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6] 독도, 운명 같은 만남
모든 것은 우연이었다. 이왕이면 현지인 추천 민박집에 묵고 싶어 숙소도 예약하지 않고 무작정 배를 탔던 여행 첫날 밤, 울릉크루즈의 조현기 상무가 밤 11시가 넘은 야심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어딘가로 대뜸 전화를 했다. "교수님, 방 있습니까?"바로 그 순간부터다. 일부러 각본을 짠다 해도 이 주연들을 한 번에 캐스팅하긴 힘들 것 같은 우연한 만남이 마치 끝말잇기라도 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줄이 이어졌다. 장한상 장군은 '울릉도사적'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동남쪽에 섬 하나가 희미하게 있다'는 짧은 기록을 남겼을 뿐이지만, 그 중요한 기록은 330년의 세월을 건너오는 동안 숱한 이야기와 인연을 더하며 섬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바로 그 섬, 우리 땅 독도에 관한 이야기다. 한평생 독도 연구한 김병렬 교수"독도는 명명백백한 한국의 영토"지금은 울릉도 산 중턱서 민박집청년단체 JCI, 매년 독도수호대회어린이들도 함께 방문 산 역사교육◆만남 1. 독도 전면 개방의 숨은 공신 (A.K.A 민박집 주인) "330년 만에 울릉도를 다시 찾은 셈인데, 오늘 울릉도에서 어디 어디 가보셨어요?" 순간 말을 잘못 들었나 싶었다. 괜찮다는 데도 굳이 큰 도롯가까지 직접 마중을 나온 민박집 주인은 장한상 장군의 '후손'이 아니라 마치 330년 전의 장군을 만난 듯이 질문을 했다. 그의 시계에선 장한상 장군이 수토관으로 파견된 1694년이나 장군의 후손들이 울릉도·독도를 여행 삼아 오는 2024년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듯 느껴졌다. "여전히 일본과의 분쟁은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올 초에도 일본 가미카와 외무상이 연례 외교연설에서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또 망언을 내놓았잖아요? 일본 국제법학계가 이런 주장의 정책적 토대를 제공해왔는데, 국제법상으로는 꽤 탄탄하게 물밑작업을 해왔거든요." 갑자기 바짝 긴장됐다. 이 민박집 주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국방대학에서 국제법 강의를 하면서 독도 관련된 연구서적만 무려 16권을 써낸 자타공인 독도 전문가, 그것도 국제법 전문가다. "국제법이란 게 그래요.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당연히 우리 땅으로 판결난다고 장담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정신 바짝 차리고 일본 고지도나 역사 문헌에서 일본이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한 사례들을 미리미리 찾아 정리해 놔야죠. 언젠가 정말 국제사법재판소에 가게 된다면 법적으로 대응할 준비를 해놔야 하거든요."순식간에 민박집 가는 길이 국방대학 강의실로 변신한 듯했다. 김병렬 교수는 일본의 주장에 조목조목 반박 대응하기 위해 일본의 영유권 주장을 원어로 공부했고, 일본에도 제대로 알리기 위해서 일어로 책을 쓰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330년 전의 분쟁은 그저 옛일이 아닐 것이다. "장한상 장군이 울릉도에 다녀가신 게, 1693년에 조선의 어부들과 일본 어부들이 울릉도와 독도 해역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일본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거든요."우리 국민이라면 이미 익숙한 안용복 사건. 당시 안용복은 일본 조정에 끌려가서도 '조선의 섬인 울릉도에서 조선인이 고기잡이 하는데 왜 납치해 왔냐'며 당당하게 항의했다. "이 일로 '울릉도쟁계(鬱陵島爭界)'가 발생했죠. 말 그대로 해역 경계를 놓고 한일 간에 분쟁이 붙었다는 말이거든요. 1694년에 장한상 장군이 수토사로 파견될 당시에 이 쟁계가 한창 극에 달했을 때인데 조선 조정에서도 움직이고 우리 어민들도 항의하자 결국 1696년에 일본은 자국 어민들이 울릉도로 출어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렇게 논쟁이 일단락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거든요." 우리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이 문제를 제소하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독도는 '분쟁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명명백백한 한국의 영토. 그래서 지금 독도를 지키는 것도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 주민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인 것이다."그걸 '실효적 지배'라고 하는데 법령, 행정, 치안 같은 공권력으로 이미 우리가 독도를 실제로 통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 국민이 가서 살고, 365일 독도를 오가는 것이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2005년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를 발의하자 우리 정부는 '독도 전면 개방' 정책으로 맞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천연보호구역으로 닫혀 있던 독도를 전 국민이 쉽게 오갈 수 있도록 개방한 것이다. 당시, 김병렬 교수는 청와대 독도대응팀장이었다. 실제로 정책이 실행되기까지는 여러 부처 사이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독도 입도 허용 인원을 해마다 늘려나갔다. 동시에 동북아역사재단 초대 독도연구실장으로 독도 연구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그 장구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울릉도 가파른 산 중턱에 자리한 그의 민박집에 다다랐다(독도에 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울릉 민박 '선녀와 나무꾼'을 예약하면 된다)."여기가 이제 제2의 고향입니다. 제가 한평생 타지에서 독도 연구를 했는데, 와서 한번 살아봐야죠. 독도에 살 순 없으니 그나마 가까운 여기에 둥지를 틀었습니다."자, 여기서 하룻밤 묵고 우리도 이제는 독도를 온몸으로 느껴볼 차례다. ◆만남 2. 수십 년째 독도를 지키는 청년들 (feat. 5살 꼬맹이) "오늘 독도 가는 배는 만석입니다."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얘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민박집을 나서며 오늘은 날이 맑아서 독도 입도가 무난할 것 같다며 좋아했는데, 장군의 후손들 얼굴에도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배 하나를 거의 통째로 예약한 단체관광객이 있다고 했다. 다른 항구로 가봐야 하나. 발길을 돌리던 그 순간이었다. "아, 잠시만요, 몇 분이라고 하셨죠? 지금 막 취소 표가 들어왔는데…"그렇게 우리는 출항 5분을 앞두고 거의 뛰다시피 가까스로 배를 탔다. 어쩌다 보니 예의 그 '단체관광객'과 한배를 탄 셈이다. 배 안은 이미 태극기로 출렁였고 네댓 살의 천진한 아이들은 태극기 페이스페인팅을 한 채로 신나게 뛰어다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청년단체 JCI가 1년에 한 번 독도수호결의대회를 하는 날, 그날이 마침 오늘이었던 것이다. "2005년 3월16일. 날짜도 정확히 기억해요. 