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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7> 헤이그 특사 이준 열사의 외침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특사로 파견됐다가 현지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도 국채보상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준은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국채보상연합회의소 소장을 맡아 모금운동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또 그의 부인 이일정(李一貞)여사도 ‘국채보상부인회’를 설립해 남편과 뜻을 같이했다. 이준은 자신의 반려자이면서 정치적 동지인 이일정의 부탁에 국채보상부인회 초청 연사로 나가 국채보상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특히 이준은 헤이그로 떠나기 이틀 전에도 고령군의무소장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된 공문서를 보내, 국채보상운동의 활동방향을 제시했다.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시리즈 7편은 국채보상운동 중심에 섰던 이준 열사에 대한 이야기다.국채보상연합회의소장 맡아전국적 범국민운동으로 확산정치적 동지 부인도 모금 동참부인회 사무소 열어 계몽 앞장 이준, 부인회 강연서 당위 역설헤이그로 가기 전까지 동분서주 “국채로 나라가 태평치 못한 바애국심이 없다면 신민도리 아냐” #1. 법복 입은 구국운동가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의 불길이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소식에 이준(李儁, 1859~1907)은 가슴이 떨렸다. “온 국민의 뜻이 그러할진대 그 누가 뒤흔들겠는가. 나 또한 마찬가지.”나이 마흔여덟에 이르기까지 그 긴 시간을 오로지 구국을 위해서만 달려왔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최근에도 고초를 겪은 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준은 평리원 특별검사에서 파면된 상황이었다.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뒤 이듬해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던 이준은 아관파천을 계기로 사임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법과에 입학했다. 그리고 졸업해 귀국하자마자 대한제국의 최고법원인 평리원(平理院) 검사에 임용된 데 이어, 1906년 6월18일에는 특별검사에까지 이르렀다. 그때 이준은 작정했다.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가 투옥된 김인식, 나인영, 오기호, 기산도 등을 ‘황제의 은사’라는 형식을 이용해 방면시켜야겠다고 말이다. 을사오적이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조약에 적극 찬성하며 서명한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다섯을 일렀다.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법무대신 이하영과 마찰이 생기면서 지난한 과정 끝에 불복종 명령으로 파면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이준은 법복을 벗어야 했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평의원으로 활동 중이었다. ‘대한자강회’는 1905년 5월 이준과 양한묵(梁漢默) 등이 조직한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로, 독립의 기초를 마련하겠다는 목적으로 확대, 개편한 단체였다. 이준의 걸음이 빨라졌다.“국채보상운동을 지지하는 데서 그쳐선 아니된다. 전국적인 범국민운동으로 크게 일으키려면 서울에도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이준은 자신의 판단을 그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국채보상연합회의소(國債報償聯合會議所)’를 설립하고 소장을 맡아 모금운동을 이끌었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헌신의 시작이었다.#2.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부부의 열정이준의 뜻에 부인 이일정도 함께했다. 어려서부터 한문과 수학에 뛰어났던 데다 인품과 용모마저 빼어났던 이일정은 1905년 봄 서울 안현동(현 안국동)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부인전문상점인 ‘안현부인상점’을 연 개혁적인 여성이었다. 이준이 유배당했을 때 뒷바라지와 살림을 도맡아 하던 중 여성의 경제력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고, 이준의 동의를 얻어 살던 집까지 팔아 마련한 상점이었다. 심지어 상점 수익금의 일부를 일본에 공부하러 간 유학생들의 장학금으로 내놓았을 정도로 의식이 깨어있던 여성이기도 했다.그러니 만큼 이일정의 행보도 큼직큼직했다. 대안동에 ‘국채보상부인회’ 사무소를 설치하고 1907년 3월15일에는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를 발표했다.“국채로 하여금 나라가 태평치 못한 바, 여자라고 하여 국가의 넓고도 깊은 은혜를 입고서 애국성심이 없다면 신민의 도리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이에 같은 마음으로 협력이로소이다. 본회에서 의금을 내시는 부인은 본회의 기록에 올리고 이름과 금액을 신문에 공포하겠사오니, 전국 동포 부인은 동참하여 이 운동을 빛내주시기 바랍니다.”그리고 국채보상운동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다. 특히 전국을 돌며 강연을 하며 국채보상운동에 힘을 싣고 있던 남편 이준을 국채보상부인회 연사로 초청했다.“국채보상운동의 취지를 설명해주시고, 아울러 부인회에 도움이 될 말씀도 해주세요.”이준은 반려이면서 정치적 동지이기도 한 이일정의 부탁에 기꺼이 응했다. 이준의 일성이 부인들 앞을 크게 울렸다. “나는 만 가지 이상이 한 가지 실천만 못하다는 신념을 굳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인들은 지금 위대한 세기적 사업을 실천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동포는 2천만으로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그런데 국채보상운동이라는 이 거룩한 일을 남자들만이 한다고 하면 그 수는 반인 1천만밖에 되지 않습니다. 2천만 남녀가 한데 뭉쳐 심력을 다해야만 하는 바, 오늘 부인들이 궐기한 것은 국민된 자로서 당연 이상의 당연한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남녀는 평등입니다. 영원히 평등입니다. 위대한 인물의 뒤에 현모양처가 있었음은 지난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부인들이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한 것은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칭찬을 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여러분을 모욕하는 언사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국권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니 부인들은 국채보상의 일을 완전히 실천하십시오. 아니면 우리는 모두 일본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이 일본인의 노예로 사는 것을 차마 어찌 보겠습니까. 그렇게 되고서야 살아 무엇 하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라도 그것만은 막아야 합니다. 즉 반드시 국채를 우리 손으로 보상해야만 합니다. 국권을 되찾고 남녀평등의 복도 누리며 은혜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분투하기를 바랍니다.”#3. 떠나기 직전까지 국채보상운동 헌신국채보상운동의 성공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이준에게 어느 날 엄청난 소식 하나가 들려왔다.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6월에서 7월에 걸쳐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이준은 고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자신을 평화회의의 특사로 파견해줄 것을 제의했다. “을사늑약은 폐하의 의사가 아니라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되었습니다. 하니 을사늑약이 무효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도 요청하겠습니다.”고종이 동의하면서 이준은 헤이그특사단의 부사가 되어 1907년 4월22일 서울을 출발하기로 결정이 났다.“나라의 중한 일을 맡아 떠나는 것은 감사한 일이나 국채보상운동이 걱정이다.”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소장이었던 그가 헤이그로 떠나기전 국채보상운동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준은 국채보상운동에 하나라도 더 보탬이 되기 위해 내내 동분서주했다. 헤이그로 떠나기 전까지도 그는 쉴 틈 없이 움직였다. 특히 헤이그 특사 파견 이틀 전인 20일에도, 이두훈(李斗勳) 고령군의무소장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공문서를 보냈다. 당시 고령군의무소(高靈郡義務所)에서 모은 의연금의 액수가 대단하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다. “삼가 아룁니다. 이번 국채보상의 의무는 온 국민과 큰 관계가 있습니다. 광문사에서 부르짖은 1통의 편지가 전국을 고무시켜 운동을 인도하고 인심을 움직인 일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발기모집소가 곳곳에서 계속 일어나면서 정리가 필요했습니다. 국내에 회의소를 설치해 서울과 지방에 연락한 뒤 일을 법도에 맞게 통일해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는 13개도의 발기인과 각 사회가 합동으로 만들어 그 이름을 국내에 알리게 되었습니다.”이어서 고령군의무소를 향해 의연금 모금을 위한 활동 내용을 구체적으로 안내했다. “그 과정에서 고령군의무소에서 한마음으로 일을 하여 의연금을 많이 모집했다고 하니 누군들 공경하지 않을 것이며, 누군들 우러러 사모하지 않겠습니까? 제반의 규칙을 간행하여 알리고자 우선 국채보상연합회의소의 취지서를 전합니다. 살펴보신 후 고령군의무소에서 의연금을 낸 이들의 이름과 금액을 소상하게 알려주십시오. 월보(月報)를 간행할 때 넣고자 합니다. 아울러 모금액은 저희가 따로 안내해드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송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마지막 하나까지 꼼꼼히 챙기고 나서야 이준은 헤이그를 향해 떠났다. 하지만 그는 돌아오지 못했고, 공문서에서 밝혔던 월보 간행도 지켜보지 못했다. 이국에서 통한의 죽음을 맞이한 때문이었다. 다만 그가 남겼다는 유훈만이 대한제국 국민의 마음을 울릴 뿐이었다.“사람이 산다함은 무엇을 말함이며 죽는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살아도 살지 아니함이 있고 죽어도 죽지 아니함이 있으니, 살아도 그릇 살면 죽음만 같지 않고 잘 죽으면 오히려 영생한다. 살고 죽는 것이 다 나에게 있나니 모름지기 죽고 삶을 힘써 알지어라.”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이준 열사, 그 멀고 외로운 여정,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 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이준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로 떠나기 이틀 전, 국채보상연합회의소장으로서 보낸 공문서. 이두훈(李斗勳) 고령군의무소장에게 보낸 공문에는 의연금을 많이 모은 고령군의무소의 활동을 격려하고, 돈을 낸 사람의 이름과 액수를 일러 달라는 내용이 담겨있다.대구 중구 동인동에 자리한 국채보상운동기념관.이준 열사
2018.12.25
[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6> 안중근 의사와 가족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이는 안 의사에 대한 보편적 이미지가 대한제국 몰락의 원흉을 처단한 열혈 독립투사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 의사는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전개될 때 ‘국채보상관서동맹회’를 설립하고 지부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 국채를 갚기 위한 의연금 모집 독려에도 누구보다 앞장섰다. 특히 그의 가족들도 국채보상운동에 솔선수범했다. 당시 각종 교육사업으로 형편이 녹록지 않았지만, 안 의사의 부인과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 등은 주저없이 집안의 모든 패물을 내놓아 나라빚을 갚는데 보탰다.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시리즈 6편은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가는데 주력한 안중근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다.“1천3백만원 속히 갚아야만 한다 노예국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안중근, 평양 명륜당 연설에 감동 참석한 선비 의연금 400여원 모아“나라가 망하게 된 지경인데 패물을 아끼어 무엇에 쓰겠소” 부인과 집안여성 주저없이 내놔 지지자인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부인회’ 통해 적극적으로 참여 회원들 금은 모아 빚 갚기에 보태#1. 평양 명륜당에 피어오른 뜨거운 불꽃1907년 2월이었다. 안중근이 서른의 나이로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한 날이 1909년 10월26일이니, 역사적인 그날로부터 약 2년 하고도 8개월 전인 셈이었다. 대구 ‘국채보상회’ 본부의 서상돈 회장에게 긴급한 연락이 하나 전해져왔다. 북방의 안중근으로부터였다. 이때 안중근이 드러낸 뜻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국채보상회 관서지부를 개설코자 합니다.”즉 관서지방에 ‘국채보상회’지부를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관서(關西)란 한반도의 북서부, 구체적으로 현재의 평남·평북·평양·자강도 일대를 가리켰다. ‘국채보상회’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국채보상운동의 불꽃이 북방에서도 타오르기 시작했다는 데 외려 감사한 마음으로 환영할 일이었다. 이로써 1907년 3월1일, 평양에 ‘국채보상관서동맹회’가 조직되었다. 오대규, 허숙, 최경식, 김학선, 이기세, 정용기 등 19명의 발기인이 주도한 가운데 안중근이 지부장을 맡았다. 아울러 ‘국채보상관서동맹회’는 취지서를 발표해 지역민들에게 알렸다.“1천300만원을 속히 갚아야만 합니다. 이집트와 같은 노예국이 되어선 결코 아니됩니다.”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다가 파산에 이르면서 영국의 보호령이 된 상태였다. 영국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수에즈 운하 법인의 주식을 사들인 때문이었다. 말이 보호령이지, 식민지나 마찬가지였다.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니 그와 같이 되지 않으려면 국민을 향해 간절히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국채는 국민된 도리로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국채보상관서동맹회’는 일주일 뒤인 3월8일, 평양의 명륜당(明倫堂)에서 대대적인 모임을 개최하였다. 평양민회를 통해 소식을 접한 1천여 명의 선비들이 자리를 빼곡하게 채웠다. 이 자리에서 안중근은 국채보상에 대한 국민의 의무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였다. 스물여덟 살 열혈 애국청년의 뜨거운 목소리에 감화와 감동을 받은 이들이 주머니를 열기 시작했고, 무려 400여원의 의연금을 거두는 성과를 이뤘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인 형사가 안중근을 찾아와 따져 물었다. “회원은 몇 명이 모였고 재정은 얼마나 거두어졌는가.”안중근이 서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회원은 2천만명이요, 재정은 1천300만원을 거둘 것이니, 그로써 보상하려 한다.”대한제국의 전 국민이 회원이라는 뜻이었다. 일본인 형사가 비웃으며 욕을 내뱉었다. “한국인은 하등한 민족이다. 주제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안중근은 물러서지 않았다. “빚을 진 사람은 빚을 갚고 빚을 준 사람은 빚을 받는 것일 뿐이거늘, 거기에 무슨 불미한 일이 있어 이처럼 질투하고 욕질을 하는지 모르겠다.”일본인 형사가 붉으락푸르락 화를 내더니 안중근에게 달려들었다. 안중근이 외쳤다. “이처럼 별 까닭도 없이 욕을 본다면, 장차 2천만 대한 민족이 큰 압제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어찌 나라의 수치를 달게 받을 수 있겠는가.”싸움이 커질 듯하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말리고 나섰다. 씩씩거리며 돌아간 일본인 형사의 뒤에서 안중근이 주먹을 쥐었다. 이 이야기를 안중근은 훗날 ‘안응칠 역사’에 기록해두었는데, 여기서 안응칠은 안중근의 아명이었다. 아울러 역사학자이자 국어학자로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계봉우(桂奉禹)는 “안중근이 1907년 평양 명륜당에서 뜻있는 선비 천여 명을 모아 의연금을 크게 거두었으니, 이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충성이니라”라고 하며 국채보상운동에서 안중근이 어떻게 활약했는지를 널리 소개하였다. #2. 혼자서가 아니라 모두 함께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던 당시 안중근은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내막은 이러했다. 1906년, 안중근은 집안의 재산을 정리하여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워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에 집중해 있었다. 아울러 해체 직전의 ‘돈의학교(敦義學校)’까지 재설립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기도 했다. 돈의학교는 진남포 천주교회가 1900년 진남포에 세운 초등교육기관으로 1906년 즈음부터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던 상태였다. 게다가 2대 주임신부인 르레드 신부가 교육활동에 열의가 없어서 문을 닫기 직전이었던 바, 천주교 신자로 ‘도마’라는 세례명까지 있던 안중근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당연히 재정 문제가 부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안중근은 재정에 보탬을 주기 위해 평양에 가서 석탄광 채굴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일본인의 방해로 수천원의 손해만 보고 말았다. 그 와중에 국채보상운동 소식이 들려왔으니 안중근으로서는 애가 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무엇보다 국채보상운동은 신분과 성별과 나이는 물론이거니와 외국인과 내국인의 구별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범국민운동이었다.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나서야 했다. 이에 안중근은 가족들에게 일렀다. “국사(國事)는 공(公)이요, 가사(家事)는 사(私)이다. 국채보상관서동맹회 지부장인 내가 우리 가정과 더불어 솔선수범치 아니하고는 결코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없다.”이어서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서 벗어나려면 국채보상운동이 성공해야 한다. 그런데 국채보상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지원과 참여가 필수일 수밖에 없다.”그러면서 가족 가운데 여성들을 향해 덧붙였다.“나라가 망하게 된 지경인데 패물을 아끼어 무엇에 쓰겠소.”그러자 안중근의 부인은 물론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와 두 제수까지 기꺼이 나섰다. 특히 부인과 제수들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 등을 주저하지 않고 내어놓았다. 뿐만 아니라 안중근의 든든한 지지자이자 버팀목이었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佩物廢止夫人會)’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는 “1천만 여성이 1인당 2원 이상의 의연금을 내면 3천만원 정도가 될 것이니 1천만원은 나라의 빚을 갚고 1천만원으로는 은행을 설립하고, 1천만원으로는 학교를 설립합시다”는 취지 아래 설립된 여성 단체였다. 회원 모두가 금은, 패물 등을 일절 착용하지 않기로 규칙을 정하고 가지고 있던 패물을 팔아 국채보상의연금을 냄으로써 관서의 다른 지역에 미친 영향이 컸다. 안중근의 가족들이 의연한 내용도 바로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 제2회 의연’ 소식란에 실렸다.“안중근 모친 은지환 2쌍 넉 냥 닷 돈 쭝은 아직 팔리지 못하였음. 은투호 2개, 은장도 1개, 은귀이개 2개, 은가지 3개, 은부전 2개 등은 합이 십 종 넉 냥 닷 돈 쭝 대금 20원.”그야말로 집안에 있던 은붙이란 은붙이는 모두 나온 것이다. 이와 같은 안중근 가족의 적극적인 의연 소식은 곧바로 다른 관서지역에 널리 전파되었고, 이에 감동받는 주민들에 의해 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국채보상운동에의 동참은 안중근의 집안에서 그치지 않았다. 안중근이 재산을 털어 세운 학교도 함께 나선 것이다. 바로 삼흥학교로, 1907년 4월 중순 학교의 교직원과 학생들 또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교감 직을 맡고 있던 안중근 본인을 비롯해 교장 한재호, 총무 김경지, 찬성 고우정, 교사 김문규 등과 학생 27명이 나란히 이름을 얹은 것이다. 27명의 학생 가운데는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과 안공근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은 액수는 34원60전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그야말로 관서지방의 국채보상운동은 안중근을 중심으로 안과 밖이 혼연일체가 되어 돌아간 것이다. 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참고=독립기념관, 통권 제301호. 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 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30일자.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30일자에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와 안 의사의 부인, 제수들이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패물을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으로 내놓았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있다.
