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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曲기행 .30] 강원 화천 곡운구곡(下)...세속 시비 행여나 들릴까…김수증의 그윽한 ‘와룡담’ 은거
3곡 신녀협(神女峽)은 청옥협으로부터 2.5㎞ 상류에 있다. 사내천로 길옆에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공원 가장자리에 ‘청은대(淸隱臺)’라는 정자가 서 있다. 신녀협의 정경이 신비스러워 강의 신 하백(河伯)의 딸인 신녀에 비유한 계곡으로, 곡운구곡 중에 경관이 가장 뛰어난 곳으로 꼽았다. 김수증은 평소 흠모하던 김시습이 노닐었다는 신녀협의 수운대(水雲臺)를 김시습의 법명인 벽산청은(碧山淸隱)에서 가져와 청은대(淸隱臺)로 이름을 바꾸었다. 지금의 청은대는 2006년에 복원한 것이라 한다. 신녀협은 부드러운 곡선의 너럭바위가 물길 양쪽으로 길게 누워 절경을 이룬다. 곡운구곡을 답사한 정약용은 ‘협곡이 아닌데도 협곡이라고 한 것은 웅덩이의 형상이 마치 마주 서 있는 듯 두 벼랑이 협을 이룬 것 같기 때문’이라고 신녀협을 묘사했다. 3곡 시는 김수증의 조카 김창집이 지었다. 3곡 신녀협 곡운구곡 최고 경관물길 양쪽 너럭바위가 절경 이뤄4곡 백운담은 물살이 가장 센 곳층층이 주름진 바위가 매우 특이산에 둘러싸인 분지 6곡 와룡담김수증 ‘농수정사’ 짓고 거처로‘삼곡이라 빈터에는 선녀 자취 묘연한데(三曲仙踪杳夜船)/ 소나무에 걸린 달은 천년을 흘렀어라(空台松月自年千)/ 청한자(김시습) 놀던 뜻을 이제야 알겠으니(超然會得淸寒趣)/ 흰 바위에 나는 여울 너무도 아름답네(素石飛湍絶可憐).’4곡은 튀어 오르는 물안개가 흰 구름 같은 못인 백운담(白雲潭)이다. 김수증이 ‘거북이와 용이 물을 먹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던 백운담에서는 용의 형상을 한 바위를 볼 수 있다. 정약용은 이곳을 ‘반석이 넓게 깔려 1천여명이 앉을 수 있고, 돌 빛은 순전한 청색에 아주 깨끗하다. 구렁으로 쏟아져 흐르는 물이 기괴하고 웅덩이에서 솟아 넘치는 기운이 언제나 흰구름 같다’고 묘사하며 곡운구곡 중에서 가장 기관(奇觀)이라고 평했다. 조카 창협에게 차운시를 짓게 한 백운담은 물이 깊어 사람들이 모이거나 고기를 잡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곡운구곡 중에서 가장 물살이 센 곳이다. 물살이 바위에 부딪혀 흩어지는 것을 김수증은 ‘설운(雪雲)’이라 하고, 정약용은 ‘백운(白雲)’이라 하였다. 이곳은 층층이 주름진 바위가 매우 특이하다.‘사곡이라 시냇물 푸른 바위에 기대 보니/ 가까운 솔 그림자 물속에 어른거리네/ 쏟아지는 물거품 그칠 줄 모르고/ 뿌연 안개 언제나 연못 위에 피어나네.’5곡 명옥뢰(鳴玉瀨)는 옥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를 내는 여울을 의미한다. 백옥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곡운기는 ‘기이한 장관을 이루기가 백운담보다는 못하나 맑고 온화하기는 백운담보다 낫다’고 적고 있다. 정약용은 1823년 ‘산행일기’에서 ‘명옥뢰는 모여 있던 담수가 쏟아져 내리는 곳이다. 반석이 넓게 깔리고 놀치는(사나운) 물결이 구렁으로 달림으로써 옥설이 함께 일어나고 풍뢰가 서로 부딪쳐 진동한다’고 적었다. 조카 창흡이 차운시를 쓴 이곳은 지금은 가옥과 도로가 들어섰고 축대를 쌓아 올려 당시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오곡이라 밤은 깊어 냇물 소리 들리니(五曲溪聲宜夜餘)/ 옥패를 흔드는 듯 빈 숲속에 가득하다(然玉佩響遙林)/ 솔문을 나서면서 가을밤 고요한데(松門步出霜厓靜)/ 둥근달 외로운 거문고 세상 밖 마음이라(圖月孤琴世外心).’◆농수정사 있던 6곡 와룡담용이 숨은 못인 6곡 와룡담(臥龍潭)은 김수증이 주변에 농수정사(籠水精舍)를 지어 은거하던 곳으로, 곡운구곡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김수증은 주자가 여산에 와룡암(臥龍菴)을 지어 제갈량의 위패를 봉안하였다는 고사를 상기하며, 자신의 곡운정사를 주자의 와룡암에 비유하며 이곳을 와룡담(臥龍潭)으로 불렀다고 한다. 곡운기에 ‘화악산은 비취빛을 머금어 책상을 대한 듯하고 그 앞에 용담이 있어 이름을 귀운동(歸雲洞)이라 하였다’라고 한 와룡담은 북쪽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명옥뢰와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김수증이 농수정사를 지어 기거하면서 경작하던 밭들이 있어 경관의 특색보다 경작하고 거처할 환경을 갖춘 곳이었다.농수정사는 시끄러운 여울물로 세속의 번거로움을 피하는 선비의 집을 말한다. 김수증은 농수정사가 완성된 후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세속의 시비 소리 행여나 들릴까(常恐是非聲到耳)/ 흐르는 계곡 물로 산을 둘러 막았네(故敎流水盡籠山)’라는 구절이 있는 고운 최치원의 시를 인용하며 자신의 심정을 표현했다. 6곡 시는 아들 창직이 지었다.‘육곡이라 그윽한 곳 푸른 물을 베개 삼고(六曲幽居枕綠灣)/ 천길 물 솔숲 사이 은은하게 비치네(深潭千尺暎松關/ 시끄러운 세상일 숨은 용은 모르니(潛龍不管風雲事)/ 물속에 드러누워 한가하게 사는구나(長臥波心自在閒)’ 계류가 잔잔히 흐르는 평탄한 지형의 7곡 명월계는 농수정사 북쪽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이곳은 ‘서북 모퉁이로 수 백보 나아가면 반석이 있는데 가히 배회할 만하다’라고 김수증이 곡운기에 기록하였지만, 지금은 강심 얕은 물 위로 다리가 놓이고 물에는 자갈돌이 굴러다니고 있어 그 옛날의 달빛 정취는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정약용이 ‘우마견시(牛馬犬豕)의 오염과 티끌 등 어지럽고 더러움이 형언할 수 없다. 수석이 오염되어 있으니 이곳을 구곡에 넣기에는 불가한 곳’이라고 폄훼한 곳이다. 7곡 시는 조카 창업이 지었다.‘칠곡이라 넓은 못은 얕은 여울에 이어졌으니(七曲平潭連淺灘)/ 저 맑은 물결은 달밤에 더욱 좋구나(淸連連響越重看)/ 산은 비고 밤은 깊어 건너는 이 없으니(山空夜靜無人度)/ 큰 소나무 외로이 찬 그림자 던지네(唯有長松倒影寒).’8곡 융의연(隆義淵)은 제갈량과 김시습의 절의를 기려 지은 이름이다. 김수증은 거처하는 곳마다 이 두 사람의 초상을 걸어놓고 숭모할 정도로 두 사람을 매우 우러렀다고 한다. 이곳 역시 정약용은 ‘모두 길가에 있어 아름다운 경관이 없다’고 평했다. 8곡 시는 조카 창즙이 지었다.‘팔곡이라 맑은 못물 아득히 괴어 있고/ 때마침 저 구름 그늘을 던지네/ 맑기도 하여라 근원이 가까운가/ 물속에 노는 고기 앉아서 바라보네.’9곡은 첩석대(疊石臺)다. 곡운기에 ‘조금씩 더 나아가면 기이한 바위가 여기저기 나열되어 있고 물은 그 사이를 일사천리로 흘러간다. 이름 하여 첩석대라고 하니 수석(水石)의 빼어난 곳이 이곳에 이르러 다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큼직한 몇 개의 바위만이 남아 옛 모습은 상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9곡시는 외손자 홍유인이 지었다.‘구곡이라 층층바위 다시 우뚝한데/ 첩첩이 쌓인 벽 맑은 물에 비치네/ 노을 속 저 물결 솔바람과 견주니/ 시끄러운 그 소리 골짜기에 가득하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곡운구곡의 6곡 와룡담. 김수증이 주변에 농수정사(籠水精舍) 등을 지어 은거하던, 곡운구곡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화천군 제공)
2018.10.04
[九曲기행 .29] 강원 화천 곡운구곡(上)...조세걸이 사실감 있게 그린 구곡도 ‘정선 진경산수화’ 토대가 되다
곡운구곡(谷雲九曲)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용담리(용담계곡)와 삼일리(삼일계곡)에 걸쳐 있는 구곡이다. 화악산(해발 1천468m)이 만들어낸 이 계곡 15㎞에 설정된 곡운구곡의 주인공은 곡운(谷雲) 김수증(1624~1701)이다. 김수증은 이곳 용담리에 농수정을 짓고 은거하면서 1곡 방화계(傍花溪)부터 9곡 첩석대(疊石臺)까지 아홉 굽이의 이름을 붙이고 구곡을 경영했다. 나중에는 구곡 그림을 그리게 하고, 구곡시도 아들과 조카 등에게 짓게 한 후 화첩으로 만들어 남기기도 했다.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의 장손으로 태어난 김수증은 효종 임금이 죽자(1659년) 일어난 예송논쟁으로 권력의 부침을 겪으면서 벼슬에 대한 욕심을 버렸다. 아버지 김광찬(1597~1668)이 세상을 떠나고 3년 상을 치른 뒤 47세(1670) 되던 봄날, 은둔지를 찾아 화천 땅을 밟게 된다. 지금의 화천군 사내면 용담1리에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곳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1435~93)이 잠시 은둔했던 곳이기도 하다.◆김수증이 은둔지를 찾아 설정한 구곡김수증이 터를 잡은 곳은 스승인 우암(尤庵) 송시열(1607~89)에게 “우리나라 산수는 봉래산 만폭동을 첫째로 치지만, 수석이 평평하고 골이 넓어서 유영(遊泳)하고 반환(盤桓)하며 서식(栖息)하고 경착(耕鑿)할 만하기로는 저 만폭동이 이곳보다 못한 바가 있습니다. 더구나 매월당의 유적이 여기에 있으니, 제가 터를 잡아서 의지할 곳으로 삼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곳이다.북한강의 지류인 사내천(史內川)이 흐르는 골짜기를 은둔지로 삼은 그는 그 이름을 주자(朱子)가 은둔했던 운곡(雲谷)을 거꾸로 써서 곡운(谷雲)으로 바꾸었다. 용담·삼일계곡 걸쳐있는 15㎞ 구곡예송논쟁으로 부침 김수증이 설정47살때 은둔지 마련해 집짓기 시작스승 송시열·아우 김수항 사약받자권력무상 느끼고 홀로 다시 들어와화음동정사 짓고 은둔하다 세상 떠1673년 김수증은 곡운을 다시 찾아와 주자가 무이산에 무이구곡(武夷九曲)을 정하여 노래한 것처럼 곡운구곡을 설정했다. 송시열과 영의정을 지낸 아우 김수항(1629~89) 등이 유배된 1675년 겨울에는 온 가족을 데려와 살면서 곡운정사(谷雲精舍)라는 현판을 내걸고,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가묘도 세웠다. 이때 곡운구곡을 설정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서인이 세력을 회복한 1681년에는 병이 나서 산을 나갔다가, 송시열과 김수항이 사사(死賜)된 기사환국(1689)이 일어나자 홀로 다시 곡운으로 들어와 화악산 북쪽에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짓고, 권력무상을 처절하게 느끼며 곡운에 은둔하다가 1701년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689년에 지은 ‘곡운기(谷雲記)’를 보면 곡운의 위치와 형세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지금 곡운에 머물면서 바라보니 큰 산이 그 바깥을 두르고 작은 산이 그 안에 뒤섞여 사면을 둥글게 감싸 안은 것이 별세계를 열어놓고 있다. ~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되었으니, 세간에서 소박삽(小撲揷)이라 부르는 곳이다. 계곡 어귀가 그윽하고 깨끗하며 기상이 깊고도 으슥했다. 급한 여울과 층층바위에 바위꽃이 무수했다. 그래서 이름을 방화계(傍花溪)로 바꾸었다. 다시 십여 리를 가니 돌다리가 물가에 걸렸는데 약간 널찍하다. 진실로 광채가 있는 듯해 청옥협(靑玉峽)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1리쯤 가자 이른바 여기정(女妓亭)이란 것이 있었는데, 신녀협(神女峽)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내가 골짜기 가운데로 가서 집을 지었다. 경술년(1670) 가을에 시작하여 몇 년 사이에 겨우 일곱 칸의 띠집을 지었다. 을묘년(1675) 겨울에 온 집안이 와서 살았다. 띠집을 지은 후에 또 초당(草堂) 세 칸을 짓고, 편액을 곡운정사(谷雲精舍)라 했다. 또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가묘(家廟)를 세웠다. 좌우에 아이들의 방을 짓고 마굿간, 행랑, 부엌 등의 부속 건물을 간략하게 구비했다.’◆조세걸의 곡운구곡도는 진경산수화의 토대그는 곡운구곡을 매우 사랑하여 1682년에는 당대의 대표적 화가 패천(浿川) 조세걸(1635~1705)을 불러 곡운구곡과 농수정의 모습을 비단 위에 열 폭의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발문은 김창협이 썼다.곡운구곡도가 완성된 후 10년이 지난 1692년에는 자신을 비롯한 두 아들과 다섯 조카, 외손자를 동원해 주자의 ‘무이도가’ 운(韻)을 따라 곡운구곡의 매 굽이를 읊은 칠언절구의 시를 짓게 하고 화첩을 만들었다. 곡운구곡도첩이다.김수증이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한 경위에 대해 조카 김창협이 지은 ‘곡운구곡도발(曲雲九曲挑跋)’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내 두 다리가 때때로 산에서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 구곡을 늘 내 눈 안에 머물게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생각날 때 가끔씩 보려고 한 것일 뿐이다.’그가 곡운구곡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조세걸이 그린 곡운구곡도는 이전 그림과 달랐다. 생생한 우리 산수의 모습은 물론 띠집과 백성들이 농사짓는 모습에다 닭, 개, 소, 나귀 등의 동물들 움직임까지 사실감 있게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제작할 때 김수증은 조세걸과 일일이 계곡을 답사하면서 어떻게 그릴지 지도했다고 한다. 최대한 사실대로 그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겸재 정선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의 토대가 됐다. 곡운구곡도(가로 425㎝·세로 64㎝)는 진경산수화의 장을 연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조세걸은 평양 출신으로, 연담 김명국에게 그림을 배운 선비 화가다.김수증은 곡운구곡시의 서시와 1곡 시를 읊었는데, 서시에서 곡운구곡 탐승을 성령(性靈) 양성의 계기로 삼기를 바라고 있다.‘티끌세상 벗어나 마음 닦기 알맞구나(絶境端宣養性靈)/ 늘그막의 마음 맑은 산 맑은 물로 기쁘도다(暮年心跡喜雙淸)/ 백운산 동쪽 화악산 북녘(白雲東畔華山北)/ 굽이굽이 물소리 귀에 가득하네(曲曲溪流滿耳聲).’1곡 방화계는 봄철에 바위마다 꽃이 만발하는 계곡이라는 의미다. 춘천에서 화천으로 들어가는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방화계를 지나는 물이 완만히 흐르다가 너럭바위에 이르러 격한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김수증은 무이도가의 운을 차운하여 1곡을 직접 읊었다.‘일곡이라 세찬 여울 배 들이기 어려운 곳(一曲難容入洞船)/ 복사꽃 피고 지는 속세와 동떨어진 시내(桃花開落隔雲川)/ 깊은 숲에 길 끊어져 찾는 이 드무니(林深路絶來人少)/ 어느 곳 산골 집에 개가 짖고 연기 나겠는가(何處山家有吠煙).’당시에는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심산유곡이었던 모양이다. 2곡 청옥협은 맑고 깊은 물이 옥색처럼 푸른 골짜기다. 방화계로부터 사내천을 한참 거슬러 오르면 우측에 높게 솟은 바위 봉우리와 만나게 된다.‘계림을 따라 석림(石林) 가운데를 지나니 높고 낮은 큰 돌들이 많고, 산봉우리는 연결되어 하늘을 막은 듯하며 길은 다한 듯하나 다시 통한다. 또 십여리를 가니 석잔(石棧)이 물 사이에 있고 점차로 전망이 트여가는 것 같았다.’이래서 이곳을 청옥협이라 부른다고 김수증은 ‘곡운기’에 적고 있다. 아들 창국이 차운하여 시를 짓게 한 곳이다. ‘이곡이라 험한 산에 옥봉우리 우뚝하니(二曲峻玉作峰)/ 흰 구름 누른 잎은 가을빛을 발하네(白雲黃葉暎秋容)/ 돌다리 가고 가서 신선세계 가까우니(行行石棧仙居近)/ 속세 떠나 몇만겹 들어온 줄 알겠네(己覺塵喧隔萬重).’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선비 화가 조세걸이 그린 곡운구곡도 중 1곡 방화계(위)와 3곡 신녀협. 김수증과 답사하며 그린 이 곡운구곡도는 진경산수화의 장을 연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2018.09.20
