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기행 .1] 역사와 가치....자연친화·소통화합·나눔배려 실천 조선시대 사립 고등교육기관
지난해 7월6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세계유산총회에서 한국의 서원 9개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소수서원(영주), 도산서원(안동), 병산서원(안동), 옥산서원(경주), 도동서원(대구), 남계서원(함양), 필암서원(장성),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이다. 조선시대 사립 교육기관으로서 조선의 핵심 이념인 성리학을 보급하고 구현하는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 서원들이다. 이 9개 서원에 대해 국경을 초월할 만큼 독보적이고, 현재와 미래 세대의 전 인류에게 공통으로 중요한 가치를 의미하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세계 인류가 공유하며 보존해 가야 할 문화유산이 된 이 서원들을 답사하며 각 서원에 담긴 이야기와 유무형의 가치를 알아본다.중국 서원 모델로 탄생했지만과거급제보다 학문·수양 중심1543년 건립 백운동서원 '최초'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지역 독서·출판문화 이끌기도우선 한국의 서원 일반에 대해 살펴본다. 서원의 원조인 중국의 서원을 제치고 한국의 서원이 세계유산이 되었다. 한국의 서원은 중국의 서원을 모델로 삼아 탄생했지만, 중국과는 크게 다른 차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에 사립학교였던 중국 서원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관이 주도하는 관학(官學)이 됐던 것과 달리, 한국 서원은 민간 차원에서 건립된 사설 학교라는 점이다. 그리고 중국 서원이 관료를 양성하는 준비 기구의 성격이 강했다면, 한국 서원은 학문을 통한 인격 수양이 중심이 되는 가운데 향촌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어 교육과 교화를 모두 추구했다. 공립 교육기관인 성균관이나 향교는 과거시험 합격이 주목적이던 것과는 달리, 서원은 그곳에 모시는 선현의 정신과 뜻을 기리며 학문을 닦고 인격을 도야하는 장소였던 것이다.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이 "오늘날까지 교육적·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하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이와 관련해 중국 대표도 "중국은 이코모스(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의 권고와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등재를 전적으로 지지한다. 우리는 세계유산 목록에 새로운 유산을 등재시킨 한국 대표단에 축하를 보낸다. 중국어로는 '슈우위안'이라 불리는 성리학 교육기관이 중국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한국의 서원 역시 16~17세기에 동아시아 유교 문화의 보급과 현지화에 기여한 중요 장소다. 이러한 서원은 자연환경과 잘 조화되어 독자적인 건축설계를 발전시킴으로써 한국에 성리학적 이상이 꽃피도록 도왔다"며 지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한국 서원의 역사서원은 조선시대 지역 지식인들이 세운 사립학교다. 조선이 치국 이념으로 채택한 성리학을 사대부 계층이 자신들의 학문으로 정착시키면서 만들어낸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영주)에 세운 백운동서원이 처음이다. 백운동서원은 이황의 노력으로 1550년 조정으로부터 '소수서원'으로 사액 받으면서 최초의 사액서원, 즉 나라가 공인한 사립학교가 되었다. 사액서원에는 서적과 토지, 노비 등이 지원되었다. 이후 서원은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조선 사회를 이끌어가는 한 축이 된다.서원은 선조 연간(1567~1608)에만 60군데 이상이 생겨나고, 그중 22개가 사액되었다. 숙종(1674~1720) 때는 130개가 넘는 사액서원이 등장했다. 서원철폐론이 등장한 1741년(영조 17) 당시에는 서원과 서원의 역할까지 한 사우(祠宇) 등을 합해 900여 곳에 이르게 됐다. 남설된 서원은 학문과 인격 도야의 전당이 아니라 당쟁논의의 소굴이 되었고, 향촌의 교화를 담당하는 곳이 아니라 민폐의 본산이 되었다.이처럼 서원 본래의 취지에 벗어나면서 비난과 원성의 대상이 되고, 서원무용론을 넘어 서원철폐론이 대두되었다. 1741년 4월8일 '갑오년(1714년) 이후에 건립된 서원과 사우·영당 등 모든 제향 사원을 철폐하는 조치'를 내린 데 이어 급기야 1871년 3월20일 '영원히 받들어야 할 충절 대의 제현을 기리는 47개 사액서원을 제외한 나머지 서원들의 현판을 떼라'(고종실록)는 명을 하달한다. 이것이 유명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다.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중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9개다. 모두 사액서원이다.◆서원의 역할과 구성유교 선현을 기리는 제향(祭享), 학문(성리학)을 갈고닦으며 성리학적 인재를 양성하는 강학(講學)이 서원의 기본적 기능이다. 따라서 서원 건축의 중심은 제향 기능을 담당하는 사당과 강학의 공간인 강당이다. 서원은 일반적으로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 뒤쪽 높은 곳에 있고, 그 앞에 학업을 위한 강당이 위치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다.관학인 향교나 성균관의 사당에는 공자와 맹자 등을 비롯한 중국과 한국의 성현(聖賢)을 모시는 데 반해, 서원은 그 지역 출신이거나 지역과 연고가 있는 선현(先賢)을 모신다. 선현 제사에는 일반 가문의 제사와는 달리 친인척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선비들이 참여하는 제사로 진행됐다.서원 교육은 과거시험을 벗어나 참다운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타고난 본성을 밝히는 인격 도야가 핵심이었다. 서원 교육은 개별학습인 독서(讀書)와 공동학습인 강회(講會)를 병행했다. 독서는 '소학'부터 시작해 사서오경을 중심으로 공부했다.서원은 또한 많은 서책과 문화유산을 소장하고 있는 지역의 지식 중심이기도 했다. 서원의 장서 및 출판 문화는 지식 확산과 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서원은 장서목록을 작성하고 서책을 서원 밖으로 유출하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정하는 등 엄격하게 관리했다. 초기에는 기증이나 구매로 서적을 마련하다가 후기에는 서원이 직접 서책을 간행했다.이런 한국의 서원은 '자연과 인간의 조화' '소통과 화합' '나눔과 배려'의 정신과 가치가 담겨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대부분 주변의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는 한국의 서원은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기 위한 제향공간, 학생들의 공부를 위한 강학공간, 휴식과 교류를 위한 유식(遊息)공간, 제향과 강학을 지원하고 관리하는 지원공간으로 구분된다. 이런 공간들은 주변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지는 건물배치와 건축공간을 형성하면서 성리학적 가치관과 자연관을 응축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사액서원 편액들. 위로부터 '소수서원' '도산서원' '옥산서원'. 나라에서 공인하면서 내려주는 사액 편액의 글씨는 당대 명필이 주로 썼는데, '소수서원' 글씨는 유일하게 당시 임금인 명종이 직접 썼다. '도산서원'은 석봉 한호가, '옥산서원'은 추사 김정희가 썼다.경남 함양에 있는 남계서원을 그린 남계서원도(1875년). 사당이 뒤쪽에 있고 공부하는 강당이 앞쪽에 있는(前學後廟) 한국 서원 건축양식의 원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세계유산 '한국의 서원' 표지석(무성서원).
2020.09.17
[山寺미학 .35·<끝>] 자연미와 인공미...울퉁불퉁 자연석 위 나무 기둥…투박하지만 질리지 않는 '한국의 멋'
중국과 일본을 여행하다보면 말은 잘 안 통해도 한자 덕분에 대충 감을 잡을 수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보다는 훨씬 편안한 느낌이 든다. 거기다가 사람들의 겉모습도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아 크게 낯설지 않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문화는 차이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식주 문화가 모두 많이 다르다. 그래서 흥미롭고 재미있다.한국과 중국, 일본은 같은 한자문화권에다 오랜 세월 같은 문화(불교, 유교)를 공유해왔는데도 왜 문화 차이는 생각보다 클까. 문화가 다르게 발전한 핵심적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하기도 한다. 중국은 황제 중심의 '황제' 문화로 발전했으며, 일본은 무사로 상징되는 '칼'의 문화이고, 한국은 선비로 상징되는 '붓'의 문화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중국은 황제의 힘이 과시와 과장으로 치달아 엄청난 규모의 만리장성이나 자금성을 만들어내고, 일본의 경우는 무사의 칼로 상징되는 비정함이 정형적인 모습의 좌우대칭과 상하비례를 추구해 깔끔한 비례미를 만들었다고 한다. 한국은 선비로 상징되는 붓이 가진 특성으로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움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한국 자연미와 일본 인공미이런 한·중·일의 문화정체성으로 인해 중국과 일본은 인공미를 중요하게 여기고, 한국은 자연미를 추구했다. 같은 인공미라도 중국과 일본의 표현 방법이 다르다. 중국은 과장과 확대가, 일본은 정형화와 규격화가 특징이다. 일본의 인공미는 특히 비례와 대칭을 중요시하며 세밀하고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에 비해 한국인은 인공적인 면을 오히려 가능한 거부하면서 자연으로 스며드는 성향을 보여준다. 그리고 외적인 면보다는 정신적인 면에 큰 의미를 둔다. 그래서 크기를 떠나 자연성을 받아들여 소박해보이면서 질리지 않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담장을 낮게 해서 자연과 소통하며 경계를 두지 않으려는 것도 이러한 특성과 연결된다. 이와 함께 창조적인 독창성과 해학성에 관심이 많고 뛰어나다. 이처럼 한국은 일본과는 반대로 규격화하는 것을 꺼려하고, 파격을 즐긴다.산사 옛 전각 대부분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 덤벙주초 사용 돌마다 크기·모양·높이 제각각…가공되지 않은 아름다움 간직 인공미 두드러진 中·日 사찰, 주춧돌·기둥 모두 다듬어 사용 자연미 추구하는 한국 문화와 달리 세밀하고 정제된 느낌 강조 일본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인 인공미 강조는 정원문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국의 정원은 수목이나 연못 등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범위에서 자연과의 동화나 친화를 도모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일본의 정원은 거의 모든 부분이 인위적으로 조작한 인공적 조형물로 이뤄진다. 대표적 예로, 일본의 전통적 정원 양식을 대표하는 교토 료안지(龍安寺)의 '석정(石庭)'을 비롯한 인공 정원을 들 수 있다.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으로도 불리는 석정은 정원의 중심 요소인 수목이나 물을 완전히 배제한 채 모래와 돌만으로 자연을 표현하고 있다.◆주춧돌과 기둥에서 드러나는 미감목재 건축물의 주춧돌이나 기둥에서도 한국의 자연미와 일본의 인공미는 확연하게 드러난다. 한국의 산사 건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춧돌인 덤벙주초는 한국의 자연미를 잘 보여준다. 덤벙주초는 울퉁불퉁한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주춧돌로 사용한 것을 말한다.납작한 돌을 사용하거나 울퉁불퉁한 돌을 평탄하게 다듬어서 나무기둥을 세우면 일도 쉽고 깔끔할 텐데, 제멋대로 생긴 돌을 그대로 두고 나무기둥의 하단을 돌 윗면 모양에 맞춰 다듬어 사용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자연석 주춧돌을 '덤벙주초'라 하고, 이 덤벙주초와 나무기둥이 한 몸이 될 때까지 닿는 면을 다듬는 일을 '그랭이질'이라고 한다. 기둥의 뿌리가 덤벙주초를 만나면서 자연과 인공이 하나가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외국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우리만의 건축 문화다.대웅전이든, 누각이든, 요사채든 이런 덤벙주초 건물을 산사의 옛 건물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다. 자연석을 대충 그대로 사용하다보니 주춧돌마다 크기도 모양도 다르다. 높이도 차이가 난다. 옛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는 경남 양산 통도사에는 극락전, 영산전, 용화전, 대광보전, 응진전, 약사전, 개산조당, 세존비각, 삼성각, 천왕문 등 대부분 전각이 덤벙주초를 사용하고 있다. 전남 구례 화엄사도 보제루, 대웅전, 원통전, 나한전, 명부전 등 옛 건물은 덤벙주초이고, 각황전은 자연석과 다듬은 돌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대구 동화사 대웅전, 충남 논산 쌍계사 대웅전, 전북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전북 고창 선운사 대웅보전 등 문화재 전각들은 대부분 덤벙주초이다.덤벙주초에 올리는 기둥도 일정한 굵기로 다듬지 않고 굽은 자연상태 그대로 사용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 산사의 건물들을 보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은 주춧돌은 오히려 찾아보기가 어렵다. 자연의 불규칙성을 일부러 다듬어 규격화하기보다 그대로 활용하며 그 가운데 아름다움을 찾는 미적 감각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덤벙주초 보이지 않은 일본 사찰일본의 사찰은 우리와는 다르다. 닌나지, 료안지, 도후쿠지, 긴카쿠지, 기요미즈데라, 덴류지 등 교토의 여러 사찰을 둘러보았지만, 우리 같은 덤벙주초는 보이지 않았다. 둥글게 다듬든지, 사각으로 다듬든지 해서 모두 같은 모양 같은 크기로 만든 주춧돌을 사용하고 있다. 너무나 똑같이 세밀하게 다듬어 공장에서 찍어낸 제품같이 보인다. 기둥도 마찬가지로 같은 굵기로 다듬은 것만 사용하고 있다. 중국 사찰도 마찬가지다. 주춧돌이든 기둥이든 일정하게 다듬어 사용하고 있다.우리 같은 자연스러움이나 파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일본이나 중국의 이런 전각들을 접하면 우리와는 다른 모습에 잠시 눈길이 갈 뿐이지 정이 가지 않는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흥이 일어나는 경우는 경험하기 어렵다. 물론 그들의 느낌은 다를지 모르지만.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그동안 관심을 가지고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자연석을 주춧돌로 사용한 경남 양산 통도사 극락전 주춧돌 및 기둥.전북 부안 내소사 누각인 봉래루의 주춧돌과 기둥. 주춧돌의 모양과 크기, 높이가 다 다르다.일본 교토 도후쿠지 비로보전의 주춧돌과 기둥.
