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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독도 파노라마]
[울릉도 독도 파노라마(10)] 나리분지 땅속 전체가 큰 물탱크 역할...울릉도 전역 용출 소 통해 청정 암반수 공급
예로부터 울릉도는 청정 이미지와 풍부한 물, 그리고 물맛이 좋기로 소문난 섬이다. 경제개발과 환경오염으로 물 부족 현상이 심화하는 지금 울릉도가 맑고 깨끗한 물로 또 한 번 주목받고 있다. 동해 깊은 바다에 우뚝 솟은 화산섬인 울릉도는 섬 전체가 여과 필터 역할을 하는 현무암으로 이뤄져 있어서 미네랄 성분이 많은 맑고 깨끗한 물이 자랑인 곳이다. 저수지도 없고 흐르는 표층수도 없는데 폭포가 있다. 우리나라 다른 도서 지역보다 비교적 풍부한 수량으로 수력발전까지 일으키고 있다. 그만큼 울릉도 주민들의 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섬이다. 울릉도라는 한정된 섬 지역에서 이렇듯 많은 양의 물이 계속해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울릉도의 유일한 평지인 나리 분지(해발 370m)가 있기 때문이다. 동서길이 약 1.5㎞, 남북길이가 2㎞ 남짓으로 면적은 330만㎡에 달한다. 나리분지는 우리나라에서 단일지역으로는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곳으로 해발 800∼900m가 넘는 산이 둘러싸고 있다. 이 산과 나리분지에 쌓여 있던 눈이 12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서서히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어 화산석이 천연 정수기 역할을 하는 나리분지의 땅속 전체가 큰 물탱크 역할을 하며 울릉도 전역에 자리 잡은 용출 소를 통해 청정 암반수를 공급한다. 용출 소에서 솟아나는 물은 각종 세균 등으로부터도 안전하며 미네랄 함유량이 많고 수질 또한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조사 결과 1급 청정수로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인 장소는 나리분지에서 약 100m 아래 위치한 추산 용출수와 봉래폭포다. 추산 용출수는 하루 평균 2만여t의 물이 용출되고 있다. 이 가운데 울릉군 북면 지역 주민들의 상수도와 간이상수도 용수로 1천t이 사용되고 추산수력발전소에서 발전용수로 9천여t을 사용해 하루 최대 1천400㎾ 전기를 생산한다. 오지인 울릉도에 1966년 공식적인 한전 전기가 들어오게 된 일등 공신이 추산 용출수다. 나머지 1만 t 정도는 바다로 흘려보내고 있다. 봉래폭포는 일 3천t의 물이 솟아나는 연중 마르지 않는 폭포이며 겨울에도 얼지 않으며 울릉도 최고의 명승지 가운데 한군데로 꼽힌다. 울릉도 최고봉인 성인봉(984m)으로 오르는 길목에 있으며, 동해안 어업 전진기지 저동항으로부터는 약 2㎞ 떨어져 있다. 이곳의 물은 나리분지의 북서쪽에 모인 강수가 지하로 스며들어 지표로 솟아 나오는 것이다. 지표로 솟은 다량의 물이 지형의 기복을 따라 흘러내리면서 높이 약 30m의 3단 폭포를 형성하고 있다. 수량이 풍부해 1년 내내 폭포의 장관을 볼 수 있는데 이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은 도동리와 저동리를 비롯한 울릉도 남부 지역의 주요 식수원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이곳을 '굴등'이라고 불렀는데, 봉래폭포가 있는 꼭대기에 굴이 있고 그 굴속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34년 일본인 도사(島司)가 부임해 이 폭포를 보고 개발만 잘하면 제2의 금강산이 되겠다고 하면서 개발했다고 한다, 주민들을 동원해 누각을 짓고 바닷가에서 폭포에 이르는 길을 넓히고 길가에는 삼나무를 심었다. 금강산을 염두에 두고 폭포를 개발했으며 여름철 금강산을 '봉래산'이라고 부르는 탓에 이 폭포를 봉래폭포라고 이름 붙였다. 물은 '검은 황금'(Black gold)이라 일컫는 석유에 빗대 '푸른 황금'(Blue gold)이라 불릴 만큼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울릉군은 매일 바다로 흘려보내는 추산 용출수 1만t의 물을 이용해 지난 2017년부터 LG생활건강과 먹는 샘물 개발사업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오는 2022년부터 생산·판매를 목표로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울릉군은 먹는 샘물 생산으로 인해 10년간 생산 유발효과 3천200억 원, 부가가치유발 1천400억 원, 고용 창출효과 1천300명, 세수증대 50억 원을 예상한다. 울릉군의 연간 예산이 2천억 원대인 점을 고려하면, 먹는 샘물의 생산·판매가 미래 울릉도 최대 수익사업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김이환 〈울릉군 문화관광해설사〉정용태 기자 jyt@yeongnam.com눈으로 덮힌 나리분지. 나리분지와 주변 산에 쌓여 있던 눈이 서서히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어 화산석이 천연 정수기 역할을 하는 나리분지의 지하에 저장된다. 추산용출소 전경. 정용태 기자봉래폭포 전경 경북 울릉도에 건설중인 생수 생산공장.