[九曲기행 .28] 청도 운문구곡(下)...“구곡 거슬러 오르며 신령한 山水 찬미…무릉도원이 따로 없네”
박하담의 ‘운문구곡가’ 서시다.‘하늘이 운문을 열고 땅이 신령을 기르니/ 그 가운데 산수가 자연스레 맑아라/ 지팡이 짚고 나막신으로 소요하며 진경을 찾으니/ 무이(武夷)의 굽이굽이에 노래하여 화답하네’.박하담은 서시에서 신령한 운문의 산수를 찬미하고, 운문구곡을 거슬러 소요하며 주자의 ‘무이도가’에 화답하는 구곡가를 읊는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의 운문구곡가를 따라가 본다.박하담, 1곡 지점 언급하지 않아선암서원 앞 하천변 바위로 추정운문사·사리암 중간쯤 6곡 석만온통 돌로 이루어져 이름붙인듯8곡 도인봉 봉우리 부분 큰 바위도인이 앉아 수련하는 모습 연상◆박하담의 운문구곡가‘일곡이라 맑은 물에 일엽선 띄우니(一曲淸流一葉船)/ 원두에 약야천이 있는 줄을 알겠네(源頭知有若耶川)/ 옛 나루 거슬러 올라서 망연히 서니(遡古渡茫然立)/ 바위는 구름 끝에 솟고 새는 안개 속에 우네(巖出雲端鳥叫烟)’.1곡 시다. 박하담은 1곡의 지점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선암(仙巖)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암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선암서원 앞 하천변에 서 있는 바위다.후학들이 박하담을 기려 건립한 선암서원은 박하담과 삼족당(三足堂) 김대유(1479~1551)를 기리고 있다. 약야천은 운문사 옆을 흐르는 하천이다. 운문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약야천으로 모여 흐르고 이 물은 다시 선암 앞으로 흘러간다. 원두는 하천의 근원으로, 도의 근원을 의미한다. 박하담은 구곡을 거슬러 올라가며 도의 경지에 나아가고자 한다.‘이곡이라 가운데 석고봉을 여니(二曲中開石鼓峯)/ 완연히 사랑하고 즐기는 모습이네(宛如雲樂舞昭容)/ 이곳에 이르러 기생 생각 없으니(吾人到此心無妓)/ 꿈밖의 양대로 가는 길 몇 겹인가(夢外陽臺路幾重)’.2곡은 석고봉이다. 1곡과 2곡 사이가 많이 떨어져 있다. 운문댐 입구 대천삼거리에서 운문사 가는 길을 따라 1.5㎞ 정도 가서 운문호를 바라보면 호수 가운데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인다. 이것이 석고봉이다. 석고봉 주위의 물길 모습은 수몰되어 버렸다.석고봉에서 당시에는 남녀가 사랑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양대(陽臺)는 고사에서 유래된 용어로, 남녀가 정을 나누는 장소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2곡에서 여색의 유혹을 극복하고 구곡을 향해 나아감을 노래하고 있다.이와 관련해 박하담은 ‘운문부(雲門賦)’에서 유람하는 사람들이 운문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 얼굴을 한 옥녀산을 만나면 더 이상 유람하지 않고 머물며 마음을 그르친다고 지적하며 경계하고 있다. ‘삼곡이라 빗긴 언덕 우선 모양이고(三曲橫坡等藕船)/ 신선이 속세 밖에 노니니 하루가 일년이네(仙遊物外晝如年)/ 간장 창자 사이 다섯 근심 지금 다 씻으니(腸間五累今消盡)/ 밝고 밝은 마음 내 가장 사랑하네(寶鑑明明我最憐)’.3곡 횡파는 석고봉 맞은편에서 6㎞ 정도 위에 위치한다. 박하담의 표현대로 우선(藕船), 즉 연 모양의 배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연 모양의 배가 운문천을 따라 내려가는 듯한 이 언덕에서 박하담은 신선처럼 물외(物外)에 노닐었다. 여기서 근심을 다 씻고 밝은 마음을 회복해 그 마음으로 살고자 했다.‘사곡이라 시내를 둘러서 사면이 바위이니(四曲環溪四面巖)/ 아름다운 꽃과 기이한 풀 드리웠네(瑤花異草影)/ 천문동 골짜기에 기절처가 많이 있어(天門洞壑多奇絶)/ 돌기운 구름에 닿고 달은 못에 비치네(石氣摩雲月印潭)’.4곡 천문동을 읊고 있다. 천문동은 횡파 입구에서 운문사 방향으로 3㎞ 정도 올라가면 신원교가 나오는데, 신원교 근처의 물굽이가 이곳이다. 4곡 아래에서 이 운문천과 신원천이 만나 운문댐으로 흘러든다.◆내원암 입구에 5곡‘오곡이라 산이 높고 땅은 더욱 깊으니(五曲山高地愈深)/ 연하가 곳곳에 평평한 숲을 덮고 있네(煙霞多處靄平林)/ 분향하고 묵묵히 앉아서 주역 읽으니(焚香默坐看周易)/ 내원암이 맑고 서늘해 심성을 기르네(內院淸凉養性心)’.5곡 내원암 입구다. 사곡에서 운문사 쪽으로 2.5㎞ 올라가면 운문사 가는 길과 내원암 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을 만난다. 이곳에서 운문천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한 굽이가 나온다. 이 굽이가 5곡이다. 고요하고 청정한 곳에서 주역을 읽으며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고 심성을 기른다는 것이다. ‘육곡이라 숲의 문이 돌 물굽이 마주하니(六曲林對石灣)/ 잔나비 울고 꽃 피어도 상관하지 않네(猿啼花笑不相關)/ 생생하는 사물 이치 천지에 보노라니(生生物理觀天地)/ 유인으로 하여금 노에 의지해 한가롭게 만드네(能使遊人倚櫂閑)’.6곡 석만이다. 석만은 운문사와 사리암 중간쯤 되는 지점이다. 시내가 온통 돌로 이루어져 있어 그렇게 명명한 모양이다. 여기서 그는 잔나비가 울고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며, 한가로운 마음임을 이야기하고 있다.‘칠곡이라 백탄으로 내려가니(七曲登臨下白灘)/ 우뚝 솟은 사찰 수풀 건너에 보이네(嶢梵宇隔林間)/ 구름 헤친 큰 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披雲巨手今安在)/ 가을 달의 맑은 정신 수면 위에 차갑네(秋月精神水面寒)’.7곡은 백탄이다. 6곡 석만에서 길을 따라 1㎞ 정도 올라가면 사리암 입구에 도착한다. 이곳 근처의 시내가 백탄이다. 이곳의 운문천은 하얀 모래와 돌이 바닥에 깔려 백탄, 즉 흰 여울을 이루고 있다. 7곡에서 산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가면 사리암이 나온다.7곡에서는 가을 달과 같은 맑은 정신을 노래하고 있다.‘팔곡이라 운림이 합했다 다시 열리니(八曲雲林合復開)/ 도인봉 아래 작은 시내 돌아 흐르네(道人峯下小溪)/ 이 한가한 가경 아는 사람 드물어(此閑佳境人知少)/ ○○○늙은이 읊조리며 돌아오네(○○○翁伴詠來)’.8곡 도인봉은 7곡에서 조금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다. 봉우리 부분에 큰 바위가 비스듬히 드리워 있는데, 멀리서 보면 도인이 앉아 수련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신라 때 한 스님이 이곳에서 수련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박하담은 8곡에서 절경을 찾는 일반인은 모르나 자신은 이곳에서 한가한 가경, 즉 도의 극처에 가까움을 알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마지막 구절의 세 글자가 누락돼 있다. ‘구곡이라 산이 다하고 물 맑아서(九曲山窮水瑩然)/ 물고기 발발하게 평천에서 뛰노네(遊鱗潑潑躍平川)/ 고깃배는 이날도 도원을 찾지만(漁舟此日桃源覓)/ 달리 운문에 한 동천 있다네(別有雲門一洞天)’.9곡은 평천이다. 8곡에서 산길 따라 1.5㎞ 정도 가면 운문산이 끝자락에 이른다. 이 굽이에 이르면 계곡이 환하게 열리면서 확 트인 공간이 나타난다. 멀리 가지산이 보이고 가까이는 운문산 끝자락이 보인다. 주자의 무이구곡의 9곡을 떠올리게 한다.박하담은 별천지인 무릉도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이 바로 별천지라고 이야기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운문구곡 중 1곡인 선암(仙巖)의 주변 풍경. 물가에 서 있는 바위가 선암으로,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선암서원 앞 동창천에 있다.
2018.09.06
[九曲기행 .27] 청도 운문구곡(上)...黨禍에 초연했던 신도반처럼…‘은자의 삶’ 선택한 박하담
운문구곡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1479~1560)이 청도군 운문면과 금천면에 걸쳐 흐르는 운문천과 동창천에 설정해 경영한 구곡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구곡 중 매우 이른 시기에 설정된 구곡에 속한다.박하담의 문집인 ‘소요당일고(逍遙堂逸稿)’에 ‘중종 31년(1536) 선생의 나이 58세에 운문구곡가를 지으시다. 무이도가에 차운하니 소요하는 취미를 읊으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박하담은 1536년 주자가 무이산의 무이구곡을 읊은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운문구곡가를 지은 것이다. 그는 운문천 일대에 운문구곡을 설정하고 소요하며 구곡원림을 경영했다.그는 왜 운문천에 운문구곡을 설정하고 은거하는 삶을 살았을까.박하담은 명문 집안에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고려시대부터 벼슬에 나아가 높은 관직에 올랐으며, 포은 정몽주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가학으로 이어갔다. 조부 때 밀양에서 청도로 옮긴 이후 청도의 대표적 사족으로 자리 잡게 된다.연산군은 점필재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세조를 겨냥한 대역무도의 행동으로 보고,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그의 제자인 탁영 김일손이 그 글을 실록에 기재했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했다. 그리고 정여창·김굉필 등 김종직의 문인 30여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이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당시 20세이던 박하담은 김일손의 죽음을 애도하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사화 겪으며 은거를 택한 박하담‘제나라 역사에 다투어 쓴 것은 사관의 곧음이고(齊簡爭書惟史直)/ 공자는 꺼림을 빌려서 때에 따라 권도를 행하였네(魯田假諱達時權)/ 어지러운 한나라 세상에 초연히 재앙을 면하니(瞻烏漢世超然免)/ 나는 신도반이 족히 현명하다 말하리라(我屠謂蟠亦足賢)’.그는 사화를 통해 사관의 곧음과 공자의 권도(權道)를 생각했다. 권도는 목적 달성을 위해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임기응변으로 일을 처리하는 방도를 뜻한다.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사실을 기록하는 사관이 있어서 제나라 역사는 사실이 기록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자는 정도(正道)로 대처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권도로 임하여 사람이 희생되는 일을 막았다. 그런데 무오사화에서 사림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정도로만 대처하다 보니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고 김일손은 목숨을 잃었다.그래서 박하담은 신도반이 당화(黨禍)에 초연하여 재앙을 면한 것을 현명하다 했다. 중국 후한 말의 학자이며 은자였던 신도반(申屠蟠)은 당고(黨錮)의 화를 피해 산으로 들어가 살면서 대장군 하진·동탁 등의 초빙을 물리치고 절조를 지키며 생을 마친 인물이다.박하담은 이런 마음을 굳히게 되면서 벼슬길에 나아가는데 뜻을 주지 않고 은거하는 삶을 택했다. ‘하늘을 위로 하고 못을 아래로 하여 여기에서 소요하고, 고금을 포섭하여 여기에서 소요하여 자적(自適)의 즐거움을 깃들이니, 마침내 집의 이름을 소요(逍遙)라고 하였다. 나의 소요는 구름에 날고 하늘에 노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즐거운 곳에서 자재하는 것이다. 산을 마주하고 물에 임하여 태극의 형상을 징험하고, 꽃과 풀을 품평하여 조물주의 뜻을 생각하고, 올려 보고 굽어 보며 왼쪽으로 보고 오른쪽으로 보니, 아침의 햇빛과 저녁의 어둠이 기후를 달리하고, 봄의 화장과 가을의 장식이 형태를 변화시켜 온갖 형상을 제공하면서도 무진장하다.’‘소요당일고’ 중의 ‘소요당기’ 내용이다.여기에서도 나타나듯이 박하담은 은거하는 자연에서 그 안에 내재하는 이치를 궁구하고 깨닫고 관조하는 소요의 삶을 살고자 했다. 그 소요의 공간으로 운문을 택했다. 그는 ‘운문부(雲門賦)’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곤륜산의 한 가지 갈라져/ 접역(域)의 산들을 두르네/ 교남(嶠南)에 도주(道州)가 있어/ 방박(旁)을 맺으며 꿈틀하네/ 산들이 고을 동쪽으로 모이니/ 가장 아름다운 곳 운문이네’.접역은 우리나라의 다른 이름이다. 교남은 문경새재 이남인 영남을 말하고, 도주는 청도의 옛 지명이다. 박하담은 청도의 산천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판단한 운문에 은거하며 소요하고자 했다.‘군자가 몸을 보존함이 절실하니(諒君子只存身)/ 굽히고 펼 때를 알아서 스스로 노력하네(知屈伸而自强)/ 부귀 보기를 뜬구름 같이 하니(視富貴如浮雲)/ 서쪽 언덕에서 당귀를 캐노라(采當歸於西岡)/ 마땅한 가르침 속에 낙토가 있으니(名敎內有樂地)/ 오로지 소요하며 배회하리라(聊逍遙兮相羊)’.박하담의 작품 ‘소요부(逍遙賦)’ 내용이다. 그의 뜻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이 운문에 구곡을 설정하고, 운문구곡가도 지었다.운문구곡은 청도군 금천면 신지리에 있는 선암서원 앞의 선암(仙巖)을 1곡으로 하여, 상류로 오르면서 9곡까지 이어진다. 2곡은 석고봉(石鼓峯), 3곡은 횡파(橫坡), 4곡은 천문동(天門洞), 5곡은 내원암(內院庵), 6곡은 석만(石灣), 7곡은 백탄(白灘), 8곡은 도인봉(道人峯), 9곡은 평천(平川)이다. 운문댐을 거쳐 운문사와 사리암 입구를 지나 멀리 가지산이 보이는 곳까지 걸쳐 있는 구곡이다.◆박하담은박하담은 본관이 밀양(密陽)이고,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 증조할아버지는 함양군수를 지낸 박융이고, 할아버지는 소고공 박건이다. 아버지는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박승원이고, 어머니는 경절공 하숙부(河叔溥)의 딸 진주하씨다.박하담은 1516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 여러 번 대과에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청도의 동창천 눌연(訥淵) 위에 정자를 짓고 소요당이라 명명하고 자연과 더불어 학문을 닦으며 은거의 삶을 살았다. 조정에서 박하담의 학행을 듣고 감역, 봉사, 사평 등의 직임을 주며 여러 번 불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기묘사화로 낙향한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함께 청도 지역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기도 했다. 82세로 죽은 뒤 청도 칠엽산에 묻혔다.조식·성수침 등과 교유하였으며, 그의 시문집인 ‘소요당일고’가 남아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박하담의 운문구곡 중 1곡인 선암(仙巖) 근처에 있는 선암서원(청도군 금천면 신지리). 선암서당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건물은 강당이다. 선암서원은 1577년 현재 위치에 건립되었으며, 박하담과 김대유를 기리고 있다.