일본이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통과시키면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했잖아요. 어찌나 황당하던지. 그 며칠 후에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기자회견을 했는데, 우리 국민들이 최대한 자유롭게 독도에 입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거예요. 그 뉴스를 보고 당장 회원들이 모였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 해 오고 있습니다."그전까지만 해도 독도에 가려면 울릉군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또 여객선도 따로 없어서 주민들 어선을 직접 섭외해야 했다. 경북지구JC 박준걸 기획조정실장은 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기어이 왔던 독도인데 요즘이야 꽃길이라고 했다. 역사와는 거리가 멀 것처럼 생긴 이 젊은 청년들에게 독도는 대체 어떤 의미일까."오늘 온 애들 중에 제일 어린 애가 4살? 5살? 그 정도인 것 같은데, 그 아이들은 독도가 뭔지도 모를 거예요. 그저 태어났을 때부터 매 해 업고 안고 여기를 오니까 그냥 이맘때쯤이면 독도에 오는 것이 자연스러워요. 그게 저는 역사라고 봅니다. 뭐 일본이 백 번 교과서에 저거 땅이라고 해봐야 뭐합니까? 우리 애들이 이렇게 해마다 자유롭게 와서 뛰어놀 수 있는 것. 그것이 우리 청년들이 우리 땅 독도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그 말을 듣고 있자니 괜히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렇게 도착한 독도에서 장군의 후손인 장선호 회장과 장수용씨도 청년들 속에 섞여 독도수호결의문을 낭독했다. 멋모르고 뛰어다니는 꼬맹이들에게 장한상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특별한 식순도 넣었다. 장한상 장군도 보고 계실까. 이곳은 독도. 330년 전 장군이 울릉도에서 희미하게 바라보았던 그 섬에 오늘 우리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고 있다. 모든 것은 우연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우연 같은 필연이 있었을 뿐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330년 전 장군이 준비해두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독도 이후, 장군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글·사진=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공동기획: 의성군2010년 3월, 경북경찰청 헬기를 타고 찍은 독도 사진. 김재도 작가는 2014년 의성조문국 박물관에서 열린 장한상 학술대회 때 사진 전시를 함께했다. 김재도 사진작가는 경북 의성 출신으로 지역사를 기록해 오고 있는데, 누구보다 기록의 중요성을 잘 아는 사람, 그런 그도 학술 대회 때 처음으로 장한상 장군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의 기록에 자신의 기록을 보태고 싶다고 했다. 김재도 사진작가 제공독도의용수비대가 라디오·TV도 없던 시절, 하루종일 독도를 지키면서 바위에 새긴 글씨 '한국령'. 김재도 사진작가 제공독도경비대가 오가는 순찰로를 찍은 항공사진. 경비대가 다니는 길이 한반도 지형을 형상화하고 있다.김재도 사진작가 제공장선호 회장과 청년들이 함께 독도수호결의문을 낭독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오른쪽 끝에 선 장한상 장군의 후손들.
2024.07.24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5] 섬은 알고 있다
운이 좋았다. 뱃멀미 없이 밤새 평온하게 달려 크루즈에서 내린 시각은 아침 7시. 하루를 시작하기 딱 좋은 때다. 장한상 장군의 기록을 따라 장대한 수토여정을 시작해야 하는 만큼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비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래, 일단 아침부터 든든하게 먹자! 그때부터였다.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굳이 맛집을 검색해 보지도 않았는데 무작정 들어간 곳이 마침 허영만 백반 기행도 다녀갔다는 손꼽히는 맛집이었고, 식당 사장님의 남편은 울릉도 곳곳을 누비며 사진 찍는 취미를 가진 멋쟁이였고, 주방에서 홍합 비빔밥이 만들어지는 그 짧은 사이 그의 휴대전화 속 사진만으로도 울릉도 명소 관광을 끝냈고, 택시를 탔는데 마침 3대째 울릉도에 살고 있다는 기사님을 만나 울릉도 근현대사도 초스피드로 들었고, 점심 식당에서는 직접 물질을 해서 홍합이며 따개비를 공수한다는 머구리 사장님을 만나 요즘 울릉도 바닷속 근황까지 들었다. 벌써 끝? 어라… 이게 아닌데… 반나절 만에 길을 잃은 느낌이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장군을 따라가는 우리의 수토여정이 이렇게 쉽고 편안하고 빨라도 되는 것일까. 너무나도 친절하고 다정한 섬사람들이 애꿎게도 수토기행의 방해꾼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 장군의 후손인 순천장씨대종회장 장선호씨가 왜적 앞에 장검을 꺼내들 듯 허리춤에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장한상 장군의 기록이다. ◆330년 전 왜적의 흔적으로 둘러싸인 울릉도 '서쪽으로 큰 골짜기를 바라보면 사람이 살던 터가 세 군데 있고, 또 북쪽으로는 사람이 살던 터가 두 군데 있으며, 동남쪽 긴 골짜기에도 사람이 살던 터가 일곱 군데, 돌무덤이 19개가 있었습니다.'장군이 울릉도 수토 후에 남긴 기록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을 읽어 내려가던 장선호 회장과 문득 눈이 마주쳤다. 같은 의문일 것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장한상 장군이 처음으로 울릉도 수토에 나선 시기는 1694년(숙종20). 당시는 울릉도 '쇄환(刷還)정책'이 실시되던 시기였다.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 조정에서는 울릉도에 백성이 살게 되면 동해안에 들끓는 왜구들이 노략질할 것이고 울릉도를 근거지로 하여 강원도까지 침략할 것을 우려해 '울릉도의 주민들을 육지로 나오게 했다'. 태종실록에 기록된 이 조처를 두고 '섬을 비운다'고 해서 '공도(空島)정책'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일본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펼칠 때 '주인 없이 비워진 땅' '섬을 포기했다'는 것으로 곡해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어쨌거나 이 집터와 돌무덤은 신라 장군 이사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우리나라로 편입시킨 이후부터 조정에서 쇄환정책을 쓰기 이전까지, 그사이 우리나라 백성들이 울릉도에 살던 흔적일까? "그건 아닌가 봐. 여기, 다음 단락에 나오네. 동남쪽 해안에 가마 3개와 솥 3개가 있는데 모양이 우리나라 양식이 아니었대. 가마에는 발도 없고 뚜껑도 없는데 2말 쌀로 밥을 지을 수 있을 정도, 솥은 너비와 지름이 한 자(약 30㎝) 남짓이며 깊이는 두 자 정도로 물 네댓 통을 담을 수 있을 정도… 와,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남기신 거야? 무관은 그저 싸움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정말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동행한 장군의 후손 장수용씨가 기록을 읽어 내려가다, 장군의 허를 찌르는 섬세함에 혀를 내둘렀다. "목적이 분명한 기록이니까!"장선호 회장의 얼굴이 사뭇 비장하다. 