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스토리텔링]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6] 고려시대 반란을 진압한 임지한 장군..."호랑이 타고 신출귀몰"…고려때 경주 반란 싸우지 않고 진압한 충신
#1. 호랑이를 타고 다니는 사내고려 제24대 왕 원종(1219~1274, 재위 1259~1274) 조, 예천 관아에 새로운 수령이 부임했다. 수령을 지근에서 수행하고 보필해야 하는 아전들은 동분서주했다. 정신없기는 수령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지역을 파악하고 인계받은 업무를 확인하느라 밥을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고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수령이 기겁했다. 부친의 생일이 바로 다음날이었던 것이다. 불효를 저지를 뻔했다고 자책하며 서둘러 귀한 먹거리를 장만했다. 그리고 아전들을 불러 모았다."예천에서 가장 발 빠른 자가 누구냐?""어인 일로 그리하십니까?""도성에 다녀올 일이 있다.""기한을 얼마나 주십니까?""내일 도착해야 한다."하루 만에 예천에서 개경을 가라는 소리에 다들 기절초풍하는데 한 사내가 나섰다."제가 다녀오겠습니다."공방(工房) 임지한(林支漢)이었다. 예천에서 태어나 근면성실한 데다 늘 병법서를 읽어 좋게 보던 차였기에 수령은 반색했다. 하지만 수령 생각에도 무리는 무리였다. "만일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어찌하겠느냐?"임지한이 단호한 어투로 대답했다."목을 바치겠습니다."안도한 수령은 바로 먹거리를 내주며 반드시 시간을 맞춰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다른 아전들이 "그 먼 길을 무슨 수로" 하며 걱정을 쏟아내는 가운데 임지한만 혼자서 천하태평이었다. 바로 채비해 떠나도 시간이 부족할 판에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칠순 노모를 챙기고 집안일을 마무리한 후 한숨 돌리기까지 했다. 외려 수령의 명으로 임지한의 뒤를 밟은 나졸이 애가 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는 동안 시간이 흘러 밤이 이슥해졌다. 그제야 임지한이 노모에게 다정하게 고했다."어머니. 소자,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이 밤에 어디를 간다고 그러느냐?""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주무시고 계시면 금방 돌아오겠습니다.""오냐. 오죽 알아서 잘할까."집을 나온 임지한은 범우리로 향했다. 범우리는 본포리(本浦里)와 원곡리(原谷里) 사이에 자리한 우거진 숲이었다. '범 호(虎)'와 '울 명(鳴)'을 써서 호명산이라 부르기도 했다.숲에 다다른 임지한이 어둠을 향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나타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덩치가 산만 한 호랑이였다. 기실 임지한은 호랑이를 길들여 말처럼 타고 다녔다. 곧장 임지한이 말을 타듯 등에 오르자 호랑이가 내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람처럼 사라진 임지한은 다음날 수령의 부친에게서 서찰까지 받아 돌아왔다. 이 일로 임지한이 여산대호(如山大虎)를 부린다는 소문이 널리 파다하게 퍼졌다. 범우리 숲 호랑이 길들여 타고 다녀수령 부탁 받고 이틀만에 개경 왕래대마초씨로 빚은 술 먹여 반란군 평정임금이 상주 다인현 예천 귀속 허락"대장군 신령 깃든 고을 조심하라"임란때 왜군 장수 제 올리고 물러나사당 의충사 1978년 호우로 사라져#2. 반란을 진압하다원종이 근심어린 한숨을 흘렸다."반란이라?""예, 최종(崔宗), 최적(崔積), 최사(崔思) 무리가 난을 일으켰다 합니다."100여 년에 걸친 무신정권 기간 경상도·전라도·양광도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1193년(명종23) 가을에 청도 사람 김사미(金沙彌)가 일으킨 난은 후유증이 컸다. 초전(草田·울산) 사람 효심(孝心)과 연합해 국토를 들썩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반란이었다. 보고가 이어졌다."경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최종, 최적, 최사 무리가 청송 주왕산에 1만여 명의 병력을 모아놓고는 이웃 고을의 수령을 죽이고 곡식을 약탈하는 등 패악이 크다 합니다. 뿐만 아니라 최종 목적지가 도성이라 합니다.""결국 게까지 중앙군을 움직여야 한단 말인가?""그보다는 그곳 지세에 밝은 장수에게 일단 맡겨보심이 효율적이라 사료됩니다.""마땅한 인물이 있는가?""예천 관아에 임지한이라고 병법에 능한 관리가 있습니다."원종으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임지한을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에 임명한다. 그로 하여금 진압하게 하라."지엄한 어명이 예천에서 맡은 업무에 여념이 없던 임지한에게 전해졌다. 임지한은 뜻을 받잡고 그동안 갈고닦은 병법을 동원해 계책을 세웠다. "병법의 가장 상책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다."임지한은 군사들을 모아놓고 명령을 내렸다."내 곧 적진으로 들어갈 터이다. 너희는 안동으로 가 그곳에서 기다려라."말을 마친 임지한은 홀로 적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반란군에게 자신을 '고려에서 도망친 장수'라고 속인 후 투항했다. 임지한의 눈에 비친 반란군은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심각한 굶주림에 사기가 바닥을 쳤다.그때 임지한이 나서 적장에게 제안했다."내가 안동에 가서 먹을 양식을 구해 놓겠소. 보름 후에 안동으로 집결하시오."반란군은 의심하지 않고 임지한을 보내주었다. 안동에 도착한 임지한은 먼저 도착해 있던 군사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누룩과 대마초 씨로 술을 빚고 음식을 푸짐하게 마련했다. 약속한 날에 반란군은 안동에 도착했다. 그들은 경계를 풀고 음식과 술을 마음껏 마셨다. 시간이 흘러 반란군들이 술에 취해 쓰러지자 임지한과 그의 군사는 싸우지 않고 반란군 무리를 평정했다. 이 소식에 원종이 임지한을 불러 올렸다."그대의 공이 실로 크다. 삼중대광 벽상공신에 봉한다."삼중대광(三重大匡)은 정1품의 품계이고 벽상공신(壁上功臣)은 초상화가 조정의 벽에 걸린다는 뜻이었다. 어마어마한 명예였다.하지만 임지한은 벼슬을 사양했다. 대신 군세를 확장할 수 있도록 상주 관내의 다인현(多仁縣)을 예천에 귀속시켜 달라고 청했다. 원종은 감동해 바로 허락했다. 이후 임지한은 장군의 신분으로 예천과 다인을 수시로 왕래했다. 그때마다 범우리를 지나야 했는데 임지한이 탄 호랑이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원래도 포효했지만 그 소리가 더 커진 것이다. 그럼 산에 있는 모든 호랑이들이 산이 흔들릴 정도의 울림으로 대답을 했다. 그렇게 호랑이들이 너도나도 포효하는 날이면 마을에선 "우리 임 장군님이 지나시나보다"고 짐작하며 마음을 놓았다. '범우리'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했다.#3. 죽어서도 예천을 지킨 장군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왜군이 부산에서부터 물밀 듯 북상하는 가운데 장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예천을 치고 들어왔다. 묵을 장소로 향교를 지목한 뒤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사방이 빠르게 어두워지며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흙먼지를 일으켰다. 두려움에 빠진 우키타 히데이에가 서둘러 향교를 벗어나 주민에게 물었다."혹 이 근처에 명장의 사당이 있소?"주민들이 한 입으로 답했다. "노상리(路上里) 객사 동쪽에 의충사(毅忠祠)라고 해서 임지한 장군님의 사당이 있습니다."우키타 히데이에는 바로 의충사로 향했다. 가보니 사당 벽에 아주 오래돼 보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커다란 노송(老松)과 집채만 한 호랑이 한 마리였다.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호랑이에게서 안광이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상서로운 기운에 압도당한 우키타 히데이에는 즉시로 향을 피우고 축문을 지어 제를 올렸다. 그리고 주민에게 사과한 후 병사들에게도 일렀다. "이 고을은 대장군의 신령이 깃든 곳으로 조심해야 한다. 함부로 날뛰어선 안 되며 살인이나 방화는 더더욱 해서는 안 된다. 경거망동했다가는 화가 우리 군 전체에 임할 것이다."이로써 예천에서는 왜란으로 인한 큰 피해를 겪지 않았다. 영험한 일은 숙종 조에도 벌어졌다. 1717년(숙종43) 2월24일 왕에게 장계가 올라왔다."평안도 각 고을 백성으로 전염병을 앓는 자가 313명에 죽은 자가 10명이며, 전라도에서는 920여 명에 110명입니다."하루 뒤인 25일에도 보고는 이어졌다."경상도 각 고을의 백성으로 전염병을 앓는 자가 930여 명에 죽은 자가 150여 명이며, 충청도에서는 360명에 100여 명입니다."이때부터 약 이태 동안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은 이가 전국에서 무려 3만5천여 명에 달했다. 당시 인구가 약 1천400만여 명이었으니 엄청난 피해였다. 두려움에 휩싸인 예천의 주민들은 임지한의 사당을 찾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장군을 향해 마을의 무사안녕을 빌었다. 그 덕분인지 예천에서는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이후 의충사는 1868년(고종5)에 전국을 뒤흔든 서원철폐령 와중에 헐리는 아픔을 겪었다. 그랬다가 30년 뒤인 1898년(고종35)에 마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하지만 그로부터 80년이 흐른 1978년에 집중호우로 다시 붕괴되고 터만 남았다. 그 세월을 나무들이 지켜보았다. 사당 오른편에 서있던 감나무 두 그루와 왼편에 서있던 소나무 한 그루가 그것이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 : 예천군경북 예천군 예천읍 노상리 의충사 유적지. 의충사는 고려시대 반란군을 진압한 임지한 장군을 제향했던 곳이다.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898년 마을 주민들에 의해 다시 세워졌지만 1978년에 집중호우로 다시 붕괴되고 현재는 터만 남았다. 작은 사진은 의충사유적지비.
2021.12.13
[인재향 영양 .13] 소설가 이문열, 문향의 고장 두들…그의 작품속 인물 삶의 무대로 자주 등장
두들은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이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갓난아기 때인 1950년부터 4년, 10대 시절에 3년,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고 2년 뒤 돌아와 3년을 살았다. 서울, 안동, 밀양, 부산 등 도시와 도시를 옮겨 다녔지만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부터는 수십 년을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집안의 제사에 참여했고 그때마다 근 일주일을 머물렀다. 문중은 그의 뿌리였고 두들은 좌표의 영점이었다. 2001년 그는 고향 두들에 서재이자 집필실이고 동시에 사랑방인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다. '광산문학연구소'다. 그것은 '마침내 내가 돌아갈 곳'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음식디미방 집필한 장계향의 후손 300년된 석간정사서 어린시절 보내 작품에서 고향·문중 자부심 드러내 2001년엔 '광산문학연구소' 건립 서원 염두에 두고 장서 2만권 보내 학사·강당·사랑채·정자 등 들어서"후배 위한 소설 사랑방 같은 공간" '이문열 문학관' 내년에 완공 예정#1. 고향 두들 이문열은 1948년 5월18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열(李烈)로 아버지 이원철(李元喆)이 지어준 이름이다. 대학교수이자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했다. 그해 그의 어머니는 세 살 갓난아기였던 그를 데리고 고향인 두들로 왔다.두들마을은 재령이씨(載寧李氏) 집성촌으로 입향조는 석계 이시명이다. 그는 인조 18년인 1640년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부인은 안동장씨 장계향으로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집필한 여중군자로 이름 높다. 장계향은 이문열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석계선생의 선업을 이은 이는 넷째아들 항재(恒齋) 이숭일(李嵩逸)로 이문열은 항재의 12세손이다. 그는 두들마을의 석간정사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조상 때부터 10대에 걸쳐 300여 년을 살던 집이다. 원래 이름은 여산정사(廬山精舍)로 이문열의 5대조인 좌해 이수영의 살림집이자 서실이었다. '여산'은 마을 뒷산인 광려산(匡廬山)에서 따 온 이름이라 한다. 이문열의 두 번째 귀향은 열세 살 때다. 그는 밀양중학교를 중퇴하고 가족 모두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야산을 개간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두들을 오르내리며 어머니의 회상 속에 존재하는 영화로웠던 고향의 현재를 10대의 눈으로 보았다. 이문열은 '그때 처음으로 문중이란 것을 알았고, 자연과의 친화를 경험했으며, 노동과 생산을 이해하게 되었다'(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1994)고 한다. 그리고 '아름드리 참나무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언덕에 오르자 상상 속에서나 그려보았던 덩그런 기와집들이 잇따라 나타나 이미 도회적인 안목으로 내게 느닷없는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거기다가 그 뒤 사흘 고향에 머물면서 들은 자기 옛 고향의 영광은 그것을 한때의 충격에서 깊은 감동으로 키워 마침내는 뒷날의 내 의식에까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변경, 1986)그는 1964년 안동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다시 고향을 떠났지만 1년 만에 중퇴하고 한동안 주먹질로 세월을 축내며 떠돌았다. 그러다 1968년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입학한다. 그 시절의 방황과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자전적 소설이 '그해 겨울(1979)'이다. 그는 대학생 시절인 1969년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동시에 1970년 2년 만에 대학을 그만두고 사법시험에 도전한다. 그의 세 번째 귀향은 이때로 여겨진다. 이문열이 고향을 세심한 눈길로 관찰하게 된 것이 이 시기이며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1980)'의 소재 대부분을 이때 얻었다고 한다. 그는 사법시험에 세 번 실패한 뒤 결혼을 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1976년 대구로 이사했다. 그리고 1977년 대구의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나자레를 아십니까'로 입선,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이 당선되어 중앙 문단에 들어섰다. 그리고 잇따라 '사람의 아들(1979)' '들소(1979)'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1979)' '어둠의 그늘(1980)' '황제를 위하여(1980~1982)' '달팽이의 외출(1980)' '이 황량한 역에서(1980)' 등을 발표했다. #2. 이문열의 집 '녹동고가 광고신택'2001년 이문열은 고향 두들에 '광산문학연구소'를 지었다. 그리고 장서 2만여 권을 내려보냈다 한다. 그는 이곳을 지을 때 일면 서원(書院)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늙어가면서 젊은 친구들과 함께 글을 이야기하는 공간, 서로 주고받는 강학(講學)의 공간, 내가 더 많이 공부하는 집(宇)이 되길 바랐다고 한다. 고래등 같은 집이다. 긴 돌담과 큰 대문간 속에 학사, 강당, 사랑채, 서재, 대청, 식당, 정자 등이 'ㅁ'자로 들어서 있다. 그가 1990년 중반 고향 집을 찾아왔을 때 이미 주인이 바뀌어 있었고 당호 역시 '여산정사'에서 '석간정사'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고향 집을 매입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그는 인근에 새집을 짓고 '광산문학연구소'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대문에 '광산문우(匡山文宇)'라는 현판을 달았다. '광산'은 '여산'의 맥을 잇는 이름이다. 2018년 그는 '광산문우'의 현판을 내리고 '녹동고가 광고신택(鹿洞古家 廣皐新宅)'이라는 새 현판을 걸었다. 그는 이곳을 '그냥 개인 창작실이고 개인 서재고 후배를 위한 소설 사랑방 같은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의 '새로운 집'과 '장계향 예절관' 사이에 '여산정사' 현판이 걸린 세 칸 기와집이 높은 석축 위에 앉아 있다. 그의 새집과 옛집은 담을 공유하며 좁은 문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뒤쪽으로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 펼쳐져 있다. 입향조인 석계 부부는 두들에 터를 잡으면서 도토리를 얻을 수 있는 상수리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리고 왜란과 호란으로 궁핍해진 이웃에게 도토리 죽을 끓여 나누었다. 두들에는 지금도 상수리나무가 많다. 수령 370년이 넘는 고목이 50여 그루에 이른다. 오늘날 그의 새로운 집 뒤편의 언덕은 '도토리 공원'이라고 불린다. 주변으로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는 참나무 숲으로 이어진다.'도토리 공원'에서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연작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에서 그는 고향과 문중에 대한 향수를 드러냈다. '풍화된 화강암 언덕 위에 서식하던 참나무붙이가 당당하던 시절, 늘어선 수십 칸 고가들이 그림처럼 서 있고, 그 한 곳 서당 대청에서는 낭랑한 강 소리가 울려 퍼지던 시절, 몇 년마다 한 번씩 문중 출신의 현관들이 임금의 하사품을 실은 나귀와 종복들을 앞세우고 퇴관해 오고, 가을이면 인근 소작지의 아름드리 거둔 나락바리를 인도해 분주하게 그 언덕을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다고…. 향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러나 이제 저기에 광고신택이 있다. 넓은 언덕의 새로운 집이 고요히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다. '나의 뿌리는 고향으로 상징되는 전통적인 집단의식에 자리 잡고 있었고, 의식도 강한 전통 지향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 삶이 외견상 뿌리 없이 보이고 때로는 극단의 일탈을 보일 때도 나는 그것들을 언제나 한시적이고 예외적인 상황으로만 받아들여 왔다.'(이우는 세월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그에게 고향 두들은 '감동'이기도 하고 '감옥'이기도 했으며 '실패의 예감을 자아내던 황무지'이기도 했고 '비옥함과 다사성을 감추고 있는 한 넓고 위엄 있는 영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뿌리이고 마침내 돌아갈 곳이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그의 집필실 벽에는 고향 집을 스케치한 액자가 걸려 있다고 한다.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많은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지만, 이문열은 가장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이 시대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오늘의 작가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했으며, 2015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은 현재 미국·프랑스 등 전 세계 20여 개국 15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고 있다. 현재 두들마을에 이문열의 학사채, 도서관과 영양군 소유의 건물 다수를 리모델링해 '이문열 문학관'을 조성하고 있고 내년 완공 예정이다.글=류혜숙<작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소설가 이문열이 2001년 두들마을에 지은 광산문학연구소. 그는 '녹동고가 광고신택'이라는 현판을 단 이곳을 '자신의 집이면서 개인 창작실이고 후배를 위한 소설 사랑방 같은 공간'이라고 이야기한다. 긴 돌담과 큰 대문간 속에 학사, 강당, 사랑채, 서재, 대청, 식당, 정자 등이 'ㅁ'자로 들어서 있다.이문열의 고향 두들마을. 두들은 이문열의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던 무대이기도 하다. 사진 아래는 광산문학연구소 옆에 있는 한옥 북카페 '두들책사랑'.
