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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曲기행 .14] 안강 옥산구곡(下)...관어대 위엔 독락당 계정…숲·바위·맑은물 어울러진 ‘仙界’
‘사곡이라 원천이고 태암이니(四曲原泉又泰巖)/ 학전은 어느 때 봉황의 모습이었나(鶴何日鳳儀)/ 적은 물이 바다에 이르는 천리 길에(涓到海心千里上)/ 시냇물은 밤낮으로 빈 못으로 들어가네(晝夜川流入空潭)’4곡 공간(孔澗)을 노래하고 있다. 공간은 세심대에서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데, 구멍이 난 바위가 많은 시내라는 의미다. 이 시를 이해하려면 ‘맹자’의 글이 필요하다.‘근원이 좋은 샘물은 용솟음쳐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아, 파인 웅덩이를 가득 채우고 난 뒤에 넘쳐흘러 나아가 바다에 이른다. 학문의 길에 근본이 있음은 이와 같으므로 이것을 취한 것이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是之取爾).’‘물을 보는 데는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여울목을 보아야 한다. 해와 달은 밝음이 있으니 빛을 용납하는 곳은 반드시 비추는 것이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가 차지 않으면 흘러가지 않는다. 군자가 도를 추구함에도 문장을 이루지 않으면 통달하지 못한다(觀水有術 必觀其瀾 日月有明 容光必照焉 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이가순은 이곳에서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웅덩이를 채우고 나서야 넘쳐흘러 바다로 나아가는, 근원이 좋은 물처럼 학문을 성취하고 도를 이루려는 뜻을 다지고 있다.5곡 관어대물고기 바라보며 즐거움 깨달아이언적 ‘독락’‘계정’ 詩로 노래7곡 징심대맑고 차가운 물 쉼없이 흘러들어자신의 도심 지닐 수 있도록 다짐◆오곡 관어대에 자리한 계정(溪亭)‘오곡이라 시냇가 정자는 경계가 더욱 깊어(五曲溪亭境更深)/ 꽃에 물 주고 대나무 기르니 원림이 풍성하네(花剖竹園林)/ 종일토록 관어대에서 물고기의 즐거움 깨달으니(臨臺永日知魚樂)/ 활발한 천기는 성인의 마음과 계합하네(活潑天機契聖心)’5곡 관어대는 계정이 자리한 암반이다. 독락당에 딸린 정자가 계정이다. 물고기를 바라보는 누대라는 의미의 관어대 위에 계정이 서 있다. 관어대 앞으로는 맑은 물이 천천히 흐르면서 제법 넓은 못을 이룬다. 숲과 바위, 맑은 물이 어울려 선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언적은 이곳을 ‘관어대’라 이름 짓고 계정을 지어 물고기를 바라보며 도를 닦았을 것이다.이언적이 지은 시 ‘독락(獨樂)’이다.‘무리를 떠나 누구와 함께 읊조릴까(離群誰與共吟壇)/ 바위 위의 새와 시내의 물고기는 내 얼굴을 익히 아네(巖鳥溪魚慣我顔)/ 그 가운데 빼어난 곳 알고자 하니(欲識箇中奇絶處)/ 자규새 소리 속에 달이 산을 엿보네(子規聲裏月窺山)’이언적은 정자를 읊은 시 ‘계정(溪亭)’에서는 이렇게 노래한다.‘숲 곁에서 우는 그윽한 새 소리 기쁘게 들으며(喜聞幽鳥傍林啼)/ 새로 띠집을 작은 시내 옆에 지어(新構茅壓小溪)/ 홀로 술 마시며 다만 밝은 달 맞아 짝하니(獨酌只激明月伴)/ 한 칸에 오로지 흰 구름과 함께 깃드네(一間聊共白雲棲)’이가순은 관어대에서 이곳에서 노닐던 이언적의 경지를 그려보고 있다.‘육곡이라 떨어지는 한 굽이 맑은 물결이여(六曲懸流玉一灣)/ 맑은 하늘 우레와 날리는 우박 솔숲을 뒤덮네(晴雷飛雹掩松關)/ 동천은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어(洞天逈與人煙隔)/ 태극서 이뤄지고 일월이 한가하네(太極書性日月閑)’6곡 폭포암을 노래하고 있는데, 지금은 이런 모습을 그려보기 어려운 환경이다. 이가순은 인간세상을 떠난 것 같았던 이곳에서 한가한 자연의 이치가 드러남을 읊고 있다.◆칠곡은 마음을 깨끗이 하는 징심대‘칠곡이라 징심대는 푸른 여울에 비치고(七曲澄臺映碧灘)/ 신령스러운 근원 한 점 거울 속에 보이네(靈源一點鏡中看)/ 하늘과 구름은 밤낮으로 참다운 모습이니(天雲日夜眞光景)/ 작은 못에 차가운 활수가 더해지네(添得方塘活水寒)’7곡 징심대에서는 맑고 차가운 물이 쉼 없이 흘러들어 시내가 맑은 것과 같이 자신도 쉼 없는 활수, 즉 도심을 지닐 수 있도록 다짐하고 있다.이언적도 이곳에서 맑은 물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었기에 ‘징심대’라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팔곡이라 차가운 못은 바위 안고 흐르니(八曲寒潭抱石開)/ 티끌 묻은 갓끈 다 씻고 물길 따라 도네(塵纓濯盡任沿)/ 내게 베풀어진 광명 다함이 없는데(光明惠我垂無極)/ 묘처를 누가 능히 체험하리(妙處誰能體驗來)’8곡 탁영대는 시내 양쪽에 바위가 마주하고 있는 굽이다. 시내가 바위 때문에 좁아지고 두 바위 사이로 시냇물이 완만하게 흘러간다. 한쪽 바위 위에는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넓은 공간이 있다. 이가순은 탁영대에서 하늘이 베풀어준 광명, 밝은 덕을 밝혀 묘처(妙處)에 이르고자 하였다.탁영(濁纓)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시인이자 정치가인 굴원의 ‘어부사(漁父辭)’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을 것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것이다(滄浪之水淸兮 可以濁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옥산십사영(玉山十四詠)을 읊은 소재 노수신은 이 탁영대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이 물은 원래 절로 맑고(此水元自淸)/ 이 마음 원래 절로 밝네(此心元自明/ 맑음과 밝음 날로 서로 비추니(淸明日相映)/ 외물은 티끌 묻은 갓끈이네(外物是塵纓)’‘구곡이라 산 높고 땅은 경계가 분명하니(九曲山高地截然)/ 복사꽃 눈에 가득하고 해오라기 냇가에 졸고 있네(桃花滿眼鷺眠川)/ 신령한 사자 한 번 울어 뭇 생명 놀라게 하여(靈獅一吼驚群蟄)/ 만고의 혼돈 세계를 거듭 연다네(重闢渾淪萬古天)’9곡 사암은 옥산구곡의 마지막 굽이인 극처이다. 복사꽃이 가득 피어있고 해오라기는 시내에서 졸고 있다며 신선 세계인 것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자의 포효가 혼돈의 세계를 새롭게 열듯, 성리학의 도가 널리 퍼져 태평한 세상이 펼쳐지기를 희망했다.사암(獅巖: 사자바위)은 옥산 저수지 왼쪽 수구(水口) 부분에 있는 바위다. 지금은 저수지 축조 과정에서 많이 파괴된 상태다. 사암 맞은편에 호암(虎巖)이 있다. 옛날 호암 부근에 호랑이가 자주 출몰해 사람들을 해쳤는데, 이언적 선생이 맞은편 바위를 사자바위라고 명명한 뒤 호랑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오곡 관어대에 자리한 계정과 주변 풍광. 계정은 이언적이 42세 때 자옥산 아래 지어 거처로 삼았던 독락당에 딸린 정자다.
2018.02.22
[九曲기행 .13] 안강 옥산구곡(上)...‘동방오현’ 이언적 은거지…死後 250여년 뒤 이가순이 아홉굽이 명명
옥산구곡(玉山九曲)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옥산천(玉山川)에 설정된 구곡으로, 회재(晦齋) 이언적(1491~1553)의 유적이 그 중심이다. 옥산서원과 독락당 등 이언적의 자취가 남아 있는 옥산천에 설정된 구곡이지만, 이언적이 설정하고 경영한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하계(霞溪) 이가순(1768~1844)이 설정한 구곡이다. 이가순은 옥산서원을 방문한 뒤 이언적의 은거지에 구곡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옥산구곡을 설정하고 옥산구곡시를 지었다. 이가순이 언제 옥산을 방문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언적 사후 250여 년 뒤에 이황의 학문에 큰 영향을 끼친 이언적의 은거지를 방문해 옥산천 일대를 유람하고 옥산구곡을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설정한 옥산구곡은 이언적의 자취가 남아 있는 굽이였다.◆회재 이언적 은거지에 설정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난 이언적은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유학자다. 주자를 흠모해 자신의 호를 주자의 호인 ‘회암(晦庵)’에서 따와 ‘회재(晦齋)’로 지을 정도였지만, 학문적으로는 독창적인 성리학의 세계를 주창했다.경주 안강의 독락당(獨樂堂) 일대는 그가 김안로와 대립하며 관직에서 밀려나 있을 때 은거한 곳이다. 이언적은 42세 때 자옥산 아래 독락당을 지어 살면서 주변 바위들을 선정해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선생은 젊어서 그곳의 바위 골짜기가 괴이하고 시내 못이 청결한 것을 사랑했는데, 이때에 비로소 시냇가에 집을 지으니 수십 칸이다. 가난하여 공사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오랜 시간이 지나서 완공하고 독락당이라 이름하였다. 다섯 대를 두고 탁영대, 징심대, 관어대, 영귀대, 세심대라 하였다. 또 관어대 위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첫째 칸은 정관재(靜觀齋)라 하고, 둘째 칸은 계정(溪亭)이라 하였다. 정자 전후에 소나무, 대나무, 꽃과 풀을 심고 날마다 그사이에서 읊조리고 노닐거나 낚시하며 세상의 어지러움을 사절하였다.’ <회재선생연보>이언적 경주 양동마을서 출생조선 성리학 토대 마련 유학자자옥산 아래 독락당 짓고 살아주변 바위 선정 이름 붙이기도後代 옥산서원 방문한 이가순‘이언적 바위’ 중심 구곡 설정옥산구곡시 지어 이상향 노래이가순은 이언적이 명명한 지점을 중심으로 구곡을 설정, 성리학적 이상세계로 만들려고 했다. 옥산구곡은 제1곡 송단(松壇), 제2곡 용추(龍湫), 제3곡 세심대(洗心臺), 제4곡 공간(孔澗), 제5곡 관어대(觀魚臺), 제6곡 폭포암(瀑布巖), 제7곡 징심대(澄心臺), 제8곡 탁영대(濯纓臺), 제9곡 사암(獅巖)이다.이가순은 서시에서 이언적의 은거지인 옥산구곡을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유한다.‘신령함을 기르기 좋은 곳 원기 넘치는 경주땅(元氣東都好毓靈)/ 자옥산은 첩첩 자계는 맑다네(紫山增重紫溪淸)/ 외로운 배로 진원을 거슬러 오르려니(孤舟欲眞源去)/ 뱃노래 소리 새로이 굽이굽이 들리네(乃新聆曲曲聲)’자산(紫山)은 자옥산, 자계(紫溪)는 옥산천을 말한다. 동도(東都)인 경주는 신령한 기운이 넘쳐 자옥산이 깊고 옥산천이 맑다고 읊은 뒤, 외로운 배로 옥산천을 거슬러 올라 도의 근원에 이르고자 하니 뱃노래 소리가 굽이마다 들린다고 노래하고 있다. 뱃노래는 바로 주자가 무이구곡을 거슬러 오르며 불렀던 노래 ‘무이도가’를 말한다. ◆설정자 이가순의 옥산구곡시‘일곡이라 낚싯배 매어두고 송단에서 읊조리다가(一曲吟壇繫釣船)/ 긴 옥산천에 비친 화산을 돌아본다(回看華岳映長川)/ 낯익은 물고기와 새를 신경 쓰는 이 없고(慣顔魚鳥無人管)/ 푸른 소나무 저녁 안개 속에 서 있을 뿐(只有蒼松立暮煙)’1곡 송단은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옛길 초입에 있는, 시냇물이 깊어지는 곳이라고 한다. 화산은 화개산이고, 장천은 옥산천을 말한다. 낯익은 물고기와 새를 신경 쓰는 이가 없다는 것은 이언적이 별세하고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살아있지 않고 그 기상을 대신하는 푸른 소나무 몇 그루만 남아 있을 뿐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다.‘이곡이라 영추가 여러 봉우리를 곁에 두고(二曲靈湫傍亂峰)/ 긴 세월 우레비 내려 폭포 되네(長時雷雨任春容)/ 모든 사람들 간절히 운예를 바라는데(蒼生擧切雲霓望)/ 누가 상암을 구중과 막히게 했는가(誰遣商巖隔九重)’2곡 용추는 옥산서원 앞 마을 입구에 있는 작은 폭포다. 폭포가 떨어지는 지점에 제법 깊은 못이 형성돼 있다. 운예(雲霓)는 비가 내릴 조짐을 말하는데, 가뭄에 단비처럼 백성들을 잘 다스려줄 위정자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이언적을 말한다. 어진 선비를 말하는 상암(商巖)도 이언적을 의미하고, 구중은 조정을 뜻한다. 누가 이언적이 조정에 나아가 경륜을 펼치지 못하게 막았는가 하는 말이다. 상암은 부열(傅說)의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부열이 죄를 지어 노역에 끌려가서 길을 닦고 있었는데, 상왕(商王)이 그를 찾아내 재상으로 등용해 나라를 잘 다스렸다는 고사다. 재야의 어진 선비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삼곡이라 세심대는 달을 실은 배 하나(三曲心臺月一船)/ 진실로 정일(精一) 전한 지가 천년이네(眞傳精一自千年)/ 인을 체득해 선천의 학문 알게 되니(體仁會得先天學)/ 무변루의 바람과 달 더욱 어여쁘네(風月無邊更可憐)’3곡 세심대는 이언적을 기리는 옥산서원 옆 시내의 너럭바위다. 이가순은 세심대에서 1천년 전의 학문, 즉 공자의 도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옥산서원 무변루의 바람과 달이 새롭게 보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정일(精一)은 도심(道心)을 말한다. 세심대 굽이에는 작은 소인 용추 옆 바위에 ‘용추(龍湫)’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이 용추는 2곡 용추와 같은 이름인데 2곡 용추는 하용추, 3곡의 용추는 상용추라고 한다. 용추 글씨는 이황의 글씨라고 한다. 그리고 너럭바위 가운데 있는 작은 바위에는 ‘세심대(洗心臺)’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글씨 역시 이황 글씨다. 옥산서원은 1573년에 이언적을 기려 창건되었고, 1574년에 사액받았다. 서원 강당 처마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것이고, ‘무변루(無邊樓)’ ‘구인당(求仁堂)’ ‘암수재(闇修齋)’ 등은 한석봉 글씨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옥산구곡의 삼곡인 세심대의 작은 소(沼)인 용추. ‘마음을 씻는 대’라는 의미의 세심대는 옥산서원 옆에 있는 계곡의 암반인 너럭바위다. 이곳에는 이황의 글씨를 음각으로 새긴 ‘세심대(洗心臺)’와 ‘용추(龍湫)’를 확인할 수 있다.세심대 옆에 자리한 옥산서원.