2021.09.11
[울릉도·독도 파노라마(9)] 축구장 280개 규모의 분화구 안에 또 다른 분화구...세상에 유례 찾기 힘든 나리분지
울릉도에서는 유일하게 평지를 이룬 나리분지. 나리분지는 화산분화구이다. 처음 화산이 터졌을 때는 이곳 분화구도 백두산이나 한라산처럼 물이 고여 있었고, 분화구 역시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분화구 주변의 산들이 무너져 물을 다 덮어버렸고 현재의 평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약 6천 년 전에 나리분지 북서부에서 한 차례 더 화산이 분출해 알봉과 알봉 분지가 생겨났다. 이중 화산폭발이 된 것이다.알봉은 나리분지를 주변의 산들이 새 둥지처럼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나리분지 한편에 새알처럼 동그랗게 솟아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알봉 반대쪽엔 다시 나리분지와 같은 평지인 알봉 분지가 있다. 이렇듯 커다란 분화구 안에 또 다른 작은 분화구가 잘 보존이 되어있는 곳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며, 이런 형태의 이중 화산분화구에 사람이 사는 곳은 더욱더 유래를 찾기 힘든 귀한 곳이 나리분지다. 나리분지는 동서 1.5㎞, 남북 2㎞로 면적이 198만㎡에 이른다. 눈 씻고 찾아봐도 평지라고는 없는 울릉도에서 나리분지는 육지의 평야에 버금가는 광활한 들녘인 셈이다. 주변 서쪽 지역 알봉 분지를 포함하면 330여 만㎡에 이른다. 울릉도의 최고봉 성인봉과 형제봉이 주변에 천길 절벽으로 병풍처럼 둘러싼 거대한 암벽들과 화산 분화구에 화산재가 쌓여 생긴 화구원으로 주변 풍광이 아름답다.울릉도 개척민들이 130여 년 전(1882년)부터 화산 분화구 중심 주변에 너와집과 투막집을 짓고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이 '나리(羅里)'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한자의 의미처럼 '비단처럼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나리꽃이 예나 지금이나 많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개척 당시 나리 분지에도 사람이 많이 거주했었는데 먹을 것이 마땅히 없던 시절에 겨울을 지나 봄이 되면 나리의 뿌리를 캐서 5∼6월까지 연명했기 때문에 개척민에게 나리꽃은 아주 소중한 양식이었다. 개척 당시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천혜의 요새여서 입구만 잘 지키면 능히 100만 군사도 막을 수 있는 요충지이고 평평한 평지에서는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라 조선 고종이 울릉도로 파견한 이규원 검찰 일기에 적혀 있으며 최대 96가구 500여 명이 이곳 나리분지에서 살았다고 전한다. 지금은 16가구 정도 살고 있다.나리분지는 12월부터 4월까지 이어지는 겨울철이면 3∼4m 이상의 폭설이 자주 내려 국내 최대 다설지(多雪地)로 유명하다. 개척민들은 강설량이 많은 이런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통나무를 이용해 울타리를 세운 귀틀집을 지었다. 지붕에는 너와를 얹거나 억새를 이어서 '너와집' 또는 '투막집'으로 불린다. 눈이 많이 와도 집안으로 눈이 들이지 않고 안에서 모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벽체에 '우데기'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울릉도만의 특징이 담긴 가옥구조다. 오늘날에는 주택개량사업 등으로 그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현재 너와집 1동과 투막집 4동이 유일하게 남아 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특히 너와집은 2007년 12월 31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나리분지 일대에는 희귀 멸종 식물과 너도밤나무·섬단풍나무·마가목 등의 울릉도의 다양한 자생식물이 산재해 아름다운 숲을 형성하고 있다. 나리분지에서 성인봉 산기슭까지 이르는 4.5㎞의 아름다운 숲길은 찾는 이들에게 태고의 신비를 잘 간직한 채 자연 그대로 모습을 잘 보여줘 명품 숲길로 통한다. 나리분지 숲 일대는 성인봉 원시림과 함께 산림청이 선정한 보전·연구형 명품 숲 중 하나로 2002년부터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과 시험림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김이환 〈울릉군 문화관광해설사〉경북 울릉도 나리분지 전경. 나리분지와 알봉 일대 전경. A가 나리분지, B가 알봉, C가 알봉분지 나리분지에 있는 너와집. 나리분지에 있는 투막집. 나리분지에서 성인봉 산기슭 신령수까지 이르는 숲길.