2021.12.07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5] 구한말 일본화폐의 유통에 맞서 '금융 주권' 지키려 했던 장화식
#1. 포의(布衣) 선비가 재상이 되기까지1853년 2월 예천 호명 내성천 옆 안질마을. 딸만 있던 장영제(張永濟)와 창원황씨(昌原黃氏) 부부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학암(鶴巖) 장화식(張華植·1853~1938)이었다. 늦둥이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장화식은 영특했다. 겨우 7세 나이에 천자문을 떼는 등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다. 부모의 사랑이 함박눈처럼 쏟아졌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듬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뜬 것이다. 장화식은 애통비통하며 3년상을 치렀다."어른도 저리 못한다. 하늘이 내린 효자다."상실의 슬픔을 장화식은 공부로 잊었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 장영제가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러는 동안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보위에 올랐다. 장화식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의성 봉정리 사람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혼인해 아들 쌍둥이를 본 것이다. 용환과 봉환이었다.젊은시절 봉덕산 서악사서 학문 연마훗날 절 입구 바위 '연파독역산' 음각한성부판윤·통신원총판 요직 역임일본인 불법 전신주 아예 뽑아버려불공정한 한일통신협정 반대운동도어깨가 무거워진 장화식은 학문을 심화하기 위해 예천 봉덕산 서악사(西岳寺)로 향했다. 서악사는 1701년(숙종27) 창건해 1737년(영조13)에 이건한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였다. 스무 살의 장화식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밀어두고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계기로 훗날 서악사 입구 바위에 '蓮坡讀易山(연파독역산)'이 음각되었다. 연파만(蓮坡晩·장화식의 이칭)이 역경(易經)을 읽은 산이라는 뜻이다.절 생활이 한창이던 어느 날 낯선 스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세상의 이치를 논하던 가운데 장화식이 "물은 온천처럼 뜨거운 물이 있는 반면, 불은 얼음처럼 차가운 불이 없습니다"하며 자신만의 논리를 풀었다. 스님은 탄복했다."훗날 큰 재상이 될 그릇이십니다."장화식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1878년에 초시에 합격하고도 약 9년간을 조용히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때가 이르렀다. 1887년(고종24)에 의금부도사가 된 것이다. 이후는 스님의 예언처럼 흘러갔다. 참령(參領), 군부경리국장(軍部經理局長), 육군부령(陸軍副領)과 같은 요직을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통신원총판(通信員總辦, 우체·전신·전화·전기·선박·육해운 수송 등의 분야를 관장하던 기관의 으뜸 관직) 등 재상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고종의 전폭적 신임 하에 이루어진 인사였음은 물론이다. #2. 퇴계 이황의 신주를 새로 모시다1901년이 저물어가던 12월, 원수부(元帥府, 국방·용병·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기관)의 군무국부장(軍務局副長) 직을 수행하던 장화식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퇴계 이황의 후손 참봉 이돈호(李敦鎬)였다. "오늘자 황성신문에 퇴계 선생의 신주가 분실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신문을 확인하기 전이었던 장화식은 경악했다. 바로 알아보니 유학의 성지 도산서원에 도둑이 들어 신주를 훔쳐갔다는 내용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서원 관리인이 수감되고 예안군수와 경북관찰사가 동분서주하는 동안 장화식이 고종을 찾았다."도산서원은 국학(國學)입니다. 국가의 원기가 흔들리고도 남을 변란입니다. 머리를 하늘에 두고 발로 땅을 밟고 선 자라면 모두가 절박하게 움직여야 합니다."그리고 사건의 전후좌우를 꼼꼼하게 조사한 후 다시 아뢰었다."오래전 김인후(金麟厚·인종의 스승)와 조헌(趙憲·의병장)의 위판을 분실했을 때 나라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니 위판을 다시 만들어 봉안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소서."고종은 흔쾌히 허락했다. 장화식은 품질 좋은 위패목을 구해 공경을 다해 실어 보냈다. 이를 유림에서 받아 고증을 거친 규격에 따라 새로이 제작해 1902년 1월26일에 봉안했다.#3. 일제와 대립하며 국권을 수호한 한성부판윤1902년(고종39) 9월17일 장화식은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명예와 권력의 자리였으나 실상은 전쟁에 나선 장수의 입장이었다. 특히 날로 증가하는 외국인의 주택과 토지 매입 문제가 골치 아팠다. 하지만 장화식은 단호하게 해결하며 국권을 지켜나갔다."독일인 상인 모세을의 초가 파손에 대해 사실을 조사한 결과 피해가 과장되었다. 보상을 불허한다.""미국인 웜볼트의 토지 문서 발급 신청건을 면밀히 파악한 결과 허위로 밝혀졌다. 문서 발급이 불가하다."뿐만 아니라 경운궁 인근 건축물에 대한 고도를 제한하고, 궁궐 담장 500m 이내의 신축을 금지하는 등 해묵은 미결사항 또한 엄격하게 집행했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11월의 어느 날 보고가 들어왔다."농상공부 고문 일본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자택에 전화를 가설하겠다며 공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장화식은 대로했다. 통신원에서 승인하지 않았음을 모두가 아는데 이를 어긴 것이다. 안 그래도 전신(電信)·무선 등의 영역에서 멋대로 사업을 벌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본이었다. "우리만의 전화 사업을 시작한 이상 외국인의 전화시설은 허가 못한다고 분명히 밝혔거늘 감히!"장화식은 서둘러 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불법으로 세운 전신주가 무려 23개나 된다는 보고에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럼에도 일본 측은 묵살하고 그대로 강행했다. "백주대낮에 대궐 지척에서 무허가 전화 공사라니, 더는 용납할 수 없다."장화식은 통신원에 협조를 구해 전신주를 아예 뽑아내버리는 강수를 두었다. 일본인의 불법 전화 시설 설치를 온몸으로 막으며 국권을 지킨 것이다. 일제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음은 물론이었다.장화식은 또 일본제일은행권의 유통 금지를 고시해 한국 화폐가치의 하락과 주권 침탈을 막는데도 진심을 다했다.불법전화 설치 일로 분기탱천해 있던 그에게 어느날 또 다른 보고가 올라왔다."진고개에 사는 일본인이 집을 저당잡고 돈을 내주었는데, 일본제일은행에서 발행한 일본화폐라고 합니다.""결국 일이 터졌구나." 장화식이 한성부판윤이 되기 전부터 일본제일은행권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 권면의 금액은 재한국 각 지점에서 일본통화를 가지고 태환함'이라고 적힌 이 은행권은 금화가 아닌 일본은행 태환권이었다. 즉 도쿄에서만 태환이 가능해 우리 백성에게는 식민지적 신용화폐에 불과했다. 장화식은 기가 막혔다. 우리 정부에서 발행하지도 않은 비정상적인 화폐가 유통되면 어떤 피해가 초래될지 예상되고도 남았다. 무엇보다 우리 화폐의 가치가 폭락해 주권이 흔들릴 것이 자명했다. 장화식은 1903년 2월5일 황성신문에 자신의 명의로 고시했다.'일본인들이 일본제일은행권을 주조하여 우리나라 은행의 각 지점에 유통하고 있다. 일본인이 상호 간에 통용함은 간섭할 바 아니나 우리 인민이 통용했다가는 병폐가 생길 것이다. 이를 막지 않으면 장차 손해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알린다. 대소인민은 그 은행권을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 몰래 주고받는 자는 적발하여 단호히 중벌로 다스릴 것이다.'하지만 일본은 물러서지 않았고 대한제국 정부는 굴복하고야 말았다. 일본제일은행권의 통용 금지를 진두지휘하다시피 한 장화식으로서는 한성부판윤 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소신, 통탄을 금치 못하며 사직을 청합니다."1903년 2월12일 사직서가 수리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의기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1904년 통신원회판(會辦), 1905년 통신원총판(總辦)으로 일하는 내내 통신권 수호를 위해 항거했다. 핵심은 한일통신기관협정 조약 반대였다. 협정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하나, 국내에 있는 우편전신사업의 관리를 일본국 정부에 위탁한다. 둘, 이미 설치된 통신설비 일체를 일본에 이양한다. 셋, 통신기관의 운영에 필요한 토지 등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넷, 수익금은 면세로 한다.'온갖 특권이 망라된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장화식은 물리적 충돌도 서슴지 않고 반대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대세는 일본으로 기운 터였다. 결국 협정은 체결되었고 장화식은 총판직에서도 물러났다. 그러자마자 을사늑약이,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대한제국은 더 이상 나라가 아니었다.그럼에도 장화식은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종 사후 19년째이자 순종 사후 12년째인 1938년, 한 서린 몸을 고향 봉덕산 서악사 후운평(後雲坪)에 뉘었다.장화식의 충심은 두 아들에게로 이어졌다. 장봉환(張鳳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에서 수학한 수재였다. 벼슬길도 탄탄대로였다. 칙임검사, 육군보병부령, 시종원시종(侍從院侍從·비서관), 시위연대(궁궐수비대)대대장 등 고종의 최측근 요직을 거쳤다. 그러다 대구진위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일제의 압력으로 보직해임됐다. 이유는 의병활동 지원과 의병봉기 선동. 그때가 1905년 아버지 장화식이 한일통신기관협정 조약을 반대하다가 통신원총판직에서 물러난 바로 그해였다. 그리고 장용환(張龍煥)은 고향 원곡서당(原谷書堂)에서 선생의 삶을 살았다. 1919년 3·1운동 때 예천 만세운동을 주도한 생도들이 다닌 바로 그 서당이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 : 예천군장화식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 예천 봉덕산 중턱에 자리한 서악사에 들어가 공부했다. 이 일을 계기로 서악사 입구 바위에는 '蓮坡讀易山(연파독역산)'이 음각되었다. 연파만(蓮坡晩·장화식의 이칭)이 역경(易經)을 읽은 산이라는 뜻이다.장화식이 일본제일은행권의 유통금지를 고시한 1903년 2월5일자 황성신문.장화식이 한때 공부한 서악사. 1701년 창건해 1737년에 이건한 직지사의 말사다.
2021.12.06
[인재향 영양 .12] 시인 조지훈…수필 '지조론'으로 친일파 정치인·변절 일삼는 지도자 질책
여인은 '차운 샘물에 잠겨 있는 은가락지를 건져내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여인은 부드럽게 배를 어루만졌다. 뱃속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출산이 가까워지자 집안에서는 여인을 종택으로 불러 내렸다. 영양 일월의 주곡리, 주실(注室)마을이다. 마을 앞에는 붓을 닮은 문필봉이 솟았고 뒤에는 물 위의 연꽃 같은 부용봉(芙蓉峯)이 펼쳐져 있으며 그사이를 넉넉하고 편안하게 장군천이 흐른다. 이곳에서 일제강점기인 1920년 12월3일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는 맑은 지조와 곧은 절개로 일생을 살았던 시인 조지훈이다.#1. 조지훈의 어린 시절주실마을은 한양조씨(漢陽趙氏) 세거지다. 인조 때인 1630년경 호은(壺隱) 조전(趙佺)이 처음 들어와 정착했다. 조전의 후손들은 실학자들과 교류해 일찍 개화했고, 일제강점기에는 모두가 똘똘 뭉쳐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조지훈이 태어난 종택은 마을 중심부의 맨 앞에 자리한다. 조전의 둘째아들인 조정형(趙廷珩)이 지어 아버지의 호를 따 호은종택이라 했다. 솟을대문이 덩실하다. 종택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7칸인 'ㅁ'자형으로 대문에 들어서면 사랑채 마루를 정면으로 마주한다. 조지훈은 사랑마루와 연접한 사랑방에서 태어났다. 종택에서 가장 좋은 방이라 한다. 조지훈의 아버지는 제헌(制憲) 및 2대 국회의원이자 한의학자인 해산(海山) 조헌영(趙憲泳)이며 어머니는 전주류씨(全州柳氏) 류노미(柳魯尾)다. 지훈은 그의 아호이고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할아버지 조인석(趙寅錫)이 '동방의 뛰어난 인재가 되라'는 뜻으로 동탁이라 지어주었다고 한다. 사헌부 대간이었던 조인석은 국권이 피탈되자 낙향해 마을의 월록서당(月麓書堂)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영진의숙(英進義塾)을 세우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지훈은 일제 하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할아버지로부터 한학과 조선어, 역사 등을 배웠다.어린시절 형과 함께 시인의 꿈 키워11세때 '꽃탑회' 만들어 '꽃탑' 펴내아버지 친구이자 시인 오일도 만나서울 인사동 일월서방서 지내며 활동'시원'의 동인으로 문예지에 詩 응모'승무' '봉황수' 로 시인의 길 들어서생가 뒤편에 조지훈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본가가 있다. 대문에 '방우산장(放牛山莊)'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그가 자신의 집에다 스스로 붙인 이름이다. 조지훈은 '땅 위에 남겨 놓고 간 영혼의 새가 깃들이는 곳, 그 무성한 숲의 어느 한 가지가 방우산장'이라고 했다. 이 집에서 그는 제임스 매튜 배리의 '피터 팬',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파랑새' 등과 같은 동화를 읽었고 9세 무렵부터 글을 썼다. 그는 시인이 되고자했던 형 세림(世林)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형을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시를 접했고 함께 시인의 꿈을 키웠다. 11세 때에는 세림과 함께 마을 소년들의 모임인 '꽃탑회'를 조직해 동인지 '꽃탑'을 펴내기도 했다. 조지훈은 아주 어릴 때부터 일제의 감시를 받았다. 열 살도 채 안된 지훈이 외가에 다니러 갈 적에도 일경이 따라붙었다. 그것은 아버지 조헌영이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경북 상주 출신의 박열 의사가 일왕 암살 기도사건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을 당시 박열이 입은 조선의 관복을 제공한 이가 바로 조헌영이었다. 이후 조헌영은 그 관복을 소중히 보관했는데, 사연을 알고 있던 지훈은 자주 그 옷이 든 함을 열어보곤 했다고 한다. 훗날 조지훈은 '나의 시작(詩作) 노트'라는 수필에서 "박열이 입었던 관복을 집에서 어린 시절 직접 본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2. 시인의 길에 들다1937년 17세가 된 조지훈은 형 세림과 함께 상경했다. 형제는 아버지가 1936년 인사동에 설립한 동양의약사(東洋醫藥社) 겸 일월서방(日月書房)에서 지내며 아버지의 친구이자 시인인 오일도를 만나 시인의 길로 인도받았다. 조지훈이 당시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용운을 찾아간 것도 이때였다. 한용운이 김동삼의 유해를 한강에 뿌리며 서럽게 울 때, 홍안의 젊은 문학청년 조지훈은 그 옆에 나란히 서서 또 그렇게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추모하며 이렇게 노래했다. '아, 철창의 피눈물 몇 세월이던가/ 그 단심 영원히 강산에 피네/ 심상한 들사람들도 옷깃 여미고 우러르리라/ 온 겨레 스승이셨다. 일송 선생 그 이름아.'그리고 그해에 형 세림이 세상을 떠났다. '꽃탑회'를 불온단체로 규정한 일경의 취조를 받고 나온 후 악화된 치통에도 울화를 참지 못하고 술을 마시다 세상을 떠났다. 21세였다. 조지훈은 형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으로 괴로워했다. 그는 충격을 이겨내기 위해 원산에서 평양까지 걸어서 여행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시인 오일도와 함께 형의 유고시집인 '세림시집(世林詩集)'을 펴내 그 넋을 위로했다. 조지훈은 형을 위해 더욱 습작에 열중했다. 신극에도 관심을 둬 극예술연구회와 중앙무대, 낭만좌 등의 극단에 드나들었다. 독학으로 전문학교 입학자격을 취득해 1939년 혜화전문학교(동국대)에 입학했으며 오일도가 창간한 '시원'의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해 봄 순수문예지 '문장(文章)'의 신인 모집에 시 '고풍의상(古風衣裳)'을 응모했는데, 시인 정지용(鄭芝溶)으로부터 호평을 받아 초회 추천됐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 정지용은 "시에서 깃과 쭉지를 고를 줄 아는 것도 천성의 기품이 아닐 수 없으시니"라며 조지훈의 활동에 기대감을 표했다. 이어 12월에 '승무(僧舞)',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됐다. 드디어 시인의 길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3. 마지막 선비호은종택과 월록서당 사이에 '지훈문학관(芝薰文學館)'이 있다. 정면 열두 칸의 긴 한옥 건물로 2007년 5월 개관했다. 현판은 부인 김난희 여사가 쓴 것이라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그의 일생이 펼쳐진다. 책 읽던 소년 시절, 20대 청록 시절, 그리고 광복과 전쟁이 이어진다. 일제 말기 그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돼 신문을 받고 풀려난 뒤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에 은거하기도 했다. 일제가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렬을 주지에게 강요한다는 말을 듣고 종일 통음하다 피를 토한 적도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 문학과 사상 전환의 강요에 한 번도 몸을 굽힌 적 없다. 그리고 광복이 되자 그는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했다. 그는 1948년부터 세상을 뜨기 전까지 고려대 교수로 재직했고 6·25전쟁 동안 종군작가로 활동했다.커다란 벽 앞에서 '지조론'을 마주한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이기도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변절자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이 글은 1960년 '새벽' 3월호에 실린 조지훈의 대표적인 수필이다. 1950년 말 과거의 친일파들은 뉘우침없이 정치 일선에 나왔고, 지도자들은 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았다. '지조론'에 나타나는 매서운 질책은 민족을 위한 양심의 절규였다. 광복 후 최초의 국어·국사교과서 편찬곧고 반듯한 성품 정치비평 많이 남겨불의·부정맞서 지식인으로 책임 다해'마지막 선비' '지사문인'으로도 불려'지훈 문학관' 산책로에 시공원 조성5·16 이후 그는 '혁명정부에 직언하다' 등의 논설을 쓰는 한편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한 서명 운동을 주동해 정치교수에 몰리기도 했다. 그는 항상 사직서를 지니고 다녔다. 그는 시대의 지성으로서 추상(秋霜)같은 정치 비평을 많이 남겼으며 어느 정권 하에서도 불의와 부정에 맞서 싸웠다.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시대적 양심이었다. 이러한 그를 세상은 '마지막 선비' 또는 '지사문인(志士文人)'이라 불렀다. 조지훈은 늘 곧고 반듯했지만 해학도 뛰어났다. 산만한 듯하면서도 조리있고, 우스갯소리 같으면서도 품위 있는 그의 유머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생전에 그는 한 학생과 파자(破字)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달밤에 개가 징검다리를 건너는 글자는?" "그럴 연(然)자입니다.""나무 위에서 또 또 또 나팔을 부는 글자는?""뽕나무 상(桑)자입니다.""그럼, 사람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글자는?""그것은 모르겠습니다.""자네도 참, 그렇게 쉬운 글자도 모르다니. 그건 말이야, 한글 '스'자라네." 문학관 뒤 산자락을 타고 산책로가 이어진다. 길섶에는 시비들이 늘어서 있다. 산책로는 부용봉의 가운데 봉우리의 기슭에 닿는다. 그곳에 지훈시공원이 있다. '승무' '낙화' '다부원에서' 등 27개의 시비와 청동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있고 그 가운데 시인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1968년 5월17일 고혈압으로 토혈한 후 입원했으며 기관지 확장증으로 19일 세상을 떠났다. 48세였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디지털영양군지. 지훈문학관 누리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마을 지훈시공원에는 '승무' '낙화' '다부원에서' 등 27개의 시비와 청동조각상들이 어우러져 있고 그 가운데 시인의 동상이 서 있다. 영양에서 태어난 조지훈은 서정시를 대표하는 청록파 시인으로, 맑은 지조와 곧은 절개로 일생을 살아 '마지막 선비'라 불리기도 했다.조지훈이 태어난 호은종택은 주실마을 중심부의 맨 앞에 자리한다.시인은 사랑마루와 연접한 사랑방에서 태어났다.영양 주실마을에 있는 월록서당. 조지훈은 어린시절 일제 하의 정규교육을 받지 않고 월록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조선어, 수신, 역사, 도서 등을 공부했다 .조지훈의 삶과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지훈문학관'. 소년 시절 즐겨 읽었던 책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시대를 고민한 작품까지 시인의 전 생애가 한 편의 전기처럼 펼쳐진다.