2018.08.23
[九曲기행 .26] 영주 죽계구곡...소백산 국망봉·비로봉이 낳은 계곡…‘한 이름 두 구곡’을 품다
영주를 둘러싸고 있는 소백산 자락이 만들어낸 계곡인 죽계(竹溪)에 설정된 구곡이다. 죽계는 소백산 국망봉과 비로봉 사이에서 발원해 영주시 순흥면을 휘감아 돌아 흘러가다 낙동강 상류로 흘러든다. 이 죽계의 상류에 죽계구곡이 있다. 죽계는 특히 고려 후기 근재(謹齋) 안축(1278~1348)이 죽계의 아름다움을 ‘죽계별곡’으로 읊으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신재(愼齋) 주세붕(1495~1554)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죽계 옆에 안향의 사당을 세우고 학사(學舍)를 마련해 1543년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건립했다. 그 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은 나라에 사액을 요청,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을 받으면서 명칭이 소수서원으로 바뀌었다. 풍기군수 역임했던 주세붕·이황최초 경영說 있지만 기록은 없어지금의 계곡 안내표지판 내용은순흥부사 신필하가 설정한 구곡순흥·흥주誌 기록 구곡과 큰 차지점 다르고 규모도 2㎞에 불과소수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이기도 하다. 죽계 옆에 있는 소수서원은 이로 인해 조선 선비들의 고향이 되었다. 이런 죽계에 있는 죽계구곡은 언제 어떤 인물이 처음 설정하고 경영했는지 확실하지 않다. 주세붕이 설정했다는 설도 있고, 이황이 설정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와 관련한 자료는 찾을 수 없다.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있었고, 이황도 풍기군수를 역임하고 소백산을 유람한 사실 등이 원인이 되었을 것이나 관련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선 후기 문신인 해좌(海左) 정범조(1723~1801)가 환갑을 맞아 죽계구곡을 유람한 뒤 그 감흥을 시로 읊었다. 정범조는 풍기군수를 역임했다. ‘휘장 친 수레 멀리서 기다리니/ 문서는 상관하지 않았네/ 함께 환갑을 맞은 객이 되어/ 산을 전혀 유람하지 못했네/ 가을이 되니 소나무 문 깨끗하고/ 스님이 함께하니 구름과 새 한가롭네/ 천천히 돌면서 구곡을 완상하니/ 무이산 사이에 있는 듯하네’ 이 시를 통해 그가 유람한 죽계구곡이 초암사 시내에 설정된 구곡이라는 사실과 무이구곡을 본받은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두 개의 죽계구곡현재 죽계구곡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되고 있다. 순흥부사 신필하(申弼夏)가 1728년에 설정한 죽계구곡과 ‘순흥지(順興誌)’와 ‘흥주지(興州誌)’에 기록되어 있는 죽계구곡이다.순흥지에 ‘죽계구곡은 순흥군수 신필하가 일찍이 소백산에 노닐 때, 초암사(草菴寺) 금당반석(金堂盤石) 앞에 죽계제일수석(竹溪第一水石)을 크게 써서 새기니 곧 무이구곡을 모방한 것이다. 처음 반석에 제1곡을 새기고, 시내를 따라 내려가며 끝인 이점(梨店))에 제9곡을 새기니 그 사이가 겨우 5리 정도다. 시내가 길고 굽이가 많은 가운데 가장 기이한 곳을 취한 것이다. 마땅히 새긴 구곡에만 그치지 않을 것이니, 너무 짧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이구곡은 처음 동구(洞口)에서 거슬러 올라가 원두(源頭)에 이르니, 동구가 제1곡이 되고 원두가 제9곡이 된다. 여기서 이른바 죽계구곡은 그것과 상반된다. 지금의 소견으로는 백운동(白雲洞) 취한대(翠寒臺)를 1곡으로 시작하고, 금성반석(金城盤石)을 2곡으로 삼고, 백자담(栢子潭)을 3곡으로 삼고, 이화동(梨花洞)을 4곡으로 삼고, 목욕담(沐浴潭)을 5곡으로 삼고, 청련동애(靑蓮東崖)를 6곡으로 삼고, 금당반석(金堂盤石)을 8곡으로 삼고, 중봉합류(中峯合流)를 9곡으로 삼는 것이 마땅하니 비로소 여기에 기록해 후인을 기다린다’고 적고 있다.신필하의 죽계구곡처럼 상류에서 1곡을 시작하는 구곡도 간혹 있기는 하다. 그러나 순흥지 편찬자는 이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구간이 짧다는 생각으로 신필하가 새겨놓은 죽계구곡에 의문을 표시하며 새롭게 죽계구곡을 정했다. 이러한 설정은 흥주지에도 계승되었다.이황의 후손인 광뢰(廣瀨) 이야순(1755~1831)은 소수서원에서 출발해 이황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 기록을 따라 소백산을 유람하면서 죽계구곡을 답사한 뒤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소백산에 들어갔는데, 죽계구곡에 굽이를 따라 돌에 새긴 것은 퇴계 선생이 손수 적은 것은 아니고 후인이 잘못 전한 것이다. 그래서 글을 지어 바로잡았다. 비류암(飛流巖)은 선생의 시문이 일찍 미친 곳이나 드러나지 않고 전하지 않는 것이니, 당시의 유록(遊錄)을 질정하여 그 장소를 알아냈다.’ <광뢰집>신필하가 죽계 곳곳에 ‘1곡’부터 ‘9곡’까지를 돌 위에 새겨놓은 것을 본 이야순은 이황이 써서 새기게 한 것이 아니고 후인이 잘못 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돌 위에 새긴 글자는 이황이나 주세붕이 새긴 것이라는 설이 있었던 것이다. 이야순과 함께 유람했던 송서(松西) 강운(1772~1834)은 ‘유소백기(遊小白記)’에서 주세붕이 새긴 것이라는 설과 이황이 새긴 것이라는 설이 있다고 소개했다.한편 하계(霞溪) 이가순(1768~1844)은 순흥에서 만년을 보내면서 죽계를 따라 소백산을 유람하고 시를 읊으면서 구곡시 ‘소백구곡(小白九曲)’을 지었다. 그는 죽계구곡을 자세히 언급하지 않으면서 이황이 유람한 자취를 따라 소백구곡을 설정했다. 이가순의 소백구곡은 신필하의 죽계구곡과 차이가 많다. 아홉 굽이의 지점이 다르고 규모도 훨씬 크다.순흥지가 제시한 죽계구곡 중 그동안 확인할 수 있었던 굽이는 제1곡 취한대, 제7곡 용추, 제8곡 금당반석, 제9곡 중봉합류다. 나머지 굽이는 그 지점이 확실하지 않아 전문가들이 다만 추정할 뿐이다. 두 죽계구곡은 순서는 다르지만 지점은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안내 표지판은 신필하의 죽계구곡을 안내하고 있다. ◆순흥지 죽계구곡1곡 취한대는 소수서원 옆 죽계 시냇가에 있는 대(臺)인 취한대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 굽이다. 맑은 죽계의 물과 취한대, 소나무 숲 등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굽이다. 취한대는 1550년 당시 풍기군수이던 이황이 처음으로 터를 닦고 흙을 쌓아 단을 만들어 소나무를 심은 대다. 이 아름다운 대에서 소수서원의 원생들이 시를 지으면서 청운의 꿈을 키우도록 한 것이다. 지금은 정자가 세워져 있다. 지금의 정자 취한대는 1986년에 건립한 것이다. ‘흥주지’에 “백운동(白雲洞)은 순흥부 영귀봉 아래에 있다. 옛날에는 숙수사(宿水寺)가 있었고, 지금은 소수서원이 있는 곳이다. 수석이 매우 빼어나고 동학(洞壑)이 그윽하게 안아서 아름답고 영롱함이 남쪽 고을에서 제일이다. 취한대, 경렴정, 경자바위(敬字石)가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경렴정은 취한대 건너편 언덕 위에 있다. 소수서원 경내로 들어가는 대문 앞에 있는 정자로,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였다.2곡 금성반석은 순흥향교 옆 죽계에 있는 널따란 바위로 추정하고 있다. 3곡 백자담, 4곡 이화동, 5곡 목욕담, 6곡 청련동애에 이은 7곡 용추폭포는 배점리 주차장에서 2.7㎞ 정도 걸어 오르면 도로 왼쪽 계곡에 나타나는 폭포다. 초암사로 올라가는 길 아래에 있다. 6m 높이의 바위 틈에서 시냇물이 물기둥을 이루며 떨어지고, 그 아래는 폭포수가 만든 소가 있다. 바위 위쪽에 ‘사곡(四曲)’이라는 글씨가 있는데, 신필하의 죽계구곡 제4곡이다.8곡 금당반석은 초암사에서 국망봉 쪽으로 길을 따라 300m 정도 걸어서 올라가 계곡으로 내려가면 나온다. 널따란 반석 위로 죽계의 물이 흘러가는 굽이다. 금당반석 위에 작은 폭포가 있고, 오른쪽 큰 바위 벽에 신필하가 새긴 ‘죽계일곡’이 있다. 신필하는 이 금당반석을 1곡으로 삼았다.금당반석에서 아래로 조금 내려가면 이황의 자취가 남아있는 청운대가 있다. 청운대는 이황이 이름을 바꾸어 새로 지은 바위 이름이다. ‘청운대(靑雲臺)’라는 각자가 있는데, 원래 이름은 백운대(白雲臺)였다.9곡 중봉합류는 금당반석에서 100m 정도 올라가면 나온다. 국망봉 서쪽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과 비로봉 동쪽에서 내려온 물이 중봉 아래에서 합류하는 지점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순흥지’에 기록된 죽계구곡의 1곡인 취한대 풍경. 소백산에서 발원한 죽계에 설정된 죽계구곡은 순흥지 죽계구곡과 신필하가 설정한 죽계구곡 두 종류가 있다.
2018.08.09
[九曲기행 .25] 성주 무흘구곡(下)...회연서원·무학정·옥류정·무흘정사…구곡 곳곳에 정구 선생의 자취
무흘구곡의 면모는 정각의 무흘구곡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신령함 크게 쌓은 듯 신안(新安)의 수려한 모습/ 붉은 휘장에 그윽한 향기 남아 한 누각 맑도다/ 무이산을 관리하여 그 구곡 가까이 하니/ 구름 창(雲窓)에 맑은 시냇물 소리 들려오네’정각은 이 서시에서 한강 정구를 떠올린다. 신안(新安)은 정구가 그토록 배우고 닮고자 했던 주자가 머물렀던 곳의 지명이다. 신안은 주자를 의미한다. 둘째 구의 강장(絳帳), 즉 붉은 휘장은 정구가 무흘에 지은 서운암(棲雲菴)을 가리킨다. 무이산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던 정구는 무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 무흘에 살면서 상상 속에서 무이구곡을 가까이 했고, 정각은 그런 정구를 읊고 있는 것이다.‘일곡이라 바위 가에 작은 배를 놓으니/ 활기찬 시내에 어부 노래 한가롭네/ 봉비암은 천 길이고 벽오동에 달 걸리니/ 아름다운 기운 모이고 저녁 안개 걷히네’1곡 봉비암을 노래하고 있다. 봉비암은 회연서원 뒤의 야트막한 바위산이다. 봉황이 나는 듯한 형상이라고 해서 봉비암이라 불린다. 회연서원(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은 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정구가 1583년에 지어 제자를 가르치던 회연초당이 정구가 별세한 후 1627년 지방 유림의 여론에 따라 서원으로 건립된 것이다.회연서원 옆에는 무흘구곡 표지석을 비롯해 김상진의 무흘구곡도와 정동박의 구곡시를 곡별로 담은 비석 등이 세워져 있다. 31세때 2곡에 한강정사 짓고 은거朱子의 ‘한천정사’서 이름 따온 것6곡 옥류동 바위 위 자리한 옥류정숲·계곡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7곡 만월담, 人家 멀리 떨어져 있어초가삼간 세워 서책 두고 휴식처로무흘정사도 지어‘서운암’편액 달아◆한강 정구가 사랑한 2곡 한강대‘이곡이라 하늘 닿을 듯한 만 길 봉우리/ 창파에 은은히 비치니 모두 원래 모습이네/ 행인이 가리키는 곳에는 유풍(遺風) 가득하니/ 그 위로 솔거문고(松琴) 몇 번이나 울렸는가’2곡 한강대를 읊고 있다. 이곳에서 제자를 가르치고 학문에 정진한 정구를 떠올리고 있다. 한강대는 1곡에서 1.5㎞ 정도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 수륜면 수성2리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다. 산 정상에 있는 바위로 ‘한강대(寒岡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정구는 31세 때(1573년) 마을 뒷산 산등성이에 한강정사(寒岡精舍)를 지으면서 2곡에서 은거를 시작했다. 정사 이름을 ‘한강’의 ‘한(寒)’자는 주자가 세상에 대한 관심을 접고 학문에 매진했던 한천정사(寒泉精舍)에서 가져 온 것이다.정구는 한강정사에 머물면서 느낀 감흥을 ‘효기우음(曉起偶吟)’이라는 시로 읊었는데, 한강대 바위에 이 시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61세 때 한강대 북쪽에 숙야재(夙夜齋)를 짓고 62세 때는 오창정(五蒼亭)을 지었다. 한강대를 매우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3곡 무학정은 작은 바위산 위에 있다. 물가에 우뚝 솟은 이 바위는 배 모양을 하고 있어 선암(船巖), 즉 배바위라고 불렀다.‘사곡이라 시냇가에 깎아지른 듯이 우뚝 솟은 바위/ 멀리 보이는 산빛은 하늘 따라 길게 드리웠네/ 조화옹이 여기 와 온갖 재주 부리니/ 하얀 너럭바위와 푸른 연못 펼쳐놓았네’4곡 입암은 3곡에서 대가천을 거슬러 4.2㎞ 정도 오르면 만난다. 물가에 촛대 같이 우뚝 솟은 바위로 ‘선바위’로도 불린다. 바위 아래 ‘입암(立巖)’이라 새겨져 있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정구는 가야산 기행문 ‘유가야산록(遊伽倻山錄)’(1579년)에서 입암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흰 돌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는데 매끄럽기가 잘 다듬은 옥 같고, 푸른 물은 잔잔히 흐르는데 맑기가 밝은 거울 같다. 우뚝 솟은 바위는 높이가 오십 장쯤 된다. 비틀린 소나무가 바위틈에서 자라는데 늙었지만 키는 크지 못했다. 백옥 같은 너럭바위가 수면에 드러나 있고 삼사십 명은 앉을 만하다. 맑고 기이하며 그윽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얼마 전에 구경한 홍류동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오곡이라 시내 따라 길은 돌아 깊어지고/ 옥으로 깎은 듯한 꽃과 나무 숲을 이루네/ 첩첩이 웅크린 바위 그림처럼 기이하여/ 인간세상 부귀 탐하는 마음 사라지게 하네’5곡 사인암의 풍광을 읊고 있다. ‘검은 구름이 걷히지 않고 가랑비가 잠깐 내렸다. 결책(決策)하며 말을 타고 사인암(舍人巖)을 찾으니 수석이 깨끗하고 상봉우리가 우뚝했다. 옛날 사인이 된 벼슬아치가 여기 수석의 승경을 사랑해 바위 아래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혹은 사신암(捨身巖)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심신을 모두 잊고 인간세상의 몸을 버리고 이 땅과 인연을 길이 맺는다 한다. 하지만 모두 시골 사람들이 하는 말이어서 전하고 믿기에는 족하지 않다.’정구는 ‘유가야산록’에서 이렇게 적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사인암(舍人巖)’이라고 했지만, 무흘구곡도에는 ‘사인암(捨印巖)’으로 되어 있다. 도로가 나면서 지금 사인암의 풍광은 크게 훼손된 상태다.6곡 옥류동은 사인암에서 3.4㎞ 정도 오르면 만난다. 정자 옥류정(玉流亭)이 시냇가 바위 위에 날아갈 듯이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는 너럭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고, 뒤로는 솔숲이 좋다. 계곡이 깊고 산과 물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이 굽이부터는 김천시 영역이다.◆7곡 만월담 아래 무흘정사 지어 은거‘칠곡이라 맑은 못이 돌 여울에 이어지니/ 물 고인 곳을 고요한 가운데 바라보네/ 선생이 남긴 자취는 서운암에 있으니/ 맑은 기상 영원토록 푸르고 찬 물에 비치리라’7곡 만월담에 서린 한강 정구의 학덕을 이야기하고 있다.“무흘은 성주 서쪽 수도산에 있으니 천석(泉石)이 맑고 깨끗하며 인가가 멀리 떨어져 있다. 선생이 이곳에 초가삼간을 세워 서책을 보관하고 쉬는 장소로 삼으니, 그 깊은 뜻은 사람들을 피해 있고 싶은 것이었다. 편액을 서운암(棲雲庵)이라 했다. 서운암 아래는 비설교(飛雪橋)와 만월담이 있고, 만월담 위에는 자이헌(自怡軒)이 있는데 나무를 얽어서 만들었다. 암자 동쪽에는 산천암(山泉庵)이 있다. 바위틈에서 샘물이 솟아나는데 그 소리가 마치 옥이 부딪히는 소리 같다. 그 이름은 주자의 시 ‘밤에 산의 샘물 소리 배고 잤다’에서 가져온 것이다.”정구는 62세에 무흘정사를 짓고 서운암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이 무흘정사 아래에 만월담이 있다. ‘팔곡이라 용이 하늘로 오르고 비가 개려 하니/ 청라 깊은 곳에 물과 구름 휘도네/ 사람들 신공의 조화 알 수 있으니/ 하늘 땅에 베푸는 은혜 예부터 있어왔어라’8곡 와룡암 굽이에는 이름처럼 용이 누워있는 듯한 암반이 펼쳐져 있다. 암반 바위 한 귀퉁이에는 ‘와룡암’이 새겨져 있다.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구곡이라 용추에서 물이 콸콸 떨어지니/ 신선대 아래서 시내의 근원이 시작되네/ 세속 근심 이 신령한 곳에 침범하는 것 싫어하여/ 마른 하늘 천둥 같은 소리 내어 동천을 지키네’9곡 용추는 크게 높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위용을 자랑하는 멋진 폭포다. 정구는 이곳을 찾아 100여 척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보았다. 그리고 폭포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왼쪽 가에 죽은 나무를 불태우고 공간을 마련해 ‘완폭정’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자리가 어딘지 지금 확인할 근거는 남아있지 않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6곡 옥류동 주변 풍경. 정자 옥류정(玉流亭)이 바위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는 너럭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고, 뒤로는 솔숲이 좋다.