2020.09.03
[山寺미학 .34] 산사 누각...마루 귀퉁이에 놓인 차와 다구…암자 찾는 이 위한 스님의 배려
전남 강진 백련사는 바닷가에 있는 만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백련사에서 보는 강진만 풍광이 각별하다. 백련사 만경루에 오르면 이런 풍광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 2019년 초여름에 백련사를 찾았다. 더운 날씨였다. 한참 걸어 만경루 앞마당에 올랐다. 누각 밑을 지나자 대웅보전이 바로 코앞에 나타났다. 명필 이광사가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로 쓴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을 감상한 뒤 바로 뒤돌아 만경루 안으로 들어갔다. '만경루(萬景樓)' 편액도 이광사 글씨다. 멋지고 다양한 경치를 누릴 수 있는 누각이라 '만경'이라는 이름도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천 은해사 부속암자 운부암 누각 보화루방문객 차 우려 마실 수 있도록 개방스님 마음 씀씀이 고준한 법문보다 깊은 울림산사 누각, 전통한옥 자연미 가장 잘 드러난 건물로자연석 주춧돌 사용한 덤벙주초·다듬지 않은 기둥이 특징◆백련사 만경루, 백흥암 보화루누각 안으로 들어서자 서늘한 기운이 더위를 가시게 했다. 깨끗하고 넓은 마루에 올라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강진만이 눈에 들어와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오른쪽으로는 동백숲이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누각 앞마당에 큰 배롱나무 한 그루가 한창 꽃봉오리를 맺고 있었다. 며칠만 지나면 붉은 꽃을 가득 피운 배롱나무가 선사할 풍광이 그려졌다. 다시 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배롱나무는 보기 드물게 수형이 멋진 데다 크기도 크고 생육도 왕성한 상태였다. 수령이 200년 이상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만경루는 백련사의 전각 중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정면 3칸 규모의 대웅전보다 훨씬 크다. 측면은 벽체로 되어 있고, 바다 쪽은 모두 문으로 되어 있다. 나무판으로 된 문이어서 닫으면 바깥 풍경이 차단된다. 대웅보전 쪽도 문으로 되어 있다.영천 은해사 백흥암 누각인 보화루에는 2019년 가을에 올라보았다. 맑은 가을 햇살이 스며든 누각 바닥만 봐도 심신이 깨끗해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스님과 차 한 잔을 나누며 누각 밖으로 눈길을 주니 만산홍엽의 만추 풍경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이 보화루 맞은편은 백흥암의 법당인 극락전이다. 보물로 지정된 멋진 건물이다. 극락전 앞 마당과 누각의 마루는 같은 높이로 되어 있다.누각은 극락전 쪽은 트여 있고, 반대쪽은 여닫는 문으로 되어 있다. 바깥 처마에는 '보화루' 편액, 누각 안에는 '산해숭심(山海崇深)' 편액과 '백흥대난야(百興大蘭若)' 편액이 걸려 있다. 산해숭심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데, 원본은 은해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백흥대난야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기도 한 박규수(1807~1877)의 글씨라고 한다. 이 보화루(5칸)도 극락전(3칸)보다 규모가 더 크다.◆차와 다구를 준비해둔 운부암 보화루은해사 부속 암자인 운부암(雲浮庵)의 누각 보화루에는 각별한 추억이 있다. 11년 전 느꼈던 기분 좋은 감정을 떠올리며 지난 5월 다시 운부암을 홀로 찾았다. 그때처럼 보화루에는 맛있는 차와 차도구, 찻물이 준비되어 있었다.2009년에는 초겨울에 들렀다. 은해사에서 운부암까지는 3.5㎞ 정도. 며칠 전 내린 비로 산천은 촉촉하고 하늘과 공기는 더없이 맑은 날이었다. 쌀쌀한 기온에다 바람도 약간 불었지만, 친구들과 낙엽이 바닥을 포근히 덮고 있는 산자락 길을 걸었다. 주위의 나목들 풍경이 선사하는 정취가 각별했고, 길 옆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는 음악처럼 들렸다. 운부암 마당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보화루에 올랐다.보화루에 올라서 바라보니 주변 풍광이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마루 한 귀퉁이에 차를 우려먹을 수 있도록 차와 차 도구를 갖춰 놓은 것이 보였다. 법당인 원통전 앞에서 받아온 물을 끓인 뒤 녹차를 우렸다. 운치를 더해주는 맷돌 찻상에 일행 4명이 둘러앉아 따뜻한 녹차를 마시니 기분은 더없이 좋았다. 그리고 열어 놓은 문 앞에는 의자를 2개씩 놓아 두었다. 누구든지 앉아서 풍경을 즐기도록 한 배려였다. 암자를 찾는 이들을 배려하는 스님의 마음이 참으로 고마웠다. 보화루 차 한 잔은 그날 산행의 백미였다. 운부암 스님의 마음 씀씀이는 어느 고승의 고준한 법문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중국 항주 자사로 있던 백거이(白樂天·772~846)가 도림(道林) 선사를 찾아가 불법을 물었다.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근본입니까." "어떠한 악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오." "그런 것은 세 살짜리 아이도 다 아는 얘기가 아닙니까." "세 살 먹은 아이도 말할 수 있으나 팔십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소."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가르침 하나라도 실천하며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것이 중요함을 일깨우고 있다.◆산사 누각의 기능산사의 누각은 전각 중 가장 크고 잘 지은 건물인 데다 주변의 자연 풍경을 가장 잘 누릴 수 있는 공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산사 누각이 운부암 보화루처럼 차를 우려먹을 수 있도록 해 개방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바람직한 일이다.산사의 누각은 전통 한옥 미학의 핵심인 자연미가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자연석을 그대로 주춧돌로 사용한 덤벙주초와 다듬지 않은 기둥 등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다.사찰의 누각은 통일신라 때 선종이 도입된 후 사찰이 도시의 평지에서 벗어나 산속으로 옮겨지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에 누문(樓門) 형식으로 누각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억불정책에다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산사는 중심 전각인 주 법당과 누각, 좌우 요사채로 구성되는 ㅁ자 형태의 전형적인 틀이 정착되었다.이런 유형으로 건립된 산사 누각은 통상 누각의 마루가 법당 앞마당과 같은 높이로 맞추어지고, 누각 아래가 법당으로 가는 통로가 된다. 그리고 누각이 예불의 공간을 겸하기 때문에 법당 쪽은 트여 있고, 반대쪽은 문을 다는 구조가 된다. 선암사 강선루, 고운사 가운루 등 다른 성격의 누각도 있기는 하다. 이런 누각은 출입구 기능과 함께 강당, 예불, 법회, 전망, 사찰 사무, 좌선 등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범종이나 법고 등을 설치하는 종루·고루 등으로도 활용되었다.누각은 사면이 벽이나 창호로 폐쇄된 경우(해인사 구광루, 화엄사 보제루, 천은사 보제루 등), 법당 방향만 벽이 없는 경우(선운사 만세루, 화암사 우화루, 내소사 봉래루 등), 사방이 트인 경우(봉정사 덕휘루, 표충사 우화루, 부석사 안양루 등) 등이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지난 5월 영천 은해사 운부암의 누각인 보화루에서 등산객들이 차를 우려 마시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20.08.27
[山寺미학 .33] 적멸보궁...법당 밖에 모신 석가모니 부처 사리…독특한 미학의 공간
불전(佛殿)이라고도 하는 법당에는 부처상이나 보살상이 봉안돼 있다. 대웅전, 원통전, 극락전, 비로전, 무량수전, 대적광전, 관음전, 명부전 등은 모두 그 이름에 맞는 다양한 부처상이나 보살상을 모시고 있다. 산신각에는 또 산신을 모시고 있다.그런데 어느 산사의 중심 법당인데도 불구하고 법당 안에 불상이 없는 곳이 있다.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이 달린 전각이다. 불상이 없는 것은 예배의 대상이 법당 밖에 있기 때문이다. 적멸보궁의 예배대상은 바로 석가모니 부처의 사리다. 이 사리가 봉안된 쪽으로 예배를 올릴 수 있도록 불단만 마련한 법당인 것이다.이 적멸보궁은 눈에 보이는 불상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부근의 땅속이나 탑 속에 모셔진 석가모니의 사리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그 시신을 화장하고 난 뒤에 남은 유골을 진신사리라고 말한다.이런 적멸보궁이 있는 대표적 산사가 다섯 군데 있다. 영축산(양산) 통도사, 오대산(평창) 상원사, 설악산(인제) 봉정암, 사자산(영월) 법흥사, 태백산(정선) 정암사의 적멸보궁이다. 5대 적멸보궁으로 불린다. 궁(宮)은 건물 위계상 전(殿)이나 각(閣)보다 우위에 있다.5대 적멸보궁 봉안 방식 제각각통도사, 금강계단에 사리탑 봉안법흥사는 법당 뒤 언덕 어딘가에봉정암, 설악산 암반 위 오층석탑정암사, 태백산 수마노탑에 안치상원사, 적멸보궁 뒤 석비 세워◆통도사 적멸보궁이런 적멸보궁은 산사에 독특한 미학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방식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통도사 적멸보궁은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을 향해 서 있다. 이 법당에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을 비롯해 4개의 편액이 사방 처마에 걸려 있다. 통도사의 중심 법당인 이 법당은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이 있는 쪽의 벽이 유리로 되어 있다. 이 법당에서는 불상이 아니라 금강계단의 진신사리탑을 향해 예배를 올리는 것이다. 동쪽은 '대웅전(大雄殿)',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은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적멸보궁 편액이 걸린 쪽 앞에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이 있다. 석가모니 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금강계단 형태를 따랐다. 정사각형의 넓은 기단을 상하 이중으로 쌓고, 가운데에 연꽃모양의 받침돌 위에 종 모양의 사리탑을 봉안한 형태다. 네 모서리에는 계단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이 서 있다. 금강계단 뒤로는 잘생긴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법흥사 적멸보궁법흥사 적멸보궁은 통도사 적멸보궁과 다르다. 사리를 봉안한 탑이 따로 없다. 적멸보궁 법당에서 바라보면 멀리 바위산 능선이 보이고, 그 앞으로 잔디로 덮인 거대한 무덤 같은 언덕이 펼쳐진다. 가장 앞쪽에 부도 하나와 석분이 눈에 들어온다. 석가모니 사리는 이곳 어디에 묻혀 있겠지만 정확한 장소는 알 수가 없다.이곳 부도에 대해 석가모니 사리를 봉안한 부도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그 주인공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체가 8각 형태인데, 두꺼운 지붕돌 표현이나 높은 지붕돌의 꽃장식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부도 옆에 석분이 있다. 신라 선덕왕 때 축조되어 승려 자장이 수도했다고 하나 그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석분 밖은 완만한 경사를 이용하여 석실(石室) 위를 흙으로 덮었다. 봉토는 높지 않으나 남쪽을 향한 입구의 정면만은 약간 높게 쌓았다.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설악산 봉정암은 법당인 적멸보궁과 사리가 봉안된 탑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다. 법당에서 보면 아득한 거리에 있는 사리탑은 산등성의 거대한 암반 위에 서 있다. 작고 소박한 탑이다. 주위의 절경과 어우러져 철마다 시각마다 각별한 분위기를 선사한다. 진신사리가 봉안된 오층석탑은 설악산 소청봉 아래 해발 1천244m 높이에 위치하고 있다. 사리탑은 3.6m 규모로, 거대한 바위를 기단부로 삼아 16개의 연잎을 조각하고 그 위에 탑신을 안치했다. 상륜부는 횃불처럼 생동감이 있어 눈길을 끈다. '봉정암중수기'(1781년)에 따르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얻은 석가모니 부처의 사리 7과가 이 탑에 봉안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당나라에서 석가모니 사리를 모시고 돌아온 자장율사가 사리를 모실 자리를 찾던 중 봉황이 인도한 자리가 바로 설악산 용아장성 능선 한 봉우리인 이곳이었다고 한다. 봉황이 인도하고 사라진 곳이 부처 형상의 바위 중 부처의 이마 부분이었다.자장스님은 그 자리에 사리를 봉안할 5층 사리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은 뒤 봉황이 부처의 이마로 사라졌다 하여 암자 이름을 봉정암(鳳頂庵)이라 붙이게 되었다고 전한다. 사리탑 서쪽으로 설악산에서 가장 험한 능선이자 절경을 자랑하는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펼쳐진다.◆정암사·상원사 적멸보궁정암사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 사리를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태백산에 수마노탑을 세워 안치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세운 것이다. 석탑은 정암사 적멸보궁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평평한 대지를 만들고 석탑을 세웠다. 벽돌처럼 돌을 다듬어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국보 제 332호. 높이 9m.사적기에 신라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나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46년(1770), 정조 2년(1778), 고종 11년(1874) 등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쳤다.오대산 상원사의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적멸보궁은 상원사를 지나 중대(中臺) 사자암 위쪽에 위치한다. 적멸보궁의 뒤편 어디엔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돼 있으나 정확한 지점은 모른다고 한다. 적멸보궁 뒤편에 사리를 모셨다는 증표로 탑 모양을 새긴 석비가 세워져 있다. 불상이 없는 내부에서 뒷벽에 뚫린 창을 통해 뒤쪽 어딘가에 묻혀있을 진신사리를 향해 예배하게 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양산 통도사 적멸보궁 앞에 있는 금강계단. 석가모니의 사리가 봉안돼 있다.설악산 봉정암 오층석탑. 용아장성 능선의 암반을 기단석으로 삼아 세워져 있다.영월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 적멸보궁 뒤쪽의 산비탈 어디엔가 석가모니의 사리가 봉안돼 있다.
