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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8> 우광훈의 '인각사(麟角寺)로 향하는 길'
“얘야, 읍내에서 미꾸라지를 사야겠다.” 신녕 읍내에서 민물고기를 사자는 건 전적으로 고모님의 아이디어였다. 대구에서 산 물고기들은 장거리 이동에 따른 후유증으로 매번 물 속에 풀어두면 제자리에서 빙빙 맴돌 뿐이었다. 방생이란 숭고한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그 아이러니한 장면이 고모님은 매번 안타까우셨다고 한다. 그렇게 우린 신녕 읍내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화북리로 향했다. 새벽에 한차례 소나기가 퍼부었던 터라 도로는 약간 질퍽했다. 그날은 고모부님의 기일이었고, 나, 고종형님, 그리고 고모님은 인각사 앞 학소대에서 방생을 할 예정이었다. 영천시와 군위군의 경계가 되는 고로면을 지나자 화북리로 이어지는 삼거리가 나타났고, 이어 위천(渭川)이 펼쳐졌다. 그 맑은 계곡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다보면 화산(華山)과 옥녀봉 사이에 위치한, 마치 폐허 같은 절 하나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인각사였다.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인각사는 일연스님이 만년에 이곳에 머물며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천 삼백 여년이 지난 지금, 학자와 세인들의 무관심 속에 철저히 잊혀지고 훼손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뒤늦은 관심도, 관심은 반가운 법, ‘인각사 복원 불사를 위한 천일관음기도’를 알리는 복원관련 플래카드며, 일연스님의 생애와 삼국유사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된 ‘보각국사 일연기념관’ 등 인각사는 복원에 대한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부산에서 온 단체관람객들이 삼삼오오로 짝을 지어 인각사 경내를 자유로이 관람하고 있었다. 우린 관광버스 틈 사이에 주차를 한 다음, 곧장 옥녀봉이 바라다 보이는 학소대 앞으로 갔다. 8월의 햇살은 실눈조차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이 아름다운 풍광은 그 뜨거운 열기를 단숨에 식히기에 충분했다. 고모부님은 작년 이맘 때 돌아가셨다. 치매와 그에 따른 휴유증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주소나 전화번호를 잊어버리는 등 가벼운 증상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외출 시 집을 찾지 못할 정도로 병환이 깊어지자, 고모부님은 고향인 이곳 신녕으로 내려오셨다. 당시 고모님 역시 편찮으셨던 터라 고모부님의 병간호는 전적으로 큰형님 몫이었다. 직장에 1년 간 병가를 내신 형님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고모부님을 바로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이곳 인각사에 들러 고모부님의 쾌유를 위한 108배를 드리셨다고 한다. 위천에서의 방생이 끝나고, 우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인각사 남쪽에 위치한 화산을 올랐다. 고모부님이 직접 만드신 돌탑을 보기 위해서였다. 3년 전인가 아내와 함께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난 마치 마이산 돌탑을 재현해 놓은 듯한 신묘한 광경에 감탄사를 연발해야만 했다. 원뿔과 사각뿔의 형태로 산재해 있는 이 돌탑의 무리를 역사라고 하기엔 그 기간이 너무 짧고, 문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사적이었지만, 그 둘을 아울러 표현하더라도 결코 부족함이 없는 광경이었다. 칠순을 넘어선 노인이 5미터 가까이 되는 높이와 3미터 이상의 직경을 가진 돌탑을 그것도 가파른 언덕길에 10여 개 이상이나 쌓았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물론 그 탑을 쌓기 위해 주위 나무들을 베고, 땅을 파헤치느라 인근 마을 주민들로부터 여러 차례 경고와 주의를 받기도 했지만 고모부님은 결코 탑에 대한 집착을 꺾지 않으셨다고 한다. 형님은 잠시 탑의 언저리에 돋아난 잡초를 정성껏 뽑으셨다. 그리고 우린 돗자리를 펴고 앉아 고모님이 손수 준비하신 도시락을 먹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선 옥녀봉의 가파른 지맥이 곤두박질치듯 위천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앞으로 국사전, 명부전, 산령각 등 인각사의 당우가 듬성듬성 펼쳐져있었다. 넓은 땅덩어리에 비하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행색이었다. 지난 가을, 오대산 월정사에 들렀을 때 느꼈던 그 인위적인 비만과는 또 다른 불균형이었다. 난 그 황량함이 비만의 전초가 되지 않길 기원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대구로 향하기 전, 우린 새로 리모델링한 보각국사 일연기념관에 잠시 들러 일연의 생애와 삼국유사의 흔적들을 관람했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은 일연과 삼국유사에 대한 나의 놀라운 무지였다. 그것은 나의 얄팍한 역사의식에 편승해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악화되곤 했다. 하지만 그러한 불편한 감정도 잠시, 고속도로를 내달려 대구로 접어들 때면 난 어김없이 그리이스 로마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서재에 꽂혀있는 ‘한권으로 읽는 삼국유사’나 ‘사진으로 읽는 삼국유사’와 같은 책들도 나의 이러한 증상을 완화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무지와 편견 속에서도 나를 감동으로 몰아넣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다음과 같은 사실이었다. 일연스님은 당시 승려로서 최고의 위치인 국사에 책봉되었지만 항상 연로하신 어머니가 계시는 인각사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 뜻이 매우 간절했기에 거듭 청하자 충렬왕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 스님이 내려온 이듬해 어머니는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이윤기 선생은 자신의 저서 <꽃아 꽃아 문 열어라/열림원> 서문에서 ‘일연 스님에게 고려의 신화 설화 시가 등의 유사(遺事)는 사기(史記)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마침내 돌아가야 할 어머니의 품안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말하고 있다. 선생은 삼국유사의 역사적 가치를 강조하고자 우리 신화를 ‘어머니’에 비유했을 터이지만 나에겐 왠지 어머니란 그 본래 의미에 더 애착이 갔다. 아니, 솔직히 고백컨데 나에게 인각사는 삼국유사의 산실이었다는 역사적인 의미보다는, 김견명(일연의 속명)이란 한 효성스런 아들이 자신의 만년을 노모와 함께 했다는 그 감동적인 사실이 더 눈물겨웠다. 그것은 아마 ‘당시 승려로서는 최고의 위치인 국사에 책봉되었지만 항상 연로하신 어머니가 계시는 인각사로 돌아가기를 원했다’는 일연의 전기와 자신의 직장까지 쉬어가며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병간호했던 큰형님의 지극한 효성이 중첩되어 빚어낸 결과이리라. 사실, 치매란 가까운 사물과 사람으로부터 시작해 결국 자신의 모든 것까지 깡그리 잊어버리는 무서운 병이다. 고모부님 또한 그러셨다. 화투를 치실 때 상대방의 패까지 고려하시던 분이, 어느 날부터인가 눈에 보이는 패에만 집착하더니 결국 같은 패도 맞추지 못하는 비극. 그 비극의 종점은 결국 자신의 아내와 작은 아들마저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상황 속에서도 가슴 뭉클한 감동이 하나 있었으니, 다름 아니라 큰 형님에 대한 잊지 않은 사랑이셨다. 그렇다. 고모부님은 자신의 큰 아들인 형님만은 이름과 얼굴, 그리고 그 단편적 기억까지도 끝까지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다. 고모부님은 임종 전까지 “정우야, 나의 아들아……”하시며 눈물 흘리셨다고 한다. 나는 인각사에만 오면 고모부님과의 추억과 더불어 수백 년 전 이곳에 살았다는 한 효성 깊은 아들이 떠오른다. 그렇다. 나에게 인각사는 위대한 역사가이자 저술가의 숨결이 깃든 곳도, 당대 최고의 고승이자 불교학자의 엄정함을 기리는 곳도 아니었다. 그곳은 78세의 아들이 77년을 홀로 산 95세의 노모를 모시며 1년 남짓 자신의 말년을 보낸 곳, 그리하여 이듬 해 자신의 노모를 하늘로 떠나보내고 그 불효를 통곡하며 남은 생을 그리워한 한 효성 깊은 아들이 살다간 곳이었다. 세상 그 어떤 풍경보다, 아니 그 어떤 예술보다 아름답고 감동적인 것은 역시 인간이란 사실을,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삶의 기본을 이곳에서 다시 한번 돋을새김 한다. 우광훈<소설가>
2021.05.25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7> 이하석의 ‘갓바위, 지극한 기도가 통하는 자리’
중악(팔공산)의 여름은 깊고 푸르다. 골짜기 마다 연신 흰 구름들이 피어오른다. 서라벌에서 스승은 여전히 연락이 없다. 그러나 그의 소식은 꾸준히 듣고 있을 터였다. 봉우리 아래 있는 선본사의 스님들이 자주 찾아오니 그 편에 소식을 전했으리라. 머리도 제 때 제대로 깎지 않아 털투성이 얼굴로 땀범벅이 된 채 오직 돌과 씨름하는 그를 스승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스승을 떠나온 지 얼마만인가? 어언 20년이 되어간다. 스승이 어떤 분인가? 원광법사로 불리는 큰 스님이다. 진흥왕 대에 출가한 후 중국 진나라에 건너가 ‘열반경’과 ‘성실론(成實論)’을 배우고 강의하여 이름을 얻었다. 이후 다시 수나라로 건너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전반에 걸쳐 폭넓게 공부를 했다. 쉬운 말로 불교를 전파하기로 유명했으며, 왕명을 받아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화랑의 기본 계율이 되게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법사의 수제자였다. 스승은 그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주었다. “의현아, 중악으로 가거라. 거기 네가 점지해둔 그 바위를 쪼아 부처를 드러내라. 그게 네 어머니를 극락으로 모시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의 지극한 효심을 배려한 말이었다. “불도를 깨치는 것도 여러 길이 있느니라. 인연에 맞게 제 길을 선택하기 마련이지. 너는 그 길이 맞을 것 같다.” 그리하여 돌을 깎아 부처를 드러내는 일이 그의 필생의 도업(道業)이 된 것이다. 아아, 스승의 지극한 제자 사랑! 그는 몇 번이나 스승 앞에 엎드려 머리를 땅에 찧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를 불문에 귀의케 한 이도 스승이었다. 어머니의 병이 깊어져 절망하고 있는 그에게 스승은 어머니를 영원히 살리는 문이 있다며 머리를 깎기를 권했다. 승려가 되고 난 후에도 어머니가 병이 깊어지자 그걸 치유하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약을 짓고, 약초를 캐러 중악을 샅샅이 뒤졌다. 그 지극함을 스승은 말없이 지켜볼 뿐이었다. 결국 어머니는 유명을 달리했다. 슬픔에 빠진 그에게 스승은 중악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평생 가슴에 모실 일을 하게 한 것이다. 서라벌을 떠난 그는 중악의 동쪽 끝자락, 바위가 많은 봉우리를 찾았다. 약초를 캐러 산을 헤매면서 특별한 기운이 있음을 알고 점 찍어둔 자리였다. 바위 아래 우묵한 곳에 임시 거처로 움막을 지었다. 그런 다음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해 제 몸을 바치기를 그 바위 앞에서 서원했다. 몇 달 동안 그렇게 했다. 길 가에 있는 뼈를 보고 예배하면서 그 뼈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들어 남녀를 구별하는 대목부터 시작하는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뼈에 사무치도록 염송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뼈가) 여자라면 세상에 살아있을 때에 아들딸을 낳고 키움에 있어 한번 아이를 낳을 때마다 서 말 서 되나 되는 엉킨 피를 흘리며, 자식에게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젖을 먹여야 한다. 그런 까닭으로 뼈가 검고 가벼우니라.” 아난이 이 말씀을 듣고 어머님 생각에 마음이 마치 칼로 베이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서 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여쭙기를, “부처님이시여, 어머니의 은덕을 어떻게 갚아야 되겠습니까?> 염송할수록 절실하게 다가오는 어머니의 생각. 그리하여 부처님의 제자 목건련이 어머니 사후 그랬던 것처럼, 그 은혜를 갚아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이루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사무쳤다. 그리하여 마음이 정해지자 마침내 정으로 돌을 쪼기 시작했다. 부처님의 형상은 이미 돌 앞에 섰을 때부터 마음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는 돌 안에 부처님이 있어서 그 형상의 겉을 때내기만 하면 그 안의 부처가 본모습 그대로 드러나리라는 믿음으로 망치질을 했다. 고된 일이었다.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나무 둥치를 얽어 짜서 작업대를 만들고, 그 위에서 하는 일은 위험했다. 선본사 스님들이 이따금 올라와 독려를 했다. 바위에 부처를 새기는 승려가 있다는 소문이 인근에 퍼져 사람들이 올라와 그에게 공양을 하기도 했다. 학이 날아와 더우면 그늘을 지어주고, 추우면 깃으로 덮어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은 더욱 그를 공경했다. 그렇게 20년이 흘러 드디어 바위 속 부처가 온전히 드러난 듯했다. 그는 망치질을 멈추고는 부처를 우러러보았다. 바위들이 중첩해 있는 그 위에 세워진 거대한 석불의 뒤로는 광배처럼 큰 바위가 둘러쳐져 있었다. 불상의 머리 위에는 넓적한 돌을 얹어 비를 막게 했다. 작업대를 뜯어내고 주위를 정비했다. 그런 다음 절벽 아래에서 아득히 올려다 보이는 불상에 절을 했다. 불상은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눈부신 미소였다. 그는 절을 하고 또 절을 했다. 어머니가 떠올랐다. 스승의 모습도 떠올랐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너무나 큰일을 마쳐서일까? 한꺼번에 피로가 몰려오면서 바위 아래 절을 하는 자세로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불상 주위로 오색구름이 덮이고, 학이 나는 게 보였다. 불상은 방광하는 상서로운 빛에 싸여 환하게 우뚝했다. 그리고 옷자락을 날리면서 온갖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의 무리들에 싸여 극락으로 올라가는 어머니가 보였다. 그의 온 몸도 온통 빛에 싸여 있음이 느껴졌다. 그는 꿈을 깼다. 주위가 들떠있는 듯해서 돌아보니 언제 올라왔는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절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잘 생긴 미륵부처님이야!” “아니, 약사불이야!” 사람들이 저마다 떠들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부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부처님의 이름이야 공경하는 사람들에 따라 달리 불리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갓바위 부처님’이란 말도 나왔다. 그게 가장 그럴 듯하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의현이 지극한 효도의 마음을 모아 기도와 서원으로 갓바위를 이루어낸 이후 이곳은 큰 기도처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 이치가 다 그렇듯 지극하면 뭐든 통한다”고. 