2018.07.26
[九曲기행 .24] 성주 무흘구곡(上)...“이처럼 그윽하고 맑은 곳 없어라” 무위의 삶 녹아 흐르는 대가천계곡
무흘구곡(武屹九曲)은 성주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인 한강(寒岡) 정구(1543~1620)가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한강정사(1573년), 회연초당(1583년), 무흘정사(1604년)를 중심으로 성주 대가천 일대에 설정된 구곡이다. 무흘구곡은 성주 수륜면에서 시작돼 금수면을 거쳐 김천 증산면으로 이어지는 매우 긴 계곡에 걸쳐 있다. 정구 역시 주자의 삶을 닮고자 했고 무이구곡을 사랑했다. 그래서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시를 짓고, ‘무이지(武夷志)’를 증찬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흘계곡 곳곳에는 그런 그의 삶이 녹아있다. 무흘구곡은 정구의 이런 삶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정구가 직접 무흘구곡을 설정했다는 등의 기록이 있는 것은 아니다.◆주자의 무이구곡을 동경한 정구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1736~1820)의 문집인 ‘묵헌선생문집’에 ‘무흘구곡도발(武屹九曲圖跋)’이라는 글이 있다.‘우리 한강 정 선생은 회암(주희) 선생의 도를 몸소 행하셨다. 공부하며 시를 읊던 장소 중에 가장 좋은 무흘 한 구역이 있는데, 회암이 사셨던 무이와 같다. 선생이 일찍이 무이지를 증찬하고 구곡시에 화운을 하셨는데 그 뜻이 미묘하다. 이에 후인이 무흘구곡이라 이름하고 바위에 새기고 그림을 그려서 화첩을 만들어 무이의 고사를 모방했다.’이 기록을 보면 정구가 주자의 삶을 존숭하며 그런 삶을 영위하고 싶어했지만 직접 무흘구곡을 경영한 것은 아니고, 그 마음을 받들어 후인이 무흘구곡을 설정하고 이름을 새기고 그림을 그린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그러나 후손의 기록을 보면 무이도가에 화운(和韻)한 시를 무흘구곡을 읊은 것으로 보고 있다.정구는 주자의 ‘무이도가’를 화운한 구곡시 ‘앙화주자무이구곡시운십수(仰和朱子武夷九曲詩韻十首)’를 남겼는데, 이 구곡시 제목을 보면 무이구곡을 대상으로 읊은 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후손들의 기록에 의하면 달리 보게 된다. 진암(進菴) 정각(1799~1879)이 무흘구곡을 읊은 시의 제목을 ‘경차선조문목공무흘구곡운십절(敬次先祖文穆公武屹九曲韻十絶)’이라고 달고 있다. 이를 보면 정구의 구곡시가 무흘구곡을 읊은 시인 것으로 되어 있다. 후손들은 이를 통해 정구의 구곡시가 무흘구곡을 대상으로 읊은 시라고 인식해왔다.성주∼김천에 걸친 22㎞ 긴 계곡 정구 선생 은거하며 제자 가르쳐 朱子 무이산에 대한 깊은 경외심 무이도가 차운詩 짓고 저서 증찬 무흘구곡 직접 경영 기록은 없어 ‘주자에 외람된 일’ 생각했을 수도 후손·후학 구곡 그림으로도 남겨 김상진作 ‘무흘구곡도첩’ 전해져 이처럼 정구가 무흘구곡을 경영했다고 볼 수 있으나 무흘구곡 경영과 관련한 구체적 언급은 따로 없는데, 그 이유는 이황이 직접적 구곡 경영은 주자에게 외람된 일이라고 생각한 것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정구는 자신이 지은 ‘무이지발(武夷志跋)’에서 ‘무이산은 기이하고 빼어나며 맑고 고와 진실로 천하에 제일이다. 또 우리 주 선생이 도학을 공부하던 장소가 되어 만대의 아래가 수사(洙泗)와 태산처럼 우러르게 하니 진실로 우주 사이에 다시 있을 수 없는 땅이 된다. 내가 외진 곳과 늦게 태어나서 이미 선생의 문하에서 배울 수 없고 또 구곡의 하류에서 갓끈을 씻을 수 없으니 어찌 심히 불행이 아니겠는가’라며 안타까워하고 있다.정구는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산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1604년에는 ‘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를 짓기도 했다. 주자가 머물렀던 운곡(雲谷), 무이산, 백록동(白鹿洞), 회암(晦菴) 등에 대한 서(序), 기(記), 제영(題詠), 사적(事跡)을 모아 엮은 책이다.그는 또 이중구(李仲久) 집안에서 소장했던 무이구곡도를 볼 수 있었는데 ‘한가할 때마다 한 번씩 펼쳐보면서, 이 몸이 주자가 돌아가신 지 400여년 후 동쪽 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때마다 주자를 모시고 강도(講道)하며 그 가운데 가영(歌詠)하고 주선(周旋)하니 그 기상의 의미가 어떠하겠는가’라는 감회를 남기기도 했다. 성주 수륜면에서 김천 증산면까지 22㎞에 걸쳐 있는 무흘구곡은 회연서원 뒤의 바위산인 제1곡 봉비암(鳳飛巖)부터 시작된다. 제2곡이 한강대(寒岡臺), 제3곡이 무학정(舞鶴亭), 제4곡이 입암(立巖), 제5곡이 사인암(捨印巖), 제6곡이 옥류동(玉流洞), 제7곡이 만월담(滿月潭), 제8곡이 와룡암(臥龍巖), 제9곡이 용추(龍湫)다.자동차가 다니는 도로가 구곡을 따라 나 있고, 곡마다 안내표지가 서 있어 찾아보기가 어렵지 않다. ◆그림으로도 그려진 무흘구곡무흘구곡은 정구 이후 후손과 후학들에 의해 그림으로 그려지고 차운시가 지어지면서 영남의 대표적 구곡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경헌(警軒) 정동박(1732~1792)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영재(嶺齋) 김상진에게 부탁해 무흘구곡도를 그리게 하고, 곡마다 그 명칭을 적고 직접 지은 두 수의 시를 써 넣은 뒤 첩을 만들었다. 김상진이 79세 때인 1784년에 그린 그림이고, 무흘구곡도첩으로 전하고 있다.이만운이 이 무흘구곡도를 보고 지었을 것으로 보이는 ‘무이구곡도발’에는 다음의 내용도 담겨 있다.‘무이정사는 순희 갑진년(1184)에 완성되고, 무흘정사는 만력 갑진년(1604)에 창건되어 지금 중건해 새기고 그린 것이 마침 갑진년(1784)이다. 하늘이 두 현인을 세상에 내면서 땅의 이름이 이미 닮고 앞뒤로 경영한 해가 또한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 시내와 산에 향기가 넘치고 안개와 구름이 눈에 가득하니 손으로 만짐에 닮은 점이 있다. 만약 월담과 용암 사이에서 선생을 모시면 사모하고 흥기하는 것이 있을 것이니, 곧 선생의 인지(仁智) 덕을 배우고자 하는 이는 또한 이 그림에서도 얻음이 있을 것이다.’무흘구곡 차운시는 진암 정각의 ‘경차선조문목공무흘구곡운십절(敬次先祖文穆公武屹九曲韻十絶)’과 정관영(鄭觀永)의 ‘영무흘구곡시십수(詠武屹九曲詩十首)’, 최학길(崔鶴吉)의 ‘경차무흘구곡운(敬次武屹九曲韻)’으로 이어진다.정구의 구곡시(仰和朱子武夷九曲詩韻十首)는 도학적 성격이 강해 무흘구곡의 실경 느낌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시와 1곡시를 소개한다.‘천하 산중에 어느 곳이 가장 신령한가/ 세상에 이처럼 그윽하고 맑은 곳 없어라/ 일찍이 주자가 깃들었으니/ 만고에 길이 흐르는 도덕의 소리여’. ‘일곡이라 여울가에 고깃배를 띄우니/ 석양 드리운 시내에 실바람이 감도네/ 그 누가 알리오 세상 근심 다 버리고/ 박달 노 잡고 저문 안개 헤칠 줄을’.정구는 성주 출신으로 이황과 조식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통천군수, 우승지, 강원도관찰사,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경서, 병학, 의학, 역사, 천문, 풍수지리 등 모든 분야에 통달했고 특히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41세가 되던 1583년에 후진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금의 회연서원 자리에 회연초당(檜淵草堂)을 마련하고 방 이름은 불괴침(不愧寢), 창문은 매창(梅窓), 당호는 옥설헌(玉雪軒)이라고 지었다. 뜰 앞에는 백 그루의 매화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백매원(百梅園)이라 불렀다. 이때의 초당은 정구가 벼슬길에 나가 있는 동안 퇴락해 그가 63세가 되던 1605년에 다시 복원했다. 그의 사후 7년째가 되던 1627년 회연초당 자리에 그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는 회연서원이 건립되었으며, 1690년 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무흘구곡 4곡인 입암 풍경. 한강 정구는 입암에 대해 ‘유가야산록’에서 “맑고 기이하며 그윽하고 고요한 분위기는 얼마 전에 구경한 홍류동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고 표현했다.1784년에 그린 무흘구곡도를 담은 비석들. 1곡이 있는 회연서원 앞에 조성돼 있다.
2018.07.12
[九曲기행 .23] 문경 대야산 선유구곡(下)...“8곡 난생뢰 반석 여울물 소리, 난새 탄 신선이 생황 연주하는 듯”
‘못 위의 급한 물살 쏟아지며 이룬 물결/ 이 못에 이르러선 그 기세 잔잔하네/ 물결 보면 원래 이처럼 근원 있으니/ 차가운 수면 위로 내 마음 비춰보네.’5곡 관란담은 시에서 노래한 것처럼, 세차게 내려온 물결이 이 못에 이르러 기세가 꺾이면서 잔잔한 수면을 만들어낸다. 이곳 물가 바위에 ‘관란담(觀瀾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뚜렷하지는 않다. ‘관란’은 물결을 본다는 의미인데, 관란은 ‘맹자’의 ‘진심장구(盡心章句)’에 있는 구절에서 유래한다.‘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물결이 이는 여울을 보아야 한다. 해와 달은 밝은 빛이 있으니, 그 빛을 용납하는 곳에는 반드시 비추는 것이다(觀水有術 必觀其欒 日月有明 容光必照焉).’주자는 맹자의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을 달았다. ‘이는 도에 근본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란(瀾)은 물의 여울이 급한 곳이다. 밝음이라는 것은 빛의 체(體)요, 빛은 밝음의 용(用)이다. 물의 여울을 보면 그 물의 근원에는 근본이 있음을 알게 되고, 해와 달이 빛을 용납하는 틈에는 비추지 아니하는 것이 없음을 보면 그 밝음에는 근본이 있음을 알게 된다.’정태진은 이렇게 성리학자들처럼 물결을 바라보며 그 현상의 근원, 즉 도의 근원을 생각하고 도의 이치를 떠올리며 마음을 돌아본 것이다.5곡에는 또 ‘관란담’이 새겨진 바위 옆 바위에 ‘김태영(金泰永)’을 비롯해 김씨 성을 가진 9명의 한자 이름과 함께 ‘구은대(九隱臺)’라는 글씨가 순서대로 새겨져 있다. 9명의 이름은 김태영 김상봉 김상련 김상홍 김상건 김진영 김무영 김석영 김종진.이들은 순천김씨 가문 사람 아홉 노인으로, 일제시대인 1933년 4월 구로회를 만들고 이곳에 숨어들어 이렇게 새겼다. 이들은 이곳에 모사(茅舍)를 짓고 밭을 사서 여생을 마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정태진, 5곡 관란담 바라보며성리학자처럼 道의 근원 생각상주 출신으로 초야 은둔생활남한조 기려 6곡 탁청대 노래9곡 근처 바위엔 최치원 글씨◆손재 남한조를 기리는 6곡 탁청대‘탁청대 앞으로 흐르는 물에 일어나는 가는 물결/ 갓끈 한번 씻으니 만 가지 근심 가벼워지네/ 손재 선생 그날의 흥취를 상상해보니/ 푸른 물결 한 굽이서 오롯한 마음 밝아지네.’6곡 탁청대에도 물가 바위에 ‘탁청대’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는 해서체다. ‘탁청’이라는 말은 중국 전국시대 시인이자 정치가인 굴원의 ‘어부사(漁父詞)’에서 유래한 것이다. 강남으로 유배 와 있던 굴원이 거기서 만난 어부에게 다른 이는 다 옳지 않고 자신만이 곧음을 내세우자, 어부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可以濯吾足)’고 읊었다. 여기서 정태진이 떠올린 손재는 손재(損齋) 남한조(1744~1809)이다. 그는 탁청대 서쪽에 세심정을 지어 살았던 인물이다. 상주 출신으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 은둔하며 후진 교육에 힘쓴 선비였다.‘물가에서 온종일 맑은 풍광 즐기다가/ 때때로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네/ 기수(沂水) 무우(舞雩) 아니어도 뜻을 펼 수 있으니/ 영귀암 누대에서 자족하며 봄옷 펄럭이네.’7곡 영귀암을 읊고 있다. 너럭바위에 ‘영귀암(詠歸巖)’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이곳도 흰 바위들과 맑은 물의 풍광이 노래가 절로 나오게 한다. ‘노래하며 돌아온다’는 ‘영귀’는 공자와 증석(曾晳)의 고사에서 유래한다.어느 날 공자가 제자인 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와 대화를 나누다 제자들에게 이루고 싶은 것을 말해 보라고 했다. 다들 벼슬하며 펼쳐 보일 정치적 야망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증석은 그게 아니었다. ‘늦봄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冠)을 쓴 어른 대여섯 명과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며 돌아오겠습니다.’증석이 이렇게 말하자 공자는 감탄하며 ‘나도 점(點)과 함께 하리라’고 말했다. 점이 이름이고 석은 증점의 자이다. 정태진도 이런 뜻을 읊었다.‘반석 여울 물소리는 생황을 연주하는 듯/ 여울 바닥에는 어렴풋이 신선 발자국 보이는 듯/ 예부터 신선 사는 곳은 기이하고 신비하다지만/ 구름 사이 닭소리 개소리 들리니 유안 같은 신선이겠지.’7곡에서 4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나오는 8곡 난생뢰다. 이곳에도 난생뢰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아주 멋지다. 난생(鸞笙)은 신선이 타고 다니는 난새와 악기인 생황을 뜻한다. 이는 곧 난새를 타고 생황을 부는 신선을 말한다. 뢰(瀨)는 여울이다. 이 여울에 흐르는 물소리를 신선의 피리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마지막 구절의 유안 이야기는 한나라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이 임종할 때 남긴 단약을 먹은 닭과 개도 신선이 되었다는 고사를 말한다. 유안은 신선의 도를 좋아해 팔공이라는 신선으로부터 불로장생의 선단(仙丹)을 제조하는 기술을 전해 받고 천신만고 끝에 그 기술을 연마해 스스로 대낮에 승천하게 되고, 골육지친 삼백여명도 함께 승천했다. 이때 집의 개와 닭들도 약 그릇에 묻은 것을 핥아 먹고 역시 함께 날아올라갔다는 내용이다.◆9곡 옥석대는 신선이 신발 남긴 곳‘계곡에 누운 반석 위에는 거울 같은 맑은 물/ 오목한 곳 폭포 떨어져 샘 되고 솟은 데는 옥석대 되었네/ 선인이 남긴 신발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섭현에서 날아온 오리 두 마리 있으리라.’마지막 9곡은 옥석대다. 일부러 다듬어 만든 듯한 너럭바위에 ‘옥석대’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옥석은 옥으로 만든 신발을 말하며, 도를 얻은 사람이 남긴 유물을 의미한다. 한나라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다.“안기생(安期生)은 낭야 부향(阜鄕) 사람이다. 동해에서 약을 파니 그때 사람들이 모두 천세옹(千歲翁)이라 불렀다. 진시황이 동쪽으로 유람을 갔을 때 안기생을 초청해 더불어 사흘 밤낮 동안 이야기를 나눈 뒤 기뻐하며 많은 황금과 벽옥을 하사했다. 이에 안기생은 상으로 받은 값진 보물들을 모두 부향의 역참 내에 남겨두고 말없이 떠났다. 그리고 떠나면서 편지 한 장을 남기고, 붉은 옥으로 만든 신발 한 켤레를 남긴 채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편지에는 ‘수 년 후 봉래산으로 나를 찾아오시오’라고 적혀 있었다.”쌍부섭현(雙鳧葉縣)은 ‘후한서’ 중 ‘왕교(王喬)’ 대목에 나오는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후한 현종 때 왕교가 섭현의 원이 되었는데, 신술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반드시 와서 조회하는데, 명제는 그가 자주 오는데도 거마를 볼 수 없으므로 태사를 시켜 지켜보게 했다. 태사는 왕교가 올 때는 오리 두 마리가 동남에서 날아온다고 보고했다. 이에 날아온 쌍오리를 그물로 잡으니 한 켤레의 신발뿐이었다고 한다.옥석대 너럭바위 건너편에 솟은 바위에는 ‘선유동(仙遊洞)’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고운(孤雲) 최치원의 글씨로 전한다. 그리고 반대편 계곡 가에는 도암(陶菴) 이재(1680~1746)를 기려 세운 학천정(鶴泉亭)이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선유구곡 중 8곡 난생뢰와 9곡 옥석대 주변 풍광. 난생뢰는 난새를 탄 신선이 부는 생황 소리가 들리는 여울이라는 의미고, 옥석은 신선이 남긴 신발을 말한다. 9곡 옥석대 주변 바위에 새겨진 ‘선유동(仙遊洞)’. 고운 최치원 글씨로 전한다(작은 사진).