2020.08.20
[山寺미학 .32] 부도...세월 흔적 가득한 '승탑'…노송 한 그루 벗삼아 나란히 서있네
해남 대흥사는 입구의 산문에서 전각들이 있는 사찰 경내까지 이르는 길이 매우 길다. 동백나무와 편백나무, 전나무, 소나무 등이 하늘을 가리고 있는 멋진 '십리숲길'은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선사한다. 동백숲길을 지나 우리나라 최초의 여관이라는 유선관(遊仙館)을 지나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 피안교가 나온다. 피안교를 건너 조금 올라가면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라는 편액이 걸린 일주문이 맞아주고, 좀 더 올라가면 길 오른쪽에 부도밭이 눈길을 끈다. 담장으로 둘러싸인 이 부도밭(浮屠田)에는 보기 드물게 많은 부도가 늘어서 '부도숲'을 이루고 있다.스님들이 별세한 뒤 화장 후 그 유골을 모신 부도(승탑이라고도 함)가 몰려 있는 부도밭은 스님들의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다. 산사의 부도밭은 보통 전각들이 있는 사찰 경내가 아니라 대흥사 부도밭처럼 경내로 들어가는 길옆이나 부근 산비탈 등에 따로 조성돼 있다. 부도는 보통 한 곳에 모여 있는데, 이런 부도밭은 산사의 특별한 볼거리다. 물론 부도밭이 아닌 곳에 따로 있는 부도들도 있다.부도는 돌로 되어 있어 목재로 된 전각들과 달리 세월이 오래 흘러도 보존될 수 있다. 그래서 부도는 1천년이 넘은 것도 있고,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것도 있다. 그래서 시대에 따라 모양이나 방식이 달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부도에 새겨진 문양 등도 흥미로운 경우가 적지 않다.부도밭의 부도든, 외롭게 자리한 부도든 오래되어 주변의 자연에 동화된 듯한 분위기의 부도들을 접하면 각별한 감흥을 느끼게 된다. 근래 만들어진 부도는 너무 크고 형태도 아름답지 못할 뿐 아니라 정성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씁쓸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대흥사 부도밭대흥사 부도밭에는 80여기에 이르는 부도(54기)와 부도비(27기)가 서 있다. 서산대사, 초의선사를 비롯해 대흥사에서 배출한 13 대종사, 13 대강사 등의 부도비(부도 주인공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 및 부도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다.사찰 들어서는 길옆·산비탈에스님 유해 모신 '부도밭' 자리자연과 동화돼 특별한 분위기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문양석조미술 진수 보여주는 것도이중 '청허당(淸虛堂)'이라고 새겨진 서산대사부도(西山大師浮屠)는 보물 제1347호로 지정돼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래의 팔각원당형의 부도 양식을 계승한 석조부도로 높이는 2.7m인데, 다른 부도와 비교해 형태나 조각이 매우 화려하다. 근처의 서산대사 부도탑비가 1647년에 건립된 것으로 되어 있어 부도 역시 이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중대석과 상대석의 동물장식, 옥개석의 전각에 표현된 용과 상륜부의 장식이 눈길을 끈다. 초의선사 부도는 서산대사 부도 앞에 있다.◆흥국사 부도밭소박하면서도 인상적인 부도밭으로 여수 흥국사 부도밭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왼쪽에 보이는 축대 위로 부도들이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노송 한 그루가 가운데 서 있고, 그 양쪽으로 부도 12개가 일렬로 안치돼 있다. 모두 그다지 크지 않은 데다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부도들이다. 산사 부도밭 중에는 근래 스님들의 유해를 안치한 부도를 주변과 어울리지 않게 너무 크고 화려하게 만들어 추가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 부도밭은 그렇지 않아 좋다. 일부가 부서지거나 마모된 것도 있지만, 굽은 노송과 어우러져 더욱 자연스럽고 친근하게 다가왔다.흥국사를 창건한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의 부도를 비롯해 12개의 부도가 그 형태나 새겨진 조각이 각기 달라 흥미롭다. 특히 취해당(鷲海堂) 부도는 규모는 가장 작지만, 그 형태와 디자인이 매우 단순하면서도 현대적 미감에도 어울려 눈길을 끈다.◆쌍봉사 철감선사 부도화순 쌍봉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철감선사의 부도(승탑)는 국보 제57호로 지정된 대표적 부도다. 부도 전체에 치밀하고 정교한 장식들이 새겨져 있다. 특히 목조 건축물을 연상하게 하는 정밀한 탑신의 장식 표현이 돋보인다. 부도 전체의 장식이 매우 화려하고 비례와 구성미가 빼어난 부도로, 통일신라 하대 석조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철감선사는 중국 당나라 유학 후 이곳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 붙였다. 868년 71세로 쌍봉사에서 입적하자, 왕이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부도와 비를 세우도록 했다.철감선사 부도는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신라시대 부도다. 하대와 상대로 이루어진 기단부와 탑신부, 그리고 없어진 상륜부로 이루어진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격식을 제대로 갖추었다. 2단을 이룬 하대석에는 하단에 구름무늬, 상단에 사자를 조각했다. 상대석에는 연꽃무늬(仰蓮) 위에 팔각 괴임대가 있다. 탑신에는 기둥 모양과 문짝, 사천왕상, 비천상 등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옥개석)은 기왓골을 조각하면서 끝부분은 암막새와 수막새 기와 무늬까지 표현했다. 처마에는 서까래와 부연까지 사실적으로 조각했다. 상륜부는 부재를 꽂았던 구멍만 지붕 위에 남아 있을 뿐이다. ◆연곡사 동부도구례 연곡사의 동부도(주인공을 알 수 없는 연곡사 부도 중 하나)는 기단으로부터 상륜부까지 거의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부도의 형태도 매우 수려하여 통일신라 부도 중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국보 제53호.팔각원당형의 이 부도의 바닥면은 사각으로 되어 있고, 하대부터 팔각형의 평면이 시작된다. 하대는 크게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단과 중단은 구름과 용무늬를 장식하고, 상단은 각 면에 굵은 테를 돋우고 그 안에 사자상을 배치했다. 중대에는 각 면에 안상을 내어 팔부신중상을 새겼다. 상대는 밑면이 연꽃받침모양을 이루고, 위에는 난간모양의 짤막한 장식기둥을 모서리마다 세웠다. 각 면에는 가릉빈가상을 새겨 넣었다.몸체부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기고 앞뒷면에는 문틀, 자물통, 문고리 등을 표현했다. 문틀 좌우에 사천왕상을 배치하고 양 옆면에는 향로를 새겨 넣었다. 지붕은 서까래와 기왓골 등을 세밀하게 표현했다. 상륜부는 앙화(仰花) 위로 사면에 날개를 활짝 편 새를 조각하고, 그 위로는 연꽃무늬 장식의 보륜을 올리고 있다. 전체적으로 표현이 매우 뛰어나며, 세부장식도 정교하고 세련된 감각을 발휘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소박하면서도 예술성이 돋보이는 다양한 부도들이 늘어서 있는 여수 흥국사 부도밭. 소나무 왼쪽에 보이는 부도가 흥국사를 창건한 보조국사 지눌의 부도이다.구례 연곡사 동부도
2020.06.18
[山寺미학 .31] 불영사 대웅보전 기단 거북...대웅보전 짊어진 두 거북 머리…몸체는 어디에 따로 두었을까
울진의 대표적 산사인 불영사. 부처 형상의 바위 그림자가 연못에 비친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불영사(佛影寺)는 역사가 깊은 고찰이다. 신라 의상 스님이 651년에 창건한 사찰로 전한다. 비구니 사찰로 정갈하고 차분한 분위기에다 소중한 문화재도 적지 않고, 입구 숲길도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사찰이다. 이 불영사를 찾는 사람이면 누구나 눈길을 보내게 되는 대상이 있다. 대웅보전 기단 아래 양쪽에서 목을 내밀고 있는 돌거북 두 마리다.◆기단을 짊어지고 있는 두 거북대웅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다. 대웅전 건물로는 작은 규모다. 기단은 일종의 가구식(架構式) 기단이다. 면석(面石)과 그 위에 덮개로 얹는 갑석(甲石)으로 구성됐다. 2단으로 된 면석은 평평하게 다듬어 허튼층쌓기(크기가 다른 돌은 불규칙하게 쌓기)를 했다. 석재가 서로 물리는 곳은 부분적으로 귀 부분을 짜 맞추어 성곽돌을 쌓듯이 해놓았다. 이 기단의 중앙에 계단을 만들고, 그 양쪽 기단 아래에 돌로 만든 거북 머리가 정면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다. 머리와 앞발 부분만 노출돼 있는데, 마치 대웅보전을 거북 두 마리가 등에 짊어지고 있는 듯하다.이 거북은 불영사가 있는 자리가 '화산(火山)'이어서 그 불기운을 누르기 위한 비보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대웅전이 자리한 지형이 바다를 닮아서, 거북을 받쳐주어 물에 가라앉는 것을 막도록 한 비보책이라는 설도 있다.거북이 법당을 짊어지고 있는 이 파격적 건축장치는 대웅보전이 반야용선(般若龍船)임을 표현하기 위해 거북을 묻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반야용선은 사바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주는 배를 말한다. 두 마리 돌거북의 몸통은 기단석 아래에 묻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몸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몸체를 따로 만들지는 않았을까.본전 대들보 용그림 발톱 옆에 금색 거북 한마리씩 붙어있어 해학성 드러낸 파격 건축장치신라 의상 스님이 651년 창건 대웅보전은 1725년 건립 추정 후불탱화, 불화연구 중요자료◆거북 몸체는 대웅전 대들보에대웅보전 안에서 그 몸체를 찾을 수 있다. 세 불상이 있는 불단 위의 천장을 가로지른 두 대들보 옆구리에 달라붙어 있다. 작아서 유심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양쪽 대들보에는 세 개의 발톱을 가진 용 그림이 있고, 그 발톱 옆에 거북이 한 마리씩 붙어 있다. 금색인데 다리와 꼬리가 달린 몸체만 있다. 머리 부분이 없다. 머리는 밖에 있기 때문이다.재미있다. 우리 민족의 해학성을 잘 보여주는 조각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는 금으로 만든 거북이라 하지만, 오래전에 이를 조사한 문화재 위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동으로 만든 동제(銅製)라고 한다. 기단 아래의 돌거북과 법당 안의 거북을 같은 시기에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보물 제1201호인 불영사 대웅보전의 건립 시기는 대웅보전 내부에 걸린 탱화의 묵서명에 '옹정3년 을사(雍正三年 乙巳)'라고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1725년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법당의 불상 뒤 벽에는 1725년에 조성된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보물 제1272호)가 걸려 있다. 여섯 명의 스님들이 그렸다고 한다. 비교적 양호한 보존 상태인 이 탱화는 18세기초 조선 불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법당 내부는 이와 함께 기둥과 도리 사이에 조각한 용두 4점, 반야용선, 비천상, 단정학(丹頂鶴), 극락조, 백호 등 수준 높은 그림과 조각, 건축 부재 등으로 장엄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불단 위에 봉안된 세 불상은 2002년에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높이 1m 정도의 이 불상들은 경내에 있던 600년 수령의 은행나무가 태풍으로 부러진 것을 활용했다. 그 나무 둥치를 4년간 물에 담그고 말리기를 반복한 후에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불영사 창건 설화불영사가 위치한 천축산은 산세가 인도의 천축산(天竺山)과 비슷하다하여 천축산이라 불리었다. 651년에 의상 대사(625~702)가 창건했다는 불영사의 창건 설화도 흥미롭다.의상이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해안을 따라 단하동(丹霞洞) 해운봉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니 서역의 천축산을 옮겨온 듯한 지세가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맑은 물 위에 부처님 다섯 분의 형상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 부근 폭포에 독룡(毒龍)이 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의상은 독룡에게 설법하고 이 땅을 보시할 것을 청했다. 그러나 용이 따르지 않자 법력으로 쫓아냈다. 용은 산을 뚫고 돌을 부수며 떠났다. 의상은 그 못을 메워 사찰을 건립했다. 의상은 이어서 남쪽에 청련전(靑蓮殿)을 짓고 무영탑(無影塔)을 세워 비보(裨補)한 뒤 산 이름을 천축산, 절 이름을 불영사라 했다. 연못에 비친 부처님 모습의 바위는 불영암(佛影巖), 용이 산을 뚫었다는 자리는 용혈(龍穴), 용이 도사리고 있던 곳을 오룡소(五龍沼)라고 했다. 불영사를 휘감아 도는 광천(光川) 계곡은 구룡(九龍) 계곡으로도 불린다.지금 사찰 경내에 있는 연못이 바로 의상 대사가 부처님 그림자를 보았다는 불영지다. 불영사를 창건한 의상은 그 뒤 오랫동안 천하를 두루 다니다가 오랜만에 다시 불영사로 돌아왔다. 그때 사찰 입구의 마을에 이르러서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몹시 기뻐하며 "우리 부처님이 드디어 돌아오셨군요"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불영사를 불귀사(佛歸寺)로 부르게 되었다. 의상은 불영사를 창건하고 9년 동안 머물렀고, 원효 스님도 왕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불영사 주변에는 동쪽으로 삼각봉(三角峰), 절 아래로 좌망대(坐忘臺)와 오룡대(五龍臺), 남쪽으로 향로봉(香爐峰)·청라봉(靑螺峰)·종암봉(鍾巖峰), 서쪽으로 부용성(芙蓉城)·학소대(鶴巢臺), 북쪽으로 금탑봉(金塔峰)·의상대(義湘臺)·원효굴(元曉窟)·용혈(龍穴) 등이 있어 모두 절의 승경을 이루었다고 한다.창건에 대한 이 내용은 1370년 류백유(柳伯儒)가 지은 '천축산불영사기'에 나와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울진 불영사 대웅보전 전경(맨위쪽)과 대웅보전의 오른쪽 기단 아래에 내밀고 있는 거북 머리(가운데). 불영사 대웅보전 내부 천장 대들보에 목이 없는 거북 두 마리가 붙어 있다.