2018.12.18
[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5> 한국 근대여성운동의 시초가 되다
전국적인 범국민운동으로 확산된 국채보상운동의 불길은 여성들의 가슴에서도 활활 타올랐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남성에게 속한, 이른바 종속적인 존재에 불과했지만 그들도 대한제국의 같은 국민이었다. 일제에 나라가 넘어갈지도 모르는 위기 상황에서 성별의 구분은 무의미할 뿐이었다. 여성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특히 여성들이 가장 먼저 참여한 곳도 대구였다. 당시 대구의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시작으로 전국의 여성들은 다양한 단체를 조직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구 기생 앵무의 의연은 전국적인 화제가 되며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양반 부녀자는 물론 상인, 신여성, 기생, 삯바느질하던 여성까지 신분의 경계를 넘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국채보상운동을 여성이 주체가 된 최초의 근대적 여성운동의 시초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의 여성 참여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권 신장의 계기를 마련했으며, 일제강점기 여성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시리즈 5편은 신분과 사회통념을 깨고 나라빚을 갚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 여성들의 이야기다. 대구기생 앵무 의연금 100원이 기폭제 적게는 50전 많게는 10원까지 십시일반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는 격문을 공포국채보상운동 시작되자‘女 참여’촉구전국 45개 단체가 나라 위해 솔선수범 #1. 사회 가장 밑바닥으로부터의 바람대구의 국채보상의연금 수취소에 수수한 차림의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저는 앵무라는 기생입니다.”기생이라는 말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저는 천박한 신분일뿐더러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저 또한 이 나라의 국민입니다. 하여 1천300만원의 만분의 일이라도 돕고자 합니다. 듣자하니 지금까지 나온 의연금 가운데 최고 금액이 100원이라 하더이다. 아녀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더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은 저도 100원을 내겠습니다. 하나 남자들 중에 누구라도 천원, 만원을 낸다면 저도 죽기를 각오하고 따르겠습니다.”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서상돈, 김윤란, 정재학 등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러움과 감동 때문이었다. 이에 더 많은 의연금을 내기로 서로 간에 결의하였다.이 소식은 곧 ‘대한매일신보’에 대서특필되었고, 동료 기생들이 그 뒤를 잇기 시작했다. 먼저 대구의 권번기생 14명이 적게는 50전에서 많게는 10원까지 집단적으로 의연금을 냈다. 그리고 3월 초에는 평양 기생 31명이 “우리들이 비록 천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국민 된 의무는 같을지니 어찌 이것을 간과할 수 있겠습니까”면서 의연금 32원을 모금한 데 이어 다른 기생 18명도 50전씩 모금하여 기성회에 납부하였다. 실제로 평양은 기생들에 의해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부산의 기생들도 국채를 보상할 때까지 매월 의연금을 내기로 결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기생 39명이 비녀를 빼어 의연금으로 내었다. 특히 진주에서는 1907년 3월19일에 기생 부용이 동료들과 함께 ‘진주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를 구성하여 모금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사실 기생은 팔천(八賤), 즉 노비, 광대, 백정, 공장, 무당, 승려, 상여꾼, 기생을 이르던 여덟 부류의 천민 집단 중 하나였다. 한때는 일종의 예술인으로 대접받기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는 오로지 성적인 소비 대상으로만 각인된 상태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생들은 이러한 상황에 굴하지 않고 사회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을사늑약 이후에는 사회적인 책무를 인식하고 실천하는 존재로 거듭나기에 이르렀다. 사립학교, 야학, 고아원 등에 후원금을 전달하고 재해 발생 지역에는 구호품을 전달하는 등 자선사업과 구호사업에서 열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이다. 앞선 앵무의 경우에도 사회가 달라지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순수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고향인 성주 용암면이 홍수로 물난리를 자주 겪자 거금을 들여 제방을 만들어준 것이 그것이다. 이에 고향에서 공덕비를 세워주었는데, 그 비석을 일러 ‘앵무빗돌’이라 이름하였다. 나아가 1927년에 달성권번을 설립해 기생들을 조직화한 앵무는 1938년에는 팔순을 앞둔 고령의 몸으로 교남학교에 2만여원에 달하는 거액의 운영비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앵무는 비주류인 여성에 신분까지 하찮았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선각자였던 것이다. #2. 규방의 작은 촛불이 전국을 밝히는 불길로“우리는 규중에 거하는 일개 여자의 몸으로 삼종지도(三從之道) 외에는 간섭할 일이 없사오나,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 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다 하리오. 듣자오니 국채를 갚으려고 2천만 동포들이 석 달간 연초를 아니 먹고 거금을 모은다 하니 이 아름다운 일에 사람으로서 어찌 감동치 않으리오. 하나 부인들은 논의조차 되지 않는 바, 대저 여자는 나라의 백성이 아니며 천지만물이 빚은 소생이 아니리오. 다만 여자인지라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이 패물 말고는 없음이라. 태산이 흙덩이를 사양치 아니하고 하해가 가는 물을 가리지 아니하듯 적음으로 큰 것을 도우려 하나니 뜻이 있으신 부인 동포들은 많고 적음을 불구하고 정성껏 의연하여 국채를 깨끗이 없애는 데 힘을 보탭시다.” 1907년 2월23일, ‘남일패물폐지부인회(南一佩物廢止婦人會)’는 격문 ‘경고(敬告) 아(我) 부인동포라’를 공포했다. 남일동에 살고 있던 정운갑의 어머니 서채봉, 서병규의 부인 정경주, 정운하의 부인 김달준. 서학균의 부인 정말경, 서석균의 부인 최실경, 서덕균의 부인 이덕수, 김수원의 부인 배씨 등 7명은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고 여성들의 참여를 촉구하는 목소리를 격문에 담았다. 이들은 본인 소유의 은가락지, 은장도, 은가지, 은연화 등 총 13냥 8돈에 해당하는 패물을 의연하며 솔선수범했다. 남일패물폐지부인회의 의연은 지역 여성들에게 큰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대안동에 사는 강소사 부인은 남의집살이를 하는 궁핍한 생활 중에서도 품삯 4원을 의연하였다는 기사가 2월2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고, 양성환의 딸로 아산 백암 이씨 집안에 출가한 뒤 청상과부가 되어 두 아들을 가르친 부인의 편지가 ‘제국신문’에 실리기도 했다.“우국지사들이 국채를 보상하기 위하여 동포를 권유해 의금을 모집한다는 큰 소식을 들었습니다. 내 비록 규중의 여자이오나 또한 대한 국민의 한 사람인지라 감격의 눈물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하나 살림이 심히 가난한지라 겨우 20원밖에는 보내지 못합니다.”이러한 가운데 대구국채보상사무총회소의 의연금 모금에 참여한 134명 가운데 여성이 27명이었고, 패물을 내놓은 이는 12명이었다. 아울러 대구단연상채회사무소를 통해 ‘대한매일신보’에 도착된 부인 의연자 수는 무려 277명이나 되었다. 언론에서 이를 크게 알리면서 여성들의 참여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먼저 서울에서는 1907년 2월28일에 김일당, 김석자, 박희당 등을 중심으로 반찬값을 절약해 국채보상 의연금을 내자는 취지의 ‘부인감찬회(夫人減餐會)’가 결성되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또한 1907년 3월 초에는 상류층의 부인들로 이루어진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大安洞國債報償婦人會)’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취지서를 발표한 후 전국의 부인들에게 보냈다.“국채로 하여금 나라가 태평치 못한 바, 여자라고 하여 국가의 넓고도 깊은 은혜를 입고서도 애국성심이 없다면 신민의 도리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이에 같은 마음으로 협력이로소이다. 본회에서 의금을 내시는 부인은 본회의 기록에 올리고 이름과 금액을 신문에 공포하겠사오니 전국 동포 부인은 동참하여 이 운동을 빛내주시기 바랍니다.”기존의 여성 단체들도 국채보상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서울의 서울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진명부인회(進明夫人會), 대한부인회(大韓婦人會), 원일부인회 등이 국채보상의연금모집소를 설치하고 활동한 것이 그것이다. 지방은 지방대로 뜨거웠다. 도사(都事) 이현규의 대부인 하동정씨가 문중의 부녀자들과 더불어 ‘연안이씨일문부녀회(延安李氏一門婦女會)’를 조직한 뒤 식량을 절약하여 의연금을 내게 하였고, 1907년 4월에는 황해도 안악에서 ‘반지를 빼서 국채를 보상하자’는 취지로 ‘국채보상탈환회(國債報償奪還會)’가 조직되었다. 또한 부산 좌천리에서는 남성들보다 먼저 ‘부산항좌천리부인회감선의연회(減膳義捐會)’를 조직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나라가 있은 뒤에 백성이 있고 백성이 있은 뒤에 나라가 있으니, 외채 1천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우리 강토 삼천리를 보존키 어려움이라. 하나 남자만 국토에 사는 것이 아니라 여자도 생명을 지켜야 함은 매한가지이니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마음이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1907년 3월14일에는 평안남도 진남포 삼화항에서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佩物廢止夫人會)’가 결성되었다. “1천만 여성이 1인당 2원 이상의 의연금을 내면 3천만원 정도가 될 것이니 1천만원은 나라의 빚을 갚고, 1천만원으로는 은행을 설립하고, 1천만원으로는 학교를 설립합시다.”그리고 회원 모두가 금은, 패물 등을 일절 착용하지 않기로 규칙을 정하고 가지고 있던 패물을 팔아 국채보상의연금을 내었다.국채보상운동을 위해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활동한 여성 단체는 무려 45개에 이르렀다. 이는 남성들을 더욱 분발하게 함과 동시에 전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나아가 한국 근대여성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독립기념관 통권 제314호. 오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과정, 조항래. 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국채보상운동 여성기념비. 대구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에 자리한 기념비에는 부인회에서 공포한 격문 ‘경고(敬告) 아(我) 부인동포라’가 새겨져 있다.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는 나라의 위기 앞에서는 남녀구분이 없다며 국채보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작은 사진은 중구 진골목에 있는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중심이 되어 여성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한 곳이라는 표지석.폐교 직전에 몰렸던 교남학교를 살리기 위해 거금을 기부한 기생 앵무의 이야기를 다룬 조선민보 1937년 4월27일자 기사. 기생 앵무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당시에도 집 한 채 값인 거금 100원을 의연금으로 내 화제가 됐다.
2018.12.11
[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4> 국내 외국인과 해외동포의 의연
1907년 2월 대구에서 깃발을 올린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경제적인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답게 전국을 대단히 빠른 속도로 흔들어놓았다.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친일세력을 제외하고, 성별과 연령과 신분을 초월한 각계각층에서 자발적·경쟁적·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운동의 규모를 키운 것이다. ‘국채는 반드시 갚아야만 하는 온 국민의 의무’라는 공통된 인식과 ‘망국의 위기 앞에서 고작 3개월간의 단연(斷煙)쯤은 어려울 것이 없다’는 공감대가 동력으로 작동하였다. 이러한 확산에 기꺼이 뜻을 보탠 이들이 또 있었다. 바로 국내에 여러 가지 형태로 거주하고 있던 외국인과 해외동포였다. 시리즈 4편은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했던 국내 거주 외국인과 애끓는 심정으로 조국을 돕는 데 발벗고 나선 재외국민에 대한 이야기다. 수원 성공회교회 브라이들 신부 앞장신도·주민들 합세로 120원40전 모아뒤이어 용주사 승려도 뜻 함께하기로평안도선 천주교 프랑스신부들도 합류일본 유학생 등 재외동포 동참 이어져미국 교포단체 회원들도 의연금 출연연해주 지역 블라디보스토크서도 성원#1. 이방인들의 공감과 참여먼저, 경기지역에서는 수원이 미담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수원에 자리하고 있던 성공회교회에는 한글 이름 부재열(夫在烈)인 브라이들 신부가 1905년부터 관할 사제로 봉직하고 있었다. 지역민을 대상으로 한 선교와 봉사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그는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이에 그 내용을 미사 시간을 이용해 신도들에게 알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도움의 기도까지 올렸다. 이에 감화와 감동을 받은 신도와 주민들이 주머니를 열기 시작했다. 열기는 뜨거워서 곧 120원40전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모금되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근방에 위치한 용주사(龍珠寺)에도 마찬가지로 전해졌다. 승려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국채보상운동의 뜻에 힘을 얹기로 결정하고, 어려운 재정 상황에도 불구하고 12원이나 의연금으로 희사한 것이다.충북에서는 옥천군 창명학교(彰明學校)에 재직 중이던 일본인 교사 제광길(堤廣吉)이 도화선이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알게 된 그가 학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알다시피 나는 본래 일본인이다. 하나 지금은 대한제국의 영토 안에 살고 있으므로 당연히 대한제국을 위하여 처신할 것이다. 그것이 만국통의(萬國通義)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에 나는 오늘부터 단연 동맹에 참여하고자 한다. 보라, 제자들아. 너희들은 대한제국의 학생들이다. 하물며 일본인인 내가 이러하거늘 대한제국을 사랑하는 그대들의 마음이 어찌 나보다 못하겠는가.”그러면서 무려 5원을 수금소로 보냈다. 그러자 학생들이 속속 동참하였고, 학생들의 동참은 곧 주민들의 참여로 이어졌다. 평안도에서도 외국인의 참여 소식이 들려왔다. 영유군의 천주교당을 맡고 있던 프랑스 신부 명약일(明若日)이 국채보상회에 10원을 의연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순식간에 주변에 영향을 미쳤다. 외국인 신부의 의연에 은혜를 받은 고용인이 자신이 받은 품삯 가운데서 2원을 의연함으로써 지역의 분위기를 대번에 뜨겁게 끌어올린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같은 영유군 내의 이화학교(梨花學校)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일본인 교사 정류호빈(正柳好彬)도 선뜻 나섰다.“어찌 보면 남의 나라 일이니 나와 상관없다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동아시아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보면 나 또한 아주 남이라고만은 할 수 없지 않겠는가.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의연활동을 보고 있자니 감동을 주체할 수 없다. 나도 기꺼이 동참하겠다.”그러면서 2원을 의연하였다.이러한 외국인의 국채보상운동 동참은 일부 특정한 지역에서 일어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주요 도시를 비롯해 개항장 등 외국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난 현상이었다. 특히 청국 상인들의 국채보상운동 참여는 우리 상인들이 보다 더 분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은 ‘대한매일신보’나 ‘만세보’ 등의 언론에 그대로 공개되었다. 진심 어린 찬사가 이어졌음은 물론이었다. #2. 몸은 외국에, 마음은 고국에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뜻이 그러할진대, 국외에 거주하는 우리 국민의 뜻은 오죽했으랴.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전해들은 재외국민들은 애가 끓는 심정으로 하나가 되었다. 대구군민대회가 있었던 1907년 2월21일로부터 스물닷새가 지난 3월18일이었다.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800명의 유학생이 유학생총회를 개최하고 한자리에 모였다. “비록 우리가 타국에서 궁핍함에 시달리며 공부하는 처지이기는 하나,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대한제국의 국민으로서 우리의 의무입니다.”그러자 유학생들의 단체였던 태극학회(太極學會)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발언하며 지지를 표명했다. “이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구국운동입니다. 단연과 금주를 통해 비용을 절약하고, 이로써 국채를 보상하는 데 힘을 실읍시다.” 이때 유학생들이 작성한 취지서가 3월31일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재일본 한인유학생의 단연동맹취지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무릇 경제는 국가에 필요하고 긴급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법률만 가지고는 국가가 되지 못하나니, 법률이 고명한 로마제국도 경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망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와 같은 지경에 당하였거늘, 어찌 경제를 강구치 않을 수 있겠는가. 경제란 적은 것으로 큰 것을 궁구하여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유학생으로 말하면 거의 800명에 달한다. 매일 아침 담배 한 갑씩이라도 6전이요, 한 달에 한 사람이 1원80전이니, 100명을 한 달로 곱하면 180원이고, 1년을 통계하면 2천160원이며, 800명으로 계산하면 1년 담뱃값이 결코 적지 않다. 하물며 전 국민의 담뱃값임에랴. 음식물은 끊으면 죽기 때문에 안 될 일이나, 무익한 연초를 끊는 데야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니 일제히 단연하여 국채의 만분의 일이라도 도웁시다.”아울러 수금위원 3명을 선정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결과, 적지 않은 액수를 모을 수 있었다. 그들이 ‘황성신문사’에 보내온 의연금의 액수는 4월7일에 18원56전, 5월에는 29원49전이었다. 미국에서도 활발하게 움직였다. 먼저 2월24일,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등지에 사는 교포의 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 회원들이 ‘대한매일신보사’에 35원을 의연했다. 각각 독자적인 활동도 이어졌다. 한 달 뒤인 3월25일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 회원인 김성무·임치정·이교담 등이 의연금 수전소를 ‘공립신보사(共立新報社)’로 정한 후 ‘국채보상 의연 발기서’를 발표했다.“해외에 있는 우리 동포도 만분의 일일지언정 당연히 도와야 하는 바, 이에 뜻을 모아 발기하니 미주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힘을 다하여 보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흘 뒤인 28일에는 로스앤젤레스 교포 박형모·남궁염·신봉희·염달욱 등이 ‘국채보상 취지서’를 통해 뜻을 밝혔다. “외국에 나와 항상 애국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우리가 어찌 심상히 보고만 있겠는가? 이에 널리 알리니 형제자매는 보잘것없는 힘이라도 함께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아울러 ‘공립신보사’로 보낸 의연금을 신문에 게재하여 알릴 것과, 의연금이 모두 수합될 때까지 은행에 임시로 예치하였다가 국내로 송금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동시에 의연금에 대한 사무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황사용·강영대·신봉희·염달욱 네 사람을 수전위원으로 위촉하였다. 뿐만 아니라 5월7일에는 하와이 등지의 교포 김성환 등이 34원을 의연하였고, 27일에는 부인들이 격려의 ‘의연서’를 보내왔다. 연해주 지역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성원이 쏟아졌다. 4월20일에 교포 36명이 국채보상금으로 거둔 55원을 ‘국채보상기성회’로 보내온 것이다. 더불어 해외에서의 고된 생활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시도 놓지 않고 있는 고국에 대한 애틋함을 글로 적어 함께 보내왔는데, 구구절절 얼마나 절실하고 격렬한지 읽는 이마다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처럼 국채보상운동의 뜨거운 불길은 머나먼 바다를 거치는 동안에도 꺼지기는커녕 외려 더 활활 타올랐다.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국채보상운동 당시 국내 거주 외국인들의 의연활동 자료가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종교인·교사·상인 등 다양한 직업과 국적의 외국인들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다.대구시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는 해외에서 벌어진 국채보상운동 관련 내용이 전시돼 있다. 국채보상운동이 들불처럼 번지자 미국·일본·러시아 등에 거주하는 교포와 유학생 등의 의연도 줄을 이었다.