2018.02.01
[九曲기행 .12] 봉화 춘양구곡(下)...높고 깊은 ‘창애’는 선비를 품고…들판 여는 ‘한수정’엔 선현의 자취
3곡은 풍대(風臺)다. 2곡 사미정에서 도로를 따라 600m 정도 상류로 올라가면, 냇가에 자리한 10m 높이의 큰 바위가 보인다. 풍대다. ‘어풍대(御風臺)’라고도 불렀다. 이곳에는 풍대 홍석범이 학문을 닦으며 제자를 가르치던 어풍대가 있었지만 이한응 당시에 이미 없었다. 이한응은 3곡시와 관련해 ‘홍풍대가 창건한 정사는 훼손된 지 오래다. 바위 봉우리가 매우 기이하다’고 적고 있다.‘삼곡이라 풍대는 배를 얹어놓은 듯(三曲風帶架若船)/ 신선이 배를 잘못 몰아 찾게 된 지 몇 년이나 되었나(冷然神御枉何年)/ 시내는 끊임없이 흐르고 바위 언덕 영원한데(波流不盡巖阿古)/ 우는 새 지는 꽃들 모두 가련하여라(啼鳥落花摠可憐)’이 시의 ‘가약선(架若船)’은 주자의 ‘무이도가’ 중 3곡시에 나오는 ‘가학선(架壑船)’을 떠올리게 한다. 가학선은 중국 고대 고월인(古越人)들이 시체를 안장하던 관이다. 이 목관은 깎아지른 높은 절벽에 안치했는데 지금도 무이산에 가면 볼 수 있다.5곡 창애정냇가 바위 벼랑 맞은편에 지어정면 4칸 측면 3칸 춘양목 정자 이중광 은거하며 선비들과 풍류8곡 한수정1608년 지은 춘양 의양리 정자권벌이 세운 거연헌 있던 자리소실 후 손자 권래가 다시 지어이 풍대 근처에는 조덕린의 제자 옥계(玉溪) 김명흠(1696~1773)을 기리기 위해 지은 옥계정(玉溪亭)이 있다. 졸천정사(拙川精舍)라고도 한다. 옥계정 뒤에는 옥계고택이 자리하고 있다.4곡은 풍대에서 80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나타나는 바위 벼랑 앞의 소(沼)인 연지(硯池)다. ‘사곡이라 연지에 바위 비치니(四曲硯池印石巖)/ 갈매기 맹세와 물고기 즐거움 매일 좋구나(鷗盟魚樂日)/ 마치 청련거사의 시 구절 베껴 쓰듯(若敎依寫靑蓮句)/ 도도한 물결 지금도 못을 가득 채우네(滔滔如今自滿潭)’갈매기 맹세는 은거를 다짐한 마음을 비유한다. 이한응은 4곡에서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노래하고 있다. 청련(靑蓮)은 당나라 시인 이백을 말한다.◆5곡 창애정은 이중광 은거하던 곳 5곡은 냇가에 우뚝 솟은 바위 벼랑 창애(蒼崖)다. 연지에서 1㎞ 정도 떨어져 있다. 창애 벼랑에는 유려한 필치의 한자 ‘수운동(水雲洞)’이 새겨져 있다. 창애 맞은편 밭 가운데 창애정(蒼崖亭)이 자리하고 있다. 창애 이중광(1709~1778)이 은거하며 당대의 선비들과 풍류를 즐기고 제자를 가르치던 정자로, 춘양목을 사용해 지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ㄱ자형 기와집이다. 창애정에 걸린 시판 ‘창애정’의 내용이다.‘한없는 청산 속에 자유롭게 놀던 몸이(無限靑山自在身)/ 어이해 오릉의 손님이 되었던가(如何來作五陵賓)/ 내일 아침 말 타고 청산에 돌아가면(明朝騎馬靑山去)/ 여전히 청산속 사람 되려하네(依舊靑山影菓人)’이한응은 창애의 풍광을 보며 5곡시를 읊었다.‘오곡이라 창애는 높고 깊어서(五曲滄崖高且深)/ 병풍으로 가리듯 운림을 숨겼네(由來屛隱鎖雲林)/ 창애 그림자 속 사람은 어디 갔는가(依然影裏人何處)/ 홀로 선 청산 변함없는 마음일세(獨立靑山萬古心)’6곡은 쌍호(雙湖)다.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방전마을에 있다. 명칭이 두 개의 소가 있다는 뜻이지만, 지금은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옛날에는 물길이 두 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냇가 한쪽에 작은 산이 하나 있는데 독산(獨山)이다. 독봉(獨峰), 고봉(孤峰) 등으로 불리는 바위 산이다. 이한응은 6곡시 설명에서 ‘봉우리의 옛 이름은 삼척봉이다. 나의 벗 홍치기가 여기를 차지하고 쌍호정을 지었다’고 적고 있다. 삼척봉이라 한 것은 삼척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독산 아래에는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확보하는데 큰 공을 세운 봉계(鳳溪) 홍세공(1541~1598)을 모신 사당인 당성사(唐城祠) 등 남양홍씨 유적들이 있다.‘육곡이라 두 시내가 바위 물굽이를 감돌고(六曲雙溪繞石灣)/ 외로운 봉우리 가운데 솟아 관문이 되었네(孤峰中突作中關)/ 상전벽해 오랜 세월 원래 그러하니(桑瀛浩劫元如許)/ 이 동천 안의 별천지 절로 한가롭네(壺裏乾坤自在閑)’시를 보면 운곡천 물굽이가 독산 양쪽으로 빙 둘렀음을 알 수 있다. 독산이 관문이 되었다는 것은 여러 갈래 길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7곡은 서담이다. 이한응은 7곡시 주석에 ‘이 굽이는 옛날 서당의 터가 되니 이로 인해 못의 이름을 삼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서당 터도 확인할 수 없다.‘칠곡이라 서담 물은 여울로 흘러들고(七曲書潭注入灘)/ 붉은 절벽 푸른 빛 머금어 달리 보이네(丹崖涵碧更殊看)/ 선을 생각하던 당시의 즐거움 안타깝구나(憐觀善當時樂)/ 성색이 부질없이 맑고 학의 꿈 차갑네(聲色空淸鶴夢寒)’◆권벌의 얼이 서린 8곡 한수정 8곡 한수정(寒水亭)은 춘양면 의양리에 있다. 한수정은 1608년에 세워진 정자다. 원래 이 자리에는 충재 권벌(1478~1548)이 세운 거연헌(居然軒)이라는 정자가 있던 자리로, 그 정자가 소실된 후 권벌의 손자인 권래가 다시 세웠다. 연못과 대, 고목들이 잘 어우러진 정자다. 권벌은 강직한 선비로 이름을 떨치며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문신으로,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불천위에 오른 영남의 대표적 선비다.이한응은 ‘정자는 한수정이라 부르고 헌은 추월헌이라 부르고, 대는 초연대라고 하였다. 또 연못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한응은 이곳에서 선현 권벌을 떠올리며 이렇게 노래한다.‘팔곡이라 한수정은 넓은 들판이 열리는 곳(八曲寒亭弟野開)/ 선계의 초연대가 문득 맑은 물굽이 굽어보네(仙臺超忽俯澄)/ 사람들아 선현의 자취 멀어졌다 한탄 말게(遊人莫歎遺芳遠)/ 가을달 밤마다 연못 속으로 찾아온다네(秋月潭心夜夜來)’한수정에서 운곡천을 90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9곡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이른다. 도연서원은 정구(1543~1620)와 허목(1595~1682), 채제공(1720~1799)을 기리던 곳이었는데 1858년에 훼철되었다.지금 그 자리에는 두 개의 삼층석탑이 서 있다. 봉화서동리삼층석탑(보물)이다. 이곳은 신라 고찰이던 남화사(覽華寺) 터로 알려져 있다. 절터에 서원이 들어섰고, 지금은 춘양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도연은 도가 비롯되는 연못이라 의미다.‘구곡이라 도연서원 호연한 기상 있구나(九曲道淵更浩然)/ 봄날 누대에서 아득히 긴 시내를 굽어보네(春樓遞見長川)/ 서원은 여전히 궁궐의 담장처럼 남아 있고(依舊賴有宮墻在)/ 십리 풍연은 거울 속 하늘 같네(十里風烟鏡裏天)’춘루(春樓)는 서원에 있던 청풍루이고 장천은 운곡천을 말한다. 청풍루에 올라 서원 앞을 돌아 흘러가는 운곡천을 바라보며 도가 멀리 영원히 흘러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춘양구곡 중 5곡 창애정(위쪽)과 8곡 한수정. 춘양구곡은 앞선 선비들의 유적을 중심으로 설정되었다.
2018.01.18
[九曲기행 .11] 봉화 춘양구곡(上)...봉화 운곡천 9㎞ 굽이굽이마다 ‘구곡’…선비들 은거 정자 중심으로 설정
봉화는 깊은 산골이지만 선비들의 숨결이 곳곳에 남아있는 고장이다. 운곡천(雲谷川)은 그 숨결이 스며있는 대표적 하천이다. 운곡천은 태백산 줄기인 문수산(1천206m), 옥석산(1천242m), 각화산(1천177m) 등에서 발원해 춘양면 서벽리와 애당리를 적시고, 법전면 소천리를 거쳐 명호면 도천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춘양구곡은 경암(敬巖) 이한응(1778~1864)이 운곡천 9㎞에 걸쳐 설정하고 경영한 구곡이다. 이한응은 서예와 시문에 뛰어났으며, 법전면 녹동마을에 있는 계재(溪齋)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며 제자 양성에 주력했다. 이한응의 학문은 오로지 경(敬)에 있었다. 그는 성인(聖人)과 광인(狂人)의 구분은 단지 경과 일(逸)에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경을 중시해 자신의 호도 경암이라 지었다.◆선비들이 은거한 정자 중심으로 구곡 설정춘양구곡은 앞서간 학자들이 은거한 정자나 정사가 있는 굽이를 중심으로 설정했다. 깊은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도가 면면히 전해 내려오는 것을 자랑스럽게 드러내려 한 것이다. ‘춘양은 신령한 골짜기와 맑은 시내를 가졌다. 춘양의 물은 태백산 서남 두 계곡으로부터 흘러오다가 남으로 흘러 낙동강으로 합해져 수백 리를 흐른다. 태백산은 신령하고 빼어남이 충만한데 춘양이 그 중심에 있음으로써 그윽하고 깊을 뿐만 아니라 시내가 흐르면서 가경을 이루고 있다.’이한응은 ‘춘양구곡시’ 서문에서 이렇게 운곡천 주변의 자연환경을 이야기한 뒤 “우리 현은 비록 처한 곳이 궁벽하나 덕이 높은 유현이 많이 이어나고, 우아한 풍절은 성대하게 세상의 희망이 되는지라, 이미 각각 장수(藏修)하는 임학(林壑)과 평장(平章)하는 수석(水石)이 은구(隱求)와 양진(養眞)의 장소가 되었으니, 이것은 그 산과 물의 만남이 진실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 때문에 춘양의 산수가 세상에 이름난 것이 이미 오래다. 그 유풍과 여운이 아직 사라지지 않으니 내가 볼 수 있고, 이제 또 공허한 저 계산(溪山)의 토구(중국 노(魯)나라 고을 이름으로 은거처를 뜻함)는 정히 두보 선생이 말한 ‘문조(文藻)는 비웠다’는 것이다. 이제 내가 퇴락하여 은거함에 매번 서호의 꿈이 있었으나 심중을 토로할 길이 없었다. 이에 어은(漁隱)에서 도연(道淵)까지 구곡을 정하고 삼가 무이도가 운에 차운해 각각 한 장을 짓고, 장난삼아 여러 명사에게 주어서 서로 화운하게 하여 춘양의 산수고사(山水故事)를 삼는다”며 구곡을 설정하고 시를 짓는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다. ‘서호의 꿈(西湖之夢)’은 중국 항저우 서호에서 평생 매화를 아내로, 학을 자식으로 여기는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은거하며 살다 간 송나라 시인 임포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말이다.경암은 춘양이 비록 외진 고을이나 학덕이 높은 선비를 많이 배출하고 풍속과 예절이 우아해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고을이라 했다. 성리학의 도가 구현되는 공간이고, 그래서 은구와 양진의 장소가 되는 곳이라는 것이다. 실제 춘양구곡은 굽이마다 덕이 높은 선비가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친 유적이 남아있다. 아홉 굽이를 설정하고 거슬러 올라가며 구곡시를 지은 것은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춘양구곡이 평범한 공간이 아니라 성리학의 도가 전개되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담아낸 것이다.춘양구곡은 1곡 어은(漁隱), 2곡 사미정(四未亭), 3곡 풍대(風臺), 4곡 연지(硯池), 5곡 창애(滄崖), 6곡 쌍호(雙湖), 7곡 서담(書潭), 8곡 한수정(寒水亭), 9곡 도연서원(道淵書院)이다.◆이한응의 춘양구곡시이한응은 춘양구곡시 서시에서 이렇게 읊는다.‘태백산 남쪽은 맑고 신령스러우니/ 발원(發源)이 어찌 청결하지 않겠는가/ 춘양의 평평한 들판에 구불구불 흘러서/ 굽이마다 구역을 이루어 대대로 도가(櫂歌) 소리 있네.’태백산의 맑고 신령한 기운을 받은 물이 흘러와 춘양의 들판을 흘러가며 아홉 굽이를 이룬 곳에 덕 높은 선비들이 깃들어 살면서 학문을 닦았으니, 어찌 주자의 무이도가 소리가 대대로 이어지지 않겠는가라고 노래하고 있다.춘양구곡의 1곡은 어은이다. 법전면 어은리에서 한참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운곡천에 있다. 사미정 골짜기에서 내려갈 수도 있고, 명호면 쪽에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어은에 이르면 계곡과 산이 어우러져 절경이 펼쳐진다. ‘일곡이라 적연은 배 띄울 수 있으니(一曲笛淵可以船)/ 옥순봉 아래에서 어천으로 들어가네(玉荀峰下注漁川)/ 유선이 한 번 떠난 뒤로 찾는 사람 없으니(儒仙一去無人訪)/ 그 발자취 부질없이 무학봉 운무에 남아 있네(芳空留舞鶴烟).’이한응은 주석에서 ‘적연 위의 석봉을 옥순봉이라 한다. 눌은 이광정이 정자를 지어 어은정이라 했다. 북쪽 언덕에 무학봉이 있다’고 적었는데, 정자는 사라지고 없다. 옥순봉이나 무학봉이란 명칭의 봉우리 이름도 지금은 없다고 한다.2곡 사미정은 어은에서 1㎞ 정도 올라가면 나온다. 시내가 넓어지며 물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다. 이 굽이의 바위 언덕 위에 사미정이 날아갈 듯이 앉아있다. 요즘은 이 주변의 계곡을 ‘사미정계곡’이라 부른다.사미정은 옥천(玉川) 조덕린(1658~1737)이 말년에 지은 정자다. 조덕린은 1691년 문과 급제 후 사관·교리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당쟁에 휘말려 여러 번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1725년 노론과 소론의 당쟁이 거세져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소를 올리자 영조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보냈다. 조덕린은 이때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면 사미정을 지을 것을 계획했다.“내가 종성에 유배된 지 3년, 그해가 정미가 되고 그해 6월이 정미가 되고 그달 22일이 정미가 되고 그날 미시가 또 정미가 되었다. 이런 날을 만나면 무릇 경영하는 자는 꺼리지 않았고, 음양가는 이런 날을 존중해 만나기 어렵다고 여겼다. 내가 이때 중용을 읽다가 공자의 말씀에 ‘군자의 도가 4가지인데 나는 그중에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고 하는 데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여 ‘성인은 인륜이 지극한데도 오히려 능하지 못하다 하는데 우리들은 마땅히 어떠한가’라고 토로했다. 마침 이런 일시를 만나 한 움집을 지어서 살려고 생각하며 ‘사미’라고 이름 지었다.”조덕린의 ‘사미정기’ 내용이다. 조덕린의 이런 정신은 후세에 이어지고, 사미정은 영남 사림의 공부 장소가 되었다. 정자 처마에 걸린 현판 ‘사미정(四未亭)’과 정자 안 현판 ‘마암(磨巖)’의 글씨는 번암 채제공(1720~1799)의 친필이라고 한다. 사미정에서 보는 운곡천 계곡은 울창한 숲과 바위, 맑은 물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랑한다.‘이곡이라 옥천 시냇가 산봉우리(二曲玉川川上峰)/ 그윽한 초당에서 마주하니 사람 얼굴 같네(幽軒相對若爲容)/ 갈아도 닳지 않는 너럭바위 위로는(磨而不盤陀面)/ 천고에 빛나는 밝은 달빛이 비치네(千古光明月色重).’이한응은 사미정 굽이에서 정자 주인공인 조덕린을 그린다. 옥천은 조덕린의 호이면서 운곡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유헌(幽軒)은 사미정을 말한다. 산봉우리는 조덕린 모습 같고, 너럭바위처럼 변하지 않는 조덕린의 덕은 밝은 달빛처럼 영원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춘양구곡 중 2곡의 중심인 ‘사미정(四未亭)’. 사미정은 옥천 조덕린이 지어 은거한 정자다(작은 사진). 사미정에서 바라본 사미정계곡.