서쪽 골짜기에서도 솥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것 역시 '저들(일본)'의 물건이라고 기록돼 있다. 북쪽 포구에 있는 도르래도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동서남북 섬의 사위가 모두 '저들'의 흔적으로 에워싸여 있었다. 장한상 장군은 섬의 지형에서부터 가파른 돌산에 뿌리내린 수목의 종류, 그곳에 깃든 날짐승과 길짐승, 바다의 어류, 수토기간의 날씨까지 세세하게 기록을 이어가며 끝없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듯했는데, 기록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그 정체가 드러났다. '산골짜기에 동구(洞口)가 있으니 만일 왜구를 막을 방책을 염려한다면, 이곳은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낼 수 있는 곳이며, 저들이 배를 오래도록 묶어두고 싶어 해도 풍랑이 일면 필시 배는 보존되지 못할 형세입니다.'왜구로부터 울릉도를 지킬 최고의 비책, 오직 이 섬만이 알고 있던 것이다. ◆2024년 장군의 후손들이 써 내려가는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 "울릉군민의 날이 언제인지 아세요?"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기념일도 모르는데 울릉군민의 날까지야… 분명 알 턱이 없는데도 해맑은 해설사의 얼굴을 보니, 왠지 내가 알고 있을 것만 같다. 이곳은 태하리에 자리한 울릉수토역사전시관. 수토 역사는 물론 울릉도 개척의 역사를 한 곳에서 느끼고 볼 수 있는 울릉도 대표 전시관이다. "독도의 날은 많이들 알고 계시죠? 독도의 날이 바로 울릉군민의 날이에요." 아! 저절로 도 터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울릉도와 독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 세트로 묶여 다니는, 한 몸과 마찬가지인 섬이었던 것이다. 울릉도 쇄환정책이 대전환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장한상 장군의 수토가 시작되고 190년의 세월이 더 흐른 뒤다. 당시 일본의 한반도 침탈야욕이 갈수록 거세지자 고종은 이를 막기 위해 1882년 울릉도 개척령을 반포하고 이규원을 감찰사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이규원은 울릉도를 살펴본 뒤 사람이 살 만하다고 판단했고, 이듬해 16가구 54명이 정부 지원으로 울릉도에 들어와 살게 된다. 주민 수가 점차 늘어나자 마침내 1900년 10월25일, 고종은 울릉도를 독립된 울릉군으로 격상하고,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섬으로 명시하는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를 발령했다. 10월25일, 독도가 울릉군의 섬임을 전 세계에 공표한 날. 바로 그날이 울릉군민의 날이었다. 울릉도에서 나고 자라, 육지로 시집갔다가 남편과 함께 다시 울릉도로 들어왔다는 박순덕 해설사는 울릉군민으로 사는 지금이 행복하다고 했다. 이 섬의 아름다운 자연과 역사를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2008년 울릉군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모집하던 첫해부터 활동을 시작해 코로나 시기를 제외하곤 한 해도 쉬지 않고 뛰었다고 했다. 환하게 웃는 그 얼굴에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영원히 늙지 않는 섬 소녀 같았다. "해설사 한 지 16년 정도 됐는데 가끔… 손에 꼽을 만큼 적긴 해도 가끔 일본인은 한 번씩 만나거든요. 그런데 장한상 장군의 후손을 이곳 수토역사전시관에서 만나게 될 줄은 또 몰랐네요. 저는 장군 이름을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는 가족 같은, 우리 조상 같은 느낌인데… 아, 이상하게 일본인 만났을 때보다 더 긴장되는데요?"그 말을 듣고 있자니, 일본인에 비하면 우리가 너무 늦게 수토기행을 시작한 듯 느껴져 갑자기 조급함이 생겨났다. 어서 빨리 330년 전 장군처럼 우리도 독도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그 섬에 가봐야만 할 것 같았다. "독도가 개방된 지 불과 20년 정도밖에 안 됐잖아요. 그때 청와대에서 관광객들이 독도에 입도할 수 있도록 정책을 수립한 분, 그분이 이제는 울릉도에 들어와 사신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같은 울릉군민으로 살고 있답니다. 여기 진짜 살기 좋거든요."목소리에 울릉군민의 자부심이 뚝뚝 묻어났다. 해설사의 환한 얼굴 위로 우리가 앞서 만났던 택시 기사님, 식당 사장님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섬에 대해 묻지 않아도 자꾸만 얘기해주고, 더 얘기해주지 못해 안달이던 다정하고 정 많던 그 얼굴들. 330년 전 울릉도에는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던 일본인들이 남몰래 둥지를 틀었다면, 2024년 울릉도에는 우리 영토를 사랑해마지않는 진짜배기 주민들이 더 단단히 둥지를 틀고 있다. 330년 전 장군이 독도를 바라보았던 곳, 그곳은 초목과 괴석으로 아찔하고 가파른 '중봉'이었지만 이제 장군의 후손들이 독도를 바라보는 곳에는 인심 좋고 경치 좋은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다. 이곳엔 우리 땅을 사랑해서 깊이 뿌리를 내린 이들이 하루하루 쌓아 올린 삶의 이야기들이 켜켜이 산을 이루고 있다. 자, 이제 독도는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330년 전의 그 날처럼, 섬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글·사진=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공동기획: 의성군지난해 7월, 독도에서 김흥구 사진작가가 찍은 울릉도 사진(김흥구 작가 제공). 흐린 날임에도 불구하고 독도에서 울릉도가 선명하게 보인다. 그동안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끈질기게 주장해온 일본인 학자 가와카미 겐조는 장한상 장군의 기록대로 울릉도에서 독도를 육안으로 관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한 장의 사진은 흐린 날에도 육안으로 독도에서 울릉도를 볼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조선 초기 관찬서인 '세종실록 지리지'(1454년)는 '우산(독도)과 무릉(울릉도) 두 섬은 서로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 날씨가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이 사진을 촬영한 날은 기상이 좋지 않아 여객선이 독도에 접안하는 것도 힘든 날이었다.울릉수토역사전시관에 전시된 작품. 감상 위치에 따라 울릉도를 바라보는 2개의 시점을 체험할 수 있는데 오른쪽에서 바라본 모습은 어둠을 뚫고 울릉도로 들어가는 수토사의 시점을 표현한 것이다. 두려움과 역사적 사명으로 가득 찬 수토사들의 시점을 체험해볼 수 있다.울릉수토역사전시관에서 만난 울릉도 최초의 문화관광해설사이자 울릉도 토박이 박순덕씨. 수토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울릉주민이 생각하는 장한상 장군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울릉도 비경으로 손꼽히는 대풍감. 이곳에서 섬과 섬 사이, 그것을 이어주는 또 다른 존재들을 만났다. 그들을 통해 섬으로 존재하던 어제와 오늘이 보이고, 그것을 잇는 역사를 볼 수 있다.해발 340m의 망향봉 정상에 있는 독도전망대. 날이 맑으면 독도전망대에서 87.4㎞ 떨어진 독도를 육안으로 볼 수 있다. 330년 전 장한상 장군처럼 장선호 순천장씨대종회장이 울릉도에서 독도를 바라보고 있다.