2018.12.04
[스토리텔링 2018] 최치원의 聖地<4·끝> 문경 희양산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언제나 흠칫 놀란다. 희양산(曦陽山) 하얀 봉우리. 냇물 따라 저 놀라운 산으로 드는 길, 봉우리는 이따금 모습을 감춘다. 고운 냇물과 소박한 마을에도 눈길 주라는 듯. 그러나 마음은 자꾸만 산마루를 더듬는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1천100여 년 전 지증대사가 처음 희양산을 만났을 때를 이렇게 전한다. ‘산이 신령하여 갑옷 입은 기사를 앞세운 듯한 기이한 형상이 있어…산이 병풍처럼 사방을 에워싸고 봉황의 날개가 구름 속에 치켜든 듯하고, 물이 백 겹으로 띠를 두른 듯하여 용의 허리가 돌에 누워 있는 듯하였다…하늘이 준 땅이니 승려의 거처가 되지 못한다면 도적의 소굴이 되리라.’ 곧 지증대사는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 희양산 남쪽 자락에 터를 잡는다. ‘기와 올린 처마를 네 기둥에 일으켜 지세를 진압하고, 쇠로 만든 불상 둘을 주조하여 절을 호위케 했으니’, 바로 봉암사(鳳巖寺)다. #1. 지증대사 적조탑비 태고의 모습으로 엎드린 산길이 너른 계곡과 함께 나아간다. 걸음은 물소리에 묻혀 둥둥 선계(仙界)를 떠도는 듯하다. 봉암사는 지증대사가 창건한 이래 지금까지 선(禪)을 수행하는 도량(道場)으로 일관해 온 선찰(禪刹)이다. 특히 1982년 조계종의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되면서 일반인의 접근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1년 중 단 하루 오직 석가탄신일에만 굳게 닫힌 산문의 빗장을 연다. 평소의 봉암사 길은 신경을 타고 흐르는 자연의 미세한 소리에도 꿈쩍 않는 적막이다. 일주문을 만난다. ‘희양산봉암사’ 현판이 걸려 있다. 본 적 없는 기둥 받침이 특이하다. 일주문은 봉암사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적어도 18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한다. 일주문을 통과하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 새겨진 커다란 바위가 다시 한 번 문을 연다. 그리고 천천히, 계류 너머 봉암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계곡물 위에 베개처럼 걸린 침류교(枕流橋)를 건너 압도적인 규모의 남훈루(南薰樓)를 지나면 봉암사가 환하게 펼쳐진다. 대사의 어린 시절·높은 행적·죽음당시 불교상황 등 광대한 내용담아 봉암사는 후삼국시대의 전란과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되었고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현재의 전각들은 대부분 근래의 것이다. 지증대사가 맨 처음 터를 잡은 자리에 봉암사의 중심전각인 대웅보전이 자리한다. 1922년에 세운 것이다. 앞에는 두 동의 요사채가 보림당(寶林堂)과 성적당(惺寂堂)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대웅보전 우측에 있는 극락전은 봉암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물 제1574호다. 정면 3칸 측면 3칸에 정중앙의 한 칸 내실을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방형의 사모지붕이 두 겹으로 올라 있고 탑의 상륜부처럼 절병이 얹어져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후백제 견훤을 피해 이곳에 숨어들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는 왜군들이 불타는 장작을 극락전 지붕 위로 던졌으나 장작개비만 탔다고 전해진다. 대웅보전 좌측에는 금색전(金色殿)이 자리한다. 금색인(金色人), 즉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이다. 금색전은 원래 봉암사의 대웅전이었다. 지금도 금색전 배면에는 대웅전 현판이 걸려 있다. 대웅보전을 지으면서 금색전은 옆으로 옮겨졌다. 해체하여 조립한 것이 아니라 통째로 들어 옮겼다 한다. 금색전 앞에는 보물 제169호인 삼층석탑이 서있다. 머리장식이 모두 완전히 남아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금색전 뒤편에 커다란 비각이 있다. 고운의 사산비명 중 하나인 ‘지증대사 적조탑비’와 지증대사의 사리탑(보물 제137호)을 모신 곳이다.지증대사는 헌강왕 8년인 882년에 입적했다. 고운의 글에 따르면 ‘12월18일 가부좌를 하고 말을 나누던 중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승려가 된 지 43년이요, 누린 나이는 59년’이었다. 왕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명을 내리고 885년 당에서 귀국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비문은 그로부터 8년의 세월이 흐른 뒤 진성여왕 8년인 893년에서야 완성되었고 탑비는 30여 년이 더 지난 경애왕 원년인 924년에 건립되었다. 비문에는 지증대사의 모습과 어린 시절의 이야기부터 그의 높은 행적들과 죽음,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불교계의 상황까지 광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지금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국보 제315호다. 고운은 지증대사의 죽음을 추모하며 이렇게 썼다. ‘썩은 선비의 붓으로 대사의 정상(情狀) 들추기 부끄럽구나. 발자취 빛나 탑에 이름 새길 만한데 재주가 모자라 글짓기 어렵기만 하네. 선열(禪悅)에 흠뻑 취하려거든 이 산중에 와 탑의 비명(碑銘) 보기 바라네.’ 청석(靑石)의 비신에 새겨진 고운의 글은 많이 희미해졌다. 봉암사의 가장 깊은 자리에 스님들의 수행처인 태고선원(太古禪院)이 자리한다. 1947년, 광복 직후의 극심한 혼란기에 성철 스님과 청담·자운·우봉 스님 등 네 분이 이곳에 모였었다. 그들은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 오직 부처님 법대로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운다. 이른바 ‘봉암사 결사’다. 이후 청담·행곡·월산·종수·보경 등 20여 명의 스님이 결사에 동참했고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수행의 근간을 확립하게 된다. 이것이 봉암사가 엄격한 수행 도량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게 된 시초다. 입구는 진공문(眞空門)이다.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이 문안에 들어오면 세상에서 알았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라. #2. 백운대와 야유암 다시 침류교를 건너 ‘마애불참배길’이라 적힌 소롯길로 들어선다. 숲은 깊고 그윽하고 계곡 길은 더없이 아름답다. 이곳에는 수달, 하늘다람쥐, 담비, 삵을 비롯한 주요 멸종위기종이 광범위하게 살고 있다고 한다. 봉암사 일대의 사찰림은 국가 산림유전자원보전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세속의 간섭 없이 영구히 참선 도량으로 가꿔가기 위한 봉암사 측의 건의였다. 일체의 개발행위는 물론 실질적인 사유권 행사를 거의 포기한 것이다. 거대한 반석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큰 바위 문을 지나면 하늘처럼 넓은 반석 가에 하늘을 이고 앉은 마애보살을 만난다. 높이 4m가 넘는 중장한 모습이다. 너른 암반은 두드리면 목탁 소리가 난다하여 옥석대(玉石臺)라 부른다. 마애보살 옆 바위를 통과하면 큼직한 바위들이 기립해 있다. 그중 한 바위에 ‘백운대(白雲臺)’라 새겨져 있는데 고운의 글씨라 전해진다. 어느 날 봉암사에 들었던 고운은 희양산 봉우리 아래에 흰 구름을 영원히 드리워 놓았다.산문을 나선다. 백운대 맑은 계류가 예까지 따라 나선다. 바위도 물도 넓고 부드럽고 투명하다. 계곡 아래로 내려선다. 희디흰 시루떡 같은 너럭바위에서 멀리 희양산 봉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본다. 고운 역시 쉬이 걸음을 재촉하지 못했다. 혹은 몇 밤을 이곳에서 노닐었는지 모른다. 그는 바위에 ‘야유암(夜遊岩)’이라는 글을 남겼다. 야유(夜遊)란 ‘시를 읊으며 밤을 즐긴다’는 뜻이다. 새겨진 글씨는 흐르는 물살 같고 스치는 바람 같은 형상이다. 야유암에서 북쪽으로 300m쯤 떨어진 석벽에도 그의 글씨라 전해지는 ‘고산유수명월청풍(高山流水明月淸風)’이라는 각자가 있다. 희양산 아래 바위에 새겨진 글귀고운 선생이 남긴 글씨라 전해져봉암사 초입에 ‘야유암 역사유적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봉암사는 일년에 한 번만 문을 열지만 야유암 역사유적공원은 언제나 열려 있다. 지증대사 적조탑비를 원형대로 재현한 모형이 있고 야유암과 백운대 각자, 창원의 월영대 각자 등도 재현되어 있다. 그리고 범해를 비롯한 고운의 시편들과 그의 발자취를 찾아온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고운의 시간과 그 이후의 시간을 집약해 놓은 곳이다. 지금 고운의 자취를 찾아 온 조선 후기의 대학자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노래를 듣는다. ‘밝은 달빛 쏟아지는 백석탄에는/ 밤새도록 물소리 계곡 울리네/ 고운 신선 가신 뒤로 오지를 않고/ 지금 나만 이곳에 홀로 노니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이구의, 최치원 문학의 창작 현장과 유적에 대한 연구, 2008. 한국의 명산대찰, 국제불교도협의회, 1982. 새벽에 홀로 깨어, 최치원선집, 돌베개, 2008.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문경 희양산 봉암사 산문을 나서 계곡 아래로 내려서면 흰 시루떡 같은 너럭바위에 ‘야유암(夜遊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최치원이 남긴 글인 야유는 ‘시를 읊으며 밤을 즐긴다’는 뜻이다. 야유암 뒤편 멀리 희양산 봉우리가 정면으로 보인다.최치원이 비문을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로 지증대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그의 행적과 죽음,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불교계의 상황까지 광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희양산 봉암사 침류교를 건너 ‘마애불참배길’을 따라가면 거대한 반석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큼직한 바위들이 기립해 있다. 그중 한 바위에 ‘백운대(白雲臺)’라 새겨져 있는데 최치원의 글씨라 전해진다.
2018.11.29
[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3> 신분을 초월한 의연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 언론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마른 들판에 불꽃 번지듯 무서운 속도로 전국에 확산됐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한데 모여 조직을 구성했고, 의연금을 모으기 위해 모두가 열정적으로 나섰다. 망국의 위기 앞에서 고작 3개월간의 단연(斷煙)이라는 간편하고 간단한 일도 못하겠는가 하는 공감대의 형성이었다.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시리즈 3편은 임금부터 관료, 부자, 선비, 시장 상인, 학생, 백정, 걸인까지 신분을 초월해 의연에 나선 이야기다.#1. 국권회복에 너도 나도 힘을 보태니국채보상운동이 가장 먼저 시작된 대구의 열기는 초기부터 끓어올랐다. 즉각적이면서 뜨거운 반응을 보인 곳은 서민들의 삶의 터전인 시장이었다. 대구군민대회가 열렸던 1907년 2월21일로부터 사흘 뒤인 24일 짚신장수, 콩나물장수, 술장수, 밥장수, 떡장수 등 서문시장의 영세 상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주머니를 열었다. 50~60전에서부터 1~2원에 이르기까지 애써 번 돈을 나라빚을 갚기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들의 얼굴에선 결기마저 흘렀다. 서민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추이를 지켜보기만 하던 선비들과 유지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식과 학행이 있은들 무엇하겠습니까. 실로 부끄럽습니다. 우리도 국채보상운동에 앞장서야 합니다.”그러던 2월26일이었다. 고종 황제가 칙어(勅語)를 내렸다. “우리 국민들이 국채를 보상하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단연하고, 그 값을 모은다 하거늘 짐이 어찌 담배를 피우겠는가. 짐 또한 단연하겠다. 아울러 국채보상운동을 격려하는 의미에서 영친왕(英親王)의 길례(吉禮, 가례)를 연기하도록 하겠다.”칙어가 무엇인가. 임금이나 황제가 몸소 나서서 전하는 말 아닌가. 그런 점에서 그날의 칙어에는 단연보상(斷煙報償)에 대한 고종의 절절한 진심이 배어 있었다. 이 소식은 당시 국채보상운동에 냉소적인 입장을 보이던 정부 대신들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참정대신을 지낸 김성근(金聲根)이 100원을 의연한 것을 필두로 고위관료들이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러한 사실을 신문에 그대로 게재했고 이는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2. 신분을 초월한 애국심 국채보상운동에의 참여는 나이, 성별, 신분, 지위 등을 모두 초월했다. 일선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관립영어학교’에서 교장, 학생, 사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전체가 뜻을 한데 모아 동맹했고, ‘시종무관부(侍從武官府)’의 사환병 30명 또한 단연 동맹 후 6원20전의 의연금을 모아 국채보상기성회로 보내왔다. ‘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의 교성대(敎成隊) 81명은 45원52전5리의 성금을 모아 보내왔는데, 그중에서 1등과 2등으로 졸업한 하영수와 한용학은 한 달치 월급을 모두 내놓아 귀감이 됐다. 하층민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서울의 한 양반집에서 잡일과 궂은일을 맡아하던 이들이 품으로 받은 삯 전부를 내놓은데 이어 한 노복은 단주까지 결심하면서 5원을 보내왔다. 더불어 서울에서 인력거를 모는 인부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북촌의 한 인력거꾼은 4원을, 생선전의 인력거꾼인 장승관 등 23명은 5원75전을, 서십자각 병문의 인력거꾼 17명은 3원40전을 의연금으로 전달했다. 특히 유해종이라는 82세의 노인은 병중에 짚신을 삼아 판 돈으로 비지를 사서 아내와 함께 근근이 연명하고 있으면서도 2원을 기성회에 보내와 마음을 울렸다. 뿐만 아니었다. 속속 답지된 의연금에는 아이들의 세뱃돈, 고아원 학도들의 심부름값 등도 포함돼 있었다.들불의 진원지인 대구는 보다 더 활발했다. 1907년 3월9일 대구민의소는 대구 서문 밖의 수창사(壽昌社)에 ‘국채지원금수합사무소’를 설치하고 의연금 모금에 나섰다. 이때 의연 행렬이 끊이지 않고 연일 줄을 이었다. 무리 중에는 행상은 물론 심지어 걸인까지도 있었다. ‘국채보상 단연금(斷煙金) 모집설명회’ 때는 더 분위기가 고조됐다. 당시 대구 지역의 단연회 관계자들은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한 책임을 다하려면 경상북도가 다른 지역보다 모범적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국채보상도총회(慶北國債報償道總會)’를 결성했다.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대구 최고의 거부 서상돈이 총무장이 되어 실무를 지휘한 ‘경북국채보상도총회’가 개최한 행사가 바로 ‘국채보상 단연금(斷煙金) 모집설명회’였다. 설명회 당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어 몇 십원, 몇 십전을 바치는 가운데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20원을 바친 백정 김창녕(金昌寧)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엽전 5냥을 바친 걸인이었다. 특히 두발에 장애가 있는 앉은뱅이 걸인은 구걸한 돈을 의연금으로 내면서 담뱃대를 부러뜨려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를 곁에서 본 사람들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부녀들은 은가락지는 물론이고 품에 가지고 다니던 장도(粧刀)까지 함께 풀어서 내밀었다. 그리고 서상하(徐相夏)가 서문시장 장날을 맞이해 단연회 회장 등과 함께 단연을 동맹하는 뜻에 대해 연설하고 군중을 향해 큰절을 올렸을 때는 이에 감화받은 백정 김시복(金時福)이 10원을 의연하기도 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4월 30일 대구의 ‘단연동맹회(斷煙同盟會)’에서 서상돈 1천원, 정재학 400원을 비롯해 전(前) 군수, 전(前) 승지 등 벼슬을 지냈던 유지들이 각각 100원이라는 거금을 의연해 회비를 분담했다. 지도층 인사들의 솔선수범은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의 경우 무려 41개 군에 ‘국채보상의연금수합소’가 설치돼 있을 정도였다. 이는 황성신문에 실린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윤웅렬(尹雄烈) 소장이 7월9일 대구에 와서 경북 41개 군의 국채보상금수전소 소장을 소집해 연설하고 11일에 서울로 돌아갔다’라는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3. 전국의 마을들이 일어나다1907년 8월까지 ‘국채보상취지서’를 발표하고 활동에 나선 전국의 단체는 100개 이상에 이르렀다. 모두 자발적인 참여였다. 이는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핵심 요인이었다. 또한 국채보상운동은 도·군·면의 마을 단위로 전 계층에 걸쳐 전개됐다. 정부 관리에서부터 학생과 군인에 이르기까지 금연과 금주에 나섰고, 나아가 음식을 줄이는 이들도 이었다.특히 국채보상운동이 확산되면서 나라 전체에서 미담사례가 이어졌다. 김천 지역의 계몽활동가인 이병재(李秉宰), 김안서(金安瑞), 김순서(金順瑞) 등은 국채보상회를 조직한 후 주민들의 동참을 간절하게 호소했다. 이들은 손자와 손녀를 포함한 온 가족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생계를 꾸려가는 일조차도 뒤로 미루었을 만큼 운동에 전념했다. 또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던 남보(南甫)라는 노파는 술을 팔아 5원이라는 거금을 의연해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김천의 유지들로 구성된 단연회에서도 1차로 200원을 황성신문사에 기탁하고, 2차로 202원50전과 은반지 등을 기탁해 관심을 모았다.충남 지역에서는 아산에서 훈훈한 소식이 자주 들려왔다. 과부 양소사(梁召史)가 처음으로 의연금을 내놓은 데 이어 둔포에 거주하는 일신소학교(日新小學校) 교직원과 학생들이 13원40전을 의연하고, 이서면의 문지사숙(文旨私塾)도 이에 동참했다. 특히 안봉삼(安鳳三)이라는 가난한 노동자의 의연은 감동적이었다. 그는 학생들의 의연 소식에 감동을 받은 터였다. 이에 일하고 받은 임금 80전을 아내에게 맡기고는 며칠 뒤 의연을 하기 위해 다시 달라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내민 것은 80전이 아니라 거금 2원이었다. 그는 놀라며 “이리 큰돈이 대체 어디서 난 것이냐”며 아내에게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내가 삭발한 후 머리카락을 팔아 보탠 금액이었다. 이 소식은 주위에 널리 알려졌고, 주민들의 동참을 유도하는 기폭제가 됐다.황해도에서는 은율군(殷栗郡)의 홍진삼을 비롯한 주민들이 ‘국채보상 발기문’을 공포했고, 안악군(安岳郡)의 김응화 등도 취지문을 발표해 주민들의 관심을 끄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살림을 팔거나 머리카락을 팔아 의연에 동참하는 부인도 있었다.평안도에서는 국채보상회를 조직한 임기반의 아내 최신실이 은장도를 내놓았다. 그녀가 한 말이 남편 임기반의 마음을 울렸다.“모든 사람은 천부적인 자유와 국가적인 관념이 있습니다. 그런 만큼 부녀자도 의무를 실행해야 합니다.”함경도 단천(端川)에서는 ‘국채보상가’를 지어 알림으로써 의연활동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그야말로 신분을 초월한 의연이 거대한 물결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 과정, 조항래. 대한제국기 경북 김천지역 계몽운동 전개와 성격, 김형목. 충남지방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양상과 성격, 김형목. 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임금부터 관료, 부자, 선비, 시장 상인, 학생, 백정, 걸인까지 신분을 초월한 의연행렬이 줄을 이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는 당시 국민들의 의연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이 전시돼 있다.두발에 장애가 있는 앉은뱅이 걸인도 구걸한 돈을 국채를 갚는 데 보태라며 내놔 주변을 놀라게 했다.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는 의연에 참여한 걸인의 모습을 재현해 그때의 감동을 전하고 있다.