2020.06.04
[山寺미학 .30] 법당 수미단...부처 앉은 '수미산' 형상화...영원·안락 누리는 신비의 세계 한눈에
산사의 법당에 들어가면 불상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 그 불상이 놓인 좌대가 있다. 이 불상 좌대를 수미단(須彌壇)이라 한다. 불교적 세계관을 나타내는 상상의 산인 수미산을 형상화한 단이어서 수미단이라 한다. 수미단은 보통 나무로 되어 있다. 수미단은 대부분 사각인 장방형이지만, 육각이나 팔각도 있다. 육각은 육바라밀(六波羅蜜: 피안의 세계에 이르기 위한 여섯 가지 수행 덕목)을 의미하고, 팔각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여덟 가지 수행 방법인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한다. 수미단은 통상 상단과 중단, 하단으로 구분된다. 수미단은 수미산의 초월적이고 환상적인 세계, 부처의 위신력에 의해 나타나는 상서로운 현상, 당시 사람들의 염원 등이 묘사돼 있는 곳이다. 여기에는 부처에 대한 환희심과 외경심이 다양한 형태의 문양 속에 담겨 있다. 대표적 수미단으로 영천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양산 통도사 대웅전, 강화 전등사 대웅전, 동래 범어사 대웅전, 김천 직지사 대웅전, 밀양 표충사 대광전 등의 수미단이 꼽힌다. 이런 수미단의 조각은 당대 최고의 불교 조각을 보여준다.◆백흥암 극락전 수미단백흥암 극락전의 수미단(보물 제486호)은 조선 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수미단 중에서 문양의 다양성과 조형미, 조각 기법 등 여러 방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불단 가장 아래 받침 부분에는 귀면과 용을 조각했고, 맨 위에는 안상(眼象: 코끼리 눈 모양의 문양)을 조각했다. 받침과 몸체, 덮개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높이는 1.25m, 너비는 4.13m.받침과 덮개 사이의 몸체는 3단으로 구획돼 있다. 정면은 15개면이고, 양 측면은 각 6개면이다. 모두 27개의 면으로 짜여 있다. 면마다 화려한 색채와 다채로운 형상의 동물과 식물 문양이 가득 차 있다. 일반적인 불단 장식과 달리 금니(金泥)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불상 좌대에 온갖 동식물 가득적·황·녹 등 화려한 색채까지당대 최고의 불교조각 보여줘영천 은해사 백흥암 작품 백미조각은 얇은 판자에 문양을 투각하면서 가장자리를 둥글게 처리해 부조 효과를 냈다. 완성된 투각판 뒤에 적황색을 칠한 얇은 판자를 덧댔다. 색채는 기본적으로 적색, 황색, 녹색, 흑색, 백색을 사용하고 있다. 용과 학 등의 동물은 특별히 금니를 칠했다.서쪽 측면에는 연꽃 봉오리를 손에 든 가릉빈가, 여의주를 든 거북, 네 발 달린 물고기, 게, 사람 얼굴에 네 발 달린 물고기, 인두귀갑(人頭龜甲)에 새 발이 달린 동물, 달리는 기린, 물고기, 자라 등이 조각돼 있다. 동쪽 측면에는 물고기·여의주를 들고 있는 반인반어(半人半魚) 형상의 동물, 흰 호랑이 형상의 동물, 인두어신(人頭魚身) 형상의 동물, 기러기 형상의 새 등이 있다.정면에는 흰 코끼리, 봉황, 연잎 줄기를 잡고 있는 동자, 황룡, 개구리, 여의주, 말 형상의 동물, 모란꽃, 용 발가락에 물고기 꼬리 형상의 동물, 공작, 국화, 두 마리 사자, 모란, 봉황, 연꽃, 사슴뿔의 익마(翼馬), 다양한 식물문양 등이 펼쳐져 있다.이처럼 신비롭고 기괴한 동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극락전은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고, 아미타여래는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다. 불자들에게 서방 극락정토는 영원한 안락을 누릴 수 있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계로 인식되고 있다.'극락국토에는 밤과 낮 여섯 번 만다라화 꽃비가 내리고, 하늘에서는 백 천 가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고, 땅에는 온갖 새들이 노닐고 있다. 흰 고니와 공작과 앵무, 사리조(舍利鳥), 공명조(共命鳥), 가릉빈가 같은 새들이 밤낮으로 여섯 때에 걸쳐 아름답고 온화한 소리를 낸다. 이 새들은 모두 아미타여래께서 법음을 널리 펴기 위해 화현(化現)한 것이다.'극락정토의 정경을 설명한 '불설아미타경'의 내용이다. 여기에 나오는 가릉빈가를 백흥암 수미단에서 볼 수 있다. 하반신은 새, 상반신은 사람, 등에는 새 날개를 단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환성사 대웅보전 수미단수미단 문양 중에는 경산시 환성사 대웅보전의 수미단처럼 민화적 정감과 매력이 넘치는 문양도 있다. 나무로 된 수미단 전면의 12폭, 양 측면의 8폭에 다채로운 문양이 장식돼 있다. 받침에는 용과 귀면이 조각돼 있다. 귀면은 모두 정면상이고, 용은 불단 양쪽 끝에서 중앙을 향해 모여드는 모습이다.문양 내용은 코끼리, 기린, 게, 사슴, 가릉빈가, 새 등과 함께 표현한 식물(꽃) 문양이 주종을 이룬다. 식물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모란, 국화, 인동, 연꽃, 접시꽃 등을 쉽게 구별해 낼 수 있다. 새는 한 문양 속에 한 마리만 있는 것도 있고, 한 쌍이 들어 있는 것도 있다. 한 쌍의 경우에는 수놈이 암놈 등에 올라타고 있는 것도 있다.새 중에는 비익조도 있다. 비익조는 암컷과 수컷의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어서 짝을 짓지 아니하면 날지 못한다는 상상의 새다. 부부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움, 애틋함, 우정을 상징하기도 한다.꽃과 새를 주제로 한 화조 문양은 역사가 매우 오래됐다. 화조 문양은 자연계의 조화를 특별한 애정과 관심으로 보았던 동양인의 자연관에 바탕을 두고 있다.환성사 수미단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동쪽 측면의 수면조신상(獸面鳥身像)과 서쪽 측면의 인물상 및 나찰상이다. 동쪽의 것은 새 몸에 짐승의 얼굴, 귀갑(龜甲)을 갖춘 괴이한 형상인데, 상서로운 기운이 뻗치는 여의주가 담긴 그릇을 머리에 이고 서있다.서쪽의 사람 닮은 형상은 서기로 충만한 오색 구슬이 가득 담긴 그릇을 머리에 이고 서있다. 그리고 서쪽 측면 구석자리에는 쪼그리고 앉아 네모난 물건을 두 손으로 받쳐 든 붉은 몸의 난쟁이가 있다. 이것은 나찰로 알려진 인물상이다. 푸른 눈과 붉은 머리털을 가진 것이 특징인 나찰은 사람을 잡아먹거나 지옥의 죄인을 못살게 군다고 하는 고대 인도의 신이다. 후에 불교에 귀의해 부처님을 수호하는 신이 됐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백흥암 극락전의 수미단. 〈문화재청 제공〉영천 은해사 부속암자인 백흥암의 극락전 수미단 서쪽 측면에 새겨진 문양들. 이 수미단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수미단으로 꼽힌다.경산 환성사 수미단에 새겨진 가릉빈가 문양.
2020.05.21
[山寺미학 .29] 경주 장항리사지 사자상...포효 대신 앙탈 부리는 사자상…선인들 여유·해학 정겹게 다가와
산사에 가면 다양한 동물을 만날 수 있다. 용, 봉황, 사자, 코끼리, 원숭이, 물고기, 게, 토끼, 거북 등을 사찰 건물과 석탑, 석등, 계단과 축대, 벽화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들 중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동물이 용과 사자다. 사자는 특히 석탑, 석등, 불상 대좌, 대웅전 앞, 기단석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문수보살이 타고 있는 동물도 사자다.사자는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상징으로도 활용된다. 부처가 앉는 자리나 경전을 법문하는 자리를 사자좌(獅子座)라 한다. 사자후(獅子吼)라는 말은 사자가 내는 소리가 모든 동물의 소리를 잠재우듯이, 다른 모든 삿된 잡설들을 깨뜨리는 부처의 설법을 상징한다. 사자는 동물 중에 가장 강하기도 하지만, 또한 단체 사냥을 할 때는 매우 영리한 모습을 보여주는 등으로 인해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인 문수보살이 타는 동물로 등장한다. 사자는 인도의 불교에 수용된 후 중국과 우리나라 불교에도 전래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사자가 용맹하기보다는 매우 친근하고 귀여운 모습으로 많이 변용돼 나타난다. ◆장항리사지 불상대좌 사자상귀엽고 재밌는, 조각 솜씨도 뛰어난 최고의 사자상은 경주 장항리사지 불상대좌에 새겨진 사자상이 아닐까 싶다. 장항리사지는 깊은 산속 계곡 가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오층석탑 2기와 법당 건물터(금당지) 주춧돌, 불상대좌 등이 남아있다. 우리나라 불교에 전래된 사자친근한 모습으로 많이 변용돼장항리사지 작품 생동감 넘쳐귀여운 자세로 웃음도 자아내합천 영암사지 엎드린 사자상햇살아래 조는 삽살개 보는 듯이곳의 불상대좌(佛像臺座)는 아래와 위가 분리되어 있고, 팔각형이다. 아래쪽은 8면에 안상(眼象: 연화문과 함께 불교 장식에 사용되는 대표적 문양으로, 코끼리 눈을 형상화한 것)을 새긴 뒤, 그 안에 신수(神獸)와 신장(神將)을 새겼다. 위에 있는 원형 돌에는 아래위로 맞붙은 연꽃이 16송이씩 조각되어 있다. 대좌는 전체적으로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섬세하고 아름다운 조각 솜씨는 탄성을 자아낸다.이 대좌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웃음을 자아내는 귀여운 자세를 취한 사자상이다.살아서 튀어나올 듯한, 생동감이 넘치는 귀여운 사자 한 마리. 새끼 사자가 먹을 것을 형한테 빼앗기자 분통을 터뜨리며 고함치고 있는 모습을 떠올린다. 입을 벌리고 혀를 드러낸 채 주먹을 쥔 두 앞발은 앞을 향해 내 지르고 있다. 하나는 쫙 뻗고 하나는 약간 굽은 상태다. 뒤쪽 왼발은 발가락으로 딛고 있고, 오른발은 살짝 들어 발가락을 움켜쥐고 있다. 엉덩이는 땅에 닿아 있다. 움켜쥔 한 다리로는 배를 차며 앙탈을 부리고 있는 듯하다. 한쪽으로 드러난 꼬리도 위로 치켜든 채 화가 잔뜩 났음을 말해주고 있다. 볼수록 재미있고 귀엽다. 집으로 데려가 키우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신성한 불단을 지키는 사자상인데도 이처럼 재미있게 표현하는 우리나라 석공과 스님들의 여유와 해학이 정겹게 다가온다. 이 절터가 근래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20년대.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1㎞ 지점에 금광이 생겨난 후였다. 그런데 1923년 4월28일 사리장치를 탈취할 목적으로, 광산에 쓰이던 폭약으로 오층석탑과 불상을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 1932년 석탑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불상은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옮겼다가 몇 번의 복원수리를 거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자리하고 있다.당시 사자 부분이 파괴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온전하게 남아있다.◆영암사지 금당 기단 사자상합천 황매산 영암사지에는 흥미롭고 소중한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사자상 조각이 단연 눈길을 끈다. 보물로 지정된 쌍사자석탑의 사자 두 마리가 먼저 눈길을 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적지 않게 마모된 느낌이지만, 허리를 곧추세우고 화사석(火舍石)을 받치고 있는 사자 모습은 최고로 꼽을 만하다.맛이 다르지만, 이에 못지않게 멋진 사자 조각들이 있다. 하나둘이 아니다. 각기 다른 모습의 사자상이 여덟 군데나 있다. 쌍사자석탑 뒤의 금당터 기단석 사방에 새겨져 있다. 흥미로운 사자들이다.금당터에는 사방에 쌓은 기단과 각 면의 중앙에 놓은 네 개의 계단이 남아있다. 계단의 소맷돌은 한군데는 소실되고 세 군데만 남아있는데, 모두 가릉빈가를 조각해 놓았다. 전문가가 아니면 잘 분간하기도 어렵긴 하다. 가릉빈가는 불경에 나오는, 사람의 머리를 한 상상의 새다. 계단에 가릉빈가로 소맷돌을 장식한 것은 드문 일이다. 사자상은 이 금당터 기단의 면석에 조각해 놓았다. 따뜻한 햇살 아래 졸고 있는 삽살개마냥 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자가 있고, 뒤로 머리를 돌려 으르렁거리며 경계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사자도 있다. 졸고 있는 듯한 모습도 있고, 웃고 있는 듯한 모습도 있다. 얼굴 부분을 강조해 돋을새김한 사자상도 있다. 이 사자상의 조각솜씨가 특히 돋보인다.모두 사자를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얼굴이나 꼬리 등이 개 모습에 더 가까운 사자상도 있다. 그래서 더 친근하게 느껴지고 흥미롭다. 많이 마모되어 잘 분간이 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같이 생동감 있는 조각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사자는 '백수(百獸)의 왕(王)'으로 불리는 맹수로 불교에 다양하게 수용되어왔지만, 우리나라에는 살지 않아 동물원이 없던 옛날에는 그 실물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상이 가미되기도 해서 사자 같지 않은 사자상도 나타났을 것이다.중국이나 일본 사찰의 사자상들은 무섭거나 근엄한 데 비해, 우리나라 사찰에는 이처럼 친근하고 재미있는 사자상들이 많다. 우리나라 승려나 석공들의 해학성과 창의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경주 장항리사지 사자상(아래)과 이 사자상이 새겨진 불상대좌. 귀엽고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보는 이를 미소짓게 만드는 사자상이다.합천 영암사지 금당 기단석에 새겨진 사자상.