2024.07.10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4] 울릉도 수토사의 파란만장 뱃길
밤 9시, 포항 영일만신항 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울릉도로 가는 터미널은 총 4곳. 요즘은 뱃길이 좋아져서 강릉, 동해, 울진, 포항 그 어디서든 쾌속선을 타면 3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굳이 가장 긴 노선, 밤새 달려야 하는 뱃길을 선택했다. 330년 전, 장한상 장군은 울릉도 수토 뱃길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긴긴밤을 보냈다고 하는데, 우리 역시 목숨까지 걸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하룻밤은 배를 타고 달려야만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밤 11시50분에 출항하는 울릉 크루즈는 6시간 30분을 밤새 달리기 때문에 갑판 위에서 일출을 볼 수도 있다. 수토선에서 동이 터오는 모습을 보고 난 뒤에야 울릉도 남쪽 해안에 도달했다는 '울릉도사적'의 기록을 최대한 체험해볼 수 있는 코스다. 뱃길이 긴 만큼 귀에 붙이는 멀미약에 먹는 멀미약까지 챙기며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울릉도를 향해가는 뱃길 위에는 멀미는커녕 왠지 가슴 뭉클해지는 반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330년 전 악천후의 그 밤 "아마 이 시간쯤이었을 거라. 여기 기록에 보면, 술시(戌時)라고 나오니까 이게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를 말하는 거거든? 장군의 수토선이 대양 한복판에서 첫 풍랑을 만났다는 거야."배에 타자마자 장군의 후손인 순천 장씨 대종회장 장선호씨와 조카뻘인 장수용씨가 '울릉도사적'을 꺼내 펼쳐 들었다. 여기는 울릉 크루즈의 갑판 위, 아직 배가 출항하려면 한참 멀었는데 후손들의 마음은 벌써 동해 한가운데 와 있다. "'이는 필시 수종(水宗)이니 이 때문에 배들이 물결에 휩쓸려 일시에 흩어져 향방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짐 실은 배며 사람 실은 배까지 6척의 수토선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는 거야. 수종(水宗)이란 건 물마루, 그러니까 수평선이 높이 치솟은 부분을 말하는 것이거든. 순풍을 기다려서 출항했는데도 바다 날씨는 알 수가 없지. 특히 그날은 파도가 거셌나 봐. 그런데 진짜 문제는 바로 그다음이야."그저 어렵기만 하던 울릉도사적의 기록이 후손들의 대화 속에서 천일야화보다 더 흥미진진해졌다. 330년 전 그날 밤, 울릉도를 향해 가던 장군의 수토선은 후손들의 이야기만큼이나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자시(子時), 그러니까 밤 11시부터 새벽 1시 사이에 검은 구름이 북쪽에서부터 밀려오기 시작했대. 번개가 번쩍이고 그 섬광이 파도 속까지 뚫고 들어가더니, 갑자기 광풍이 일면서 뒤이어 소나기까지 쏟아졌다는 거라. 그 당시 배라고 해봐야 제아무리 크게 잘 만들었다 해도 목선에 돛단배 아니었겠어? 성난 파도가 공중으로 솟구치니 타고 있던 수토선도 덩달아 떴다 가라앉았다…"우리가 탄 배는 아직 출항도 안 했는데, 이야기만 듣고도 벌써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150여 명의 수토사들이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질 즈음, 풍랑은 더욱 악화되어 방향을 잡는 배의 키마저 부러졌고 급기야 배를 제어하기도 힘든 상태가 됐다고 한다. 결국, 배 젓던 노를 선미와 좌우에 꽂아 간신히 버티고 있었지만, 금세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았다고 장군은 그날 밤을 기록하고 있었다. 과연 장한상 장군과 수토사 일행은 어떻게 이 난관을 극복할 것인가.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은 그때, 흰색 제복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크루즈의 승무원이 다가와 혹시 장한상 장군의 후손 일행이냐고 물었다. 이 배의 운영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1694년 9월19일 수토사 일행 출발뱃길 험해 150여명 생사 넘나들어이튿날 간신히 울릉도 도착 유숙험했던 바닷길 지금은 크루즈 다녀◆울릉도호박엿 공장 하다 뱃길을 열게 된 사연 "동해는 서남해와 달리 바람이 초속 12m 정도만 돼도 풍랑이 일어 배가 뜨지 못합니다. 동해의 특성상 파고가 높고 악천후가 잦아서 1년에 120일 정도는 발이 묶이기 예사였죠. 육지에 있는 부모 형제가 세상을 떠나도 우리 울릉주민들은 부두에서 눈물로 애만 태울 때가 많았습니다. 배가 떠야 가지요."1883년(고종20)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5대째 울릉도에 살고 있다는 울릉도 토박이 조현기 상무는 그렇게 이 배를 취항하게 됐다며 후손들의 손을 덥석 잡았다. 최초의 수토사로 파견된 장한상 장군 이후 200년간 수토사들이 험난한 뱃길을 이어가며 일본인들로부터 울릉도와 독도를 지켜준 덕에 울릉주민들의 오늘이 있게 됐다는 얘기다. 당시 수토사들의 뱃길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그는 매일 실감한다고 했다. 어지간한 배로는 동해 풍랑을 이겨낼 수 없어 무려 2만t급 대형 크루즈를 띄운 것이 2021년 9월. 장한상 장군이 출항하던 그해 9월처럼 만반의 준비를 끝냈지만, 첫 출항하던 날 하필 태풍 예고가 있었다고 했다. "웬만한 풍랑에도 문제없이 출항 가능하지만 첫 출항인 만큼 신경이 많이 쓰였죠. 기상특보를 피해 예정된 시간보다 출항 시간을 조금 당기긴 했지만, 결항 없이 무사히 울릉도에 도착했습니다. 취항 신고식 제대로 한 셈이죠."장한상의 후손들이 배를 탄다는 얘기를 듣고 인사라도 드리려고 일부러 기다렸다는 그를 보면서, 이 역사적인 순간에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세속적인 궁금증이 떠올랐다. 도대체 얼마나 돈이 많으면 이렇게 큰 배를 살 수 있는 걸까. "당시 대기업들은 다들 돈이 되지 않는다면서 모두 이 사업을 포기했어요. 기존에 운행하던 배는 수명이 다 돼서 운행이 중단됐는데 새 여객선을 운행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답답하던 상황이었죠. 울릉도 주민들이 당장 섬을 오갈 수가 있어야지요. 울릉도 주민, 다 합해봐야 9천명인데 주민들 발이 되어주자고 매일 이 큰 배를 운행할 수는 없다는 거죠. 할 수 없이 한국해양대 나온 형님이 총대를 메고 동생이 울릉도호박엿공장을 해서 번 수익을 몽땅 털어 부었습니다. 물론 지자체 지원도 받고요. 돈 벌자고 하는 게 아니라 발이 되자고 하는 일이니까요."말수 적고 점잖기만 한 조현기 상무를 대신해 옆에 있던 김영기 이사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거들었다. 그렇게 울릉도호박엿공장을 하며 노후 걱정 없이 살 수도 있던 조씨 형제의 삶이 매일 배 기름값을 걱정해야 하는 삶으로 180도 바뀌게 되었다는 얘기. "그래도 이게 다 주민들 덕분입니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 옛날 그 험한 뱃길을 마다 않고 이 섬을 지켜준 사람들 덕분이고요."