2021.09.04
[울릉도·독도 파노라마 (8)] 독도 알고 방문하자 - (하) 독도경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은 동도일까 서도일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은 국민 관광지 독도를 찾는 탐방객들이 울릉도에서 여객선을 타고 도착하는 곳은 동도 선착장이다.독도 동도에는 대한민국 경찰청 독도경비대가 주둔하고 있다. 그리고 독도항로표지관리소가 있고 관리소 직원 3명을 포함하면 동도에는 최소한 30여 명 이상의 사람이 살고 있다.동도 선착장은 5백t급 선박 1척이 댈 수 있는 물양장 길이 80m, 진입 통로길이 100m, 길너비 3m, 간이 접안시설 20m 등을 갖추고 있다. 1997년 선착장이 완공되었을 때 김영삼 대통령이 준공기념으로 '대한민국 동쪽 땅끝'이라고 쓰인 친필 휘호가 독도 선착장준공비에 새겨져 있다.일본은 1914년 대한민국 주소를 통폐합하면서 동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이를 우리 정부가 2008년에 다시 우리 이름으로 바꿔 새로운 도로명 주소를 부여했다. 독도는 전 국민 공모를 통해 2011년 6월에 동도에는 '독도이사부길', 서도에는 '독도안용복길'이 각각 새로운 도로명 주소로 정해졌다. 동도 선착장에 있는 '독도이사부길' 도로명 표지판은 이곳을 배경으로 인증사진을 남기는 탐방객들로 인해 독도에서 독도 선착장준공비와 함께 최고 인기 있는 '포토존'이다.동도 선착장 주변에는 한국전쟁 직후 혼란했던 시기 일본인들의 독도 침범으로부터 독도를 수호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상징으로 세워진 3개의 표지석이 있다. 독도 선착장준공비 뒤편 절벽 가장자리에 두 개의 표지석이 있다. 하나는 1953년 '한국산악회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대'가 민간인 최초로 설치했던 표지석이 태풍으로 유실된 것을 2015년 복원한 것으로 가로 60㎝, 세로 25㎝, 높이 46㎝의 직육면체로 '독도'가 우리말과 한자·영어로 새겨져 있다. 조금 더 뒤쪽에 가로 62㎝, 세로 19㎝, 높이 111㎝ 화강석에 세로로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 지표'라고 한자로 새겨진 직사각형의 표지석은 1954년 경상북도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알리고자 세웠다. 나머지 하나는 1950년 6월 8일에 동도의 몽돌 해안에 세운 비석이다. 가로 72㎝, 세로 30㎝, 높이 220㎝ 크기이며, 전면에 '독도조난어민위령비(獨島遭難漁民慰靈碑)'라고 새겨져 있다. 1950년대에 유실되어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았으나 2005년에 경상북도가 복원해 새로 세웠다. 유실되었던 독도조난어민위령비는 2015년 8월에 독도 바다 밑에서 다시 찾아내 탈염·오염물 제거 작업을 거쳐 2017년부터 울릉도의 안용복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동도 선착장에서 마주 보이는 서도에는 주민 숙소가 있다. 이곳은 독도 지킴이 고(故) 김성도 씨가 살던 낡은 숙소를 지난 2011년 국비 30억 원을 투입해 현대식 4층 건물로 증·개축했다. 주민 숙소에는 지난 2018년 10월 김성도 씨가 지병으로 별세하고 난 후 지금은 고(故) 김성도 씨의 부인 김신열(83) 씨와 울릉군 독도 관리사무소 직원 2명 등 모두 3명이 살고 있다. 울릉군 직원들은 2008년 4월부터 독도 방문객들의 안전지도·지원 등을 위해 주민 숙소에 상주해 근무 중이다.서도 주민 숙소 뒤로 보이는 계단은 해수 담수화 시설이 도입되기 전 서도의 식수원인 물골로 가는 계단이다. 이 계단은 예부터 독도 주민이나 어민들이 물골에서 식수를 얻기 위해 만든 길로서 998계단으로 조성해 놓았다. 물은 생명의 지표이며, 또한 독도가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섬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서도의 물골이 상징하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물골은 1950년대 독도를 지키던 의용수비대원과 인근에서 조업하던 어민들이 식수를 조달했던 유일한 공급처로 하루 700∼800ℓ의 물이 고인다. 지난 2007년 주민 숙소에 담수화 시설을 도입해 식수 문제를 해결하자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이경애 〈울릉군 문화관광해설사〉지난 1997년 준공된 독도 동도 선착장독도 선착장준공비독도 동도 도로명 표지판독도 서도 도로명 표지판한국산악회가 독도 동도에 세운 표지석경상북도가 세운 독도표지석독도조난어민위령비서도주민숙소서도 주민숙소 뒤편으로 물골로 가는 998계단독도서도물골샘.
2021.08.28
[울릉도·독도 파노라마 (7)] 독도 알고 방문하자-(상) "탐방 후 반드시 명예주민증 발급을"
삼대(三代)가 덕을 쌓아야만 갈 수 있다는 우리 땅 '독도'. 어렵사리 도착해 30분이란 짧은 시간, 독도 동도 선착장으로 한정된 공간에서 무엇을 보고 와야 할지에 대해 질문하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늘 남아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앞으로 독도를 찾는 방문객들이 독도에 대해 제대로 보고 느끼기 위해서 독도에 대해 2회에 걸쳐 알아보기로 한다.■우리 땅 독도 알고 방문하자 (상)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해온 독도는 그 아픔 또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에 '독도'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진다. 매년 20만 명이 넘는 탐방객이 찾는 '독도'는 동도와 서도 그리고 89개의 암석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우리의 영토다. 동도와 서도는 간조 시 해안선 기준으로 최단 거리가 151m이다.독도는 460만 년 전 화산이 폭발해서 생긴 섬이다. 독도가 처음 화산이 폭발해 생겨났을 당시 그 크기가 울릉도 정도였다. 오랜 세월 파랑과 침식으로 인해서 현재 형태의 독도가 됐다. 동도와 서도가 하나의 섬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화산활동 흔적이 남아있다. 동도의 숫돌바위와 서도 주민 숙소 뒤쪽으로 연결된 암맥을 보면 같은 용암 성분의 암질로 나타나 이를 통해 하나의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천연기념물 제336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는 독도는 2012년 12월 27일 자연공원법 제36조의3의 규정에 따라 울릉도와 함께 우리나라 국가지질공원 제1호로 인증·고시됐다. 모두 23개의 명소 가운데 울릉도에 19개가 있고 독도에는 독립문바위·삼형제굴 바위·천장굴·숫돌바위 등 4개가 있다.'