2018.01.04
[九曲기행 .10] 화양구곡(下)...‘금모래 옥돌 깔린 세상 밖 선경’…우암 8세손도 찾아 절경 읊어
우암 송시열의 후손인 수종재(守宗齋) 송달수(1808~58)의 문집인 ‘수종재집(守宗齋集)’에 실린 ‘화양구곡차무이도가운(華陽九曲次武夷棹歌韻)’(1844년 작)의 내용을 소개한다. 화양구곡의 당시 풍광과 역사, 작자의 생각 등을 잘 알 수 있는 글과 시다. 송달수는 송시열의 8세손으로 1852년 경연관(經筵官)과 사헌부 관리 등을 역임하였으며, 1855년 승지에 이어 이조참의에 이르렀다. 학문에 힘써 예학과 성리학에 밝았다.◆1844년에 쓴 송달수의 화양구곡기화양동 구곡의 시냇물은 동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오다가 괴강(槐江)에 든다. 처음엔 두 물줄기가 멀리서부터 구불구불 흘러오는데, 선유동과 송면(松面) 사이에 합류하고, 파곶(巴串)에 이르면 점점 평평하게 펴져서 흐른다. 계곡은 온통 암반이며 바닥의 돌은 모두 희다. 그 가운데 갈라진 틈 사이로 시냇물이 흐르는데, 그 모양이 ‘곶(串)’ 자와 같다. 파곶이란 이름은 이 때문일 것이다.파곶에서 왼편으로 조금 내려가면 석봉(石峯)이 갑자기 높이 솟아 있고, 봉우리 위엔 가로로 걸터앉을 만한 커다란 돌이 있다. 위쪽 흙이 조금 덮여있는 곳에 푸르고 무성한 노송이 있다. 이곳이 학소대이다. 옛날 청학(靑鶴)이 새끼를 치기 위해 보금자리를 만든 곳이라고 한다.학소대 아래로 한 굽이 휘어져 꺾인 곳부터 오른쪽으로 커다란 너럭바위가 수변에 누워있는데 와룡암이다. 와룡암에서 두세 번 굽이 돌아 내려가면 우측에 능운대가 있고, 좌측에 첨성대가 보인다. 능운대 위는 산기슭에 닿아 있고, 아래로는 시냇물에 다다른다. 한 덩어리의 바위가 우뚝 솟아 대를 이루는데, 족히 수십 명은 앉을 수 있겠다. 나무는 바위틈으로 무성하게 자라 그늘을 드리웠는데, 옷깃을 헤치고 서니 매우 상쾌하다.첨성대는 깎아놓은 것처럼 우뚝 서 있는 거대한 바위 맨 꼭대기에 겹겹의 돌이 서로 포개져 대를 이루었다. 지붕의 처마를 덮어놓은 것 같다. 그 아래 바위엔 선조 임금의 어필을 새겨 놓았다. 또 돌로 만든 감실은 비바람을 가릴 수 있으니, 참으로 세상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길 만한 곳이요 귀신이 깎고 새긴 것’이라 이를 만하다.첨성대 북쪽의 훤히 트인 골짜기에 채운암(彩雲菴)이 있고, 능운대의 아래 그윽이 깊은 곳에 환장사(換章寺)가 있다. 두 곳 모두 승려들이 거처한다. 절 앞쪽에는 운한각(雲漢閣)이 있다. 그 우측 석문에서 바위 위로 나가면 3칸의 암서재가 있다.암서재 아래는 금사담이다. 골짜기의 물이 바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데, 물살이 세차고 빠른 곳이 많으며, 순탄하게 흐르는 곳은 적다. 여기를 지나면 물살이 잔잔하게 흐르고, 물이 깊고 넓어져서 못을 이루었는데, 금빛 모래가 가득해 맑고 윤기가 나며 깨끗하다. 그래서 금사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일찍이 우암 선생께서 왕래할 당시에는 물고기를 잡는 작은 배가 아니면 건널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심이 얕고 깊은 곳을 따라 옷자락을 걷고 건널 수 있으니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골짜기의 형세가 바뀜을 볼 수가 있다.금사담을 지나 수십 보 아래의 읍궁암은 우암께서 효종 임금의 제삿날이면 통곡한 곳이다. 읍궁암 곁 평지의 정사는 우암 선생께서 거처한 곳이다. 정사의 남쪽 조금 위에 만동묘를 세우고, 만동묘 아래에는 서원을 세웠다. 그리고 서원 앞에 소양(昭陽)·열천(洌泉)의 두 재(齋)가 있다.정사 북쪽 조금 아래에는 운영담이 있는데, 금사담 하류에서 읍궁암까지 바위와 돌을 만나 물살이 빠르다. 운영담에 이르면 고르고 넓은 물이 못을 이루고, 곁의 석벽은 짙푸른 등나무 넝쿨이 서로 뒤섞여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운영담 아래에서 다시 몇 굽이를 지나면 푸른 석벽이 하늘 높이 우뚝 솟아 있으니, 바로 경천벽이다. ‘힘차고 고귀해 굽히지 않는 기상과 두껍고 무거워 옮길 수 없는 형상’이라고 하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화양구곡은 경천벽에서 시작해 파곶까지이다. 구곡의 명칭은 어느 때 비롯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것은 형상을 보고 짓거나 역사적 사실에 따라 명명하기도 했다. 아니면 경치 때문에 이름을 붙이기도 했을 것이다.구곡의 순서는 한수재(寒水齋) 권상하 선생께서 정했으며, 굽이마다 새긴 전자(篆字)는 담암 민진원의 글씨다.(중략) 옛날에 율곡 선생이 석담에 살면서 고산구곡가를 읊은 것은 무이고사(武夷故事)를 모방한 것이다. 우암선생께서도 무이도가의 첫 편을 차운해 시를 짓고, 나머지 아홉 편의 절구는 당시의 여러 현인에게 부탁해 그들로 하여금 운을 따서 고산구곡시를 짓게 했다. 그러나 오직 화양구곡만은 무이도가를 차운해 지은 시가 없으니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 뒤의 현인들도 우암 선생이 고산구곡의 시를 지은 것처럼 차운해 지은 시가 없으니, 역시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이에 감히 재주 없음을 잊고, 삼가 무이도가의 운을 써서 화양구곡시를 지으니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동지들은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 주자의 무이도가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흥을 일으키고, 정취를 미루어 도의 오묘한 진리를 밝혀내 뜻이 원대하고 여운이 오래도록 남는다. 솜씨가 서툰 내가 어찌 만분의 일이나마 주자를 본받을 수 있겠는가마는 다만 그 경치를 보고 묘사하고자 하였을 뿐, 고산구곡시의 여러 작품과 같은 빼어남은 마침내 미칠 수가 없다. 여러 동지들은 시로서 이를 보지 말고 뒤이어 답시를 지어 선비들의 아름다운 일이 되게 하기를 바란다. 1844년 여름.◆주자 ‘무이도가’를 따라 지은 송달수의 화양구곡시하늘이 대현(大賢)을 내려 땅의 정기 열리고/ 화양의 맑은 물은 무이(武夷)에 닿아있네/ 겨울 소나무 홀로 봄빛을 띠니/ 세월 흘러도 아름다운 풍속 다하지 않으리라 <서시>// 일곡이라 봄 물결 일어 배 띄울 만한데/ 하늘 높이 솟은 푸른 암벽 물 깊은 시내 곁에 있네/ 애오라지 한 손으로 돌기둥 떠받들고/ 우뚝 서서 언제 세속 일에 물든 적 있었으랴 <경천벽>// 이곡이라 맑은 못에 푸른 봉우리 기울고/ 흰 구름 한 장이 산을 덮었네/ 때때로 지나가며 인간세상에 비 내리고/ 또 숲을 겹겹이 감싸는구나 <운영담>// 삼곡 바위 위에 낚싯배 매어두니/ 봄날 서재의 하루 일년 같네/ 찬 시냇물 임금의 승하 슬퍼하는 눈물인 양/ 밤낮 울부짖으며 흐르니 너무 애처롭구나 <읍궁암>// 사곡이라 도인을 찾아 가파른 바위에 올라가니/ 듬성듬성 가늘고 푸른 소나무 집 주위에 늘어져 있네/ 금모래 옥돌 깔린 세상 밖 선경이 펼쳐지니/ 천년의 마음 담은 달빛이 못에 비추는구나 <금사담>// 오곡이라 산을 따라 점점 깊이 들어가니/ 숲은 하늘 높이 첨성대 위로 솟아났네/ 하느님이 솜씨 좋게 절벽의 돌 다듬어/ 충정(衷情)의 신하에게 나라 위해 마음 쓰게 한 것이라네 <첨성대>//육곡이라 우뚝 솟은 층대는 푸른 물굽이에 의지하고/ 높이 솟아올라 성큼성큼 걸어 겹겹의 문 통과하네/ 그윽한 곳 산새와 이야기하고 아름다운 꽃나무와 어울려/ 지팡이 눕히고 신 벗어 놓고 종일 한가로이 보내노라 <능운대>// 칠곡이라 푸른 절벽 흰 돌에 여울이 일고/ 와룡의 신기한 흔적 길이 머무르네/ 숨어 있어도 스스로 밝은 덕 드러나/ 끝내 짙은 그늘 추위 속에서 온누리로 나오리라 <와룡암>// 팔곡이라 구름 안개 내렸다가 다시 걷히니/ 푸른 솔 우뚝 솟고 물은 굽이굽이 휘돌아가네/ 늘그막에 수많은 바위에 정붙여 벗처럼 의탁하니/ 산 사립문에 나그네 온다고 알리지 마라 <학소대>// 구곡이라 파곶 계곡 가장 시원스레 탁 트였으니/ 찬 돌이 눈처럼 깔려 있고 옥은 냇물에서 솟아오르네/ 가고 가다가 비로소 참다운 근원에 이르렀음을 깨달았으니/ 빼어난 경치는 모두 이곳 동천(洞天)에서 다하였네 <파곶>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권신응(1728~87)이 1756년에 그린 화양구곡도(충북대박물관 소장) 중 ‘읍궁암’(왼쪽)과 ‘첨성대’. 당시의 화양구곡 내 건물과 바위 등의 위치나 명칭을 잘 알 수 있다.화양구곡 중 칠곡인 ‘와룡암’ 바위에 새겨진 ‘와룡암(臥龍巖)’ 글씨. 민진원이 약 300년 전에 새긴 전서 글씨로, 굽이마다 같은 글씨체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2017.12.21
[九曲기행 .9] 화양구곡(上)...송시열의 은거처…20년 거주하며 제자들과 중화문명의 성지를 꿈꾸다
화양구곡(華陽九曲)은 충북 괴산군 청천면 속리산국립공원 내 화양천 3㎞ 구간에 자리하고 있다. 하류에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며 좌우 자연경관이 빼어난 지점에 구곡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구곡이 있지만, 화양구곡은 보기 드물게 1곡부터 9곡까지 원형을 거의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화양구곡은 2014년 8월에 대한민국의 명승 제110호로 지정됐다. 화양구곡이 있는 화양계곡은 청화산(988m)에서 발원해 서쪽으로 흐르는 화양천과 그 주변에 있는 가령산·도명산·낙영산·조봉산 등이 둘러싸듯 어우러져 만들어진 계곡이다. 이 일대의 지질은 화강암이 잘 발달돼 있다. 화양천이 흐르면서 골짜기에 있는 화강암을 침식시키면서 기암괴석이 하늘을 향해 떠받들고 있는 듯한 모습을 비롯해 절벽·바위·소 등 다양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빚어내고 있다.◆송시열 유적 중심으로 설정한 화양구곡화양구곡은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이 은거처를 마련, 도학을 닦으며 남긴 유적들을 중심으로 설정된 구곡이다. 송시열은 60세 되던 1666년 8월부터 화양동에 계당(溪堂)을 짓고 머물기 시작했다. 그는 회덕으로 돌아간 1686년 4월까지 화양동에서 20년간 살았다. 우암과 그의 제자들은 이곳 구곡의 바위에 여러 가지 글씨를 새기는 등 많은 유적을 남겼다.이곳 화양동은 원래 황양목(회양목)이 많아 황양동(黃楊洞)이라고 불렸으나, 송시열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이름을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화(華)는 중화(中華)를 뜻하고, 양(陽)은 일양내복(一陽來復)에서 따왔다. 일양내복은 불행이 지나가고 행운이 찾아오는 것을 뜻하는데, 군자의 도가 사라졌다가 다시 싹트기 시작한다는 의미를 지닌다.대한민국 명승 제110호로 지정우암 송시열의 제자 수암 권상하스승의 유적 중심으로 처음 설정단암 민진원이 범위와 명칭 확정1곡부터 9곡까지 원형 완벽 유지괴석이 하늘 떠받친 모습 제1곡 경천벽 華陽洞門은 송시열 글씨우암과 그의 제자들은 중국의 명나라가 망해버린 마당에 중화문명을 지켜낼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조선밖에 없다면서 화양구곡을 경영하며 구곡의 큰 바위에 명나라 황제와 조선 국왕의 글씨를 새기는 등을 통해 화양구곡을 중화문명의 성지(聖地)로 만들고자 했다.명나라는 쇠퇴하고 청나라가 일어서면서, 청은 명나라를 치기 전 조선을 두 번 침략했다. 조선은 두 번의 전쟁에서 패전했으면서도 청을 오랑캐로 보고, 비록 망했지만 유교의 도통(道統)을 이은 명나라를 문명국으로 보고 따랐다. 이런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의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다.화양구곡은 송시열이 사망한 후 제자인 수암(遂菴) 권상하(1641∼1721)가 처음으로 설정하고, 이후 단암(丹巖) 민진원(1664~1736)이 구곡의 범위와 명칭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그 이름을 전서로 바위에 새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민진원이 화양구곡 9개 굽이의 범위와 명칭을 최종 확정한 시기는 1721년에서 1727년 사이일 것으로 전문가는 추정하고 있다.지금의 화양구곡 명칭은 제1곡 경천벽(擎天壁), 제2곡 운영담(雲影潭), 제3곡 읍궁암(泣弓巖), 제4곡 금사담(金沙潭), 제5곡 첨성대(瞻星臺), 제6곡 능운대(凌雲臺), 제7곡 와룡암(臥龍巖), 제8곡 학소대(鶴巢臺), 제9곡 파곶(巴串)이다.◆구곡 굽이마다 전서로 이름 새겨‘화양지(華陽誌)’에는 구곡에 대해 곡마다 이름을 붙인 연유와 풍광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화양지는 1744년(영조 20)에 송주상(宋周相)이 편찬하고 1861년(철종 12)에 송달수·송근수 등이 증보해 간행한 화양동(華陽洞)·만동묘(萬東廟)·화양서원(華陽書院) 등에 대한 기록이다.