그러면서 그는 또 한 번 장군의 후손들에게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그때 크루즈가 뱃고동 소리를 두 번 울렸다. 출항할 시간이다. 그러자 조현기 상무가 서둘러 배에서 내려야 한다고 했다. "인사 드렸으니, 저는 또 나가서 부지런히 기름값 벌어야지요"◆330년의 시간을 건너 마침내 울릉도에 닿다 바다도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까. 배가 움직이고 있는지 알아채기도 힘들 만큼 파도는 잠잠했다. 배가 큰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장한상 장군의 뱃길과 최대한 비슷한 여정을 택한 것이 오히려 멀미라곤 찾아볼 수 없는 뱃길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장군은 후손들에게 안락하고 편안한 길을 열고 있었다. 천일야화를 이어가기 딱 좋은 밤이다. "비바람이 점차 잦아들고 동이 터왔지만 섬은 북쪽에 있는데 물살은 동쪽으로 흐르고 있기에, 배 안의 사람들이 이로 인해 정신을 차리고 힘껏 노를 저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섬을 향해 갔습니다. 사시(巳時·오전 9시에서 11시 사이)쯤 간신히 섬의 남쪽 해안에 도달하여 바위 모서리에 밧줄을 묶었습니다. 잠시 뭍에 내려 밥을 지을 때 급수선 4척은 점차 다가오는데 복선(卜船)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는데, 유시(酉時·오후 5시부터 7시 사이)쯤 또다시 남쪽 바다에서 당도하여 각각의 배가 모두 화를 면하였습니다. 남쪽 해안에는 배를 정박할 곳이 없어 동쪽과 남쪽 사이 동구에 배를 대고는 유숙하였습니다."장한상 장군이 기록한 '울릉도사적'의 첫째 날은 이렇게 끝나고 있었다. 선실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더니, 창밖으로 어슴푸레 동이 터 오른다. 저만치 바다 안개 너머 신비로운 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울릉도다! 글·사진=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공동기획 : 의성군밤 11시50분에 출항한 배가 다음 날 아침 6시40분 울릉도 사동항에 도착했다. 크루즈터미널 옆으로는 울릉공항이 한창 건설되고 있다. 330년 전 장한상 장군이 겪은 험난한 여정을 더 이상 겪지 않고도 이제는 울릉도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장한상 장군의 수토기행에 나선 장군의 후손 장선호씨(왼쪽)와 장수용씨가 이른 아침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낸 울릉도를 바라보며 하선 준비를 하고 있다. 울릉도에서 독도로 이어지는 여정에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지난 2021년 울릉도 주민들의 뱃길이 끊기자 2만 t급 대형 크루즈를 취항한 조현기 상무.육지와 울릉도, 독도를 오가며 섬을 관리하고 왜구를 토벌하던 330년 전의 수토선. 울릉군은 옛 울릉중학교 태하분교 부지에 세워진 울릉 수토역사전시관 마당에 길이 28m, 너비 9m, 높이 7m의 수토선을 복원해 놓았다. 장한상 장군이 쓴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에 따르면 당시 수토사의 규모는 역관과 구실아치, 사공과 곁꾼까지 모두 150명이었다.
2024.06.26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3] 길 위에 새겨진 첫 발자국들
"표산동 돈 15냥, 봉수동 돈 8냥, 어현동 돈 7냥, 구산동 돈 30냥…. "마치 무슨 결제 장부 같다. 전시관의 우아한 조명 아래 펼쳐놓은 고서에서 이런 내역이 나오리라고는 미처 상상도 못 했다. 조선 시대 수토사 일행의 체류비용이라는데, 도합 9개 마을 총 120냥이다. "배 6척에 150명, 규모가 줄어든 경우에도 4척에 80명 정도는 됐다고 합니다. 이 일행들이 울릉도로 출발하기 전 여기 구산리 마을회관에 머물면서 순풍을 기다려야 했는데. 바람의 형편에 따라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기도 하니까…."도대체 이게 당시 물가로 얼마인 걸까? 조선 시대 1냥이 약 5만~7만원 정도라고 하니까… 품격 있는 고서 앞에서 궁색하게 계산기나 두드리고 있자니 울진 수토문화전시관 관리인 김성조씨가 슬그머니 말을 덧붙인다. "영화 '명당'을 보면 초가집 거래가 닷 냥부터 시작하거든요. 그러니까 울릉도 수토할 때마다 우리 구산동 마을 어른들은 초가집 대여섯 채 값을 내놔야 했던 거죠."이것도 그나마 몇 번이나 관청에 민원을 넣은 끝에 9개 마을이 나눠 내게 됐을 때의 이야기이고, 처음엔 수토사 경비 전체를 구산동민들이 전담했었다고 했다. 아, 잊고 있었다. 우리 역사의 숱한 영웅들이 내디딘 거대한 첫 발자국은 사실 그 영웅과 함께 살아가던 수많은 작은 영웅들의 평범한 발자국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지금부터 하게 될 이야기는 '장한상'이라는 위대한 영웅의 수토 여정 뒤에 숨은 무수한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다. ◆ 바람을 기다리는 집 '대풍헌(待風軒)' "어린 학생들이 여기 오면, 제가 늘 아이스크림 상품을 걸고 내는 퀴즈가 하나 있습니다. 한번 맞혀 보세요. 자, 이 건물은 조선 시대 다른 건물과는 달리 눈에 띄는 특성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올여름, 울진 여행 계획이 있는 초중고 학생 가족이라면 주목하시라. 공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매번, 꼭 하는 질문이라고 했다. 울진 수토문화전시관 관리인이자 농어촌마을해설사이기도 한 김성조 씨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문화재며 역사는 고리타분하다는 편견을 아이스크림을 미끼로 한 방에 깨뜨리는 진행 솜씨를 지녔다. "처마 아래… 현판이…." "2개네요!"힌트가 연이어 나오자 순천장씨대종회 장선호 회장이 한발 빨리 정답을 맞힌다. 역시 장한상 장군의 후손답게 순발력이 뛰어나다. 그러고 보니 '대풍헌(待風軒)'이라 적힌 현판 옆으로 '기성 구산 동사(箕城龜山洞舍)'라고 적힌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기성은 평해의 옛 이름이고 구산은 마을 이름이다. 원래는 마을회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수토관 일행이 순풍을 기다리며 숙소로 사용하면서 대풍헌으로 불리게 되었다. 1851년(철종2) 6월에 건물을 중수하고 대풍헌 현판을 걸었으며 건물 정면에 이 역사를 보여주는 2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평해 구산동 마을회관이라는 뜻이잖아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여기가 그저 오래된 마을회관인 줄만 알았죠. 여름이면 여기 대청마루에서 동네 조무래기들이 만날 뛰어놀고 그랬는데, 그때만 해도 '수토사' 이런 역사는 자세히 몰랐죠. 어른들한테 말만 몇 번 들었을 뿐이고 잘 알지도 못했어요."그랬는데 2005년 대청마루 옆 온돌방 벽장에서 중요한 고문서 2종이 발견됐다. 벽장 속에는 마을회의 내용을 기록한 회의록이 수십 권씩 쌓여 있었는데, 오래된 그 문서 더미 속에 미처 몰랐던 보물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게 완문(完文·1811년 제작)하고, 수토절목(搜討節目·1823년 제작)이라고 합디다. 