기도야말로 가장 그러한 것이다. “아, 갓바위 갔다 온 이야기 들어보면 알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불상이 지극한 효심으로 빚어낸 것이니, 기도가 잘 통할 수밖에 더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세상 어떤 것보다도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가장 지극한 게야. 어린애가 배고플 때 어머니의 젖을 그리는 그 간절함이 이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기도의 마음인 게야. 그런 마음이 평생 동안 지어올린 것이니 영험이 없을 수 없지.” 그래서 갓바위 오르는 길은 그리움의 길이며, 지극한 기도의 길이며, 영험의 길이라 말해진다. 그래서 그럴까,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갓바위 기도의 영험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다. 갓바위 가는 길에서 잠시 만난 한 사람의 이야기. 간이 좋지 않아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꿈에 갓바위 부처를 만났다는 게야. 그게 무슨 서광 비치는 징조인 것만 같아서, 그 후 매일 새벽이면 과체중으로 무거운 몸을 헉헉대며 갓바위에 올라 “기왕 죽을 목숨, 부처님 앞에서 죽자”하고 절을 했는데, 어라, 석달이 지나면서 현저하게 체중이 줄더니 자신도 모르게 간이 나아 있더라나. 그래, 그래, 지극하고 지극한 기도가 살린 게지. 그런 얘기들이 갓바위에 가면 자주 들린다. 한 아주머니가 선본사가 펴낸 갓바위 관련 책에서 영험에 대해 밝힌 이야기도 그렇다. 뭐 이런 얘기다. 남편이 의처증 환자였는데, 감시와 의심에다 욕설과 함께 두들겨 패는 통에 남 보기 미안한 것은 물론 견디기 어려운 게 매일 매일이 지옥 같았단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웃 아주머니가 갓바위에서 빌면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주신다며, 얼른 가보라고 했다. 그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막무가내로 남편 손을 잡고 갓바위에 올라 절을 하는데, 어라, 남편이 부처님 앞에 엎드려 한없이 울어대는 게 아닌가. 그렇게 포악하던 남편의 어느 구석에 그런 눈물이 남아있었는지 참 신기했다. 부부는 함께 울었다. 이상하게도 어떤 올가미에서 빠져 나온 듯한 기분이 들면서, 그날 이후 남편의 마음도 행동도 바뀌어져갔다. 그리하여 십년을 갓바위 기도를 하면서 부부간의 금슬도 좋아졌다는 게다. 시아버지의 병세를 기도로 낳게 됐다는 얘기는 또 얼마나 지극한지. 기도로 아들의 병을 낳게 하고,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됐다는 건 흔한 얘기에 속한다. 위험한 일을 갓바위 부처님이 꿈에서 미리 알려주어서 무사히 피했다는 얘기도 솔깃하게 들린다. 그런 얘기들은 언제나 ‘지극한 기도’라는 전제가 붙어서 나온다. 세상 사람들이 부지기수니, 맺힌 마음도 부지기수여서 그걸 기도로 풀려는 이들로 갓바위에는 눈이오나 비가 오나 늘 붐빈다. 팔공산 관봉 오르는 돌계단은 지극한 기도의 발길들로 닳고 닳아 반질반질하다.이하석<시인>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6> 이하석의 '청량산 地氣化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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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5> 이상국의 '영주 초군청, 피눈물 사랑을 재판하다'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4> 우광훈의 '연못 속에 당신이 있어요'
오리 한 쌍이 연못 위를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어요. 흙내음 잔뜩 머금은 장맛비가 한바탕 대지를 적신 뒤라, 수면 위에 드리워진 연잎들은 투명에 가까운 녹색을 띄고 있었죠. 그 위로 탐스런 벚꽃이 보이네요. 아, 저 순결한 자태. 하얀 꽃잎 속 연분홍은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지요. 달포 전이었어요. 마을 연못가로 절 데려오신 낭군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우리의 혼약을 위해 나 술을 끊으리다. 아니, 이제부터라도 책을 제대로 읽으리다.” 따스한 눈길만큼이나 깊고 낮은 목소리. 아, 전 그 언약이 공허해도 좋을 듯싶었어요. 그 날, 우린 연못가를 두 바퀴나 돌았었죠. 마을사람들의 눈길이 두려웠던 전, 낭군의 손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조심스레 뒤를 따라야만 했어요. 낭군 역시 흠, 흠, 거리시며 간간히 헛기침만 내뱉으시더군요. 손을 잡고 싶었냐고요? 양반이란 원래 밤이 되어야 뜨거워지는 법. 그렇다고 엉뚱한 공상은 하지 마세요. 연당 앞 능수버들 앞에 다다랐을 때쯤, 낭군이 걸음을 멈추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우리 혼인 후 처가에서 한 달 정도 쉬다 옵시다. 장인 장모님께 효도도 하고, 그곳 벗들이랑 긴히 나눌 이야기도 있고. 어떠오?” “아버님께 허락은 받았사옵니까?” “물론이오. 어머님도 쾌히 승낙하시었소.” 순간, 울컥 눈물이 치밀 뻔 했습니다. 전 끓어오르는 감정을 달래며 이렇게 말했지요.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래요. 허허. 오늘 따라 하늘이 참 청명하오. 마치 낭자의 눈동자 같구료.” 낭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시더군요. 그제야, 홍수처럼 밀려드는 연못의 풍경. 그날따라 태양은 더없이 강렬하고, 미풍조차 찾아볼 수 없어 낭군과 제 모습이 마치 명경(明鏡)처럼 물 속에 투영되어 있더군요. 물에 어린 제 사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전 손을 살짝 들어올려 그의 그림자를 조심스레 어루만졌지요. 그의 볼, 어깨, 가슴, 허리…… 그때, 갑자기 남동풍이 불어왔어요. 그림자가 심하게 일렁이더니 우리의 모습은 거친 물결 속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죠. 낭군의 모습도, 제 모습도, 이젠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아, 얄미운 남동풍. 전 고개를 들어 연못 맞은편 대숲을 바라보았어요. 대나무들은 ‘쉬이쉬이~’하고 기이한 소리를 내며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죠. “바람이 심하오. 고뿔이라도 걸리면 큰일이니 이제 그만 들어갑시다.” “네.” 전 그 날을 잊지 못해요. 그 연못에서의 오후는 화양연화(花樣年華), 제 아름다움의 전부였으니까요. 가거라. 조만간 우리 마을에도 왜놈들이 들이닥칠 테니 어서 길을 떠나거라. 어머니께서는 어디로 가시려 하옵니까? 우리 걱정일랑 말고 어서 구성으로 떠나거라. 뼈를 묻더라도 시집에서 묻어야지. 석이야 뭐하느냐! 어서 봇짐을 메지 않고! 혼인 닷새 후, 낭군은 급한 일이 생기시어 본가인 구성으로 떠나셨죠. 그런데 며칠 뒤, 왜군이 난(亂)을 일으켰다는 소식과 함께 대구(大邱)마저 함락되어다는 전갈이 마을관리에게 전해졌어요. 마을 사람들은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고, 상인들을 따라 하나 둘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죠. “큰 마님, 아니 되옵니다. 이런 난리에 아래로 내려간다는 건 사지(死地)로 뛰어드는 것. 나리께서도 벌써 피난길에 오르셨을 테니 마님과 저도 큰 마님과 함께 하게 해 주십시오.”석이가 어머님께 고개 숙여 간곡히 아뢰었죠. 하지만 어머님은 막무가내였어요. “시집간 여자는 출가외인인 법, 죽더라도 시집에서 죽어야 하느니라. 얼른 짐을 챙겨 떠나거라!” 어머님의 불같은 호령에 석이 역시 어쩔 수 없었지요. 제 손이 엄동설한 계수(溪水)처럼 시리다며 사시사철 어루만져주시던 아버님도 이번엔 아무런 말씀도 않으시더군요. 양천에서 구성까지는 과곡을 지나 삼십 리 길이었죠. 과곡 언덕배기를 지날 때쯤, 우린 목도 축일 겸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지요. “아씨, 마을 사람들이 이미 피난을 떠났으면 어떡하죠?” 석이가 저에게 물병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어요.. 하지만 전 두렵지 않았어요. 아니, 오히려 잠시 뒤면 제 낭군을 만날 수 있다,라는 기대감으로 충만했죠. 그렇게 상좌원(上佐院) 옆 감천(甘川)이 눈앞에 펼쳐질 때쯤이었어요. 갑자기 후덥지근한 바람이 제 볼을 스치더니, 문득 낯선 사내의 체취가 느껴졌어요. 전 걸음을 멈춘 다음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았죠. 잡풀이 무성한 소나무 숲 뒤로 검은 그림자가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보였어요. “거기 뉘시오?” 석이가 조심스런 어조로 물었어요. 그러자 갑옷을 입은 사내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더군요. 이마를 훤히 드러낸 채 머리를 위로 말아 올린 것이 소문으로만 듣던 왜군의 모습과 똑같았어요. 왜군들의 얼굴은 선했으나, 들고 있는 칼날엔 핏자국이 선연하더군요. 왜군들은 굴참나무가지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우리를 향해 빙긋이 미소를 머금었어요. “예쁘구나. 참으로 예쁘구나!” 남정네의 욕정이란 끝이 없어, 늙어 죽을 때까지도 여자의 몸을 그리워한다더군요. “마님 뛰어요! 저 놈들은 짐승이랍니다.” 순간, 석이가 외쳤어요. 그 소리에 전 얼른 뒤돌아서 선대의 산소가 있는 능지산 쪽을 향해 달아나기 시작했죠. 하지만 왜군들을 따돌리기엔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어요. 석이가 안타까운 듯 뒤처진 절 바라보며 소리치더군요. “아씨, 장의를 벗어 저에게 주시어요!” “왜 그러느냐?” “제가 놈들을 따돌려 보겠사옵니다.” “아니다, 석아. 난 어렵겠다. 너라도 살려야겠다.” 전 방향을 틀어 연당(蓮堂)이 보이는 쪽을 향해 곧장 내달렸죠. 다시 등 뒤에서 석이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아니 되옵니다. 그곳으로 가면 죽음뿐이어요. 아씨, 제발 장의를 벗어 저에게 주시어요!” 하지만 전 못들은 척 계속 달음질쳤지요. 왜군들은 잠시 멈칫하더니 절 향해 걸음을 돌리더군요. “섰거라. 게 섰거라.” 연당 앞 능수버들이 가까워질 때쯤, 거울처럼 투명한 연못이 보이더군요. 그러자 문득, 내 낭군의 얼굴이, 내 낭군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졌어요. 저곳에서 당신은 저에게 이렇게 속삭였죠. 오늘 따라 하늘이 참 청명하오. 마치 낭자의 눈동자 같구료…… 아, 그건 사랑의 밀어(密語)였나요? 연못 수면 위로 당신의 모습이 보이는 군요. 참으로 의연하신 당신.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고 계시는 군요. 그래요. 당신은 나의 남자, 전 당신의 여자. 연못 속에 당신이 있어요. 당신 속에 연못이 있어요. 낭군, 제가 달려갑니다. 당신의 여자가 달려갑니다. 아, 이제야 제 목소리가 들리시나 보지요. 고개 돌려 절 바라보시는 당신. 그래요, 낭군. 더 이상 주저하거나 망설이지도 않을 겁니다. 부끄러워하거나 눈치 보지도 않을 겁니다. 당신의 사랑이 달려갑니다. 이제껏 눈길 한 번 제대로 맞추지 못한 이 못난 년이 당신을 향해 달려갑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따스한 품속으로, 당신의 그윽한 눈길 속으로. 우광훈<소설가>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3> 이하석의 ‘털네의 밤 손님’
1국경의 밤은 늘 불안하다. 오늘처럼 가을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날은 더하다. 고구려 땅인 산등성이에서 초저녁부터 고라니가 울더니, 그 그릇 깨지는 듯한 소리가 신라 땅인 냉산 등성이 쪽으로 넘어오곤 한다. 털네(毛禮)는 자주 마당에 나가 고라니 울음이 넘어오는 산을 올려다본다. 캄캄하다. 이런 어둠과 정적은 국경을 넘는 이에겐 아주 좋은 여건이 되리라. 털네는 또 가슴이 조인다. 국경을 넘어와 그의 집을 찾을 이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오래전부터 일과가 되어버렸다. 얼굴이 검은 그 사내. 그 때도 이런 정적 속을 더듬어 그가 왔다. 조용히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안채는 물론 바깥채의 일군들도 잠든 한밤중. 양들이 자는 우리 안도 조용했다. 이따금 소 우리에서 소들이 내뿜는 콧김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일군 중의 한 사람이려니 생각했다. 국경지역의 밤손님은 언제나 경계대상이라, 밤에 나다니는 이는 잘 없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자 어둠 속에 괴이한 모습의 누가 서 있었다. “누, 누구요?” “쉿!” 그가 재빨리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털네에게 절부터 했다. 그가 불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이했다. 박박 깎은 머리에 얼굴은 검고, 장삼을 입고 있었다. 털네도 털보라는 별명처럼 얼굴이 수염투성이라 검었다. 그는 피부가 검었다. 눈만이 반짝였다. 의외로 준수한 용모였다. 털네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묵호자로 불리지요. 고구려 사람입니다. 어르신의 존함을 익히 들어 알고 찾아왔습니다.” “차림은 스님 같소만.” “그렇습니다. 당분간 좀 숨겨주십시오.” 고구려와 백제에는 이미 절이 세워져 불교를 믿는 이가 늘어난다고 했다. 그런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신라는 아직 그렇지 못했다. 왕실의 공인이 없어 불교는 위험한 사상이었고, 승려는 배척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정당한 입국이 아닌, 밀입국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걸리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털네는 그를 숨겨주는 게 운명이라 여겼을까? 그 때부터 묵호자는 그의 집 깊숙한 곳에 숨은 채 머슴처럼, 엄청나게 많은 양과 소를 먹이는 목동처럼 행세하면서 밤에 인근 사람들을 모아 은밀하게 포교를 했다. 어느 날 서라벌에서 사람들이 내려와 기이한 물건을 내놓으며, 그 쓰임새를 묻고 다녔다. 양나라에서 온 물건들 중 불상과 불경은 알겠는데, 명단(溟檀)이 뭔지 몰라 조정에서 그 쓰임새를 수소문하고 다녔던 게다. 불교를 모르는 상태라 아무도 알 리 없었다. 그러나 묵호자가 알았다. 피우는 향이라 알려주었다. 이를 계기로 서라벌로 가서 왕녀를 치료하여 왕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서라벌은 위험했다. 그는 다시 야음을 타서 털네집에 잠입했다가 행적을 감추어버렸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흐른 셈이다. 털네도 꽤 늙었다. 얼굴을 덮은 수염도 흰 빛이 많아졌다. 묵호자가 사라진 후 그 많은 세월동안 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저녁이면 그를 기다렸다. 그런 일 역시 그의 운명이라 여겼을까? 밤이 깊다. 그는 불을 끄고 눕는다. 또 고라니가 운다. 벌레소리가 갑자기 뚝 끊긴다. 그는 벌떡 일어난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미세한 인기척 소리가 난 것이다. 가슴이 뛴다. 문을 열자 옛날 본 그 기이한 자태를 한 자들 네명이 서 있다. 털네는 재빨리 방으로 인도한다. 불을 켜자 그 중 한 사람이 절부터 한다. 이번에는 털네도 그에게 절을 한다. 그리고는 그를 바라본다. 역시 얼굴이 검다. 묵호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는데, 그 얼굴이 그대로일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는 아직 스무 살이 채 안된 앳된 모습이다. “아도라고 합니다. 어르신의 존함을 오랜 예전부터 익히 들었는데, 이제야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시종들과 함께 왔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스님, 누추하지만 저의 집에 숨으십시오.” 그리하여 아도와 시종들 역시 머슴처럼, 양과 소를 키우는 목동처럼 털네 집에서 일하면서 밤마다 은밀하게 포교를 했다. 2국경의 밤은 늘 불안하다. 털네는 오늘도 문밖을 한참이나 지켜보다가 방으로 들어온다. 