2018.11.27
[스토리텔링 2018] 최치원의 聖地<3> 의성 고운사
구름을 타고 오른다는 등운산(騰雲山). 산의 서쪽 산자락은 연꽃이 반쯤 피어난 형상이다. 꽃 가운데에서는 샘이 솟아 안망천(安望川)으로 흐른다. 거기 샘솟는 꽃자리에 고운사(孤雲寺)가 자리한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 해동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 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원래 절집의 이름은 고운사(高雲寺), ‘높은 구름’의 절집이었다. 산을 오르는 길은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의 솔굴이다. 소나무 굽은 둥치를 부여잡고 아기단풍이 고개 내밀고, 길섶의 얕은 계곡엔 물소리가 조용하다. 1천여 년 전의 어느 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경주를 떠나 경상도 북쪽으로 향했다. 그는 영천과 신녕을 지나고 군위를 거쳐 의성의 빙산에 들었다가 이곳으로 왔으리라 여겨진다. 그때도 고운사 가는 걸음마다 솔향이 났을까. 혹 구름을 타고 올랐을까. 벼슬을 내려놓고 세상을 떠돌던 그는 고운사에서 마음을 비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갈등 없는 화목한 세상 이상으로 여겨도교 사상이 담긴 가운루·우화루 지어이후 도선 국사가 일으켜 세운 고운사고려·조선시대 거치며 수차례 중창돼왜란때는 사명 대사의 승군 전방기지#1. 고독한 구름, 고운사산문에 든다. ‘등운산 고운사(騰雲山 孤雲寺)’ 현판을 단 일주문 속에 천왕문이 들어앉았다. 이곳에 도착한 최치원은 한동안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여지(如智)·여사(如事) 스님과 함께 두 채의 건물을 지었다.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다. 천왕문을 지나면 오래된 석불들을 모신 자그마한 고불전 위로 커다란 가운루가 출항하는 배처럼 둥실하다. 가운루란 ‘구름을 타고 앉은 누각’이라는 뜻이다. 곧 신선의 세계다. 원래 이름은 ‘가허루(駕虛樓)’였다. ‘허공을 담은 가마’라는 뜻이다. 가운루도 가허루도 모두 도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 뒤를 우화루가 따른다. 번데기가 날개 달린 나비로 변하는 것이 우화(羽化)다. 훗날 소동파는 ‘훌쩍 세상을 버리고 홀몸이 되어 날개를 달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것만 같다(飄飄乎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고 했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은 사람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감을 이르는 도교적 표현이다.최치원은 통합의 사상가라 불린다. 유(儒)·불(佛)·도(道)에 대해 그는 ‘길은 각각 다르나 도착지는 같다’고 했다. 그리고 모든 사상·종교·집단이 대립과 갈등 없이 서로 어울려 화목하게 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각 사상의 특징을 명확하게 인정하면서도 그 개별성보다는 보편적인 성격을 종합함으로써 거국적인 사상적 통합을 시도했던 것이다. 신라의 국운은 날로 기울고 있었다. 그의 사상적 통합은 분산된 힘을 응집하고 민족공동운명체로서의 집단의식을 일으켜 시대적인 현실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가운루와 우화루는 도교 사상이 담긴 이름이다. 부처의 마음과 유교의 정신, 도교적 사상을 넘나들며 그가 품었던 이상 세계로의 간구 또한 깃들어 있다. 최치원이 거쳐 간 이후 ‘높은 구름(高雲)’을 뜻하던 고운사(高雲寺)의 이름은 그의 자(字)를 따 ‘고독한 구름(孤雲)’을 의미하는 고운사(孤雲寺)가 되었다.#2. 가운루와 우화루가운루는 등운산 계곡을 가로질러 다리처럼 놓여 있다. 계곡에 기둥을 세워 누각을 떠받치는 모양이다. 가운데 깊은 계곡에는 돌기둥을 세우고 가장자리로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놓아 주춧돌로 삼았다. 계곡의 생김대로 초석을 놓은 것이다. 그 위에 나무기둥을 올려 균형을 맞추고 누마루를 깔았다. 기둥은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이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다. 서향인 전면과 남북의 양 측면은 판벽(板璧)으로 막았는데, 전면의 중앙 3칸은 가운데 설주가 있는 쌍여닫이 판창문으로 열었고 양측에는 판문을 달아 누에 들 수 있게 했다. 동쪽을 바라보는 배면은 계자(鷄子)난간을 둘러 개방하였고 누각을 오르내리는 나무계단을 놓았다. 누마루는 통 칸으로 처리해 우물마루를 깔았다. 기둥머리에 새 날개처럼 뾰족하게 생긴 부재를 익공(翼工)이라 한다. 익공이 하나면 초익공, 둘이면 이익공이다. 가운루는 네 모서리 기둥만 이익공, 나머지는 초익공이다. 이는 흔치 않은 형식이라 한다. 이 건물은 후대에 여러 차례 중수되면서 부분적인 변형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전체적으로 보아 조선 중기의 양식이 지배적이며 숙종 때인 1676년과 1717년의 중수기가 남아 있다. 옛날에는 ‘누각에 서면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찬란한 산들과 구름의 바다를 접하는 신선의 세계’라 했다. 계곡은 대부분 메워져 옛 풍취는 없지만 지금도 누각에 오르면 하늘가에 걸린 등운산 봉우리가 대해의 섬처럼 보인다. 가운루는 그곳을 향해 항해하는 커다란 배처럼 느껴진다. 가허루가 언제 가운루로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운루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누각 바깥 처마에 걸린 행초서 글씨는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두 번의 내란을 겪고 사랑하는 노국 공주마저 잃은 왕은 전국을 떠돌다 이곳으로 왔다. 그의 글씨에는 구름에 몸을 싣고 세상사를 잊고 싶어한 공민왕의 심경이 담겨 있을 것이다. 우화루는 가운루의 북동쪽에 위치한다. 하나의 사찰에 두 개의 누각은 드문 일이다. 우화루는 정면 6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운루를 향하고 있는 정면은 2층 누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배면은 누마루와 극락전 마당이 접해 있다.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했다. 우화루 역시 여러 번의 개창과 중수를 거쳤다. 기록을 보면 1898년 포운(抱雲)과 혜은(惠隱)이 여러 전각과 더불어 중수했으며 2004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누각 안에는 우화루(雨花樓)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다. ‘꽃비가 내린다’는 뜻이다. 부처가 설법하자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법화경의 가르침에서 온 이름이다. 불교적 의미로는 환생을 뜻한다. 우화루는 현재 조용히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다. 그것은 꽃비를 맞으며 세상을 잊는 시간이다. #3. 1천여 년이 흐르는 동안고운사는 최치원이 머물다 간 이후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크게 일으켜 세웠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조에 걸쳐 여러 번 중창되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사명 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삼았다. 우화루 곁의 종각을 지나면 고운사의 중심 법당인 대웅보전이 장쾌하다. 1992년에 신축한 건물로 계곡을 메워 너른 앞마당을 펼쳐 놓았다. 대웅보전의 왼쪽은 극락전, 뒤쪽은 약사전, 오른편 돌계단을 오르면 나한전이다. 극락전은 30여 년 전만 해도 고운사의 큰 법당이었다. 약사전에는 보물로 지정돼 있는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나한전은 조선 중기의 건물로 앞뜰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약사전의 부처님과 나한전 앞의 석탑은 도선 국사가 조성한 것들이다.약사전 맞은편에는 연수전(延壽殿)이 자리한다. 영조 때인 1774년에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帖)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한 전각으로, 1902년에는 고종의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새로 지었다. 나침반의 바늘이 꼼짝하지 않을 정도로 기가 센 자리라 한다. 경내의 가장 깊은 곳에는 명부전이 자리한다. 약 300년 전에 세워진 법당이다. 세상을 떠나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이렇게 묻는다고 한다. “고운사엔 다녀왔는가?”일제강점기 동안 고운사는 조선 불교 31총본산의 하나였다. 광복 이후 사찰의 재산이 망실되고 당우는 쇠락했지만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 인근의 크고 작은 60여 사찰을 거느리고 있다. 고운사 큰스님의 처소 이름은 ‘고운대암(孤雲大庵)’이다. 암자의 기둥에는 고운사의 한 수도승이 쓴 주련이 걸려 있다. ‘고운사 큰 암자에 가까이 한지 어언 백년 / 고락을 다한 가운데 오래도록 살아왔네 / 풍광도 형체도 무상히 흘러가는데 / 태평한 큰 성품으로 해탈을 이루었네.’ 수도승은 해탈을 이루었는가. 벼슬을 내려놓고 세상을 떠돌던 최치원은 고운사에서 마음을 비웠다고 한다. 그러나 은거의 유랑 중에도 그에게는 신라에 대한 변함없는 자부가 있었다. 그는 다시 산문을 나섰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 현대불교신문. 이구의, 최치원 문학의 창작 현장과 유적에 대한 연구, 2008. 이재운, 고운 최치원의 사상과 역사인식 연구, 1996.681년 의상 대사가 지은 고운사는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고찰이다. ‘높은 구름’을 뜻하는 고운사(高雲寺)로 불리다가 최치원이 거처간 뒤부터 그의 자(字)를 따 ‘고독한 구름’을 의미하는 고운사(孤雲寺)로 불리고 있다.최치원이 고운사에 머물며 지은 가운루. 계곡을 가로질러 지은 모습이 마치 둥실 뜬 배처럼 보인다. 옛날에는 ‘누각에 서면 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찬란한 산들과 구름의 바다를 접하는 신선의 세계’라 했다.최치원이 가운루와 함께 지은 우화루.
2018.11.22
[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2> 언론의 대대적인 캠페인과 전국조직 구성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된 범국민운동이다. 특히 순식간에 전국에 확산된 데에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1907년 2월21일 대구군민대회가 열릴 때부터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해 황성신문·제국신문·경향신문·만세보 등은 보도와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또 의연금을 직접 접수하고 국채보상운동 단체들의 취지서와 의연금 납부자 명단을 게재했다. 이 과정에서 신문사 직원들도 단연을 결심하고 의연금을 내기도 했다. 국채보상운동을 국난극복을 위해 펼친 최초의 언론캠페인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론의 적극적인 지원 가운데 국채보상운동은 날로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전국적인 조직이 구성되어, 국채보상운동은 체계를 갖추어 나갔다.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시리즈 2편에서는 언론의 대대적인 캠페인과 전국적 조직을 구성한 당시의 이야기를 되짚어본다. #1. 검은 활자의 붉은 힘국채보상운동 확산을 위한 대구군민대회가 열린 바로 그날, 1907년 2월21일이었다. ‘대한매일신보’에 피 끓는 글이 실렸다. 국채보상운동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 광문사(廣文社)의 김광제(金光濟)와 서상돈(徐相敦)이 작성한 취지문이었다.‘지금은 우리들이 정신을 새로이 하고 충의를 떨칠 때입니다. 국채 1천300만원은 우리나라의 존망에 직결된 바, 이를 갚으면 나라의 보존이요, 갚지 못하면 나라의 망함이니, 이는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하나 현재의 국고 능력으로는 도저히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정녕 갚지 못한다면 그 때는 이미 3천리 강토가 내 나라 내 민족의 소유가 아니게 될 것이고, 국토란 한 번 잃으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어집니다. 그런데 수고롭지도 않고 손해 보는 일도 없이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2천만 동포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각 한사람마다로부터 대금 20전씩을 매달 거둔다면 1천300만원을 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광문사 김광제·서상돈의 취지문대한매일신보에 실려 ‘큰 반향’황성신문 등 타언론도 속속 동참신문사 사내 보상금 모금처 설치기자도 담배 끊고 의연금 내기도이때 설립된 보상소가 무려 27곳연합회의소 만들어 한곳으로 통합돈관리 위해 지원금총합소 만들어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관심은 대한매일신보뿐만 아니었다. 다른 신문도 연이어 지지를 보냈다. 나흘 후인 2월25일, ‘황성신문’이 서울에서 설립된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의 취지서를 게재한 데 이어, 사설 ‘단연보국채(斷煙保國債)’를 실어 국민들이 스스로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특히 ‘대한매일신보’는 연이어 국채보상운동 기사를 쏟아냈다. 2월27일에는 ‘국채보상기성회 취지서’를, 28일에는 ‘국채보상에 대하여 동포에게 경고함’이라는 심의철(沈宜哲)의 순한글 기고문을 신문 1면에 게재해 힘을 실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의 회계 담당이던 심의철은 검은 활자를 통해 이렇게 외쳤다.‘국채보상에 대해 백성들 중 일부는 “그 돈을 내가 썼나? 한 푼이라도 구경이나 해봤나? 왜 우리에게 물어내라고 하는가? 그 많은 차관은 모두 어디에 썼는가? 만일 우리들이 추렴하여 물어준다면 이에 재미 들린 이들이 또 차관을 들여올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이는 분명 잘못된 생각입니다. 정녕 나라와 토지를 빼앗기고 나면 우리가 어찌 생활할 수 있겠습니까? 대한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 가서 힘을 쓸 수 있겠습니까? 담배를 끊고 술도 끊은들 좀 어떻습니까? 비단 옷 입던 사람은 무명 옷을 입고, 밥 먹던 사람은 죽을 먹고, 타고 다니던 사람은 걸어 다니고,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빚을 갚으면 좀 어떻습니까? 그래봐야 아무런 어려움도 부끄러움도 해로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쉬운 일 하나도 못해서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다면 그 이후의 우리 모양새는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가 하려는 일은 죽는 것보다는 쉽습니다. 성공하면 천하만국에 빛날 것이며 국권도 곧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2천만 동포를 모두 염하여 천 개의 무덤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같은 날인 28일, ‘만세보(萬歲報)’도 주장을 이어나갔다. ‘국채상환 의금모집’이라는 논설로 국채보상운동을 지원하자는 뜻을 밝힌 한편, 광고란에 ‘국채보상서도의성회(國債報償西道義成會) 취지서’를 싣고 의연금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또 ‘제국신문’은 28일부터 3월4일까지 닷새간에 걸쳐 ‘국채보상금 모집에 관한 사정’이라는 논설을 연일 게재해 힘을 보탰다.대구에서 일어난 불꽃에 중앙의 신문들이 바람을 불어넣자, 전국 각지에서 호응의 불길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특히 신문사들은 사내에 국채 보상금 모금처를 설치했고,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의연금이 신문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충남 아산군에 사는 한 부인의 경우에는 ‘제국신문’에 20원을 보내면서 동봉한 편지에 이렇게 썼다.‘제가 비록 빈곤한 가정의 주부이기는 하나 국채보상운동에 기꺼이 참여하겠습니다.’또 김봉훈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우리 다섯 식구의 뜻을 모았다”며 다섯 식구당 1원씩 계산한 금화 5원을 대한매일신보에 보내왔다. 이러한 가운데 대한매일신보 사원들이 일제히 담배를 끊어 의연금을 내기도 했다. 특히 신문사들은 사내에 답지한 의연금과 명단을 신문에 상세하게 게재했고, 국채보상운동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널리 알렸다. 동시에 어떤 의혹도 일어나지 않도록 체계적으로 관리했다.특히 신문뿐만 아니라 ‘대한자강회’에서 출간한 정치잡지 ‘대한자강회월보’를 비롯해 서우학회 기관지인 ‘서우’, 종합지 ‘야뢰’, 구국계몽지이자 국채보상운동 기관지인 ‘대동보’ 등의 잡지도 국채보상운동이 확산되는 데 큰 힘을 실었다. 당시 국채보상운동이 국난극복을 위한 언론캠페인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이유다.#2. 유기적이고 조직적으로 단결하라언론의 대대적인 캠페인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러한 가운데 전국적인 조직이 구성됐다. 가장 먼저 조직된 단체는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였다. 1907년 2월22일, 명망 있는 유지 25명의 발기로 시작된 ‘국채보상기성회’는 전국 각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국채보상운동을 총괄하기 위해 설립됐다. 국채보상기성회 설립은 국채보상운동의 합법성과 운동의 체계를 갖추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국채보상기성회는 설립과 동시에 곧바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취지문을 싣고 국민들의 동참을 촉구했다.‘동포여,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를 바랍니다. 아! 국가가 망하면 국민도 망하는 바, 우리 동포여 열심을 다하며 뒷날을 기다립시다. 하여 국채를 깨끗이 청산한 연후에, 세계 제일의 향기롭고 좋은 담배 수천만 닢을 구입하여 맑은 날의 흥취를 돋우어봄이 어떠하겠습니까.’특히 국채보상기성회는 의연금을 모으는 곳으로 보성관(普成館), 대한매일신보사, 야뢰보관(夜雷報館) 임시사무소, 상동청년학원 사무소, 유한모의 조동건재약국, 서점인 김상만의 광학서포, 고유상의 서포, 주한영의 서포 등 8개 장소를 지정하고 접수를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서울에 살고 있던 또 다른 59명이 뜻을 모아 ‘국채보상중앙의무사’를 설립했다. 국채보상중앙의무사는 ‘황성신문사’를 의연금보상소로 정하고 모금운동에 나섰다.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도 지역별 국채보상회가 설립되면서 의연금을 모으는 등 분위기가 고조됐다. 이때 설립된 보상소가 무려 27곳이나 됐다.그러던 4월1일이었다. 국채보상기성회 사무소인 보성관에 결기에 찬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국채보상전국연합운동’의 첫 임시회합을 위한 발걸음이었다.“국채보상운동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확산시키려면 성숙한 고민이 필요합니다.”“옳습니다. 무엇보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국채보상회를 일괄 통솔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회의는 다음날에도 이어졌고,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됐다.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국채보상회를 통솔하는 기구의 명칭을 ‘국채보상연합회의소’로 정할 것과 조직을 책임질 임원을 선출했다. 초대 소장으로 이준, 고문에 이도재, 도총무에 장지연, 총무에 양기탁·안창호·이동휘, 부총무에 김광제, 평의장에 박은식, 부평의장에 이갑, 간사에 이종일·박용규·양한묵·서병규·이면우·김인식 등이 뽑혔다. 이준은 온 국민이 읽을 수 있게끔 국문으로 된 취지서를 작성해 4월4일에 발표하고 국민들의 참여를 호소했다.한편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의연금 관리를 위한 통합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논의 끝에 4월8일 의연금 관리를 위한 통합기구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가 대한매일신보사 내에 설치됐다. 소장에 윤웅렬, 부소장에 김종한, 재무감독에 박용규, 감사에 이강호·이면우, 회계에 양기탁·정지영, 평의원에 조존우, 검사원에 김광제가 임명됐고, 이들을 중심으로 의연금에 대해 철저한 수합과 관리가 이루어졌다. ‘국채보상연합회의소’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는 국채보상이라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설립되었고 임원도 겹치는 인물이 있었지만 엄연히 다른 단체였다. 염려하는 여론이 서서히 발생하기 시작했다.“전국적인 범국민운동이 두 단체로 나뉘어져 시행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합니다.”“그렇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분열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이에 두 단체는 김광제와 이강호를 대표로 세워 해결책 모색에 들어갔다. 회합이 시작되었고 협의는 곧 이루어졌다. ‘국채보상연합회의소’에서는 국채보상운동의 지도업무와 권장업무를 총괄하고,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에서는 의연금에 대한 수합과 관리를 전담하기로 결론을 지었다. 국채보상운동이 범국민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는 물론 서서히 체계가 잡히고 있었다. 주춧돌이 놓이고 기둥이 서면서 국채보상운동의 온전한 모양새가 갖춰지기 시작했다.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 國債報償運動과 言論의 역할, 정진석. 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국채보상운동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산된 데에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특히 대한매일신보를 비롯해 황성신문, 제국신문, 경향신문, 만세보 등의 신문사들은 보도와 논설을 통해 국채보상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전 국민의 동참을 호소했다. 대구 중구 동인동 국채보상운동기념관에서는 당시 국채보상운동을 다룬 주요 신문들을 볼 수 있다.