제1곡 경천벽은 기암괴석이 하늘을 떠받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바위에는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제2곡 운영담은 경천벽에서 400m 정도 위에 있는 계곡으로 맑은 물이 모여 소를 이루고 있다.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 하여 운영담이라고 한다. 주자의 시 구절 ‘하늘 빛(天光) 구름 그림자(雲影)’에서 취한 것이라고 화양지에 적고 있다.제3곡 읍궁암은 운영담에서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나오는 계곡 가에 있는 바위다. 희고 둥글넓적한 이 바위는 송시열이 제자였던 임금 효종이 죽자 매일 새벽 이 바위에 올라 엎드려 통곡했기에 읍궁암이라 불렀다. 읍궁은 활을 보고 울었다는 말. 활은 귀인의 죽음을 비유하는데, 여기서는 효종의 승하를 말한다. 효종 제삿날 5월4일이 되면 이 바위 위에서 대궐을 향해 통곡했다. 읍궁 옆에 송시열의 유언에 따라 그의 제자 권상하 등이 중국의 명나라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만동묘(萬東廟)와 송시열의 영정을 모신 화양서원(華陽書院)이 있다.제4곡 금사담은 맑은 물 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같이 깨끗해 지은 이름이다. 금사담은 화양구곡의 중심이다. 금사담 옆 바위 위에는 암서재(巖棲齋)가 있다. 송시열이 기거하며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현재의 암서재는 1986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1669년 송시열이 지은 암서재 시다. ‘시냇가 절벽 사이(溪邊石崖闢)/ 그 틈에 집 지었네(作室於其間)/ 차분히 성현의 말씀 찾아(靜坐尋經訓)/ 분촌도 아끼며 공부한다네(分寸欲 攀).’ 이 시 현판이 암서재에 걸려 있다.암서재 옆 직립한 바위에 ‘창오운단 무이산공(蒼梧雲斷 武夷山空)’이란 송시열 글씨를 쓴 암각문이 있다. 창오운단에서 창오(蒼梧)는 순임금이 죽은 곳이다. 창오에 구름이 끊어졌으니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王)·무(武王)→주공(周公)으로 이어지는 도통(道統)이 끊겼음을 이야기하고, 그 끊긴 도통을 무이산에서 공부한 주자가 이었으나, 이제 무이산도 비었다며 도통이 끊어졌음을 한탄한 말이다. 또 하나의 암벽에 새긴 큰 암각 글씨로 명나라 태조의 글씨인 ‘충효절의(忠孝節義)’가 있다.제5곡 첨성대는 금사담에서 1㎞쯤 올라가면 나온다. 큰 바위가 첩첩이 겹쳐 높이 솟아 있고 그 위에서 별을 관측할 수 있다 하여 첨성대라 한다. 첨성대에는 의미 깊은 암각문이 있다. 첨성대 아래 큰 바위에 새겨진 선조의 글씨 ‘만절필동(萬折必東)’과 숙종의 글씨인 ‘화양서원(華陽書院)’이다. 만절필동은 황하(黃河)가 만 번 굽이쳐도 결국은 동으로 간다는 뜻으로, 동(東)은 원래 중국의 동쪽을 가리키나 우리나라로도 볼 수 있다. 제6곡 능운대는 시냇가에 우뚝 솟아 있는 큰 바위인데,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붙인 이름이다. 제7곡 와룡암은 계곡 가의 크고 넓은 바위(길이 30m·폭 8m)인데, 그 모습이 꿈틀거리는 용을 닮았다. 제8곡 학소대는 바위가 쌓여 봉우리를 이루고 있다. 이 바위산에 큰 소나무들이 자라는데, 이곳에 학들이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을 학소대라 했다. 학소대에서 1㎞ 정도 거슬러 오르면 제9곡 파곶이다. 개울 복판에 희고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는데, 그 위로 흐르는 물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놓은 것처럼 보여 파곶이라 한다. 넓고 평평한 바위에 용의 비늘무늬를 연상시키는 포트홀(돌개구멍)이 발달돼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우암 송시열이 은거했던 화양동계곡의 화양구곡 중 2곡 운영담(雲影潭). 맑은 물에 구름이 비치는 못이라는 의미다.
2017.12.07
[九曲기행 .8] 고산구곡(下)...詩書畵評(시서화평) 망라 고산구곡도 ‘학문 정통성-정치적 결속’ 상징
율곡 이이는 고산구곡을 경영하면서 고산구곡가를 지었는데, 퇴계 이황의 구곡시와는 달리 시조의 형식을 빌려서 한글로 지었다. 이 고산구곡가는 주자가 지은 무이도가의 조선화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그리고 무이도가와 달리 굽이마다 지명을 언급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러한 방식은 조선시대 구곡시가의 보편적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이의 고산구곡가는 주자의 무이도가를 본받은 것이지만 무이도가와는 그 시의(詩意)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다. 무이도가는 무이산에서 각 굽이의 경치를 평화로이 즐기는 주자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 것인 반면, 고산구곡가는 각 굽이의 경치를 하루와 1년의 시간 흐름 속에 나타내고 있다. 동시에 고산에서 강학과 음풍농월을 하며 무이산의 주자를 흠모하는 자신의 마음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인생과 자연에 대한 관조를 통해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자신의 삶을 그것과 일치시키는 시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무이도가가 역대 시인들이 본받아 쓴 시들이 첨가돼 거대한 작품군을 형성한 것처럼, 고산구곡가도 관련 한시 작품들이 보태어지면서 하나의 작품군으로 형성된다.◆송시열 주도로 제작한 고산구곡도이이의 고산구곡 경영과 고산구곡가 창작은 후대에 이르러 고산구곡도 제작으로 발전한다. 고산구곡도는 이이가 별세한 뒤 문인들에 의하여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되는 기록이 옥소(玉所) 권섭(1671~1759)의 ‘옥소장계(玉所藏)’에 수록된 ‘고산구곡도설(高山九曲圖說)’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이이의 서현손(庶玄孫)인 이석이 그린 ‘고산구곡도’를 원만령(元萬齡)이 소장하고 있다가 김수증에게 주었다. 그리고 김수증으로부터 그 작품을 증여받은 송시열은 김수증, 김수항, 권상하 등 9명에게 고산구곡가의 차운시를 짓게 해 그림과 함께 장정했다고 한다. 한시와 시조에 능했던 권섭은 권상하의 조카이며, 옥소장계는 기호학파의 구곡가 관련 시문들을 모은 것이다.구곡가 창작과 함께 구곡도까지 제작李珥 학통 이어받은 우암 송시열 주도김홍도·김득신 등 당대 유명화가 참여 조선말 양반문화 동경 農工商 부유층소박한 형식 선호 ‘民畵’로도 그려져이처럼 고산구곡도 제작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시작되는데, 특히 이이의 학통을 이은 기호학파로 노론의 핵심 인물인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이 주도적이었다. 이이의 학통을 이은 서인 노론계 문사들은 고산구곡을 이이의 학문적 상징 공간으로 삼고, 그 위상을 높이기 위해 고산구곡도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후 고산구곡도의 초기 양식은 18세기 이후로 계승되면서 범본(範本)의 기능을 하였고, 19세기에는 민간 화가들이 그린 민화의 소재로도 널리 그려졌다.송시열은 당시 황폐화된 고산구곡을 정비하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이의 ‘고산구곡가’를 차운(次韻)한 한시를 짓게 한 뒤, 이를 그림과 함께 목판화로 제작해 보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송시열이 고산구곡도를 제작한 배경에는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노론계 문사들은 이이로부터 이어지는 학통을 자신들의 정통성으로 삼고, 정치적 결속을 강조하기 위한 상징물로서 고산구곡도를 활용했던 것이다.현재 전하는 대표적인 고산구곡도 작품으로는 국보 제237호로 지정된 ‘고산구곡시화병(高山九曲詩畵屛)’이 있다. 1803년 노론계의 사대부, 문인, 화가 등 총 21명이 발(跋)·제(題)·시(詩)·서(書)·화(畵)·평(評) 등을 맡아 제작한 것이다. 현부행(玄溥行)의 발의로, 이이가 은거했던 황해도 해주의 고산구곡의 경치와 시를 모아 화원과 문인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문신들이 시를 쓴 것 등을 한데 모아 병풍으로 꾸민 것이다.각 폭의 최상단에는 조선 후기 명필 유한지(1760~1840)가 쓴 표제가 있고, 그 아래 상반부에는 이이의 ‘고산구곡가’와 송시열의 고산구곡가 한역시 및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계 기호학파 제자들의 역화시(譯和詩)가 김조순 등 안동김씨 일문의 문신들 글씨로 적혀 있다. 이어 화면의 중·하단에 고산구곡의 각 경치가 그려져 있으며, 여백에는 각 폭마다 김가순(金可淳)이 쓴 제시(題詩)가 있다.12폭 중 제1폭에는 율곡 이이의 제자로 당대의 대표적 문장가인 최립(1539~1612)의 ‘고산석담기(高山石潭記)’가 실려 있다. 제2폭은 ‘구곡담총도’를 김이혁(金履赫)이 그렸으며, 이후 3폭부터 11폭에는 각각 고산구곡의 경치가 하나씩 그려져 있다.1곡인 ‘관암도’는 김홍도(金弘道)가, 2곡 ‘화암도’는 김득신(金得臣)이, 3곡인 ‘취병도’는 이인문(李寅文)이, 4곡인 ‘송장도’는 윤제홍(尹濟弘)이, 5곡 ‘은병도’는 오순(吳珣)이, 6곡 ‘조협도’는 이재로(李在魯)가, 7곡 ‘풍암도’는 문경집(文慶集)이, 8곡 ‘금탄도’는 김이승(金履承)이, 9곡 ‘문산도’는 이의성(李義聲)이 그렸다. 마지막 12폭에는 송시열의 6세손 송환기(宋煥箕)의 발문과 석담구곡시가 있다. 이 고산구곡도는 진경산수화와 남종화의 화풍을 따랐고, 각 경관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조감법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시 이름난 화가들의 특색과 기량이 잘 나타나 있어 그들의 역량을 비교해 볼 수도 있다.◆민화로도 그려진 고산구곡도이와 함께 19세기에 그려진 고산구곡도의 대표작은 홍익대 박물관과 영남대 박물관 소장의 10폭 고산구곡도병이다. 두 병풍은 1817년 작으로 글씨 한 폭과 그림 아홉 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속의 경물은 화면 아래에서 위쪽으로 쌓아 올라가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고산구곡도병의 화풍은 19세기에 확산된 남종문인화풍에 바탕을 두면서도 약간의 형식화가 진행된 것이 특징이다.그리고 이를 민화풍으로 계승한 사례로는 건국대 박물관 소장 고산구곡도병을 들 수 있다. 이 10폭 병풍 역시 글씨 1면과 그림 9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고산구곡도병은 그림의 구도가 앞 시기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으나 표현상의 미숙함이 드러난다. 특히 묘사에 형식화가 두드러진 점과 초보적인 묘사는 민화풍의 일반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특징에 가깝다.구곡도를 소재로 한 민화는 일반 민화와 달리 양반 문화에 대한 동경의식이 깔려 있는 그림이다. 민화 구곡도류의 수요층은 18세기 후반부터 부를 축적한 상인과 부농, 그리고 기술직 중인을 비롯한 신흥부유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세기로 이어진 신흥부유층의 사회적 진출과 지위 상승은 양반문화를 동일시하고자 하는 현상을 불러왔다. 이처럼 민화 구곡도가 그려진 중심에는 바로 신흥부유층과 그들의 수요가 있었다. 이들은 그림의 화격을 크게 따지지 않았고, 소박한 형식의 그림을 선호했다. 조선시대의 구곡도는 회화사적으로 두 가지 중요한 성취를 이루었다. 첫째,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무이구곡도’를 조선구곡의 조성과 함께 한국적인 화풍의 구곡도로 전환하였다는 점이다. 17세기 이후 무이구곡도의 장소성과 화풍을 조선화된 구곡도로 창출하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둘째, 지식인들의 전유물과 같았던 구곡도를 대중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민화의 주제와 양식으로 변환을 이룬 점이다. 구곡도는 한국화와 대중화라는 두 측면에서 뚜렷한 성취를 보여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이이의 고산구곡을 그린 고산구곡도병(영남대박물관 소장). 고산구곡도는 17세기 말 송시열이 주도해 본격적인 제작이 이루어졌고, 이후 율곡학파의 연원과 계보를 상징하는 매개체가 되었다. 18세기 중엽 정선 작으로 기록된 ‘석담도’와 1781년 정조 임금의 명으로 그린 ‘석담구곡도’ 계통의 그림 등이 전해진다. 이 그림은 첫째 폭의 발문에 따르면 후자의 전통을 이어 1817년에 모사한 것이다.