2021.11.30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4] 일제강점기에 국문학 연구...4·19땐 시위 주도...민족에 살고 민족에 죽고자 했던 조윤제
#1. 민족을 위한 학문도 독립으로 가는 길이다1926년 1월1일 아침, 책상에 펼쳐둔 신문에서 짙은 잉크 냄새가 흘렀다.'해가 갈사록 우리의 서름은 깊퍼가고 해가 올사록 우리의 감정은 새로워진다. 우리의 세계는 차별, 속박, 우수, 암흑의 세계이다. 차별에서 평등으로, 속박에서 자유로, 우수에서 환희로, 암흑에서 광명으로 새 천지 새 세계를 전개케 하는 것이….'조윤제(趙潤濟·1904~1976)의 눈이 반짝거렸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진학을 위해 고향 예천 지보리(知保里)를 떠난 지 거의 5년. 스물둘의 나이에 바로 그 새 천지, 새 세계가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독립운동을 하려면 밀고 나가야 한다." 1924년 경성제국대학에 예과(豫科)가 창설되자마자 문과 제1회 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지금은 법문학부 문학과 진학이 코앞이었다. 그것도 유일한 조선어문학 전공자였다. 출세가 보장되는 법학이나 의학 계열이 아닌 조선어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갈망!조윤제는 생육신 조려(趙旅)의 16세손이었다. 퇴계 이황을 지극히 존경해 도산서원의 남녘에서 태어났다는 뜻에서 호를 도남(陶南)으로 짓기까지 했다. 의기 넘치는 성정다운 행보였다.그런데 입학 후 얼마 되지 않은 4월25일 순종이 승하했다. 장례일은 능 조성이 끝나는 6월10일로 잡혔다. 일제는 장례식을 빌미로 조선 민중들이 봉기라도 일으킬까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실제로 수많은 학교와 단체에서 시위를 준비하는 가운데 조윤제도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가슴은 뜨거웠으나 우여곡절 끝에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뜻만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조윤제는 낙심했다."동지가 많은 만주로 망명할까?"하지만 이내 마음을 달리했다."민족을 위한 학문도 독립으로 가는 길이다. 우리 민족정신의 결정체인 고전문학 연구가 내 할 몫이다."경성제국대 입학 조선어문학 전공조선어문학회·진단학회 결성 주도조선문학을 학문 인식한 최초 학자'조선시가사강' '국문학사' 등 펴내1948년 남북협상 참여 등 통일운동4·19혁명때 대학교수단 시위 앞장1974년 72세로 영남대서 정년퇴임묘비명 '민족에 살고 민족에 죽는다'#2. 조선문학을 학문으로 인식한 최초의 학자 조윤제는 학문에 열중했지만 환경이 너무도 열악했다. "스승도 선배도 없는 것이 황무지나 다름없구나."홀로 손품과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에 관계된 문헌이라면 모조리 뒤졌고 국문학과 관련됐다 싶으면 무조건 끌어 모았다. 그렇게 고군분투한 끝에 논문 '조선소설의 연구'를 제출하고 졸업했다. 이후 조윤제는 3년간 법문학부 조수로 지내며 학자로서의 기초를 보다 탄탄하게 다졌다. 1931년에는 전공 후배들과 '조선어문학회'를 결성해 '조선어문학회보'를 발간하기도 했다. 국문학 잡지로서는 최초였다. 그러던 1934년 봄,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이병도(李丙燾), 송석하(宋錫夏), 손진태(孫晉泰) 등과 의기투합했다. "우리의 역사, 언어, 문학을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학자들이 주도하는 작금의 현실을 타개해야 하네.""지당하이. 우리 것이니 우리 힘으로 연구하고 우리 글로 발표하세.""하면 우리 학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으로 무엇이 좋겠는가?""'진단'이 어떠한가? 예로부터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이르는 이름이 아닌가."이로써 '진단학회(震檀學會)'가 탄생했다.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을 통해 일본에 항쟁한다는 뜻이었다. 학계에 활력이 일었고, 조선 관련 학문에 대해서만큼은 권위도 세울 수 있었다.조윤제가 동분서주하는 동안 그의 은사가 '향가 및 이두의 연구'를 통해 향가를 해독해 내놓았다. 문제는 그 은사가 일본인 교수 오쿠라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를 두고 일본학계에서 자기들끼리 이러쿵저러쿵 논쟁까지 벌였다. 향가는 조선의 얼, 정신, 이념이 반영된 문학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개념적 장치가 없다 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조윤제는 조선학자로서 참담함을 느꼈다. 그리고 결심했다."우리 시가는 내가 연구할 것이다."조윤제는 시가의 형식을 중심으로 시가사(詩歌史)를 체계화했다. 발생(發生)시대, 향가(鄕歌)시대, 시가한역(韓譯)시대, 구악(舊樂)청산(淸算)시대, 가사송영(誦詠)시대, 시조문학발휘시대, 시가찬집(撰集)시대, 창곡(唱曲)왕성시대로 역사를 나누고 각 시대의 개관·양식·작품에 대해 논술했다. 그리고 이를 1937년에 '조선시가사강(朝鮮詩歌史綱)'으로 펴냈다. 이 저서는 우리 시가의 역사를 다룬 최초의 글로 조윤제의 왕성한 저술 활동의 시발점이 되었다.#3. 실천적 지식인의 민족사관 '조선시가사강'이 학계를 뒤집어놓은 바로 그해에 조윤제는 '교주 춘향전(校註 春香傳)'을 탈고했다. 본디 전공이 소설사였으니 그에 걸맞은 결과물이었다. 이 책에서 조윤제는 '춘향전'을 국문학의 백미로 인정하고 원전 비판의 새 방법을 제시했다. 이후 조윤제는 학문에 더 매달렸다. 하지만 현실이 받쳐주지 않았다. "연구할 시간도, 집필할 시간도 부족하니 이래서야 곤란하다."결국 1939년 3월 근무하고 있던 경성사범학교를 사임했다. 보성전문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하며 연구에 전념하고 자신의 학문을 재검토했다. 도서관장 손진태(孫晉泰), 대학 후배 이인영(李仁榮) 등과 토론하며 민족사관 입장 또한 공고히 했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우리 역사의 주체적 발전을 강조한 것이다.하지만 곧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조윤제는 경신학교·천주교신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에서 강사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1945년 8월 광복이 됐다."민족된 자로서 어느 누가 감격하지 않겠는가만,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시작한 국문학 연구에서 성과가 나타나자마자 민족해방이 왔으니 이 감격을 더 주체할 수가 없다."조윤제는 '우리 민족의 혈관을 흐르는 민족정신의 고동이 내 심금을 울리는' 감격 속에서 경성대학 법문학부 재건의 책임을 맡았다. 비로소 안정적으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과물은 혁혁했다. 1948년 출간한 '조선시가의 연구'가 시작이었다. 우리 문학을 양식별로 고찰한 첫 사업이었다. 이듬해에는 민족사관에 입각해 국문학의 형성과 발전을 체계화한 역작 '국문학사'를 펴냈다. 이 저서를 기본으로 삼아 국문학 연구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6·25전쟁 후인 1955년에는 '국문학개설'을 내놓았다. 국문학을 다각적으로 분석, 고찰한 국문학개론 계열의 효시였다. 이어서 1963년에는 '국문학사'를 개정한 '한국문학사'를 출간했다. 우리 문학을 학문으로 인식한 최초의 학자 조윤제는 민족해방과 통일을 위해 헌신한 실천적 지식인이기도 했다. 1948년의 평양 남북협상에 참여했고, 1960년 4·19혁명 당시에는 대학교수단 시위를 주도했다. 이후 통일운동에 참여하던 중 1965년 한일협정 비준에서 비롯된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가담했다. 그 과정에서 형무소에 끌려간 것도 모자라 대학에서 추방되는 고초도 겪었다. #4. 고향 지보에 대한 애정조윤제는 나라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고향에 대한 애정도 남달랐다. 6·25전쟁 당시 서울대 문리대학장으로 있던 그는 인민군에게 붙들렸다가 풀려난 뒤 고향 지보리로 돌아가 칩거했다. 동족상잔의 슬픔 속에서 선조들이 살던 땅을 밟다 보니 절절함이 솟구쳤다. 아버지 조용범(趙鏞範)과 어머니 청주한씨(淸州韓氏)의 품에서 근심 걱정 없던 어린 시절도 가슴이 시리도록 그리웠다. 그는 자신의 심사를 시(詩) '지포팔경(芝圃八景)'으로 옮겼다. '지포'는 '지보'의 별칭이다.달을 안은 태을산, 백운 토하는 만기봉, 봉산 나무꾼 노랫소리, 낙동강 어부 피리소리, 다 지켜보는 서산 기린, 와우대에서 본 농경, 학강나루 배, 지보암 저녁 종소리, 이렇게 여덟 개의 경치마다 고향의 안태를 빌었다.1952년 서울로 돌아간 조윤제는 성균관대 대학원장 및 부총장, 청구대학 교수 등을 거쳐 1974년 2월 영남대에서 정년퇴임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우리나라 학술발전에 미친 조윤제의 공로에 나라도 경의를 표했다. 1963년 제8회 대한민국학술원상 공로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이다. 그리고 그해 조윤제는 훗날 자신의 무덤 앞에 세울 묘비명을 직접 썼다.'민족에 살고 민족에 죽는다!(生於民族 死於民族)'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예천군예천군 지보면 지보리에 세워져 있는 삼선생공적기념비. 도남 조윤제를 비롯해 애국지사 조용구·조용필의 기념비가 나란히 서 있다. 가장 오른쪽이 도남 조윤제 기념비. 조윤제는 민족사관에 입각해 국문학의 기틀을 닦은 국문학자로 일제강점기 황무지나 다름없던 국문학 연구에 있어 개척자적 역할을 했다.도남 조윤제조윤제는 생전에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획을 그은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왼쪽부터 '조선시가사강' '교주 춘향전' '한국시가의 연구' '국문학사'.