2018.11.20
[스토리텔링 2018] 대구의 자부심 국채보상운동<1> 광문사에서 불꽃이 피어나다
국채보상운동 역사의 시작과 중심은 바로 대구다. 일제가 강제로 빚지게 한 국채 1천300만원을 갚기 위해 시작된 국권회복 운동으로, 1907년 1월29일 대구 광문사에서 첫 물꼬를 텄다. 그해 2월21일 대구군민대회는 국채보상운동의 서막을 알리고 전국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됐다. 특히 국채보상운동은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비롯한 여성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특징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운동으로서의 의미도 있다. 일제의 핍박으로 끝내 좌절됐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밑거름이 되었고, 1997년 IMF 환란 시기에는 금모으기 운동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대구의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 과거의 역사지만 국채보상운동은 지금도 대구의 자부심이자 후손들에게 전해줄 미래자산이다. 이는 대구만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총 8회에 걸쳐 ‘대구의 자부심! 유네스코가 인정한 국채보상운동’ 시리즈를 연재한다. 시리즈는 국채보상운동의 역사성과 가치를 재조명하고, 대구는 물론 전국을 무대로 펼쳐진 국채보상운동 스토리를 소개한다. 시리즈 1편은 국채보상운동의 물꼬를 튼 광문사에 대한 이야기다. #1. 대한제국을 뒤덮은 먹구름“차관이 필히 화를 초래하리라. 종내는 이 나라가 악의 손에 떨어지고야 말리라.” 차관(借款)이 무엇인가. 쉽게 한마디로 말하자면 빚, 그것도 다른 나라에서 들여오는 엄청난 규모의 빚이었다. 그런데 그 빚을 일제가 대한제국을 상대로 시도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경제를 파탄에 빠트려 식민지화를 앞당기려는 속셈이었다. 이에 조정의 염려가 날로 자심해지고 백성의 근심 또한 커졌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차관을 도입하기에 이른 것이다.차관 공여의 당사자인 일제는 이미 1894년 청일전쟁 당시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차관 공여를 적극적으로 해오고 있었다. 두 차례에 걸쳐 각 30만원과 300만원의 차관을 성립시킨 것이다. 이러한 공세는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이후 고문(顧問)을 파견해 간접통치를 시작하면서 더욱 노골화됐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대한제국의 재정을 일본 재정에 완전히 예속시키고자 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식민지 건설을 위한 사전 준비의 일환이었다.광문사 사장 김광제·부사장 서상돈사내모임 광문사문회 특별회서 제안회원 만장일치로 동참 2천여원 모아1907년 대구민의소서 ‘단연회’ 구성북후정에서 모금 위한 군민대회 개최 이에 따라 일제는 1905년에 대한제국의 문란한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목으로 화폐정리채 300만원을, 채권 상환 등을 이유로 200만원의 차관을 연이어 들이도록 한 데 이어 화폐개혁에서 비롯된 금융공황을 구제한다는 명분 아래 150만원을 또 들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1906년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고부터는 교육제도의 개선과 금융기관의 확장정리 등 갖은 명목을 동원해 무려 1천만원에 달하는 고이율의 차관 도입을 강요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1906년까지 고작 2년여 사이에 원금 1천650만원에 달하는 채무와 해마다 늘어나는 상당한 액수의 이자를 떠안게 되었다. 비록 1907년 2월에 약 350만원을 정리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1천300만원(현재기준 약 3천100억원)의 국채는 당시의 국가 재정으로서는 도저히 갚을 길이 없는 액수였다. 실제로 1천300만원은 대한제국의 1906년 1년치 예산에 버금가는 액수였다. 그야말로 나라 땅 전체를 일본에게 빼앗기게 될 절박한 처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바람 앞에 등불이 따로 없었다. 대한제국의 백성으로서는 차관의 족쇄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2. 대구에서 피어난 불꽃 1907년 1월29일, 대구의 광문사(廣文社)에 굳은 표정의 인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광문사는 대구·경북지역의 지식인, 자산가, 관료 등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출판사 겸 인쇄소였다. 각종 실학서에 대한 저술과 발간, 도내 각 학교에 사용될 교과서 출간, ‘월남망국사’를 비롯한 각국 망국사 편찬 등이 핵심 업무였다. 아울러 광문사는 신학문을 도입하여 자강의식을 일깨우는 데도 앞장섰다. 특히 사내에 ‘광문사문회(廣文社文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독서와 시작(詩作) 교육 등을 통해 애국계몽운동 또한 전개하던 선각단체였다. 이날은 광문사문회를 대동광문회로 확대하고 그 명칭을 변경하기 위해 특별회가 열리던 터였다.“국채를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라도 내주어야 함은 불을 보듯 뻔한 일. 두 눈 뜨고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 1866~1920)였다. 경무관이던 김광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가 경성의 경찰치안권을 장악하면서 사표를 낸 인물이었다. 일제가 조선왕궁에 대한 경비마저 도맡으려 한 데 대한 비분강개 차원이었다. 아울러 고종황제 앞으로 ‘친일배와 내정부패를 탄핵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조정으로부터 미움을 사 고군산도로 유배를 다녀오기까지 한 터였다. 그리고 1907년 초에 대구로 돌아와 건립한 것이 바로 광문사였다. 김광제의 발언을 들은 부사장 서상돈(徐相敦)이 몸을 일으켰다.“우리 힘으로 국채 1천300만원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는 겁니다. 우리 2천만 동포가 담배를 단 석 달 동안만 끊어도 그 대금이 모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금으로 국채를 갚으면 됩니다.”서상돈(1850~1913)은 1866년에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대구로 피난해온 이였다. 엄청난 핍박에도 불구하고 대구의 첫 천주교 신부였던 김보록을 통해 신앙을 굳건히 유지해온 그는 엄청난 부자이기도 했다. 천주교회를 통해 알게 된 인맥을 이용해 중국 등지와 상거래를 터 상당한 부를 축적한 때문이었다. 그는 1871년부터 지물행상 및 포목상을 시작해 불과 15년 뒤인 1886년에 대구의 재벌로 꼽히고 있었다. 또한 이를 바탕으로 경상도 시찰관에 임명되기도 했으며, 독립협회의 주도회원으로 활약하고 있기도 했다. 서상돈이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나부터 의연금으로 800원을 내놓겠소.”여기저기서 찬성의 목소리들이 튀어나왔다.“좋은 생각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함께 참석해 있던 회원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는 가운데, 사장 김광제가 국채보상발기회 연설을 시작했다.“금일(今日) 문제(問題) 국채(國債)의 보상(報償)이로 본사(本社)에서 발기(發起)니, 본사(本社)의 형편(形便)부터 강 설명(說明)하고 본사(本社)를 광문사(廣文社)라 명칭(名稱)야. 설립(設立)든 초두사기(初頭事機)를 방청제위(傍聽諸位)가 다 목도이문(目睹耳聞)한 바 …중략… 제일패망(第一敗亡)할 와 제일시급(第一時急)한 바 일천삼백만원(一千三百萬圓)의 국채(國債)올시다. …중략… 발기자 본사장(本社長) 김광제(金光濟), 부사장(副社長) 서상돈(書相敦)으로 자서(自書)하오리다. 본인(本人)부터 흡연(吸煙)의 제구(諸具)를 만장제군전(滿場諸君前)에 파쇄(破碎)오며 오등(吾等)의 토지(土地)와 신체(身體)가 전집중(典執中)에 현재(現在)한지라. 보상(報償)면 속토속신(贖土贖身)할 것이오, 미보(未報)면서 여(予)하고도 무죄(無罪)한 이 몸이 인(人)의 노예(奴隷)되리로다. 황천(皇天)이 감응(感應)여 전국인민(全國人民)으로 일심합력(一心合力)야 대사(大事)를 순성(順成)고 민국(民國)을 보존(保存)케 하옵소서.”연설을 마친 김광제는 “휘한허희(揮汗噓晞)고 하담이퇴와(下坍而頹臥)니라”하고는 자신의 담뱃대와 담뱃갑을 버렸다.“미룰 것 없습니다. 당장 이 자리에서 시작합시다. 일단 나부터 석 달 동안의 담뱃값 60전에 10원의 의연금을 별도로 내겠소.”김광제의 의연에 이어 다른 회원들도 스스로 동참했고, 순식간에 2천여원이 모였다. 당시 신문 한 달 구독료가 30전, 주사 월급이 15원, 쌀 한말이 1원80전이던 것을 비교하면 이날 모인 금액은 거액이나 다름없었다.#3. 불꽃이 곧 들불로 일어나기를그로부터 20여일 지난 1907년 2월21일, 대동광문회의 총회 날이었다. 김광제와 서상돈, 대동광문회 회장 박해령을 중심으로 한 회원들이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 대구상공회의소의 모태)에 한데 모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단연회가 구성되었다. 말 그대로 ‘끊을 단(斷)’과 ‘연기 연(煙)’, 담배를 끊어 국채를 보상하자는 뜻이었다. 단연회 설립과 동시에 이 자리에서도 500원이 모금되었다. 이어 이들은 대구 북후정(北亭)에서 국채보상운동 모금을 위한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했다. 2월 말의 날카로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발디틈 없이 군중이 응집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음은 물론이거니와 직업 또한 다양했으며, 개 중에는 골목에서 제기 차며 놀던 아이까지도 끼어있었다. 호응 또한 열렬한 가운데 ‘국채보상운동 취지서’가 낭독됐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지금 백성과 나라가 위급한 때이거늘, 결심도 계획도 없이 다만 팔짱끼고 우두커니 앉아서 멸망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나라가 망하면 민족도 따라서 진멸됨이 당연한 터. 그런데도 제 몸과 제 집이 있는 것만을 알고 임금과 나라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 이는 스스로 함정에 빠져 멸망하는 길입니다. 이제 정신을 가다듬고 충의를 분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국채 일천삼백만원이 있은즉, 우리 대한의 존망이 걸려 있습니다. 갚으면 나라는 보존될 것이나,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할 것은 필연적인 사실입니다. 하나 지금의 국고로는 변제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2천만 민중이 석 달을 정하여 담배 피우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금으로 각 사람으로부터 매월 20전씩 거둔다면 충분히 모을 수 있습니다. 우리 2천만 국민 가운데 털끝만큼이라도 애국사상이 있는 이라면, 이에 대해 두말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우리 대한 신민 여러분은 이를 곧 말과 글로 서로에게 알리어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하십시오. 이로써 강토가 유지된다면 이 이상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광무 11년 2월21일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바람이 불고 있었다. 불꽃을 들불로 일으킬 거대한 바람이었다.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세계가 주목하는 국채보상운동, 나눔과 책임연구소. 국채보상운동 100주년 기념 자료집, 대구시.대구 중구 수창초등학교 인근 광문사터. 국채보상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다양한 전시물이 조성되어 있다. 광문사는 국민 힘으로 국채 1천300만원을 갚아야 한다고 처음 발의한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최근 광문사가 있었던 자리가 지금까지 알려진 수창초등 인근이 아닌 경상감영공원 인근 경상북도 관찰부 내 취고수청(吹鼓手廳)이라는 주장이 나와 설득력을 얻고 있다.광문사터 표지석. 표지석에는 ‘국채보상운동 발상지’라는 글귀와 ‘2년여 동안 불타오른 국채보상운동의 첫 물길’이라는 설명이 새겨져 있다.국채보상운동의 두 주역 김광제(왼쪽)와 서상돈.