2018.06.28
[九曲기행 .22] 문경 대야산 선유구곡(上)...신선 노닐던 선유동계곡…광복 맞은 독립운동가의 감격이 흐르는 듯
선유(仙遊). 신선이 노닌다는 의미의 이 이름이 들어가는 지명이 우리나라에 적지 않다. 이런 지명을 가진 곳 중 문경 가은의 선유동(仙遊洞)계곡은 말 그대로 신선이 노닐 만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계곡이다. 이 계곡은 문경 대야산(해발 931m)에 있다. 대야산의 이 계곡 말고 괴산 쪽으로 흐르는 계곡도 수려한데 역시 선유동계곡이라 한다. 그래서 헷갈리기도 하는데 기호지방 유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괴산 선유동을 선유동 혹은 내선유동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영남 유학자들은 자신의 고장인 문경 선유동을 내선유동이라 하고, 괴산 선유동을 외선유동이라 했다. 고산자 김정호는 괴산 선유동을 그냥 선유동이라 하고, 문경 것을 내선유동이라 했다. 상주 출신의 선비인 우복(愚伏) 정경세(1563~1633)는 이렇게 노래했다. ‘두 선유동 사이좋게 서로 이웃이 되었는데(兩仙遊洞好相隣)/ 중간에 있는 한 고개로 구름이 떠가는구나(只隔中間一嶺雲)/ 이름난 명승을 두고 우열을 논하지 말게(莫把名區評甲乙)/ 조물주는 시내와 바위 공평히 나눠주었다네(天將水石與平分)’. 정경세는 이런 시를 지으면서 문경의 것을 동선유동, 괴산의 것을 서선유동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가은읍 완장리 시내 1.8㎞ 구곡 일제때 옥고 치른 정태진이 설정 1947년 은거 문집에 구곡詩 남겨 아홉 굽이마다 명칭 새겨놓은 돌 언제 누가 했는지 확인되지 않아 ◆정태진이 1947년에 설정한 구곡 문경 선유동, 즉 동선유동의 아름다움은 ‘완장(完章)’이라는 마을 이름에서도 드러난다. 정경세는 선유동 산수의 기묘함과 수려함에 감탄해 이 동네에 이르러 ‘가이완장운(可以浣腸雲)’이라고 했다 한다. ‘골짜기가 탁 트여 창자가 시원하다’는 뜻인데, 현재의 완장이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지사(地師)로 종군했던 풍수가 두사충이 백두대간을 넘어 이곳으로 들어서다 선유동 경관을 보고는 창자가 시원하다며 완장(浣腸)이라 한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문경 선유동계곡의 선유구곡은 외재(畏齋) 정태진(1876~1956)이 설정해 경영한 구곡이다. 문경 선유동과 관련된 인물로는 이전에 선유동에 옥하정을 짓고 머물렀던 손재(損齋) 남한조(1744~1809)가 유명하다. 정태진은 항일 독립운동가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는데, 1919년 4월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에 서명했다. 이후 독립운동 군자금 확보에 힘쓰다가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문경 가은에 은거했다. 정태진은 문경에 머물며 선유동을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이곳을 찾은 것은 광복 후인 1947년 5월(음력)이다. 당시의 감흥을 그는 이렇게 읊었다. 선유구곡시 서시다. 정태진의 문집(외재집)에 나온다. ‘10년을 꿈꾸다 이렇게 한 번 찾아오니(十載經營此一遊)/ 선유동문 깊숙한 곳 흥취가 끝이 없네(洞門深處興悠悠)/ 맑은 시내 굽이굽이 원두에서 흘러오고(淸溪曲曲靈源瀉)/ 늙은 돌은 울룩불룩 푸른빛이 감도네(老石積翠浮)/ 아득히 오랜 뒤에 은자 자취 찾아보는데(曠世蒼茫追隱跡)/ 어느 때나 터를 닦고 좋은 계책 얻을까(幾時粧點獲勝籌)/ 한 해가 다 가도 선약 얻을 소식 없으니(金丹歲暮無消息)/ 부끄러이 세상을 향해 백발을 탄식하네(羞向人間歎白頭)’. 선유구곡은 문경 가은읍 완장리 앞으로 흐르는 시내를 따라 1.8㎞에 펼쳐진 구곡이다. 선유구곡 아홉굽이에 굽이마다 이름을 돌에 새겨놓았는데, 누가 언제 새겼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홉굽이의 이름은 1곡 옥하대(玉霞臺), 2곡 영사석(靈石), 3곡 활청담(活淸潭), 4곡 세심대(洗心臺), 5곡 관란담(觀瀾潭), 6곡 탁청대(濯淸臺), 7곡 영귀암(詠歸巖), 8곡 난생뢰(鸞笙瀨), 9곡 옥석대(玉臺)다. ◆정태진의 선유구곡시 ‘흰 바위에 아침 햇살 비추어 밝게 빛나고(白石朝暾相暎華)/ 맑은 시내 찬 물결에 안개 붉게 피어나네(晶流寒玉紫騰霞)/ 새긴 글씨 한가로이 찾지만 확인하기 어렵고(閒尋題字迷難辨)/ 옥하대 위 허공 멀리 흰 구름만 떠가네(只有白雲帶上遐)’ 아주 넓은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는 1곡 옥하대는 ‘아름다운 안개가 드리우는 누대’라는 의미다. 정태진은 이 1곡시 위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곳이 선유구곡의 제1곡이다. 옛날에는 새긴 글자가 있었으나 큰물에 갈라져 지금은 그 장소를 알아낼 수 없다.’ ‘너럭바위 뗏목 삼아 신령을 찾아가다(以石爲喚作靈)/ 시내 속에 정박한 지 아득히 오랜 세월(中流停著歲冥冥)/ 곁의 벼랑에도 선인의 자취 남아 있으니(傍崖又有仙人掌)/ 한 길로 원두 찾으면 신선을 만날 수 있으리(一路窮源指可聽)’. 1곡에서 조금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나오는 2곡 영사석은 ‘신령스러운 뗏목 모양의 바위’라는 뜻이다. 수량에 따라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는 영사석 너럭 바위 위에 ‘영사석’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무이구곡처럼 배를 띄울 수 있는 계곡은 아니지만, 너럭바위를 신선이 타던 뗏목으로 생각하고 원두를 찾아가려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원두는 선유구곡을 흐르는 물이 발원하는 곳을 말하는데, 도의 근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서 신선은 도가의 신선이라기보다는 유학자이니까 유가의 도를 구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정처에서 동처를 마음으로 바라보니(靜處從看動處情)/ 못 속이 활발하여 못물이 깨끗하네(潭心活活水方淸)/ 본래 맑고 활발함 흐리지 말게(本來淸活休相)/ 한 이치 허명하면 도가 절로 생기리라(一理虛明道自生)’. 3곡 활청담은 얕은 못인데, 4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이곳에서 활청담을 만든 뒤 2곡을 향해 흘러간다. 이 활청담은 흘러드는 물로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항상 맑음을 유지한다. 그래서 활청이라 한 것이다. 이런 자연을 보면서 맑고 활발한 마음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허명한 이치가 본디 내 마음이거늘/ 부질없이 세상사에 깊이 물들었네/ 이 대(臺)에 이르러 한 번 씻을 생각하니/ 어찌 묵은 때를 추호라도 두겠는가’. 4곡 세심대를 노래하고 있다. 이곳에는 사각형의 바위가 비스듬히 서 있는데 여기에 ‘세심대’라는 글자가 전서로 새겨져 있다. 그 앞으로는 너럭바위 위로 맑은 물이 흘러간다. ‘허명’은 비어 있지만 맑다는 의미다. 마음이 비어 있으면서 밝고 맑은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선비들의 자세이자 정태진의 화두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심대 바위에 보면 ‘구로천(九老川)’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구로(九老)’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772~846)가 향산에 은거해서 주변의 노인 8명과 함께 ‘향산구로회(香山九老會)’를 만들어 시를 지으며 노년을 즐긴 고사에서 비롯된 말인데, 이 글씨는 1933년 4월 김태영을 비롯한 순천김씨 아홉 노인들이 이곳에 은거하며 새긴 것이라고 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문경 대야산의 선유동계곡에 있는 선유구곡의 4곡인 세심대 주변 풍경. 선유구곡은 구곡 중 보기 드물게 경치가 수려한 계곡이다. 마음을 씻는 대라는 의미의 ‘세심대’ 글자가 새겨진 바위.
2018.06.14
[九曲기행 .21] 충남 계룡산 용산구곡...조선 독립 염원했던 권중면, 승천하는 龍 주제로 국권회복 노래하다
용산구곡은 계룡산 상신계곡(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에 있는 구곡이다. 취음(翠陰) 권중면(權重冕 1856~1936)이 1932년에 설정했으며, 승천할 용을 모티브로 삼아 국권의 회복을 바라는 염원을 담아낸 것으로 해석된다. 우리나라가 국권을 상실한 이후 계룡산 상신계곡에 은거하며 용의 일생을 주제로 구곡을 설정, 기울어진 국운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일반적인 구곡과는 다른 주제를 담고 있어 특별한 흥미를 갖게 하는 사례다. 구한말 남다른 절의를 드러낸 인물인 권중면은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조정에서 여러 벼슬을 지냈다. 외직으로 황해도 평산군수를 거쳐 1907년 능주군수로 전임받았을 때 관직을 사직하고 비통에 젖어 지내다가 회갑이 되던 1916년 봄에 계룡산 자락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는 따르는 제자들을 위해 사랑채에 서당을 차리고 망국의 서러움 속에서 두문불출하며 선비의 절개를 지켜나갔다. 국운이 되살아나길 학수고대했으나 광복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81세 되던 1936년에 별세했다. 시집 52권, 문집 14권, 기행문 1권 등 모두 67권의 저서를 남겼다. 하지만 6·25전쟁 당시 공산군이 그의 집을 3개월간 점거·사용할 때 휴지와 불쏘시개로 사용해 모두 없어지고, 기행문인 ‘금강산 유람기’ 한 권만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권중면은 친형인 권중현(1854~1934)이 1905년 을사조약에 서명하자 형제의 의를 끊고, 관직 유지와 사퇴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1907년 정미칠조약을 계기로 벼슬을 내려놓고 계룡산 상신리에 은거하며 1932년 8월 용산구곡을 설정하고 말년을 보내다가 삶을 마감했다. 권중현(농상부대신)은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과 함께 을사오적에 속하는 인물이다. 친형제이지만 생각과 가치관이 너무나 달랐던 모양이다. 권중면의 아들은 우리나라 단학(丹學)의 대가로, 민족운동가이자 단군사상가로 평가받는 봉우(鳳宇) 권태훈(1900~1994)이다. 구한말 선비 절개지킨 권중면 을사오적 지탄 친형과도 의절 관직 내놓고 상신계곡에 은거‘龍의 일생’ 관련지어 9곡 설정 광복 끝내 못보고 1936년 별세◆용을 주제로 설정한 용산구곡용산구곡은 구곡의 설정 주제를 용으로 삼은 점이 특징이다. 용이 숨어있다가 승천할 때까지 이야기 전개를 통해 국권을 강탈당한 조선인의 국권회복 의지와 염원을 자연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루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계룡산 상신계곡에 은거해 수도하던 용이 비로소 때를 만나 여의주를 물고 승천함을 조국이 독립하고 번영하는 것으로 상징화시켜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1곡은 용을 찾는 문인 심룡문(尋龍門), 2곡은 용이 숨어 있는 못인 은룡담(隱龍潭), 3곡은 용이 수련하는 곳인 와룡강(臥龍岡), 4곡은 용이 수련하다 쉬면서 노니는 곳인 유룡대(遊龍臺), 5곡은 용이 공부가 무르익어 여의주를 얻는 바위인 황룡암(黃龍岩), 6곡은 용이 세상 이치를 보는 능력을 얻어 모습을 나타내는 현룡소(見龍沼), 7곡은 용이 구름을 만나 하늘로 오를 준비를 하는 못인 운룡택(雲龍澤), 8곡은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곳인 비룡추(飛龍湫), 9곡은 용이 승천해 신이 된 못인 신룡연(神龍淵)으로 구곡의 위치와 명칭을 정했다. ‘용’자가 다 들어가 있고, 마지막 자를 모두 다르게 한 것이 특징이다.이 용산구곡은 상신리 마을 입구 계곡에서 시작해 계곡 상류로 거슬러 오르며 큰골까지 이르는 2.5㎞ 정도 되는 계곡을 따라 설정돼 있다. 마을 옆을 지나 3곡부터 펼쳐지는 상신계곡의 5월 풍광은 맑은 물이 적당히 흐르는 깨끗한 암반 계곡인 데다 활엽수 숲이 뒤덮여 있어 용이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려하다. 1곡 심룡문은 마을 입구의 길 옆 계곡인데, 계곡 따라 난 도로 옆 큰 바위에 ‘1곡 심룡문’이 새겨져 있다. ‘용산구곡(龍山九曲)’이라는 글씨도 같이 새겨져 있다. 한자로 된 이 글씨들은 권중면의 글씨로 보인다. ‘일곡’은 예서 형태로, ‘심룡문’은 초서로 되어있다. 9곡 신룡연까지 모두 같은 형식으로 되어있다. 이 바위 뒤편에는 ‘개학동문(開學洞門)’과 ‘상신소(上莘沼)’라고 새겨져 있다. 바위 아래 계곡에는 ‘취음동천(翠陰洞天)’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2곡 은룡담은 상신리 당간지주가 있는 곳을 지나 계곡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데, 계곡 바닥 바위에 ‘2곡 은룡담’이라 새겨져 있다.3곡부터는 숲과 바위, 맑은 물이 어우러지는 수려한 계곡이 이어진다. 3곡 와룡강은 계곡물이 흐르는 암반과 소가 있는 곳이다. 바위 우측 상단에는 ‘자양산월동원만천 백록담파영방사해(紫陽山月同圓萬川 白鹿潭波盈放四海 : 자양산에 뜬 달 모든 시내 비추고, 백록담 물은 넘쳐 사해로 흐르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와룡강 조금 위에 있는 4곡 유룡대는 커다란 너럭바위다. 이 바위에는 다양한 글귀들도 새겨져 있다. ‘4곡 유룡대’를 비롯해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 ‘강산풍월 한자주인(江山風月 閑者主人)’ ‘자양시(紫陽詩)’ ‘취음서(翠陰書)’ ‘권태훈(權泰勳)’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거연아천석’은 멋진 풍광과 더불어 평안하게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주자의 ‘정사(精舍)’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거문고 타며 공부한 지 40년(琴書四十年)/ 나도 모르게 산중 사람 다 되었네(幾作山中客)/ 띠집 짓는데 하루면 족하니(一日茅棟成)/ 문득 나와 샘과 돌이 한 몸이네(居然我泉石)’.◆용산구곡 중심은 5곡 황룡암5곡 황룡암은 용산구곡의 중심이며,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오방색 중 황색은 중앙을 상징하듯이 황룡을 구곡의 중심인 오곡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넓은 암반 위에 큰 바위가 계곡 양 옆에 마주 보며 서 있다. 그중 큰 바위에 ‘5곡 황룡암’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암반 위에는 ‘태극암(太極岩)’ ‘궁산을수(弓山乙水)’ 등 다양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궁산을수는 산태극·수태극의 지형을 상징한다. 풍수지리에서 산줄기와 물줄기가 어우러져 둥그스름하게 굽이쳐 태극모양을 이루는 계룡산 지세를 표현하고 있다. 이곳에는 ‘취음 권중면 임신팔월(翠陰 權重冕 壬申八月)’이라는 각자도 있다. 1932년 8월(음력)에 권중면이 새긴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6곡 현룡소는 제법 큰 못이다. 못 위 바위에 곡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어지는 7곡 운룡택과 8곡 비룡추는 각자가 많이 마멸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마지막 9곡 신룡연은 큰 바위 앞의 작은 못이다. 바위 아랫부분에 ‘신룡연 9곡’이 새겨져 있고, 왼쪽에 ‘구룡조천(九龍朝天)’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다. 구룡조천과 관련해 권중면의 아들 권태훈이 남긴 글이 있다.‘나의 선고께서 계룡산의 신야(莘野)에 들어오신지 이십일년만에 하세(下世)하시었다. 이 동천(洞川)에 구곡을 설(設)하시고 동구(洞口)에 각 왈 신야춘추(莘野春秋) 도원일월(挑源日月)이라 하여 말년의 은둔(隱遁)을 표(標)하시었다. 구곡에 곡곡(曲曲)을 용(龍)자로 명명하시고 구곡에 구룡조천(九龍朝天)이라 하시어 도학(道學)의 성공을 일방(一方)으로 의미하시었는데, 선고 향수(享壽) 팔십일세이니 용은 양구(陽九)요 구룡이 조천하면 구구팔십일수(九九八十一數)에 조천하신다는 예기(豫期)도 된다.’ 1952년 3월23일의 기록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용산구곡의 중심인 5곡 황룡암 주변 풍경. 왼쪽 바위 위에 ‘5곡 황룡암’이라 새겨져 있고, 오른쪽 바위와 그 아래 암반 위에도 여러 가지 글귀가 새겨져 있다.‘용산구곡’과 ‘1곡 심룡문’이 새겨진 바위. 여기서부터 용산구곡이 시작된다.