2017.11.23
[九曲기행 .7] 고산구곡(上)...“高山에 집지어 사니 벗님들 다 오네…武夷 생각하고 朱子 배우리라”
조선시대의 무이구곡은 누구도 가 보지 못한 곳이었기에 그 의경(意境)은 상상 속에서만 떠올려야 했다. 그러한 동경을 해소해 준 것이 바로 ‘무이구곡도’였다. 무이구곡도는 주자학(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기반이 마련된 16세기부터 조선에 들어왔다. 이후 지식인들에게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조선 말기까지 변용과 확산의 과정을 거치며 널리 감상되었다. 17세기에 이르면 무이구곡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벗어나 개인의 은거처에 구곡을 조성하는 사례가 등장한다.무이구곡을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머문 현실 공간 속에 직접 구곡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구곡 경영은 주자의 학자적 삶을 적극 계승하는 방편으로 여겨졌다. 이는 조선구곡의 조성과 조선식 구곡도가 등장하게 된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독창적인 조선의 구곡문화가 태동하는 토대가 되었다.조선구곡의 본격적인 서막은 율곡 이이(1536~1584)가 은거의 공간으로 조성한 고산구곡(高山九曲)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퇴계 이황과 달리 율곡 이이는 직접 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했다. 고산구곡은 조선의 선비가 직접 구곡을 경영한 초기 사례 중 하나이다.율곡 이이 ‘구곡 직접경영’ 서막 열어처가가 있는 황해도 해주 고산에 은거청계당 짓고 동편엔 은병정사도 마련漢詩 아닌 한글 시조로 계곡절경 읊어이이는 1569년 교리(校理)에서 물러나 황해도 해주에 머문다. 해주는 이이의 처가가 있는 곳이다. 2년 뒤인 1571년에는 해주에 있는 산인 고산의 석담리(石潭里)를 탐방하고, 계곡의 아홉굽이에 이름을 붙인 뒤 은거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이이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고산구곡을 자주 찾지 못했다. 관직의 임기를 마친 뒤 잠시 휴가를 보내고자 한시적으로 왕래했을 뿐이다.이이가 정하고 이름 붙인 구곡은 제1곡 관암(冠巖), 제2곡 화암(花巖), 제3곡 취병(翠屛), 제4곡 송애(松崖), 제5곡 은병(隱屛), 제6곡 조협(釣峽), 제7곡 풍암(楓巖), 제8곡 금탄(琴灘), 제9곡 문산(文山)이다.그 후 이이는 2년간의 해주 관찰사직을 마친 1576년에 고산구곡으로 돌아가 기거할 거처로 청계당(聽溪堂)을 세웠다. 2년 후인 1578년(43세)에는 청계당 동편에 정사를 짓고 은병정사(隱屛精舍)라 이름을 붙였다. 주자가 무이구곡 5곡을 굽어보는 은병봉 아래 무이정사를 지은 것을 본받은 것이다. 이렇게 고산구곡에서 본격적으로 은거할 준비를 마쳤지만, 오래 머물지 못했다.그리고 이이는 1578년 은병정사를 짓고 은거하면서 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본떠서 고산구곡가를 지었다. 고산구곡가는 한글로 지은 시조 형식의 시다. 이이가 고산구곡을 조성한 것은 고산구곡가 서시에서 밝혔듯이 주자의 무이구곡을 생각하고 주자의 학문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었다.조선은 주자의 성리학을 국시로 했고, 이이 역시 주자의 가르침과 삶을 흠모하며 그를 본받으려 했다. 이이는 사람들이 고산 계곡의 뛰어난 경치를 모르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고산구곡가를 지은 것은 아니다. 그 바탕에는 주희의 무이구곡과 무이도가 등이 있었던 것이다.◆이이의 고산구곡가이이의 고산구곡가는 다음의 서시로부터 시작된다. 현대어로 바꾸고 그 해설문을 함께 덧붙인다.‘고산구곡담(高山九曲潭)을 사람이 모르더니/ 주모복거(誅茅卜居)하니 벗님네 다 오신다/ 어즈버 무이(武夷)를 상상(想像)하고 학주자(學朱子)를 하리라’(고산 구곡담을 사람들이 모르더니/ 풀을 베고 집 지어 사니 벗님들 다 오는구나/ 아아, 무이를 생각하고 주자를 배우리라)‘일곡(一曲)은 어디인가 관암(冠巖)에 해 비친다/ 평무(平蕪)에 안개 걷히니 원근(遠近)이 그림이로다/ 송간(松間)에 녹준(綠樽)을 놓고 벗 오는 양 보노라’(일곡은 어디인가 갓바위에 해 비친다/ 들판에 안개 걷히니 원근이 그림같이 아름답구나/ 소나무 숲속에 술통 놓고 벗들 오는 모습 보노라)‘이곡(二曲)은 어디인가 화암(花巖)에 춘만(春晩)하구나/ 벽파(碧波)에 꽃을 띄워 야외(野外)에 보내노라/ 사람이 승지(勝地)를 모르니 알게 한들 어떠리’(이곡은 어디인가 꽃바위의 늦봄 경치로다/ 푸른 물결에 꽃을 띄워 멀리 들판으로 보내노라/ 사람들 경치 좋은 이곳을 모르니 알게 하여 찾아오게 한들 어떠리)‘삼곡(三曲)은 어디인가 취병(翠屛)에 잎 퍼졌다/ 녹수(綠樹)에 산조(山鳥)는 하상기음(下上基音) 하는 적에/ 반송(盤松)이 수청풍(受淸風)하니 여름 경(景)이 없어라’(삼곡은 어디인가 푸른 병풍 같은 절벽에 녹음이 짙어졌도다/ 푸른 숲에서 산새들 아래위로 지저귀는 때에/ 반송이 맑은 바람에 흔들리니 여름 풍경 이에 더 없어라)‘사곡(四曲)은 어디인가 송애(松崖)에 해 넘는다/ 담심암영(潭心岩影)은 온갖 빛이 잠겼어라/ 임천(林泉)이 깊을수록 좋으니 흥(興)을 겨워 하노라’(사곡은 어디인가 소나무 벼랑 위로 해 넘어간다/ 물 속의 바위 그림자 온갖 빛과 함께 잠겨 있구나/ 숲속 샘은 깊을수록 좋으니 흥에 겨워 하노라)‘오곡(五曲)은 어디인가 은병(隱屛)이 보기 좋다/ 수변정사(水邊精舍) 소쇄(瀟灑)함도 가이없다/ 이 중에 강학(講學)도 하려니와 영월음풍(詠月吟風)하리라’(오곡은 어디인가 병풍바위 보기도 좋다/ 물가에 세운 집 깨끗하기 그지없구나/ 이런 곳에서 글도 가르치고 시를 지어 읊으며 풍류도 즐기리라)‘육곡(六曲)은 어디인가 조협(釣峽)에 물이 넓다/ 나와 고기와 누가 더 즐기는가/ 황혼(黃昏)에 낙대를 메고 대월귀(帶月歸)를 하노라’(육곡은 어디인가 낚시하는 골짜기에 물이 많구나/ 나와 고기 어느 쪽이 더 즐기는가/ 황혼에 낚싯대 메고 달빛 받으며 집으로 돌아가리라)칠곡(七曲)은 어디인가 풍암(楓巖)에 추색(秋色)이 좋다/ 청상(淸霜)이 엷게 치니 절벽이 금수(錦繡)로다/ 한암(寒岩)에 혼자 앉아서 집을 잊고 있노라’(칠곡은 어디인가 단풍 덮인 바위에 가을빛이 좋구나/ 맑은 서리 엷게 내리니 절벽이 비단 빛이로다/ 차가운 바위에 혼자 앉아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 있노라)‘팔곡(八曲)은 어디인가 금탄(琴灘)에 달이 밝다/ 옥진금휘(玉軫金徽)로 수삼곡(數三曲)을 탄 것을/ 고조(古調)를 알 이 없으니 혼자 즐겨 하노라’(팔곡은 어디인가 거문고 소리 들리는 듯한 여울에 달이 밝다/ 빼어난 거문고로 서너 곡조 탓지만/ 옛 가락을 알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 즐기노라)‘구곡(九曲)은 어디인가 문산(文山)에 세모(歲暮)구나/ 기암괴석(奇岩怪石)이 눈속에 묻혔어라/ 유인(遊人)은 오지 아니하고 볼 것 없다 하더라’(구곡은 어디인가 문산에 해 저문다/ 기이한 바위와 돌들이 눈 속에 묻혔구나/ 세상 사람들 찾아와 보지도 않고 볼 것 없다 하더라)고산구곡가는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무이도가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 이황의 경우가 그렇듯이 거의 한시로 차운(次韻)을 한 것과 달리, 시조의 형태로 지었다는 점에서 각별히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주자의 무이도가를 본떠 지었으나 시상(詩想)에 있어 독창적인 면이 엿보인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국보 제237호로 지정된 고산구곡도 그림 중 김홍도가 그린 1곡 관암도(왼쪽)와 이의성이 그린 9곡 문산도. 12폭으로 된 이 고산구곡도시화병에는 구곡 그림과 함께 이이의 고산구곡가, 송시열의 고산구곡가 한역시 등이 함께 실려 있다.
2017.11.09
[九曲기행 .6] 안동 도산구곡(下)...퇴계 후학이 설정한 도산구곡…5곡까지는 대부분 안동댐에 잠겨
도산구곡이 언제 누구에 의해 설정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황이나 그의 제자들 문집에서 이황이 도산구곡을 설정했다는 사실을 언급한 기록이 없어 이황이 직접 설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도산구곡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후계(後溪) 이이순(1754~1832)의 문집 ‘후계집(後溪集)’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내가 보건대 청량에서 운암까지 45리 사이에 명승지가 많은데 도산이 그 가운데 자리해 상하를 관할하며 한 동천을 만든다. 시험 삼아 그 굽이를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곳을 무이구곡의 예를 따라 나누면 운암(雲巖)이 제1곡이 되고, 비암(鼻巖)이 제2곡이 되고, 월천(月川)이 제3곡이 되고, 분천(汾川)이 제4곡이 되고, 탁영담이 제5곡에 있으니 이곳은 도산서당이 있는 곳이다. 제6곡은 천사(川砂)이고, 제7곡은 단사(丹砂)이고, 제8곡은 고산(孤山)이고, 제9곡은 청량(淸凉)이니 굽이굽이 모두 선생의 제품(題品)과 음상(吟賞)이 미친 곳이다.’선생 死後 이이순이 처음 언급무이도가 차운 구곡詩도 지어후손들 지금까지 20여편 남겨구곡 지점·명칭 일치하진 않아19세기 후반 편찬된 ‘오가산지’사림 견해 등 종합해 구곡 확정이이순은 이렇게 구곡을 자신이 직접 정하고,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시 ‘유도산구곡경차무이도가운십수(遊陶山九曲敬次武夷棹歌韻十首)’도 지었다. 이 기록 등을 통해 볼 때 도산구곡 설정은 18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도산구곡시도 18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창작되었다. 특히 이황의 후손들에 의해 많이 지어졌다. 그 대표적 인물이 후계 이이순, 광뢰(廣瀨) 이야순(1755~1831), 하계(霞溪) 이가순(1768~1844)이다. 이밖에 이종휴(1761~1832), 조술도(1729~1803), 금시술(1783~1851), 최동익(1868~1912) 등도 도산구곡시를 지었다. 현재까지 도산구곡시는 20여편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그런데 이들 도산구곡시를 보면 구곡의 지점이나 명칭이 대동소이하나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점도 도산구곡이 이황이 아니라 후학들이 설정한 것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의 ‘오가산지(吾家山誌)’에는 구곡의 위치와 명칭을 정리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오가산지는 이황이 ‘오가산’이라 명명한 청량산과 관련된 이황의 시문 등을 모은 책으로, 이만여(1861~1904)가 편찬했다. ‘청량산지’라고도 불린다.‘명종 병인년(1566) 임금이 도산을 그리기를 명하고, 그 후 영조 계축년(1733)과 정조 임자년(1792)에 또 그림을 그려서 올려라 명하니, 도산을 그린 것이 청량에서 운암까지 구곡이 된다. 삼가 이 화본에 의거해 청량의 여러 시를 먼저 싣고 도산의 여러 시를 총체적으로 묶어서 청량에서 도산까지, 도산에서 운암까지 길을 따라 지은 시를 하나하나 갖추어 기록해 한 구역의 산천을 총괄한다. 구곡은 1곡이 운암(雲巖), 2곡이 월천(月川), 3곡이 오담(鰲潭), 4곡이 분천(汾川), 5곡이 탁영(濯纓), 6곡이 천사(川砂), 7곡이 단사(丹砂), 8곡이 고산(孤山), 9곡이 청량(淸凉)이다.’이를 통해 오가산지를 엮을 때 기존의 여러 도산구곡시를 참고하고 안동 사림의 견해를 종합해 도산구곡을 확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도산구곡의 지점은 이이순, 이야순 등이 설정한 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특히 이가순이 설정한 구곡의 지점과 동일하다.현재 도산구곡 중 5곡까지는 안동댐 건설로 대부분 수몰되어 온전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이야순 도산구곡가대표적 도산구곡가인 이야순의 도산구곡가 ‘차무이구곡도가운십수(次武夷九曲棹歌韻十首)’를 따라 그가 정한 도산구곡 풍경과 이야기를 떠올려 본다.‘비단 같은 산과 유리 같은 맑은 물 신령스러운데/ 산은 더욱 높고 강물은 더욱 맑구나/ 무이산 거대한 은병봉이 여기서 멀다 말하지 말게/ 천년 동안 한 곡조의 뱃노래로 다 함께 들린다네.’ 이야순은 이 서시에서 도산구곡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무이구곡의 은병봉을 거론하면서 주자의 무이구곡과 비교하고 있다.‘일곡이라 바위 위의 구름 배를 잡아당길 듯하고/ 추로지향 군자 많지만 그 중에도 오천이라네/ 단풍에 어린 저녁 풍경 누가 이어 노래하리/ 쓸쓸한 절에는 한 점 푸른 연기만 머물 뿐.’ 안동 오천 군자리 부근에 있던 1곡 운암사(雲巖寺)는 이야순 당시에도 이미 퇴락했던 모양이다. 안동이 조선의 대표적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향)으로 불려 왔는데 그 중에서도 오천마을이 으뜸으로 꼽혔다. ‘이곡이라 부용봉 옥을 깎아 만든 듯/ 누굴 위해 만들었나 달빛 가득한 풍월담/ 학문으로 나아가는 길의 연원은 트여 있으니/ 구름 연기 한두 겹 막혔다고 말하지 말게나.’ 2곡은 월천(月川)이다. 1곡에서 6㎞ 정도 거슬러 오르면 월천이다. 이황의 제자인 월천 조목이 이 월천마을에 살면서 동네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댐이 생기면서 주민 대부분 떠나갔고 언덕 위에 월천서당이 있다. 월천 조목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다.‘삼곡이라 연못의 자라 배를 이고 있는 형상/ 우리나라 역학이 어느 해에 시작되었나/ 오랜 세월 공력 쌓아 주역 이치 밝혔는데/ 명교당 정일재 안에는 달빛만 다시 애잔하네.’ 3곡 오담(鰲潭)은 우탁(1262~1342)을 모신 역동서원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이곳 역시 안동호 물에 잠겨버렸다. 우탁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역동서원은 1969년 안동시 송천동으로 옮겼다.‘사곡이라 거센 물가 바위 귀머거리 되고/ 바위 위 구름 겹겹이 둘러싸 푸르게 내려오네/ 농암에 살던 신선 지금은 어디에 계신가/ 복사꽃잎 떨어지고 있는데 달은 못속에 숨어있네.’ 4곡은 분천(汾川)이다. 이곳 역시 수몰되었다. 농암 바위가 유명한 분천마을은 영천이씨 집성촌으로, 농암 이현보가 대표적 인물이다. 시에서 농암에 살던 신선은 이현보를 말한다.‘오곡이라 탁영담은 깊고 깊어서/ 채우고 남은 물결 사방을 적시네/ 옛날 같은 달과 끝없이 흘러오는 물/ 고인을 생각하니 실로 내 마음과 합하는구나.’ 5곡 탁영담(濯纓潭)은 도산서원 앞 물결이 굽이도는 지점이다. 이황은 탁영담에서의 뱃놀이 운치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5곡에 있는 도산서원은 무이구곡 중 주자가 머물렀던 5곡의 무이정사와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공간이다.‘육곡이라 나무숲이 옥 같은 물굽이를 감싼 곳/ 피라미와 백로는 사이좋게 지내네/ 하명동(霞明洞)에 핀 늦은 꽃 더욱 어여뻐/ 서쪽 바라보며 한적한 골짜기 하나 차지했네.’ 6곡 천사(川砂)의 풍경을 읊고 있다. 한적한 골짜기는 중국 북송의 문필가인 왕안석의 시 구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은거하며 살고픈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칠곡이라 휘감아 도는 한줄기 여울물/ 갈선대와 고세대를 다시 돌아 보네/ 만 섬의 붉은 단사 하늘이 감춘 보배/ 푸른 절벽에 구름 일어 찬물이 어리네.’ 7곡 단사(丹砂)는 강변의 벼랑이 붉은 빛을 띠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갈선대와 고세대는 강변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도가의 인물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팔곡이라 옥거울 같은 물가에 홀로 선 산/ 또렷또렷한 심법(心法)이 이 물가에 맴도는구나/ 멈추어 노래하다 푸른 절벽 향해 묻노니/ 지팡이 짚고 시 지어 노닐던 분 기억하는가.’ 8곡 고산(孤山)이다. 강변에 우뚝 솟은 암봉이 고산이고, 맞은편 강변에 고산정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정은 이황의 제자인 성재 금난수가 머물던 정자다.‘구곡이라 산이 깊어 형세가 끊어진 곳/ 누가 알리 산속에 이런 냇물 있을 줄/ 복사꽃 뜬 물결에 세인들 알까 두려우니/ 백사장 백로에게 이 동천(洞天) 보호하라 분부하리라.’ 9곡 청량(淸凉)은 청량산 입구의 강마을인 광석마을 주변이다. 청량산을 사랑한 이황은 스스로 호를 ‘청량산인’이라 짓고 이 산에 머물며 후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야순은 복사꽃이 떠내려가면 혹여나 세상사람들 눈에 띌지 모르니 백로에게 이 곳을 보호하라 부탁하고 있다. 이황이 지극히 사랑했던 산이기 때문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도산구곡 중 8곡에 있는 고산정 주변 풍경. 도산구곡은 퇴계 이황이 만년을 보냈던 안동 도산을 중심으로 낙동강 상류 오천마을 부근에서 청량산 입구까지 27㎞에 걸쳐 설정됐다.