독립문 바위'는 바위의 모양이 독립문의 형상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동도의 맨 끝에 있다. '삼형제굴 바위'는 마치 두 동생이 형을 따르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도와 동도 사이에 위치해 서북쪽 멀리서 독도를 바라봤을 때 동·서도와 함께 또 하나의 산봉우리처럼 보인다. 이로 인해 독도를 세 개의 봉우리란 의미로 예전에 '삼봉도'라고 불렀다.독도의 동도 동쪽 끝부분에 깊이가 100m 정도인 컵 모양의 분화구 모양이 있다. 이 분화구에서 바다까지 바닷물이 왕래하는 동굴 두 개가 호수를 이루고 있는데 이 굴을 '천장굴'이라고 한다.'숫돌바위'는 독도 주민과 독도 의용수비대대원들이 칼을 갈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도 선착장 인근에 있어 삼형제굴 바위와 함께 선착장에서 눈으로 볼 수 있다.독도를 다녀온 탐방객이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독도 명예 주민증을 만드는 것이다. 독도 명예 주민증은 독도 영유권을 강화하고 홍보하기 위해 독도에 상륙했거나 배를 타고 독도를 한차례 이상 선회한 국내외 방문객이 신청해 받을 수 있는 주민증이다.지난 2010년 11월 울릉군에서 발급하기 시작해 11년 만에 7만 명을 넘어섰다. 독도 명예 주민증의 외관은 일반 주민등록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로 8.5㎝, 세로 5.4㎝ 크기이며 울릉군수 직인이 찍혀 있다. 또 '울릉도 독도 천연보호구역 관리 조례 제11조에 의거 발급됩니다'란 문구와 태극기·독도 사진이 담겨 있다.발급은 울릉군 독도 관리사무소 홈페이지에 접속해 독도행 여객선표 상단에 있는 16자리의 숫자를 입력하고 본인 사진과 주소를 등록한 후 신청하면 우편으로 무료로 받을 수 있다. 독도 명예 주민증은 독도 사랑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울릉도에서 관광시설을 이용할 때 울릉주민과 똑같이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어 반드시 발급받기를 권한다. 이경애<울릉군 문화관광해설사〉 정용태 기자 jyt@yeongnam.com독도 전경독도 동도의 독립문바위독도 동도와 서도 사이에 있는 삼형제굴 바위독도 동도 정상에서 보이는 천장굴독도 동도선착장 옆에 있는 숫돌바위. 숫돌바위 오른쪽으로 삼형제굴 바위가 보인다.독도명예주민증 울릉군 제공
2021.08.22
[울릉도·독도 파노라마 (6)] 독도박물관 24주년- (하) 6~20세기 한·일·러 고지도 전시 우리땅 입증
독도박물관은 울릉도·독도와 동해를 둘러싼 관련 자료를 발굴·수집·연구하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전시·관리·교육·홍보를 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와 이론의 토대를 구축하는 동시에 국민의 영토 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박물관 외관은 독도의 옛 이름 '삼봉도(三峯島)'의 이미지를 본 떠 세 개의 큰 바위와 동해의 푸른 바다를 형상화한 연회색 화강석과 푸른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독도를 연상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독도박물관은 울릉군이 부지를 제공하고 삼성문화재단에서 지어 헌납, 1997년 8월8일 개관했다. 개관 당시 대지 8천68㎡, 전체면적 1천600㎡,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건물에 3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자연생태 영상실 등을 갖췄다.2016년 개관 20주년을 맞이한 독도박물관은 낡은 전시시설을 첨단화하고 질 높은 전시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20여 억원을 들여 기존의 주요 전시실을 개축해 재개관했다. 관람객들이 독도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낡은 전시시설을 정비하고 음성 및 입체영상 등 디지털 다중정보전달방식 시스템을 구축했다. 또 다양하고 첨단화된 전시가 가능한 시설로 탈바꿈했다. 고지도·고문서 등 인문사회과학 위주의 기존 전시공간에 독도의 동식물과 지질환경, 해양자원 등 자연생태 분야의 전시공간과 체험시설도 추가로 갖췄다.제1전시실과 2전시실에는 테이프를 빨리 감는 기법을 사용해 독도의 하루를 40초로 줄여서 보여준다. 또 독도를 방문했지만 볼 수 없는 곳은 VR로 볼 수 있게 준비돼 있다. 또 서기 512년부터 1900년대까지의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고지도와 각종 문헌이 전시돼 있어 우리의 고유영토로서 독도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제3전시실에는 독도의 어장을 관리하는 독도리 이장인 고(故) 김성도 씨, 타국의 위협으로부터 독도의 안전을 지키는 독도경비대, 그리고 독도를 대상으로 한 국민의 다양한 활동상 등이 전시돼 있다. 제4전시실에는 독도의 식물과 조류·어류 등 독도의 생태를 사진으로 볼 수 있으며, 대형 화면을 통해 독도의 자연환경을 보여주는 영상 코너가 마련돼 있다.영상실에는 독도의 자연, 일본의 불법적 영유권 주장의 문제점 등 독도와 관련한 다양한 영상을 볼 수 있다. 특히 미국인 험프리렌지가 1960년대 말 울릉도에 거주하며 울릉도 주민들의 생활상을 영상으로 기록한 독립영화 'Out There A Lone Island'를 주제별로 선택해 감상할 수 있다.독도박물관 주변에는 야외 독도박물관도 마련돼 있다. 울릉도 자연석 828개로 만들어진 조경 시설과 편의시설이 마련돼 있어 관광객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또 개관 5주년을 맞이해 대마도가 우리 땅이었다는 증거인 '조선국 지리도'가 새겨진 '대마도표석비'가 있다. 우리 땅이었던 대마도가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져 지금은 일본 땅이 된 것처럼 독도도 우리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버리면 대마도의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비석이다.우리 영토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탄생한 독도박물관. 일본의 독도 침탈 시도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이제는 말보다 행동'으로 독도를 수호해야 한다. 독도를 수호하고 사랑하는 첫걸음은 국민이 독도와 함께 독도박물관에 관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꾸준히 방문하는 것이다. 이경애〈울릉군 문화관광해설사〉 정용태기자 jyt@yeongnam.com독도박물관 입구.독도박물관 영상관에 마련된 미국인 험프리렌지 영상실.독도박물관 야외박물관에 세운 대마도표석비.