2021.11.29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12·(끝)] 상주역과 청리역, 경북線 기찻길 따라 시간여행…레트로 감성 느끼며 잔잔한 힐링
상주역은 한산했다. 몇몇 사람들이 승강장을 빠져나가자 금세 텅 비어 고요했다. 철길 옆에는 몇 그루 수양벚나무가 봄만을 기다리는 듯 새초롬했고, 그늘을 드리운 승강장 지붕은 성실한 역무원처럼 몸을 곧게 세우고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철길 건널목을 건너 대합실로 향하는 캐노피 위로 상주역 코레일 역명판이 보인다. 그 너머로 정면 쪽 역 간판이 살짝 솟아있다. 옛 철도청 시절 사용했던 반달모양의 역명판을 재활용한 모습이다. 상주역은 크고 작은 사각형의 매스들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의 역사는 1971년에 지어진 것이지만 상주역의 시작은 일제강점기인 192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 상주역상주역은 김천에서 영주를 잇는 경북선에 속해 있다. 경북선은 일제강점기 때 건설된 철도로 당시에는 김천에서 안동을 잇는 노선이었다. 1921년에 착공되어 1931년 전 구간이 개통되었지만 태평양 전쟁기인 1944년 점촌에서 안동 사이의 철로는 전쟁 물자로 철거되었다. 현재의 경북선은 광복 이후 옛 노선을 수정하여 건설된 것으로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경북 북부지방의 생활권 형성과 물자의 집산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경북선은 기능이 점점 쇠약해지고 유독 폐역과 무인역이 많은 노선이 되었다. 상주역은 여전히 유인역이다. 비둘기호와 통일호 열차는 모두 다 없어지고 이제는 상·하행 각각 하루 5번 정차하는 무궁화호가 전부지만 상주역은 지금도 경북선 여객 양의 절반을 차지한다. 주말에는 부산에서 출발해 강릉까지 이어지는 열차를 추가로 운행하고 있다. 대합실은 넉넉하다. 냉난방이 되는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한쪽에는 상주의 특산물인 상주 쌀과 누에, 곶감 등이 전시되어 있다. 대합실 의자에 앉으면 텔레비전과 자판기 위로 오래된 흑백 사진이 커다랗게 보인다. '1925년 조선8도 전국 자전거대회' 사진이다. 조선팔도전국자전거대회는 상주역 개통을 기념해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자전거 왕 엄복동 선수와 상주 출신의 박상헌 선수가 일본인들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고 조선인 선수들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사진 속 우승 깃발을 쥔 사람들과 쌀가마니를 앞에 둔 사람들의 얼굴에서 매우 옅은 미소를 느낀다. 모두 우리의 선수들이다. #. 상주역1924년 시작…물자수송 핵심 역할지금은 무궁화호만 운행하는 유인역대합실엔 세월의 흔적 흑백사진 즐비역주변 자전거타고 구경하기 좋아읍성·옥터 등 곶감시장 가볼 만해역 광장이 훤하다. 아주 오래전 이곳을 가득 채웠을 팽팽한 긴장감을 상상해 본다. 역 광장 오른편에는 작은 무대가 있다. 그 옆에 상주역 공영 자전거 주차장이 있는데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해 준다. 자전거를 타고 자전거 도시 상주를 시원하게 달려보는 것도 좋겠다. 슬렁슬렁 걸으며 이 도시의 길을 즐겨보는 것도 좋다. 상주역은 상주시 성동동에 위치하고 성동은 상주읍성의 동쪽에 있다는 의미다. 성벽은 1912년 일제에 의해 무너졌지만 상주역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남문길, 성동길, 성하동 등과 같은 이름들은 사라진 것의 내력을 환기시킨다. 상주역 공영자전거 주차장 옆에는 철도변을 성동1길까지 따라 이어지는 숲길 산책로가 있다. 자전거에 대해 알려주는 벽화가 있고 소나무와 전나무와 이팝나무들 사이로 호젓한 소로가 나있다. 곳곳에 벤치와 파고라가 있어 어디에서 머물러도 편안하다. 상동동 제1건널목을 건너면 좁은 길을 따라 '칙칙폭폭 꼬마기차' '덜컹덜컹 기차' '바다 기차' 등과 같은 그림책 벽화가 함께하고 상주의 지명유래, 상주 읍성과 동서남북 성문들, 태평루, 상산관과 같은 옛 건물들에 대한 안내도 만날 수 있다. 산책로에서 남문2길로 빠져나가면 상주 중앙시장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가겟집들이 뜨문뜨문 있는 한적한 주택가를 조금 걷다 보면 상회나 얼음 수산물 가게, 설비집 등 다양한 점포들이 이어지면서 시장이 가까워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 골목 모퉁이에 걸린 '상주옥터' 안내판을 본다. 상주옥터는 1408년 경상도 관찰영이 상주에 있을 당시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박해 시기 동안, 경상도 서북부 지방의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 갇혔다가 순교했다.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도 이곳에서 대구 관덕정으로 이관되어 순교했다. 지금 옥터에는 자그마한 경당이 있고 마당에는 사라진 상주읍성의 성돌 두 개가 보존되어 있다. 옥터 근처에 상주 곶감시장이 있고 길을 하나 건너면 상주 중앙시장이다. 곧 상주 거리마다 주황빛 감들이 와르르 쏟아지겠다.한편 '문경∼상주∼김천' 내륙철도 사업이 가시화되면 상주 기차여행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사업은 총사업비 1조3714억원을 들여 중부내륙철도(서울 수서∼경북 문경)와 남부내륙철도(김천∼경남 거제)의 미연결 구간(73km)을 잇는 대형 국책사업이다. 현재 예비타당성조사가 진행중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예타를 통과하면 철도를 이용한 접근성이 좋아져 기차여행은 물론 상주의 관광산업은 날개를 달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2. 청리역경북선에는 26개의 역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열차가 서는 역은 10개. 그 중 절반 정도는 역무원이 없는 무인역이다. 상주역 남쪽에 있는 청리역도 2014년 역사 내 직원이 없는 무인역이 되었다. 상주역과 마찬가지로 1924년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으니 이곳에 기차가 선 지 100년이 다 되어간다. 역사는 1978년에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이다. 대합실에는 승객들을 위한 의자가 있고 텅 빈 매표창구가 하나 있다. 벽 위쪽에는 존애원과 체화당 등 청리면에 위치한 의미 깊은 곳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모두 역에서 근거리다. 지난 4월 MBC '손현주의 간이역'이 청리역에서 촬영되었는데 대합실 한쪽에 촬영 당시의 스냅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방송 이후 청리역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소소히 늘었다고 한다.#. 청리역2014년부터 직원없는 무인역 운영올 4월에 '손현주의 간이역' 촬영방송후 찾아오는 사람 소소히 늘어통통방앗간·논두렁길·공동빨래터사진작가들에겐 이미 유명한 장소역 광장이라 할 만한 공간은 없다. 역을 빠져나오면 곧장 길 양쪽과 정면으로 개인택시, 역전분식, 중국집, 역전다방, 이발소 등의 역전그룹이 펼쳐진다. 간이역에 대한 아련한 기억에는 언제나 역 앞의 풍경이 큰 자리를 차지하는데 청리역 역시 정감 넘치는 역전 풍경을 가지고 있다. 역전그룹의 조용한 환호를 뚫고 통통 방앗간을 지나 청하 4건널목을 건너 한적한 논두렁길을 조금 걸으면 50년 된 공동 빨래터도 볼 수 있다. 사실 청리역은 사진가들에게 이미 유명한 곳이다. 들이 황금색으로 물들 무렵이면 청리교 위에는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기차는 황금 들녘의 가운데를 뚫고 달려오며 땡땡 땡땡 인사를 한다. 이제 들은 비워져 서늘하게 눈부신 햇살아래 깊은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다. 그 휴식의 한가운데로, 저기 기차가 온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이제는 상·하행 각각 하루 5번 정차하는 무궁화호가 전부지만 상주역은 지금도 경북선 여객 양의 절반을 차지한다. 역에서 빠져나와 슬렁슬렁 걸으며 옛 추억을 더듬어보는 것이 기차여행의 묘미이다.상주역 공영 자전거 주차장에서는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해 주는데, 자전거를 타고 상주를 시원하게 달려보는 것도 그만이다.상주 출신 자전거 선수 박상헌의 이력을 새긴 표지석. 그는 1925년 조선8도 전국 자전거대회에서 일본인을 제치고 우승을 차지했다.상주역 남쪽에 있는 청리역의 대합실. 청리면에 위치한 의미 깊은 곳들의 사진이 걸려 있고, 방송에 소개되면서 찾아오는 관광객이 늘었다고 한다.청리역을 빠져나와 천천히 걷다 보면 50년 된 공동 빨래터도 볼 수 있다.
2021.11.25
[인재향 영양 .11] 시인 오일도…일제강점기 詩 전문지 '시원' 창간…조선 문단에 예술문화 꽃 피워
다섯 칸 솟을대문이 아담하다. 대문 옆 담벼락에는 작은 화단이 가꾸어져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중문간을 사이에 두고 좌측에 1칸 규모의 작은 방이 있고 우측에는 팔작지붕에 마루가 있는 사랑채가 자리한다. 중문 너머 안채까지 모두 44칸의 한옥이지만 담박하다는 느낌이 크다. 1901년 이곳에서 시인 오일도(吳一島·1901~1946)가 태어났다. 그는 사랑채의 온돌방에서 생활했고 한 칸 작은 방이 그의 글방이었다고 한다. 150년이 넘은 집이지만 마루가 반들거린다. 지금도 후손이 살고 있어 집안 어디에나 생기로운 자취가 가득하다. 1925년 '한가람 백사장에서'로 등단문예동인지 시문학 등에 서정시 발표한시들, 암울한 시대 민족 슬픔 다뤄맏형에 자금 얻어 창간한 전문지 '시원'강점기 조선시인 작품 발표 장 역할수많은 시인·작품 세상에 알렸지만정작 생전에 시집 한 권도 출판 안해유고詩 '현대시학' 통해 세상에 알려져#1. 감천마을과 오일도, 그리고 시일월산에서 발원한 반변천이 영양읍의 남쪽에서 초승달처럼 굽이지는 곳에 감천(甘川)마을이 자리한다. 큰 내가 마을 앞을 흐른다고, 혹은 마을 뒤 산기슭에 단맛이 나는 좋은 물이 샘솟는다고, 또는 마을에 감나무가 많다고 감천이라 했다 한다. 마을은 낙안오씨(樂安吳氏) 집성촌이다. 400여 년 전 통정대부를 지낸 오시준(吳時俊)이 처음 터를 잡았다고 전한다. 천변에서 조금씩 물러난 구릉진 땅의 형세대로 집들이 들어서 있다. 기와를 얹은 흙돌담 길이 넉넉하게 휘어지며 부드럽게 울렁인다. 오일도의 생가는 이 마을의 한가운데 자리한다. 그의 조부 오시동(吳時東)이 1864년에 지은 집이다. 오일도의 본명은 희병(熙秉), 일도는 아호다. 입향조 오시준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오익휴(吳益休), 어머니는 의흥박씨(義興朴氏)다. 아버지 오익휴는 천석의 거부로 오일도는 넉넉한 가풍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는 8세부터 14세까지 마을의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1915년 뒤늦게 영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이른 1918년에 졸업했다. 그리고 전국의 수재들이 모여드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합격했지만 졸업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글방은 너무나 고요해서 차마 열어보지 못했다. 어쩐지 그의 고요한 침잠을 흩트릴 것만 같아서. '작은 방 안에/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 피우고/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저녁놀 中) 오일도는 1922년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그리고 이듬해 릿쿄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학업 중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시 '한가람 백사장에서'로 등단했다. '한가람 백사장은/ 흰 갈매기 놀던 곳/ 흰 갈매기 어디가고 갈가마귀 놀단 말가./ 교하(橋下)에 푸른 물은/ 의구(依舊)히 흐르건만/ 이처럼 변하였노.'한민족의 한(恨)이 서린 영탄이다. 그는 1929년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해 1년 동안 덕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근화학교(槿花學校)에서 무보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1931년 문예동인지 '시문학'과 종합문예지인 '문예월간' 등에 서정시를 발표했다.이후 오일도는 1935년 2월에 맏형 희태(熙台)로부터 자금을 얻어 시 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했다. '시원'은 1935년 12월에 5호를 내고 발행이 중단되었지만 조선 문단 시인들의 작품 발표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특히 우리 현대시의 발전 속도를 한층 빠르게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일도는 시원 창간호 편집후기에 이렇게 썼다. "문학은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우리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 한다. 여기 본지 '시원' 출생의 의의가 있다." 시원의 발행 중단은 오일도의 심신에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1936년 '을해명시선집(乙亥明詩選集)'을 발행하고, 1938년에는 조동진의 유고 시집인 '세림시집'을 발간하는 등 시대의 울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 시집은 지금도 한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자료들로 평가되고 있다.#2. 오일도 시문학공원과 시를 통한 저항마을 안쪽에는 감천지라는 연못이 있다. 동쪽 제방을 따라 멋진 노송들이 굼실굼실 가지를 뻗고 있다. 연못 뒤쪽에 오일도 시문학공원이 조성돼 있다. 나지막한 둔덕들이 올망졸망 펼쳐진 가운데 오솔길이 흐르고 굽이지는 길섶마다 그의 시를 새긴 비가 기다리며 서 있다.'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지금은 애수의 가을, 가을도 이미 깊었나니.'(내 연인이여! 가까이오렴)'밤새껏 저 바람 하늘에 높으니/ 뒷산에 우수수 감나무 잎 하나도 안 남았겠다.'(노변애가)오솔길을 한 바퀴 돌아 나와 '지하실의 달' 시비 옆에 책을 펼치고 앉은 그를 본다. 오일도의 작품은 한시의 현실주의 세계관과 한글시의 서정성이 조화를 이룬다. 식민지 현실을 다룬 한글시에서의 서정성은 매우 우울하고 비감에 가득한 우수 어린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한낮에도 광명을 등진/ 반역의 슬픈 유족, 오오 올빼미여!/ 자유는/ 이 땅에서 빼앗긴 지 오래였나니/ 혈전의 네 날카로운 주둥아리/ 차디찬 역사를 씹으며 이대로 감인할 건가.'(올빼미)이와는 달리 그의 한시 세계는 일제의 공출이나 징용 등과 같은 내용이 주제를 이루며 현실을 보고 슬픔과 분노를 느끼는 일에 적극적이다. '나의 집은 한길 가 아침저녁으로 수레가 잇닫는다.(吾家大路邊 朝暮車連綿) 보내고 또 보내는 눈물 어이 끝나리. 언제 돌아오나 물으면 대답은 아득할 뿐.(送送淚何盡 歸期問杳然)' '징용차를 보내며(送徵用車)'라는 시다. 그의 한시에는 진실로 하고 싶은 말들이 처절하게 담겨 있다. 나태주 시인은 그의 시에 대해 '억센 항변과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는 시들'이라 했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더욱 강화되자 오일도는 1942년 낙향했다. 그리고 그는 '과정기(瓜亭記)' 등 수필을 쓰면서 긴 칩거에 들었다. 광복이 되자 상경해 문학 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민족민주 진영인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에 입당해 자주독립국가와 민주주의 수립에 뜻을 두었다. 특히 그는 '시원'의 복간을 위해 노력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때문에 깊은 우울에 빠져 폭음으로 나날을 보냈다. 결국 그는 1946년 간경화증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2월28일 맏아들의 집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감천마을의 언덕에서 자신의 시들에 둘러싸여 책을 펼친 그는 여전히 젊다. 한 문학평론가는 1938년 '사해공론(四海公論)'의 '문단인물지(誌)'에 오일도에 대해 이렇게 썼다.'일도 오군은 너무 선인(善人)이고 너무 고독한 친구이기 때문에, 즉 그의 인생에서 나의 인생을 발견하기 때문에 나는 고통 없이 군을 대하지 못한다. (중략) 이 친구는 눈물이 너무 많아서 시를 못 쓴다. 미제라블한 오일도.'그는 수많은 시인과 작품을 세상에 알렸지만 정작 자신의 시집은 생전 한 권도 출판하지 못했다. 그의 유고 시들은 1973년이 되어서야 '현대시학'을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3년 뒤인 1976년에는 유고 시집인 '저녁놀'이 근역서재에서 발간되었다. 이들 유고는 오일도 시인이 생전에 조지훈 선생에게 맡겨 두었던 것이라 한다. 오일도의 유고는 조지훈이 사망한 후 그의 고모인 시조 시인 조애영 선생이 묶었다. 이후에 '지하실의 달'이 문화공론사에서 출간되었고 1988년에는 영양 출신 시인인 이병각·조지훈·조동진·오일도 네 사람의 시를 묶어 낸 '영양 시선집'이 발행됐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디지털영양군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잡지백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오일도 시공원 입구에 들어서면 책을 펼쳐 들고 앉아 있는 시인을 만날 수 있다. 그 옆에는 '지하실의 달' 시비가 있다. 오일도는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며 억센 항변과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는 시들을 썼다.오일도 시공원에는 '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누른 포도잎' '그믐밤' '코스모스' '가을하늘' 등 그의 시를 새겨 넣은 바윗돌들이 나지막한 둔덕 가운데 서 있다.시인 오일도 생가의 사랑채. 1901년 영양에서 태어난 그는 사랑채의 온돌방에서 생활했고 한 칸 작은 방은 그의 글방이었다고 한다.