2017.10.26
[九曲기행 .5] 안동 도산구곡(上)...陶山에 심신 의탁한 이황…조선 선비들 ‘구곡의 삶’으로 이끌다
안동의 도산(陶山)구곡은 안동을 가로질러 흐르는 낙동강 상류(오천마을 부근~청량산 입구)에 설정된 구곡이다. 그 길이가 27㎞나 되는 매우 긴 구곡이다. 도산구곡은 퇴계 이황(1501~1570)이 도산서당을 짓고 머물렀던 도산에서 비롯된 구곡으로, 이황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이황이 도산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도산은 이황이 학문을 닦고 심신을 수양하던 거점이었다. 주자의 삶과 학문을 체현하고자 했던 공간이었다. 이황은 또한 무이구곡도를 비롯해 무이구곡 관련 자료를 가장 많이 구해 탐독하고 무이구곡가를 차운한 시도 지었다. 이황은 이처럼 주자를 흠모하고 그 행적을 따르고자 했지만, 주자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으로 생각했던지 자신이 머문 곳에 직접 구곡을 설정하여 경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황이 ‘희작칠대삼곡시(戱作七臺三曲詩)’를 남긴 것을 보면 구곡경영과 구곡시 창작에 뜻을 두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지만, 구곡경영까지는 나아가지 않은 것으로 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여기서 삼곡은 석담곡(石潭曲), 천사곡(川沙曲), 단사곡(丹砂曲)이다. 6도산구곡은 이황의 후손 문집에 등장한다. 이를 통해 이황 사후 200년 정도 지난 18세기 후반기에 도산구곡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이순(1754~1832)은 ‘유도산구곡경차무이도가운십수(遊陶山九曲敬次武夷櫂歌韻十首)’에서 도산을 무이구곡에 비유하면서 주자와 이황의 학문적 위업을 나란히 평가했다. 이황이 주자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했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이황과 도산구곡이황은 태어나고 자란 예안의 온혜리 일대를 비롯해 독서와 사색의 장이었던 청량산, 노년에 머물렀던 도산이 그 삶의 중심지였다.이황은 온혜리에서 태어나 그 인근에서 40대 후반까지 살았다. 숙부 이우(1469~1517)의 훈도를 받던 소년시절부터 청량산을 왕래하며 독서에 열중했으며, 34세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간 이후 49세 때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했다. 50대 초반에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53세에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이후에도 관직이 주어졌으나 사퇴하고 예안으로 돌아와 저술과 강학에 전념하며 말년을 보냈다.이황은 50대를 한서암(寒棲庵)과 계상서당(溪上書堂)에서 보내다 다시 은거할 곳을 물색, 도산의 남쪽 땅인 지금의 도산서원 자리를 찾아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했다. 이황은 서당의 규모와 구조, 건물 배치 등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5년 만인 1561년에 완공을 보았으며, 이곳에서 말년 10년을 보내다 생을 마감했다.안동의 낙동강 상류 27㎞ 계곡이황 도산서당 짓고 말년 은거주자의 삶·학문 체현하던 공간자신이 직접 ‘구곡’ 설정 안 해死後 후손이 무이구곡에 비유이황은 사색과 독서의 장이었던 청량산이 아니라 왜 도산을 선택했을까. 이황은 청량산이 험준한 산이라서 늙고 병약한 자신이 즐겨 다니기에 힘겨웠고, 또 청량산 안에는 물이 없어 산수를 좋아하는 자신의 심신을 의탁하기에 어려웠다는 점을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에 밝힌 바 있다. 이황이 도산에서 보낸 삶은 주희의 무이구곡 삶과 흡사한 점이 많다. 도산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 지은 도산잡영병기는 주희가 무이정사에서 남긴 무이정사잡영병서(武夷精舍雜詠幷序)와 유사하다. 거처를 정하게 된 동기, 주변 경물의 선정과 이름을 붙이는 방식을 보면 이황이 주희와 무이정사를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그런데도 이황이 자신이 머물던 장소에 구곡을 정하고 이름을 붙이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가. 이에 대해 이황 자신이 구곡을 직접 설정하는 것은 주자를 존모하는 태도에 역행하는 행위로 인식했거나 도산서당 주변의 지리적 환경 등 때문인 것으로 연구자들은 추정하고 있다.◆이황의 무이도가 차운시주자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차운하여 시를 짓고,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를 감상하고 ‘무이지(武夷志)’를 읽고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조선 선비들의 본격적 삶은 이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황은 어느 날 ‘무이지’를 읽고 ‘무이도가’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이 시의 제목은 ‘한거독무이지차구곡도가운십수(閒居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十首)’인데, 풀이하면 ‘한가롭게 지내면서 무이지를 읽고 구곡도가를 차운한 10수’이다. 시의 제목에서 이 시가 어떻게 지어졌는가를 알 수 있다.여기서 ‘무이지’는 중국 무이 지방의 풍물을 기록한 책이다. 물론 무이산과 무이구곡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실려 있다. 이황은 이 책을 읽고 상상 속에서 무이구곡을 유람하고 그 감회를 주자의 무이도가 형식을 따라 시를 읊은 것이다. 이황이 지은 구곡시의 대상은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강산이 아니라, 그 옛날 주자가 은거했던 무이구곡이었다. 주자를 따라 무이구곡을 읊은 이황의 시(한시 번역)다.‘선산(仙山)은 이령(異靈)을 자랑하지 않고/ 창주의 유적은 맑기만 하다/ 지난 밤 꿈의 감격 때문에/ 구곡가 운을 빌려 다시 노래하네// 일곡에서 고깃배를 찾아 오르니/ 천주봉은 예와 같이 의연히 서천을 굽어보네/ 한 번 진유(眞儒·주희)가 음상(吟賞)한 후로는/ 동정(同亭·도교 전설 어린 정자)에 다시 풍연을 관장함이 없어라// 이곡이라 선녀가 변한 푸른 봉우리/ 아름답고 빼어나게 단장한 얼굴이네/ 다시는 경국지색 엿보지 않노라니/ 오두막에 구름이 깊고 깊게 드리우네// 삼곡이라 높은 벼랑에 걸린 큰 배/ 공중을 날아와 걸린 그 때 일 괴이하다/ 내를 건넘에 마침내 어떻게 쓰였을까/ 오랜 세월 헛된 번뇌 귀신 보호 가련하구나// 사곡이라 선기암(仙機巖)은 밤이 되어 고요한데/ 금계가 새벽 되니 날개 치며 새벽 알리네/ 이 사이에 다시 풍류가 있으니/ 양구 걸치고 월담에 낚싯줄 드리우네// 그 때 오곡 산 깊이 들어가니/ 대은이 도리어 수풀 속에 은거하셨네/ 요금(瑤琴)을 빗겨 안고 달밤에 타노라니/ 산 앞의 삼태기 맨 사람 이 마음 알겠는가// 육곡이라 푸른 옥빛 물굽이 둘러 있고/ 신령한 자취는 어디인가 구름 관문뿐이로다/ 꽃잎 떠 있는 물길 따라 깊은 곳 찾아오니/ 비로소 알겠네 선가의 한가로움을// 칠곡이라 노를 잡고 또 한 여울 오르니/ 천호봉의 기이한 풍경 가장 볼만하네/ 어찌하면 신선이 마시는 유하주를 얻어서/ 취하여 비선(飛仙)을 따라 학의 등에 오르려나// 팔곡이라 구름 걷히니 호수가 열리고/ 표연히 노에 맡기고 물 위를 선회하네/ 고루암은 조물주의 뜻을 알아서/ 나그네를 불러서 끝까지 찾아오게 하네// 구곡이라 산 열리니 눈앞이 확 트이고/ 사람 사는 마을 긴 하천 굽어보네/ 그대는 이것을 유람의 끝이라 말하지 말라/ 묘처(妙處)에 반드시 별천지가 있으니’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퇴계 이황이 소장하며 친필 발문 등을 남긴 ‘주문공무이구곡도’(영남대 박물관 소장). 주문공은 중국의 주자를 말한다. 이황은 이 무이구곡도를 수시로 감상하고 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한 시도 지었지만, 직접 도산구곡을 설정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황이 이처럼 도산구곡을 설정하지 않음으로 해서 이황의 후학들인 영남학파 선비들은 율곡 이이의 기호학파와는 달리 늦게까지 구곡을 경영하지 않고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 일대를 그린 도산도와 무이구곡도를 함께 소장하게 되고, 이것이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성호 이익(1681~1763)이 강세황에게 무이구곡도와 도산도를 그리게 한 사실도 그 예라 할 수 있다.
2017.10.12
[九曲기행 .4] 무이구곡도...朱子 삶·가르침 녹여낸 문화산수도…퇴계 이황도 감동해 눈물
팔경(八景)을 그린 팔경도와 구곡(九曲)을 그린 구곡도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대표적 문화산수도 양식이다. 이 중 팔경도의 원류는 중국 후난성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가 합류하는 지역의 경치를 여덟 폭으로 그린 ‘소상팔경도’다. 북송의 이성(李成)이 처음으로 ‘소상팔경도’를 그렸다. 그리고 구곡도는 바로 주자의 무이구곡을 그린 ‘무이구곡도’가 시초다. 주자는 54세 되던 1183년 제자들과 함께 푸젠성 무이산의 무이구곡에 정사(精舍)를 짓고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와 저술 작업에 전념했다. 이 무이구곡은 원대(元代) 이후 주자 성리학의 발원지로서 또는 주자의 학통을 이은 후학들의 활동 공간으로 부상하게 되었고, 주자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한 상징물로서 무이구곡도가 활발히 제작되었다. 무이구곡의 산수를 그린 무이구곡도는 16세기 때 조선에 전래된 이후 구한말까지 약 400년 동안 꾸준히 그려진 그림이다. 여말선초에 전래된 주자의 성리학을 깊이 탐구한 16세기 유학자들에게 주자는 학문의 종주로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주자의 삶과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본 무이구곡도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이후 큰 인기를 끌며 유행하였다. 특히 원본을 베껴 그린 모사본이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의 지식인들에게도 널리 보급되었다. 당시 유학자들에게 무이구곡도는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기 위한 그림이 아니라 주자와 정서적 교감을 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주자 업적 상징물로 활발히 제작16세기 조선 전래후 400년 유행성리학 종주와 시공초월해 교감聖地 동경한 선비들 애정도 각별원본 베낀 모사본 지방까지 보급조선말 대중적 취향 민화에 영향상·하류층 모두 선호 그림 주제◆조선 선비들이 애장한 무이구곡도주자 성리학을 최고의 학문 가치로 여긴 조선 선비들의 무이구곡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각별했다. 요즘처럼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무이구곡을 직접 답사할 수가 없었던 만큼, 무이구곡도를 구해 곁에 두고 보면서 주자의 삶과 가르침을 본받고자 하는 욕구는 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무이구곡도의 초기 작품으로 대표적인 예는 이성길(李成吉)의 1592년 작 ‘무이구곡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다. 두루마리로 된 이 그림(가로 4m)에는 화면 전체에 걸쳐 무이구곡의 아홉 굽이가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화면 구성은 무이구곡의 경관적 특성과 두루마리 그림의 기능에 맞춘 것이다. 화면에서 각 곡의 명칭은 기록하지 않았지만, 각 곡마다의 특징적인 경관을 일정한 간격으로 화면 안에 배치해 그린 것이 특징이다.이성길의 무이구곡도와 함께 대표적인 무이구곡도로 영남대 박물관의 ‘주문공무이구곡도(朱文公武夷九曲圖)’를 들 수 있다. 주문공은 주자를 말한다. 16세기 중국에서 전래된 무이구곡도를 지방 화공이 모사한 것으로, 퇴계 이황의 친필 발문이 있어 이황이 그림의 소유자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퇴계 이황이 이 그림을 보며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감동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원본 모사를 거듭함에 따라 원래 그림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작품이다.또한 안동의 학봉 김성일(1538~1593) 종택이 소장하고 있는 ‘무이구곡지도’ 역시 눈길을 끈다. 무이구곡의 전체 경관을 한 화면에 담은 총도 형식의 구곡도이다. 김성일이 1577년 종사관으로 연경에 갔다올 때 ‘무이구곡도’를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선인 화가가 그 원본을 모사한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그림은 보기드문 16세기 무이구곡도 중 하나다.무이구곡도 감상층이 점차 확산되면서 18세기 이후에는 무이구곡도를 그리는 사람들도 화원 화가와 문인 화가, 그리고 무명 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확산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강세황(1713~1791)의 무이구곡도(25.5㎝X406.8㎝)와 영남대 박물관의 계병(契屛) ‘무이구곡도’다. 계병은 나라의 큰 행사를 기념해 만든 병풍이다.강세황이 그린 무이구곡도는 당시에 전하던 두루마리 형식의 무이구곡도를 간략한 선묘 위주로 베껴 그린 그림이다. 문인화 취향의 분위기가 간결하고도 함축적인 선묘에 잘 나타나 있다. 영남대 박물관의 계병 무이구곡도는 8폭을 연이어 그린 것으로 1739년 중종비 단경(端敬) 왕후 신씨의 복위로 인해 능을 단장하는 일을 맡은 도감의 관원들이 기념물로 만든 것이다. 이 두 점의 무이구곡도는 화원 화가들의 공력이 담긴 그림과 문인들의 취향이 담긴 그림으로서 화원화와 문인화의 대비를 잘 보여준다. 18세기 전반에는 이처럼 표현 방법이 다채로운 무이구곡도가 널리 그려졌다.한편 성주의 선비인 응와 이원조(1792∼1871)는 1862년 무이구곡도와 함께 무이구곡과 관련 있는 선인들의 글을 엮은 첩인 ‘무이도지(武夷圖誌)’를 만들었다. 무이구곡도와 함께 이황, 정구, 정종로가 쓴 무이구곡 차운시와 이상정의 구곡도 발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무이구곡도에는 주자의 ‘무이도가’도 담겨 있다. 주자와 무이구곡에 대한 동경심을 읽을 수 있다.◆민화로 확산된 무이구곡도조선 말기의 무이구곡도는 대중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민화로까지 확산된다. 그러면서 뚜렷한 양식 변모를 보인다. 무이구곡도는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 전통 형식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그림으로도 그려져 대중의 수요와 접목되었고, 이후 상상력이 가미된 민화로 그려졌다. 원래 유학자나 양반들 사이에서 감상되던 무이구곡도가 민간양식으로 그려져 민화의 저변을 넓히는 소재로 다루어진 점은 매우 의외의 현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러한 무이구곡도의 민화화는 변화하는 시대 환경, 새로운 수요층의 등장과 수요에 따른 민간 양식의 그림 생산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분석된다.1785년에 그린 무이구곡도첩(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은 무이구곡의 주요 경물을 의인화 내지 의물화하고 있다. 예컨대 제2곡의 중심 경물인 옥녀봉은 한복을 차려입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렸다. 옥녀봉이 미인을 상징한다는 의미를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인의 형상으로 의인화한 것이다. 단연 감상자의 시선을 흥미롭게 사로잡는 요소다. 무이구곡도가 지식이 있어야만 보는 어려운 그림이 아니라 누구나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인 점을 강조한 파격적인 구성이다.가회민화박물관 소장의 10폭 무이구곡도병은 상상의 경관과 조형성을 강조한 민화풍의 그림이다. 이 병풍 그림은 각 폭마다 대부분 비슷한 구도와 필치로 그려져 있다. 특히 무이구곡의 고유한 지형적 특징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고, 상상으로 그린 부분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산의 굴곡을 비슷한 간격의 반복되는 운필로 표현했다. 경물 묘사에 원근의 차이가 없지만, 전통화법에 구애받지 않는 조형적 표현이 신선하다. 여기에 적힌 주자의 무이구곡시가 이 그림이 무이구곡도임을 알려 주는 단서다.이처럼 무이구곡도는 대중적 취향을 담은 민화로도 그려짐으로써 상류층부터 중서민층에 이르기까지 가장 폭넓은 계층을 대상으로 한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무이구곡도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중국 도상을 한국적인 화풍으로 전환해 낸 사례로, 중국문화의 수용과 한국화라는 측면에서 우리나라 문화사에서 시사하는 의미도 매우 크다.물론 무이구곡도는 조선의 선비들이 설정해 경영한 곳곳의 구곡을 담은 다양한 조선 구곡도로 전개·발전되어 갔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우리나라 무이구곡도의 대표작인 이성길의 ‘무이구곡도’(부분). 문신인 이성길이 1592년에 그린 작품으로 길이 4m(세로 33.5㎝)에 이르는 두루마리 작품이다.