아도를 기다리는 게다. 아도는 어머니의 말씀을 좇아 서라벌로 가서 불법을 펴는 걸 의무로 여겼다. 호시탐탐 서라벌 행을 노렸다. 그러나 불법의 전파는 요원했다. 승려의 모습도 괴이하게 여겨졌고, 그 사상도 위험시됐다. 승려를 죽이려는 세력도 만만찮았다. 그래도 아도는 수차 서라벌로 들어가 불교 전파를 역설했다. 그러다 공주가 병이 나 무당과 의원의 치료에도 차도가 없자, 아도가 그 치료를 자원, 대궐로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아도의 극진한 치료와 기도에 공주의 병이 낫자 왕은 기뻐하며 소원을 물었다. “천경림에 절을 세워 불교를 일으켜 나라의 복을 빌고 싶을 뿐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왕이 허락했다. 띠풀로 지붕을 해 절을 짓고 흥륜사라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왕이 죽자 불교 반대론자들의 득세가 심해지고, 아도를 해치려 했다. 털네는 그런 사정을 전해 듣고 있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아도가 다시 그의 집에 돌아오리라 여기고 기다린다. 불안하다. 그동안 고구려에서 몇몇 승려들이 신라로 들어왔다가 왕과 신하들의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한 일을 상기한다. 아도 역시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서 무사히 서라벌을 빠져나왔는지 걱정이 된다. 밤공기가 차다. 털네는 다시 마당에 나와 대문의 빗장이 풀어져 있는지 확인한다. 아도가 오면 소리 없이 잘 들어올 수 있게 늘 그렇게 해놓았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인기척에 일어나보니 옆에 누가 앉아 있다. 벌떡 일어나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접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아도였다. 둘은 얼싸안았다. “얼마나 걱정이 됐는지 모릅니다. 스님, 이렇게 오실 줄 알았습니다.” “조정에서 나를 해치려드니, 이곳도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어르신도 위험할 수 있지요. 내일 냉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 피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 봐 둔 자리가 있습니까?” “나중에 알려드리지요.” 3국경의 밤은 늘 불안하다. 냉산 기슭에서 고라니가 운다. 사슴도 운다. 은밀한 곳을 즐기는 짐승들인데 저렇게 우는 걸 보니 새끼라도 낳았나보다 라고 털네는 생각한다. 아도 역시 저 산 어디에선가에서 입정에 들었을까? 털네는 금방이라도 그가 집으로 들어설 것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 한다. 아도가 냉산에 든 지 3년째에 냉산 남쪽 기슭에 절이 지어졌다. 띠를 엮어 덮은 작은 집이지만, 그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기적 같았다. 그러했다. 아도가 점지한 땅이었다. 겨울인데도 하얀 눈 속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어 있던 곳이었다. 생각이 간절하면 그런 일도 일어나는 법이다. 털네는 전 재산을 절 짓는 일에 쏟아부었다. 절이름은 도리사(桃李寺)라 했다. 그러나 아도는 여전히 위험한 수배인물의 상태였다. 냉산 북쪽 켠 토굴 속에 숨어 있어야 했다. 나중에는 아예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입적했다는 소문도 들렸다. 털네도 이젠 늙었다. 그에게는 오직 기다리는 일만 남았을 뿐이었다. 국경의 밤은 늘 고저넉하지만, 불안하다. 냉산 기슭에서 고라니가 운다. 이런 날 밤이면 누가 또 국경을 넘어올지 모른다. 아도가 냉산을 내려와 불현듯 그의 앞에 나타날 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도는 털네에게 말했다. “이 곳은 신라에서 불법의 꽃이 처음 핀 곳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성스럽고 영광스런 자리지요. 나중에 이 지역의 이름이 도계(道開)라 불릴 지도 모릅니다. 꽃을 피운 이는 소승이 아니라 어르신이라 해야 옳을 것입니다. 어르신의 이름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일 뿐”이라고 털네는 중얼거린다. 그는 새로운 생각과 사상이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는 사람이므로 기다림을 운명적인 일이라 여겼을까? 기다리는 그에게 찾아온 것과 꽃 핀 것은 무엇일까? 다만, 그는 여전히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 밤이 깊어지자 그는 또 우물이 있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의 빗장을 가만히 열어놓는다. 이하석 <시인>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2> 이상국의 '여자 안중근, 남자현의 독백'
# 무명지를 자르며 (1932년 9월17일)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오늘 왼쪽 무명지 두 마디와 이별하려 한다. 이름이 무명지(無名指)라 한들 어찌 쓸모 없는 손가락이겠느냐. 제 나라를 잃고 무명민(無名民)이 되어 떠도는 나보다는 실한 것이느니. 어쩌면 평생을 가만히 붙어 내 손을 채웠던 이 작은 것이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할 수도 있겠다 싶구나. 중지(中指)와 약지(弱指) 사이에서 어중간하게 여기도 붙었다 저기도 붙었다 살아온 줏대없음을 논죄하는 준엄한 심판이 아니겠느냐. 아들아, 오늘 문득 하얼빈 남강의 어느 중국인 음식점에서 가만히 내 왼손을 들여다 보나니, 성경에 나온 대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알 수 없을 만큼 쥐도새도 모르게 처리해야할 일이 있구나. 며칠전 국제연맹에서 일제의 만주 침략 현장을 조사하는 대표단을 파견한다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서럽고 아픈 이 나라의 뜻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더냐. 우리는 일제의 지배를 원하지 않으며 독립국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준다면 세계에서도 여론이 생겨나지 않겠느냐. 일본은 우리의 입을 틀어막고 우리가 마치 그들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세상을 속이고 있지 않더냐. 오늘 이 무명민의 무명지가 비로소 제 할 말을 할 것이다. 내 아들 김성삼아. 너는 36년전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영주는 훌륭한 분이셨지. 네 외할아버지 남정한 통정대부의 아끼는 제자이기도 하였단다. 우리는 열한살의 나이 차이를 아름답게 여기고 혼인을 하였지. 유학자 집안의 둘째 딸이었던 나는, 오라버니처럼 듬직한 네 아버지가 무척 좋았단다. 진보의 홍구동을 흐르던 반변천이 피개울이 되던 여름, 네 아비 김영주는 의진(義陣) 속에서 두려움 없이 싸우다가 눈을 감았단다. 을미의병이 창의하던 1896년이었지. 그 전해 10월 일제가 경복궁 건청궁을 감히 침입해 명성황후의 심장을 찌르지 않았겠느냐. 이 나라 국모를 무참히 시해한 일을 '늙은 여우'를 사냥했다고 한다니 천하의 몹쓸 것들이 아니냐. 의로움을 귀히 여기던 아버지는 분연히 일어서서 토역(討逆)의 선봉에 뛰어들었지. 이후 네 아비의 부음을 들었다. 나는 너를 밴 몸으로 실성한 듯 개울로 뛰어들어 석보의 친정에서 전장(戰場)이었던 진보로 건너가려 했단다. 아버지는 무너지는 근대사에서 학의(鶴衣)를 걸치고 온몸으로 옳음을 지키려 했던 아름다운 투사였다. 그 사람은 첫날밤 어린 신부인 내게 내 성씨인 南자를 새긴 옥가락지를 끼워주었지. 만주에 오면서 그 가락지를 벗어버릴 수 밖에 없었지만 가끔 나는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가락지 자국을 어루만지며 그때를 그리워하곤 했지. 가락지에 글자를 새기던 그 마음도 희미한 자국도 오늘 마침내 끊어지겠구나. 나라를 위해 죽었던 그 사람의 자국을 다시 잘라내, 나라를 살리려 하나니, 이날은 그런 날이구나.아들아, 이제 칼을 가지고 왔다. 내 손가락이 먼저 알고 피가 뛰는구나. 이것을 잘라 모레 국제연맹 조사단장인 리튼에게 전할 것이다. 지금 내게 두려운 것은 없다. 나라를 잃었고, 남편을 잃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궁벽한 영양 땅 선비의 여식으로 태어나 사서삼경을 읽으며 자란 나는, 네 아버지를 잃었을 때 맹세했다. 너를 훌륭히 키우고 시부모의 봉양을 무사히 마친 이후에, 홀연히 떠나 남편의 원수를 갚고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원을 세웠다. 25년 동안 나는 봉건적인 가정 안에서 묵묵히 여자의 일을 다하였다. 관청에서 이런 일을 칭찬하여 효부 표창을 내렸지. 우습구나, 나라도 없는 몸이 효부라니. 삼일운동이 있던 1919년에 나는 고향을 떠났다. 교회의 인맥을 타고 서울로 가서 우선 내가 할 일을 찾아나섰지. 마침 만세운동이 일어나 내 피를 뜨겁게 했어. 서울 남대문동에 있는 여성동지 김모가 내게 비밀편지를 보냈지. 연희전문학교 부근 교회당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이날 오후 3시에 독립선언문을 뿌리고 다녔지. 이런 일이 있고나자 일제경찰의 감시가 더없이 심해지더군. 활동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어. 그래서 만주로 가기로 했다. 그곳엔 안동 출신의 김동삼선생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거든. 네 아버지와 친분이 있는 분이라, 우선 그쪽으로 연락을 취했어. 그가 참모장으로 있던 서로군정서에 입단한 것도 그때였고...기억 나니? 그때 안동에 있던 너를 이곳으로 불렀지 않느냐? 네가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을 하던 날 어미는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늙어서 그런지 가끔 옛 기억들이 이렇듯 쏟아지는구나. 내 나이가 벌써 육십이다. 양반가의 할머니가 독립운동을 한다? 일견 우습게도 들릴 일이지만, 현실은 그런 모양을 가릴 때가 아니다. 이 늙어가는 육신의 일부를 끊어, 절규를 내놓아야할 때도 있는 법이 아니냐? 이제 칼을 들었다. 영양 산골에서 자라난 푸른 초목같은 육신의 한 가지를 잘라내어, 이 몸이 살아있음을, 이 나라의 백성이 아직 피를 철철 흘리며 살아있음을 보여야겠다. 나, 남자현의 무명지. 세상을 위해 날아가거라. (.......) 내 오른손가락이 왼손가락을 들었구나. 피를 뚝뚝 흘리는 무명지를 붓자루처럼 들고, 이 겨레붙이의 소원을 한번 적어보려 한다. 韓國獨立願! 한국은 독립을 원하오! 이제 이 잘린 손가락을 혈서와 함께 리튼에게 보내리라. 한국 여성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록도 함께 보내야겠다. (이 혈서는 아쉽게도 삼엄한 감시에 막혀 전달되지 못했다. 남자현은 인력거꾼에서 대양1원을 주어 전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그것도 실패했다고 1933년8월26일자 <조선중앙일보>가 보도하고 있다.) # 하얼빈 감옥, 단식, 그리고 임종 앞에서(1933년 8월22일) 아들아. 나는 괜찮다. 울지 말아라. 나는 허수아비 만주국을 세운 일제가 중국 전체를 삼키려고 침을 흘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만주에서 일제의 간판이라 할 만한 부토 전권대사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은, 나라 잃은 민족으로 저들의 끝없는 야욕에 쐐기를 박으려는 결심이었다. 거사일은 만주국 수립1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1933년 3월1일로 잡았다. 우리로 말하면 독립만세운동 14주년이 되는 날이었지. 1월에 부하 정춘봉과 중국인 몇이 모여 무기 조달에 관해 논의를 했단다. 우리는 권총 한 자루와 탄환, 그리고 폭탄 두 개를 준비하기로 했다. 이달 27일 오후 4시 남강 길림가 4호 푸른 대문앞에 표시한 붉은 천이 암호였고 무기가 든 과일상자를 건네받기로 했어. 2월에 나는 어느 사진관에 가서 최후 기념사진을 찍었지. 죽게 되면 이 사진이 남아 지상을 돌아보고 있으리라. 내 눈을 한번 들여다봐. 유난히 아래쪽에 흰 자위가 많아서 날카로워 보이니? 아마 오랜 분노가 쌓여 저절로 이런 표정이 되지 않았나 싶어. 2월23일 오전 10시에 거사 장소를 한번 확인한 뒤에, 노파로 변장해서 무기와 폭탄을 운반했어. 그런데 나흘 뒤인 27일 하얼빈 한 거리에서 갑자기 일제경찰이 덮친 거야. 누군가의 밀고가 있었을 거야. 나는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여섯 달 동안 온갖 고문을 받았지.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어. 이렇게 욕되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항거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결단이 서자 마음이 평안해졌어. 일본이 주는 음식을 개처럼 받아먹지 않겠다. 9일을 단식하니 죽음이 가까이 오는 듯 하더군. 8월17일 오후 1시30분에 일제는 초주검이 되어있는 나를 병보석으로 풀어주었지. 나는 너와 손자(김시련)를 만나기 전에는 죽을 수 없었단다.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어. 일본 경찰은 나를 풀어주고도 숨을 거뒀는지 확인하러 수시로 들락거리고 있더군. 내가 하얼빈 적십자여관을 거부하고 굳이 조선인여관으로 보내달라고 고집한 것은, 고향이 그립기 때문이다. 고향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고 싶구나. 1927년 길림사건이 문득 생각난다. 안창호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 지도자 47명이 중국 관원에 검거되어 일제에 넘겨질 뻔했지. 그때 위기를 해결하느라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나네. 어쨌든 저 사람들을 내보내다오. 그리고 물을 좀 가져오너라. 몸을 좀 닦고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아들아, 이 행낭을 받아라. 여기엔 2백49원80전이 들어있다. 그중 2백원은 조선이 독립되는 날 독립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갖다 바쳐라. 남은 돈 49원80전의 절반은 손자 공부하는데 써라. 대학까지 공부시켜 내 뜻을 알게 하여라. 나머지 반은 친정의 증손자에게 주어라. 내가 굶어죽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사람이 죽고사는 건 안먹고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신에 달려있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조국아. 이제 잃어버린 무명지를 찾으러 가야겠다. 자는데 깨우지 마라. 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기자>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1> 우광훈의 '와인 속에 내 사랑이 있다'
작년, 이맘때의 일이다. 그녀의 가슴에 조그마한 종양이 생긴 것은.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포도씨만한 것이니까.” 영남대학교 앞 커피전문점, 하얀 커피잔 아래 갈색 커피공방. 다음 날, 우린 그녀의 부모님과 함께 대구 도심에 위치한 한 대학병원으로 갔다. 간단한 입원수속이 끝나고, 간호사가 안내해준 병실로 들어서자, 두 개의 텅 빈 침대 너머로 조그마한 연못과 함께 녹슨 분수대가 보였다. “수도원 같은 분위기네.” 그녀가 침대 위로 털썩 주저앉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잠시 후, 그녀는 두 개의 링거바늘을 손등에 꽂은 채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곧장 수술실로 향했다. 카페라떼의 하얀 거품만큼이나 나른했던 오후…… 그렇게, 그녀의 지루했던 수술은 삼성라이온스의 3회말이 시작될 때쯤 박진만의 뼈아픈 실책과 함께 끝이 났다. “걱정하지 마세요. 진통제를 다시 투여할 테니까.” 병실로 돌아오는 동안, 그녀의 입술에선 짧고 가는 신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외출이 허락되면 와인이나 한 잔 사줘. 가볍고 스위트한 걸로 말이야.” 따스한 햇살이 커튼 아래로 사라지고, 주차장 너머로 땅거미가 짙게 드리워질 때쯤, 그녀가 엷은 미소를 머금으며 나에게 말했다. 