2020.04.29
[山寺미학 .28] 청도 대적사 극락전 기단...게·거북 노니는 '바다'에 불국정토 향하는 '용선' 띄운 듯
청도 대적사(청도군 화양읍 와인터널 근처)는 작은 암자 같은 사찰이다. 널리 알려진 사찰도 아니고 사람들이 많이 찾지도 않는다. 감나무밭으로 둘러싸인 마을 뒤쪽에 있다. 마을과 감나무밭을 지나면 나오는 산비탈 계곡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전각이라고는 극락전, 명부전, 산령각이 전부다. 하지만 극락전 하나만 해도 불교 문화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흥미를 가질 만하다. 특히 극락전 기단이 눈길을 끈다. 다른 사찰 기단에서는 볼 수 없는, 흥미롭고 아름다운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인 이 극락전은 18세기에 중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보물 제836호로 지정돼 있다. 얼기설기 짜맞춘 기단 면석에여러 마리 수생동물 돋을새김내륙 사찰서 볼 수 없는 사례법당내 쌍룡 '반야용선' 상징벽화엔 선두 맡은 인로왕보살피안으로 중생 인솔하는 모습◆거북과 게가 노니는 기단극락전 앞면 기단은 석탑의 기단부처럼 면석(面石)들을 조합해 만들었다. 넓적하게 다듬은 면석의 아래와 위는 길쭉하게 다듬은 장대석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정교하고 치밀하게 맞춰져 있지 않아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진다.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놓았다.좌우 기단의 면석에는 H자 모양의 굵은 선을 돋을새김한 것도 있고, 열십자 모양을 새긴 것도 있다. 그냥 아무런 무늬가 없는 면석도 있다. 면석의 크기도 같지 않다. 얼기설기 대충 짜 맞춘 듯하고, 기단석의 색상도 균일하지 않다.이 바탕 위에 선과 선의 교차점이나 선 위, 면석 중앙 등에다 꽃이나 원, 꽃잎 문양 등을 새겨 놓고 있다. 특히 거북과 게가 눈길을 끈다.기단 오른쪽의 가장 큰 면석에 새겨져 있는 거북과 게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로띠와 세로띠가 교차한 부분 중 세로띠에 새겨져 있다. 가로띠보다 넓은 세로띠에 새겨져 있다. 위쪽에 아래로 향하는 엄마 거북의 머리 앞에 작은 새끼 거북 한 마리가 있다. 머리는 왼쪽으로 향하고 있다. 엄마와 산보 나와 노닐고 있는 듯하다. 게는 그 아래에 떨어져 있다. 거북 가족을 향해 위로 걸어오고 있다. 게와 거북이 둑길에서 만나기로 한 모양이다.이 오른쪽 면석에 보면 거북 한 마리가 더 있다. 이 면석에는 가로띠가 없이 좌우 양 끝부분에 세로띠를 양각해놓고, 그 가운데 커다란 꽃 한 송이를 새겨놓고 있다. 꽃잎을 세 겹으로 둥그렇게 조각했는데, 연꽃인 듯한 이 꽃의 한가운데에 작은 거북 한 마리가 놀고 있다. 이 꽃 양옆에는 꽃봉오리처럼 보이는 것을 하나씩 새겨놓았다. 무엇을 표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거북은 계단석의 소맷돌에도 있다. 통돌로 만든 소맷돌 중 오른쪽에 보면 두 마리의 거북이 있다. 외곽선을 두른 안쪽에 여의주를 문 용 조각을 중심으로, 연꽃 봉오리와 파도를 형상화한 것 같은 나선형의 문양 등과 함께 거북 두 마리가 한가하게 노닐고 있다.그 반대쪽 소맷돌에는 커다란 나선형 문양 두 개와 도끼날 같은 문양 아래에 꼬리와 머리 부분을 드러낸 물고기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왼쪽 기단 면석에는 알 수 없는 추상적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가로띠와 세로띠가 만나는 부분에 사각 원 모양의 선이 하나 새겨져 있고, 그 오른쪽에는 가로띠 아래 세로띠 양쪽에 알 수 없는 문양이 두 개씩 새겨져 있다. 그 옆 면석에는 금강저가 연상되는 문양이 양쪽에 있다.계단 맨 아래 왼쪽에 넓적한 사각 석판을 하나 세워놓았는데, 그 가운데에도 거북 한 마리가 새겨져 있다.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흥미로운 기단 조각들이다. 부재들을 보면 그 크기나 색깔, 통일성 등의 면에서 처음부터 이 기단을 만들기 위해 장만한 것이 아니라, 다른 전각의 기존 기단석을 모아 사용한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이 기단석에는 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수생 동물들이 등장할까.◆거북과 게가 등장하는 이유전문가들은 이 극락전 전체가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인 피안(彼岸)의 극락정토로 중생들을 건네주는 반야바라밀의 배(船)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참된 지혜(반야)를 깨달은 중생은 이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정토로 간다. 사찰에는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정토로 향하는 모습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법당 기단부를 바다로 표현해서 법당 전체를 반야용선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기단부나 기둥 초석에 거북이나 게, 물고기 등의 바다생물을 새기기도 하고, 연꽃을 활용하기도 한다.해남 미황사 대웅보전과 여수 흥국사 대웅전 등에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미황사의 경우는 사찰의 연기설화(緣起說話) 자체가 극락정토에 닻을 내린 반야용선의 서사를 갖고 있다. 인도 왕이 경전과 불상을 배에 싣고 모실 곳을 찾아다니다 달마산 꼭대기에 1만 분의 부처가 나타난 것을 보고 찾아왔다는 미황사 연기설화를 반야용선으로 해석한 것이다. 대웅보전 주춧돌에 게와 거북, 연꽃이 새겨져 있는데, 주춧돌과 그 아래의 기단이 바다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대웅보전은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가 되는 것이다. 미황사의 부도밭 부도 조각에도 게와 물고기, 거북, 연꽃 등이 새겨진 경우가 많아 눈길을 끈다.바닷가에 자리한 여수 흥국사 대웅전 기단부에는 거북, 게 등을 새겨 두었다.하지만 내륙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이 대적사 극락전 기단의 사례는 다른 내륙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어 흥미롭다. 극락전 법당은 선실이며 기단은 바다를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극락전 중앙 어간 문 위 양쪽에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데 이것도 법당이 반야용선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대적사 극락전이 반야용선으로 구상되었다는 사실은 법당 내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벽화 중 반야용선의 선두에 서서 승선자들을 인솔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과 선미를 맡는 지장보살 등이 그려져 있는데, 이 벽화도 극락전이 반야용선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청도 대적사 극락전(왼쪽)과 극락전 기단 오른쪽에 새겨진 거북과 게 등. 이것은 극락전이 불법을 깨달은 중생을 극락정토로 건네주는 반야용선이고, 기단은 바다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청도 대적사 극락전(왼쪽)과 극락전 기단 오른쪽에 새겨진 거북과 게 등. 이것은 극락전이 불법을 깨달은 중생을 극락정토로 건네주는 반야용선이고, 기단은 바다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2020.04.15
[山寺미학 .27] 안동 봉정사 영산암 벽화...탱화·시화·민화 어우러진 암자…'열린 불심'에 친근함 느껴져
안동 봉정사 영산암이 종교적 분위기가 아니라 누구나 편안하고 친근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또 하나의 이유는 벽화다. 법당인 응진전과 요사채인 송암당에 벽화가 많은데, 이 벽화들의 소재가 불교와는 관계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대의 불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좋아했을 소재들이다. 그래서 요즘 일반인들도 흥미로워할 만하다.◆송암당 벽화영산암 벽화는 불교적 내용과 함께 민화적 소재, 중국의 유명 한시 등을 소재로 한 그림들로 어우러져 있다.먼저 송암당 벽화다. 소나무 곁의 송암당(松巖堂)은 건물의 삼면에 마루를 낸 정감 있는 요사채다. 마당쪽으로는 툇마루를 내고, 남쪽 측면에는 대청마루를, 뒷면에는 쪽마루를 달았다. 마루들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정면 문 위에 그려진 벽화의 공간적 배경은 연꽃이 만발한 연지(蓮池)다. 한 장면은 일출 무렵에 물고기가 용으로 극적으로 변하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을 묘사하고 있다. 어변성룡도는 민화에서 선호되는 소재로, 잉어가 용문의 거친 협곡을 도약해 오른다는 의미에서 '약리도(躍鯉圖)'라고도 부른다. 벽화의 한 쪽에 붉은 글씨로 '어변성룡'이라는 화제를 적어 놓았다.어변성룡도의 오른쪽에는 달마대사가 갈대 가지를 꺾어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인 '달마도해도'를 그려놓았다. '달마도해(達磨渡海)'라는 화제도 있다.요사채 송암당의 漢詩 소재 작품들 격 높고 솜씨 뛰어나법당 응진전 안팎 민화풍 그림은 화려한 색채 운용 눈길당대 사람들 다양한 생각·가치관 투영돼 각별한 재미도그 옆에는 같은 연지를 배경으로 사람이 용을 잡아 끌어가는 그림과 함께 '일모귀래도'가 그려져 있다. 일모귀래도는 도롱이를 입고 삿갓을 쓴 사람이 배 위에서 노를 젓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 위에 '일모귀래우만의 (日暮歸來雨滿衣)'라는 화제를 써놓았다. 일모귀래도는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시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불교와는 관계가 없는 소재다. 선비 사회에서 종종 그려지던 그림의 소재다.이 구절이 나오는 이상은의 '방은자불우(訪隱者不遇: 은자를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하고)'라는 시다.'가을비 주룩주룩 농가 별장 사립문 적시네(秋水悠悠浸墅扉)/ 꿈속에는 여러 번 왔지만 실제 온 것은 드물지(夢中來數覺來稀 )/ 매미 사라지고 나뭇잎은 누렇게 떨어지는데(玄蟬去盡葉黃落)/ 한 그루 사철나무 있고 사람은 돌아오지 않네 (一樹冬靑人未歸)// 성에서 쉬며 보니 아는 사람 없고(城郭休過識者稀 )/ 슬픈 원숭이 울음소리 있는 곳에 사립문 하나(哀猿啼處有柴扉 )/ 강은 파랗고 해는 흰데 나무하며 고기 잡는 길만 있고(滄江白日樵漁路)/ 해 저물어 돌아오는 길에 비가 옷을 다 적시네(日暮歸來雨滿衣)' 송암당의 큰 마루가 있는 쪽의 벽에도 시를 소재로 한 그림이 있다.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의 유명한 시를 소재로 한 '송하문동자도'다. 한쪽이 좁아지는 가로로 긴 공간에 그렸다. 동자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학이 두 마리 있는 그림이다. 학 옆에 시의 전문을 그대로 써놓고 있다. 이곳 분위기가 시가 묘사한 공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가도의 시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 은자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는 다음과 같다.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으니(松下問童子)/ 스승님은 약초를 캐러 가셨는데(言師採藥去)/ 이 산 속에 계시긴 하겠지만(只在此山中)/ 구름이 깊어 어딘지는 모르겠다 하네(雲深不知處)'이 벽화들은 같은 사람이 그린 것 같은데 솜씨가 뛰어나다. 그림의 격이 매우 높다. 언제 그린 작품인지 모르겠으나 상당히 오래 된 듯하다.◆응진전 벽화법당인 응진전에는 안과 밖에 다양한 벽화들이 있다. 여기에도 불교적 소재의 그림과 함께 민화풍의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서쪽 외벽의 벽화로는 호랑이와 까치 그림인 호작도, 불사약을 찧고 있는 토끼 한 쌍의 그림 등이 눈길을 끈다. 호작도는 액막이와 길조의 상징성을 담고 있어 조선후기 민화의 단골소재로 활용했다. 불사약을 빻고 있는 토끼 한 쌍의 민간 설화를 사찰벽화로 만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호작도 옆에는 고목 아래 영지(불로초)가 가득한 곳에 사슴 두 마리가 다정하게 서 있는 그림을 그려놓았다. 뿔이 있는 사슴은 영지를 물고 있다. 그 앞의 뿔이 없는 사슴은 새끼인 듯하다. 반대편 외벽에는 송학도와 함께 두 사람이 용을 밧줄로 낚아 올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용을 잡는 그림은 성불(成佛)하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나려는 용이 인간에게 일부러 잡히는 용의 서원이 담긴 경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인간이 되려는 서원으로 용이 잡혀준 줄도 모르고 의기양양해 하는 두 사람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웃통을 벗어 던진 채 반바지 차림으로 긴 밧줄을 용의 콧수염에 묶어서 당기고 있는 모습이 해학적이다.송암당 정면 벽화에도 같은 소재의 그림이 있다. 일모귀래도 옆에 있다. 응진전의 벽화와는 다른 분위기다. 갈고리에 코를 꿰인 용이 어부와 한바탕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응진전 내부 벽화에도 민화풍의 그림이 많다. 어변성룡도, 봉황도, 선학도, 파초, 포도, 대나무 등 다양하다. 물론 불교적 소재인 연화화생도(蓮華化生圖), 심우도(尋牛圖), 나한도, 운룡도 등도 있다.선학도(仙鶴圖)에 등장하는 소재는 쌍학과 함께 고매(古梅), 길상화, 보름달, 불로초 등이다. 고매는 꽃이 만발한 백매다. 검은 매화 등걸은 용틀임하듯 역동적이고, 보름달이 휘영청 매화가지에 걸려 있다. 선학 두 마리가 서 있는 매화나무 아래에는 영지버섯 같은 불로초가 가득 피어 있다.봉황도는 강렬하고 화려한 보색 대비의 색채 운용이 눈길을 끈다. 바위와 깃털, 오동나무 등이 잘 어우러진 모습이다.영산암 벽화는 이처럼 보는 사람들의 관심사나 안목에 따라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는 다양한 벽화들이 곳곳에 있어 각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사찰 벽화이지만 당대 사람들의 다양한 민심이 잘 반영된 벽화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다양한 생각과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반영할 줄 아는, 열린 사고를 보여주는 암자라는 생각이 든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영산암의 응진전 내부 벽화 중 선학도(仙鶴圖·위쪽)와 송암당 벽화 중 가도의 시 '심은자불우(尋隱者不遇)'를 소재로 한 송하문동자도(부분). 한쪽이 좁아지는 벽면에 그린 것인데, 동자가 가리키는 쪽 끝부분에 시 전문을 한문으로 써놓고 있다.