2017.09.21
[九曲기행 .3] 주자의 무이구곡가...산수 풍광 읊었나, 도학사상 담았나…무이구곡가 해석 분분
조선에 찬란한 구곡문화를 낳게 한 무이도가(武夷櫂歌), 즉 무이구곡가는 어떤 내용일까. 주자가 1184년 무이산 계곡에 구곡을 정하고 지은 무이도가는 무이산의 개황을 읊은 서시로부터 시작된다. ‘무이산 위에는 신선의 정령이 어려 있고/ 산 아래 찬 물결은 굽이굽이 맑도다/ 그 가운데 기막힌 절경을 알고자 하는가/ 뱃노래(櫂歌) 두세 가락 한가로이 들어보게’. 무이산 천유봉에는 도교의 천유각(天游閣)이 있고, 천유각에는 800여세를 살았다는 신선 팽조와 두 아들 팽무·팽이를 모시고 있다. 신선의 정령이 어려 있다는 것은 이를 말한다.무이산 개황 담은 序詩로 시작일곡∼구곡 절경 노래 총 10수성리학 탐구·토론 조선 선비들朱子 뜻 이해 열쇠로 받아들여◆무이구곡을 노래한 무이도가‘일곡 시냇가에서 낚싯배에 오르니/ 만정봉 그림자 맑은 물에 잠겨 있네/ 무지개 다리 한번 끊어진 뒤 소식이 없고/ 골짜기와 바위 봉우리마다 푸르스름한 안개 자욱하네’일곡 시다. 일곡 북쪽에는 대왕봉(527m)이 솟아있고 그 왼쪽에 만정봉(512m)이 있다. 만정봉은 도가(道家)의 무이군(武夷君)이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시황 2년 가을에 무이군이 허공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여러 신선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곡에 우뚝 솟은 옥녀봉아/ 꽃을 꽂고 물가에 서 있으니 누구를 위한 단장인가/ 도인은 더 이상 양대(陽臺)의 운우(雲雨)를 꿈꾸지 않으리/ 흥에 겨워 앞산에 들어가니 푸르름이 첩첩이네’ 이곡에는 유명한 옥녀봉(玉女峯)이 있다. 무이산에서 가장 수려한 봉우리다. 정상에는 나무가 자라고 절벽은 마치 옥석을 잘라 조각한 모습이다. 옥황상제의 딸 옥녀가 아버지 몰래 구름을 타고 인간 세상에 내려왔다가 무이구곡의 산수에 매료되고 우연히 대왕(大王)과 만나 좋아하게 되어 돌아오지 않자, 옥황상제의 노여움으로 옥녀와 대왕이 돌로 변해 계곡의 양쪽에서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삼곡에서 그대는 가학선을 보았는가/ 노 젓기 그친 지 몇 해인지 모르겠네/ 뽕밭이 바다로 바뀐 것이 언제인가/ 물거품 같고 바람 앞의 등불같이 가련한 인생이여’삼곡에는 높고 험준한 암벽의 소장봉(小藏峯)이 있다. 소장봉에는 아득한 절벽 위 틈 사이에 배모양의 목제 관이 있다. 홍교판(虹橋板)과 가학선관(架壑船棺)이다. 가학선관은 골짜기에 설치한 배라는 뜻으로 배 모양의 관(棺)을 말하고, 홍교판은 무지개 다리판이니 관을 고정시키기 위한 목판이다. 풍장(風葬)을 하던 고대 남방의 소수민족 관인 가학선관은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썩지 않고 있다.‘사곡의 동서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바위산/ 바위 틈 꽃은 이슬 머금고 푸르게 드리웠네/ 금계(金鷄) 울어 새벽을 알려도 보이는 이 없고/ 공산엔 달빛 가득하고 와룡담엔 물결만 넘실대네’사곡으로 돌아들면 거대한 바위산인 대장봉(407m)과 선조대(仙釣臺)가 마주하고 있다. 대장봉(大藏峯)은 도가(道家)의 대장경을 숨겨둔 곳이라고 한다. 대장봉 아래의 와룡담(臥龍潭)은 구곡 중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선조대는 신선이 낚싯대를 드리우던 곳이라 한다. 강태공도 이곳에 와서 낚시를 했다고 한다. 대장봉에는 금닭이 있었다는 동굴 금계동(金鷄洞)이 있는데, 이곳에도 홍교판과 선관이 있다.‘오곡은 산 높고 구름이 깊어/ 언제나 안개비에 평림(平林)은 어둑하네/ 숲 속의 나그네 알아보는 이 없고/ 사공의 노랫가락에 만고의 수심 깊어지네’오곡은 주자가 무이정사를 세워 살던 곳이다. 무이구곡의 중심으로 계곡 북쪽에는 은병봉(隱屛峯)이 우뚝 솟아있고 그 아래에는 주자가 세운 무이정사가 있다. 이 시에 나오는 높은 산은 은병봉을 가리키고, 평림(平林)은 무이정사로 들어가는 초입의 지명을 말한다.‘육곡의 바위 병풍 푸른 물굽이 휘감아 돌아가고/ 초가집 사립문은 온종일 닫혀 있네/ 나그네 와서 배를 띄워 바위 꽃이 떨어져도/ 원숭이와 새들 놀라지 않고 봄 정취 한가롭네’구곡은 육곡에 이르러 북쪽에 우뚝 솟은 쇄포암을 바라보며 휘감아 돈다. 쇄포암은 수백개의 물줄기 자국이 파여 있어 장관을 이루는데, 마치 큰 천을 햇볕에 말리는 듯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린다. 신선의 손바닥 같다고 해서 선장암(仙掌巖)이라고도 한다.‘칠곡이라 배를 저어 푸른 여울 거스르며/ 은병봉과 선장봉을 다시금 돌아본다/ 어여쁘다 어젯밤 봉우리에 비가 내려/ 폭포수에 더해지니 얼마나 차가울까’칠곡에는 달공탄(獺控灘)이라는 여울이 있다. 달공탄에서 아래쪽으로 돌아보면 거대한 선장암과 은병봉이 보인다. ‘팔곡에 바람 불어 안개 개려 하고/ 고루암 아래에는 물결이 굽이쳐 돌아가네/ 이곳에 좋은 경치가 없다고 말하지 마라/ 여기부터 유람객들이 올라오지 않는구나’팔곡을 돌아 구곡을 향하면 높이 솟은 고루암이 막아선다.‘구곡에 다다르니 눈앞이 탁 트이고/ 비와 이슬 내리는 쌍마(桑麻) 밭 평천이 보이네/ 뱃사공은 다시 무릉도원 가는 길을 찾지만/ 이곳 말고 인간 세상에 별천지가 있으랴’구곡을 지나면 평천(平川)이라는 곳이 나온다. 이곳은 지나온 구곡까지와는 달리 하천은 평평하게 흐르고, 주위에는 뽕나무, 대마 등이 자라는 들판이 있다.◆조선 성리학자들의 무이도가 해석조선의 구곡문화는 성리학자들이 주자의 이 무이도가(무이구곡가)를 접하면서 시작된다. 주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구곡을 설정하고 무이도가를 읊었을지 모르나, 성리학이 우리나라에 수용된 이후 본격적으로 학문적 탐구와 토론의 대상이 된 16세기에 이르면 퇴계 이황과 같은 이들에 의해 무이도가는 주자의 문학과 사유를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의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중국인들과는 달리 무이도가를 특별한 뜻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정확한 이해인가를 따지는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구곡문화의 핵심인 무이도가 해석은 도학적으로 인식하여 입도차제(入道次第: 유교 도학의 경지로 진입하는 차례)를 읊은 재도시(載道詩) 또는 조도시(造道詩)라고 보는 관점(하서 김인후), 서정적으로 인식하여 인물기흥(因物起興: 일정한 사물을 통하여 시인이 흥취를 일으키는 것)을 읊은 서경시(敍景詩) 또는 서정시라고 보는 관점(고봉 기대승)으로 나뉘었다.한편 퇴계 이황은 재도시로 해석하면서도 서경시로 해석하는 절충적 입장을 취했다. 퇴계는 주자가 ‘경치를 묘사하면서 그 속에 탁흥우의(托興寓意)했다’는 절충적인 결론을 내렸다. 산수의 흥취에 의탁하여 무언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았다는 말이 ‘탁흥우의’이다. 이처럼 무이도가의 수용에서 드러나는 사림파 지식인들의 의식 차이는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면서 구곡문화는 더욱 다양화하고 심화되게 되었다. ‘무이도가는 도에 들어가는 순서를 읊은 시’라는 인식은 조선 후기에 강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인식을 더욱 확산시킨 것은 ‘도가시주(櫂歌詩註)’였다. 지금 전하는 책이 아니어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여러 문헌에 부분적으로 전하는 내용을 보면 무이도가 10수를 입도차제에 맞게 정밀하게 해석하며 비평한 책으로 파악되고 있다. 조선 후기 많은 선비들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무이도가를 인식하고 감상했다. 단순한 서정시가 아니라 조도시라는 도학적 입장에서 접근한 것이다.무이도가 인식이 가장 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구곡이다. 구곡을 도의 극처로 인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무이도가 인식을 결정해 준다. 구곡은 경치가 빼어나지 않고 일상의 경관이 전개되는 공간이다. 이러한 평상의 공간을 극처로 인식하는 것은 유람적 접근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더욱 빼어난 경치를 찾아 나아가는 것이 당연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이곳이 바로 극처가 되는 것이다. 유자(儒者), 즉 선비의 도는 일상의 인륜에 있기 때문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주자가 1183년에 지어 7년간 은거한 무이정사. 주자는 이곳에 은거하며 이듬해 무이구곡을 설정하고 무이구곡가를 지었다. 무이정사는 무이구곡 중 5곡의 명칭이고, 뒤로 보이는 암산이 은병봉이다.무이정사 앞에 세워져 있는 주자 동상. 근래에 복원한 것이다.