귀를 입술 가까이에 가져가야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성량. 가볍고 스위트한 것이라…… 순간, 청도 남성현에 위치한 한 조그마한 기차터널이 떠올랐다. 그 동굴 속은 시원한 냉기와 함께 시큼한 감내음으로 가득했다. “멋진 곳을 알고 있어. 이곳 에어콘 바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아.” 형편없는 것은 짜디 짠 병원식만이 아니었다. 천장에 달린 녹슨 팬에선 하루 종일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한 달 뒤, 우린 주치의의 허락 하에 청도로 갔다. 한낮 기온은 35도를 웃돌았고, 그녀는 달랑 티셔츠 한 장만을 걸친 채 나의 차에 올라탔다. “빨리 와요. 회복기 일수록 조심해야 하니까.” 간호사가 그녀의 손등에서 은빛 링거바늘을 빼내며 이렇게 말했다. 차가 대구 도심을 벗어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신나게 휘파람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글렌 밀러의 '인 더 무드(In the Mood)' 만큼이나 스윙감 있는 노래. 자동차가 경산 남천을 지나 아카시아나무로 울창한 남성현재로 접어들 때쯤, 난 경산과 청도를 잇는 한 고개를 떠올렸고 그에 얽힌 전설 하나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예전, 청도로 시집간 한 여인이 모친의 부고를 접하고 급히 경산으로 가던 중 그만 산 속에서 곰을 만나게 되었대.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자신의 치마를 뒤집어 쓴 채 길 한가운데 엎드려버렸지. 그런데 하필이면 그 날이 여자의 달거리 날이라 가랑이 사이로 피의 붉은 흔적이 드러나 버렸고, 그 기이한 모습에 놀란 곰은 오히려 숲 속으로 줄행랑 쳤다지 뭐야. 그 후 그곳은 곰이 튄 곳이라 하여 ‘곰티재’로 불리게 되었대. 어때, 재밌지 않아?” 그녀는 나의 이야기에 빙긋이 미소를 머금더니, “너…… 날 버리고 튀려는 속셈은 아니겠지?” 하고 되물었다. “설마.” “괜찮아.”하고 그녀가 다시 말했다. “나 알고 있어.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거.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일년이 될 수도 있겠지. 그동안만이라도 건강했으면 좋겠어……” 건강. 그러자 나의 볼을 스쳐지나가는 이 바람은 건강한지, 전나무를 집어 삼킬 듯한 저 뜨거운 햇살은 건강한지…… 그렇게 모든 사물들의 건강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급하게 휘어지는 내리막길이 끝나자, 드디어 송금교회의 뾰족 솟아오른 두 개의 첨탑과 함께 ‘와인터널’이라고 적힌 녹색의 표지판이 눈앞에 드러났다. “와인터널?” “그래, 감으로 만든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야. 내 기억으론 맛이 스위트했고, 아로마가 풍부했던 것 같아.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어.” 짙은 녹음으로 감싸인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감그린의 상징물과 함께 녹슨 철로가 나타났다. 차에서 내린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잡고 철로 위를 나란히 걸었다. 그녀는 가끔 증기기관차를 흉내 내듯 칙칙폭폭하고 기차소리를 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터널 안은 한산했다. 바(bar)까지 이어지는 길은 화려한 조명과 다양한 장식품으로 더없이 아름다웠다. 우린 장식용 오크통이 옆에 놓인 테이블 앞에 앉아 ‘감그린 아이스와인’과 함께 조각케이크를 시켰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선 단체관광객인 듯해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연방 기념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조금만 마셔. 이곳은 키핑이 가능한 곳이니까.” 내가 그녀의 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두 잔까진 괜찮을 거야. 의사가 회복기라고 했으니까.” 회복기…… 순간, 가슴이 잔잔히 아려왔다. 우린 서로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하며 건배했고, 몇 모금의 와인을 마셨으며, 몇 마디의 농담을 주고받았다. 감의 떫은맛은 타닌이라는 성분 때문인데 혈관을 깨끗이 정화시켜 주는 작용을 한대…… 솔직히 난 이후의 대화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 당시, 난 청혼의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전날 밤부터 새벽까지, 아무리 차가운 물을 들이켜도 내 가슴 속 열기는 식지 않았다. 그러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녀를 향한 나의 이 뜨거운 감정을 사랑이란 단어 외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아픈 그녀에게 ‘값싼 동정 따위’로 오인 받지 않으려면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녀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힐끔 훔쳐보며 말했다. 순간, 난 용기를 내었다.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니?” 물론, 이런 구닥다리 대사를 처음부터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말 외엔 모든 것이 다 가볍게 느껴졌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감그린’ 로고가 선명한 술잔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풋, 나 결혼식 하다 죽을 수도 있어. 아니, 첫날밤도 장담 못해……” 그리고 모든 것이 귀찮다는 듯 짧은 하품을 했다. 하지만 그건 속임수…… 그녀의 입술은 잔잔히 떨렸고, 눈망울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래, 지금까지의 난 그녀에게 있어 가벼운 남자친구에 불과했다. 분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아니었다. 2년이란 긴 세월을 오크통에 틀어박혀 숙성되는 이 감와인의 깊은 맛과 향처럼,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를 향한 나의 깊이 있는 감정을 어떻게 하면 솔직하고 담백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때, 난,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준비해온 반지를 꺼내어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널 끝까지 지켜주고 싶어.” 그러자,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볼을 타고 길게 아래로 흘러내렸다. 순간, 주위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그 박수소리는 어둠 속을 더듬더듬 헤집으며 터널 끝, 아니 그 뜨거웠던 여름의 끝자락을 향해 곧바로 나아갔다. 그래, 작년 이 맘 때의 일이다. 난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리를 감싸고 있던 멋스런 아치형의 터널과 그 감미롭고 달콤했던 한 잔의 아이스와인을. 그리고 그 해 겨울, 그녀는 죽었다. 우광훈<소설가>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10> 김주영의 '청송 벽절 마을의 가슴 애이는 왕버들'
조선시대 제 14대 임금인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조선과 동맹을 맺어 명나라를 침공하려던 도요또미(豊臣秀吉)의 야심이 좌절되자, 그는 1592년 4월, 15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조선을 침공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들은 세 갈래를 나뉘어서 서울로 향했다. 그 들 중에서 고니시(小西行長)이 이끄는 1군은 조선의 전국토를 가차 없이 초토화시키며 부산, 밀양, 대구, 상주, 문경을 거쳐 충주에 이르렀다. 왜군들의 말발굽에 불타지 않는 사찰이 없었고, 민간에 대한 침탈과 횡포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정유재란에 이르기까지 6년 동안의 참혹한 전화 속에서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고, 조정은 우왕좌왕 나아갈 길을 찾지 못했다. 경상도 청송과 같은 오지에서 살고 있는 헐벗은 백성들도 임진년 왜란의 아비규환에서 무사할 수 없었을 정도로 전화의 처참함은 치명적이었다. 그 전화의 와중에 청송군의 벽절 마을이란 곳에 채씨 (蔡氏) 성을 가진 과년한 처녀가 있었다. 일찍 어머니를 여윈 그녀는 노쇠한 아버지 채씨를 봉양하며 가난한 살림을 겨우 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댁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허리가 꼬부라져 콧등이 땅에 끌릴 정도로 병약해서 문밖출입도 임의롭지 못한 아비 채씨에게 출병하라는 영장이 날아든 것이었다. 이런 변고는 크게 잘 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병든 아비와 바깥출입이라곤 모르고 살았기에 이렇다할 견문도 없었을 뿐더러 하소연할 관아조차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출병 날짜는 아득바득 다가오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그 댁의 딱한 사정을 관아로 나아가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서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서 머슴살이하고 있는 쑥대머리 총각이 찾아와 처녀의 아비인 채씨를 뵙자고 청했다. 겨우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어인 일인가 하고 수인사를 하는 채씨에게 공손히 절을 올린 총각이 건네는 말은 전혀 예상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어르신네. 당돌하다 마시고 제 말을 들어 주십시오. 연세 육십을 넘겨 병고를 겪고 있는 어른께 출병 영장이란 날 벼락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분명 잘못되어도 보통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필경 관아의 배부른 아전 놈들이 서로 시시덕거리면서 탁상공론으로 어르신네의 연세나 병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상부에서 출병시키라는 인원의 충수만 채우기 위해 어르신 명함에 무작정 꺾자를 휘갈겨 영장이랍시고 날려 보낸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을 하네. 그러나 출병 일이 바로 코앞이어서 어찌 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이라네.” “지금 난데없는 왜병들이 들이닥쳐 산골짜기에 숨어 있는 절간조차 가차 없이 불태우고, 소중한 보물을 약탈해 간다고 합니다. 생명과 같은 양식을 빼앗아 저들의 배를 채우고, 가축을 잡고 술을 빚어 아녀자들을 겁탈하고 관아에 불 지르는 것을 예사로 저지른다 합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쑥대밭에 아비규환입니다. 이런 차제에 정신 못 차린 관원들과 아전들이 서로 결탁하여 이런 못된 일들만 저지르고 있으니, 하찮은 머슴인들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보게 자네 말이 당장 귀로 듣기에는 매우 당연한 것 같으나, 지금 난리 통에 그런 말을 함부로 했다간, 어느 솔개가 채 갈지 모른다네. 말조심하게. 바른 소리를 할수록 혀를 뽑아갈 세상이라네.” “제가 어르신네를 대신하여 출병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나대신 출병을 하겠다니?” “지금에 이르러 비로소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평소 마을 앞 우물길을 드나드는 따님의 단아하고 정숙한 모습을 지금껏 가슴을 졸이며 사모해왔습니다. 그러나 한낱 머슴살이로 연명하고 있는 하찮은 지체로써 감히 바라보기만 했을 뿐 터놓고 속내를 토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어르신네가 당한 억울한 일을 혈기 방장 한 제가 대신함으로써 저의 속내를 어르신네와 따님에게 전달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런 천우신조가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젊은이가 몸을 숨기고 전장 터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또한 비겁하고 몹쓸 짓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하오니 저의 작은 뜻을 흔쾌히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수 없네.” “제가 어찌 가볍게 맘을 먹고, 찾아와 외람 된 말씀을 올리고 있겠습니까.” “자네의 언사가 예사롭지 않은데. 어디서 문자를 익힌 것인가.?” “오다가다 어깨너머로 언문 몇 자를 터득했을 뿐입니다.” 총각의 희생이 숭고한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헤아린 두 부녀의 눈자위에 눈물이 맺혔다. 그 날 밤 다시 만난 처녀와 총각머슴은 들고 온 어린 버드나무 한 그루를 마을의 우물가에 심었다. 출정한 총각이 싸움터에서 개선하여 돌아오면, 물론 신분의 벽을 뛰어 넘어 남보란 듯이 백년가약을 맺을 터이지만, 그 동안이라도 처자는 아침저녁 우물길을 드나들면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며 마음을 달래라는 뜻이었다. 그 이튿날로 출정 길에 오른 총각은 왜군과 맞서 싸우는 신입(申砬)장군 휘하로 들어가 싸우고 있었다. 신입 장군은 대구를 거쳐 상주를 진군하여 파죽지세로 문경에 이르는 왜군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부상을 당하거나 혹은 집으로 돌아오는 병사들에게서 총각의 소식을 듣게되면 처녀의 가슴은 떨리면서도 뿌듯했다. 그 동안 그녀는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고 집에 밥 지을 물이니 마실 물이 있다 하더라도 마을의 우물가를 찾아가 심어 둔 버드나무에 물을 주고 가꾸었다. 정성을 기울인 나무는 심은 나이와는 달리 깊게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어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러나 왜군을 맞이하여 승승장구했었던 신입 장군 휘하의 장병들이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왜군과 싸우게 되었다. 그때, 최후의 결의로 배수의 진을 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신입 장군조차 전사하고 말았다는 놀라운 패전의 소식이 벽절 마을에까지 들려왔다. 장군 휘하에서 싸우던 병사들 역시 비겁하게 도망한 병사 외에는 단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소식도 들려 왔다. 그러나 처녀는 총각이 필경 살아올 것을 믿어 의심한 적이 없었다. 전쟁도 끝장이 났고, 그로부터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단념이 빨랐던 처자의 아비는 나이를 먹어 가는 여식의 고단한 모습을 바라보다 못해 여식 몰래 혼사를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부모 된 처지로썬 어쩌면 당연한 처사라 할 수 있었다. 집안에 매파로 보이는 사람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결같이 마을 우물가로 가서 나무에 물을 주고 가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채씨는 여식을 불러 앉히었다. 아비는 여식도 눈치를 채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긴 말 하지 않았다. “이것은 너의 애처로운 모습을 바라보다 못해 주선한 혼사다. 마을에서 효녀로 소문난 네가 이 아비가 주선한 혼사를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다. 다만 걸리는 것이 있다면, 너와 정혼하기로 언약하였던 그 총각의 일인데, 그것은 나 또한 오래두고 고심해 왔었던 일이다. 사람의 도리로 봐서도 그렇고, 언약을 봐서도 이 아비 대신 출정한 그 젊은이를 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총각의 짐은 그래서 이 아비가 무덤까지 안고 가마. 그러나 너는 네가 살아가야 할 인생이 있다. 네가 오매불망 기다리는 그 사람은 전화의 티끌에 휩싸여 사라져서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하염없이 기다린다는 것은 덧없고 허망한 일일뿐이다.” 타이르는 아비의 말을 처녀는 고개를 다소곳하게 숙이고 듣고만 있었다. 아비의 말을 거스른다는 것은 지체 있는 집 안의 아녀자로썬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혼례를 닷 새 앞 둔 날 새벽, 마을 우물가에 물을 기르려 왔던 마을 사람들은 평소 알뜰하게 가꾸어왔었던 왕 버드나무 가지에 명주 수건으로 목을 맨 채씨 처녀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금 청송읍 벽절 마을 우물가에는, 천연 기념물 제193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는 수령 400여 년의 왕 버들이 그때 총각처럼 우연히 곁에 자란 노송과 함께 다정스럽게 서 있다. 김주영<소설가>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9> 성석제의 '용의 나라 장수의 고을'