2021.08.16
[울릉도·독도 파노라마 (5)] 독도박물관 24주년- (상) 독도 사랑 실천 故 이종학 초대관장
우리나라에서 최초이자 유일한 영토박물관인 독도박물관. 맑은 날 독도가 바라보이는 울릉도 관문 도동항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기에 울릉도를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둘러볼 수 있다. 독도가 한국 땅임을 알리기 위해 세워져 올해로 개관 24주년을 맞은 독도박물관에 대해 2회에 걸쳐 알아보기로 한다.'독도'하면 자연스럽게 독도 이장 고(故) 김성도씨를 떠올리듯 울릉도 주민들에게 독도박물관 하면 초대 관장이었던 고(故) 이종학 관장을 손에 꼽는다. 독도박물관은 1995년 광복 50주년을 맞아 울릉군이 부지를 제공하고, 삼성 문화재단이 80억원을 들여 건물을 지어 울릉군에 기부해 1997년 8월8일 개관했다.박물관 입구에는 한자와 한글로 된 '獨島博物館(독도박물관)'이라는 큼지막한 글이 아로새겨진 비석이 있다. 독도박물관 초대 관장이었던 이종학 관장이 개인재산을 털어 제작한 것이다. 비석의 한글체는 세종대왕의 '월인천강지곡'에서, 한문체는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집자했다.80년대 초부터 입증자료 수집재임기간엔 1300여점 기증日의 영토주장 반박에 힘써이종학 관장은 일본과 독도 영유권 분쟁이 뜨거워지기 훨씬 이전, 독도가 한국 땅임을 입증하는 자료를 준비해왔다.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그가 30년 동안 모은 독도 자료 351종(512점)을 바탕으로 고(故) 홍순칠 대장 유품,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와 푸른독도가꾸기모임이 제공한 자료 등 귀중한 전시품이 모여 국내 유일의 영토박물관이 섰다. 또, 그가 초대 독도박물관장으로 재임한 기간에 독도박물관에 기증한 자료가 무려 1천300점에 달한다. 대부분 발품 팔고 사비로 모은 독도 사료였다. 독도박물관의 개관은 이종학 관장의 눈물과 땀으로 채워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종학 관장은 1980년대 초부터 독도에 관한 일본 측 자료를 수집하려고 수십 차례 일본을 왕래했다. 이 과정에서 수천 종의 사료적 가치가 귀중한 독도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 이를 배경으로 시마네현 관계자에게 독도가 한국 땅임을 강조했다. 1997년 독도박물관 초대관장을 역임했지만 2000년 5월 '지키지 못한 독도, 독도박물관 문 닫습니다'라는 현수막과 함께 독도박물관을 폐관시켜 독도 문제에 대한 한국 정부의 굴욕적 태도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당시 독도에 대한 한국 정부의 태도는 미온적이었다. 일본이 행정·입법·사법부를 총동원해 독도침탈 야욕을 대내외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그것이 그때 우리나라의 처지이자, 수준이었다. 그는 그것을 굴욕이라고 받아들였고, 박물관 폐관이라는 강수를 둔 것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독도박물관 관장에서 물러난 후 2001년 3월에 일제강점기와 관련된 자료를 사비를 털어 마련해 북한 평양 인민대학습당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2002년 11월 별세하기 전까지 올바른 역사 찾기 운동을 펼쳤던 이종학 관장의 가장 큰 업적은 많은 이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독도에 대한 문제를 대내외적으로 알렸으며, 일본 측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자료를 모으는 데 평생을 바쳤다는 것이다. 특히 독도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흩어져 있는 독도 자료를 발굴해 재정립하고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쳐 노력했다.생전 '죽어 한 줌 재 돼도 우리 땅 독도 지킬 터'라는 좌우명처럼 독도에 대한 무한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이를 실행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노력은 현재 독도박물관에 보관된 자료를 통해 독도의 한국 영유권 주장에 대해 뒷받침해 주고 있다. 울릉군민들은 이런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03년 6월12일 독도를 바라보고 있는 독도박물관 한편에 그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다.이경애 〈울릉군 문화관광해설사〉정용태기자 jyt@yeongnam.com독도박물관 전경과 고(故) 이종학 관장(작은 사진).故 이종학 관장이 박물관 입구에 세운 비석.