2017.09.07
[九曲기행 .2] 구곡문화 탄생지 무이구곡...朱子, 무이산서 강학·풍류 7년…도교·불교 성지가 유학 요람으로
구곡문화는 주자가 중국 푸젠(福建)성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짓고 은거하면서 시작됐다. 주자가 이곳에 1183년부터 7년 동안 머물면서 계곡의 절경 가운데 아홉 굽이에 이름을 붙이고 무이도가(武夷櫂歌·무이구곡가)를 지은 것이 무이산의 문화를 바꿔놓음은 물론 후일 조선에 찬란한 구곡문화를 일구게 한 것이다. 무이산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역사와 풍부한 전설이 서려 있게 된 명산이다. 한족(漢族)이 들어오기 전에는 남방의 이민족이 살았던 곳으로 절벽에 매장하는 장례풍속이 남아 있었고, 불교와 도교의 자취가 우세했던 곳이다. 그런 곳을 주자가 머물면서 유학자의 강학과 풍류의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게 되었다. 무이산, 中 10대 명산으로 꼽혀北宋∼淸왕조대 35개 서원 유적세계자연·문화유산보호구 지정구곡 9.5㎞ 뗏목유람 ‘점입가경’ 주자, 유학 실천윤리 체계 확립천리 본성이 이치 ‘性卽理’ 입장道佛 흡수해 철학·수행법 완성동아시아 사상계에 엄청난 영향◆무이산무이산은 중국 동남쪽의 최고 산수경관을 자랑하는 산이라는 찬사를 받는 명산이다. 무이산풍경구 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삼앙봉(三仰峯)으로 높이는 717m다.전설에 따르면, 요(堯)임금 시대에 팽조(彭祖)가 이 산의 만정봉(慢亭峯)에 은거했다고 한다. 팽조의 큰아들 팽무(彭武)와 둘째아들 팽이(彭夷)는 당시 홍수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을 걱정해 아홉 굽이의 강을 파서 물길을 냈는데, 이를 구곡계(九曲溪)라고 부른다. 구곡계는 길이가 60여㎞. 무이산이란 명칭도 팽무와 팽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전한다.무이산의 대표적 봉우리인 천유봉(409m) 정상 바로 아래에는 천유각이 있고, 그곳에 팽조·팽무·팽이 상이 모셔져 있다. 최고의 절경을 자랑하는 천유봉은 한 개의 엄청난 바위로 이뤄진 봉우리로 840개 정도의 절벽 계단으로 오를 수 있다. ‘천유봉에 오르지 않고는 무이산을 보았다고 하지 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이산의 최고 명소다. 이곳을 오르면서 보게 되는 무이구곡(4~7곡)의 풍광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구곡계 협곡은 맑고 풍부한 물과 부드러운 바위 절벽이 어우러져 뛰어난 풍경을 만들어낸다. 무이산은 처음에는 도교의 중심지였지만, 불교 또한 함께 발전해 17세기에는 불교가 도교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자가 이곳에 정사를 세우고 성리학을 연구하면서 성리학의 요람으로 변했다. 무이산에는 북송 시대부터 청 왕조 사이(10~19세기)에 지은 35개의 서원(書院) 유적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무이산은 무이암차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11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곳에는 황실의 차 농장이 있었으며, 황실에 바칠 차를 생산했다.36개 산봉우리, 72개 동천, 99개 암봉, 13개의 샘 등이 있는 무이산은 현재 세계자연유산보호구와 세계문화유산보호구라는 2개 타이틀을 함께 보유하고 있는 명산이자 유명 관광지다. 중국 10대 명산 중 하나이기도 하다.◆주자와 무이구곡주자는 이 무이산의 계곡 중 절경 9.5㎞ 구간에 구곡을 설정하고 구곡의 풍광과 감상을 읊은 무이도가를 지은 것이다. 주자는 무이구곡 아홉 굽이의 절경에 각기 이름을 붙였는데 1곡은 승진동(升眞洞), 2곡은 옥녀봉(玉女峯), 3곡은 선조대(仙釣臺), 4곡은 금계동(金鷄洞), 5곡은 무이정사(武夷精舍), 6곡은 선장봉(仙掌峯), 7곡은 석당사(石唐寺), 8곡은 고루암(鼓樓巖), 9곡은 신촌시(新村市)다. 선조대는 선기암(仙機岩)으로 불리기도 한다. 금계동은 금계암(金鷄岩), 오곡은 철적정(鐵笛亭)으로 된 기록도 있다. 철적정은 인지당(仁智堂), 은구재(隱求齋), 지숙료(止宿寮), 석문오(石門塢), 관선재(觀善齋), 만대정(晩對亭) 등 무이정사의 부속 건물 중 하나였다. 이 구간에 실제 물굽이는 13군데 정도 된다. 무이구곡 구간은 대부분 양쪽으로 솟아 있는 커다란 암벽과 높은 암봉들 사이로 맑고 많은 물이 흘러 탄성을 자아내는 절경을 이룬다. 굽이가 많으나 물결은 대부분 잔잔하게 흐른다. 작은 폭포라도 한 곳 없다. 옛날에는 1곡에서 뗏목을 타고 9곡까지 거슬러 올랐다고 하나, 지금은 9곡에서 대나무 뗏목(竹筏)을 타고 1곡까지 내려오면서 유람한다. 걸리는 시간은 1시간30분 정도인데, 관광객이 많아 하루종일 뗏목이 이어지며 장관을 이룬다. 무이산의 죽벌(竹筏)은 600~700여 명의 사공에 의해 600여 척이 운항되고 있다고 한다. 죽벌은 2척을 묶어 6인승으로 운항되며, 죽벌 사공은 앞뒤로 1명씩 있다. 3~4m의 대나무 장대를 이용해 강바닥을 이리저리 밀어 배의 흐르는 방향을 조정하는 죽벌인(竹筏人)의 솜씨는 감탄할 정도다. 이런 죽벌은 황금 시즌인 5월이 되면 1주일에 7천~8천명이 이용한다고 한다. 9곡을 향해 1곡인 승진동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멀리 대왕봉(大王峯·527m)이 솟아 있고 철판봉(鐵板峯·404m)도 눈에 들어온다. 계곡 위쪽으로는 멀리 2곡의 상징인 옥녀봉(313m)이 멋진 자태를 자랑한다. 앞으로 펼쳐질 절경을 예고하기에 충분한 풍광이다. 옥녀봉은 무이산의 랜드마크로 무이산 관광 안내간판의 상징 디자인으로 활용되고 있다. 옥녀봉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옥황상제의 딸 옥녀(옥녀봉)가 무이산에 내려왔다가 무이산 풍광에 취한 데다 대왕(대왕봉)을 만나 천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자, 옥황상제가 철판도인을 사자로 보내 불러오려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사자는 두 사람에게 술법을 써서 바위로 변하게 한 뒤 계곡 양쪽에 떨어져 있게 했다. 그리고 서로 보지도 못하도록 그 사이에 병풍바위(철판봉)를 만들어놓았다.2곡 옥녀봉을 돌아 올라가면 3곡 선조대를 거쳐 점입가경의 절경들이 굽이마다 펼쳐진다. 8곡에 이르면 계곡 주변이 보다 평범해지며, 구곡을 지나면 좌우에 멀리 산이 보이는 평지가 펼쳐진다. 갈수록 골이 깊고 물길도 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구곡을 지나면 오히려 평평하고 평범한 계곡이 펼쳐지는 특이한 지형이다.◆칸트에 비유되는 주자주자(朱子)는 선대 유학자들의 성과를 집대성하고 유학의 방향을 새롭게 전환시킴으로써 이후 동아시아 사상계의 지형도에서 커다란 산맥으로 자리 잡은 인물이다.도교와 불교에도 흥미를 갖다가 24세 때 이연평을 만나 유학에 복귀하며 그의 유학을 계승한 주자는 양명학자인 육상산과 더불어 절차탁마하면서 학문(유학)을 비약적으로 심화·발전시켜 중국 및 동아시아 사상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변철학과 실천윤리의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다. 그는 ‘천리에서 부여받은 본성(本性)이 곧 이치(性卽理)’라는 입장을 취했고, 육상산은 ‘마음이 곧 이치(心卽理)’라는 입장을 취했다. 두 사람은 치열한 자세로 논쟁에 임했지만, 주자는 나중에 육상산을 백록동서원 강의에 초빙했고, 육상산은 형 육구령의 묘지(墓誌)를 써줄 것을 부탁했다. 학문적 입장을 달리하면서도 서로를 깊이 존경했던 것이다.주희가 편찬한 책은 80여 종, 남아 있는 편지글은 2천여 편, 그의 대화를 기록한 대화록이 140편에 달한다. 그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 학자들이 467명에 달했다. 주자는 위로는 공자와 맹자에 거슬러 올라가고, 옆으로는 불가·도가까지 흡수해 새롭고 치밀한 유가의 사상과 수행 방법을 완성했다. 이러한 주자는 서양의 대표 철학자 칸트(1724~1804)에 비유되기도 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대나무 뗏목을 탄 관광객들이 무이구곡 중 2곡인 옥녀봉(오른쪽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을 향해 가며 유람하고 있다. 무이구곡(9.5㎞) 유람은 9곡에서 출발해 1곡으로 내려가며 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2017.08.24
[九曲기행 .1] 구곡과 구곡문화...朱子 은거한 ‘무이구곡’처럼…조선 선비들 이상향을 꿈꾸다
도산구곡(안동), 무흘구곡(성주), 화양구곡(괴산) 등 우리가 흔히 듣고 보는 수많은 구곡은 조선 선비(성리학자)들이 추구한 도학(道學)의 세계와 이상향이 서려 있다. 단순히 수려한 계곡의 굽이가 아니라 당대 지식인들의 정신세계와 자연관이 녹아있는 특별한 정신문화의 유산이다. 최근 들어 지방자치단체 등이 대표적 구곡들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새로운 문화관광산업 콘텐츠로 개발하는 등 찬란한 문화유산 중 하나인 구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화양구곡은 명승 제110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구곡문화의 유래와 내용 등을 알아보고 경북을 중심으로 전국의 대표적 구곡을 답사하며 우리나라 구곡문화를 살펴본다.우리나라 어느 지역이든 풍광이 멋진 계곡이나 골짜기에 가면 구곡(九曲)이나 동천(洞天)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특히 큰 선비를 비롯한 유명 인물이 살았던 곳에는 어지간한 계곡에도 다 무슨 구곡이나 동천이란 이름이 붙어 있고, 바위나 암반에 관련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도교적 색채가 짙은 이름인 동천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라는 의미로 풍광이 좋고 그윽한 골짜기를 의미하는데, 구곡과 비교하면 짧은 계곡(골짜기)이라 할 수 있다.구곡은 말 그대로 산속 계곡의 아홉 굽이를 뜻한다. 이 구곡은 선비들이 경영한 원림(園林)으로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시대 선비들의 핵심 문화였다 할 수 있다. ‘구곡’으로 한 것은 ‘구(九)’가 동양에서는 양의 기운이 충만한 완전한 수이고 가장 큰 수인 점 등에서 최고의 수로 여긴 문화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성리학자 주자 무이산에 은거九曲 경영하고 九曲歌도 지어조선 지식인 삶·사상 큰 영향거처 주위 산천에 구곡 설정해정자 마련 詩쓰고 그림도 그려16세기 지배 ‘구곡문화’ 일궈구곡은 단순히 풍광이 빼어난 곳을 선정한데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 선비들이 추구한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한 공간이었다. 구곡문화는 중국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에서 비롯됐지만, 중국보다 조선에서 훨씬 더 성행하고 발달했다. 선비들은 구곡을 설정하고, 그것을 매개로 구곡시를 짓고 구곡도를 마련해 걸어놓고 보면서 성리학의 이상을 정립하고 실천하려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조선의 구곡문화는 확대·심화되면서 우리의 산천을 인문학의 보고로 만들어 갔다.이황에서 비롯된 도산구곡, 이이의 고산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 정구의 무흘구곡 등이 대표적 구곡이다. 우리나라 구곡의 수는 조사가 진행될수록 늘어나고 있는데, 전국적으로 150여 개의 구곡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40개가 넘는 구곡이 있는 경북이 구곡문화가 가장 성행한 지역이다.◆구곡문화의 유래구곡의 조건을 갖춘 지형은 세계 곳곳에 무수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구곡은 특정의 역사적·환경적 조건 속에서 형성된 문화적 개념이다. 이 구곡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이는 남송의 성리학자 주자(1130~1200)다. 그의 이름은 희(熹)고, 호는 회암(晦庵)이다. 주자는 푸젠성(福建省)의 우계현(尤溪縣)에서 태어나 19세에 진사에 급제, 24세 때 처음 출사(出仕)한 이래 71세로 별세할 때까지 여러 벼슬을 받았지만 예우 수준의 명목상 직책이 대부분이었다. 실제 관리로 부임해 복무한 기간은 9년 정도에 불과했다. 주자는 유학 외에 불교와 도교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에 이연평(李延平)과 만난 이후 유학으로 복귀해 몰두하면서 그 정통을 계승했다. 주자가 푸젠성 무이산(武夷山)에 은거해 학문을 닦으면서 구곡을 경영하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노래한 무이구곡가를 지음으로써 중국의 무이산은 물론 동아시아의 문화 지형을 바꾸어 놓게 되었다.주자는 53세 때인 1183년 무이산에 무이정사를 지어 은거하면서 주변의 사물을 읊은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을 짓고, 아울러 정사를 경영하게 된 내력을 적은 ‘무이정사기(武夷精舍記)’ 등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7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후학을 위해 강학하고 학문 연구에 힘쓰는 한편 산수의 아름다움을 한시로 노래했다. 그 가운데 구곡의 경영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주자는 1184년 구곡을 설정해 배를 타고 구곡을 따라 유람한 뒤 ‘무이도가(武夷櫂歌)’ 10수를 지었다. 주자가 구곡을 설정해 이름을 붙이고 서시와 더불어 곡마다 시를 읊은 이 10수의 무이도가, 즉 무이구곡가는 구곡문화의 시발점이 되었다. ◆구곡문화의 전개성리학은 주자가 집대성한 새로운 유학이다.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따라 인의예지를 실현하는 도덕적 삶을 통해 도덕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은 기존 유학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왜 도덕에 따라 살아야 하는지, 과연 도덕에 따라 잘살 수 있는지를 형이상학적으로 치밀하게 밝힌 점에서 새로운 유학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심신을 바로 하고 맑게 하며 사물의 이치를 공부함으로써 우주만물의 이치를 체득하고 인의예지를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주자를 지극히 존경하며 받들었다. 성리학 신봉자인 조선 선비들의 주자 추앙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주자의 사상과 가르침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졌다. 특히 무이산에 은거하며 무이구곡을 경영하고 무이도가를 지은 것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탐구했다. 주자의 무이구곡 경영과 무이도가 창작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무이도가를 도학의 완성을 향해 가는 단계를 읊은 것으로 본 그들은 주자의 무이구곡과 관련된 삶을 자신들의 삶 속에 구현하려 했다. 주자는 그 개인을 떠나 도학을 실천하며 성인이 되고자 했던 현자로 보았기 때문이다.그래서 성리학이 정착되던 16세기의 조선 지식인들은 무이산과 무이구곡에 대한 글을 기록한 ‘무이지(武夷誌)’를 탐독하고 무이구곡가를 차운(次韻)하거나 무이구곡도를 감상하며 주자에 대한 존경과 감화의 정서를 고양시켰다. 그들은 또 자신의 거처 주위의 산천에 구곡을 설정하고 정자 등을 마련, 구곡시를 짓고 구곡도를 그리는 등 구곡문화를 일궈갔다. 이를 통해 주자의 사상과 삶, 문학을 본받으려 했다.구곡문화의 도화선인 ‘무이도가’가 언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려 말에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무이도가를 하나의 통상적인 시로 인식했을 뿐이고, 구곡을 경영하며 구곡시를 짓거나 하는 것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구곡문화는 16세기에 이르러 성리학이 지배사상으로 자리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구곡의 경영과 구곡시 창작은 기록상으로 소요당(逍遙堂) 박하담(1479~1560)의 ‘운문(雲門)구곡’과 ‘운문구곡가’가 처음이다. 그는 1536년 청도의 운문산을 비롯한 동창천 일대의 빼어난 곳을 구곡으로 경영하면서 운문구곡가를 지었다.비슷한 시기에 퇴계 이황(1501~1570)은 안동에 도산구곡을, 율곡 이이(1536~1584)는 황해도 해주에 석담구곡을 경영하면서 조선의 구곡문화는 선비들의 필수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이황은 무이도가를 차운해 시를 짓고, 무이구곡도를 감상하며, 무이지를 읽고, 무이구곡을 상상하는 삶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주인공이다. 이후 한강 정구의 무흘구곡, 우암 송시열의 화양구곡 등 수많은 구곡이 뒤를 이었다.주자의 무이도가를 차운해 시를 짓고 무이도가에 대한 비평을 펼치고, 구곡을 경영하며 구곡시를 짓고 구곡도를 그려 감상하면서 조선 선비들이 형성한 구곡문화는 성리학을 바탕으로 자연과 문학, 미술이 융합된 조선 성리학의 ‘꽃’이고 ‘진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 위에 문학(구곡가)과 예술(구곡도), 건축(누정)이 결합된 구곡문화의 심화·확산은 사대부의 원림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중국 푸젠성 무이산 천유봉(天遊峯)에서 바라본 무이구곡(일부). 조선의 구곡문화는 주자가 무이산에 은거하면서 무이구곡을 설정하고 무이구곡가를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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