아득한 옛날부터 의성에는 용이 많이 있었다. 용이 살았던 흔적은 용소, 용 절, 용문, 용바위, 용마 등의 이름과 전설로 남았다. 의성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용은 경북팔경의 하나인 빙계계곡의 용이다. 원래 이 계곡에는 거대한 못이 있었다. 그런데 이 못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물길이 없어서 고인 물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이때 계곡 뒷산 큰 절에 있던 힘 센 장수(또는 부처)와 못에 살던 용이 만나 물길을 어떻게 낼 것인가를 가지고 의논하게 되었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결국 각자 힘껏 물길을 내되 빨리 내는 사람의 뜻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용은 몸을 힘차게 움직이고 꼬리를 쳐서 서쪽 산맥을 끊기 시작했고 장수는 쇠스랑으로 북쪽 산맥을 끊기 시작했다. 용호상박, 아니 용장상박(龍將相搏)의 대결이 펼쳐지며 산천이 뻐개지고 바위가 날았다. 용은 먼저 서쪽으로 물길을 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머리가 바위에 부딪히는 바람에 중간에 큰 소가 만들어졌으니 이곳에 용소(龍沼) 혹은 용추(龍湫)라는 이름이 붙었다. 장수는 쇠스랑으로 산맥을 너무 급히 찍다가 자루가 부러지는 바람에 물길을 내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용에게 지고 말았다. 북쪽 능선에는 장수가 쇠스랑으로 찍은 자국이 지금도 남아 있는데 이를 ‘부처막(佛頂)’으로 부르고 있으며 그때 깨어진 돌조각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그런데 ‘부처막’에서 부처를 상정하기보다는 힘 센 장수였다고 보는 게 신빙성이 더 놓은 것이 의성 지방에는 유사 이래 힘 센 장수가 출현한 흔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안사면 만이골 깊은 산중에도 아기 장수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 모습이 비범하고 기골이 장대하며 성장 속도가 무척 빨랐다. 이웃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아기가 장차 역적이 될 게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가난하고 무지한데다 어리석은 부모는 후환을 두려워하여 아기를 없애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마을 사람 중 힘깨나 쓰는 사람들 몇에게 아기를 맡겼고 그들은 서쪽 준령의 계곡에 아기 장수를 산 채로 엎어 두고 그 위에 거대한 소나무 나뭇짐을 덮어 눌러버린 채 내려왔다. 사흘이 지나도록 아기 장수를 덮어 놓은 나뭇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뇌성벽력이 일고 용마가 크게 울음을 터트리면서 장수가 탈 안장을 던지고 그 위를 날아가 버렸다. 비슷한 이야기는 또 있다. 단밀면 낙정리 나루터에서 2백미터쯤 상류에 위치한 용바위(龍岩)에 얽힌 전설이다. 낙정에 윤 씨 성을 가진 역졸이 있었는데 어느날 긴요한 공문서를 2백 리 가량 떨어진 유곡역에 전달하게 되엇다. 윤 씨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모래밭에서 신나게 놀고 있던 아이에게 문서를 들려 보냈다. 아이는 발이 얼마나 빨랐던지 오후가 되자 벌써 돌아와 모래밭에서 다시 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이때부터 오히려 근심에 사로잡혔다. 보잘 것 없는 신분, 집안에 어울리지 않는 비범한 아이는 역모를 꾸밀 것이라는 미신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잠자던 아들의 겨드랑이에 돋은 날개까지 보게 되었다. 아버지는 굳게 결심하고 아들이 잠든 사이에 동아줄로 묶고는 죽이려고 했다. 이때 하늘에 빛나던 별들이 사라지면서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이 울리면서 소낙비가 쏟아졌다. 이와 때를 맞추어서 용바위 아래 낙동강의 소에서 크나큰 용마가 나오더니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미친 듯 달려가 버렸다. 아이가 자라서 타고 다닐 용마였다. 단북면 소재지 앞 쪽 들판에 도로를 끼고 커다란 못이 있는데 이름은 연지(硯池)다. 옛날 옛적 이 못의 자리에는 민가가 있었다. 그 집에서 태어난 아이는 몸집이 아주 컸고 골상이 비범한 데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났다. 비슷한 맥락으로 소문이 퍼졌고 부모가 아들을 없앨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른 곳과 다른 점은 결정적인 순간에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서 그 집이 흔적 없이 파여 커다란 못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벼락못(雷池)이라 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벼루못(硯池)이라 바뀌었다고 한다. 인근에서 용마가 버리고 간 안장을 주워다가 신당을 지었는데 영험이 많아서 제사를 정성들여 지낸다고 한다. 마지막 이야기는 훨씬 더 구체적이다. 사곡 땅에 자식이 없는 늙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길손이 충고하는 대로 산중의 고목을 신주처럼 받들고 백일동안 기도하여 옥동자를 얻었다. 그런데 이 아기는 생후 사흘째부터 말을 하고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게 범상치 않은 풍모를 보였다. 한 해가 지난 어느날, 부부는 한창 모내기에 바쁘고 아이는 논둑에서 놀고 있었는데 한 장군이 말을 타고 긴 칼을 휘두르며 달려와서 다짜고짜로 이들에게, "지금까지 심은 모의 포기 수를 알아내고 만약 모른다면 이 칼로 세 사람의 목을 벨 것이다"라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공포에 질린 부모를 대신해 앞에 나선 아이는 "장군이 타고 온 말이 여태껏 몇 번이나 발굽을 내딛었는지 알아맞추면 나도 모의 포기수를 말씀드리겠소"라고 했다. 장군은 안색이 싹 변하더니 "두고 보자" 란 말을 남기고 사라져 갔다. 아이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어느날 아기는 어머니에게 콩알 백 개를 볶아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가 콩을 볶다 무심결에 한 개를 그만 먹어버리는 바람에 99개의 콩만 주자 아이는 슬픈 얼굴로 "이제 나는 죽게 되었습니다. 내가 죽거든 내 목을 잘라서 명주 수건에 싸서 남쪽으로 가다가 첫째 못에 버리십시오. 누가 내 목을 찾더라도 절대로 가르쳐 주지 마십시오" 하고 방문을 열었다. 난데없이 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하자 아이는 콩을 던져서 화살을 막기 시작했다. 아흔아홉 번은 막아냈지만 백 번째 콩이 없어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어머니는 슬프고 경황없는 가운데서도 아들의 당부를 생각하여 목을 남쪽 못에 가져다 넣었다. 막 돌아서는데 갑자기 지난날의 장군이 달려와 아들의 목을 내어 놓으라고 위협했다. 어머니는 두려움에 혼이 나가 그만 사실대로 가르쳐 주고 말았다. 장군이 못 둑에 있는 수양버들 세 개를 따서 못 위에 던지자 물이 갈라졌다. 못 가운데는 갑옷 입은 장수가 일어나려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것을 본 장군은 한 칼에 장수의 목을 치고 말았다. 이 못을 일컬어서 ‘신주(神主)못’이라고 한다. 나는 아기장수들이 비명에 죽어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부모가 그런 이야기로 사람들의 이목을 흐린 뒤 아기 장수를 어디론가 탈출시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춘산면 대사리에 오장군(吳將軍) 묘가 있는 것이다.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온 오장군은 어릴 적부터 나막신을 신고서도 절벽을 오르내리는 절세의 용력을 자랑했으며 복경산에서는 큰 바위를 조약돌처럼 던져서 도적떼를 전멸시켰다. 그 때의 큰 바위는 아직도 마을 앞들 가운데 있다. 또한 비안면 남쪽 두모강변 두모동에는 두모라는 장수가 나타났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천하장사여서 그가 거동하면 바위에 손자국, 발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두모장군은 동구의 중앙에 거처하면서 이 동네를 수호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마을 높은 곳에서 바위문이 있고 그 바로 옆에는 장군이 밥을 지어 먹던 흔적도 볼 수가 있다. 무슨 혁혁한 명예도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도 없이 스스로와 마을 공동체, 삶의 터전을 도적과 재앙으로부터 지키며 살다 간 무명의 장수, 장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역사의 주인공들이 아닐까.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리라. 성석제<소설가>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8> 이상국의 '삼족견(三足犬) 보리, 성주 태실에서 500년 사랑을 품다'
나는 '보리(菩提)'라고 하는 여인네요. 세종대왕 시절에 꽃 피었다가 단종대왕 유폐(幽閉)와 함께 쓸쓸히 진 해어화(解語花, 기생)라오. 나는 한 남자를 사랑했소. 그 사람, 안평대군 이용은 나를 참 어여삐 여겼소. 안평이 몽유도원(夢遊桃園)하던 밤의 꿈에도 내가 동행하고 있었던 것을 모르지요? 그는 내게 꿈이야기를 해주었소. 함께 말을 타고 들어갔는데 무릉의 절벽 앞에서 그만 내가 말 아래로 추락하더라는 거요. 깜짝 놀랐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나를 둔 채로 계속 말을 달렸다고 하오. 안평대군은 등 뒤에서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소. 하지만 세상사람들의 입방아를 꺼렸기에 이원(梨園, 화류계)의 나를 굳이 언급하지 않았소.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안견의 <몽유도원도>(1447년작, 일본 덴리[天理]대학 소장) 속에는 보리가 숨어있는 셈입니다. 이제 와서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그때 나의 낙마(落馬)는 무슨 의미였을까.세종대왕은 셋째 아들인 그에게 비해당이란 호를 내렸지요. 안평(安平)의 뜻이 너무 느긋하여 맺고 끊는 일이 분명치 않을까 염려하여, 게을리 하지 말라는 뜻으로 '비해(匪懈)' 두 글자를 준 것이었소.(시경의 '대아'편에 나오는 구절에서 딴 것) 아아, 대왕은 뒷날의 일을 예견한 것일까요? 안평은 상황을 낙관하다가 결국 형제의 욕망과 계략을 읽지 못하고 처연한 최후를 맞았지요.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었지요. 대왕의 아들 중에서 풍채가 비할 바 없이 훤했고, 빼어난 소객(騷客,시인)이자 붓끝에서 신운생동하는 명필이었습니다. 중국의 황제까지 그 글씨를 받아보고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인쇄하여 후세에 전하라는 조칙을 내렸다 하오. 내게 지혜와 깨달음(智.覺)을 뜻하는 '보리'라는 이름을 준 이도 안평이었소. 유교국의 왕자였지만 불심이 유난히 두터웠던 그는 여러 차례 빼어난 필체로 경전을 베껴쓰는(寫經) 공덕을 짓기도 하였지요. 또 그의 핏줄 중에 '무심(無心)'이라는 불교명을 지닌 소녀도 있었을 만큼 친불(親佛)의 가풍을 지닌 그였으니, 내게 보리라고 작명한 일이 어색하지 않았어요. 1453년 10월 계유정란 때 좌의정 김종서를 죽인 수양대군은 안평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강화도와 교동으로 귀양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사약을 내려 죽였지요. 그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뒤 나 또한 가만히 목숨을 끊어 평생 그리웠던 그와 저승동행을 하였지요. 뒤틀린 삶과 죽음의 황망한 매듭이었습니다. 그 뒤로 어느 시간에 나는 소로 태어났었지요. 흩어져버린 안평의 흔적을 찾아 다니다가, 성주 고을에 그의 태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냈습니다. 달 밝은 밤 나는 어느 외양간의 고삐를 풀고 선석산 태봉(胎峰)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나의 님 안평과, 형제의 살인자 수양대군의 자취를 함께 만났습니다.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의 손에 죽임을 당한 단종의 태봉(胎封, 왕의 태실),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돌아간 금성대군의 태실도 있었습니다. 수양대군 세조는 못마땅한 이들의 태실을 모두 파헤쳐버렸지만 나는 그것들이 어디에 흩어져 있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소가 된 이 몸은 서러움이 밀려와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엉엉 울었습니다. 이 광경을 누군가가 보았는지, 관청에 신고를 했습니다. 왕가 태실의 금표(禁標)를 어긴 책임을 물어 나는 그 자리에서 도살되었고, 이곳 관리마저 파직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9년전인 2001년 동짓달에 다시 태어나보니 나는 진도견이었습니다. 세 살이 되던 2003년에 고향인 대구를 떠나 다시 선석산으로 달려왔습니다. 세상에 남아있는 님의 자취라도 느끼려면 아무래도 성주의 태실만큼 좋은 곳이 없기 때문이죠. 너무 급히 달려오다가 태실 부근에 사냥꾼의 덫이 놓여있는 것을 보지 못했지요. 나는 철사줄 올가미에 오지게 걸려들어 낑낑거리고 있었습니다. 며칠째 기진맥진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지나가던 한 스님이 다가와 구해주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선석사에 있는 법견스님이었습니다. 그는 나를 데려가 정성껏 치료를 해주었지요. 그래도 다리 하나는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나의 님 안평이 보고싶어 견딜 수 없었거든요. 다리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태실로 뛰어갔습니다. 다시 비슷한 자리에서 덫에 걸렸습니다. 이러기를 네 번. 그때마다 스님이 구해주었으니, 목숨도 참 질기다 할 만합니다. 그러는 동안 왼쪽 눈도 각막이 손상되어 실명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말못하는 짐승이 줄기차게 태실에 올라가고 그곳에서 밤을 새니 기이해 보였나 봅니다. 모두가 나를 보살처럼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선석사에서 예불(禮佛)도 함께 하고, 공양도 함께 합니다. 