2021.08.09
[울릉도·독도 파노라마 (4)] 조선 조정의 수토 정책(하)...성하신당엔 슬픈 전설 속 동남동녀가…
조선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나는 수토활동은 태종 12년(1412년) 강원도관찰사 보고에 의하면 울릉도에 11호 60여 명이 거주하고 소·말과 논은 없지만 콩·보리를 경작하고 해산물과 과일이 많다고 보고했다. 태종 17년(1417년) 안무사 김인우가 우산도를 조사하고 토산물을 조정에 바쳤다.세종 7년(1425년) 안무사 김인우의 2차 수토 때 수행원 46명이 실종되는 큰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중 36명은 익사하고 10명은 표류하다 일본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돌아왔다. 숙종 19년(1693년) 울릉도에서 안용복과 일본 어부들의 충돌로 조선과 일본 사이 외교분쟁이 발생해 이 사건 이후로 삼척 첨사 장한상이 수토관이 되어 이듬해 가을에 20일 동안 울릉도를 수토하면서 독도까지 돌아보고 왔다는 사실이 특이하다. 숙종 21년(1695년) 삼척 첨사 이준명이 울릉도 순찰을 회피한 이유로 관직에서 파면당했는데 이는 울릉도 수토 중 사망한 관리가 많아 이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울릉도 곳곳에는 수토 역사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는데 숙종 37년(1711년) 삼척 영장 박석창이 울릉도를 수토하고 바위에 수토사실을 새겨놓은 각석문이 있다. 울릉도의 관문 도동항에서 발견돼 울릉수토역사기념관에 전시하고 있으며 이는 울릉도 수토 역사를 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울릉군 서면 학포마을 암벽에는 검찰사 이규원 외 다수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임오명 각석문'이 남아 있다. 조선 고종 19년(1882년) 임오년의 기록으로, 울릉도의 근세 흐름을 금석문으로 입증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고종 19년에 검찰사 이규원은 15일 동안 울릉도 전체를 수토하고 그 보고서를 조정에 제출하면서 울릉도 쇄환정책(刷還政策)의 마침표를 찍었다. 본격적으로 울릉도를 개척하는 계기가 됐다. 울릉도 서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울릉군 서면 태하리엔 성하신당(聖霞神堂)이라는 옛날 서낭당이 있는데 여기엔 조선 쇄환정책 시기에 탄생한 한 편의 슬픈 전설이 전해온다.조선 초기 태종은 안무사 김인우를 보내 울릉도 주민들을 육지로 이주시키게 했다. 김인우는 섬사람들을 모두 모아 다시 육지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풍랑이 심해 돌아가지 못하던 중, 두 명의 남녀를 두고 가라는 꿈을 꾼 뒤 그대로 했더니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육지로 돌아온 김인우는 울릉도에 두고 온 두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8년 뒤 조정에서는 그에게 다시 안무사 직을 맡겼다. 울릉도에 도착한 김인우가 자신이 기거하던 곳으로 가보니 꼭 껴안은 동남동녀의 백골이 있었다. 김인우는 용서를 빌면서 그들을 위해 그곳에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울릉도 주민들은 이곳을 성하신당이라 부르며 매년 음력 3월1일에 농사나 어업의 풍년을 비는 제사를 이 사당에서 지내며 배를 진수할 때도 꼭 이곳에 와서 진수식을 올리고 무사한 뱃길이 되기를 기원하게 되었다고 한다.지금까지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서 국가의 정책을 수행한 수토관들의 애환과 고통이 담겨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간략하게 소개했다. 울릉도·독도의 개척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울릉도에서 눈으로 직접 체험하며 울릉도의 수토 역사를 확인해 보는 것도 울릉도·독도 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임만주〈울릉군 문화관광해설사〉 정용태기자 jyt@yeongnam.com매년 음력 3월1일에 울릉도 개척민들의 정신을 기리고 지역의 무사 평안을 기원하기위해 열리는 성하신당 기원제의 모습.울릉수토역사전시관의 '신묘명각석문'.울릉군 서면 학포리 암벽에 새겨진 '임오명각석문'
2021.08.02
[울릉도·독도 파노라마 (3)] 조선 조정의 수토 정책(상)
울릉도·독도는 우리나라 최동단에 위치하며 역사적·지리적·국제법상 우리의 영토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천혜의 화산섬이다.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울릉도·독도를 과거 조정에서는 어떤 정책으로 지켜왔는가를 생각하면서 그 수단의 하나인 수토정책(搜討政策)에 대해 2회에 걸쳐 알아보기로 한다. 울릉도·독도를 관리하기 위한 정책의 이름으로 수토정책의 수토란 "무엇을 조사하고 찾아서 토벌한다"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지만, 그 정책은 울릉도·독도를 전체적으로 관리·지원하는 넓은 의미의 국가 정책이며 내국인과 외국인을 막론하고 떠돌아다니거나 도망간 사람을 데리고 돌아와 섬을 비우는 쇄환정책(刷還政策)에 비해 적극적인 관리정책이라 할 수 있다.고려 시대 현종 9년(1018∼1022) 때 고려의 관리들이 우산국에 입도해 농기구를 지원한 기록이 있으며 그 후 조선조 초기부터 1882년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진 이후까지도 수토정책은 지속해왔다. 이러한 수토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국가에서 파견하는 관리들을 수토사 또는 수토관이라 부른다.고려 시대에는 감창사·안무사·작목사 등으로 불렀고 조선 시대에는 안무사·심찰사·경차관·순심경차관·수토군관 등으로 부르다가 17세기 말 울릉도에서 어로 활동을 하던 조선의 어부와 상인을 일본이 납치하는 '울릉도쟁계(鬱陵島爭界)'를 겪은 이후 수토관으로 정착했다. 수토군관 혹은 수토군은 울릉도 이외의 지역에도 있었지만, 수토정책이 실시되면서 울릉도에 정기적으로 파견된 군관을 수토관으로 불렀다. 