2018.05.31
[九曲기행 .20] 충남 계룡산 갑사구곡...친일 매국 윤덕영이 설정한 구곡…곳곳에 깊이 새긴 글씨 아직도 선명
충남 계룡산(鷄龍山·845m)은 이어지는 산봉우리들의 능선이 마치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여진 산이다. 또한 무학대사가 신도(新都)를 정하기 위해 조선 태조 이성계와 함께 신도안의 좌우 산세를 둘러보고 ‘이 산은 한편으로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니 계룡이라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한 데서 계룡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에는 오악(五嶽) 중 서악(西嶽)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는 3악(상악 묘향산, 중악 계룡산, 하악 지리산) 중 중악(中嶽)으로 불렸다. 1968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국가의 안위를 위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인 중악단(보물 제1293호)이 지금도 계룡산에 남아 있다. 이 계룡산의 계곡에도 두 개의 구곡이 있는데, 갑사구곡과 용산구곡이다. 모두 20세기(갑사구곡 1927년, 용산구곡 1932년)에 설정된 구곡이다. 특이하게 구곡 설정 주인공이 한 사람은 친일 매국의 대표적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경술국치 이후 은거하며 독립의 염원을 구곡에 담아 표현했던 선비여서 극단적 대비를 이뤄 관심을 끄는 구곡이기도 하다.◆윤덕영이 1927년에 설정한 구곡갑사구곡은 갑사 옆을 흐르는 계곡 2㎞ 정도에 걸쳐 있는데, 벽수(碧樹) 윤덕영(1873~1940)이 설정한 구곡이다.윤덕영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황제의 왕비, 순정효황후의 삼촌이다. 순종황제의 장인은 윤택영으로, 윤덕영의 동생이다. 윤덕영은 황실의 외척으로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치며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1910년 경술국치 때는 순종황제와 황후를 위협해 황후의 치마 속에 감추었던 옥새를 빼앗아 한일합병을 앞장서서 조인시킨 장본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윤덕영은 노년에 갑사 앞 계곡 가에 지은 간성장(艮成莊)이라는 별장에 머물며, 이곳을 중심으로 계곡을 따라 경치가 좋은 아홉 군데를 골라 9곡을 설정했다. 그리고 곡마다 그 이름을 바위에 새겼다. 행서로 된 이 각자(刻字)는 글씨를 새길 부분을 네모 형태로 파내 평평하게 다듬은 후 거기에다 글씨를 매우 깊게 새겼는데, 지금도 글씨가 선명하다. 구곡 명칭뿐만 아니라 계곡 곳곳에 주역 관련 글귀 등 다양한 글을 새겨놓았다.벽수 윤덕영대한제국 순종황제비의 삼촌옥새 빼앗아 한일합병 조인시켜노년기 갑사계곡 별장에 머물러갑사구곡1927년 갑사계곡 2㎞ 걸쳐 설정별장 간성장 주변엔 5곡 금계암구곡의 중심으로 풍광도 뛰어나간성장은 당시 공주 갑부 홍원표가 계곡 암반 위에 지어 윤덕영에게 바친 한옥 별장으로, 그 터는 갑사와 30년 임대계약을 하고 사용했다고 한다. 간성장은 윤덕영이 애용하다가 나중에는 공주 출신으로 국회의원을 지낸 박충식(1903~66)의 별장으로 사용했으며, 그 후 한동안 전통찻집으로 활용되다가 지금은 외부 손님이 묵는 갑사 요사채로 사용되고 있다.이 간성장 앞 계곡인 5곡 금계암을 중심으로 설정한 갑사구곡의 곡별 이름은 1곡 용유소(龍遊沼), 2곡 이일천(二一川), 3곡 백룡강(白龍岡), 4곡 달문택(達門澤), 5곡 금계암(金鷄巖), 6곡 명월담(明月潭), 7곡 계명암(鷄鳴巖), 8곡 용문폭(龍門瀑), 9곡 수정봉(水晶峯)이다.용이 노니는 못이라는 의미의 용유소는 갑사 사찰매표소를 지나 계룡산국립공원 갑사탐방지원센터로 향하는 다리 아래에 있다. 바위계곡 아래 형성된 작은 못이다. 주변 바위에는 ‘일곡 용유소(一曲 龍遊沼)’와 더불어 ‘간성장(艮成莊)’ ‘삼갑동문(三甲洞門)’ 등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간성장’ 각자는 5곡과 9곡 주변 바위에도 새겨져 있다.2곡 이일천은 1곡에서 한참 올라가는데 계곡 가에 있는 철탑상회 부근이다. 이곳은 수정봉과 연천봉에서 발원한 두 계곡물이 합쳐져 하나가 되는 지점이다. 그래서 이일천이라 했다. 계곡 옆에 있는 바위에 ‘이곡 이일천(二曲 二一川)’이라 새겨져 있다.3곡 백룡강은 여름 우기에 물보라가 마치 흰 용이 꿈틀대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배를 띄워 풍류를 즐기던 곳인 4곡 달문택은 갑사 화장실 건너편 아래 계곡을 막아 만들어놓은 못이다.◆윤덕영 별장 ‘간성장’ 주변이 중심5곡 금계암은 간성장 주변에 있다.‘계룡갑사’라는 편액이 달린 갑사 강당 건물 앞을 지나는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길 옆에 공우탑(功牛塔)이 보이는데, 이 공우탑 옆을 지나 계곡 쪽으로 내려가면 간성장을 지나 계곡을 건너는 다리(대적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 바위에 ‘금계암’이라 새겨져 있다. ‘5곡(五曲)’이라는 글씨는 계곡 바위에 따로 새겨져 있다. 금계암은 계룡산이 풍수학에서 말하는 금계포란의 명당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적교 아래쪽 계곡이 5곡이다. 갑사구곡의 중심이고 풍광도 매우 좋다. 5곡에서는 많은 각자를 확인할 수 있다. ‘오곡’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위 옆 다른 바위에는 ‘삼갑동주(三甲洞主)’라는 글씨가 크게 새겨져 있고, 그 오른쪽에 ‘일중석(一中石)’이라는 글씨와 더불어 20여자의 글자가 도형적으로 새겨져 있다. 왼쪽 끝에는 ‘간옹명(艮翁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주역과 천문지리에 능했다는 윤덕영이 새긴 것이다. 이 밖에도 부근에서 ‘간도광명(艮道光明)’ ‘은계(銀溪)’ ‘순화임원(舜華林園)’ ‘용화(龍華)’ 등 많은 각자를 확인할 수 있다.공우탑도 윤덕영과 관계가 깊다. 공우탑은 지금의 자리에 옮기기 전에는 대적교 바로 옆에 있었다.공우탑은 백제 비류왕 시절 갑사의 부속 암자를 건립할 때 건축 자재를 운반하던 소가 냇물을 건너다가 죽자 그 넋을 위로하고자 세웠다고 한다. 암자에 있던 이 탑을 윤덕영이 간성장 근처로 옮겨 세우고, 탑신 1층 정면에 다음과 같은 글을 새겨 넣었다. ‘와탑기립(臥塔起立) 인도우합(人道偶合) 삼혜을을(三兮乙乙) 궐공거갑(厥功居甲)’이라는 글이 있다. ‘쓰러진 탑을 일으켜 세우니 사람의 도리에 부합되네. 세 번을 수고했으니 그 공이 으뜸이다’라는 의미다.윤덕영 자신이 쓰러져 있던 탑을 일으켜 세운 것을 자화자찬하고 있는 내용인데, 후세인들의 비난을 받는 일이 되었다. 대적교 옆에 방치되어 있던 공우탑은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관리되고 있다.6곡 명월담은 석조약사여래입상이 있는 곳 부근 계곡으로, 작은 폭포와 소가 있다.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잔잔한 물 위로 밝은 달이 비치면 각별한 정취를 선사할 만하다. 소 옆의 큰 바위에 한자로 ‘6곡 명월담’이라 새겨져 있다. 명월담에서 잠시 올라가면 나오는 7곡 계명암은 계룡산이 처음 열릴 때 산속에서 닭이 날갯짓을 하며 울었다는 바위다. 이 바위에 ‘7곡 계명암’이라 새겨놓았다.8곡 용문폭은 용문폭포를 말한다. 폭포가 10m 정도로 비교적 높고 그 아래 소도 큰 편이다. 소 앞 너럭바위에 ‘8곡 용문폭’이라고 크게 새겨져 있다.‘9곡 수정봉’ 각자는 용문폭에서 850m 정도 더 올라가면 나오는 신흥암의 산신각에서 50m 위쪽에 있는 바위에 새겨져 있다. 신흥암에서 보이는 수정봉은 암벽을 아름답게 깎아 세워놓은 모습의 멋진 봉우리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계룡산 갑사 옆을 흐르는 갑사계곡에 설정된 갑사구곡 중 8곡 용문폭. 소 앞 암반에 ‘8곡 용문폭(八曲 龍門瀑)’이라고 새겨져 있다.용산구곡의 중심 굽이인 5곡 금계암 주변 풍경. 주변 바위 곳곳에 ‘오곡(五曲)’ ‘삼갑동주(三甲洞主)’ 등 다양한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2018.05.17
[九曲기행 .19] 안동 고산칠곡...眉川(미천) 따라 굽이진 七曲…측백나무 벗삼으니 道學(도학)의 길 멀고도 가깝다
고산칠곡은 안동시 일직면과 남후면에 걸쳐 있는 미천(眉川) 물줄기에 조성된 구곡이다. 미천은 낙동강 지류로, 안망천(安望川)이라고도 한다. 구곡은 계곡 환경에 따라 매우 드물지만 이처럼 칠곡으로 설정돼 경영되기도 했다.이 고산칠곡을 경영한 주인공은 대산(大山) 이상정(1711~81)이다. 이황의 학통을 이어받은 이상정은 이황 이후 영남학파 최고의 성리학자로 꼽히며 ‘소퇴계’로 불릴 정도로 학문이 깊었다. 서른 살 때인 1740년 미천 물줄기를 지나면서 아름다운 경관에 이끌린 이상정은 이곳을 마음에 담고 있다가, 1767년 대석산에서 뻗어나온 제월봉(霽月峯)이 미천과 만나는 둔덕 위에 세 칸 짜리 서실을 지었다. 그러나 물이 너무 가깝고 바람이 많이 불어 기거하기가 마땅하지 않아 3년 뒤 지금 자리로 옮겨 지었다. 새로 옮긴 곳은 마을이 가까웠으나 앞에 송림이 있어 지낼 만했다. 이름은 ‘고산정사(高山精舍)’라 지었다. 고산이라는 이름은 고암(高巖) 또는 암산(巖山)이라 불리던 마을 이름을 하나로 합친 것이다. 이황의 학통 이은 대산 이상정영남학파 최고 성리학자 손꼽혀‘소퇴계’불릴 정도로 학문 깊어서른살 때 眉川 물줄기 지나며 경관 이끌려 서실 짓고 학문 닦아 이후 자리옮겨 고산정사 지어 은거고산칠곡 설정하고 ‘칠곡시’ 남겨 이상정은 고산칠곡을 설정하고 칠곡시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고산칠곡도를 함께 남겼다. 이상정은 고산정기(高山亭記)를 지어 손수 한 첩자(帖子)에 적고 그 아래에 칠곡의 산수와 정(亭)·대(臺) 등을 그리고, 굽이를 따라서 시를 쓴 후 ‘고산정기병도(高山亭記竝圖)’라고 명명했다. 그림이 사실적이지는 않지만 고산칠곡의 지점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상류에서 시작하는 고산칠곡의 이름은 1곡 늠연교(凜然橋), 2곡 세심정(洗心亭), 3곡 유연대(悠然臺), 4곡 고산정사(高山精舍), 5곡 심춘대(尋春臺), 6곡 무금정(舞禁亭), 7곡 무릉리(武陵里)다. 이상정의 ‘고산잡영(高山雜詠)’ 중 ‘고산칠곡시’는 각 굽이에서 일어나는 흥취에 의탁하여 관물구도적(觀物求道的) 도학(道學)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상정은 주자의 시(무이도가)에 대한 인식도 이황처럼 탁흥우의(托興寓意)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상정의 고산칠곡시‘공산(公山)의 남쪽 기슭 시냇물 그윽하고 그윽하며/ 여기저기 돌들 삐죽 솟아 배 뒤집히기 쉽네/ 건널 때마다 두려워하는 마음 잃지 않으면/ 구당 협곡도 예부터 안전한 물길이라네’1곡을 읊은 시다. 1곡 늠연교는 안동시 일직면 원호리와 광음리 경계인 미천의 여울이 얕게 흘러내리는 곳이다. 지금은 송리철교가 놓여 있다. 1곡의 물길 환경을 묘사하면서 도학의 길이 멀고 험하지만,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하며 그 길을 가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구당협(瞿塘峽)은 암초와 절벽이 펼쳐지고 급한 여울이 휘돌아 흐르는 중국 양쯔강의 협곡을 말한다.‘넓은 들 끝나는 곳에 냇물 고여 소가 되고/ 돌계단 이끼 낀 낚시터 물가를 빙 둘러 있네/ 늦은 봄날 제자들과 목욕하고 바람 쐬기를 끝내면/ 옷 털어 다시 입고 세심정으로 걸어 올라가네’2곡은 냇물이 흘러오다 잔잔한 소를 이루는 굽이다. 이상정은 논어에 나오는 증점의 고사를 인용해 목욕하고 바람 쐬기를 마치면 바위 위에 널어놓았던 옷을 털어 입고 세심정으로 올라간다고 했다.‘푸른 절벽 마주하는 사이에 고인 물 깊고/ 운무가 아침저녁으로 평지 숲 가려 어둑하네/ 한가로운 마음으로 높은 대 위에 올라 앉으니/ 천 년 지나도록 누가 알겠는가 산속에 사는 이 마음’3곡 유연대는 2곡에서 1㎞ 정도 물길 따라 내려가면 물줄기가 부딪히는 쪽에 20~30m 높이의 수직 절벽이 길게 버티고 있는 곳이다. 절벽 아래 형성된 소는 맑고 넓고 깊다. 3곡은 옛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3곡시는 주자의 무이도가 중 5곡시와 운자가 같고 내용도 비슷하다. 