스님은 내 전생의 전생을 어떻게 알았는지, 원래 이름인 '보리'를 찾아내 불러주었습니다. 이제 보리는 세 개의 발로 절뚝거리며 밤마다 안평대군을 뵈러 갑니다. 외로운 원혼을 지켜주는 것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오. 태실을 굳이 지키는 까닭은, 계유년의 피비린내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세종대왕은 핏줄의 화합을 위하여 이 나라에서 가장 좋은 양택(陽宅, 산 사람들의 풍수명당)을 고르고 골라, 18인 아들 손자의 태실을 만들었지요. 태(胎)는 생명이 이어지는 바로 그 오묘한 정수(精粹)로서, 이를 귀하게 다루고 모시는 일은, 왕자의 길운과 왕실의 번영을 기약하고자 하는 의식인 것이지요. 지혜로우신 세종대왕이 많은 왕자들의 태실을 굳이 한곳에 모은 까닭은 많은 형제들 사이의 알력과 욕망이 서로 충돌할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오. 아니나 다를까 왕국 초기의 불안한 정국은 수양의 야망으로 결국 폭발하고 말았더이다. 그런데 이곳은 참 기이한 곳이랍니다. 아픈 기억과 뒤틀린 역사조차도 품어버릴 만큼, 선석산과 태봉(胎峰)은 생명의 정기로 가득 차 있거든요. 핏덩이를 품어 한 존재를 이룩해내는 모체(母體)의 에너지가 그대로 느껴지는 곳이지요. 들 가운데 우뚝 솟았으며 위는 평평해 하늘과 맞닿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사방에 산들이 병풍처럼 가려주고 있어서 아늑한 자리입니다. 속인(俗人)들은 산 아래 만산교 다리 옆에 있는 계곡 벽에 겹쳐진 바위를 득남혈(得男穴, 음부바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곳에 돌을 던져 구멍 안에 넣으면 아이를 갖게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기도 하죠. 그러니까 이 산은 거대한 어머니의 자궁인 셈이지요. 성주(星州)는 예로부터 별의 도시로 일컬어져 왔습니다. 태봉 산정에 앉아서 이마 위에 반짝이는 별빛을 보는 일이 한없이 아름답지요. 그 별빛은 생명을 잉태하기 전에 여인들이 갖는 오르가즘과도 닮은 것입니다. 옛사람들은 별빛이 새벽에 영롱한 이슬로 지상에 내려와 인간과 교합한다고 믿었습니다. 이슬은 바로 생명이 맺어지는 절묘한 순간의 이미지입니다. 모든 상처를 품어 삶을 평화롭게 하고 운명을 길하게 하는 어머니의 힘이 이 산에는 있습니다. 태종과 세조(두 사람이 모두 성주에 태를 묻었다. 성주가 큰 도시인 목(牧)이 된 것은 태종이 자신의 태가 묻힌 이곳을 승격시켰기 때문이다)가 칼에 핏줄의 피를 묻히며 정권을 잡았지만, 이후 포악한 정치를 그치고 어진 정치에 힘쓴 것은 이 양택의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내가 삼족견(三足犬)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오래 전 나의 왼쪽 다리와도 같은 안평대군을 비명(非命)에 보냈으니 그때 이미 실족(失足)과 다름없었지요. 다시 님을 찾으려고 달려가다가 다리를 잃고 한쪽 눈마저 잃었으니, 이는 애인과 나를 같은 지경으로 만들어 서로 더욱 간절히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겠소? 그까짓 세월이 무슨 대수이겠소. 생을 거듭할 수록 애틋한 마음은 더욱 짙어지고 뜻은 더욱 단단해지더이다. 이 생명의 산에서 밤마다 영명한 대군을 기억하며 정녕 거룩한 사랑의 회임(懷姙)이라도 한번 이루고 싶소. 내 나이 이미 견세(犬歲)로는 할머니인지라 쑥스러운 생각이지만 마음은 늘 그러하단 얘기요. 1928년 일제가 나라의 정기를 흔들고 조롱하려 전국의 태봉과 태실을 서삼릉으로 이봉(移封)할 때, 이곳의 태 항아리는 모두 옮겨갔으나 석물(石物)들은 당시 월항면장이었던 도문희가 인수하여 오늘날까지 여기에 보존할 수 있었지요. 왕과 왕자들의 태(胎)는 사라졌지만, 그 기운은 석물과 함께 이 산정에 가득 남아 있습니다. 보리가 이토록 치열하게 밤마다 태실에서 한쪽 눈에 불을 켜고 경비를 서는 까닭은 이곳을 침탈하던 부정한 것들을 선험적으로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외다. 보리는 밤마다 늘 운우(雲雨)의 산정을 거닙니다. 복사꽃 활짝 핀 지난 봄에는 꿈에 그이가 찾아왔더이다. 보리가 보고 싶어 왔다고, 가만히 나를 바라보며 울더이다. 이제 그도 나도 사람이 아니고, 떠도는 옛기억의 조각일 뿐이지만 나도 한없이 기쁘고 서러워 말없이 내 님 곁에 앉았지요. 어깨를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고, 나는 500년 전보다 더 수줍어져서 하늘의 별을 올려다 보았지요. 이 순간을 위하여 나는 절뚝거리며 생을 건너온 것이 아닌지요. 선석사 앞마당의 선바위보다도 더 굳은 우리 사랑. 안평의 뺨이 닿은 내 뺨에 함께 흘러내린 눈물 만으로도 태봉은 왕자 하나 품어낼 듯 깊이 허리를 뒤트는 듯 하였습니다. 상사화(相思花) 피는 유월, 숨바꼭질같이 날마다 밤마다 이토록 그리운 생각으로 몽유할 수 있게 하여준 안평이여, 고맙습니다. 이상국<스토리텔링 전문기자>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7> 이하석의 ‘문경 탄광 이야기’
1(돌숯이 약이 되더니 큰 불이 됐네) 도탄(都炭)이라 했다. 마을 이름이 그랬다. 그 마을 김 동석의 집 뒤안과 산은 옛날부터 온통 불에 탄 것처럼 그슬려 있었다. “얘, 불 놓으며 놀까?”하고 김 동석의 아들 정균은 이웃 친구에게 말했다. 두 아이는 집 뒤안을 파고 시커먼 돌들을 몇 개 골라냈다. 그걸 집 밖 공터에 쌓아놓고 마른 푸나무로 밑불을 붙이면 잠시 뒤에 그 돌들에 불이 옮겨 붙어 꽃처럼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와 신기하다. 돌에 불이 붙다니.” 친구는 손뼉 치며 소리를 질렀다. “돌숯이야. 이걸 약으로 쓰기도 한단다.” 정균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리 집 주변은 돌숯 천지야.” ‘탄(炭)’은 숯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돌숯이라 했다. 바로 석탄이었다. 도탄이란 마을이름은 돌숯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돌숯을 찾아다니는 이들이 나타났다. 일본인들이었다. 1934년 무렵, 이 지역의 광업권을 따낸 일산화학공업주식회사 직원들이었다. 조선인 인부 몇 명을 데리고 나타난 그들은 도탄마을 뒷산을 파고 지질과 탄맥을 조사했다. 마을 사람들은 일인들의 지표조사를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희한해. 돌숯이 그냥 땅 속에 묻혀있는 게 아니고 맥이 있어서 그 시커먼 줄을 따라 분포한다는 거야. 왜놈들은 그 맥이 확인되면 파는 걸 중지하고 다시 몇 십 미터 가서 말목을 박아놓아. 그런 식으로 해서 산엔 온통 말목 천지야. 참 왜놈들 용해.” 그러나 신기하다고 여긴 건 잠시였다. 그들 앞에 청천 벽력같은 통고가 떨어졌다. 탄광개발을 위해 마을주민들이 강제 이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산주인 김 동석은 절대로 산을 내놓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일인들은 임대형식으로 사용하겠다고 김 동석을 회유했다. 그 후 조용했던 농촌마을이 탄광촌으로 바뀌면서 이 산은 결국 일인에게 팔려 넘어가고 말았다. 탄광촌 이름도 은성으로 바뀌었다. 가은의 은(恩)자와 마성의 성(城)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938년 시작된 은성무역탄광의 개발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은성탄광은 일인들이 경영하고 관리했지만, 막장에서 일하는 갱부들은 조선인들이 많았다. 본토백이 가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팔도공화국’이라 불렸다. 김정균의 친구 남 씨도 그랬다. 농사보다 수입이 많았기에 열심히 하면 부자가 되겠다싶어 광부를 지원했다. 그리하여 어릴 때 장난삼아 불을 붙이고 놀았던 그 돌숯을 캐러 지열 뜨거운 막장의 캄캄한 속으로 들어갔다. 해방 후 은성탄광은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한국석탄공사가 운영하는 국광이 됐다. 국가산업의 근간을 이루는 에너지원의 주요공급처가 된 것이다. 그 후 연탄파동도 겪고, 석유파동으로 다시 호황을 맞는 등 부침하다가 연탄이 유류로 대체되면서 석탄 산업이 사양길로 접어들어 90년대에 폐광이 속출했다. 문경탄광 최고의 요지였던 은성탄광도 1994년 봄에 문을 닫았다. 남 씨의 광부 일도 그 때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이 곳 도탄리 원주민이었다는 것도,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후까지 호구를 위해 막장 생활을 했던 것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그저 시커먼 석탄처럼 자신의 이력을 가슴에 꼭꼭 묻어놓을 뿐이다. 너무 아프고 캄캄한 기억 때문일까? 2(쥐, 같이, 살다) 갱부 남 씨(또는 김 씨일 수도 이 씨일 수도 있다)의 일상은 이러했을까? 그는 ‘게다짝’(나막신)을 신으려다 짜증스런 얼굴로 다시 장화로 바꿔 신는다. 출근하려니, 아내가 마음에 걸린다. 밤에 다퉜던 게다. ‘탄광 돈은 햇빛만 봐도 녹는다’고 하지만, 월급날 술을 하고는 작부와 “배꼽 맞추자”며 호기를 부린 바람에 집에 와서 보니 월급봉투가 너무 앏아져 있었던 게다. 아침에 밥을 지으면서 그녀는 아무 말이 없다. 식사 후 갱부들이 모여 사는 사택을 나서면서 더 이상 잔소리를 않는 아내에게 더욱 미안해진다. 기실 탄광촌에서는 아침 출근길에 아내가 잔소리하는 걸 금기시한다. 그런 금기사항이 참 많다. 출근할 때 여자가 앞을 가로 질러가면 출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부부싸움 후에는 가급적 갱에 들어가지 않는다. 남편이 출근한 후 신발을 방 안쪽으로 향하게 놓는다. 출근길에 짐승이라도 치면 그날은 출근 포기다. 갱내에서는 휘파람을 불거나 뛰지 않는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갱부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할 정도로 절박한 징크스들이다. 금기를 지키지 않았다가 사고라도 나면 그건 바로 갱 속에 파묻혀 죽는 것이다. 아내도 그런 징크스를 알기에 속이 끓어도 출근길에는 내심을 하지 않은 게다. ‘3000만원 짜리 돼지’의 안전을 위해서다. ‘3000만원 짜리 돼지’는 광부인 남편을 가리킨다. 사고로 죽으면 재해보상금 3000만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인차를 타고 한참 갱 속을 내려가선, 다시 걸어서 작업장으로 향한다. 갱 속은 후끈후끈하다. 오죽하면 월남막장이라 했겠는가? 동료들 중에는 팬티 바람으로 작업에 임하는 이도 있다. 그와 동료들은 갱 속에 들자마자 구석부터 유심히 살핀다. “있어?”라고 그는 동료에게 묻는다. “응 저기 한 마리, 저 구석에도 있는 듯해”라고 동료는 구석을 가리킨다. 자세히 보니 검은 게 작업도구들 아래서 고물거린다. 쥐다. 반갑다. 쥐가 산다면 이곳도 안심할만하다고 그는 여긴다. 그는 도시락 속의 밥을 조금 떼 내어 쥐에게 던져준다. 광부는 쥐를 아주 친하게 여긴다. 예지력이 뛰어나 쥐는 광부들에게 생명을 지켜주는 나침반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갱내에서 자주 발생하는 가스 유출을 쥐는 아주 민감하게 감지하고는 피한다. 갱내 출수사고나 붕괴 사고도 미리 예감한다. 광부는 그런 쥐의 움직임을 보고 위험을 미리 인지하여 피할 수 있다. 낙반붕락, 운반사고, 전석, 추락 및 전도, 가스사고, 출수, 화약 발파 사고, 화재 등 탄광재해는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니 갱내 안전에 대한 주의는 아무리 해도 과하지 않다고 할 정도다. 그 역시 갱에 들자마자 각종 안전 조치를 취하고, 상황을 점검하는 것부터 일을 시작한다. “지난 번 사고는 너무 끔찍했어. 이젠 갱에 들어오기가 더 겁난다니까”라고 동료 중 한 명이 말한다. “생존자가 80여명이나 됐지만, 갱내에 사흘 동안 갇혀 있다 구출됐지. 죽은 사람은 44명이나 되었고.” “그래요? 그런데도 매스컴이 조용했잖아요?” 오늘 처음 갱에 들어온 신참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가난을 벗어나보자고 떼를 써서 막장으로 내려왔지만, 그는 일이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불안해서 포기해버릴까 하며 잔뜩 겁을 먹고 있는 터다. “그건 박대통령 시해사건 때문에 우리 사건이 가려져서 그랬지.” “가뜩이나 사회로부터 왕따 당한 우리 신센데, 이렇게 큰 사고가 나도 한 사람 때문에 다시 우리 몽땅 왕따를 당하는군.” 누가 자소하듯 내벹는다. “어쨌든 매사 조심하자.” 그는 안전을 다시 강조한다. “두 하늘을 덮어쓰고 사는 우리 아닌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매일 고마운 일이지.” ‘두 하늘을 덮어쓰고 산다’ 또는 ‘두 하늘을 모시고 산다’는 말을 그들은 자주 한다. 지하에서는 갱도의 천정이 광부들의 또 다른 하늘이다. 밖의 하늘과 갱도 속의 하늘을 늘 의식할 정도로 그들은 언제나 사고 위험에 대한 공포심을 떨치지 못한다. 고참인 그가 훗노미(쇠막대, 일명 꼬질대)로 탄층에 능숙하게 발파구멍을 뚫고 그 속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전한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자 이내 꽝하는 소리와 함께 탄가루가 갱내를 자욱하게 메운다. 신참들과 다른 갱부들은 탄을 객차에 담아 갱 밖으로 실어낸다. 어느 것 하나 마음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갱 속의 검의 하늘에 기도하는 것으로 가라앉힌다. 그리하여 작업을 끝내고 나와 푸른 하늘을 보고는 “오늘도 마지막은 아니었구먼”하고 비로소 안심하는 것이다. 3(닫힌 하늘, 새로 열리는 하늘) 그는 이제 농사를 짓는다. 가은에는 2만5000명의 광부들이 거주했으나 폐광 후 거의 다 떠났다. 은성탄광 자리에 세운 석탄박물관을 강 건너에서 늘 보지만, 마음이 개운치 않다. 석탄박물관의 여운황 학예연구사는 문경지역 박물관 자료를 모으느라 김 씨 같은 광부 출신들을 자주 찾아온다. 그 때마다 말한다. “광산 경기가 좋을 때에는 은성 광업소에만 1천500명이 일했지. 하루 3교대 근무였는데, 교대시간만 되면 광부들 소리로 이 골짝이 떠들썩했어. 지금은 다 떠나고 가은에 40명 정도가 남아있을 정도지.” “박물관을 구경하는 마음이 어떻습니까?” “은성광업소 폐광 후 그 자리에 이 지역의 석탄 산업을 관광자원화한다고 세운게지. 박물관이 생길 때 이곳에 근무하던 이들은 마음 아파하기도 했고, 큰 기대를 갖기도 했어. 특히 진폐증 환자들의 기대가 컸지. 이 박물관을 통해 진폐증 광부들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 커질 것이란 기대를 많이 가졌지.” 그는 이곳에 지금도 꽤 많이 남아있는 진폐증 환자들을 안타까워한다. 문경제일병원에 있는 산재병동은 진폐병원이라 불린다. 지금도 3~400명의 환자들이 진료중이다. 박물관의 야외전시장에는 진폐증으로 순직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비와 사당이 세워져 있다. 매년 10월초면 문경지역 진폐 순직자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해왔다. 그는 아들내외와 손자, 손녀들이 오면 박물관을 구경시켜준다. 전에 석탄을 실어 나르던 철로 위로 새롭게 오가는 레일바이크(철로 자전거)를 태워주기도 한다. 석탄박물관과 레일바이크 이용자는 휴일이면 아주 많다. 하루 세 번 씩 치러지는 교대시간마다 검은 물결을 이루던 광부들의 떠들썩함이 사라진 대신, 다양한 색깔의 여행복 차림 관광객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들이 밀려들고 있다. 석탄 박물관 뒤편 산비탈에는 ‘연개소문’, ‘대왕세종’, ‘천추태후’ 등을 촬영하기 위해 평양성과 고구려마을, 신라마을 등으로 구성된 영화촬영 세트장이 있어서 관광객들을 부른다. 문경시는 석탄박물관과 오픈세트장을 통합 운영함으로써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는데 효과를 보기도 한다. 석탄박물관 뒤 산에는 은성광업소가 운영되던 시절 사용했던 갱도를 활용한 갱도전시장이 있다. 이곳에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실제갱도체험을 할 수 있다. 레일바이크는 과거 이곳의 석탄을 점촌역까지 운송하던 철로를 새롭게 이용해서 운행하는 것이다. 그 중간 역으로 석탄의 역사를 잘 떠올려주는 가은역과 불정역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이런 변화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그는 80노구를 겨우 버티면서 이렇게 말할 뿐이다. “두 개의 하늘 중 한 하늘은 이제 깊은 어둠 속에 묻혀버렸네. 그 대신 이 곳에는 과거의 어둠을 새롭게 닦아 보이는 새 하늘이 열리고 있는 셈이야. 그 청천 하늘 속에서도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게 바로 땅 속의 하늘이야.” 이하석<시인>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6> 우광훈의 '전 턱없는 탈입니다'