2021.11.23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3] "조선 선비가 자기 역사를 모르다니"...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 저술 나선 권문해
연산군때 무오사화로 가문 큰 고초1560년 별시문과 급제 집안 일으켜방대한 자료수집 대동운부군옥 집필지리·나라·성씨 등 11개 항목 20권 초고집필 초간정 1739년 옛터 재건#1. 오복(五福)을 이을 자손사랑채 대소재(大疎齋) 마루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학가산 능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신을 신고 발을 내디뎠다. 수십 보를 걸어 닿은 곳은 집 앞에 자리한 향나무 아래였다."할아버님, 기뻐해 주십시오. 소손, 향시에서 장원을 했습니다."권지(權祉)의 아들, 19세의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였다. 울컥해진 그가 향나무를 향해 말을 이었다."소손이 집안을 일으킬 것입니다. 나아가 이 나라에 커다란 보탬이 될 것입니다."50여 년 전만 해도 뜨르르한 가문이었다. 특히 할아버지 권오상을 비롯한 오행·오기·오복·오륜 5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해 조정으로부터 '오복문(五福門)'이라 칭송받기도 했다. 하지만 복은 오래 머물러주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4)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화근이 돼 무오사화가 터진 것이다. 김종직이 부관참시되는 등 수많은 선비가 화를 면치 못했다.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셋째 권오복도 예외가 아니었다. 잔인하게 능지처참 당했고 다른 네 형제도 유배를 떠났다. 가문의 몰락이었다.다행스럽게도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섯째 권오상이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전남 강진에서 고향인 예천 죽림리로 돌아온 그의 짐에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바로 지금 권문해가 보고 선 향나무였다. 마음을 가다듬은 권문해는 퇴계 이황을 찾아갔다. 대학자의 그늘에서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등과 더불어 학문의 지경을 넓혔다. 이는 1560년(명종15) 별시 문과 급제로 이어졌다.권문해는 형조좌랑·예조정랑 등을 거쳐 1570년(선조3) 영천(榮川·지금의 영주)군수로 나아갔다. 임기를 마친 후 도성으로 돌아가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 등을 지낸 뒤 안동부사·청주목사·공주목사의 지방관직을 다시금 수행했다. 그렇게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권문해는 한 가지 사실로 늘 마음이 아팠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얕잡아보는 뭇지식인의 태도였다."조선의 선비들이 중국의 역사와 역대 치란흥망(治亂興亡)에 대해서는 상세히 꿰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의 역사는 문자가 없던 옛날의 일처럼 아득하게 여긴다. 눈앞의 물건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을 응시하는 짓과 다를 바가 없으니 실로 안타깝구나." 그러면서 권문해는 '운부군옥(韻府群玉)'을 떠올렸다. 운부군옥은 원나라의 음시부(陰時夫)가 중국의 역사를 운별로 정리, 배열해 지은 사전이었다."우리에게도 일목요연한 사전이 필요하다."#2. 대동운부군옥의 탄생초간정사(草澗精舍) 아래로 물소리가 야단스러웠다. 권문해는 바로 앞의 원고에 몰두하느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공주목사에서 물러나 예천 고향으로 돌아온 이래 하루같이 매달린 작업이었다. 바로 동방(東方)에 자리한 대국(大國) 우리나라의 운부군옥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 초고 집필이었다. 이를 위해 방대한 분량의 자료도 모았다. '삼국사기' '계원필경' '신라수이전' '은대문집' 등을 포함한 우리나라 저서 174종과 '사기' '한서' 등을 비롯한 중국 저서 15종 등이 그것이다.집필의 원칙도 명료했다. "하나, 민족자존의 견지에서 방언과 속명 등 우리 고유의 것들을 그대로 기록한다. 둘, 원본에 충실하여 서로 모순되는 기록이라도 내 마음대로 가감하지 않는다. 셋, 자료를 최대한 광범위하게 다룬다. 넷, 후대에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은 더욱 중요하게 다룬다. 다섯, 유학의 뜻을 존숭한다."집필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조정에서 어명이 내려왔다."임금께서 그대를 원합니다. 속히 입궐하십시오."권문해는 다시 도성으로 불려 올라갔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청직의 소임을 다하는 동안에도 권문해는 자료 수집과 초고 집필을 쉬지 않았다. 이는 1584년(선조17)년에 부사의 직을 명 받아 대구로 내려와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1587년(선조20) 11월26일(음 10월27일) 본격적으로 정서 작업에 돌입했다. 분류체계는 '운부군옥'을 참고해 한자의 상평성(上平聲) 15운, 하평성(下平聲) 15운, 상성(上聲) 29운, 거성(去聲) 30운, 입성(入聲) 17운의 총 106운으로 세웠다. 내용은 우리나라의 지리, 나라, 성씨, 인명, 효자, 열녀, 수령(守令), 신선, 나무, 화초, 동물 등 11가지 항목으로 설정했다. 범위는 단군 시기부터 당시 조선 선조조까지를 망라했다. "하면 제1운은 '동운(東韻)'이 되리."권문해가 조심스럽게 붓을 놀렸다.'움직인다는 뜻이다. 봄을 가리키는 방위다.((東/動也 春方也)/진나라 황제가 고구려왕 연을 정동장군 낙랑공에 봉했다[출전:남사](征東/晉帝封高句麗王璉爲征東將軍樂浪公[南史])'집필 의도에 걸맞게 권문해는 역사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삼한, 삼국, 고려의 역대 왕은 물론이고 말갈, 거란, 몽골, 왜의 역사까지 실었다. 1589년(선조22) 20권 20책으로 집필이 완료되었다. 만일에 대비해 두 질을 더 만들어 두기까지 했다. 대장정을 마무리한 권문해가 성주에 머물던 벗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찾아갔다. '대동운부군옥'의 완고 소식에 정구가 반색했다."식견을 넓히고 싶으니 부디 빌려주셨으면 합니다."내심 걱정이 됐지만 권문해는 한 질을 빌려줬다. 그런데 얼마 뒤 정구의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타버리고야 말았다. 권문해는 속이 상했으나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고 너그러이 넘겼다.그로부터 2년이 흐른 1591년(선조24) 사간이 된 권문해를 퇴계 이황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찾아왔다. '대동운부군옥'을 살펴본 김성일이 감탄했다."그냥 두기 아깝습니다. 이러한 역작은 나라에서 보급해야 합니다."권문해는 흔쾌히 또 한 질을 김성일에게 넘겼다. 그러는 동안 권문해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집필로 인한 과로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권문해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11일(음 6월23일)에 사간의 직을 내놓고 도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의 부음을 들은 임금이 명했다."예조는 들으라. 권문해의 상여를 지극정성으로 고향까지 호송하라."김성일은 벗의 이른 죽음을 통탄하며 홍문관의 책임자로서 대동운부군옥 간행을 준비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북새통 와중에 사라져 버렸다. 이 사실에 아들 권별(權鼈)은 절통했다. 남은 하나를 소중히 보관하며 한 질을 더 필사해 두었다가 훗날 정산서원(鼎山書院)에 모셨다. 나아가 아버지가 수집해둔 장서의 힘으로 '해동잡록(海東雜錄)'을 펴냈다. 14책 규모의 방대한 인물사전이었다. 부전자전이었다.세월이 흘러 1798년(정조22) 7세손 권진락(權進洛)이 다시 출간을 준비했다. 대사헌을 역임한 정범조(丁範祖)에게서 서문을 받는 것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 그리고 1812년(순조12) 본격적으로 간행을 시작해 1836년(헌종2) 드디어 대동운부군옥을 완간했다. 권문해 사후 245년만의 일이었다.#3. 초간(草澗)으로서의 삶'풀 초(草)'와 '산골 물 간(澗)'의 호처럼 권문해는 청섬(淸贍), 맑음이 넘치는 삶을 살았다. 그가 '대동운부군옥'의 초고를 집필한 정자 '초간정(草澗亭)'도 그의 호에서 따왔다. 정자의 이름은 본래 '초간정사(草澗精舍)'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말았다. 1626년(인조 4) 권문해의 아들인 죽소(竹所) 권별(權鼈)이 재건했는데 이 역시 화재로 타고 말았다. 100년이 넘도록 방치되다 1739년(영조 15)에 현손인 권봉의(權鳳儀)가 옛 터에 중수했다.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 건물 중앙에 방 한 칸을 배치했다. 계곡 쪽으로 난간을 설치했다. 계곡의 바위 위에 막돌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세운 팔작지붕 건물이다. 금곡천이 보이는 4m 높이 절벽에 바짝 붙어 자리한 정자의 풍모는 더없이 매혹적이다. 처마 남쪽에는 초간정사(草澗精舍), 북쪽에는 초간정(草澗亭), 동쪽에는 석조헌(夕釣軒)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권문해의 정신은 '초간일기'에도 남아있다. 생전의 그는 1580년 11월부터 1591년 10월까지 약 10년간의 일정을 '선조일록' 117장, '초간일기' 90장, '신란일기' 34장으로 구분해 기록했다. 조정과 지방관아에서 일어난 일, 관리들의 생활, 당쟁에 관련된 인물을 비롯해 정치·국방·사회·교육·문화·지리 등을 아울러 꼼꼼하게 적었다.권문해는 사후에 나라가 내린 불천위(不遷位)가 됐다. 신주가 모셔진 초간종택 사당에서 초간정사까지 도보로 40여 분 거리. 그사이를 풀향과 물소리가 부지런히 오간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 : 예천군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자리한 초간정.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권문해가 지은 정자로, 물을 굽어보는 바위 위에 터를 닦아 앉은 풍모가 더없이 매혹적이다.초간정 인근에 있는 초간권선생신도비.예천군 용문면 예천권씨 초간종택은 1589년(선조 22) 권문해의 할아버지인 권오상이 지은 집으로, 오른쪽 뒤편에 있는 사당에 권문해의 불천위가 모셔져 있다.
2021.11.22
[인재향 영양 .10] 아나키스트 엄순봉 의사…불꽃처럼 살다간 젊은 독립투사…사형 순간에도 "조선독립 만세"
영양읍에서 영해로 가는 길목에 대천리가 있다. 읍에 속해있지만 사방 산인 골짜기에 들이 상당한 마을이다. 마을 북쪽의 산은 옥산(玉山)이라 한다. '신선이 구슬을 가지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간 산'이다. 그 아래에 옥산마을이 있다. 옥산교 건너 마을 안을 천 따라 조금 들어가다 보면 왼쪽 길섶에 비석 하나가 낮게 서 있다. 반듯한 직사각형의 까맣고 매끄러운 비석. 어떤 설명도, 어떤 안내도 없이 거기에는 다만 이렇게 새겨져 있다. '독립투사엄순봉지사생가지(獨立鬪士嚴舜奉義士生家址)'.가난한 어린시절 교육 못받았지만호방한 기백 의협심 책임감 강한 소년만주서 日폭압 목격후 독립운동 투신김좌진장군 휘하에서 막료로 활약상하이서 남화한인청년동맹 가입류자명 영향받아 아나키즘에 심취항일구국연맹 결성 무장투쟁 나서흑색공포단 행동부원으로 맹활약일본공사 암살시도한 육삼정의거거사당일 日에 의해 실패로 끝나정보넘긴 이용로 사살했지만 체포동지와 항일투쟁하다 30대에 생 마감#1. 엄순봉엄순봉은 1903년 대천리 옥산마을에서 태어났다.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문헌마다 달라 1905년 혹은 1906년이라는 기록도 있다. 이명은 형순(亨淳), 호는 추수(秋水)다. '가을철의 맑은 물'은 '번쩍이는 칼 빛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한다. 그의 집은 매우 가난했다. 때문에 어린 시절 교육을 제대로 받지는 못했지만 기백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었으며 책임감이 강한 소년이었다고 한다. 18세 무렵에는 영양읍 하원리 음지마을에 있던 서당에서 잠시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러다 1922년 그는 만주로 떠났다. 홀로였는지 혹은 다른 가족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도 확실하지 않다.엄순봉은 만주에서 일제의 강압적이고 야만적인 폭압을 목격하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김좌진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청년층 막료(幕僚)의 한사람으로서 활약했다. 1929년에는 만주에 있는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의 청년부장에 선임됐다. 한족총연합회는 한국 청년층의 결집을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이때 동지들과 함께 훈련하며 자주성을 기르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바로 이듬해인 1930년 1월 김좌진 장군이 피살당한다. 이미 여러 선배 지도자들을 잃은 상황이었다. 이즈음 엄순봉은 재만 조선인 아나키스트연맹에 가입하면서 아나키스트로 변신하게 된다.#2. 무장 투쟁에 뛰어들다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엄순봉은 만주를 떠나 1932년 북경을 거쳐 상하이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중순 남화한인청년동맹에 가입했다. 남화한인청년동맹은 재만 조선인 아나키스트연맹이 상하이로 철수하면서 전투체제로 개편한 단체다.엄순봉은 상하이에서 류자명의 영향을 받아 아나키즘에 깊이 있게 심취하게 된다. 1931년 11월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중국인과 일본인 무정부주의자와 연대해 '항일구국연맹'이라는 연합체를 결성하고 적극적인 무장투쟁에 나선다. 특히 항일구국연맹은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이라고 불린 행동부를 두었는데, 핵심 구성원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의 맹원들이었다. 이회영, 정화암이 지휘하고, 중국인 왕아초가 재정과 무기 공급을 책임졌다. 단원으로는 백정기, 이용준, 이강훈, 엄순봉 등이었다. 엄순봉은 이들과 더불어 북경과 상하이 사이를 무수히 오가며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32년 이회영이 일제에 의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곧이어 1933년 3월 일본 육군대신 아라키를 중심으로 한 일본 군벌은 주중공사 아리요시에게 4천만 엔(미화 2천만 달러 상당)을 주고 중국 국민당 내의 친일분자 및 패잔군벌 등을 매수할 음모를 꾸민다. 중국인 사이의 내분을 조장해 반만항일(反滿抗日)운동의 기세를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무엇보다 한인 독립운동가 탄압에 중국이 협력하게 할 목적이었다. 이를 위해 아리요시는 장제스의 국민정부에 기생하면서 일본에 부역하고 있는 인사들과 일본군사령부의 고급 장성들이 자리를 같이하는 연회를 기획한다. 1933년 3월17일 상하이 공동조계에 있는 '육삼정'이라는 고급 요정에서였다. 정보를 미리 입수한 흑색공포단은 연회를 습격해 아리요시 등을 폭살하기로 계획한다. 거사에는 류자명, 원심창, 백정기, 이강훈, 이용준, 정화암, 오면직, 정현섭, 김성수, 이달, 정해리, 김지강, 박기성, 이규창, 엄순봉 등이 참여했다. 실행에는 백정기, 원심창, 이강훈이 선출되었고 엄순봉은 후보자로 결정됐다.이들은 윤봉길 의사 의거 후 김구 주석이 상하이를 떠나 가흥으로 이동할 때 맡긴 폭탄 2개와 중국인 왕아초 등으로부터 조달된 권총 2자루와 탄환 20발, 그리고 수류탄 1개도 준비했다. 거사 일이 다가오면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러던 중 거사 당일 갑자기 덮친 일본군에 의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이 바로 '육삼정 의거'였다. 육삼정 의거는 실패한 거사였지만 '장제스 주석과의 밀약'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중국은 물론 침체기의 국내 항일운동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특히 육삼정 의거는 윤봉길의사 의거, 이봉창 의사 의거와 함께 한국독립운동사의 해외 3대 의거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3. 아나키스트 만세, 조선독립 만세육삼정 의거 이후인 1934년 엄순봉은 이회영의 아들인 이규호와 함께 조선거류민회의 이용로를 제거하기로 모의한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이용로가 반동분자를 규합해 독립운동을 방해하고 정보를 수집해 일제 경찰에 제보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마침내 1935년 3월 25일, 엄순봉은 이규호의 안내로 이용로의 집을 찾아가 사살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두 사람은 붙잡히고 말았다. 당시 주요 신문들은 '1935년 3월 25일 한인거류민회 고문 이용로를 암살한 30살 엄순봉과 21살 이규호를 조사한 일본영사경찰은 이들이 한국무정부주의당의 단원임을 밝혀내었다. 이들은 또한 1933년 3월의 아리요시의 암살기도, 1933년 8월의 옥관빈 암살, 1933년 12월의 프랑스 경찰의 고용원인 옥성빈의 암살에도 관계가 있다'고 전했다. 재판에 넘겨진 엄순봉은 결국 1936년 4월 24일 사형을 언도 받았다. 그는 구차하게 상고하지 않았다. 2년간 복역하다가 1938년 4월9일 사형장으로 끌려갔다. 입회한 법무관이 유언을 물었다. 엄순봉은 죽음 앞에서도 단호했다."설령 전할 말이 있다 하더라도 적인 너희들을 통해 유언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요 너희들도 사람이니 공통된 인류애로서 너희들에게 일언(一言)한다. 내가 과거에 행한 바는 압박을 받고 허덕이는 민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니, 원컨대 그대들은 가식된 논변과 법리론을 청산하고 참으로 인류를 정복·피정복이 없고 압박과 착취와 악행이 없는 진정한 평화의 세계를 만들어 인류 만대의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하라." 당시 사형을 집행한 형리의 말에 따르면 엄순봉은 형장으로 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조금도 당황하거나 초조해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순간 '조선독립 만세', '아나키스트 만세'를 삼창하고 운명했다고 전해진다.조선이 독립을 이루고 엄순봉은 196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영양읍내 군민회관 앞에는 영양 호국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 영양의 독립투사인 엄순봉·남자현, 의병장 김도현을 기리는 '영양 3의사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엄순봉의사기적비'에는 그의 짧지만 불꽃 같았던 생이 새겨져 있다. 비석에 새겨져 있는 그의 호는 추수(秋水)가 아닌 '추수(秋樹)'다. '가을 나무들처럼 자기 분신인 낙엽으로 세상의 거름이 된다는 뜻'이라 한다. 그는 번쩍이는 칼을 품고 살다 거름이 되었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디지털영양군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민족문제연구소 누리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경북 영양군 영양읍 서부리 호국공원에 있는 '영양 3의사 비'. 영양 출신 독립운동가 엄순봉·남자현, 의병장 김도현을 기리는 비로 1977년 10월 건립됐다. 오른쪽이 엄순봉의사기적비다.영양군 영양읍 대천리 옥산마을 안을 천 따라 조금 들어가면 왼쪽 길섶에 작은 비석이 나타난다. 엄순봉의 생가지 표지석으로, 옥산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기백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었으며 책임감이 강한 소년이었다고 한다.(사진 위) 엄순봉 생가지 표지석은 반듯한 직사각형의 까맣고 매끄러운 모양으로 비석에는 '독립투사엄순봉지사생가지(獨立鬪士嚴舜奉義士生家址)'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2021.11.16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2] 문종·단종을 가르친 조선 초 성리학의 대가 윤상은 어떻게 거위 뱃속의 진주를 꺼냈을까