2018.11.13
[스토리텔링 2018] 최치원의 聖地<2> 경주 독서당과 서악서원
경주 낭산(狼山)은 실성이사금(實聖尼師今) 시대부터 신라인들이 숭앙했던 신령스러운 산이다. 413년 8월, 낭산에는 누각과 같은 구름이 일었는데 사방으로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왕은 ‘하늘의 신이 내려와 노니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고 이후 나무 한 그루도 베지 못하게 하였다. 사실 낭산은 해발 100m가 조금 넘을 뿐인 나지막한 야산이다. 그것은 왕경의 동쪽에 누에처럼 부드러운 등줄기로 엎드려 있다. 그러나 시선은 너른 들 너머 멀리 초승달 모양의 월성까지 날아간다. 그곳에 고운(孤雲)의 옛집이라 전하는 독서당(讀書堂)이 있다. #1. 서적 베개 삼아 풍월 읊던 안식처날쌔게 달리는 산업로에서 낭산으로 오르는 곧은 길이 들을 가로지른다. 1980년대에는 없었다는 길, 그래서 키 작은 독서당 표석은 몇 m 떨어진 들길 초입에 서있다. 산 아래에서부터는 완만한 계단이다. 길가에는 대숲과 솔숲이 푸르다.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힘썼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벼슬을 내려놓고 은거를 선택했다. ‘그리하여 여기저기 방랑생활을 하며 산림이나 강가에 대와 정자를 지어 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고 서적을 베개 삼아 풍월을 읊으며 지냈다.’ 그때 그가 주로 거주한 곳이 바로 이곳 낭산의 독서당이라고 전해온다. 삼국유사에는 최치원에 대한 언급이 여러 곳 있다. 그중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를 살펴보면 ‘최치원은 즉 본피부(本彼部) 사람이니 지금도 황룡사 남쪽과 미탄사 남쪽에 옛날 집터가 있어 이것이 최후(崔候)의 옛집이라고 하니 아마도 명백한 것 같다’는 기록이 있다. 오랫동안 미탄사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2014년 황룡사 앞쪽의 절터에서 ‘미탄(味呑)’이라 새겨진 기와편이 여럿 발견되면서 드디어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황룡사, 미탄사, 독서당의 연결고리가 풀리게 되었다. 그것은 미탄사의 위치를 증명하는 최초의 자료였고 독서당이 최치원의 옛집임을 방증하는 중요한 증거였다. 계단을 오르면 숲으로 둘러싸인 안온한 터에 독서당이 자리한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방형으로 둘러서 있고, 정면으로 작은 사주문이 열려있다. 살짝 기울어진 땅에는 석축 수로가 흐른다. 독서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에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낮은 시멘트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툇마루 앞쪽으로는 원형기둥을 세웠다. 초석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재를 비롯해 조선시대의 석조물까지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오랜 시간에 걸쳐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왼쪽에는 3칸 집이 남쪽을 바라보며 자리한다. 부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살림집으로 여겨진다. 담장 안 앞뜰에는 고운이 사용했다는 우물(古井)이 있다. 둥근 돌로 가장자리를 동그랗게 두른 작은 샘물이다. 지금도 물이 찰랑이며 맑다. 담장 밖에는 그가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 한 그루가 비스듬히 누운 듯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나무는 1982년(1986년이라는 기록도 있다)에 도벌되고 말았다. 독서당은 현판도 없는 무구한 얼굴로 서쪽의 왕경을 바라본다. 은거하여 유랑하였던 그에게 경주의 독서당은 일종의 구심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최치원의 마지막은 알 수 없다. 다만 홀연히 세상을 떠나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오래 떠돌았다. 독서당 경역의 오른쪽에는 따로 담장을 두르고 붉은색 사주문을 단 비각이 있다. 조선 철종 1년인 1850년에 건립한 유허비다. 비석의 전면에는 ‘문창후최선생독서당유허비(文昌侯崔先生讀書堂遺墟碑)’라 새겨져 있다. 비문은 경주부윤 이원조(李源朝)가 썼다. ‘선생은 학문으로는 성묘(聖廟)에 배향할 만하고 문장으로는 사맹(詞盟)의 주인이 되었으며, 뜻은 백이의 세상을 피한 것을 본받았고 자취는 장자방의 신선을 구하겠다고 한 말을 본받았다.’ #2. 퇴계가 직접 현판 쓴 곳에 모셔져최치원의 모습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그의 영정을 모신 곳은 우리나라에 열 곳이 넘는다. 그의 모습은 선비로, 관료로, 신선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고려시대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에 최치원에 대한 시가 있다. ‘당나라 과거에 합격한 고운은(孤雲金馬客)/ 동해(신라)의 훌륭한 문장가(東海玉林枝)/ 훌륭한 문장으로 중국을 울리고(射策鳴中國)/ 천하를 진동시켰네(馳聲震四)/ 높은 이름이 당시에 울려 퍼지고(高芬繁)/ 남긴 시문은 지금도 메아리로 울린다(遺韻遠委蛇).’ 이규보는 모든 유학자가 유학의 시조로 섬기는 이가 최치원이라고 했다. 당대에는 이루지 못했던 고운의 사상은 고려시대 이후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주류의 정치사상으로 기능하게 되면서 그를 기리기 위한 사우(祠宇)나 서원이 곳곳에 세워졌다. 최치원을 가장 먼저 배향한 곳이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이다. 조선 명종 16년인 1561년, 부윤 이정(李楨)이 김유신(金庾信)의 사당을 세우고자 했을 때, 부의 유생들이 설총(薛聰)과 최치원도 함께 모시기를 청하였다 한다. 이를 받아들여 세 현인의 위패를 한곳에 봉안하였고, 퇴계 이황이 서악정사(西岳精舍)라 이름 지었다. 강당은 시습당(時習堂), 동재는 진수재(進修齋), 서재는 성경재(誠敬齋), 동쪽 하재(下齋)는 절차재(切磋齋), 서쪽 하재(下齋)는 조설재(雪齋), 누각은 영귀루(詠歸樓), 문은 도동문(道東門)이라 하였는데 정사 내의 모든 현판은 퇴계의 글씨다. ‘서악지(西岳誌)’에는 서악서원에 최치원을 배향한 이유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쪽 나라에서 태어나서 그 문장과 공적이 중국을 휩쓸고 후세에 빛낸 이는 천고에 한 사람뿐이다. 이것이 공자를 제사 지내는 사당에 배향하게 된 원인이었다. 저 청송황엽(靑松黃葉)의 글귀를 예언하여 고려의 창업을 비밀리에 찬양하였다는 말은 천루(淺陋)한 사전(史傳)에 불과한 것이다. 기미를 보고 벼슬에서 물러나 깨끗이 은거하여 마침내 자취를 감추어 여대(麗代)의 세상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특립독행(特立獨行)한 그 의(義)는 또한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이를 만하다.’서악서원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 위패는 산골짜기로 피난시켜 다행히 보존할 수 있었다. 선조 33년인 1600년에 터를 다시 고르고 초가를 지어 위패를 봉안했고 2년 뒤 사당을 지었다. 그리고 광해군 2년에 강당과 재실, 전사청(典祀廳), 장서실(藏書室)을 지어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인조 원년에는 유생들의 청으로 사액(賜額)되어 서악서원 현판이 내려졌다. 편액은 당대의 명필 원진해(元振海)의 글씨다. 그 후 1646년에 누각인 영귀루를 지었다. 서악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서악서원은 신라 왕경의 서쪽, 무열왕릉을 비롯한 수많은 옛 무덤이 있는 선도산(仙桃山) 아래 서악마을 초입에 위치한다. 서원 바로 옆 폐교된 경주초등학교 앞에 하마비가 있다. 현재 서악서원의 현판은 퇴계가 지었던 옛 이름 그대로다. 학교가 폐교되기 전, 어린 학생들은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영귀루에 올라 수업을 받곤 했다고 한다. 최치원이 홀로 유학을 떠났던 나이 12세.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5학년이다. 먼 길 돌아 묘우에 모셔진 그는 한 시절 아이들 글 읽는 소리로 흐뭇하였겠다. 지금 서악서원에서는 고택체험과 음악회가 열리고 해마다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선현의 뜻을 받드는 향사를 지낸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이구의, 최치원 문학의 창작 현장과 유적에 대한 연구, 2008, 동경잡기, 경주최씨 중앙종친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경주시 서악동에 자리한 서악서원은 가장 먼저 최치원을 배향한 서원이다. 매년 2월과 8월 중정(中丁)에 선현의 뜻을 받드는 향사를 지낸다.경주시 배반동에는 최치원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독서당이 자리해 있다. 삼국유사에 최치원의 집터와 관련한 기록이 전해내려 온다.설총, 김유신, 최치원의 위패가 봉안된 서악서원의 묘우.조선 철종 1년인 1850년 건립한 ‘문창후최선생독서당유허비’가 독서당 경내에 서 있다. 비문은 경주부윤 이원조가 썼다.
2018.11.08
[스토리텔링 2018] 최치원의 聖地<1> 경주 초월산대숭복사비와 상서장
◆시리즈를 시작하며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유교·불교·도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을 겸비했던 ‘천재’였다.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려 신라를 다시 일으키려 했던 ‘개혁가’이기도 하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중국 당나라까지 이름을 떨친 ‘최고의 문장가’였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 관계 역사를 상징하는 인물로 극찬한 ‘한류 원조’로도 불린다.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쳐지 못했지만 최치원이 이룩한 학문과 사상 그리고 개혁의지는 지금도 큰 족적으로 남아 있다. 그런 최치원의 뿌리가 경북이다. 경북을 최치원의 성지(聖地)이면서 종주도시로 부르는 이유다. 무엇보다 그의 발자취가 경북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총 4회에 걸쳐 ‘최치원의 聖地(성지)…그의 발자취를 찾아서’ 시리즈를 연재한다. 시리즈는 경북을 무대로 펼쳐진 최치원의 이야기와 그가 남긴 발자취를 집중 조명한다. 1편에서는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 중 하나인 경주 ‘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와 시무십여조를 쓴 역사의 현장 ‘상서장(上書莊)’을 찾아 나선다. ‘돛 달아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 긴 바람은 만리에 통하네 / 뗏목 탄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 약 캐는 진나라 아이 기억나네 / 해와 달은 허공 밖에 / 하늘과 땅은 태극 안에 있네 / 봉래산 가까이 보이니 / 나도 이제 신선을 찾으려 하네.’ 최치원(崔致遠)의 시 ‘범해(泛海)’다. 그는 17년간의 이국생활을 끝내고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은거하기 전에 쓴 시라는 견해도 있다). 이립(而立)을 앞둔 담담한 얼굴이었다. #1. 초월산대숭복사비 경주 원성왕릉(괘릉)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길은 집과 들을 지나 토함산 서쪽의 나지막한 산중턱에 닿는다. 마을은 말방리(末方里), 신라시대 행정구역 제도인 조방제(條坊制)의 ‘마지막 방’이라고도 하고, 마방(馬房)이 있었다고 해서 ‘말방’이라고도 한다. 길 끝은 풀들로 뒤덮인 너른 터다. 거기에 한 그루 감나무와 온전치 못한 두 기의 탑이 서 있다. 그리고 그 뒤쪽에 용의 머리를 가진 두 마리 거북의 등에 우뚝 올라 선 비석 하나가 있다. 최치원이 쓴 ‘초월산대숭복사비’다. 최치원은 신라 말 문성왕(文聖王) 때인 857년에 태어났다. ‘4세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해 10세 때 사서삼경을 읽었다’라는 기록이 전할 만큼 총명한 아이였다. 그는 12세가 되던 868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874년 18세의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으로 합격했다. ‘토황소격문’ 등으로 문명(文名)을 천하에 떨친 그는 885년 3월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접고 귀국했다. 헌강왕 11년(885년)이었다. 고국에 돌아온 최치원은 각종 문서를 작성하는 직책인 ‘시독 겸 한림학사’에 임명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886년 봄 최치원은 왕으로부터 비명(碑銘)을 지으라는 명을 받는다. 바로 ‘대숭복사비’를 위한 글이다.◇초월산대숭복사비왕으로부터 ‘사산비명’ 짓도록 명 받아4개 중 처음 제작…비석 10년만에 완성최초의 절 비명 …왜란때 훼손돼 복구두머리거북받침은 경주박물관에 전시비석은 ‘이 산을 초월산, 이 터를 대숭복사’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비문은 대숭복사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원성왕릉이 자리한 땅에는 원래 ‘곡사(鵠寺)’라는 절이 있었다. 798년 능원을 조성하면서 곡사를 남쪽으로 옮겨 대숭복사(大崇福寺)라 개칭했고 왕릉을 지키는 원찰로 삼았다. 그 과정에서 ‘왕릉을 이루는데 비록 왕토(王土)라고는 하나 실은 공전(公田)이 아니어서 부근의 땅을 묶어 좋은 값으로 구했다’고 한다. 능을 조성하기 위해 땅을 국가에서 사들였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시대 식민사관 비판의 가장 중요한 근거 가운데 하나인 토지국유제설을 정면으로 반박할 수 있는 자료가 되고 있다.비문이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비석은 진성여왕 10년인 896년이 되어서야 완성됐다. 헌강왕이 886년, 이어 왕위에 오른 정강왕이 887년에 사망하는 등 왕실 내부의 혼란으로 건립이 늦춰진 것으로 여겨진다. 최치원이 지은 4개의 비문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 한다. ‘대숭복사비’는 그중 하나로 가장 먼저 명을 받아 지은 것이고 또한 우리나라에서 절의 비명으로는 처음이다. 비는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되었다고 전해지며 4개의 비명 중 유일하게 전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용의 머리를 가진 쌍거북 받침과 비편 몇 조각 뿐, 그것은 일제강점기부터 이곳 절터에서 수습됐다. 서쪽으로 광대한 시야를 펼친 숭복사지에 지금 온전한 모습으로 서있는 초월산대숭복사비는 복원한 것이다. 필사본으로 전해 오던 비문을 모아 맞추었고,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쌍계사진감선사탑비’의 글씨를 집자해 새겼다. 비석을 얹었던 두머리거북받침(雙頭龜趺)은 1930년대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현재 야외전시장에 있으며 비석 조각들은 경주박물관과 동국대박물관에 소장 전시돼 있다.#2. 상서장 귀국 초기 최치원은 의욕적으로 경륜을 펴려 했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의 벽은 견고했고 887년 진성여왕이 등극했을 때 신라는 이미 급속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지방에서는 호족세력이 등장해 중앙 정부를 위협했으며 국가의 재정은 궁핍했다. 889년에는 농민의 봉기로 전국적인 내란이 일어났다. 한계를 느낀 최치원은 대산군(전북 태안), 천령군(경남 함양), 부성군(충남 서산) 등의 태수로 외직을 떠돌았다. 그러나 개혁의 의지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894년 최치원은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안을 진성여왕에게 올린다. ‘시무십여조’다. 상서장. 최치원은 이곳에서 왕에게 올린 글을 썼다. 금 거북이 서라벌 깊숙히 들어와 편하게 앉아 있다는 금오산(金鰲山) 북쪽 기슭에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이 훤하게 내다보이는 곳이다. 계단을 가파르게 오른다. 끝은 외삼문이다. 삼문을 지나면 화강암 판석을 깐 중앙 길이 추모문(追慕門)에 닿고 그 안쪽에 정면 5칸의 상서장이 교교하게 앉아 있다. 상서장 뒤편 단을 높인 양지에는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影幀閣)이 자리한다. 그가 쓴 개혁안의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당시 진성여왕은 개혁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최치원은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오른다. 그러나 개혁안은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상서장진골귀족 부패로 무너지던 신라 위해정치 개혁안 ‘시무십여조’ 작성한 곳진성여왕에 올리고 고운대서 기다려효공왕 즉위 후엔 새 국가 암시 ‘상서’897년 진성여왕이 즉위한지 11년 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신라는 끊임없이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최치원은 새로운 국가의 등장을 예감한 듯하다. 그는 상서했다. ‘계림황엽곡령청송(鷄林黃葉鵠嶺靑松)’, 즉 ‘신라의 계림은 낙엽이 지고, 고려의 송악산엔 솔이 푸르다’는 뜻이다. 왕은 크게 노했고, 최치원은 이후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불혹(不惑)이었다. 고려가 건국되고 제8대 현종의 시대에 들어 최치원은 문창후(文昌侯)에 추봉하고 공자묘에 배향됐다. 문창후는 공덕을 기리고 칭송하는 이름이다. 현종이 그의 상서를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최치원이 머물며 공부하던 곳을 상서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상서장 경내에는 ‘문창후최선생상서장비(文昌候崔先生上書莊碑)’가 있다. 고려 말기에 세웠다는데, 현재의 비는 고종 연간에 경주부윤 이돈상이 비문을 지어 통일신라시대의 연화대석 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상서장 동쪽은 벼랑이다. 기이한 바윗돌들이 대(臺)를 이루고 둥치 큰 나무들이 자유롭게 몸을 뒤틀어 호위하는 그곳을 후세 사람들은 ‘고운대(孤雲臺)’라 이름 붙였다. 아래에는 남천(南川, 문천(蚊川)이라고도 한다)이 월성으로 향한다. 최치원은 임금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린 뒤 이곳에 올라 기다렸다고 한다. 계단 오른편에는 최치원의 시 ‘범해’가 커다란 바윗돌에 새겨져 있다. 돛 달아 푸른 바다를 건너왔던 그는 다시 신선을 찾아 떠났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이구의, 최치원 문학의 창작 현장과 유적에 대한 연구, 2008. 이구의, 최치원의 ‘대숭복사비명고’, 2004. 김승황, 고운 최치원의 시텍스트 ‘범해’와 ‘유선가’ 해석, 2016. 이우성, 신라시대 왕토사상과 공전, 1965. 김복순, 경주 괘릉의 문헌적 고찰, 201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최치원이 머물며 학문을 연구했던 상서장.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해 있고, 이곳에서 최치원은 임금에게 올린 ‘시무십여조’를 썼다고 전해진다.상서장 동쪽 벼랑에는 기이한 바윗돌들이 대(臺)를 이루고 있다. 둥치 큰 나무들이 자유롭게 몸을 뒤틀어 호위하는 이곳을 최치원의 호를 따 ‘고운대(孤雲臺)’라 부른다.상서장 경내에 있는 ‘문창후최선생상서장비’.경주에 자리한 초월산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 중 하나다. 비문이 언제 완성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비석은 진성여왕 10년인 896년에 완성됐다. 지금 숭복사지에 온전한 모습으로 서있는 초월산대숭복사비는 복원한 것이다.