저는 이메탈입니다. 안동시 풍천면 하회동에서 태어났죠.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전 턱이 없습니다. 턱이 없다보니 뭐 하나 씹을 수가 있나, 짧은 말 한 마디 내뱉을 수 있나, 영락없는 금수의 생(生) 그대로죠. 하지만 세상사 생각하기 나름. 비천한 신분이기에 세상사 탓해도 부질없고, 맘껏 욕지거리 내뱉어도 알아들을 놈 하나 없으니 나름 편한 생이기도 하답니다. 어쩌면 말이란 놈의 교활한 구속에서 해방된 셈, 나무가 말을 집어삼켰다고나 할까요. 말, 인간이 만든 말(言)이란 것,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사실 제 턱을 이렇게 만든 그 년, 참으로 예뻤어요. 허도령이 뻑 갈만도 했죠. 조그마한 입술과 초승달 같은 눈썹, 걸음은 학처럼 우아했고, 장의 속에 감추어진 두 뺨은 백옥처럼 빛났어요. 이름은 미선. 아름다울 미(美), 착할 선(善). 거묵실골 남쪽, 초가에서 홀로 기거하고 있었지요. 허도령과 여자, 사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팔월 한가위 부락잔치에서 처음 만난 둘은 휘영청 달 밝은 밤, 동사(洞祠) 처마 아래에서 서로를 품에 안았지요. 그래요. 풍문은 풍문일 뿐, 사랑은 사랑일 뿐. 그러던 어느 날이었죠. 마을 대장간에서 일하는 최씨가 오리나무로 가득한 허도령의 작업실을 찾았어요. “허도령. 자네도 알다시피 요즘 우리 마을에 이상한 역병이 돌아 어린 것들이 목숨을 잃고 있지. 아마 이 모든 게 신의 노여움 때문이 아닐까하는 게 마을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라네. 그래서 돌아오는 정월대보름에 우린 아주 성대한 별신제를 지내기로 결정했다네. 물론 별신제에 쓰일 탈이니 신경이 많이 쓰이겠지. 하지만 우리 힘없는 것들, 양반 눈치 보랴, 관리 신경쓰랴, 어찌 맨얼굴로 할 수 있겠는가. 탈조가리라도 하나 덮어써야 하지 않겠는가. 마을 어르신들도 쾌히 승낙하셨으니, 어떤가, 해줄 수 있겠는가?” “몇 개면 되겠소?” “양반, 총각, 각시, 초랭이, 백정, 중, 이매, 부네, 할미, 떨달이, 별채, 선비, 그리고 주지 두 개 이렇게 총 열네 개가 필요하네.” “언제까지면 되겠소?” “그게…… 정월 초하루가 네 달도 채 남지 않았으니 적어도 세 달 안엔 끝냈으면 좋겠는데……” “그건 어렵겠소.” “아니 왜?” “열네 개의 탈을 만들려면 반년은 족히 필요할 터 그걸 세 달 안에 만들라니 날 보고 죽으란 말이오.” “탈 만드는 게 그리도 힘든 작업인가?” “당신네들 탈 만드는 게 그냥 나무만 적당히 깎으면 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아주 큰 오산이오. 나에게 탈은 곧 생명이오. 살아 숨쉬는 인격체란 말이오. 산모가 격한 산통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새생명을 맞이하듯, 나 역시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을 이겨내어야만 제대로 된 새끼를 얻는단 말이오. 이렇듯 탈이란 자못 인간의 생명과 영혼을 나무속에 담는 작업.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뿌리박힌 채로 살려두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겠소?” 허도령의 열변에 최서방은 결국 아무런 말도 잊지 못했지요. 사실, 허도령이 탈제작을 거절한 건 노고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세상사 모든 일에는 사익(私益)이 섞이는 법. 도덕이니, 공공이니 아무리 외쳐 봐도 사익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인간에겐 열정과 집착이 생기지 않는 법이지요. 허도령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그에겐 마을의 안녕과 평화보다는 한 여자와의 사랑이 더 중요했던 거죠. 단 하루라도 서로를 못 본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랑. 그만큼 여자를 향한 허도령의 사랑은 깊고도 넓었어요. 하지만 그 날 밤, 한 줄기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허도령의 운명을 바꾸어 놓고 말았지요. “네 이놈! 사사로운 정이 마을의 안녕보다 더 중요하더냐!” 벌떡 일어나 눈을 떠보니, 호랑이 형상을 한 산신령이 바로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산신령이 다시 말을 이었지요. “마을신의 노여움을 풀기에는 별신굿이 최고일터, 네 어찌 한낱 사랑 때문에 마을 전체를 나락으로 빠트리려 하는 게냐. 네가 만약 탈 만들기를 끝까지 거부한다면 내가 네 사랑을 앗으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허도령, 결국 탈 제작을 약속하고 말았지요. “탈이 다 만들어질 때까지는 절대로 작업실 밖으로 나와서도 아니 되고, 타인이 네 모습을, 네가 타인의 모습을 보아서도 아니 된다.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넌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며 죽게 될 것이다.” 다음 날, 꿈에서 깨어난 허도령은 결국 여자에게 이 모든 사연을 전한 뒤, 화산자락 따스하고 양지 바른 곳으로 쓸쓸히 숨어들었지요. 문 앞에는 외인의 출입을 막는 금줄을 치고, 목욕재계를 한 후, 곧장 탈제작에 몰두하기 시작했죠. 허도령, 그는 우리들을 아름답게 만들려고도, 과장되게 꾸미려고도 하지 않았지요. 그저 인간다움, 그 진솔한 삶의 흔적들을 나뭇결 깊이 새겨 넣길 원했었죠. 할미에게는 일평생 고달프게 살아온 자신의 노고를, 백정에게는 피할 수 없었던 살생에 대한 죄책과 그로인한 번민을, 부네에게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선비에게는 지체 높은 신분과 학식에 대한 가식을, 초랭이에게는 양반에 대한 반감과 경망스러움을, 각시에게는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양반에게는 여유와 허풍에 깃든 불안과 허세를, 그리고 저에겐 완벽에 가까운 익살을. 당시 마을 사람들은 겉으로는 선비와 양반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그들의 삶 속에 감추어진 위선과 모멸을 몰래 훔쳐보고, 귀엣말로 주고받으며, 비하하고, 풍자하는 그런 속된 행위에서 희열을 느끼고 있었죠. 중놈이 과부를 탐한다는 둥, 무식한 양반이 뇌물로써 관직을 샀다는 둥 높은 자들의 허물로 자신의 비루함을 자위하는 그런 이야기야말로 맛깔스런 안주였고, 야트막한 자존심이었으며, 힘든 노동을 위안하는 삶의 활력소가 된 셈이었죠. 그렇게 허도령은 인생 밑바닥에 깔려있는 저급한 삶의 기호들은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생것 그대로가 아닌) 익살과 웃음이란 양념에 한껏 버무린 다음, 우리의 얼굴 속에 차곡차곡 심어 넣어준 셈이었죠. 그렇게 여든 아홉 번의 낮과 밤이 꿈결처럼 흘렀어요. 나를 제외한 열세 개의 탈은 완벽한 모습으로 완성되어 보관함 속에 들어가고, 나 혼자 만이 작업대 위에 남아 있었지요. “이메야, 넌 어떤 턱을 원하느냐?” 새벽녘이 밝아올 때쯤, 허도령이 나에게 물었어요. 허도령의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죠. 어느새 머리는 백발로 물들었고, 피부는 깊은 주름으로 얼룩져 있었어요. 전 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히죽히죽 눈웃음을 머금었지요. 그러자 허도령은 껄껄대며 소리 내어 웃더군요. “어허, 이놈이 날 놀리려 드는구나. 좋다! 너에겐 이 풍진 세상 웃음으로 견뎌낼 수 있게 익살 하나 달아주마.” 허도령은 다시 좁고 납작한 조각칼을 집어 들더니 망설임 없이 저의 턱을 파나가기 시작하더군요. 그렇게 턱만 완성되면, 턱만 완성되면 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순간이었죠. 그때였어요. 어디선가에서 들려오는 낯선 발자국 소리. 그 소리는 차츰 출입문 쪽으로 가까워지더니 문창살 바로 앞에서 멈추었어요. 물론 작업에 푹 빠진 허도령의 귀에 그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요. 잠시 뒤, 스르르하고 문이 열리더니 갸름한 얼굴 하나가 나타나더군요. 한눈에 보아도 그 여자였어요. 여자의 몰골, 가관이 아니었어요. 눈은 병자처럼 퀭하니 패여 있었고, 볼은 광대뼈가 선연하게 드러나 있었으며, 모래 같은 육체에는 물기 한 점 느껴지지 않더군요. “도령님, 탈은 다 만드셨소?” 여자는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로 허도령을 불렀어요. 허도령, 그제서야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군요. 그렇게 여자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내 턱! 내 턱이 그만 허도령의 손에서 툭하고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어요. 마치 동백의 꽃대롱처럼 댕강하고 잘려 나가버린 내 턱. 그 찰라의 순간, 난 솟구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이렇게 소리쳤죠. “이 못난 년, 너 때문에 내가 병신이 되는구나!” 사실, 금기가 깨어짐으로 인해 불어 닥칠 허도령의 최후보단 턱의 부재로 인해 생겨날 내 얼굴의 기형에 더욱더 화가 치밀었죠. 제기랄, 턱없이 한평생을 살아야하다니 이런 기구한 운명이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솔직히, 하늘의 형벌이란 것이 그리 빨리 찾아오는 것은 아니더군요. 풍설의 그것처럼 여자와 시선이 맞닿는 순간, 곧장 피를 토하며 죽지도 않았고요. “그 곱던 얼굴 어디가고, 주름만 남았느냐.” 허도령은 자신을 사지로 몰고가버린 여자의 성급함을 결코 탓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여자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가슴 가득히 껴안았죠. 순간, 타닥거리며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났어요. “도령님은 왜 이리 백발이 되시었소? 창작이란 것이 신을 희롱하는 작업이라더니, 그것 때문에 노여움을 사신 게요?” 허도령의 눈망울에 차츰 눈물이 괴더군요. 그렇게 흐느끼는 여자와 흐느끼는 남자……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해진 얼굴하며 마치 솜털처럼 나풀대는 머리카락, 초점을 잃은 눈동자며 흐느적거리는 수족…… 어느 시대, 어느 장소 곤 기다리는 자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지요. 기다림에서 오는 초조함과 긴장은 사람의 피를 말리고, 뼈를 깎아 결국 사지(死地)로 내몰지요. 순간, 허도령이 거친 기침과 함께 피를 토하기 시작하더군요. “때가 온 것 같구료.” “저도 님을 따라 가오리다.” 여자가 재빨리 옆에 놓인 조각도를 들어 자신의 손목을 그었어요. 허도령이 말릴 틈도 없었지요. 결국 둘은 손을 꼬옥 잡은 채 제 옆에 눕더군요. “행복하오?” 남자가 물었어요. “행복해요. 당신 옆에 있어 미칠 듯이 행복해요.” 여자의 거친 숨소리가 제 뻥 뚫린 턱을 타고 두 눈 속으로 스며드는 순간, 제 익살은 눈물이 되고, 눈물은 꽃이 되고, 그 꽃이 쌓여 조그마한 무덤이 되더군요. 그래요…… 전, 턱없는 탈입니다. 비극 속에 감추어진 구슬픈 노래입니다. 사랑에 휩싸인 한 떨기 꽃입니다. 우광훈 <소설가>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5> 이상국의 '칠곡 다부동 328고지엔 비가 내렸다'
숲을 가득 채운 매미소리를 끊고 총성이 웁니다. 총성이 그치면 매미가 울기 시작합니다. 한 병사가 간밤의 백병전에서 숨진 동료의 흙투성이 낡은 군화를 벗겨주었습니다. 쓰러진 M1소총을 세워 철모를 씌웠습니다. 주머니에서 화염에 그을린 영어사전을 꺼냈습니다. 책의 뒷장에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내 아내... 나는 용감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8월13일 328고지에서”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전날 낮에 이 고지를 점령한 뒤 적었던 글이었습니다. 죽은 이의 글씨를 읽다가 산 사람의 눈물이 사전 위에 떨어져 번졌습니다. 가수 현인이 불렀던 노래 ‘전우야 잘 자라’(작사 유호, 작곡 박시춘)는 1950년 8월에 대구 코앞까지 내몰렸던 망국의 위기를 이겨내고 다시 북진하는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꽃잎처럼 떨어져간 전우야 잘 자라.” 이 노래는 이듬해인 1951년에 나왔는데, 전쟁통에 울려퍼지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가사는 비유나 과장이 아니라 피 비린내 나는 전장(戰場)에 관한 생생한 증언입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라는 말은 바로 치열했던 경북 칠곡군의 다부동(多富洞)전투를 그린 한 장면입니다. 승승장구하는 전쟁이었다면 ‘전우의 시체(요즘은, 사람의 주검은 ‘시신(屍身)’이라고 표현합니다)’가 아니라 ‘적의 시체’를 넘고 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군의 주검을, 한번도 아니라 여러번, 그것도 비켜가지도 않고 그대로 밟고 넘어야 하는 상황이었을까요. 이 땅엔 이 뜻을 아는 세대와 전혀 모르는 세대가 지금 함께 살고 있습니다. 60년이나 지난 얘기이거든요. 저 처절한 시간을 얘기해줄 사람은 점점 사라져갑니다. 8월13일 새벽 제1대대는 다부동전선 328고지에 이미 적이 들어온지도 모른채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첨병소대를 지휘하던 제3중대 제1소대장(이신국 중위)은 선두에서 남등고개를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야, 몇 연대냐?” 300m쯤 앞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 이중위는 눈 앞이 아찔한 느낌이었습니다. 등에는 식은 땀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잠깐의 정적. 그런데 평안남도 개천 출신인 그는, 질문하는 말투가 평안도 사투리인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래, 신의주 독립연대다. 왜 그러디? 인차 올라갈게.” 그의 말에 위에서는 기다리는 듯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마침 구름이 끼어 새벽4시인데도 10여m 앞이 안보일 정도로 어두웠습니다. “철모 벗어.” 이중위는 소대원들에게 속삭입니다. 연락병은 뒤에 따라오는 주력부대에 일단 정지하라는 명령을 보냈습니다. 7부 능선에 이르자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20m까지 다가가 1소대는 총을 쏘면서 덮쳐 들어갔습니다. 약 1개 소대가 전멸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기관총에 사수와 부사수 2명씩 나란히 죽어있었습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예 칡덩굴로 발을 묶어 놓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북한 정규군이 아니라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징발한 의용군이었습니다. 그들의 입가에서는 술냄새가 감돌았습니다. 술을 먹여 겁 없이 싸우도록 한 것입니다. 어이없는 남남(南南)의 살육전이었지요.13일 밤. 328고지에는 비가 부슬거렸습니다. 30여년만의 불볕더위라는 37도 폭염에 지쳤는지라 병사들에겐 빗방울이 달콤했습니다. 나뭇잎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 뿐, 칠흑같은 어둠이 깔렸습니다. 강 건너의 적들은 이날따라 포탄 한발 쏘지 않고 잠잠했습니다. 자정이 지난 시각, 천근만근의 무게로 내려앉는 눈꺼풀을 다시 들어올리느라 병사들이 자신과의 싸움을 벌일 무렵, 50m쯤 앞에서 녹색 신호탄이 허공으로 치솟아 터집니다. 이쪽에서 깜짝 놀라는 사이, 적들이 와르르 제1대대 진지로 덤벼들었습니다. 인민군들은 공격을 할 때 “만세”라는 구호를 외칩니다. 이곳에서 듣는 만세소리는 음산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장병들은 엉겁결에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부대 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캄캄하고 질척거리는 산 속,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도 잘 안되는 상황에서 서로 쏘고 찌르고 후려칩니다.