이상정의 ‘산심(山心)’과 주자의 ‘만고심(萬古心)’은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고심은 성인의 마음이다. 3곡의 그림을 보면 심연은 맑은 못이라는 징담(澄潭)으로 표현했고, 취병(翠屛) 위에는 유연대가 있다.‘물 맑고 산 깊은 곳에 한 마을이 있는데/ 텅 빈 서재에 온종일 사립문 닫고 사네/ 물가에 조는 새와 계단에서 웃는 꽃/ 향 한 자루 피워 놓고 말없이 앉아 있네’4곡 고산정사를 노래하고 있다. 3곡에서 300m 정도 내려가면 물줄기가 또 크게 휘돌기 시작하는 굽이에 이른다. 이 굽이의 물가 언덕에 고산칠곡의 중심 공간인 고산정사가 있다. 정사 뒤로는 이상정이 별세한 후 1789년에 제자들이 그를 기려 세운 고산서원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고산정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맞은편 미천 건너의 암봉인 제월봉이다. 이 제월봉 벼랑에는 측백나무 3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252호로 지정된 이 ‘안동 구리 측백나무숲’ 측백나무는 수령이 100~200년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심춘대 아래 냇물 질펀하게 흘러가는데/ 우뚝 솟은 절벽 위 고원(古院)은 텅 비어있네/ 한 줄기 무지개 다리 나루터를 가로질렀으니/ 누가 힘들였나 냇물 건너게 한 그 공덕’5곡 심춘대는 3곡에서 1.3㎞ 정도 내려가면 나오는 완만한 물굽이 지점이다. 높이 50~60m에 이르는 퇴적암 벼랑이 있다. 이 심춘대 위는 공무로 출장 오는 관리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숙소인 옛 원(院)이 있던 터다. 이상정 생존 당시에도 원은 이미 없어졌던 모양이다. 홍교는 보통 아치형으로 쌓은 돌다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나무로 놓은 섶다리를 말한 것 같다. 고산칠곡도를 보면 튼튼한 섶다리가 그려져 있다. 섶다리는 처음에는 푸른색이었다가 솔가지나 나뭇잎이 말라가며 점차 다양하게 색깔이 바뀌고 모양도 무지개처럼 둥글어서 ‘홍교’라고도 불렀다. 그는 이 다리를 보며 다리를 놓기 위해 애썼을 백성들의 노고에도 따스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끊어진 산록 길게 뻗어 옥병풍처럼 둘렀는데/ 잡초 우거진 돌밭 사이 버려진 정자가 있구나/ 성색(聲色)에는 관심 없어 관리하는 사람도 없는데/ 텅 빈 산은 예전대로이고 냇물은 절로 맑구나’6곡 무금정은 5곡에서 800m 정도 아래 지점이다. 미천은 이 굽이에서 급하게 휘돌아 흐르는데, 이곳에 50~60m의 수직 암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절경이라 지금도 여름철이면 피서객들이 적지 않게 찾는다. 이상정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무금정이 버려진 채 방치되고 있었다. ‘넓은 들 트인 산에 평평한 냇물뿐/ 숲 너머 울타리로 저녁 연기 피어오르네/ 기이한 유람 다하는 곳 다시 머리 돌리니/ 항아리 같은 협곡 별천지가 있구나’7곡 무릉리를 읊고 있다. 6곡에서 1.5㎞ 정도 물길 따라 더 내려가면 무릉리가 나온다. 절벽 사이를 흐르는 미천이 곳곳에 소와 담을 이루며 흐르다가 이곳에서 들판을 만나 평범한 냇물로 바뀌는 굽이다. 주위에 평지가 펼쳐지고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무릉리다. 이상정은 무릉도원을 연상케 하는 지명을 지닌 이 굽이에서 고산칠곡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이 마을 이름은 물줄기가 산부리를 돌아 흘러 들어가므로 ‘무른개’라 불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무릉(武陵)이 되었다고 한다.이상정은 해 질 녘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을 묘사하며 이곳이 이상향인 무릉도원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대산 이상정이 칠곡을 설정한 후 그림으로 그린 고산칠곡도 중 총도(總圖). 고산칠곡도는 총도와 함께 곡별로 그린 개별도로 구성돼 있다.
2018.05.03
[九曲기행 .18] 안동 하회구곡...하회마을 휘도는 낙동강…당쟁의 소용돌이 피해 산림처사가 은거하다
하회구곡(河回九曲)은 남옹(楠翁) 류건춘(1739~1807)이 안동 하회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에 설정한 구곡이다. 류건춘은 겸암(謙菴) 류운룡(1539~1601)의 후손으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벼슬을 하지 않고 산림처사로 살았으며, 문집 ‘남옹유고(楠翁遺稿)’가 있다.겸암 류운룡의 후손 남옹 류건춘세거지 하회 중심으로 구곡 설정문집 ‘남옹유고’에 구곡시 남겨朱子의 무이도가 차운하는 대신자신이 직접 정한 운으로 詩 지어서시를 먼저 내는 형식도 탈피해201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이름을 올린 하회마을은 풍산류씨가 600여년간 대대로 살아온 대표적 전통마을이다. 류씨가 하회에 자리잡은 지 얼마 안 돼 입암(立巖) 류중영(1515~1573)이 과거 급제 후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고, 두 아들 겸암 류운룡과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을 두었다. 모두 퇴계 이황의 제자로 영남학파의 거봉이 되었다. 류성룡은 영의정까지 지냈다.하회마을에는 풍산류씨 대종택인 입암고택(양진당)과 서애종택인 충효당 등 보물로 지정된 고택을 비롯해 문화재가 즐비하다. 하회구곡은 류운룡과 류성룡의 유적이 중심이 되고 있다.류건춘이 하회구곡을 언제 설정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가 지은 ‘하회구곡시’가 ‘남옹유고’에 실려 전하고 있어 하회구곡을 설정해 경영한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류건춘의 하회구곡시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먼저 보통 구곡시는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지었는데 비해, 하회구곡시는 자신이 정한 운으로 시를 지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구성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 대부분 구곡시가 서시를 앞에 두었는데, 하회구곡시는 구곡을 읊은 시를 먼저 내세우고 마지막에 ‘합곡시(合曲詩)’라는 결시(結詩)를 배치했다.류건춘이 설정한 하회구곡은 1곡 병산(屛山), 2곡 남포(南浦), 3곡 수림(水林), 4곡 겸암정(謙巖亭), 5곡 만송(萬松), 6곡 옥연(玉淵), 7곡 도포(島浦), 8곡 화천(花川), 9곡 병암(屛巖)이다.◆상류에서 1곡이 시작되는 하회구곡하회구곡은 상류에서 하류로 내려오면서 구곡을 설정했는데, 이것도 하류에서 1곡을 시작한 대부분의 구곡 설정 방식과는 다른 점이다.1곡 병산은 병산서원 건너편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산이다. 병산서원은 류성룡과 그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1582~1635)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병산서원 만대루에서 보면 병산과 강이 그림처럼 다가온다.2곡 남포는 1곡에서 3.5㎞ 정도 내려간 지점인 낙동강 취수장 부근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남포의 흔적을 찾기가 어려운 환경이다. 당시에는 이곳 포구에 무지개 같은 다리, 즉 홍교(虹橋)가 있었던 것 같다. 류건춘의 아버지 류풍이 지은 ‘하회 16경’에 남포의 홍교를 읊은 시가 있어 당시 남포의 정경을 상상해볼 수 있다.3곡 수림은 4곡 겸암정과 원지산 사이에 있는 상봉정 뒤쪽에 있었던 숲으로 추정된다. 이 수림은 저녁노을이 특히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수림에 떨어지는 노을을 의미하는 ‘수림낙하(水林落霞)’는 하회 16경 중 하나로, 류풍은 시에서 ‘숲이 산허리에 있어 수림이라 하는데/ 푸른 강물 흐르는 물가에 높이 임하였네/ 외로운 해오라기 나란히 구름에 들고/ 밝은 노을 수림 깊은 곳으로 떨어지네’라고 노래하고 있다.4곡 겸암정은 류운룡이 1567년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하회마을 건너편 부용대 상류 쪽 언덕 위 숲속에 자리하고 있다.5곡 만송은 하회마을 쪽 강둑을 덮고 있는 소나무숲이다. 류운룡이 풍수지리로 볼 때 마을의 허한 기운을 보완하기 위해 1만여 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조성한 숲이다. 이곳에 류운룡이 지은 정자 만송정이 있었으나 1934년 대홍수 때 허물어졌다고 한다.6곡 옥연은 솔밭 맞은편 절벽인 부용대 아래의 굽이다. 류성룡이 귀향해 옥연 위에 지은 옥연정사가 지금도 옥연을 굽어보고 있다. 류성룡은 이 옥연정사에서 ‘징비록’을 저술했다.7곡 도포는 옥연 하류에 있던 섬의 포구로 추정된다. 류건춘은 도포를 ‘강 모퉁이에 있는 외로운 섬’이라 묘사하고 있다. 낙동강이 굽이 도는 지점에 물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형성되었던 작은 섬으로 보인다. 8곡 화천은 7곡에서 하류로 좀 더 내려가 물굽이가 형성되는 지점이다. 화천 건너편에 류운룡을 기리는 화천서원이 있다.9곡 병암은 화천서원 맞은편에 자리한 암벽이다. 화천을 지나 다시 서쪽으로 급하게 돌아 방향을 잡은 곳으로, 이 굽이 옆에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바로 병암이다.◆류건춘의 하회구곡시‘낙동강의 근원 있는 물 동쪽에서 흘러내리고/ 병풍바위의 우뚝한 절벽이 그것을 에워쌌네/ 구름 낀 병산에 서원 서니 강이 섬처럼 둘러/ 일곡이라 이름난 터에 버드나무 나부끼누나’<1곡 병산>‘5리의 긴 시내 포구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운무가 반쯤 걷혀 삼필봉이 드러나 보이네/ 중류에는 나무꾼 피리소리 홍교(虹橋)에 이어지는데/ 이곡이라 두견화가 푸른 남기(嵐氣) 속에 빼어나구나’<2곡 남포>‘노을 속 오리 나는 빛이 물 서쪽에 비단 같은데/ 갈고리처럼 연결된 돌 잔도는 하늘 오르는 사다리에 닿았구나/ 세찬 물결 속의 지주(砥柱) 바위 높다랗게 서 있는데/ 삼곡이라 흰 모래밭에 기러기 떼 내려앉는구나’<3곡 수림>‘굽어보니 푸른 물결 부딪혀 역류하며 흘러가는데/ 하늘거리는 바위틈 대나무들 정자 옆에 서 있네/ 낚시 바위는 보였다 말았다 여울 소리는 오열하네/ 사곡이라 선조의 정자 십경에 들기에 손색이 없도다’<4곡 겸암정>‘강의 반은 솔 그늘이 드리워 묶인 배를 덮고/ 삼동에는 눈이 덮이며 봄에는 봄기운을 띠네/ 꾀꼬리와 학의 울음소리 바람결에 뒤섞이는데/ 오곡이라 서리 맞은 단풍 적벽 앞에 붉구나’<5곡 만송>‘백 길의 부용대가 옥처럼 맑은 물에 비치고/ 푸른 절벽 끊어진 곳에 물소리가 요란하네/ 나루 입구에서 맞이하고 돌아갈 때 전송하니/ 육곡이라 능파대에서 뱃노래가 들리는구나’<6곡 옥연>‘강 모서리의 한 조각 외로운 섬 푸르고/ 지나가는 나그네 그림자 백사장에 길구나/ 깊은 가을 누런 숲은 손바닥처럼 평평한데/ 칠곡이라 농부들 노랫소리 원근에 들리네’<7곡 도포> ‘서원을 품은 맑은 시내 백사장을 빙 둘렀는데/ 산의 이름은 화산이고 아래 시내는 화천이라네/ 명륜당 높은 곳에 청금(靑襟)의 선비들 모여 있으니/ 팔곡이라 글을 읽는 소리 북쪽 물가까지 들리네’<8곡 화천> ‘사방으로 돌던 물결 곧장 아래로 내달리고/ 너럭바위 앞의 깎아지른 절벽 병풍 문이 되었네/ 깊은 못의 용이 포효하여 종담(鍾潭) 골짜기 갈랐으니/ 구곡이라 바람 세차고 밝은 태양 어둑어둑하네’<9곡 병암> ‘그림 같은 절벽 풍경 읊은 열여섯 편의 시/ 뱀에 사족 더하기 어렵고 물은 헤치기 어렵네/ 못난 나는 만년에 주자의 무이구곡시 좋아하여/ 감히 강가 거처를 작은 무이에다 견주었네’<합곡시>‘열여섯 편의 시’는 류건춘의 아버지 류풍이 지은 시 ‘하회십육경(河回十六景)’을 말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하회구곡 1곡인 병산 풍경. 서애 류성룡을 기리는 서원인 병산서원 강당 마루에서 바라본 만대루와 낙동강, 병산의 모습이다.