2018.11.01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21·끝> 한동수 청송군수 “청송의 자연을 품은 누정, 지질공원 연계 향토문화관광 활성화”
영남일보와 청송군이 청송지역 누정을 재조명하기 위해 공동 기획한 ‘청송의 魂(혼) 樓亭(누정)’ 시리즈가 막을 내린다. 이번 시리즈는 지난 6월21일 1편을 시작으로 청송에 자리한 누정들을 20회에 걸쳐 집중 조명했다. 영남일보는 시리즈를 마무리하며 한동수 청송군수를 지난달 27일 인터뷰했다. 이날 인터뷰를 통해 청송지역 누정의 현황과 향후 활용 방안을 모색하고, 청송군의 전반적인 문화관광정책에 대해 들어봤다. 청송군 8개 읍면 70여곳에 자리 지자체 보존·관리만으론 한계 문중·개인 지원 함께 이뤄져야 ‘유네스코 등재’ 브랜드 적극 활용 세계지질공원 탐방안내소 등 건립 자연·지질, 전통·문화 어우러진 볼거리 풍성한 관광자원 발굴 주력▶올해 영남일보에 연재한 이번 시리즈를 간략하게 평가한다면…. “이번 시리즈는 청송의 누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청송의 혼, 누정’의 연재를 통해 청송군 8개 읍·면에 산재한 76개소의 누정이 소개됐기 때문이다.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눈여겨 살핀 덕분에 마치 책상에 앉아 지역의 누정들을 둘러본 느낌이었다. 소개된 누정 중에는 미처 가보지 못한 곳도 있고, 이름을 처음 듣는 곳도 있어 흥미로웠다. 누정에 담긴 역사·문화적 가치도 살필 수 있어 더욱 의미가 있었다. 특히 각 누정의 현판에 담긴 뜻을 되새길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소나무와 벗한다는 ‘우송당(友松堂)’이나, 국화를 좋아한다는 뜻의 ‘애국정(愛菊亭)’ 등의 현판은 청송의 자연을 그대로 담은 듯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에게 청송의 누정에 대해 제대로 알릴 수 있었던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 ▶청송의 누정은 청송의 역사와 혼을 오롯이 담고 있는 차별화된 자산이다. 특히 역사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향후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에도 손색없다고 생각한다. 누정을 활용한 청송군의 계획은 무엇인가?“누정이 청송만의 문화유산은 아니다. 하지만 청송 누정의 최대 장점은 절경 위에 건립되었다는 점이다. 청송읍에 위치한 망미정과 우송당에서부터 마지막에 소개된 벽절정까지 누정이 위치한 장소 자체가 아름답다. 역사·문화사적 의미가 담긴 누정이 절경과 어우러짐으로 인해 그 가치는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이 함께하는 누정이야말로 힐링과 교육이 함께하는 친환경 문화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청송군은 누정 등 문화재 활용사업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2014년부터 생생문화재사업과 향교 및 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을 지원하고 있으며, 올해는 누정 활용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도 확대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누정을 대상으로 콘서트와 바둑대회 등을 열고, 주민과 관광객이 찾을 수 있는 계기도 제공했다. 연재에 소개된 누정들은 관련 문중과 협의해 인근 관광지와 연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현장 취재 결과 잘 정비된 누정도 있지만 접근조차 힘들거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누정도 상당수 있었다. 누정의 관광자원화에 앞서 보존과 관리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한 청송군의 계획이 있다면. “이번 연재는 청송 각지에 숨어있는 누정을 찾아내는 계기가 됐다. 다행히 누정이 문화재로 지정됐거나, 각 문중에서 꾸준히 관리해 정비가 잘된 곳이 많았다. 반면 외곽에 위치한 데다 관리인조차 없는 누정의 상태는 아쉬웠다. 이는 지역 문화유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잘못이다. 하지만 향토문화유산의 경우 지자체 차원의 지원에만 의존할 수 없다. 각 누정의 소유자와 문중의 지원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청송군은 이번 연재를 기회로 소중한 문화유산을 소유한 문중과 개인들에게 그 관리와 정비를 독려할 것이다. 청송군 또한 예산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누정의 보수 및 유지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소중한 향토문화유산인 누정이 문화재로 지정받아 보수와 관리를 국가와 도에서 지원받을 수 있는 길도 찾아보겠다.” ▶청송군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됐다. 세계지질공원과 관련된 다양한 후속사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진행 중인 사업과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국내에서는 청송과 제주가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됐지만 세계지질공원에 대한 국민 인식은 여전히 저조하다. 하지만 청송의 접근성과 단체관광 수용능력이 개선되면서 청송을 찾는 이들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 청송을 지나는 당진~영덕 고속도로가 개통됐고 청송임업인연수원, 대명리조트청송, 청송민예촌 등 대규모 숙박시설도 갖춰졌기 때문이다. 청송군은 ‘유네스코’ 브랜드를 적극 활용해 청송을 알릴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 홍보행사와 지질공원해설사 탐방프로그램 운영 등 지질공원 홍보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지질공원은 지질학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보전하고 교육 및 관광을 통해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는 프로그램이다. 자원개발과 같은 일회성 경제 발전을 배척하고 교육관광 등 보전과 활용이 조화된 지속적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 지질공원의 목표다. 국가 예산 확보를 통해 명품 지질공원으로 도약하기 위한 장기 계획도 추진 중에 있다. 우선 세계지질공원 탐방안내소를 건립해 지질공원의 홍보와 교육을 강화할 것이다. 아울러 안덕면 신성리 공룡발자국 화석지, 경북도 유일무이 관광콘텐츠로 선정된 고와리 백석탄 계곡, 부남면 구천리 병풍바위 지질명소 등에 주차장, 학습장, 야영장, 직거래장터 등 편의시설을 조성하는 공원화사업도 계획 중에 있다.”▶지질공원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누정도 상당수다. 관광은 연계가 될 때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지질공원과 누정을 연계할 방안은 무엇인가?“앞서 말한 바와 같이 청송은 세계지질공원이 소재한 지역이다. 그만큼 지질학적 가치가 뛰어난 명소가 곳곳에 많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누정은 산세가 뛰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때문에 누정과 지질공원은 무관할 수 없다. 청송의 대표적인 정자인 방호정 역시 지질명소인 방호정 감입곡류천 주변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청송군 일원에는 지질공원과 연계된 지질탐방로가 조성돼 있다. 각 특색을 지닌 여행코스 등을 청송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홈페이지(http://csgeop.cs.go.kr)를 통해서 소개하고 있다. ‘공룡시대 명동과 감입곡류천’ ‘선비의 얼과 문화를 찾아서’ 코스 등은 지질공원과 누정이 함께 어우러진 대표적 여행코스다. 자연과 지질, 전통과 문화가 어우러져 관광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곳이 청송이다. 청송의 생태자연명소와 문화역사명소가 연계된 관광자원 활성화에 힘쓰겠다.” ▶청송군의 문화관광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과 향후 활성화 계획에 대해 말해 달라.“청송에는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국립공원 주왕산과 계절마다 다른 자태를 뽐내는 주산지가 있다. 또한 빼어난 절경을 자랑하는 절골계곡, 한여름에도 한기가 서려 있는 얼음골 계곡, 피서지로 많이 찾는 신성계곡 등의 자연자원과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송소고택을 비롯해 청송꽃돌, 청송백자 전수장, 청송옹기, 청송한지 등 다양한 문화관광자원이 있다. 또한 청송사과와 달기·신촌의 탄산약수 등이 유명하며, 주왕산 수달래축제, 청송도깨비 사과축제, 청송문화제 등 문화행사와 청송아이스클라이밍월드컵대회 및 전국선수권대회, 전국산악자전거 대회, 전국산악마라톤 대회 등 산악스포츠행사 또한 청송에서 열리고 있다. 청송은 이러한 관광자원을 바탕으로 자연과 지질 및 전통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에 등재됐으며 국제슬로시티의 재인증도 완료했다. 미래 관광은 자연관광, 테마관광, 감성체험중심의 관광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청송군은 농촌체험교실, 장난끼공화국과 같은 농촌 및 예술체험 프로그램, 천연염색의 전시와 체험, 생태공원, 산악레포츠 등 다양한 체험이 가능한 관광상품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것이다.”▶3선 청송군수로 내년 6월이면 임기를 마친다. 세계지질공원 등재 등 그동안 청송군의 변화와 발전을 꾀하는 수많은 공로도 있었다. 청송군수로서 지난 임기를 자평해 달라.“2만6천명의 인구 중 고령인구가 33%가 넘는 청송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브랜드 확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난 10년 동안 청송사과 브랜드화와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등재, 국제슬로시티 인증, 아이스클라이밍월드컵 개최 등 국제적 브랜드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특히 청송사과는 대한민국대표브랜드 사과부문 5년 연속 대상 수상이라는 성과를 얻었다. 청송을 체험휴양형 관광도시로 만드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청송의 경우 주왕산 등 뛰어난 자연자원에 비해 문화인프라가 열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송이 보유한 문화 및 인적자원을 기반으로 객주문학관, 객주문학마을, 청량대운도전시관, 청송백자전시관 등 다양한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힘섰다. 관광산업의 꽃으로 불리는 마이스(MICE)사업 육성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또한 고령화로 지역 의료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2011년부터 안동시의 2차병원인 성소병원에 진료를 위탁 운영하고 있다. 진료위탁 계약 체결로 지역 주민에게 제공되는 의료서비스의 품질 향상 및 타지역 진료에 따른 시간·경제적 손실이 크게 줄었다. 또한 대도시 학생들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교육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청송군 인재양성원을 개원해 운영하고 있다. 더불어 잘사는 청송을 만들기 위해 올 한 해를 달려왔다. 남은 임기 동안 지금껏 추진해 온 사업들을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에 최선을 다하겠다.”▶질문 외에 하고 싶은 말은.“향토문화유산을 소유한 문중과 지역주민들의 도움 없이는 누정 등 지역 문화유산의 보호가 불가능하다. 누정 주변의 잡초 제거나 창호와 마루를 닦는 일도 문화재를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청송군 역시 이번 연재를 계기로 지역문화재에 대해서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지원하도록 노력하겠다. 지역의 소중하고 중요한 문화유산이 더 이상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공무원과 주민 모두가 조금씩 노력했으면 한다.” 대담=최종철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장정리=임훈기자 hoony@yeongnam.com배운철기자 baeuc@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청송군영남일보가 지난 6월부터 연재한 ‘청송의 魂(혼) 樓亭(누정)’ 시리즈는 청송에 산재한 누정의 역사·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그 속에 깃든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청송의 魂(혼) 樓亭(누정)’ 시리즈의 주요 지면들.한동수 청송군수가 지난달 27일 가진 영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청송지역 누정의 보존 및 향후 활용 방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17.12.06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20> ‘청송심씨(靑松沈氏)의 본향’…청송 파천면 덕천리의 경의재·요동재사·소류정·벽절정
‘나의 입산일(入山日)을 내가 죽은 날(死日)로 하라.’ 그날은, 고려 말 악은(岳隱) 심원부(沈元符)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등을 돌리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간 날이었다. 그리고 그는 세 아들에게 말했다. ‘나라도 망하고, 임금도 잃었으니 너희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짓고 글 읽으며 시조선산(始祖先山)을 지키며 살아가라.’ 심원부의 후손들이 그의 유훈을 받들어 이곳에 자리 잡은 것은 1400년대를 전후한 때라 짐작된다. 그 후 지금까지 심원부의 후손들이 이곳에 산다. 청송심씨(靑松沈氏)의 본향 덕천리다.악은 심원부의 위패 모시는 ‘경의재’ 이성계 역성혁명에 등 돌린 선조의 뜻후손들이 받드는 청송심씨 집안 재실 중국의 요임금 같은 성인이 되겠다는 뜻요동재사, 청송심씨 12세손 심응겸 재사덕천마을 남쪽끝 산밭에 둘러싸인 소류정구한말 의병대장 심성지가 공부하던 곳벽절정, 벽절 심청의 정자로 원래는 구송정부친상 당한후 벼슬길 단념하고 학문 전념임란 나자 의병 일으켜 경주·울산서 戰功 #1. 청송심씨 집안의 재실 ‘경의재’ 용전천을 가로지르는 덕천교를 건너고 덕천을 가로지르는 경의교를 건너면, 덕천마을의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한 자리에 경의재(景義齋)가 자리한다. 악은 심원부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청송심씨 집안의 재실이다. 솟을대문과 높은 담장 위로 솟은 육중한 팔작지붕이 보인다. 대문간 아래에는 맞배지붕을 올린 신도비각이 자리한다. 제법 규모가 있는 관리사는 경의재 경역의 왼쪽에 담장과 협문으로 구획되어 있다.경의재는 정면 6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방, 왼쪽 2칸과 오른쪽 1칸은 온돌방이다. 오른쪽 마지막 1칸은 누마루 형식으로 대청방과 같이 들어열개문이 설치되어 있다. 전면은 난간 없는 툇마루다. 경의재 오른쪽에는 심원부와 아들 천윤(天潤), 손자 효상(孝尙) 등 삼대(三代)의 제단비가 세워져 있는데, 누마루형식의 방은 이 제단비를 향한 것이 아닌가 싶다. 경의재는 1976년 12월 재실 건립을 위한 제사를 올리고 공사를 시작해 1982년에 준공되었다. 가문의 역사에 비하면 매우 최근의 건물이다. 넓은 경내, 잘 손질된 조경,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공간이다. 경의재로 오르는 계단은 어칸을 피해 놓여 있고 각 칸 툇마루 아래에는 디딤돌이 정연하다. 강직한 기둥들은 나무의 민낯 그대로 결렴하게 늙어가는 색조다. 단순하면서도 청검한 입면이다. 네그루의 향나무가 경의재 앞을 호위하고 있다. 그 가운데 충(忠)과 경(敬)자를 새긴 바윗돌이 세워져 있다. 충성과 공경, 그것은 과거를 기억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영원한 새김일 게다. #2. 청송심씨 12세손 심응겸이 공부하던 ‘요동재사’경의재 앞 벚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면 마을이 열린다. 마을 한가운데 땅은 논이 차지했고 기와지붕을 인 집들은 낮은 산에 기대 있다. 논의 가장자리를 따라 뒷산에서 내려오는 좁장한 물줄기가 흐른다. ‘요골등천’이다. 물길 따라 고샅길로 들면 산 아래에 요동재사(堯洞齋舍)가 자리한다. 청송심씨 12세손인 심응겸(沈應謙)이 공부하고 쉬던 곳이다. 요(堯)는 어질기가 하늘과 같고, 지혜롭기가 신 같았다는 옛 중국의 군주다. ‘요동’이란 요임금과 같은 성인이 되겠다는 뜻이다. 재사의 뒷산도 요동이라 부르는데 선조를 모신 선산이라 한다. 재사에서 바라보이는 먼 산마루는 도치동이라 하는데 그곳도 선조를 모신 선산이다. 심응겸이 쉬고 공부하던 집은 이후 선산을 바라보고 지키고 봉향하는 재사가 된 것이다. 건물은 많이 훼손된 것을 1890년에 수리했고, 이후 2003년 유교문화권사업에 의해 해체 보수되었다. 그러나 다시 10여년이 흐르는 동안 적이 낡은 모습이다. 요동재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집이다. 가운데는 대청이고 왼쪽은 온돌방이다. 방과 대청 전면에 툇마루를 깔아 전체 ‘ㄱ’자 형의 널찍한 마루로 구성했다. 툇마루 측면에는 벽을 세워 판문을 달았다. 오른쪽 방은 통 2칸의 온돌방이다. 왼쪽방의 측면, 대청의 후면, 오른쪽 방의 측면과 전면에 쪽마루를 달았다. 양쪽 방 모두에 벽장을 달아 협소한 공간을 늘렸고 대청에는 선반이 달려 있어 생활의 흔적이 역력하다. 주사로 보이는 4칸 집은 현재 퇴락한 채로 비어 있다. ‘이 집에 올라 묘소를 바라보며 마음을 의지하며…. 선훈을 지키고 후손에 덕을 베푼 지 오래라 가히 장래가 영원할지라’는 기문이 쓰인 지는 이미 1세기가 지났다. #3. 의병장 심성지가 학문 연구하던 ‘소류정’덕천 마을의 남쪽 끝에 산과 밭으로 둘러싸인 소류정(小流亭)이 자리한다. 914번 지방도 건너편의 한가로운 자리라 덕천마을과는 한 걸음 떨어진 적적한 감이 있다. 소류정은 구한말 청송지역 의병대장을 지낸 소류(少流) 심성지(沈誠之)가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1885년에 최초창건(안내판 내용, 문화재등록을 위한 문화재위원 조사보고서에는 1896년 초창) 이후 붕괴 직전에 있던 것을 1997년 원형대로 중건했다. 밭 사이로 난 하얀 시멘트 길을 오른다. 길 양쪽에 작고 동그란 향나무들이 공경의 마음으로 서있다. 비탈길 위 낮은 산 아래 심성지를 기리는 커다란 사적비가 보인다. 검은 오석의 비신에 건너편의 산과 하늘이 비친다. 그 옆에 세 개의 작은 비가 나란하다. 심성지의 훈장증, 아들 능찬의 표장증, 증손 상기의 무공훈장증이 역시 오석에 새겨져 있다. 3대에 걸친 의로움이 차갑게 반짝거린다. 소류정은 기와를 얹은 흙돌담에 둘러싸여 있다. 좁은 공간이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작은 건물이다. 전면 2칸은 툇마루로 정면에 사분합문을 설치하고 측면에 판문을 설치해 폐쇄적인 구조를 갖췄다. 그리고 툇마루 바깥쪽으로 쪽마루를 둘러 문을 열었을 때보다 너른 마루와 개방성을 확보하도록 했다. 후면의 2칸은 온돌방으로 측면에 문, 뒷면에 창을 내었다. 촘촘하게 구성된 지극히 소박한 건물이다. 그는 의병해산령 이후 이곳에서 지내다 1904년 생을 마쳤다고 한다. 뿌리의 근저에서 근본을 이어간 이 집에 부드럽고도 정정한 기백이 넘친다.#4. 벽절 심청의 정자 ‘벽절정’덕천마을이 하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앞산, 현당산(峴堂山)이다. 선조의 선산이라는 도치동이 바로 이곳으로 벽절(碧節) 심청(沈淸)과 그의 부친인 도곡(道谷) 심학령(沈鶴齡), 증조부인 월헌(月軒) 심손(沈遜)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청송읍 덕리에 속하지만 청송심씨들에게 이 산은 마을과 하나다. 그 산의 동쪽 기슭 절벽에 용전천을 바라보며 벽절 심청의 정자 벽절정(碧節亭)이 서있다. 원래 이름은 구송정(九松亭)이었다. 벽절 심청은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의 상을 당한 이후 벼슬길에 나갈 것을 단념하고 집 뒤에 정자를 짓고 아홉 그루 소나무와 함께 학문에 전념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의병을 일으킨다. 경주, 울산 등지에서 싸워 전공을 세웠고 1594년에는 훈련원봉사에 제수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웠다. 그러다 1597년 정유재란의 도산(島山: 울산)싸움에서 전사했다. 종군했던 장자 응락(應洛)이 진중에서 말가죽으로 시신을 거두어 도치골 구송정 오른쪽 기슭에 안장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나이 44세였다. 벽절은 선조 임금이 내린 호다. 그에 따라 정자의 이름도 벽절이 되었다. 겨울철에도 소나무는 변치 않는다는 뜻이다. 벽절정은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대청방, 양쪽은 온돌방이며 전면 반 칸은 툇마루다. 경의재와 매우 흡사한 인상이다. 임진왜란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몇 차례 소실된 것을 1919년 중건했다고 한다. 기와를 올린 낮은 돌담을 사이에 두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5칸의 관리사가 1동 있다. 주변은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용전천은 아래에서 흐르고 청송읍이 남쪽에 환하며 정면에는 청송의 진산인 방광산이 솟아 있다. 넓고 너른 시야 속에서 벽절정은 고조된 정적으로 자리한다. 청송의 하 많은 정자가 품은 뜻이 곧 벽절이 아닐는지.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공동기획:청송군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에 자리한 경의재는 악은 심원부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청송심씨 집안의 재실이다. 경의재는 1982년 준공된 최근의 건물로, 넓은 경내와 잘 손질된 조경 덕분에 깔끔한 모습이다.요동재사는 청송심씨 12세손인 심응겸이 공부하고 쉬던 곳으로 ‘요동’은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성인이 되겠다는 뜻을 담고 있다.구한말 청송지역 의병대장을 지낸 소류 심성지의 정자 소류정.벽절정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벽절 심청을 기리는 정자로 심청은 경주와 울산 등지에서 싸워 전공을 세웠다.