2020.04.01
[山寺미학 .26] 산사 동백숲...눈부시게 푸르른 '春栢(춘백)'…붉은 꽃까지 피우니 그저 고마울 뿐
고창 선운사는 산 속에 있지만, 전각들이 평지에 건립돼 있다. 누각인 만세루가 큰 마당 한가운데 서 있고, 그 맞은편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전각들이 펼쳐져 있다. 선운사 경내 입구인 천왕문을 들어서면 만세루를 비롯한 전각들 대부분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세루 옆을 돌아 대웅전 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전각들 뒤편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숲이 특히 눈길을 끈다. 대웅전과 그 좌우의 영산전·관음전 등 뒤로 푸른 숲이 띠를 이루며 좌우로 길게 펼쳐져 있다. 산사 전각들과 어우러져 특별한 분위기를 선사하는데, 바로 동백나무숲이다. 동백나무숲은 다른 수목들이 꽃이나 잎을 피우지 않고 있는 겨울과 초봄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각별한 인상을 준다. 지금은 동백나무가 한창 꽃을 피우고 있어 더욱 볼 만하다. 우리나라에는 이처럼 멋진 고목 동백숲이 사찰 주변을 둘러싸서 보호하며 각별한 아름다움을 사계절 변함없이 선사하고 있는 산사가 적지 않다. ◆고창 선운사 등 동백나무숲선운사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호)은 2천여 그루의 동백나무 군락이 1만6천530㎡에 걸쳐 30m 정도 폭의 긴 띠 모양으로 조성돼 있다. 나무의 평균 높이는 6m 내외라고 한다. 가슴높이의 줄기 지름은 30㎝ 정도이며, 수관(樹冠: 나무의 줄기 위에 있어 많은 가지가 달려 있는 부분) 너비는 8m 정도.이곳 동백나무를 정확하게 언제 심었는지 알 수 없으나 500년 정도 수령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운사 동백나무는 산불이 났을 때 사찰 전각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 방화림으로 심어졌다고 한다. 동백나무숲은 대웅전 등 전각에서 15m 이상의 공간을 띄워 조성돼 있어 산불이 동백나무숲에 옮아 붙는다 해도 전각들까지는 쉽게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다.산사 둘러싼 수백년 동백군락선운사·백련사 등 특별한 풍광 옥룡사지 숲 사찰 중 최대규모산불·강풍 막아내는 역할 담당열매 짠 기름 사찰재정 보탬도강진 백련사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51호)도 유명하다. 백련사 남쪽과 서쪽의 5만여㎡에 1천5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 높이는 7m 정도. 이 동백나무숲은 고려 말 원묘 국사가 사찰을 중창할 때 방화림 등의 목적으로 조성했다고 한다. 스님들의 부도가 숲 속 곳곳에 있는 이 숲에 동백꽃들이 한창 피고 질 때면 붉은 비단을 깔아 놓은 듯한 바닥과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선사한다. 동백나무와 함께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 우리나라 남부 해안에서 자생하는 수종들도 자라고 있다.구례의 화엄사 전각들도 동백나무숲이 보호하고 있다. 서쪽 산비탈과 접하고 있는 각황전과 원통전, 만월당 뒤쪽에 동백나무숲이 조성돼 있다. 이 숲이 언제 조성됐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유재란(1597) 때 전각들이 전소된 후 각황전 등을 중건하면서 스님들이 심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또한 해남 대흥사와 미황사의 동백나무숲도 아름다운 산사 풍광을 더하는데 한몫을 한다. ◆옥룡사지 동백나무숲전각들은 사라져버리고 주변에 심었던 동백나무들만 지금까지 남아 지난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곳도 있다. 옛 절터인 광양 옥룡사지 동백나무숲(광양시 옥룡면 추산리)이다. 사찰 동백나무숲으로는 최대 규모일 것이다. 절터 주위에 조성된 동백나무숲은 7㏊에 이르고, 이 숲에는 100년 이상 된 동백나무 1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이 동백나무숲은 2007년 12월에 천연기념물 제489호로 지정됐다.이곳 동백은 지금 꽃을 한창 피우고 있다. 지난 12일 이곳을 찾아갔다. 옥룡사지 입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리니, 청량한 공기 속에 맑고 은근한 향기가 코를 즐겁게 했다. 무슨 향기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멀리 이곳저곳에 한창 꽃을 피우고 있는 매화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동백꽃은 향기가 거의 없다.매화나무와 감나무가 있는 밭을 지나 옥룡사지를 향해 조금 올라가니 하늘을 가리는 동백나무 숲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속에 들어가니 바닥에도, 나뭇가지에도 붉은 동백꽃이 수를 놓고 있었다. 동백나무숲의 분위기를 즐기며 잠시 걷다 보면 동백 터널이 끝나고 옥룡사지가 펼쳐진다. 옥룡사지는 산비탈에 있는데, 석축과 주춧돌로 보이는 유적들이 조금 보이는 것 말고는 눈에 띄는 문화재는 없고 잘 관리된 잔디밭만 펼쳐져 있었다. 이 절터 사방을 모두 동백나무숲이 둘러싸고 있었다. 크고 작은 동백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동백나무숲에 들어가니 절정의 동백꽃에 드나드는 수많은 동박새와 벌들이 내는 소리가 귀를 즐겁게 했다. 백운산(해발 1천218m)의 한 지맥인 백계산(505m) 남쪽 옥룡사지(사적 제407호) 주변의 이 동백나무숲은 옥룡사(玉龍寺)를 창건한 도선 국사(827~898)가 땅의 기운을 보강하기 위해 처음 심었다고 전해온다. 도선 국사는 옥룡사에 35년간 머물면서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며, 이곳에서 입적했다. 옥룡은 도선 국사의 어렸을 때 이름이다.광양시는 옥룡사지 동백나무숲 주변에 계속 동백나무를 더 심어 이 일대에 국내 최대 규모의 동백나무숲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산사에 동백을 심은 뜻은 산사의 동백나무숲은 방화림이자 방풍림으로 조성하거나 풍수지리적 비보 차원에서 조성한 것이지만, 사찰경제를 떠받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동백나무 열매에서 짠 기름인 동백기름은 등잔불을 밝히는 용도 등으로 사용되는 스님들의 필수 생활용품이자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가뜩이나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사찰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수입원이기도 했을 것으로 본다.조성 당시 스님들이 동백나무를 심은 목적이 무엇이든, 사시사철 푸르름과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동백나무숲으로 산사의 각별한 풍광을 누리게 해주니 고마울 뿐이다.동백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栢), 추백(秋栢), 동백(冬栢)으로 구분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광양시 옥룡면 백계산 자락에 있는 옥룡사지 동백나무숲. 옛 절터를 둘러싸고 있는 이 동백나무숲에는 100년 이상 된 동백나무 1만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지금 한창 동백꽃을 피우고 있어 숲에 들어가면 동박새와 벌 등의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고창 선운사의 영산전 뒤쪽을 둘러싸고 있는 동백나무숲.
2020.03.17
[山寺미학 .25] 안동 봉정사 '영산암 툇마루'...봄바람 드는 툇마루에 앉아 두런두런 마음 나눠도 좋으리
안동 봉정사는 친근하고 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사찰이다.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이다. 옷깃을 여미게 하는 엄숙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아늑하고 정감 넘치는 시골 외가나 고향집 느낌이 든다. 봉정사 아래의 마을 곳곳에 있는 고택 분위기가 물씬 난다. 봉정사 초입 길옆 계곡 바위 아래에 있는 정자 명옥대가 가장 먼저 맞아줄 때부터 그렇다. '창암정사(蒼巖精舍)'라는 초서 편액이 걸린 이 명옥대는 퇴계 이황이 즐겨 찾던 장소임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지은 정자다. 이황이 지은 이름인 '명옥대(鳴玉臺)'는 정자 옆 바위에 새겨져 있다. 봉정사는 일주문만 있지, 무서운 사천왕상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이나 금강문도 없다. 만세루에 오르는 계단길도 너무나 소박하고 자연스럽다. 만세루를 지나 마주하는 대웅전에 다가서도 툇마루 덕분에 친근감이 들게 한다. 이 대웅전에는 정면에 나지막한 툇마루가 있다. 사찰 대웅전 앞에 이처럼 툇마루가 있는 경우는 이곳 말고는 본 적이 없다. 1435년에 쓴 중창기가 발견된 이 대웅전은 2009년에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다.◆고택 같은 영산암대웅전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언덕 위에 한옥이 보인다. 영산암이다. 이 암자는 특히 편안한 분위기다. 사찰 분위기가 전혀 아니다. 조선시대 살림집 한옥 분위기다. 테두리도 없는 소박한 '우화루(雨花樓)' 편액이 달린 누각 아래를 지나 마당에 오르면, 우화루를 포함해 여섯 채의 크고 작은 건물들이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을 할 때 꽃비가 내렸다는 이야기에서 가져온 우화루 편액의 유래를 모르면, 의미 그대로 꽃비가 내리는 누각이라고 생각해도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우화루와 그 맞은편의 법당인 응진전, 응진전 앞 좌우에 있는 요사채인 송암당과 관심당, 응진전 왼쪽의 삼성각과 염화실이 있다. 건물들은 3단에 걸쳐 배치돼 있다. 하단에는 우화루가, 중간 마당 좌우에 송암당과 관심당이, 상단에 응진전과 삼성각·염화실이 자리하고 있다.대웅전 오른쪽 언덕 위 영산암아늑한 시골 고택 분위기 물씬마당 아담한 화단 정겨움 더해마루 통해 요사채 셋 연결사례다른 사찰서 찾아볼 수 없을듯마당에 올라서 둘러보아도 사찰 분위기가 전혀 없다. 법당인 응진전의 건물마저 작은 규모인 데다 편액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법당인 줄 알기도 어렵다. 무엇보다 이 영산암 건물은 모두 툇마루가 있어 더욱 친근하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툇마루를 만들 수도 없는 작은 삼성각 말고는 모두 툇마루가 달려 있다.특히 눈길을 끄는 점은 우화루의 이층 대청마루가 마당 좌우에 배치한 두 요사채 마루와 수평을 유지하면서 툇마루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송암당은 우화루 쪽에 한 칸을 큰 마루로 만들어 툇마루와 연결되도록 하고, 마당 반대쪽에도 툇마루가 있다. 봉정사 가까이에 있는 학봉종택이나 서애종택 등 안동의 고택에 들어와 있는 것보다 더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다.툇마루에 앉아보면 바위 위에 자라는 소나무를 비롯해 배롱나무, 작은 석등, 화단에 자라는 소박한 화초들이 눈에 들어온다. 아늑한 마음이 절로 든다. 이런 마음이 들게 하는 데는 마당의 크기가 건물과 잘 어우러지는, 적당한 크기인 점도 중요한 요인인 듯하다.사찰 건물에 대청마루나 툇마루를 만든 경우도 그렇지만, 마루를 통해 세 건물이 연결되도록 한 사례는 다른 사찰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듯하다. 거기에다 마당의 아담한 화단과 자연석 계단, 바위에 자라는 반송과 배롱나무 등이 어우러져 각별한 정겨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한다.◆이황이 즐겨 찾던 봉정사 이황은 16세 때(1516년) 봄부터 가을까지 봉정사에 머물며 공부를 했는데, 당시 명옥대를 즐겨 찾아 독서하며 노닐었다. 그리고 50년 후 또 봉정사를 찾아 '명옥대'라는 이름을 짓고 시도 남겼다. '창암정사'의 창암은 '명옥대'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다. 창암정사는 1667년에 처음 건립됐다.이황이 봉정사에 머물 때나 잠시 들렀을 당시에 영산암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있었다면 툇마루에 앉아 스님들과 주변 풍광의 멋을 누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었을 것이다. 유교나 불교 모두 진리를 탐구하며 행복한 인간 삶을 위한 길을 찾아 실천하는 공부가 아니겠는가.'형이 강화도에 계실 적에는 한 해 두어 차례 서울에 오실 때마다 저의 집에 줄곧 머물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으니, 인간 세상에서 정말 즐거웠던 일이었다오. 그런데 온 가족을 이끌고 서울에 오신 뒤로는 열흘도 한가롭게 어울린 적이 없어서 강화도에 계시던 때보다도 못하니, 도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못에는 물결이 출렁이고 버들 빛은 한창 푸르며, 연꽃은 붉은 꽃잎이 반쯤 피었고, 녹음은 푸른 일산에 은은히 비치는구려. 이즈음 마침 동동주를 빚어서 젖빛처럼 하얀 술이 동이에 넘실대니, 즉시 오셔서 맛보시기 바라오. 바람 잘 드는 마루를 벌써 쓸어놓고 기다리오.''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1569~1618)이 마음을 나누던 친구인 권필(1569~1612)에게 보낸 편지다. 광해군 때 필화사건으로 곤장을 맞고 귀양 가다가 동대문 밖 여관에서 죽은 권필의 나이 42세 때 보낸 것이다. 허균이 말끔하게 쓸어놓고 친구를 기다리던 마루도 영산암의 툇마루 같은 마루가 아니었을까 싶다.한옥 툇마루는 여름과 겨울을 동시에 나야 하는 한옥 환경에서 내외부 공간 사이에서 완충공간 역할을 한다. 이런 툇마루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는 동선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면서, 추운 겨울 밖에서 방안으로 들어갈 때 느끼는 갑작스러운 온도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도 한다. 심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툇마루는 쓰임이 별로 없는 공간처럼 보이지만 한옥에서는 매우 중요한 공간인 것이다.툇마루와 관련, 봉정사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극락전 모습이다. 봉정사를 둘러보다 보면 주변과 뭔가 어울리지 않는, 건축에 대한 일반적 미감을 훼손시키는 느낌을 주는 건물이 바로 극락전이다. 불상을 모시고 있는 법당임에도 무슨 창고 건물과 같다. 앞면 가운데 칸에 작은 문이 있고, 그 좌우 칸에는 작은 나무 살창이 하나씩 있는데 참으로 답답해 보인다.1972년 해체복원했는데, 복원 전 극락전 사진을 보면 대웅전과 같이 정면 세 칸 모두 사분합 출입문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앞쪽에는 툇마루가 달려 있다. 예전 모습이 훨씬 아름답다. 실패한 복원으로 생각된다. 툇마루가 있고, 벽이 아닌 문으로 된 복원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면 봉정사가 전체적으로 훨씬 더 아름다운 산사가 될 것 같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영산암 누각(우화루) 마루에서 바라본 송암당. 왼쪽의 누각 툇마루는 송암당 툇마루 및 관심당 툇마루와 수평으로 연결돼 있다.