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불꽃이 튕기고 비명소리가 터져나옵니다. 미끄러지면서 몸끼리 뒤엉켜 육탄전을 벌입니다. 백병전이 벌어지면 피아(彼我)를 확인하기 위해 총을 만져보거나 어깨 쪽을 서로 더듬어봅니다. 인민군 정규보병은 위장용 그물망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으니 그것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또 머리를 만져보기도 합니다. 우리 군은 대개 머리가 길었으나 저쪽은 대부분 짧은 머리였기 때문입니다. 서로 확인을 한 다음 소스라치듯 떨어집니다. 한쪽에서 칼을 내리꽂습니다. 도망치다가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집니다. 이번엔 다른 목소리가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암호! 암호 뭐야?” 병사는 그를 떨치고 다시 뛰어내려갑니다. 이날 전투로 제1대대는 고지 뒤쪽으로 후퇴합니다. 이튿날 아침 부대가 다시 진격하여 고지를 되찾았을 때 서울 출신의 한 학도병이 시신 앞에서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갑작스럽게 피난 내려 오느라 같이 내려오지 못했던 동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서울에 남아있던 그는 인민군에게 징발되어 의용군으로 참전했습니다. 칠흑의 어둠 속에서 형과 동생은 서로를 찌르고 쏘았던 것이지요. 이런 전투들로 12일 사이에 15번 정상을 빼앗았다 빼앗겼다를 거듭하였습니다. 이 고지에서만 3000여명의 주검이 널려 있었습니다. 더 끔찍한 일은 바위산인지라 호를 파기 어려웠던 병사들은 시신들을 쌓아올려 방호막으로 쓴 것입니다. 시신에 기대앉아 그들은 산 아래 마을에서 날라준 주먹밥을 우물거리며 삼켰습니다. 요기를 하고 있을 때 적의 포격이 시작됐습니다. 호 앞에 포개졌던 주검더미가 박살이 나서 흩어집니다. 포탄이 터지면 지긋지긋한 파리떼가 잠시 사라져서 그게 후련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이번엔 모기떼가 들러붙었습니다. 헤어진 전투복 구멍구멍마다 빨대를 꽂듯 내려앉았으나 그것을 쫓는 일도 귀찮았습니다. 제3대대 수색대의 사병 박모 하사가 소총을 오발하여 전우 한 명이 숨졌습니다. 수색대장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군기 해이를 물어 즉결처분하겠다.” 순간 대원들은 모두 얼굴이 굳어지고 숙연해졌지요. 달빛이 밝은 밤이었습니다. 수색대장은 박하사를 세워놓고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비장한 얼굴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부모님을 만나거든 내가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는 대구상업학교 6학년 재학중에 자원입대한 학도병이었습니다. 수색대장은 박하사를 구석진 골짜기로 데리고 가서 10보 앞에서 총구를 높이고 4발을 속사로 쐈습니다. 사병은 그 자리에서 기절을 했고 선임하사관이 현장에 뛰어가 그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잠시 뒤 수색대장은 대원들에게 말했습니다. “명사수로 이름난 내가 10보 앞에서 쏘았는데도 총탄이 맞지 않았던 것은 하늘의 뜻이다. 그러니 그를 더 이상 문책 않고 충성을 다할 기회를 줄 것이다.”제3중대 제1소대 향도 정재중 일등중사는 공동묘지 모퉁이의 진지로 갔다가 화기분대장 박노식 이등중사가 호 속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가가 “박중사”하고 어깨에 손을 댔습니다. 그의 몸은 싸늘했습니다. 그는 기관총 손잡이를 붙잡고 눈을 부릅뜬 채 적진을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새벽 적의 기습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뛰어나가 기관총을 쏘던 용감한 병사였지요. 정중사는 그의 두 눈을 감겨주었습니다. 이 죽음들이 마침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곳에서 그토록 질기게 버텨준 덕분에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펼칠 수 있었고 전세는 역전되었으니까요. 그해 8월 13일 이 전투에서 남편(정모씨)을 잃고 60년을 ‘미망인’으로 살아온 여인이 있습니다. 결혼한지 한달 만에 입대한 신랑은 두 달 뒤에 전사통지서 한 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안의 외동아들이었는지라 어린 며느리는 혼자서 집안 살림을 살면서 시할머니, 시부모를 모셨습니다. 막내 시누이의 둘째아들인 이모씨(50세)는 유난히 외삼촌을 많이 닮았다 합니다. 또 정하사가 전사한 날과 이씨가 태어난 날이 우연히 같은 8월13일인지라, 외숙모는 이 생질(甥姪)을 전쟁에 주어버린 남편 대신 얻은, '자식'처럼 아껴왔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장롱 깊숙한 곳에서 불에 그을린 영어사전을 꺼냈습니다. 뒷장을 넘겨 외삼촌의 마지막 글씨를 이씨에게 보여줬습니다. 외숙모는 이미 얼룩진 그 위에 다시 눈물을 떨어뜨렸습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은 건, 그날의 군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아닐지요. 대한민국은 이 328고지를 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상국 <스토리텔링 전문기자>
[스토리텔링 2010] 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 <4> 이하석의 '광주이씨의 金蘭之交'
1. 오직 최원도만이 자기를 구원하리라 믿고 은거지를 탈출했다. 개성에서 업고 온 아버지. 이집은 친구 최원도가 있는 영천까지의 까마득한 길을 다시 아버지를 업은 채 걷기 시작했다. 천곡(泉谷) 최원도와 둔촌(遁村) 이집은 평생의 지기였다. 벼슬길은 둘 다 평탄하지 못했다. 사간이었던 최원도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영천으로 낙향한 것은 신돈의 득세로 권문세가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세상이 어지러워져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후 이집은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 권좌에서 끌어내릴 모의를 했다. 그러나 이웃의 밀고로 그 사실이 드러나자, 신돈은 그를 포살하라는 명을 내림은 물론, 그의 집안까지 박살을 낼 기세로 등등했다. 멸문의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이집은 벼슬을 버리고 서울인 개성을 떠나 한양의 둔촌에 은거해 있다가(이집의 호 둔촌은 은거지의 이름을 딴 것이다), 화가 거기까지 미칠 듯하자 아버지를 업고 다시 친구를 찾아 먼 길을 나선 것이다. 등에 업힌 아버지를 추스르며, 내려놓고 쉬었다 다시 업었다 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추풍령을 넘었다. 영천까지 오는데 몇 달이 걸렸다. 최원도의 집은 영천에서 경주로 가는 어귀의 구룡산 아래 궁벽한 산촌에 숨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물어물어 겨우 당도했다. 집안이 떠들썩했다. 최원도의 생일잔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이집은 바깥사랑채에 아버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최원도에게 그가 왔음을 알렸다. 최원도가 바로 나왔다. “천곡! 날세, 둔촌일세.” 이집은 반가움과 안도의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최원도는 상거지 꼴을 한 친구를 내려다보았다. “왜 왔는가? 여긴 자네가 올 곳이 못되네.” 최원도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와 아버지를 끌어내 쫒아냈다. 그리고는 냅다 사랑채에 불을 질러버렸다. 그의 체취가 닿은 흔적조차 꺼리는 태도였다. 이집은 아연실색했다. 오직 친구를 찾는다는 일념으로 천리길을 죽을 고생을 하며 왔는데, 이런 천대를 받으니 기가 막힐 뿐이었다. “백년지기이니, 무슨 까닭이 있겠지. 이렇게 느닷없이 죄인의 몸으로 들이닥쳤으니 내가 심했군”하고 그는 애써 친구를 이해하려 애쓰며 오리 밖에 떨어진 낫고개(蘿峴)에 숨었다. 밤이 왔다. 어둠 속에서 고픈 배를 움켜잡고 아버지를 다독이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탄식을 했다. 문득 누가 저만치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이집은 놀라 숨을 죽였다. “둔촌, 날세.”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원도였다. “아깐 남의 이목을 생각해서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한 것이네. 오해하지 말게.”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손을 잡고는 눈물을 흘렸다. “잘 왔네. 내가 자네를 숨겨줌세.” 최원도는 이집 부자를 아무도 몰래 집안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낮에는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이슥한 밤이면 최원도의 방에서 두 친구는 나란히 잤다. 밥 먹는 것도 표가 안 나게 항상 한 사람의 밥을 넉넉하게 차리라 하여 나누어 먹었다. 신돈의 명으로 영천의 포졸들이 들이닥쳤으나 그날의 화재 사건으로 인해 두 부자가 이 집에 숨어있는 걸 깜쪽같이 몰랐다. 2 “참으로 이상한 일이네.” 부엌일을 맡아보던 몸종 제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언제부턴가 주인의 식성이 달라진 게다. 식사량이 평소와 다르게 아주 많아졌다. 밥을 고봉으로 꼭꼭 눌러서 많이 담게 했다. 상이 나올 때는 밥이고 반찬이고 남는 게 거의 없었다. 뭐든지 싹싹 비워져 있었다. 주인의 평소 식사량을 잘 아는 제비로서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루는 밥상을 들여놓고 나와서는 문틈으로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주인 한 사람만 있을 줄 알았는데, 잠시 뒤에 노인과 주인 또래의 한 사람이 다락에서 내려와선, 세 사람이 한 그릇의 밥을 나누어먹는 것이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은 채였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다시 다락으로 올라가고 이어서 “상을 물려라”라는 주인의 소리가 들렸다. 제비가 방에 들어가니, 주인만이 달랑 앉아있었다. 제비는 이 기이한 일을 최원도의 부인에게 알렸다. 부인이 그 연유를 묻자 최원도는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부인만 알고 있으라며 가족과 몸종에게 입단속을 단단히 하라고 일렀다. 부인은 제비에게 “이 일이 누설되면 우리 가족은 물론 너까지 죽는다”고 입을 봉하기를 다짐했다. 제비는 행여 자신의 실수로 주인집이 멸문의 화를 당할까 염려했다.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 영원히 제 입을 막아버렸다. 3 영천시 북안면 도유리에는 세 개의 무덤이 있다. 최원도의 어머니 묘와 이집의 아버지 이당의 묘, 그리고 제비의 묘다. 이집이 최원도의 집에 숨어있기 3년만에 아버지 이당이 벽장 안에서 세상을 떠나자, 최원도는 자신의 옷으로 염습을 하여 밤중에 모친의 산소 밑, 자기가 죽으면 묻힐 곳으로 정해둔 자리에 장사를 치렀다. 그리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끊은 제비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묘역 입구에 자그마하게 제비의 무덤, 연아총(燕娥塚)을 안치했다. 이당은 광주이씨(廣州李氏) 시조로 꼽힌다. 그러니까 그의 무덤은 광주이씨 시조묘가 된다. 묘역의 도래솔은 국내 최대로 묘를 푸른 띠로 넓게 둘러싸고 있다. 이 무덤터는 풍수상 야자형(也字形) 대길지로 꼽힌다. ‘야(也)’자의 아랫내림획 끝 부분에 위치한 이당의 묘는 글자의 모양처럼 사방을 산이 둘러싸 보호하는 형국이다. 산을 덮고 있는 도래솔의 가지들이 한결같이 이 무덤의 혈자리를 향해 뻗어있다고 보기도 한다. 조선 8대 명당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 덕분인지 광주이씨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정승 5명에 대제학 2명을 배출하는 등 크게 번창해왔다. 무엇보다 이 묘역은 함께 생사를 넘나든 최원도와 이집의 금란지교와 지극한 효심이 이루어낸 자리로 기억되어 왔다. 4 광주이씨 후손인 한음 이덕형이 영천 북안의 시조묘를 찾아 성묘한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1601년이었다. 도체찰사로 영남의 여러 고을을 순찰하고 있었는데, 가을에 영천에 들린 것이다.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가 시조묘에 도착하자, 이 지역의 유림들과 문사들이 많이 모여 환대했다. 그 중에 노계 박인로도 끼어 있었다. 노계의 집은 영천 도천으로 이곳에서 가까웠다. 노계는 한음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하던 중 마침 그가 온다는 말에 만사 제쳐놓고 참석했다. 두 사람은 인사를 했다. “무과에 급제한, 거제도 조라포 만호를 지낸 박인로입니다.” “아이구, 선생의 존함은 잘 알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두 사람은 대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마흔 한 살의 동갑내기였다. 한음의 손님 대접은 조촐했다. 홍시를 접시에 담아내놓았다. 문득 한음이 노계에게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노계, 저의 어머니는 임진왜란 때 돌아가셨지요. 아버지 홀로 지내시는 게 안타까워요. 재상이랍시고, 전란 후의 수습에 몰두하느라 홀아버지에게 효도를 할 틈도 주어지지 않는군요. 선생이 시조와 가사에 탁월한 재주가 있으시니, 이 홍시를 빌어 저의 사친의 정을 표현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에 노계가 화답, 단숨에 네 수를 지었다. 그 중 한 수는 다음과 같다.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柚子) 아니라도 품음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 하나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효친의 정이 절절히 우러나는군요.” 한음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이 시의 제작시기와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본 이야기는 김창규의 ‘노계 시 평석’을 참고했다: 필자주) 두 사람은 절실한 친구 사이가 됐다. 자연히 두 사람 간의 왕래는 각별해졌다. ‘조홍시가’를 지은 지 10년이 지난 51세 때는 노계가 경기도 광주 용진강 가에 살고 있는 한음을 방문, 용진강 사제(沙堤)의 풍광 속에서 노후를 보내는 한음의 유유자적한 삶을 그린 ‘사제곡’과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읊은 ‘누항사’를 짓기도 했다. 한음이 죽고 나서는 그의 아들 이여구와 이여황이 선고(先考)의 친구인 노계를 많이 챙겼다. 노계 만년의 가사 ‘상사곡’과 ‘권주가’는 이들이 선고의 ‘한음문고’를 편찬할 때 짓게 하여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우리 국문학사상 불후의 명작들이 한음과 노계의 교친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니, 이들의 우정은 개인적 친분의 차원을 넘어 한국문학사의 한 사건으로 기록되어지게 되는 셈이다. 노계는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향리에는 그를 기리는 도천서원이 세워졌다. 뜻 있는 이들은 광주이씨 시조묘와 도천서원을 둘러보며, 오랜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지 않는 한음과 노계의 정감 넘치는 금란지교를 새삼 되새긴다. 이하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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