수토관은 삼척진의 영장과 월송포의 만호가 교대로 맡았는데 영장과 만호는 관리의 직책 명칭이다.고려 인종 19년(1141) 명주도·감창사·이양실이 파견돼 울릉도의 과일과 나뭇잎을 채취해 조정에 바쳤다. 고려 의종 11년(1157)에는 명주도·감창사·김유립이 파견되어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킬 계획으로 조사했으나 암석이 너무 많아 주민이 살 수 없다고 보고했다. 고종 40년(1253) 이승휴가 몽골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강원도 삼척 요전산성을 수비하던 중 울릉도를 관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울릉도는 고려 말 왜구 때문에 무인도가 되었으나 조선 초 이래 조정의 쇄환정책(刷還政策)에도 불구하고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가 살았다.경북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2017년 12월 문을 연 수토역사전시관에는 조선 시대에 파견된 총 38명의 수토사 명단 비가 세워져 있으며 풍랑에 순직한 수토사 추모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 조선 시대 수토관은 경북 울진에 있는 관청에서 대기하다 맑은 날씨가 되면 울릉도를 향해 출발했고 타고 가는 배는 판옥선 형태로 추정하고 있으며 대략 30∼40여 명이 탈 수 있었다. 수토정책 실시 초기에는 2년 간격으로 3년에 한 번, 그 후로는 2년에 한 번으로 바뀌었고 수토관 파견에는 군관·수행원·역관이 동행했으며 적을 때는 80여 명, 많을 때는 150여 명의 규모로 파견됐다. 임만주<울릉군 문화관광해설사>정용태기자 jyt@yeongnam.com울릉 수토역사전시관 앞 정원에 옛 모습을 복원해 전시한 수토선2017년 12월 울릉군 서면 태하리에 문을 연 울릉 수토역사전시관 전경울릉 수토역사전시관 정원에 있는 조선시대 울릉도 수토사 38명의 명단이 적힌 비석
2021.07.26
[울릉도·독도 파노라마 (2)] "울릉도엔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 초기부터 사람 살았을 것"
동해 한가운데 오롯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외로이 떠 있는 섬 울릉도와 독도. 이 섬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까? 학계에서는 울릉도 곳곳에서 발견된 고분(古墳)들과 무문토기·청동장신구·갈돌 등을 근거로 청동기시대나 철기시대 초기부터 울릉도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문헌상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록은 3세기에 나오기 시작한다. 중국의 고전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 3세기쯤 이미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돼 있어 삼국시대 이전에 울릉도와 독도는 '우산국'이라 불리는 소규모 해상왕국이었음을 사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 문헌에 울릉도·독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이다. 기록에 따르면 울릉도와 우산도(독도)라는 두 개의 섬이 우산국이라는 하나의 독립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우산국은 신라 지증왕 13년(512년) 신라 장수 이사부에 의해 신라에 병합됐고, 이로써 울릉도·독도는 우리나라의 부속 도서로서 우리 역사에 편입되어 지금까지 우리의 고유 영토로 존재해 왔다. '고려사' '세종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살펴보면 울릉도·독도는 하나의 광역 지역으로서 우산도로 불리거나, 각각의 독자적인 섬으로서 우산과 무릉으로 불렸다. 고려 초기에는 공납 물을 바쳤다는 기록, 고려 중엽부터는 관원이 왕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후기에 울릉도·독도는 강원도 울진현의 담당으로 편입됐으며, 내륙인들의 왕래가 활발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들어 울릉도·독도에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하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지속해서 추진하다가 1881년(고종 18년) 울릉도·독도 역사의 큰 전환점이 찾아오게 된다. 정부에서 울릉도 쇄환 정책을 폐기하고 개척령을 반포해 비로소 내륙인의 왕래가 허가됐다. 개척령이 내려진 그 이듬해 16가구 54명이 정부 주도하에 공식적으로 첫 이주를 하면서 울릉도 개척의 불씨를 당겼다. 이를 바탕으로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대내외에 반포해 국제법상 완벽한 우리의 영토임을 확고히 했다. 이 칙령에는 울릉도를 울도로 바꾸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해 울릉도·독도를 정식 지방 관제에 편입한다는 사실과 함께, 제2조에 '군청의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도와 죽도 및 석도를 담당할 것'이라고 명시해 '석도(독도)'가 울도 군수의 관할 구역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일본은 1905년 독도를 '주인 없는 섬'이라며 지방정부인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통해 독도를 '죽도(다케시마)'로 명명하고 불법으로 일본의 영토로 편입했다. 일본 정부는 이를 근거로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정당화하는 증거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마네현 고시 40호'는 일본 정부의 관보에 게시되지 않고 대외적으로도 공포된 적 없는 일본 시마네현 내부 회람용 문서에 불과해 국제법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했다. 