#1. 관솔불 아래 책벌레 1374년 9월 신하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제31대 고려 공민왕의 뒤를 이어 10세의 우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보다 한 해 전인 1373년 10월 예촌 별동리(別洞里)에 똘망똘망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향리 윤선(尹善)의 아들 윤상(尹祥·1373~1455)이었다.윤선은 늘그막에 본 아들을 보며 감격에 젖었다."꿈에서 학을 받아 기이히 여겼더니 태몽이었구나."학은 관복의 흉배에 수놓는 길한 짐승이었다. 아들의 미래가 기대된 윤선은 밝고 슬기롭다는 뜻의 '철(哲)'로 이름을 지었다. 훗날 진사시에 합격해 '상(祥)'으로 바꿀 때까지 윤상은 20년 동안 윤철로 살았다. "집안이 별것 없기는 해도 윤선 어른의 소생이니 성품은 보장이 아닌가.""아무렴, 덕행은 두텁고 몸가짐은 청아한 분이 낳았는데 오죽하려고." 마을 사람들이 한입으로 예견한 대로 윤상은 어려서부터 행실이 남달랐다. 한마디로 어린 선비였다. 공부 욕심도 많았다. 한창 나가서 놀 나이에도 글을 익히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예천 관아의 사동(使童·잔심부름을 맡아하던 급사)이 되고부터는 공부에 더 집요해졌다."간밤에 상이 어쩌고 있는지 보았는가? 관솔불 아래서 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더군.""보다말다, 그러다 머리카락 태울까 걱정이야. 아무래도 예천에서 큰 인물이 날 듯하이."그런 윤상을 당시 수령이던 조용(趙庸·미상~1424)이 눈여겨보았다. 당대 성리학계의 대표 격이던 대학자 조용은 유심한 관찰 끝에 결심했다."나이답지 않게 신중하고 침착할 뿐만 아니라 총명하기까지 하니 내 키워봄직하다."조용은 결심하고 윤상을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윤상은 근면과 성실로 주경야독함으로써 스승의 기대에 부응했고 이는 곧 결실로 드러났다. 1392년(태조1) 약관 20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생원시 합격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당시는 조선 건국 초기로 분야별 업무가 산적한 시기였다. 이때 윤상은 동판내시부사(同判內侍府事)의 역할을 다해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윤상 등은 보조(補助)의 이익이 크니 그 공을 기록할 만하다. 포상하라."그리고 그로부터 3년이 흐른 1396년(태조5) 윤상은 24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했다. 집안을 일으켜 세운 커다란 경사였다.1373년 고려말 별동리서 출생관솔불 밝히고 주경야독 공부1396년 24세때 식년문과 급제김시습·김숙자 등 제자 길러내78세에 물러나 미호리 터잡아가르침 구하는 선비들 줄이어별세 다음해 불천위사당 건립'진주 삼킨 거위' 이야기 주인공#2. 성리학의 대가, 두 왕을 길러낸 스승 급제 후 선주유학교수, 보주유학교수, 서부교수, 산음감무, 조봉대부상주교수, 황간감무 등 지방관으로 내공을 쌓은 윤상은 집현전학사와 예문관제학 등을 거쳤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던 1421년(세종3)이었다. 왕이 윤상을 불렀다."세자의 스승이 되어 국본을 세우라. 내 그대를 믿는다."윤상은 기꺼이 받잡아 세자(문종)의 교육에 힘썼다. 그렇다고 윤상이 세자의 스승이기만 하지는 않았다. 본디 권력과는 먼 학관으로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무수했다. 실제로 그의 나이 63세이던 1435년(세종17)에 성균관의 수장인 대사성(大司成)이 되고부터는 후진 양성이 더 본격화되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김시습(金時習), 영남사림의 기반을 구축한 김숙자(金叔滋), 대제학 김구(金鉤) 등 그가 배출한 제자들이 이름을 혁혁히 날렸다. 그러는 동안 윤상의 머리에 서리가 잔뜩 내렸다. 결국 윤상은 69세가 되던 해에 사직을 청했다. 하지만 왕이 반려했다."불가하다. 그대가 늙었다 하나 학술이 정명하고 덕행이 높아 타의 지극한 모범이다. 아울러 따르는 제자가 많으니 그들이 실망할까 염려된다. 하니 과인의 곁에 더 머물라."한술 더 떠 원손(단종)의 성균관 입학을 계기로 박사(博士)로 임명해 힘을 더 실어주기까지 했다. 꼼짝없이 붙들린 윤상은 훗날 왕이 될 세자와 세손의 스승으로 도성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한 1450년, 팔순을 고작 2년 앞두고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무려 성균관 대사성만 16년을 역임한 역대 최고의 학관이었다. 이때 왕이 믿고 의지하던 스승과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며 승정원에 "전송에 성의를 다하고 예천관아로 하여금 매월 식물(食物)을 공궤(供饋)하게 하라"고 명함으로써 윤상의 말년을 알뜰하게 챙겼다.#3. '진주 삼킨 거위' 구한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성균관의 말단 정자에서 시작해 우두머리인 대사성으로 벼슬살이를 마무리한 윤상은 고향 예천의 미호리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지낼 수 없었다. 윤상에게서 가르침을 받겠다며 선비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윤상은 조선 개국 이래 으뜸가는 사범(師範)이라 불리는 대학자였다. 선비들이 멀리서도 찾아올 만했다. 윤상을 찾는 유생들이 끊이지 않다 보니 조정도 술렁였다. 급기야는 윤상을 다시 불러들이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하지만 워낙 연로한 탓에 고향에 남아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고, 가히 당시 성리학의 주종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그러던 1455년 윤상은 자신을 스승으로 모시는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쫓겨나기 약 석 달 전인 3월에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예천군 북쪽 성북산(城北山)의 볕이 잘 듣는 산기슭에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스승과의 영원한 이별을 슬퍼한 제자들의 곡소리가 산을 울렸다. 그로부터 한 해 뒤인 1456년(세조2)에 윤상을 제향하기 위한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 윤별동묘(尹別洞廟)가 미호리에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사당에는 윤상과 그의 부인 정부인 안동전씨(安東全氏)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해마다 음력 3월8일이면 예천윤씨(醴泉尹氏) 종가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1995년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93호로 지정되었으며, 사당 내에 보관돼 있던 별동집 목판은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진 뒤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생전에 윤상은 미호리 동쪽의 등성이에 자리한 정자 청심대(淸心台)를 즐겨 찾고는 했다. 산이 수려하고 내성천이 맑아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제자들과 더불어 강론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윤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풀어주었다."내 오래전 모처에 다녀오던 중에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렀지. 마루에 앉아 있는데 주인의 손자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구슬 한 개를 들고 촐랑대다가 그만 손에서 떨어뜨렸네. 마침 아이 옆에 있던 거위가 먹을 것인 줄 알고 그 구슬을 날름 집어 삼켜버렸고."눈을 반짝이는 제자들에게 윤상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한데 그 구슬이 꽤나 귀한 물건이었던 모양인지, 주인이 이만저만 화를 내지 않더군. 결국 그 화가 나한테까지 미쳤네. 한마디로 내가 훔쳤다, 이것이지. 그러면서 관에 가자고 성화를 부리기에 '저 거위도 묶어 하룻밤만 같이 있게 해주게. 하면 내일 아침에 틀림없이 구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네' 하고 부탁했네. 주인 입장에서야 난데없는 소리였겠으나 들어줘서 손해 볼 일도 아니고 날도 저물었으니 그러기로 되었지."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인의 무례함을 성토하는데 윤상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면 어찌 되었을꼬. 날이 밝아 거위가 똥을 누면서 해결이 됐지. 거기서 구슬이 나왔거든. 당연히 주인이 민망해하면서 왜 거위가 삼켰다고 진즉 말하지 않았느냐 하더군. 해서 '그랬다가는 홧김에 거위를 죽였을 것 아니오. 내가 하룻밤만 고생하면 될 것을' 했더니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사과를 하더군."그리고 인자한 얼굴로 덧붙였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범사에 침착하고 인내함으로써 큰 뜻을 이루기를 바라는 나의 진심을 알아들었으면 좋겠구나."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예천군윤상이 세상을 뜨고 한 해 뒤인 1456년에 그를 제향하기 위해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에 건립한 불천위사당 윤별동묘. 단정하게 정리된 입구를 따라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당을 볼 수 있다.윤별동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사당에는 윤상과 그의 부인 정부인 안동전씨(安東全氏)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윤상은 생전에 미호리 동쪽의 등성이에 자리한 정자 청심대(淸心台)를 즐겨 찾곤 했다.예천군 보문면 미호리 예천윤씨 집성촌. 윤상이 벼슬에서 물러나 터를 잡은 곳이다.
2021.11.15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1] "하늘이 내린 장수" 죽음 무릅 쓴 상소로 이순신 목숨 구한 명재상 정탁
시리즈를 시작하며…경북 예천은 천혜의 자연과 함께 유서 깊은 역사가 공존하는 고장이다. 특히 역사의 중심에 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인재향(人材鄕)으로 손꼽힌다. 명재상 약포 정탁을 비롯해 성리학의 대가 윤상,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의 저자인 권문해, 근대 이후 고전문학의 기틀을 닦은 국문학자 조윤제, 고려시대 반란을 진압한 충신 임지한, 구한말 국권수호에 앞장선 장화식, 천년고찰 용문사를 창건한 두운 선사 등 한 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인재들의 고장이 바로 예천이다. 그들의 올곧은 정신문화는 예천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공유하고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미래 예천'을 이끌어갈 원동력이기도 하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예천이 낳은 인재와 그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시리즈를 연재한다. 1편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을 구한 명재상 약포 정탁에 대해 다룬다.#1. 금당실의 군계일학형형한 눈빛의 청년이 걸음을 멈추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대번에 인상이 부드러워졌다."금당실이다!"오미봉이 눈에 가득 들어오자 청년은 고향에 돌아왔음을 절감했다. 이내 걸음을 재촉해 울창한 솔숲 사이를 빠르게 지나갔다. 막 약관의 나이에 이른 약포(藥圃) 정탁(鄭琢·1526~1605)이었다."이제 여기서 높이 날 준비를 하는 게다."정탁은 예천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의 집안이 예천에 입향하게 된 것은 안동사람이었던 그의 부친 정이충(鄭以忠)이 예천 금당곡 삼구동에 살던 한종걸(韓從傑)의 딸에게 장가들면서다. 이때부터 서원 정씨는 예천에 세거할 기틀을 놓았다. 정탁은 금당곡의 외가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10세까지 생활했다. 명민했던 그는 이름난 스승을 찾아 고작 11세에 안동의 가구촌(佳丘村)으로 넘어가 수학했고, 17세가 되던 해에는 퇴계 이황에게 입문해 학문을 심화했다. 그러는 동안 나라는 중종에서 인종, 다시 명종으로 왕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세월이 벼락같았다. 그 세월을 따라 정탁도 성인이 되었다.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야 했다. 약관의 나이에 다시 예천 고향으로 돌아 온 정탁은 공부에 더 전념했다. 22세가 되던 해에는 평생의 반려도 맞이했다. 고평사람 반충(潘)의 딸이었다. 이로써 예천에 완벽하게 뿌리를 내린 정탁은 1552년(명종7)의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명종13)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정탁의 첫 관직은 교서관의 말단 정자(正字)였다. 이후 예조정랑 등을 지낸 뒤 1568년(선조1)에는 춘추관의 기주관(記注官)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이어서 도승지, 대사성, 관찰사, 참판, 판서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82년과 1589년에는 각각 진하사(進賀使)와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도 다녀왔다. 왕의 신임이 두터웠다는 뜻이다.정탁은 참으로 맑고 바른 인재였다. 주변에서 늘 "고결하기가 마치 들판의 학 같고, 아름다운 광채를 머금은 옥과도 같다"며 고개를 주억거렸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마냥 부드럽기만 하지도 않았다. 강직한 성정으로도 유명했다. 이를 잘 아는 스승 남명 조식이 어느 날 집으로 정탁을 불렀다. 사제 간에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헤어지는 길에 조식이 정탁을 불러 세웠다."내 집에 소 한 마리가 있으니 끌고 가게.""스승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요?""자네의 민첩함과 날카로움을 보게. 날랜 말과 진배가 없지를 않나. 하나 세상은 둔하고 더딘 소의 기운도 있어야 멀리 갈 수 있는 법이지."깊은 깨달음을 얻은 정탁은 갈등과 충돌 없이 명분을 바로 세우는 데 진심을 다했다.#2. 난세의 명재상 1592년 4월13일 경상도 가덕도의 응봉봉수대가 급박하게 움직였다. "왜선이 출몰했습니다. 대략 90여 척이 부산포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봉수를 올려라! 파발을 띄워라!"다음 날 부산포는 긴박했다. 상륙한 왜선이 무려 여덟 배에 달하는 7백여 척으로 불어나 있었다. 관군과 백성들은 대경실색했다. 1만7천여 명의 왜군은 물밀 듯이 쏟아져 나왔다. 임진왜란의 발발이었다. 준비 안 된 전쟁에 파죽지세의 적, 왕부터 피신시켜야 했다. 당시 67세였던 정탁은 우찬성 겸 내의원 부제조로서 선조의 피란길을 호종했다. 계절은 봄이지만 마음은 한겨울이었다.우여곡절을 겪으며 평양성에 도착했지만 전선은 갈수록 악화됐다. 임진강 방어전투가 실패하면서 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침통한 표정의 선조가 명했다"의주로 옮기겠다."임금의 뜻에 정탁이 눈물로 호소했다."평양을 굳게 지킴으로써 국운의 회복을 도모해야 합니다. 한양을 놓친 것은 지난일이라 어쩔 수 없으나 이곳마저 버리셔서는 아니 됩니다."정탁의 호소에도 선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버리는 것이 아니다. 세자에게 힘을 줄 터이니 분조를 구성해 대응하라."간결한 명을 내린 선조는 의주로 떠나버렸다. 세자(광해군)를 중심으로 한 분조(分朝·임시파견정부)에는 영의정 최흥원, 형조판서 이헌국, 부제학 심충겸, 형조참판 윤자신, 동지 유자신, 병조참의 정사위, 승지 유희림 그리고 이사(貳師·세자시강원의 관직)의 직을 명받은 정탁이 포함됐다. 정탁은 영위사(迎慰使)로 파병 온 명나라의 관리와 장수를 접대하는 외교관 역할을 맡았다. 이후 세자와 함께 군사들을 모아 훈련 시키고 민심을 수습하는 등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최선과 전력을 다했다. 그러던 1594년(선조27) 9월 어명이 떨어졌다."관직의 유무, 서얼, 공사천(公私賤), 승려, 속인을 막론하고 인재를 천거하라. 내 그들을 들어 쓰리라."좌찬성이었던 정탁은 곽재우, 홍경신, 승려 유정(사명대사) 등 26명을 천거했다. 실제로 이들은 전란 극복과 국가재건에 큰 역할을 함으로써 정탁의 지인지감(知人之鑑), 즉 사람에 대한 탁월한 안목을 증명했다.일촉즉발의 전쟁은 계속됐다. 하지만 당쟁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데 뭉쳐 힘을 모아도 부족한데 날선 대립과 충돌은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억울한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정탁은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1596년 2월 충장공(忠將公) 김덕령(金德齡)이 의금부에 투옥됐다. 김덕령은 전라도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명장이었다. 가는 곳마다 왜군을 격파해 세자로부터 익호(翼虎·날개달린 호랑이)장군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에 첩보가 늦게 전달되는 중대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분노한 김덕령이 죄인을 장살했는데, 그가 도체찰사 윤근수의 노비였다. 결국 김덕령이 투옥되면서 일이 커지고 말았다. 이때 정탁이 나섰다."김덕령은 용맹이 절륜하고 지혜가 뛰어난 장수입니다. 나라에 절실한 인물입니다."명장이 필요한 때임을 강조한 정탁의 상소로 김덕령은 구명될 수 있었다. 그러던 차 이번에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 체포되었다. 정유재란(1597년)의 발발로 72세의 노령임에도 전장에 나갈 준비를 하던 정탁은 기함했다. 조신들의 모함과 왜군의 이간책 때문에 하늘이 내린 장수를 잃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한 차례 국문을 받고 이미 반죽음 상태가 돼 있었다. 선조 역시 단호했다. 누구도 이순신을 변호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두 처벌을 주장했다. 이순신의 목숨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이때 정탁이 상소를 올려 담대히 나섰다. 죽음을 무릅 쓴 상소였다."이순신은 장수의 재질을 지녔으며 수륙전에 뛰어난 재능을 겸비했습니다. 이러한 인물은 쉽게 얻을 수 없을뿐더러 백성들이 의지하는 바가 무척 크고 적이 매우 무서워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죄명이 엄중하고 조금도 용서할 구석이 없다고 판단해 공과 죄를 서로 비교해 보지 않고, 앞으로 더 큰 공을 세울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또 그간의 사정을 규명하지도 않고 끝내 큰 벌을 내린다면 공 있는 자와 능력 있는 자들은 앞으로 나라를 위해 더 이상 애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정탁의 호소에 류성룡·이원익 등도 이순신의 처벌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정탁의 상소문이 결국 선조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이순신은 죽음 직전에서 백의종군의 명령을 받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정탁의 구명으로 목숨을 구한 이순신은 명량대첩에서 대승하며 나라를 구했다. 정탁의 직언(直言)이 나라를 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3. 자경(自警),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는 삶"부귀, 이익, 출세는 운명에 달린 것이니 나에게 있는 것을 다할 뿐이다. 또한 배우는 자로서 배부름과 편안함을 구하지 않고, 민첩하게 일하며 말은 삼가고, 도(道)가 있는 곳에서 바르게 살 뿐이다."일흔다섯이 되면서 정탁은 자신의 소신을 지키며 벼슬에서 물러났다. 당시는 치사(致仕)라고 하여 고령이 되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이 법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지키는 이가 드물어 치사하는 인물은 욕심을 버린 깨끗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근세에 재상으로서 치사한 자는 오직 정종영, 심수경, 홍가신, 그리고 정탁뿐이었다"라고 써서 이름을 높였다.예천 고향에 돌아온 정탁은 내성천이 보이는 고평리에 '망호당(望湖堂)'이라 이름 붙인 집을 짓고 생활했다. 건너편 동호언덕에는 정자 읍호정(湖亭)을 지어 드나들었다. 무엇보다 그는 전란의 후유증을 수습하는 데 매진했다. 내성천이 범람할 때마다 물에 잠기는 고평들에 제방을 놓고, 고평동계를 조직해 황폐화된 향촌사회를 재건했다. 한평생 나라를 위해 진심을 다한 정탁은 1605년 고향 예천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가 세상을 뜨자 선조는 예조좌랑을 파견해 조문하도록 하고, 영전에 제사를 지내는 사제문을 내렸다.세상을 뜨기 1년 전 선조로부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호성(扈聖)공신3등에 봉해졌고, 사후인 1613년(광해군 4)에는 영의정과 위성(衛聖)공신1등에 추증됐다. 1635년(인조 13)에는 정간공(貞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곧을 정(貞)'과 '대쪽 간(簡)'이 의미하는 바는 이러했다. "도리를 지키고 벽처럼 우뚝하며 의리로 진퇴하며 역경에는 절개를 지키고 겸허와 공손으로 사람을 대했다. 경세를 바탕으로 명분을 바로잡고 마음가짐은 공정하고 충성스러우며 언론은 올바르고 공평했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 : 예천군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동호언덕 위에 위치한 읍호정. 약포 정탁이 벼슬에서 물러나 예천 고향에 내려왔을 때 지은 정자로, 내성천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치가 일품이다.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내성천 산기슭에 있는 도정서원. 서원의 사당에는 약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2021.11.08