2018.04.19
[九曲기행 .17] 안동 퇴계구곡...퇴계종택 앞을 흐르는 토계천…굽이마다 ‘동방의 朱子’ 발자취
퇴계구곡(退溪九曲)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퇴계종택 앞을 흐르는 토계천(土溪川)에 설정된 구곡이다. ‘동방의 주자’로 불리는 대유학자이자 문신인 퇴계 이황(1501~1570)의 체취와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는 구곡이다. 이황이 태어나고 자란 고택, 벼슬에서 물러난 후 지어 살던 집터, 제자를 가르치던 서당, 묘소 등 주위의 유적들을 통해 이황의 삶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낙동강 본류를 따라 조성된 도산구곡이 이황의 거시적 업적과 철학을 담은 구곡이라면, 이황 고향의 작은 하천 토계천에 설정된 퇴계구곡은 이황의 탄생과 성장, 출세, 귀향과 별세 등 이황의 구체적 삶의 흔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굽이들이다.토계천은 낙동강의 작은 지류로, 이황이 태어난 온혜리에서 시작해 상계마을의 퇴계종택 앞과 하계마을의 이황 묘소 앞을 지나 낙동강에 흘러든다. 토계리를 지나는 시내는 따로 퇴계(退溪)라고도 한다. 원래 이름은 토계(兎溪)였으나 이황이 냇가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이름을 ‘퇴계(退溪)’로 고친 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나중에 ‘토(兎)’ 자를 음이 같은 ‘토(土)’ 자로 고치면서 지금의 토계가 되었다.이황을 기리는 퇴계구곡은 이황 후손인 하계(霞溪) 이가순(1768~1844)이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가순은 퇴계구곡을 1곡 사련진(絲練津), 2곡 양진암(養眞庵), 3곡 죽동(竹洞), 4곡 장명뢰(鳴瀨), 5곡 고등암(古藤庵), 6곡 임부동(林富洞), 7곡 양평(羊坪), 8곡 청음석(淸吟石), 9곡 쌍계(雙溪)로 정했다. 퇴계구곡시도 지었다. 하암(下庵) 이종휴(1761~1832), 소은(素隱) 류병문(1776~1826), 동림(東林) 류치호(1800~1862) 등도 퇴계구곡시를 남겼다.이가순의 퇴계구곡시를 따라 퇴계구곡 이야기를 살펴본다.◆이가순 퇴계구곡시이가순은 서시에서 이황의 가문을 신령한 집안이라고 읊고, 이황이 살던 토계천을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유한 뒤 1곡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일곡이라 사진에서 저물녘 배를 부르니(一曲絲津喚暮船)/ 시내가 산 북쪽을 따라 남주로 들어가네(溪循山北入南州)/ 어느 시절에 은어 공물 없어질까(何年却銀唇貢)/ 어촌은 예전처럼 저녁 연기 속에 있네(依舊漁村畵裏煙)’1곡 사련진은 토계천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으로, 나루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가순은 사련진에서 뱃사공을 불러 토계천을 거슬러 오른다고 노래하고 있지만, 실제가 아니라 상상이다. 주자가 배를 타고 구곡을 유람했기에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1곡에서 이가순은 은어 공물을 언급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곡이라 산문이 두 산봉우리 마주하고 있는데(二曲山門對兩峯)/ 노을 드리운 연꽃 같은 봄날 자태 아름답네(霞蒸蓮秀媚春容)/ 만권 서적에 묻혀 살기에 참으로 좋은 곳(生涯萬卷眞休地)/ 서쪽으로 도산과 가까워 단지 산 하나 너머라네(西近陶山只一重)’2곡 양진암은 이황이 한때 기거했던 곳이다.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가 세워져 있는 하계삼거리에서 퇴계종택 쪽으로 50m 정도 지점의 도롯가인데, 지금은 ‘양진암고지(養眞庵古址)’라 새겨진 작은 표석만 있다. 이가순이 살아있을 때도 양진암은 이미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있었다. 이황이 46세가 되는 1546년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작은 집을 짓고 살며 양진암이라 이름 지었다. 이 양진암 터 뒤쪽 산길을 잠시 오르면 이황 묘소가 있다.‘삼곡이라 띠집은 조각배처럼 작은데(三曲茅齋小似船)/ 비바람 막지 못한 채 여러 해 지나왔네(不堪風雨庇多年)/ 산은 비고 봉황이 떠나고 대나무 열매도 없어(山空鳳去篁無實)/ 천 길 바위가 맡아 보호하니 가련하구나(石丈千尋任護憐)’양진암에서 95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3곡 죽동이다. 이황이 잠시 기거했던 곳이다. 현재 몇 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농촌마을이다. 대나무가 많아 죽동이라지만, 대나무 열매가 없고 그 열매를 먹고 사는 봉황도 떠나버렸다. 그런 퇴락한 띠집을 지나며 봉황(이황)이 떠난 모습을 보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이황 고향 토계리 소하천 토계천주위에 집터·묘소 등 유적 자리후손 이가순이 설정한 퇴계구곡퇴계 철학 담은 도산구곡과 달리탄생∼별세 삶의 궤적 고스란히◆5곡은 이황이 기거했던 한서암‘오곡이라 푸른 등넝쿨 고목이 깊고(五曲蒼藤古木深)/ 텅 빈 밝은 집 시내와 숲을 가까이했네(虛明一室擁泉林)/ 창문 앞에는 절로 거문고 타는 바위 있으니(窓前自有彈琴石)/ 그 누가 용문의 이치와 운치를 알겠는가(誰識龍門理韻心)’4곡(장명뢰) 다음의 5곡 고등암은 등넝쿨 고목이 있는 집을 읊고 있다. 이 집은 이황이 기거했던 한서암(寒栖庵)이다. 주자가 무이정사가 있는 굽이를 5곡으로 설정했듯이 퇴계구곡도 한서암과 계상서당이 있는 곳을 5곡으로 설정한 것이다. 한서암 부근의 탄금석을 거론하며 이황의 학문을 노래하고 있다. 유학에서 ‘거문고를 탄다’는 탄금은 ‘학문을 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용문은 이황의 가문이고 용문의 이치와 운치는 이황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육곡이라 시내 돌아 다시 한 물굽이 되니(六曲溪回更一灣)/ 새가 울고 꽃이 피어 바위 관문 둘러 있네(鳥鳴花發繞巖關)/ 산림에서 사는 삶 봄이 와 한창이니(山林日用春來富)/ 하늘 땅이 함께 흘러 만물이 한가롭네(上下同流物物閑)’ 6곡은 임부동이다. 고등암에서 300여m 상류 지점의 물굽이와 그 주변이다.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만석이나 되는 재산의 부자로 살던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이가순은 임부동의 봄풍경을 읊으며 천지의 이치가 조화롭게 펼쳐지는 이상향임을 노래했다.‘팔곡이라 비탈에는 어지러운 돌 널려 있고(八曲陂陀亂石開)/ 청음대 아래로 물굽이가 돌아 흐르네(淸吟臺下水彎)/ 사방 산에는 철쭉꽃 해마다 피고(四山年年紫)/ 가마는 가서 돌아오지 않을 줄 잘 알겠네(曠想肩輿去不來)’6곡에서 1㎞ 정도 거슬러 오르면 7곡 양평(羊坪)에 이르고, 양평마을에서 1㎞ 정도 오르면 8곡 청음석이다. 청음석은 이황의 추억이 서린 바윗돌이다. 평범한 바윗돌이지만, 이황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숙부(이우)와의 추억이 서린 이곳을 종종 찾곤 했다. 이황은 숙부의 시에서 ‘청음(淸吟)’이라는 단어를 가져와 추억이 서린 바윗돌을 ‘청음석’이라 하고 시도 지었다. 그 시 일부다.‘어린 시절 모시고 놀던 곳(總角陪遊地)/ 불러 보아도 오시지 않네(吟魂去不回)/ 오직 개울가 바위 소리만(唯餘溪石響)/ 다시 찾아온 것 위로하는 듯하네(似欲慰重來)’이가순도 이곳에서 청음석에 얽힌 사연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겨들었다.‘구곡이라 구름 덮인 산이 아득히 보이고(九曲雲山渺然)/ 쌍계가 십 리를 흘러와 앞 시내를 달려가네(雙溪十里走前川)/ 푸른 소나무 고택에 우뚝 서 있으니(蒼松古宅亭亭立)/ 세모에도 도가 서린 땅 변함 없네(道域栽培歲暮天)’9곡 쌍계는 토계천이 끝나는 곳에 온계(溫溪)와 청계(淸溪) 두 시내가 만나는 굽이다. 이 쌍계가 토계천이 되어 청음석으로 흘러간다. 청계와 온계도 이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내다.쌍계 너머 온계 들판 안쪽에 이황이 태어난 노송정 고택이 자리하고 있고, 고택에는 노송이 푸르름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었다. 유학의 도가 쇠퇴하는 시대에도 이황의 학문과 도는 여전히 보존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퇴계구곡 중 5곡 고등암 풍경. 고등암은 이황이 1549년에 지어 한동안 기거했던 한서암을 말한다. 한서암 아래에는 이황이 1551년에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던 계상서당이 자리하고 있다(위). 퇴계구곡의 2곡 양진암이 있던 곳 근처의 이황 묘. 양진암은 이황이 46세가 되는 1546년 벼슬에서 물러나 잠시 살았던 작은 집의 이름이다.
2018.04.05
[九曲기행 .15] 영천 횡계구곡(上)...횡계 산천 사랑한 두 형제…차갑고 맑은 물에 ‘세속 티끌’ 씻어내다
횡계구곡은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의 횡계(橫溪)에 설정된 구곡이다. 조선시대 학자인 훈수 정만양(1664~1730)·지수 정규양(1667~1732) 형제가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에 만들어 경영한 구곡이다. 두 형제의 호인 훈수(塤)와 지수()는 훈과 지라는 악기 이름에서 따왔는데, ‘훈지’는 형제간의 지극한 우애를 비유하고 있다. 두 사람은 영남 사림으로 퇴계학을 존숭했지만, 여러 다른 학자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윤증(1629~1714), 정제두(1649~1736) 등이다. 두 사람은 이처럼 폭넓은 교유를 통해 학문에 정진, 여러 분야에 두루 정통하게 되니 당시 사람들은 중국 송나라의 정호·정이 형제와 같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벼슬을 하지는 않고 고향에 은거하며 학문에 몰두하는 길을 택했다. 당시는 노론이 집권하고 있어 남인이 벼슬을 하는 것이 어렵기도 했다. ‘세상 풍파를 알지 못하고(世路風波也未知)/ 깊숙한 골짜기 한 곳에 우연히 깃드네(一區林壑偶棲遲)/ 시냇가에 바위 있어 낚싯대 드리우고(溪頭有石堪垂釣)/ 구름 밖 산이 많아 시를 읊조리네(雲外多山詠詩)/ 때로 절의 누각에 이르니 승려 말 부드럽고(時到寺樓僧語軟)/ 매번 차 주전자 기울이니 병든 몸에 마땅하네(每傾茶碗病軀宜)/ 날씨 개 창가에서 많은 책 다시 대하니(晴窓更對書千卷)/ 태고의 흉금은 복희에 있어라(太古胸襟在伏羲)’. ‘훈지양선생문집(塤兩先生文集)’에 있는 시 ‘술회(述懷)’이다. 두 사람의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정만양·정규양 형제가 만든 구곡정만양·정규양 형제가 언제 횡계구곡을 설정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횡계구곡에 옥간정(玉磵亭)과 태고와(太古窩)가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들이 지어진 후에 설정되었을 것이다. 태고와는 정규양 나이 35세(1701) 때 지었고, 옥간정은 50세(1716) 때 건립했다. 그렇다면 횡계구곡은 정규양의 나이 50세 이후에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35세에 횡계의 경치를 사랑해 대전리의 집을 옮겨 횡계에 거처를 정했다. 먼저 5곡의 와룡암 위에 집을 짓고 육유재(六有齋)라는 편액을 달았다. 정규양 나이 40세 때 정만양이 가족을 이끌고 횡계로 찾아와 동생과 작은 집에서 함께 거처하면서 강론을 했는데, 간혹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낚시를 하며 서로 즐거운 삶을 살았다.구곡이 있는 횡계는 보현산에서 비롯된 시내로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했으나, 상류에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지금은 물이 많이 흐르지 않는다. 대부분 암반으로 이루어진 시내로, 청송에서 흘러오는 옥계(玉溪)가 만나 자을천(玆乙川)이 된다.영천 대전리서 학문 몰두 정규양경치에 빠져 육유재 짓고 옮겨와5년후 형 만양 가족과 함께 거처벼슬 않고 은거하며 후학 강론도자연 관장 즐거움에 ‘구곡’ 설정‘산천을 관장하며 성령을 즐기는데(管嶺溪山樂性靈)/ 차갑게 흐르는 아홉 굽이 그 근원은 맑네(寒流九曲一源淸)/ 한가로이 찾아오니 미친 흥 주체할 수 없어(閒來不奈顚狂興)/ 천년 전 뱃노래 망령되이 이어보네(妄續千年櫂下聲)’문집에 있는 횡계구곡시의 서시다. 두 형제는 횡계의 산과 내를 거닐며 성정을 닦았다. 횡계의 차갑고 맑은 물에 세속의 티끌을 씻고 한가롭게 지내면서 그 즐거움에 빠져 1천년 전 주자가 무이구곡에서 읊었던 무이도가를 외람되게 한 번 흉내 내어 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구곡시 제목도 ‘주자의 무이도가의 운을 감히 사용해 횡계구곡시를 짓는다’는 의미의 ‘횡계구곡감용회암선생무이도가십수운(橫溪九曲敢用晦菴先生武夷櫂歌十首韻)’으로 정했다.‘일곡이라 배처럼 생긴 너럭바위 앉은 곳에(一曲盤巖坐似船)/ 두 시내가 합해 한 내를 이루네(雙溪合始成川)/ 도원은 진실로 산 높은 곳에 있거늘(桃源政在山高處)/ 다만 숲은 깊고 푸른 안개에 덮여 있네(只是林深幕翠烟)’1곡 쌍계(雙溪)를 읊고 있다. 쌍계는 옥계와 횡계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 지점에 널따란 바위가 있는데 배 모양을 하고 있는 반암이다. 주자가 배를 타고 무이구곡을 유람한 사실로 인해, 조선의 선비들도 실제 배를 타고 유람할 수 없는 구곡에서도 구곡시를 읊으면서 배를 타고 올라 유람을 시작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횡계구곡시도 1곡에서 배 모양의 바위를 거론하며 구곡유람을 시작하고 있다.횡계와 옥계가 만나 자을천을 이루는데, 두 형제는 옥계를 신계(新溪)라고 불렀다. ‘시내는 두 원류가 있으니 첫째는 횡계라 하고, 둘째는 신계라 하니 공암(孔巖) 아래에서 합류한다.’형제는 이 굽이에서 무릉도원이 횡계가 시작되는 산의 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구곡 유람을 시작한다. 그러나 구곡의 극처는 숲이 깊고 안개에 덮여 있어 그곳에 이르기는 쉬운 일이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이곡이라 물결은 잔잔하고 봉우리 늘어서 있어(二曲潺湲列數峰)/ 공암 바위 빛은 유난히 빼어난 모습이네(孔巖巖色別修容)/ 산허리에 길이 걸려 그윽하고 빼어난데(山腰路卦添幽絶)/ 인간세상 돌아보니 몇 겹이나 막혔던가(回首人間隔幾重)’2곡은 공암(孔巖)이다. 쌍계에서 600m 정도 횡계를 따라 올라간 지점에 있다. 시냇가 바위가 구멍이 많이 나 있어 공암이라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공암에 살고 있는 이무기가 이 바위 구멍을 통해 산 너머 계곡으로 흐르는 옥계를 오갔다고 한다. 공암 앞의 산이 이남산(尼南山)이다.그런데 두 사람의 문집을 보면 2곡의 공암은 단순한 구멍 바위가 아니라 공자를 상징하는 바위를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지은 시 ‘아니산(阿尼山)’이다.‘이산은 만고에 우뚝한데(尼山萬古立)/ 그 아래 공암이 있네(其下孔巖存)/ 후학은 다만 우러러보기만 하고(後學徒瞻仰)/ 문하에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네(還嗟未及門)’횡계구곡에서 공암은 일반적인 바위가 아니라 학문에 정진하는 후학들이 바라보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도록 한 공자 바위로 설정한 것이다.현재의 공암은 도로를 내면서 많이 파손되어 아랫부분만 남게 되었다.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는데, 옛날에는 횡계 가에 공암이 높이 솟아 있고, 뒤로 이남산이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다고 한다.◆3곡 태고와는 정규양이 1701년에 건립한 누각 ‘삼곡이라 깊은 제방 배를 띄울 만하고(三曲深堤可汎船)/ 움집 중 태고와는 몇 년이나 되었는가(窩中太古是何年)/ 진수재의 일은 모름지기 서로 힘쓰는 것이니(進修一事須相勉)/ 많은 영재들 나는 가장 아낀다네(多少英才我最憐)’3곡 태고와이다. 제방은 홍류담을 말한다. 홍류담 가에 세워진 정사가 태고와이다. 지수가 35세 되던 해인 1701년에 건립한 누각이다. 본래 태고와라 했는데, 1730년 제자들이 개축한 뒤 모고헌(慕古軒)이라 불렀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 건물로 사방에 툇간을 두른, 독특한 정사각형 평면구조이다. 중앙에 작은 방이 있다. 이 누각 뒤에는 1927년에 후손들이 건립한 횡계서당이 있다.두 사람은 이 시의 주석에 ‘제3곡은 태고와(太古窩)와 진수재(進修齋)가 있다’고 적고 있다. 태고와 앞의 홍류담은 물의 깊이가 제법 깊어 당시에는 배를 띄울 만했다. 그래서 실제 두 사람은 이곳에서 배를 띄우기도 했다. ‘8월에 작은 배가 비로소 이루어지니 대체로 서당 제군의 힘이다. 16일 밤에 산의 달이 매우 밝아 시험 삼아 제군과 더불어 배를 띄우고 홍류담에서 노닐며 뱃머리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니 생각이 초연하여 율시를 읊어서 제군에게 사례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횡계구곡 중 3곡에 있는 태고와(太古窩). 정규양이 1701년에 지은 누각으로 횡계 바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두 형제는 태고와 앞 홍류담에서 뱃놀이를 하기도 했다.
2018.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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