한 마디로 역사적·지리적·국제법적으로 근거와 효력이 없는 일본 정부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 우리나라는 1945년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후 우리의 주권과 영토를 포함한 모든 권리를 되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은 지속해서 독도를 일본의 영토로 주장하고 있다. 이는 독도에 대한 국제적 분쟁 발생 시 명분을 쌓기 위한 일본의 다단계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울릉도·독도에 관한 올바른 역사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울릉도·독도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한반도와의 연계 안에서 존재해 왔고, 우리 어민들은 고기를 잡는 거점으로 줄곧 활용해 왔다. 역사 안에서 울릉도·독도는 본토와 섬의 관계에 놓여 있었고, 동일 역사·문화 생활 권역에 속해 있는 대한민국 고유영토이다. 정용태기자 jyt@yeongnam.com신라 지증왕 13년 신라장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할 당시 우산국 우해왕과 격전지로 추정되는 울릉군 서면 남양리 일대 모습울릉군 서면 남서리에 있는 횡혈식 석실고분. 울릉군 북면 현포리에 있는 고분. 울릉도 고분에서 출토된 토기. 울릉군 서면 남양리 해안가에 있는 사자바위(사진 앞)과 투구봉. 사자바위와 투구봉의 명칭은 신라와 우산국이 싸울 때 생긴 이름이라고 전해 진다.1900년 10월 25일 제정한 '대한제국 칙령 41호' 대한제국 칙령 41호는 제정 2일 뒤인 1900년 10월 27일 관보에 게재되어 국내외에 반포·공인됐다.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게제한 관보1716호.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국최고사령부 미국 군정청이 일본의 영토를 규정한 지도로 울릉도와 독도는 남한의 영토 구획선 안에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2021.07.17
[울릉도·독도 파노라마 (1)] 나이로 보면 독도가 형님, 울릉도가 동생입니다
이번 주부터 우리가 잘 아는 듯하면서도 잘 모르고 있는 울릉도·독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울릉도·독도의 출생부터 먹거리, 볼거리, 문화, 생태 환경 등 섬의 속살을 가감없이 전합니다. 지면은 '울릉도·독도 파노라마'라는 제목으로 매주 월요일, 영남일보 홈페이지에는 상시 실립니다. 깊고 넓은 동해에 우뚝 솟은 화산섬 울릉도·독도는 너무도 잘 알려진 곳이다.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쉽게 갈 수 없다. 벼르고 별러서 찾아가기로 마음먹어도 날씨의 허락을 받아야만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신비의 섬'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었다. 울릉도·독도는 우리나라 국토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섬이다. 울릉도·독도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민 관광지로 손꼽히는 건 빼어난 자연경관과 도둑·공해·뱀이 없고, 물·미인·돌·바람·향나무가 많은 삼무오다(三無五多)의 무공해 청정지역이란 이유 말고도 독도와 더불어 대한민국 동쪽을 지키는 든든한 수문장 역할을 하는 대한민국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동해의 거센 파도와 바닷바람이 빚은 화산섬 울릉도·독도는 섬 전체가 해저화산 분출로 인해 바닷속 2천500∼3천300m 깊이에서 솟아올라 화산의 용암과 같은 분출물들이 쌓여서 생겨났다. 그래서 우리나라 서·남해의 섬들에 비해 경사가 가파르고 키가 큰 편이다. 울릉도·독도 탄생의 역사를 간단히 짚어보면 450만 년 전부터 250만 년 전 사이에 동해 속 화산이 폭발해 독도가 탄생했고, 250만 년 전엔 역시 화산폭발로 울릉도가 생겨났다. 울릉도·독도 형제 중 나이로 보면 독도가 형님인 셈이다. 울릉도는 신생대 4기(약 250만 년∼1만 년) 사이에 5∼7단계의 화산활동을 거치며 형성됐고 독도는 신생대 3기 말(약 460만 년∼10만 년 전) 화산활동이 전체적인 윤곽을 만들고, 신생대 4기의 기후 변화로 발생한 해수면 변동과 파랑에 의한 침식·퇴적·풍화작용 등에 의해 현재의 독도가 형성됐다. 울릉도는 오각형 형태의 화산암으로 만들어진 섬이다. 해안선 길이는 64.4㎞이다. 산악은 험준하고 나리 분지 이외에는 평지가 거의 없다. 부속 섬으로는 독도와 죽도, 관음도가 있다. 이 밖에도 40개의 무인도로 구성돼 있으며, 3개 읍·면의 행정조직을 갖춘 전국에서 제일 면적이 작은 지방자치단체이다. 총면적은 72.86㎢이고, 인구는 5천321세대 9천19명(2021년 3월 기준)이다. 울릉도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는 경북 울진군 죽변면으로 130.3㎞ 거리다. 울릉도와 같은 생활권으로 여객선이 주로 오가는 경북 포항은 217㎞ 떨어져 있다.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는 동도와 서도 외에도 주변에 89개의 작은 부속 섬들로 이뤄져 있다. 독도의 전체면적은 18만7천554㎡이며 총 둘레는 5.4㎞이다. 독도는 우리나라 국토에서 가장 동쪽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에서 동쪽으로 87.4㎞ 떨어져 있다. 일본의 시마네현 오키섬과는 157.5㎞ 떨어져 있다. 따라서 울산 간절곶보다 통상적으로 약 3∼4분 정도 빨리 일출을 볼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일출 장소다. 정용태 기자 jyt@yeongnam.com울릉도 공암울릉도 전경독도 전경
2021.07.10
의료대란으로 번진 의대 증원
의료개혁특위 "의료개혁 시기상 미룰 수 없는 과업…소통 통해 의견 좁힐 것"
경북대, 내년도 의대 입학정원 '155명' 조정에 대구경북 타 대학 결정도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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