[인재향 영양 .9] 남자현 지사…독립단체 분열되자 혈서로 단결 호소한 '독립군의 어머니'
석보로 가는 길은 온통 산과 들이다. 외로운 집 하나, 작물들을 위한 창고 두어 개가 들 가운데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석보면 면경계판을 지나자 길 양쪽 멀리 자그마한 솔숲들이 높아 처연하다. 옛날에는 아주 무성히 한데 모여 마을 길을 감싸고 있지 않았을까. 곧 자연석에 검게 새겨진 지경리 표지석이 나타나고, 이어 '남자현지사 생가' 안내판이 보인다. 집들이 한결 촘촘히 들어서 있는 작은 촌락의 끝에 솟을대문 높은 남자현 지사의 집이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지사(志士)'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때때로 단어가 가진 울림이 매우 불만족스러울 때가 있지만 어떠한 대안도 없음을 안다. 그녀를 향하여, 함께 싸웠던 동지들은 이렇게 불렀다.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친정아버지와 남편도 의병활동3·1만세운동후 만주서 독립투쟁군자금 모금·애국계몽 열정쏟아국제사회에 조선독립의지 전하려왼손 무명지 절단후 혈서썼지만결국 日경찰에 발각돼 접촉 실패부토 만주대사 암살시도하다 체포혹독한 고문에 생명 위태롭자 보석임종때도 '독립 염원' 만주벌 여걸#1. 남자현남자현(南慈賢)은 1872년 12월7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통정대부 수회(守晦) 남정한(南珽漢)이고, 어머니는 진성이씨 이원준(李元俊)의 딸이다. 그녀의 집안은 대대로 안동 일직면 송리에서 세거했는데, 1883년경 아버지 남정한이 이곳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로 이주해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현재의 생가는 1999년에 영양군과 남자현의 후손들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 남자현은 11세때부터 혼인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여겨진다. 그녀는 7세 때 한글을 깨쳤고 8세 때부터 한문을 배웠다. 12세에 소학과 대학을 읽었으며 14세에는 사서(四書)를 읽고 한시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19세에 아버지의 제자인 김영주(金永周)와 혼인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남자현의 아버지 남정한의 지도 아래 그의 제자 70여명이 모두 의병으로 나가 싸웠다. 남편 김영주가 그들을 이끌었으며 남자현은 뒤에서 연락책으로 활동하며 의병들을 지원했다. 1896년 7월11일 김영주가 전투 중 사망하게 된다. 그녀의 나이는 24세였고 배 속에는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남편상을 치른 후 그녀는 당시 수비면 계리에 있던 친정집에서 아들 영달(英達, 성삼·선달이라고도 한다)을 낳았고, 아들이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친정에 머물다 1905년경 분가했다.길쌈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나갔으나 시부모 봉양에 극진해 효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20여 년이 지났을 즈음 시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2. 독립군의 어머니시부모의 삼년상을 마친 남자현은 만주 망명을 결심한다. 이미 아버지의 제자 상당수가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19년 2월 말 47세의 남자현은 남대문에 사는 김모 부인의 비밀편지를 받고 서울로 올라갔다. 김모 부인과 남자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여성동지'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남편의 사망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서울에서 남자현은 동지들과 비밀회의를 열어 '기미독립선언서'를 준비했고, 3월1일 오후 3시 독립선언문을 배포했다. 그리고 태극기를 들고 보신각까지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후 남자현은 김모 부인에게 소개받은 손정도 목사의 도움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녀는 죽은 남편의 피 적삼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만주에서 남자현은 김동삼이 참모장으로 있던 서로군정서에 입단해 백서농장에서 일하며 군자금과 양식을 마련했다.그리고 아들을 서로군정서 산하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시켰다. 1920년 이후 만주지역 독립운동에서 최대 걸림돌은 우리 민족끼리의 파벌싸움이었다. 만세운동 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는 동포들이 증가했고 독립단체 또한 늘어나면서 단체 간 충돌이 잦아졌다. 1920년 8월29일 국치기념대회 날 남자현은 1천여명이 참석한 대회장에서 왼쪽 엄지를 잘랐다. 그리고 독립투쟁의 당위성과 독립운동 진영의 내부분열을 질타하는 혈서로 청중에게 호소하자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고 오열했다고 한다. 그해 10월21일부터 26일까지 10여 차례에 걸친 격전 끝에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전투가 벌어진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의 교관들과 생도들이 참여해 대활약을 하였고, 남자현은 전선에서 부상병들을 돌보았다. 동지들은 그녀를 '독립군의 어머니'라 불렀다. #3. 손가락을 자르며이후 남자현은 교육에 집중해 1921년에는 만주의 액목·화전·반석 등지에 여성독립군인 여의군을 양성하기 위한 20개가 넘는 여성교육기관을 세웠다. 같은 해 삼송육도구(杉松六道溝) 전투 때는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했다. 1922년에는 한족회,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이 연합한 대한통군부가 조직되었지만 이러한 통합의 노력에도 동포 간의 갈등은 여전했다. 결국 독립군 간의 유혈 사태까지 벌어졌고 이 소식을 들은 남자현은 산속에 들어가 금식기도를 하며 검지를 잘라 독립운동계의 단결을 호소하는 혈서를 썼다. 혈서를 본 사람들은 잘못을 뉘우치며 화합을 다짐하는 합의문을 발표한다. 갈등에서 벗어나게 된 지역 동포들은 곳곳에 목비를 세워 그녀의 공덕을 기렸다. 이로써 그녀의 이름은 만주의 조선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모두가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25년에는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였지만 일경의 감시로 실패하고 만다. 이듬해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좌우익 연합 유일당 운동에도 남자현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7년 신민회가 출범되고 국내의 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을 만주지역으로 확장시키기 위해 안창호가 지린성을 방문했을 때 남자현도 중앙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때 일본의 압박으로 독립지도자 47명이 지린성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남자현을 포함한 국내외의 여러 석방운동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연맹의 특별조사단이 하얼빈에 파견되었다. 이때 김동삼, 남자현, 이원일은 항일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파악한 일경에게 김동삼과 이원일이 체포되었다. 아슬아슬하게 검거를 피했던 남자현은 수배를 받는 중에도 김동성을 면회하며 그의 지령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그녀는 김동삼의 마지막 지령을 수행하기 위해 국제연맹 특별조사단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 2절을 자르고 그 피로 흰 천에 '조선의 독립을 원함(朝鮮獨立願)'이라고 쓰고 절단한 무명지와 함께 옥양목에 쌌다. 그것을 특별조사단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뺏기고 말았다. 그녀의 왼손에는 엄지, 검지, 무명지가 없다.#4. 독립의 날을 위한 200원1933년 남자현은 동지들과 함께 만주국 건국 1주년 기념일인 3월1일에 주 만주국 일본 전권대사 부토 노부요시를 암살하기로 계획한다. 앞서 2월22일 암살단 동지들은 무송사진관에서 마지막 기념사진을 찍었다. 2월27일 남편의 피적삼 위에 거지 복장을 걸친 그녀는 몸속에 권총과 폭탄을 숨기고 신경(지금의 장춘)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조선인 첩자 이종현의 밀고로 일경에게 알려졌고, 남자현은 하얼빈을 지나던 중 체포되고 말았다.일제는 6개월 동안 날마다 모진 고문을 하며 고급정보를 캐려 했다. 남자현은 일체의 진술을 거부했고, 8월6일부터 14일 동안 일제의 음식을 거부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혹독한 고문으로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일제는 황급히 보석을 허가하고 적십자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남자현은 조선인이 운영하는 여관으로 옮겨줄 것을 요구했다. 조선인 여관으로 옮겨진 날 남자현은 아들에게 중국 돈 249원 80전을 주면서 "이 돈에서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정부에 독립 축하금으로 바쳐라. 그리고 손자를 대학까지 공부시켜서 내 뜻을 알게 하라. 남은 돈 49원 80전의 절반은 손자의 학자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친정에 있는 종손을 찾아 공부시켜라"고 했다. 그리고 손자에게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잘 테니 깨우지 말라"하고 눈을 감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1933년 8월22일이었다. 그녀는 하얼빈지역 동포들과 중국인 지인들에 의해 남강외인(南崗外人) 묘지(현재 하얼빈 문화공원 내 러시아정교회 건물)에 안장되었다. 1946년 서울운동장에서 거행된 3·1절 기념식전에 그녀가 남긴 독립 축하금 200원이 김구와 이승만에게 전달되었다. 시간이 흘러 1962년 3월1일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남자현 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렸다. 석보면 지경리 그녀의 집 옆에는 항일순국비와 동상, 추모각이 세워져 있다. 추모각에 놓인 그녀의 흑백 영정이 우리를 본다. 방명록에는 수많은 짧은 글이 적혀 있다. '그 정신 잊지 않겠습니다' '늘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남자현의 독립운동 전사-이주와 행적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68집, 2019. 디지털 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영양군 석보면 지경리에 자리한 남자현지사 생가. 남자현은 11살 때부터 결혼 전까지 이 집에서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생가는 1999년에 영양군과 남자현의 후손들에 의해 복원된 것이다.생가 옆에 있는 남자현 지사 동상.
2021.11.02
[인재향 영양 .8] 국권 강탈 당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간 의병장 김도현
검산(劒山, 혹은 검각산)은 경북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 마을의 뒷산이다. 일월산의 줄기가 남쪽으로 달려 이룬 작은 산이다. 상청리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해 산비탈의 밭 가운데로 난 길을 오르면 정면에 성이 보인다. 검산성(劍山城)이다. 이 성은 구한말 항일을 위해 개인이 쌓은 성이다. 싸우기 위해 그는 자신의 재산을 털었고, 그의 일족과 소작인들은 돌을 날랐다. 그리고 이곳에서 거듭되는 혈전이 있었다. 뺏기고 빼앗으며 왜적과 의병들이 갈마들어 주둔했다. 나라를 빼앗긴 어느 날, 결국 그는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구한말 영양의 의병장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이다. 을미사변 일어나자 청량산서 의병 모집 경북지역 7개 의병과 연합의진 결성 일본군 병참부대 공격 전과 거두기도열등한 무기로 패퇴에도 유격전 지속 일제 횡포에 맞서 거병 준비하다 체포옥고 치른 뒤 옛 영양관아 객사 수리영흥학교 설립하고 구국의지 이어가국권 강탈 당하자 통곡하고 목숨 끊어 #1. 검산성벽산 김도현은 1852년 7월14일 상청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명옥(明玉)이다. 아버지는 참봉 김성하(金性河)이며 단종 복위사건에 가담하여 처형되었던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4세손이다. 벽산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세상이 크게 어지러울 징조라 여기고 병서를 주야로 탐독했다고 한다. 이후 1894년 동학군이 봉기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향리의 동지와 점고회(點考會)를 조직해 병사를 훈련시켰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벽산은 가재를 털어 봉화 청량산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지역 유생과 일가권속이 나라를 위해 의병으로 나섰다. 벽산이 이끄는 영양 의병은 곧 경북 지역 7개 의병과 연합의진(聯合義陣)을 꾸리고 3월에는 상주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벽산은 1896년 4월 삼척전투에서 패한 뒤 영양으로 돌아와 검산성에 본진을 두고 진영을 재편성했다. 그가 재산을 털어 쌓은 검산성은 규모는 다소 작았지만 돌들의 이음새에 허술함은 없었다. 지금 성벽은 서쪽 200m가량과 남쪽 일부 구간만이 남아 있다. 원래는 검산의 정상부에서 서쪽과 남쪽에 자연석을 이용해 벽을 쌓아 올리고 서쪽의 경사면에는 토석으로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급경사를 이루는 동북쪽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성벽으로 삼았다. 아래에는 해자처럼 천이 흐르고, 산의 경사면을 따라 흐르는 성벽은 동쪽의 단애를 만나 마무리되어 지형지세를 살핀 축성이다. 입암면에서 올라오면 바로 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고 성에 오르면 망루와 같이 시야가 훤하다.진영을 재편한 벽산은 검산성을 중심으로 영양, 안동, 청송, 영덕, 영해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가 이끄는 의병진은 열등한 무기로 인해 패퇴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영양, 예안 등지를 전전하며 유격전을 지속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조정의 명으로 일단 의병은 해산됐다. 벽산은 을미의병 때 마지막으로 의병을 해산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는 자신의 항일 의병 투쟁 전말을 일기체로 기록한 창의록을 남겼다. 의병 봉기를 모의한 1895년 12월1일부터 의병진을 해체한 1896년 10월15일까지 약 10개월 동안의 일들이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검산성은 벽산이 일월산을 중심으로 펼쳤던 유격전의 근거지였고 의병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지금 성 안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성 밖의 밭에는 지난여름 해바라기가 환하게 피었다고 한다. #2. 벽산생가성 아래 마을에는 벽산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벽산생가'라 새겨진 커다란 바윗돌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그의 생가가 나타난다. 아주 단출한 집이다. 건물은 임진왜란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선조를 호위한 김응상(金應祥)이 1580년경에 처음 지었다고 하나 현재의 건물은 18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벽산은 유년기에 조부 김하술(金夏述)의 가르침을 받았다. 조부는 생가 근처에 괴암서당(槐巖書堂)을 열었는데 벽산은 그곳에서 글을 배웠다. 어린 시절 아이들과 놀 때면 나무를 깎아 병사를 만들고, 모래로 그림을 그려 진을 치고, 돌을 모아 성채를 만들어 군진놀이를 했다고 한다. 8세 때는 마을 앞 개천에서 돌로 둑을 쌓고는 '수중기일성(水中起一城)'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조부가 이를 보고 범상치 않은 아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벽산생가는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생가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3칸 규모의 대문채가 초가를 이고 서 있다. 대문채 처마도리에 '벽산정사(碧山精舍)' 현판이 걸려있다. 벽산은 1896년에 의병진을 해체하고 은거했지만 이후에도 항일 활동을 계속했다. 1902년과 1904년에는 의병을 다시 일으킬 것을 촉구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이른바 을사5적의 처단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각국 공사관에 포고문을 보내 조선을 강제 병합하려는 일제의 횡포를 막는 데 힘써 달라고 호소했다. 1906년에는 고종황제로부터 밀지를 받는다. '밀칙으로 경에게 분격장군을 내리고 겸하여 은밀히 효유하노라. 경은 모름지기 우리 선왕들을 은혜롭게 하고 우리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의로운 군대를 고무하여 먼저 도적들을 피곤하게 하고 간흉을 제거하여 나라의 원수를 물리치도록 하라!' 벽산은 거병을 준비하던 중 1907년 봄에 체포되어 달성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나온 뒤 벽산은 지역의 유지들과 옛 영양관아의 객사를 수리해 영흥학교(英興學校)를 설립했다. 그는 교장에 선임되어 교육을 통한 구국의지를 펴기도 했다.1910년 8월29일,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며칠을 통곡하고 자결을 결심한다. 그러나 부모보다 먼저,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에게 남은 재산은 없었지만 부모 봉양에는 극진했다고 전한다. 1914년 7월, 그를 후원하고 지지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벽산은 상례를 마무리 지은 후 시를 지어 뜻을 밝혔다. '늦게야 죽으려니 묻힐 땅이 어디인가. 옛 나라의 남겨 둔 땅이 없구나.' 그리고 동짓날이었던 11월7일 영해 대진의 북쪽 산수암(山水岩)에서 유서 한 통을 바위 위에 놓고 바닷가로 나가 상복과 신발을 벗어 접어놓은 뒤 옷깃을 여미고 몸을 단정히 했다. 벽산은 상중에 쓰는 대지팡이를 짚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파도의 가운데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는 것을 나루터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둘러서서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 마지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로 그대로 걸어 들어가서 시신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벽산의 나이 63세였다.'조선왕조 오백년 마지막에 태어난 나/ 붉은 피 온 전신에 엉키었구나/ 중년의 독립운동 19년에/ 머리칼은 늙어 서리 끼었는데/ 나라가 망하니 눈물이 하염없고/ 어버이 여의니 마음도 아프구나/ 머나먼 바다가 보고팠는데/ 이레가 마침내 동지이더라/ 홀로 외롭게 서니 옛 산만 푸르고/ 온갖 헤아려도 방책이 없네/ 희고 흰 저 천길 물속이/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하여라.' 벽산이 남긴 임절시(臨絶詩)다. 1962년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73년에는 산수암에 도해단(蹈海壇)이 세워졌다. 해마다 벽산의 생일인 음력 7월14일에 '도해단 전례'가 열린다. 검산성 아래에는 창의순절기념비와 벽산선생유허비가 세워져 있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디지털 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벽산이 재산을 털어 쌓은 검산성은 항일 유격전의 근거지였고 의병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규모는 다소 작았지만 돌들의 이음새에 허술함이 없다.경북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에 위치한 벽산 생가. 검산성 아래 자리한 이 집에서 벽산이 태어나고 자랐다. 오른쪽은 검산성 아래 위치한 창의순절기념비. .벽산의 업적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가기 위해 세웠다.