수토사들이 2년이나 3년에 한 번씩 울릉도 들어갈 때면 여기 구산항에서 출발하는데, 울릉도로 가는 순풍이 불어야 바람을 타고 갈 수 있거든요. 그러니 바람 좋은 날을 기다려야지. 생각해 보세요. 군사들 100여 명이 여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바다 건너기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 장정들 방 내주고 밥 해주고… 우리 구산동 주민들 등골이 휘어지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평해 관아에서 각 동마다 경비 120냥을 어떻게 분배하라, 그 방책을 적어서 마을마다 보냈다는 거예요. 그 문서가 여기 이 안에서 발견된 것이죠."대풍헌 온돌방 벽장에는 여전히 오래된 문서 궤짝이 남은 문서들과 함께 그대로 놓여 있었다. 바닷가 주민들의 삶 속에 중요한 역사 증거자료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수토문화전시관의 관리인이 된 이장님 마을회관의 역사적 가치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대풍헌'에도 순풍이 불기 시작했다. 그즈음 김성조씨는 마을 이장 일을 맡고 있었다. "밤에 가만히 누워서 생각을 해보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라요. 대풍헌 복원사업에 예산이 떨어졌다는데, 이게 내 마지막 할 일이 아닌가 싶더라고요."울진 구산리에서 나고 자라 대풍헌에서 뛰어놀던 꼬마는 동네 어른들께 들은 대풍헌의 역사 이야기를 마을신문으로 만들어서 돌리곤 했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분들이 자꾸 돌아가시면서 이제는 대풍헌이라는 역사 자체가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한 10년? 10년쯤 걸린 것 같아. 전시관하고 요 뒤로 전망대도 만들고, 전망대 가는 길에 수토사 추모광장도 조성하고. 저는 뭐, 그저 부지런히 쓸고 닦고 관리하지요. 저는 수토사 역사 이야기는 자세히 잘 몰라요. 그런 건 해설사님 오시면 잘 설명해 주시는 데, 전화해 볼까요?"대풍헌 대청마루에 앉아 장선호 회장이 싸 온 쑥떡을 나눠 먹으면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몇 시간 전의 첫 만남이 다시 떠올랐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전시관 마당을 쓸고 있던 그는 차에서 내리는 우리를 보자마자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와 '어떻게 오셨냐'며 반가워했다. 이렇게 멋진 전시관에 와서 화장실만 이용하고 그냥 가는 경우도 많은데, 전시관에 이렇게 오래 머물 줄 알았으면 미리 에어컨이라도 틀어놓을 걸 그랬다며 연신 미안해하셨다. 예기치 않게 일찍 들이닥친 방문객 때문에 부리나케 청소를 마무리하느라 여전히 땀을 뻘뻘 흘리고 있던 그의 손에는 가장자리가 나달나달해진 프린트물이 들려있었다. 거기엔 대풍헌의 역사와 이곳에서 발견된 수토 관련 문서, 제목, 제작연도 같은 것들이 요약 노트처럼 빼곡하게 정리돼 있었다. 이미 충분했다.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이곳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너무 잘 느껴졌다. 지식 같은 건 검색창에 두드려 보면 차고 넘치게 나온다. "선생님, 저는 오늘 이곳에서 최고의 해설사를 만난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여기 계셔서 너무 고맙습니다."장선호 회장이 대풍헌을 나서며, 길 떠날 채비를 도와준 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한상 장군의 후손이 수백 년의 세월을 지나 구산리 주민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는 순간이었다. ◆어쩌다 보니 '독도 전문가'가 됐다는 관장"사실 장한상 장군은 울진 구산항에서 출발하지는 않았어요. 장군 이후에 울릉도 수토 활동이 정례화되면서 울릉도로 가는 최단 거리, 최적의 항법이 점점 발전하게 됐고 그러면서 구산항이 수토사들의 출항 기점이 된 것이죠."대풍헌 고문서를 최초로 발견했던 당시를 회고하며 심현용 박사(울진 봉평리 신라비 전시관장)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나 문헌과 기록에 철저한 학자답다. 장한상 장군이 수토사로서 울릉도에 처음 들어간 시기는 안용복이 일본에 납치된 이듬해인 1694년, 당시 삼척영장이던 장군은 강원도 삼척부의 남면 장오리진(莊五里鎭) 대풍소(待風所)에서 배를 출발시켰다. 사람을 실은 기선과 짐을 실은 복선 각 1척, 급수선(汲水船) 4척에 모두 150명이 출항했다. "중요한 건 '군사'를 파견했다는 것입니다. 전쟁하는 군인이 파견됐다는 것은 조선이 독도를 영토로 관리했다는 의미거든요. 영토가 아니면 관리할 필요가 없죠."구산리 대풍헌에서 수토절목과 완문이 발견되면서 조선 후기인 19세기까지 우리나라가 독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했음이 명백하게 입증된 것이라고 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자료입니까?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허구라는 결정적인 증거들인데, 저는 그 문서를 발견하고 너무너무 기뻐서 만세를 불렀거든요? 그런데, 하아… 학자들 사이에서 연구가 진행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사실 독도가 제 전문 연구 분야도 아니거든요. 그래도 일단 번역부터 해놔야 다른 사료들과 비교도 하고 그럴 것 같아서, 급한 대로 제가 번역부터 맡기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독도 전문가가 돼 있더란 얘기. 그러면서 장한상 장군의 발자취를 따라 울릉도로 간다는 우리에게 조선 '수토사'의 '개요 정도'를 파악할 수 있을 거라며 약 500페이지에 달하는 학술자료를 건넸다. 아아… 대체 이 길 위에는 어찌 이토록 열정적인 '첫 주자'들이 많단 말인가! 이제 겨우 첫발을 내디뎠을 뿐인데, 울릉도에서는 과연 어떤 '퍼스트 펭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 : 의성군경북도 기념물 165호 울진 대풍헌(待風軒). 원래는 마을회관으로 사용되었다가 수토관 일행이 순풍을 기다리며 숙소로 사용하면서 대풍헌으로 불리게 되었다. 1851년(철종2) 6월에 건물을 중수하고 대풍헌 현판을 걸었으며 건물 정면에 이 역사를 보여주는 2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 있다. 대풍헌 현판 왼쪽에 걸려 있는 기성구산동사(箕城龜山洞舍) 현판은 대풍헌 현판보다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대풍헌 바로 옆에 자리한 울진 수토문화전시관. (위) 역대 수토사 관련 기록과 유적, 동해안 수군 등에 대한 다양한 전시물을 갖추고 있다.울진 수토문화전시관 주변에는 수토사 추모공원과 구산항 전망대가 있고 전시관 건너편으로는 독도조형물과 수토선 모형도 함께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어 구산항이 울릉도 수토 출항의 기점이었음을 알려준다.