2017.11.22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9> ‘조상의 선행과 그 뜻이 담긴’…청송 파천면의 담포정·기곡재사·귀래정·학산정
용전천(龍纏川)은 청송의 남쪽 부남면에서 발원해 청송읍을 지나 파천면을 관통한다. 청송군 내에서 유로 연장과 유역면적이 가장 큰 천이다. 옛날에는 파천(巴川) 혹은 파질천(巴叱川)이라 했다. 뱀처럼 용처럼 흐르는 천이다. 파천면은 천의 이름에서 온 지명이다. 신기리의 신기천, 덕천리의 덕천 역시 땅과 천이 하나다. 고대로부터 물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터전은 하나였다. 강물은 때때로 인간에게 고난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영원히 움직이면서 단단한 지반을 만들어준다.#1. 평해황씨의 담포정황광혁이라는 이가 있었다. 어느 날 한 어부가 큰 자라를 잡아 나뭇가지에 달아 놓은 것을 보게 된 그는 측은한 마음에 자라를 사서 살려 주었다. 자라는 물 위를 떠가며 세 번 돌아보고는 사라졌다. 그날 밤 그의 꿈에 한 소년이 나타나 말한다. 넓은 갯가에 ‘황아무개 소유의 토지’라고 쓴 표목을 많이 세워두라. 이상히 여기면서도 그는 소년의 말을 따랐다. 이튿날 마을에는 큰비가 내렸다.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갔으나 그가 세운 표목만은 온전히 서있었다. 그 자리를 논과 밭으로 개간해 씨 뿌리고 추수하니 늘 풍년이었다. 그곳이 파천면 신기리(新基里)다. 중태산 자락에서 발원한 신기천이 신기리를 관통해 용전천과 만나는 합류점의 남쪽에 본 마을인 새터가 자리한다. 평해황씨 황광혁이 자라를 살리고 얻게 된 천변의 땅이다. 이후 후손들은 70~80여 호를 이루며 번성하게 되는데, 선조의 선행으로 얻은 땅에 그 뜻을 기려 세운 것이 담포정(澹圃亭)이다. 담포란, 담박한 밭이다. 욕심이 없고 깨끗한 마음으로 얻은 터전을 뜻할 것이다. 신기천과 용전천 합류점 남쪽 새터 마을평해황씨 황광혁이 자라 살리고 얻은 땅담포정은 후손들이 선조 선행 기려 세워기곡재사, 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 시조 이석의 묘 관리·祭 지내려 세운 재사 바람 잔잔한 산속…사람이 늘 생활하는 곳가선대부중추부사 장입국의 정자 귀래정귀래정 앞 진사 류응목 정자 학산정 자리 촘촘한 문살…고독이 음영처럼 드리운 모습담포정은 황광혁의 증손 황일성(黃一聖)이 고종 때인 1880년에 건립했다. 처음에는 서당으로 지어 후진을 키웠는데 1910년 국권침탈 후 일제의 강압으로 서당 운영이 어렵게 되자 정자로 바꾸어 담포정이라 편액했다. 이후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소실된 것을 1958년 복원했다. 그러나 갯가의 땅이라 지반이 약했던 탓인지 건물이 기우는 등의 문제가 생겼고 1962년 지금의 위치로 이건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정자가 또다시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문중회의를 통해 2007년 다시 중건했다. 새터마을 안길로 조금만 들어가면 사과밭을 병풍 세운 담포정이 보인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이 나지막하고 마당은 넓어 정자는 온전히 드러나 있다. 담은 마을길과 평행하지 않고 5도 정도 마을 입구 쪽 혹은 북동쪽으로 틀어져 있는데 대문도 정자도 같은 방향이다. 뒤돌아보니 소위 문필봉이라 부를 만한 봉우리가 솟아 있다. 정자는 봉우리 쪽을 향해 있다. 담포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는 대청방, 양쪽은 온돌방이며 정면에 반칸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대청의 들어열개 위에는 광창을 냈다. 담포정은 사용할 수 있는 고재가 남아있지 않아 대부분 새로운 목재를 사용했다 한다. 마당에는 깬 돌을 깔고 소나무 두 그루를 심었다. 한쪽에는 2007년 중건 후 세운 비석이 있다. 마루 난간의 치마널이 거의 지면에 닿을 듯해 멀찍이 보면 땅속으로 쑥 들어간 것 같기도 하고 물 위에 뜬 배 같기도 하다. 기단의 정면 가운데에 묘한 바윗돌이 있다. 자라의 머리인가? 어쩌면 자라가 돌아와 담포정을 업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2. 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의 기곡재사 새터에서 북동쪽으로 1㎞쯤 가면 신기천 너머에 신기2리 감곡(甘谷)마을이 있다.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계곡이라 해서 ‘가람실’이라 불렸다. 감곡교를 건너면 아름다운 마을 숲 앞 갈림길에 기곡재사(岐谷齋舍) 이정표와 ‘진성이씨(眞城李氏) 시조 묘 입구’ 표석이 있다. 기곡의 뜻대로 갈림길에서 골짜기로 든다. 설마 이러한 해석이 옳지는 않겠지만 길은 맞다. 골짜기는 온통 사과밭이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데 라디오 소리 우렁차다. 적적함을 달래는가 싶었는데 새를 쫓는 것이란다. 골짜기 길 끝에 재사가 자리한다. 기곡재사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조상이자 진성이씨의 시조인 이석(李碩)의 묘소를 관리하고 묘제(墓祭)를 지내기 위해 세운 재사다. 원래 있었던 재암과 1740년에 중건한 것은 소실되었고 1851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재건했다. 재사의 입구 오른쪽 앞에 3칸 초가지붕 건물이 있다. 왼쪽 칸은 아래 벽이 개방되어 있는 방앗간, 가운데 칸은 창고로 쓰이고 있다. 오른쪽 칸은 온돌방이다. 옛날 주사가 아닌가 싶다. 기곡재사는 정면이 다락집 형상인데 전체적으로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자형이다. 문을 열면 정면으로 대청이 보인다. 누하주는 팔각기둥, 누상주는 둥근기둥을 세운 높고 넓은 마루다. 양쪽으로 익사가 연결되는데 누마루보다 조금 낮다. 앞쪽에 좁은 쪽마루를 달아내어 대청으로 오르는 작은 계단 한 단을 설치했다. 계단과 대청 입구가 부드럽게 마모되어 있어 잦고 신중한 걸음을 떠올리게 한다. 우익사에는 노년층이 사용하는 윗방을 꾸미고, 좌익사에는 장년층이 사용하는 중간방을 배치했다고 한다. 서열에 따른 용도의 구분이다. 현판은 대청을 마주 보는 방 위에 걸려 있다. 툇마루 아래 신발이 많은 걸 보니 사람이 늘 생활하는 곳이다. 다락집 형식이라 가운데 마당이 깊다. 좁은 기단과 툇마루로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중심 잡히고 조심스러운 몸가짐일 수밖에 없다. 재사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작은 핑크색 자전거가 담벼락에 기대있고 핑크색 아기의자가 초가 기단 위 볕 좋은 자리에서 산과 밭을 바라보고 있다. 바람도 잠잠한 산속, 안온하다. #3. 아산장씨의 귀래정과 하회류씨의 학산정 보광산에서 발원한 덕천(德川)이 용전천으로 흘러들어가는 물길 서쪽에 낮은 산들에 둘러싸인 덕천리가 자리한다. 덕천 가에 있어서 덕천리다. 마을은 만석꾼 송소 심호택의 자손들이 모여 사는 청송심씨(靑松沈氏)의 본향으로 이름나 있으나 여러 성씨의 역사가 어우러져 있기도 하다. 덕천이 용전천과 만나기 전, 서쪽에서 흘러온 좁은 물줄기를 받아들이는 자리에 그들의 옛 시간이 있다. 아산장씨(牙山蔣氏)의 정자 귀래정(歸來亭)과 하회류씨(河回柳氏)의 정자 학산정(鶴山亭)이다. 귀래정은 가선대부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府事)를 지낸 장입국(蔣入國)의 정자다. 원래 의성 원유동(元儒洞)에 있었는데 병자호란 이후 자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폐허가 되었다. 이후 증손이 의성에서 덕천마을로 이거해 살면서 선조의 정자를 옮겨 와 중건할 마음을 품었는데 수백 년이 지나는 동안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1938년이 되어서야 귀래정은 후손에 의해 후손들 곁에 세워졌다. 귀래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대청방과 왼쪽 온돌방 앞에만 난간이 없는 툇마루를 두고 측면에 판문과 고창을 설치했다. 오른쪽 방은 통 온돌방으로 정면과 측면에 쪽마루를 달았다. 산 아래 높직한 자리다. 귀래정 앞에는 진사 류응목(柳膺睦)의 정자 학산정이 자리한다. 그는 고종 때인 19세기 중후반의 인물로 대단히 우수한 문재였다고 한다. 성균관에서 공부했던 그는 유력가의 수세에 밀려 귀향한 후 농사짓고 글 읽으며 지냈는데 출세의 권고에 밀려 몇몇 곳을 전전했다 한다. 그가 마지막에 자리한 곳이 덕천리다. 그는 학산정을 짓고 먼 데서 혹은 가까운 데서 찾아오는 많은 이름난 선비들과 우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의병의 선봉에 섰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켰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비분강개로 여생을 마쳤다. 팔작지붕을 얹은 4칸 학산정은 옛 멋은 없다. 촘촘한 문살은 앙다문 입매 같고, 바짝 에워 선 담장은 타협 없는 몸짓 같다. 단단한 고독이 음영처럼 드러나 있는 정자다. 그는 학산정기에 ‘가까운 물 먼 산은 다정을 보낸 듯 읍하며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때때로 평온했을 것이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 기획 : 청송군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자리한 담포정은 황광혁의 증손 황일성이 고종 때인 1880년에 건립했다. 6·25전쟁 때 폭격을 맞아 소실된 것을 1958년 복원했다.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의 기곡재사.가선대부중추부사를 지낸 장입국의 정자 귀래정.동학농민운동 때 의병 선봉에 섰던 진사 류응목의 정자 학산정.
2017.11.15
[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8>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뜻’…청송군 진보면의 풍호정·약산정·율간정
반변천(半邊川)은 청송군 진보면 소재지를 지나 합강리(合江里)에 들어서면서 북쪽으로 둥근 소리굽쇠 모양으로 흐른다. ‘합강’이란 여러 갈래의 물이 한데 모여 강을 이룬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북쪽 부곡리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세천(細川)이 반변천과 하나 될 뿐이다. 합강리는 1984년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었다는데 그때 물길의 형세가 변했던 걸까. 그러나 1945년에 지어졌다는 합강동 노래에 ‘합강이 회룡을 한다’는 구절이 있는 걸 보면 급하게 휘어진 굽이는 예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1. 합강리의 풍호정 진보면소재지를 지나 안동 방향 34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반변천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풍호정 휴게소가 있다. 한쪽에 임하댐 건설로 수몰된 고향을 기리는 망향비가 서 있는데 그 옆에 서면 맞은편 천변 절벽 위에 수목으로 감싸인 정자가 보인다. 섬뜩할 만치 아름다운 모습이다. 물가로 내려가 1976년에 건설했다는 합강교를 건너고, 눈부신 저습지를 양쪽에 거느린 천변 비포장 길을 따라 한참을 가야 그 아름다운 것에 닿는다. 풍호정(風乎亭)이다. 풍호정은 고려 개국공신이자 평산신씨(平山申氏) 시조인 신숭겸(申崇謙)의 후손 풍호(風乎) 신지(申祉)의 정자다. 그는 세조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1463년에는 효행과 청렴으로 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벼슬이 학문을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된다 하여 나가지 않았다. 신지는 만년에 진보로 내려와 합강 상류의 절벽을 다듬어 풍호정을 짓고 동생 신희(申禧)와 더불어 즐기며 살았는데, ‘반드시 남쪽 고향땅으로 가라’는 아버지 신영석(申永錫)의 유언을 따른 것이라 한다. 풍호정은 약한 경사지에 안정감 있게 서있다. 최초 건립은 1414년으로 지금의 것은 그 이후에 중건된 것이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5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며 가운데는 대청방, 양쪽은 온돌방이다. 전면 반 칸은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놓고 온돌방의 측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전면의 마루에만 둥근기둥을 세웠고 나머지는 네모기둥이다. 편액이 보이지 않는다. 자료에서 본 편액은 푸른 바탕에 풍호정 세 글자가 춤을 추는 듯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평산신씨 시조 신숭겸 후손 풍호 신지 ‘남쪽 고향땅으로 가라’아버지 유언에 진보로 내려와 절벽 다듬어 풍호정 지어정자 뒤편 200년된 소나무 꿋꿋이 자리작약산 아래 부곡리 가장 위쪽 약산정 원주이씨 이오언·이준영이 지은 정자수풀에 가려졌지만 탄탄·온전한 골격고산자락 함양오씨 세거지 율리 율간정 숙종 때 통정대부 제수받은 척암 오학문 세상 초연한 채 경서 읽으며 공부하던 곳 주변은 웅장한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오른쪽 뒤편에는 200년 된 소나무가 긴 가지를 늘어뜨리고 맑은 빛으로 서있다. 나무는 150년 전 어느 겨울날 폭설로 인해 윗가지가 꺾였으나 꿋꿋하게 살아남았는데 사람들은 나무의 그러한 기개가 구한말 평산신씨 후손들의 의병정신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풍호는 공자의 제자 증점이 말한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쐰다’는 이야기에서 따왔다. 그는 ‘기수는 멀고 무우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곳에 와 보니 기수와 무우의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 있더라’고 했다. 풍호정 아래에는 감돌며 굽이쳐 흘러내리는 반변천이 소(沼)를 이룬다. 옛날에는 이 일대의 물길을 따로 호명천(虎鳴川)이라 불렀다 한다. 휘어 흐르는 물소리가 호랑이의 울음소리처럼 들렸을까. 넓게 둘러보면 오른쪽의 먼 시선은 비봉산(飛鳳山)에 닿고 정면의 하늘 아래엔 광덕산(廣德山)이 빛난다. 왼쪽에는 작약산(芍藥山)이 솟아 있는데 그 줄기가 은근한 자태로 흘러 천 너머 눈앞에 드리워져 있다. 정자의 왼쪽에는 주사(廚舍)가 있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ㅁ’자형 주거건물이다. 정자 오른쪽에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신지의 후손 신예남(申禮南)과 부인 민씨를 기리는 쌍절비각(雙節碑閣)이 있다. 지금 그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후손들이 살아온 550년은 물속에 잠겼으나 그 시초만은 더없는 아름다움으로 기립해 있다. #2. 부곡리의 약산정 풍호정에서 천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작약꽃 봉오리를 닮은 작약산 아래에 부곡리(釜谷里)입구가 열려 있다. 깊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천이 반변천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부곡교가 놓여 있고 마을 안길은 천과 나란히 골짜기를 파고들고 있다. 부곡교에서 부곡리 마을이 활짝 보인다. 마을은 보이는데 마을에서 가장 윗자리에 자리한 약산정(藥山亭)은 보이지 않는다. 정자는 대숲과 잡풀이 감춰 버렸다. 부곡리는 원주이씨(原州李氏)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정종 때의 진사(進士) 이조(李稠)다. 그는 송생현(청송의 옛 지명)의 감무(監務) 겸 안동진관병마절도사(安東鎭官兵馬節度使)를 지낸 인물로 어진 정사를 베풀었다는 칭송이 있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집으로 돌아가다 산수의 아름다움과 어조(魚鳥)의 즐거움에 반해 터를 잡은 곳이 부곡리다. 이후 언제부터인가 원주이씨 집안의 가세가 점점 쇠퇴했다고 한다. 그러다 이오언(李五彦)과 이준영(李俊永) 때에 이르러 학문과 행실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한다. 약산정은 이오언, 이준영 두 사람이 지은 정자다. 그들은 집 서쪽 작은 산기슭에 정자를 짓고 글 읽고 거문고 타며 만년을 보냈다 한다. 담을 둘러 동산으로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약산정기가 조선 고종 23년인 1886년에 쓰인 것을 보면 정자는 조선 후기의 것으로 짐작된다. 약산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에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는 대청방이고 양쪽은 온돌방이다. 전면 1칸이 툇마루인데 양옆은 벽을 세워 판문을 달았다. 정자가 바라보고 있는 산이 마을 동쪽의 작약산이다. 정자의 이름을 약산정이라 한 것은 후손들이 작약처럼 무리 지어 성대해져서 문장과 덕이 온 나라에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담은 허물어졌으나 동산은 확연하고 연못은 보이지 않으나 천이 멀지 않다. 정자는 우거진 수풀에 가려져 있지만 탄탄하고 온전한 골격은 숨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약산이라 했던 마음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찾을 길 없다. #3. 율리의 율간정 북향하던 반변천은 부곡교 아래에서 서쪽으로 향하다 이내 남쪽으로 굽이쳐 고산(孤山)의 서쪽 사면 아래를 깊이 흐른다. 물길의 급박한 회룡과 비봉산, 광덕산, 작약산, 그리고 풍호정의 뒷언덕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산 자락 율리에 율간정(栗澗亭)이 있다. 34번 국도에서 하고산 마을과 청송관광농원 쪽으로 가는 기곡길로 들어가야 한다. 혼자만 알고 싶은 근사한 길이다. 율리는 합강리의 자연부락으로 함양오씨(咸陽吳氏) 세거지다. 입향조는 척암(菴) 오학문(吳學文)으로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임란 충신인 문월당(問月堂) 오극성(吳克成)의 현손이다. 오학문은 조선 숙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은 인물로 벼슬을 떠나 영양에서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옛날에는 징검다리를 건너 마을로 들어섰다. 정자 앞 천변에는 버드나무가 빽빽이 서 있어 ‘오류내’라 불렀고 밤나무와 버드나무 사이로 흐르는 강물은 ‘간이’라 불렀다 한다. 율간정은 이러한 경치를 바라보며 200년 묵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오래 묵은 밤나무 사이에 자리했다. 정자 뒤는 밤나무 밭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그는 세상에 초연한 채 대나무 심고 꽃을 가꾸고, 스스로 고요한 가운데 경서를 읽고 사기를 강론하며 공부했다고 전한다. 옛집은 병란으로 타버렸다. 지금의 정자는 오랫동안 새 울음소리와 묵정밭의 그늘만 가득했던 터에 1957년 후손들이 다시 세웠다. 율간정은 정면 3칸, 측면 1.5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는 대청방, 양쪽은 온돌방이며 전면 반 칸은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다. 시멘트 담장으로 경역을 구획하고 정면에 협문을 내었다. 정자 옆에 감나무 한 그루가 감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밤나무 밭이 있었다는 정자 뒤에는 오씨 집안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석주 두 기가 서 있는데 밤을 잡으려는 다람쥐가 양각되어 있다. 명랑하고도 고운 마음이다. 율리에는 대대로 살아온 오씨 일가 30여 호가 여전히 살고 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 기획 : 청송군청송군 진보면 반변천변에 자리한 풍호정은 고려 개국공신이자 평산신씨 시조인 신숭겸의 후손 풍호 신지의 정자다. 신지는 세조 때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벼슬에 나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청송에서 만년을 보냈다.200년 수령의 풍호정 소나무원주이씨 이오언·이준영이 지은 약산정함양오씨 세거지 율리의 율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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