2021.10.19
[인재향 영양. 7] 잉어가 얼음 깨고 나올 만큼 깊은 효심...오랑캐와 화의했다는 소식에 통곡...조검·조임 형제의 충효
아주 오래전 영양은 고은(古隱)이라 했다. '숨겨진 곳'이라는 의미다. 그중에서도 병화가 닿지 않는 제일 명당이 영양읍 상원리(上元里)와 하원리(下元里)였다. 옛 이름은 원당리(元塘里)로 부드러운 산자락이 감싸고 마을 한가운데로 반변천이 흐르는 좁은 땅이다. 천변에는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선유굴(仙遊窟)이 있고, 옥부선인(玉府仙人)들이 바둑을 즐겼다는 옥선대(玉仙臺)가 있다. 또 반변천과 동천이 만나 비파와 같은 물소리를 낸다는 비파담(琵琶潭)이 있다. 선조임금 초, 아름답고 평온한 상원리와 하원리에서 한양조씨 조검(趙儉)·조임(趙任) 형제가 태어난다. 그들은 1519년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후손이었다.기묘사화때 화입은 조광조의 후손 조모 슬하서 자란 형제, 효성 지극병든 할머니 물고기 먹고 싶어 하자조검 한겨울에 잉어 구한 일화 유명조임,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보며임란 의병시의 백미인 '남정'남겨병자호란땐 고령에 접어든 형제는단 쌓고 오랑캐 몰아내도록 기도남한산성 화의 소식 듣고는 통곡후세사람 '축천단충절'이라 불러#1. 한양조씨 조검·조임 형제 조광조가 화를 당한 후 그의 일가는 전국으로 흩어졌다. 영양으로 처음 들어온 한양조씨 입향조는 조광조의 손자인 참판공 조원(趙源)이다. 그는 영양에 살던 함양오씨(咸陽吳氏) 입향조 오필(吳)의 딸과 혼인하면서 영양 원당(지금의 상원리)에 정착했다. 조원은 1537년에 조광인(趙光仁), 1543년에 조광의(趙光義)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인 조광인의 아들이 조검(趙儉), 조임(趙任), 조적(趙籍)이며 부인은 광주안씨(廣州安氏)로 충순위(忠順衛) 안수인(安壽仁)의 딸이다. 3남인 조적의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검은 선조 3년인 1570년 상원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약(子約), 호는 수월(水月)이다. 그가 13세 무렵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났고 그와 형제들은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조검은 어릴 때부터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선현의 좋은 행실을 따르는 데 힘썼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매우 지극했는데 그에 대한 '비리동효행(飛鯉洞孝行)' 전설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어느 해 한겨울 병든 할머니가 강어(江魚)를 먹고 싶다고 했다. 조검은 엄동설한에 물고기를 구하러 다니지만 구할 수 없었다. 그는 강가에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울며 기원했다. 그러자 강에서 얼음을 깨고 큰 잉어가 스스로 뛰어올랐다. 조검이 그 잉어를 달여 할머니에게 드리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전한다. 조임은 1573년에 하원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중(子重), 호는 사월(沙月)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이 높았다. 특히 충신열사들의 전기를 탐독했는데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충절을 다한 열사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언제나 의분으로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정암으로부터 가학을 이어받지 못하고 퇴계에게 배움을 청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고, 후에는 송간(松澗) 김윤명(金允明) 문하에서 수학했다. #2. 임진왜란, 의병으로 일어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영양의 한양조씨들이 창의를 의논하고 있을 때, 조검은 곽재우의 편지를 받는다. '(전략)의병을 모집하는 의논이 있었다 하니 힘을 얻게 됩니다. (중략) 오직 바라건대 즉일로 포산(苞山)에 이르러 함께 의리를 이루는 것이 하찮은 이 사람의 바라는 바이고(후략)'이에 조검은 아우 조임과 함께 곽재우의 진영에 들어가 화왕산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이때 조검은 선친으로 물려받은 재산 쌀 오백 섬, 기마 수십 필, 가신 40명을 보내 힘을 보탰다. 이 공로로 아버지 조광의는 판결사, 조검은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됐다. 당시 조임은 화왕산성으로 가는 길에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을과 백성들의 삶을 보며 시 '남정(南征)'을 남겼다. 이는 임란 의병시의 백미로 여겨진다. '만력 임진 여름/ 요상한 기운 험한 바다 덮었네./ 어찌하여 천악이 넘쳐/ 온 천하가 모두 잠겨버렸네. (중략) 풍찬노숙의 괴로움 견뎌내면서/ 화살에 거는 마음 일성처럼 밝도다./ 어느 날 오랑캐를 평정하여/ 소의간식하는 임금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고.' 그의 호 '사월(沙月)'은 1597년 의병이 해산될 때 곽재우가 조임의 의로움을 칭찬하며 지어준 것이다. #3. 수월과 사월의 집임진왜란 후에도 조검은 자신이 태어난 영양읍 상원리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상원2리를 비리곡(飛鯉谷) 또는 비릿골이라 부르는데 '잉어가 나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지금은 폐교된 상원초등(현 마주앙 펜션)에서 비리동천길을 따라 400m 정도 들어가면 정자나무 맞은편에 '비리동천'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이 외에 상원리에 조검의 자취는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다. 조임은 1602년 하원리 반변천변에 집을 지었다. 한양조씨 사월종택이다. 옥선대를 바라보는 경승지로 일찍이 고승인 성지(性智)가 터를 잡은 명당이다. 그는 차남이라 물려받은 재산이 거의 없었지만 영해의 안동권씨 종가와 혼인을 맺은 후 처외가인 인량리 대흥백씨 집안의 재산을 1천석 넘게 물려받으면서 넉넉해졌다. 토석 담장에 둘러싸인 사월종택은 정침과 누각인 사랑채가 붙어 있는 모습이다. 조임은 사랑채를 월담헌(月潭軒)이라 했다. 현판은 창석 이준(李埈)의 글씨다. '월담'은 주자의 무이구곡 제4곡인 '달은 빈산에 가득하고 물은 못에 가득하다(月滿空山水滿潭)'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대청 문을 열면 반변천 물길과 먼 산이 환하다. 조임은 이곳에서 이준, 오운(吳澐), 신지제(申之悌), 홍위(洪瑋) 등과 폭넓게 교유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조임은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광해군 5년인 1613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620년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1621년 통정대부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21년에는 '정절(靖節)선생'이라 불렸던 도연명의 '구름이 처마 끝에 자고 간다(詹端宿雲)'에서 뜻을 취해 비파담 위에 또 다른 정자인 숙운정(宿雲亭)을 건립했다. 숙운정에서 그는 산수를 벗하고 시가를 짓고 지기들과 울분을 삭이며 시사를 논했다고 한다. 현재의 숙운정은 1889년에 후손인 조언겸(趙彦謙)이 중수한 것으로 하원리 마을 입구에 있으며 정자의 오른쪽에는 조임의 신도비각이 자리한다. #4. 단을 쌓고 통곡하다인조 5년인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조임은 '이 땅에서 먹고사는 것이 나라 은혜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벼슬에 있지 않다고 하여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곳간을 열어 군량미를 나라에 헌납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조검·조임 형제는 이미 고령이었다. 형제는 집 뒤에 단을 쌓고 매일 밤 이 땅에서 오랑캐를 몰아낼 것을 하늘에 빌었다. 이후 남한산성에서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형제는 단에 올라 통곡했다고 전한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축천단충절(祝天壇忠節)'이라 했다. 축천단이 있던 자리에 1827년에 세운 비가 보존되어 있다. 비리곡 입구에 있는 마주앙 펜션(전 상원초등학교) 옆이다. 김유헌은 '어진 사람이 죽으면 서원을 짓고 빛나는 현판을 내 거는 것을 보았으나 평지 한 조각 땅에 축천단이라 이름하여 백대의 청풍을 일으키는 것을 누가 보았는가'라며 그들의 고절을 기렸다.조검은 병자호란 이후 일월면 도계리(道溪里)로 이거해 집을 짓고 사의정사(思義精舍)라 했다. 이후 한양조씨 수월공파가 형성됐고 오늘날까지 도계리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사의정사는 현재 참판공 종택으로 2002년에 옛집을 철거하고 새롭게 중건했다. 종택 옆에는 그의 충효를 기려 후손들이 지은 수월헌(水月軒)이 자리한다. 수월헌은 '물과 달이 어우러진 처마 높은 집'이라는 뜻이다. 원래 영양읍 상원리에 있던 것을 1922년에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고 2005년에 전면 보수했다. 세 칸 겹집인 소박한 정자 앞에는 연못이 푸르고 두 그루 은행나무가 곧다. 조임은 병자년 이후 문을 닫고 폐인을 자처하며 여생을 살았다. 자리 곁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朝聞道) 저녁에 죽어도 좋다(夕死可矣)'는 논어 구절을 새기고 평생 경계하는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조검은 1644년 2월14일 사의정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임은 그해 3월19일 명나라의 의종황제가 죽고 명이 이자성의 난과 청의 침입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필시(絶筆詩)를 한 수 남기고 7월5일 운명하였다. '상전이 벽해로 변하는 미친 물결이 정북방에서 몰아치니/ 명나라를 위하는 생각으로 바람부는 구천에서 눈물 지운다/ 붉은 명정에는 숭정호를 적어 가지고 가니/ 남자의 한번 죽는 해로선 부끄럽지 않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영양군 영양읍 하원리에 자리한 사월종택. 조임이 1602년 반변천변에 지은 집으로 옥선대를 바라보는 경승지이면서 일찍이 고승인 성지(性智)가 터를 잡은 명당이다. 토석 담장에 둘러싸인 사월종택은 정침과 누각인 사랑채가 붙어 있는 모습으로 조임은 사랑채를 월담헌이라 했다.영양읍 하원리에 있는 숙운정. 조임이 1621년 비파담 위에 지은 정자로 도연명의 '구름이 처마 끝에 자고 간다(詹端宿雲)'라는 시구에서 뜻을 취했다고 한다. 1889년 후손인 조언겸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수했다.
2021.09.28
[이야기 따라 상주 여행 .11] 상주향교, 고려 말 최자의 보한집 최초의 기록...창건은 훨씬 이전 추정
'배우고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유교의 근본 문헌인 논어의 첫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배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禮)다. 공자가 말하는 예는 주나라의 문물, 사상, 제도, 전통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이는 곧 문(文)이기도 하다. 공자는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제자들을 받아들였다. 그는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고,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의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수와 혁신이 공존하는 이러한 유교의 가르침을 외적 질서로 드러낸 곳이 바로 오래된 학교, 향교다. 기교는 없다. 엄격한 질서의 체계는 지엄하나 경직되지 않았다. 질서란 지배적 위계가 아닌 예(禮)로 이루어진 위계다. 상주향교정면 5칸 대성전 국내 세번째 규모조선 중기 건립 당시 원형 잘 간직#1. 상주향교은행나무와 소나무가 높고, 또한 남루가 높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2층 구조인 남루는 1층의 가운데 3칸이 누하문으로 상주향교의 외삼문 역할을 하고 있다. 저절로 허리를 굽혀 누하의 계단을 오르면 정면으로 천천히 명륜당이 떠오른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양쪽에는 정면 5칸의 동재와 서재가 단정하고 고요하게 정좌해 있다.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맹자의 등문공편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이곳에서 90명이나 되는 많은 학생들이 공부했다고 한다.명륜당 뒤로 내삼문이 높이 서 있다. 담장으로 구분된 일곽 안에는 제향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자리한다.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서울 문묘 및 성균관 대성전 다음으로 큰 규모다. 돌을 다듬어 높은 기단을 쌓고 원형의 초석을 놓아 원주를 세웠다. 전면의 반 칸은 퇴칸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가운데 어칸에는 쌍여닫이문, 좌우 협칸에는 외여닫이문을 내었다. 내부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동무와 서무는 정면 10칸, 측면 1.5칸으로 서울 문묘와 경주향교 다음으로 큰 규모다. 기단과 처마도리를 경사지에 맞춰 건물 전체 높이는 같게 하고, 양쪽 끝에 처마도리를 받치는 보조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인방재가 가로·세로로 이루어진 격자형의 골격에 회벽으로 마감한 벽면에 최소한의 창호를 두었다. 대성전과 동·서무는 조선중기에 중창된 뒤 위치의 변경이 없다. 몇 차례의 수리과정이 있었지만 규모와 구조, 형태는 조선 중기 건립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상주향교의 대성전과 동·서무는 지난해 말 보물 제2096호로 지정됐다. 상주향교가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상주향교 관련 기록이 최초로 나타나는데 창건은 훨씬 더 이전으로 추정된다. 상주는 고려와 조선시대 동안 상주목으로 경상도 지역의 행정, 사법, 군사의 중심지였다. 때문에 고려 성종 6년인 987년 12목에 향교를 설치할 때 창건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성종 11년인 992년에는 경학박사 전보인(全輔仁)을 교수로 임명하여 학문을 부흥케 했다는 기록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종 8년인 1426년에 판목(判牧) 조치(曺致)가 남루(南樓)를 세우고 홍여방이 기(記)를 썼다고 한다. 성종 15년인 1485년에는 목사(牧使) 강구손(姜龜孫)이 성전(聖殿)과 재(齋)와 루(樓)를 중수했다. 하지만 상주향교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다. 전란 후 광해군 10년인 1618년에 목사 정호선(丁好善)이 정경세와 더불어 중수하고 이준(李埈)이 상량문을 지었다고 한다. 고종 29년인 1892년에 목사 유병주가 다시 중건했고 이후에도 여러 번의 중수와 보수가 있었다고 전한다. 1949년 9월 1일, 상주향교는 '상주고등공민학교'가 됐다. 1950년 제1회 입학식을 치렀고, 이듬해 '남산중학교' 설립 인가를 받아 수업을 시작했다. 명륜당은 교무실로 쓰였고 규모가 큰 동무와 서무는 교실로 사용됐다. 그러던 중 1961년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는데 그 후 1989년 내삼문 신축, 1991년 명륜당 복원, 1992년에 서재 복원, 1994년 고직사 이건, 1995년 외삼문 신축 등이 이루어져 어느 정도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향교의 규모는 대개 고을의 크기와 비례하는데 건물이 지어진 형식과 규모에 따라 대설위(大設位), 중설위, 소설위의 3등급으로 나누어진다. 상주향교는 대설위 향교다. 또한 경사가 심한 대지를 4단으로 조성한 입면구성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정형화되고 엄격한 배치구성이 돋보인다. 외삼문에서 대성전에 이르는 위계의 질서는 스스로를 다잡는 긴장을 낳는다. 질서 속에 정좌한 평안한 긴장이다. 대성전 앞에 서면 시선은 마당의 텅 빈 공간을 가로질러 내삼문과 명륜당의 지붕 위로 펼쳐지는 세계와 마주한다. 가슴이 시원하다. 상주향교는 지금도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대성전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의 학덕을 추모하는 석전대제(釋奠大祭)를 봉행하고 있다. 함창향교1417년 조선 태종때 현위치 이건임란 겪으며 소실 여러차례 중수3단 대지에 '전학후묘' 건물 배치#2. 함창 향교상주의 북동부에 위치한 함창읍(咸昌邑)은 아주 옛날 고령가야국(古寧伽耶國)이었다. 신라 시대에는 고동람군, 고령군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현종 때 상주목에 귀속되어 함창이라 했다. 고려 명종 2년인 1172년에는 따로 감무를 두었고 조선시대에는 현령이 파견되는 독자적인 지역이 됐다. 함창읍 교촌리의 경사진 언덕에 함창향교가 자리한다. 초입의 도로가에 함창향교 표지석이 서 있는데 뒷면에는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새겨져 있다. 이는 논어에 나오는 말로 자신의 사욕과 욕망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민가들을 지나 가파르게 굽어 올라가는 길 가에 외삼문이 높다. 계단 위 솟을대문이라 더욱 높게 느껴진다. 함창향교는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에 객관이 있던 구향리 언덕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고 태종 17년인 1417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없어진 것을 광해군 9년인 1617년에 다시 구향리로 옮겨지었는데, 인조 14년인 1636년에 지금의 위치로 다시 한 번 옮겼다고 한다. 1907년에 현감 이종호(李鍾浩)가 명륜당을 중수했고, 1972년부터 1987년까지 동재와 서재 및 명륜당을 크게 수리했다.내부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명륜당이 자리한다. 경사진 땅을 3단으로 조성하고 남북 축선을 기준으로 남쪽에 명륜당, 북쪽에 대성전을 배치한 전학후묘 형식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세 칸은 대청, 양쪽 끝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전면은 누각 형식으로 당당하고 대성전과 마주하는 후면은 단층으로 경사지를 이용한 겸양이 드러나 있다. 대성전 영역은 아주 높다. 내삼문의 맞배지붕 위로 대성전의 맞배지붕이 크고 가지런하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툇간을 설치하고 내부는 장마루를 깔았다. 어칸은 넓은 편으로 두리기둥을 세웠다. 대성전에는 5성, 송조4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명륜당과 대성전 사이에 동재와 서재가 양쪽으로 자리해 사각의 안마당을 형성하는데 흔하지 않은 구성이다. 동재와 서재는 석축을 높이 쌓고 정면 2칸, 측면 2칸의 건물을 올렸다. 강당에 비해 매우 작은 편이지만 두 칸의 방에 각기 다른 크기의 문을 달아 조형미가 돋보인다. 외삼문 밖에서 담벼락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향교 관리를 위한 건물과 전사청이 있고 전사청 옆으로는 안마당과 대성전 영역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는 협문이 있다. 현재 상주 함창 향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46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봄과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한다.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참고=문화재청 누리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상주향교 명륜당. 강학 공간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명륜'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상주향교의 제향 공간인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서울 문묘 및 성균관 대성전 다음으로 큰 규모다.상주 함창읍 교촌리의 경사진 언덕에 자리한 함창향교. 길 옆 고목은 평온한 그늘을 만들고 계단 위 외삼문은 높다. 함창향교는 1398년(태조 7) 객관이 있던 구향리 언덕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함창향교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툇간을 설치하고 내부는 장마루를 깔았다.함창향교 내부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명륜당이 보인다. 누각형식의 전면이 당당하다.
2021.09.13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대구권 의대 교수 8명 사직서 제출…정부 대화 촉구에도 의료계 강경한 태도
의협 새 회장 강경파 임현택 당선…'의대 증원 논쟁' 고조 될듯
많이 본 뉴스
오늘의운세
용띠 3월 29일 ( 음 2월 20일 )(오늘의 띠별 운세) (생년월일 운세)
영남생생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