2020.03.05
[山寺미학 .24] 전남 운주사 발형다층석탑...돌 주판알 층층이 쌓아올린 듯…상식 깨뜨리는 '고려의 파격미'
1천개의 석불과 1천개의 석탑이 있던 절이라 해서 '천불천탑(千佛千塔)'의 사찰로 통하는 운주사. 전남 화순군 도암면에 있는 천불산의 남북 방향으로 뻗은 두 산등성이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양쪽에 흘러내리는 낮은 산등성이의 비탈과 골짜기 여기저기에 석불과 석탑이 서 있다. 현재 사찰 경내에는 석탑 21기, 석불 93구가 남아 있다.여러 가지 점에서 신비스러운 사찰인 운주사의 석탑·석불 건립 배경이나 연대에 대해서는 다양한 전설과 견해가 있다. 영암 출신으로 통일신라 말기 선승인 도선국사는 우리나라의 지형을 배로 보고, 선복(船腹)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막기 위해 이곳에 천불천탑을 24시간만에 도력으로 조성해 운주사(運舟寺)를 창건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전설이다. 석탑 대부분 일반적 양식과 달라시루·물동이탑 등으로 불리기도천불천탑 사찰 신비스러움 더해고려시대 중기 이후에 건립 추정원형다층석탑도 방문객 사로잡아1979년과 1984년에 실시된 운주사터 발굴 조사 결과, '순치 8년(順治八年)' '운주사환은(雲住寺丸恩)'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면서 사찰의 이름이 '운주사(運舟寺)' 뿐 아니라, '운주사(雲住寺)'로도 불렸음이 확인되었다.운주사 석탑들은 양식적으로 보면 대부분 고려 중기 이후에 건립된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판단이다.운주사는 길을 따라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야트막한 산야지대의 깊숙한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 천왕문이나 금강문 등이 없는 이 운주사는 산문을 지나 안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바로 별세계가 펼쳐진다. 해발 200m의 천불산 계곡 안쪽으로 길게 펼쳐진 협곡의 평평한 잔디밭 중앙으로 석탑들이 이어진다. 평지 옆 암벽 곳곳에는 석불들이 늘어서서 반대편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다.석탑들은 대부분 여러 사찰에서 보게 되는 일반적 석탑과는 다른 모습이다. 각기 이색적인 모양에다 탑에 새겨진 문양도 신기하다. 눈길을 들어 멀리 양쪽의 산등성이를 바라보면 곳곳에 석탑과 불상이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면 하나씩 다가오는 석탑과 석불 등이 눈길을 사로잡는다.◆가장 파격적인 석탑운주사의 많은 석탑 중에서도 탑에 대한 일반의 상식을 완전히 깨뜨리는 파격적인 석탑이 있다. 발형다층석탑(鉢形多層石塔)이라는 탑이다. 이 석탑은 운주사를 대충 둘러보면 놓칠 수도 있다. 대웅전 뒤로 좀 더 올라가야 하는 곳에 외따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대웅전에서 불사바위(공사바위라고도 함)로 올라가는 길가에 자리하고 있다. 불사바위는 도선국사가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쌓을 때 이 바위 위에서 공사를 지휘하고 감독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서면 석탑과 석불들이 죽 늘어서 있는 협곡은 물론 산등성이의 석탑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잔디밭 위에 홀로 서 있는 이 발형다층석탑은 구성 형식이나 모습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탑이다. 지금까지 불교가 전래된 나라에서 이와 같은 탑의 형식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이르러 많이 나타난 특이한 석탑 가운데에서도 가장 파격적인 탑으로 꼽힌다.기발하면서도 파격적인 이 석탑의 모양을 보고 사람들은 시루탑, 바루탑, 물동이탑, 또아리탑, 주판알탑 등으로 불렀다. 석탑은 맨 아래 사각형의 지대석 윗면에 3단의 사각형 받침면을 다듬고, 그 위에 길쭉한 4개의 판석으로 짜인 단층 기단을 놓았다. 기단 위의 덮개돌 갑석(甲石: 돌 위에 포개어 얹는 납작한 돌)은 낙수면이 완만하게 기울어진 원형의 판석을 얹었다. 그 위에 주판알 모양으로 다듬은 원구형 바위 4개를 쌓아 올렸다. 그래서 일반적인 석탑 형식과 달리 탑신과 옥개석의 구별이 없다.발우(鉢盂:승려가 사용하는 전통 식기) 모양의 둥근 돌을 중첩시킨 것이어서 발형(鉢形) 석탑이라고 하고, 발우(바루)탑이라고도 부른다. 석탑의 둥근 돌 중에는 물동이 모양과 비슷한 것도 있고, 주판알을 닮은 것도 있다.이 탑은 1900년대에는 7층이었으나 현재는 4층까지만 남아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에 발간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사진을 보면 발우 모양 돌덩이가 7개임이 확인된다. 크기가 1~4층까지는 위로 갈수록 줄어들었으나, 5·6층은 오히려 3·4층보다 더 크고 약간 휘어진 모습이다. 1990년의 종합학술조사 당시에 약사전 터로 추정되는 마애불 옆 건물지에서 5층이나 6층 탑재로 보이는 원구형 석재가 발견되었다고 한다.완성도가 높지 않은 탑이라는 전문가의 평가를 받고 있으나, 일반인이 보기에는 매우 흥미로운 탑이 아닐 수 없다.◆원형다층석탑도 눈길운주사의 또 다른 대표적 이형(異型) 석탑으로 원형다층석탑이 있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골짜기 평지 위에 다른 탑이나 석조불감과 함께 서 있다. 이 탑은 보물 제798호로 지정됐다. 연화탑, 떡탑 등으로 불린다. 바닥에서 탑 꼭대기까지 모두 둥근 모습을 하고 있는 탑이다. 현재는 6층이나 그 위로 몇 층이 더 있었는지도 모른다. 높이는 약 6m.이 탑도 일반적인 석탑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모습이다. 받침돌은 2단으로 된 원형의 바닥돌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각진 모양으로 다듬은 돌들을 조립했다. 그 위에는 꽃잎이 위로 향한 연꽃들을 새긴 덮개돌이 올려져 있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단면이 모두 원형이다. 1층 몸돌은 두 줄의 선이 오목새김으로 장식되었고, 2층 이상의 몸돌에는 한 줄의 선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위로 올라갈수록 원형의 지름이 작아지지만, 일정하게 줄어든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받침돌의 덮개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밑면은 둥근데 반해, 지붕돌은 이와는 반대로 밑면이 평평하고 윗면이 둥글다.이 석탑도 전체적인 구성이나 조형 측면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그 사례가 매우 드문 석탑이다. 고려시대에 각 지방에서 나타난 특이한 양식이 반영된 석탑이라고 한다.운주사는 이처럼 고정관념이나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의 미학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소중한 문화재들이 즐비한 산사이다. 운주사 최대의 미스터리로 꼽히는 13m 길이의 누워있는 돌부처 와불(臥佛),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해 놓은 거대한 칠성 석판바위 등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우리나라 불교 석탑 중 가장 파격적인 탑으로 손꼽히는 운주사 발형다층석탑. 발우탑, 주판알탑, 물동이탑 등으로 불렸다.운주사 원형다층석탑도 대표적 이형 석탑이다.