2024.06.12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2] 역사 기록은 무기다
마침내 수장고(收藏庫)가 열렸다. 이곳은 의성 조문국박물관의 지하. 전쟁이 나 포탄이 터져도 끄떡없다는 학예사의 말처럼 은행 금고에서나 봄 직한 육중한 철문이 버티고 있었고, 문짝마다 디지털 보안장치가 달려있었다. 일반인은 물론 언론에도 좀처럼 공개되지 않는 이 지하 수장고에 들어설 수 있게 된 것은 '장한상 장군의 후손'과 함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몇 해 전 작고하신 장자진 종친 어른이 이곳에 장군의 귀한 유물들을 위탁 보관한 이후 후손들도 유물의 실물을 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라 했다. 보안장치가 해제되고 또 하나의 문을 더 열고 나서야 작은 복도가 나타났다. 금속류는 금속류대로, 도·토기류는 도·토기류대로, 종이 같은 지류는 지류대로 제각각 필요한 온도와 습도가 다르기 때문에 물질별로 각자의 방을 가지고 있었다. 장군의 기록을 마주하기 위해선 세 번째의 육중한 문을 한 번 더 열어야 했다. "전기 요금만 한 달에 1천800만원 들어갑니다." 학예사의 말에 놀랄 새도 없었다. 지류 수장고의 문이 열리자 천장까지 자리한 오동나무 유물장 몇십 개가 어마어마한 존재감으로 우리를 압도하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330년 전 장군의 기록이 후손들 앞에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독도에 관한 최초의 문헌기록 '울릉도사적(鬱陵島事跡)'"이것이 장한상 장군의 울릉도 수토보고서입니다. '울릉도사적'이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 보시면 독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나오죠."책장을 넘기는 최강국 학예연구사의 손끝이 더없이 조심스럽다. 그는 백화점 명품 매장 직원들처럼 수장고에 들어서자마자 깨끗한 흰 장갑부터 착용하더니 조심스레 오동나무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한지로 덮어놓은 상자 하나를 꺼내 또 열고, 상자 안에서 고운 비단 천으로 감싸인 오래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 모든 과정이 고귀한 의식을 치르는 듯 너무나 경건하고 엄숙해서 지켜보는 내내 숨조차 크게 내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울릉도사적이 독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 문헌으로 알려지면서 그 책이 따로 있는 줄 아는 분들도 많은데, 실은 '절도공 양세 실록(節度公 兩世 實錄), 그러니까 절도사를 지낸 양세(兩世)… 두 세대라는 말이죠? 아버지 장시규 장군과 아들 장한상 장군의 두 세대에 관한 실록이다, 이런 제목입니다. 이 책 안에 울릉도사적이 실려 있어요."울릉도 중봉서 육안으로 독도 확인…조정에 공문서 보고 그 기록 담긴 '절도공양세실록' 의성조문국박물관 수장 학예사 "일본 억지주장 맞설 무기…다시 학술대회 열 것"오오! 단번에 이해가 확 됐다. 한자를 보면 어디서 어떻게 끊어 읽어야 할지 난감한 현대인들에게 그야말로 친절한 맞춤식 설명이다. 그의 손끝만 따라가면, 낯설고 어렵기만 하던 조선 조정의 관료 용어들도 거뜬히 이해할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어, 여기네, 여기!"매의 눈으로 책장을 보고 있던 순천장씨대종회 장선호 회장이 책 속의 한 구절을 가리켰다. "동망해중 유일도(東望海中有一島). 동쪽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섬 하나가 있다!"역시나 친절한 끊어 읽기 덕분일까? 망망대해 같은 한자들의 물결 속에서도 선명하게 '섬' 하나가 보였다. 동시에 그 섬 옆으로 작은 의문 하나가 솟구쳐 올라왔다. '이 섬이 독도라고?' "그렇지! 정확하게 독도를 말하고 있잖아."동행한 후손 장대수씨는 마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설명을 덧붙였다. "크기는 울릉도의 3분의 1이 안되고 거리는 300여 리(대략 120㎞)에 이른다. 바로 뒤에 이렇게 적혀 있잖아. 이건 독도일 수밖에 없지. 일본은 이 섬이 현재의 죽도를 말하는 거라고 우기지만, 겨우 2㎞ 떨어진 죽도를 말한다고 하기엔 거리가 너무 멀잖아."일본 이야기까지 나오자 일순 공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곳은 항온 항습을 유지해야 하는 수장고 아닌가. 긴 이야기는 나가서 합시다!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이야기"전국구 스타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이 사람이다! 당시만 해도 지자체에서 인물을 발굴하고 선양하는 사업이 있었거든요. 사실 의성 하면 다들 마늘밖에 모르는데, 이 장한상 장군을 띄워야 된다고, 일본의 주장에 명백하게 반박할 수 있는 자료가 이곳 의성에 문서로 고스란히 남아있다고, 학술대회도 하고 자료 만들어서 배포도 하고 열심히 뛰었죠. 도청의 독도 관련 부서도 찾아가고 미팅도 몇 차례나 하고. 그런데 그게 될 듯 될 듯하더니, 또 흐지부지되고 그러더라고요."11년 전부터 장한상 장군 특별전을 기획했던 배기석 학예팀장은 그 중요성과 가치에 비해 장군의 업적이 너무 알려지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핵심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기 위해 일본 자료까지 다 모아서 정리하기도 했다. "일본은 '16~17세기 때 너희가 독도를 인지하지도 못했지 않느냐'고 하는데, 오늘 봤잖아요? 장한상 장군이 울릉도 가서 독도를 육안으로 확인하고 남긴 기록도 있고, 그 내용을 비변사 장계로 올렸다는 기록도 있어요. 공문서로 조정에 보고한 것이죠. 그런데 일본 주장대로 당시 조선 조정에서 독도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거죠."당시 동북아역사재단 이원택 연구위원과 장군이 올렸다는 '비변사 장계' 원본을 찾는 작업도 했었다고 했다. 