2020.02.20
[山寺미학 .23] 해우소...햇살 따라든 새소리·바람소리, 걱정을 비우고 또 비우네
인류 물질문명이 너무 인간의 편리와 효율 중심으로 흘러왔다. 그런 물결에 떠밀려 전래의 소박하고 자연친화적 삶의 유산들이 적지 않게 없어져 버렸거나 사라지고 있다. 그런 유산 중의 하나가 전통 뒷간(화장실)이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산사의 전통 뒷간은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자연친화적 가치관과 미학이 녹아있는 문화유산이다. 현대문명이 배출해내는 온갖 문명의 배설물들이 지구촌의 건강을 해치고 인간 정신도 황폐하게 하고 있는 상황을 우리는 수시로 접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심각성을 절감하지 못하고 눈길을 돌려버리거나 눈을 감아버리고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산사가 전통 뒷간문화를 지켜가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현대문명의 거센 물결에 떠밀려 산사 전통 뒷간마저 점점 사라지고 있어 아쉬움도 크다.대소변, 재·왕겨·낙엽 등과 썩어양질 비료로 재탄생 땅에 뿌려져가장 이상적인 배설물 처리시설편리함 추구와 무관심에 떠밀려전통 해우소 점점 사라지고 있어인간·자연 不二사상 잃지 말아야◆자연친화적 전통 해우소'비우고 또 비우니 큰 기쁨일세/ 탐진치(貪嗔癡) 어두운 마음도 이같이 버려/ 한 조각 허물마저 없어졌을 때/ 서쪽의 둥근 달빛 미소 지으리/ 옴 하로다야 사바하'사찰 뒷간에 가면 간혹 볼 수 있는 입측진언(入厠眞言)이다. 뒷간에 들어가서 외우는 진언이다. 뒷간에서 볼일을 볼 때 순차적으로 외우는 다섯 가지 진언인 입측오주(入厠五呪) 중 첫 번째 진언이다.뒷간은 측간(厠間), 변소 등 다양하게 불려 왔다. 사찰에서는 동사(東司), 해우소(解憂所)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왔다. 요즘은 '근심을 해결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해우소'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해우소라는 이름은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처음으로 '해우소'라고 명명한 주인공은 양산 통도사 극락암에 오래 주석했던 선승인 경봉스님(1892~1982)이라고 한다.잘 비우고 버리는 일은 건강한 삶을 위해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다. 어리석은 욕심이나 생각 등을 제대로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자유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육체 또한 마찬가지다. 비울 것을 잘 비울 수 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이 비우는 일을 매일 실천하는 곳이 뒷간이다. 대소변을 비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은 이를 처리하는 일이다. 더럽고 냄새나는 것의 대명사인 대소변을 매일 비우러 가는 곳의 이름은 뒷간이나 측간에서 변소, 화장실로 듣기 좋게 바뀌어왔다. 그러나 그 처리방식은 오히려 뒷걸음질치고 있다. 그래서 산사의 전통 해우소가 지닌 미학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산사의 전통 해우소는 더없이 이상적인 대소변 처리시설이다. 전통 해우소는 자연으로부터 나온 음식물을 먹고 배설한 배설물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리는 순환의 연결고리를 철저히 고려해 만들어졌다. 흙바닥에 떨어진 배설물은 그 자리에서 왕겨나 재, 낙엽 등과 함께 썩어 양질의 유기질 비료로 변한다. 이것은 다시 땅에 뿌려져 곡식과 채소를 키우는 소중한 거름이 된다. 환경오염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 환경친화적인 처리방식이다.사찰의 발우공양이 음식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이상적인 식문화라면, 전통 해우소는 이처럼 인간의 배설물을 다시 자연으로 환원시키는 가장 이상적인 배설물 처리시설인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하나라는 불이(不二)사상, 모든 것은 변하고 순환하며 서로 연관돼 있다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진리를 해우소만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어느 산사에 가나 볼 수 있었던 이 같은 전통 해우소가 이제는 흔하지 않은 존재가 돼가고 있다. 요즘은 산속 사찰이라도 대부분 수세식 화장실을 갖추고, 많은 사찰이 중창불사를 하면서 재래식 해우소를 아예 없애 버려 전통 해우소를 찾아보기가 더욱 힘들게 되어가고 있다.전통 해우소를 보존하거나 그 방식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 사찰로는 승주 선암사, 순천 송광사, 문경 김용사와 대승사, 서산 개심사, 부안 내소사, 홍천 수타사, 삼척 영은사, 영월 보덕사 등이다.◆300년이 넘은 김용사 해우소지은 지 300년이 넘었다는 김용사 해우소는 전통 해우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 해우소라 할 만하다. 최근에 가 봤을 때도 20여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개울가 길옆에 서 있는 해우소로 들어가면, 눈높이에 설치된 문창살과 곳곳의 구멍 사이로 빛이 들어온다. 밝고 아늑한 분위기다. 입측오주가 걸려 있고 측간 신의 이름을 써놓은 위패도 걸려 있다. 문창살에 걸려있는 바구니에는 휴지가 들어있다. 앉아 있으면 개울 물소리와 새소리,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해우소라는 이름에 걸맞게 심신의 걱정거리가 다 없어지는 듯하다. 이 해우소는 나무기둥이 놓인 주춧돌 높이가 인분이 쌓이는 높이보다 약간 높아 부식을 방지할 수 있도록 했고, 하단부의 기둥들은 껍질만 벗긴 원목 상태를 그대로 사용해 소박미를 더해준다.근처에 있는 대성암(김용사 부속 암자)의 해우소도 전통 해우소 그대로다. 암자 마당 아래에 있는 밭 가에 세워져 있다. 부근의 대승사 해우소 역시 김용사 해우소와 함께 전통 해우소의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는데, 최근 사찰 건물이 추가로 많이 건립되면서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다른 장소에 전통 방식의 해우소를 새로 지어놓아 다행이었다.100년이 넘은 선암사 해우소는 그 모양새가 매우 아름다운 데다 큰 규모(앞면 5칸 건물)와 구조 등의 면에서 전국 최고의 해우소로 꼽힌다. 근래 보수를 하면서 공기가 통하도록 나무판자로 만들어 놓은 하단부를 뜯어내고 철옹성 같은 벽으로 바꾸어 원형을 잃어버린 것은 아쉬운 점이다.영월 보덕사 해우소도 앞면 3칸·옆면 1칸·맞배지붕의 해우소인데, 건물의 상량문을 통해 1882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인간의 배설물을 자연스럽고 완결된 형태로 다시 대자연으로 되돌리는 전통 해우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사정이 있겠지만, 편리 추구와 무관심 속에 이런 전통 해우소가 사라지는 현실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다. 현대인의 생활 감각에 맞춰 보수하거나 새로 마련하더라도 전통 해우소의 근본 원리와 정신은 변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삶의 방식은 수행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편리만 추구하다 수행자들이 마음의 소박함까지 점점 잃어버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산사의 전통 해우소는 소중한 가치관과 미학이 담겨 있다. 대표적인 산사 전통 해우소인 문경 김용사 해우소(위쪽)와 승주 선암사 해우소.
2020.02.06
[山寺미학 21] 해인사 새벽예불..."새벽예불은 출가한 지 얼마 안 되는 행자들에게 가슴 벅찬 울림"
"한국 불교의 힘은 새벽예불에서 나온다."이렇게 이야기하는 스님들이 적지 않다. 새벽예불이 부처가 되는 성불(成佛)이 목적인 스님들에게 지난한 수행을 이어가도록 하는 힘을 충전시켜주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25시'라는 소설을 쓴 게오르규는 양산 통도사의 새벽예불을 본 뒤 '세계를 밝힐 찬란한 빛이 한국의 사찰에서 나올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산사의 가장 고요하고 맑은 기운이 충만한 새벽에 모든 스님들이 참여해 맑고 지극한 마음을 다해 예불하는 시간. 목탁과 금고(金鼓:사찰에서 사용하는 북 모양의 종), 사물(四物 :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이 울려 퍼지고 스님들의 염불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는 새벽예불 시간은 순수한 마음, 부처의 마음이 열리는 범아일체(梵我一體)의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산사의 새벽예불은 수행이 본분인 스님들에게 정진하는 힘을 충전시켜주는 중요한 의식이지만, 의식에 담긴 의미를 떠나 그 자체만으로 비할 수 없는 장엄함과 아름다움으로 크나큰 감동을 선사한다. ◆새벽 4시 도량석으로 시작전날 저녁에 합천 해인사 주지 현응 스님과 차를 마시며 새벽예불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2019년 11월 21일 새벽 3시40분에 해인사 중심 법당인 대적광전 앞마당으로 갔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수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맑게 깨끗하고 빛나고 있었다. 초생달도 함께. 자신의 발자국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와 어둠 속, 황금빛 불빛이 한지 문을 통해 비쳐 나오는 대적광전이 각별한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58분이 되자 한 스님이 대적광전 가운데 문을 열고 도량석(道場釋: 본격적인 새벽예불 시작 전에 도량을 청정하게 하는 의식)을 시작하려고 준비를 했다. 4시가 되자 도량석이 시작됐다. 스님은 천천히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하면서 대적광전 주위를 느리게 한 바퀴 돌았다. 통상적으로 도량석은 이와 달리 사찰 전각 곳곳을 돌면서 진행한다. 대중과 산천초목을 깨우고 잡귀를 몰아내 도량을 청정하게 하는 도량석은 8분 정도 걸렸다. 도량석을 할 때 치는 목탁은 일반적인 목탁보다 몇 배나 크다. 보통 도량석 목탁이 그 사찰에서 가장 큰 목탁이며, 대추나무로 만든 목탁을 최고로 친다. 소리가 좋은데다 단단해 오래 가기 때문이다. 그 동안 전각들의 불이 켜지면서 스님들이 각자의 처소에서 일어나 예불에 참석할 준비를 했다. 청아하게 들리는 도량석 목탁소리가 잦아들면서 대적광전 안의 금고가 그 소리를 받아 울리기 시작했다. 종송(鐘頌)이 시작된 것이다. 종송은 대적광전 안과 함께 대적광전 아래 심검당과 궁현당 마루에 있는 금고도 같이 치면서 진행됐다. 금고를 울리며 게송을 읊는 종송은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무명에 갇힌 중생들에게 부처의 위신력과 극락세계의 장엄함을 설하여 불법에 귀의할 것을 발원함으로써 왕생극락케 하는 의식이다. 종송의 게송 중 일부다. '원컨대 이 종소리 법계에 두루 퍼져(願此鐘聲遍法界)/ 철위산의 깊은 어둠 다 밝히고(鐵圍幽暗悉皆明)/ 지옥·아귀·축생의 고통 여의고 칼산 지옥도 부수어(三途離苦破刀山)/ 모든 중생이 바른 깨달음 얻게 하소서(一切衆生成正覺)'종송은 10분 정도 계속되었다. 4시18분에 대적광전 아래 누각인 구광루(九光樓) 아래 마당에 있는 범종루의 법고(法鼓)가 울리기 시작했다. 법고는 절에서 예불과 의식을 행할 때 치는 큰 북이다. 범종루에는 미리 네 명의 스님이 올라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량석 목탁과 종송 금고 소리가 약했던 것과는 달리, 법고 소리는 힘차게 울려 구광루를 비롯한 주변 건물에 반향 소리도 내면서 산천을 본격적으로 깨우기 시작했다. 법고 치는 시간 13분 정도. 해인사 스님들의 법고 치는 솜씨는 예전부터 최고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법고가 마무리되면서 큰 종인 범종(梵鐘)이 이어받은 시간은 4시 31분. 중생들을 깨우치기 위한 법음(法音)을 울리는 범종은 28번 울렸다. 불교의 삼계(三界)에 속하는 욕계·색계·무색계의 28천계(天界) 중생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10분 정도 걸렸다. 저녁 예불 때는 33번 울린다.범종에 이어 목어와 운판이 울려퍼졌다. 목어(木魚)는 나무를 잉어 모양으로 만들어 속을 파낸 후 겉에 색깔을 입힌 것으로, 파낸 속을 두드려 소리를 낸다. 운판(雲版)은 구름 모양으로 만든 청동(靑銅) 판으로 되어 있다. 사물 의식은 각각 지옥 중생(범종)과 네 발 가진 짐승(법고), 물고기 등 물속 생명(목어), 날짐승(운판)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 ◆장엄한 아름다움 선사운판을 마지막으로 사물 의식이 4시 45분에 끝나고, 대적광전 예불이 시작되었다. 그 동안 모든 스님들(40명 정도)은 대적광전에 들어가 좌선을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선원에서 수행하는 스님들(40여명)은 법당 예불에 참석하지 않고, 선원에서 죽비를 치고 바로 참선에 들어간다고 한다. 대적광전 예불은 오분향례, 칠정례, 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 봉독, 반야심경 봉송 순으로 진행되었다. 오분향례(五分香禮)는 부처의 오분법신(五分法身)에 향을 공양하고 예를 올리는 의식이다. 오분향은 부처가 갖추고 있는 계신(戒身)·정신(定身)·혜신(慧身)·해탈신(解脫身)·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의 5분법신(五分法身)에 향을 대비시켜 계향(戒香)·정향(定香)·혜향(慧香)·해탈향(解脫香)·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으로 바꾼 것이다. 모두 일곱 차례 이마(頂)를 땅에 대고 큰절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칠정례(七頂禮)는 전체 내용이 불법승(佛法僧) 삼보에 대한 예경과 회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불문 마지막 구절의 의미는 '다함 없는 삼보시여, 저희 예경 받으시고 가피력을 내리시어, 법계중생 모두 함께 성불하여지이다'이다. 이산 혜연 선사 발원문 봉독은 한 스님이 일어서서 발원문을 읽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산 혜연 선사는 당나라 말기 스님으로, 발원문은 불퇴전의 정진으로 보살의 덕을 실천하겠다는 비장한 각오와 발원을 담고 있다. 그 일부다. '저희들이 참된 성품 등지옵고 무명속에 뛰어들어, 나고 죽는 물결따라 빛과 소리 물이 들고 심술궂고 욕심내어 온갖 번뇌 쌓았으며, 보고 듣고 맛봄으로 한량없는 죄를 지어 잘못된 길 갈팡질팡 생사고해 헤매면서, 나와 남을 집착하고 그른 길만 찾아다녀, 여러 생에 지은 업장 크고 작은 많은 허물 삼보 앞에 원력 빌어 일심 참회하옵나니, 바로옵건대 부처님이 이끄시고 보살님네 살피시어 고통바다 헤어나서 열반언덕 가사이다.' 마지막으로 참석한 모든 스님들이 함께 불법을 수호하는 신들을 모신 신중단(神衆壇)을 향해 반야심경을 함께 소리내어 읊는다. 운율에 맞춰 읊는 반야심경 봉송은 어떤 음악보다 더 장엄하고 아름답게 다가온다. 반야심경은 가장 널리 독송되는 경으로, 완전한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다. 반야심경은 짧은 경문이지만, 대·소승 경전의 내용을 간결하고도 풍부하게 응축하고 있는 핵심 경전이다. 산사 예불은 하루에 세 번(새벽예불, 사시(巳時)예불, 저녁예불) 진행되는데, 특히 새벽예불은 출가한 지 얼마 안 되는 행자들에게 가슴 벅찬 울림과 감동을 준다고 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2019년 11월 21일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벽예불. 이산 혜연 선사의 발원문을 봉독하고 있는 모습이다.해인사 새벽예불 중 법고 치는 모습.
2020.01.08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경북대, 내년도 의대 입학정원 '155명' 조정에 대구경북 타 대학 결정도 관심
대구 수련병원 전임의 계약 늘어…'번아웃' 병원에 단비 될까
많이 본 뉴스
오늘의운세
양띠 4월 25일 ( 음 3월 17일 )(오늘의 띠별 운세) (생년월일 운세)
영남생생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