하필 담당부서가 바뀌면서 그 일을 이어갈 수 없었는데, 올해부터는 이곳 박물관에서 다시 장한상 장군 학술대회를 열 수 있게 됐다며 신이 난 얼굴이었다. "평생 무관으로 사셨던 장한상 장군이 가시면서까지 우리 후손들에게 든든한 무기를 남겨주신 거예요. 아직도 계속되는 일본과의 영유권 분쟁에 그 무기를 제대로 잘 쓰는 게 이제 우리 후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마치 다짐이라도 하듯, 나지막이 또박또박 말하는 후손들의 얼굴에는 무사의 결기가 어른거렸다. '기록'이라는 무기를 쥐고, 장군의 수토여정을 따라가며 온 국민에게 이 역사를 전하고 싶다고도 했다. 장군의 발자취를 좇아가다 보니, 어째 동행이 자꾸 늘어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수많은 장군의 후예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길 위에 있었을 것이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길을 떠나 볼까?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 기자 zone5@yeongnam.com의성 조문국박물관 2층 상설전시실. 이곳에 들어서면 '울릉도사적(鬱陵島事蹟)'(경북도 유형문화유산)이라는 명패 아래 고서 한 권이 펼쳐져 있다.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독도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 담긴 비장의 자료다. 원본은 지하 수장고에서 365일 24시간 항온 항습 상태로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다.최강국 학예사가 오동나무 서랍장에서 '절도공양세실록'을 꺼내 보이고 있다. 수백년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이 고서는 습도조절 능력이 뛰어난 몇 겹의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돼 있다. 벽면도 습기를 빨아들이는 규조토 패널로 되어 있고, 여기에 더해 항온항습기가 24시간 365일 돌아간다.
2024.05.29
[독도 지킨 무관 장한상(張漢相)을 따라 떠나는 수토(搜討)기행 .1] 호랑이를 타고 다닌 장군
장군의 아들이라 했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그 아들도 장군이 됐다 한다. 무려 330년 전에 그 장군이 독도를 지켰다고 한다.어부 안용복이 울릉도 근처에서 고기를 잡다가 일본 어부들에게 납치된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 장군이 울릉도를 수색하여 토벌하고 독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고 했다. "아, 그런 기록이 있었어요? 그 장군의 존함이…?""순천장(張)씨 태사공 28세손, 한(漢)자 상(相)자 쓰신 장군입니다."'장.한.상? 그런데 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지?' 장하다, 상을 줘도 모자랄 판에 독도 수호의 역사에서 잊힌 이름. 무식의 민낯이 더 붉어지기 전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그리하여 경북 의성에서 출발해 울진을 거쳐 울릉도와 독도까지, 예기치 않은 현장체험학습이 시작되었다. 총 7회에 걸쳐 장한상 장군과 함께하는 장대한 수토 여정이 이어질 예정이다. 기대하시라, 두둥!안용복 사건 때 울릉도 수토사 활약청나라와 국경 분쟁 땐 백두산 지켜세상 떠나자 경종이 제문 내리기도진품 영정 도난…남은 유물 道문화재◆호랑이도 꼬리 내린 전설의 장군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인 지난달 20일, 해마다 장한상 부자의 향사(享祀)를 모신다는 의성 경덕사를 찾았다."이것부터 보세요, 이렇게 호랑이가 함께 그려진 영정은 아마도 유일할 겁니다. 장한상 장군 하면 호랑이 이야기가 빠질 수 없죠."사당 안 왼쪽 끝에 파란 관복을 입은 남자가 매서운 눈매로 후손들을 주시하고 있다. 장한상 장군이다. 영정인데도 또렷한 눈매가 너무나 생생해서 저절로 자세가 다소곳해진다. 젊은 대종회원들이 향사 상차림 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 일찌감치 도포와 유건까지 갖추고 준비를 끝낸 웃어른들은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피해 사당 처마 밑에 둘러앉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향사에 참석했을 낯선 이를 의식한 탓일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어르신들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타고난 장군이셨지. 태어난 지 3일 만에 앉았고, 석 달 만에 걸었다고 하니까. 태어날 때부터 두 눈에는 광채를 띠고 있고 어린 나이에도 영특해서 마치 선인 같은 위엄이 서려 있었다지. 한창 혈기 왕성할 때는 힘도 어마어마했는데, 그 시절에 키가 6척(1m80㎝)이나 됐다니 기골도 장대했어. 딱 장군감이었지."탄생설화에서부터 정말 믿기 힘든, 신화 같은 이야기가 줄줄이 쏟아져 나온다. "조선통신사를 호위해서 일본에 갔을 때도, 왜인들이 장군의 풍모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장한상 같은 사람 몇 명만 있으면 대국(大國)도 감히 모욕하지 못할 거라고 두려워했다잖아.""그때가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계실 때지? 한번은 한양에 큰 호랑이가 나타났어. 산처럼 큰 새끼를 네댓 마리나 데리고 대낮에 궐 안을 휩쓸고 다녔다는 거야. 다들 벌벌 떨며 겁에 질려서 누구도 막을 장사가 없었지. 그러니 어째? 조정에서 '장 병사를 불러라' 명이 떨어졌지. 아, 병사는 당시 병마절도사를 부르던 별칭이라. 우리 장한상 장군이 헐레벌떡 달려갔는데, 뭐 싸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장군이 도착하자마자 제일 큰 호랑이가 장군 앞에 와서 납작 엎드렸다는 거야. 그러니까 우리 장군도 서슴없이 호랑이 등에 올라탔어." 장군이 호랑이를 타고 궐 안을 한 바퀴 돌자 줄줄이 새끼들이 마치 호위무사처럼 그 뒤를 따라 나오며 소동이 끝났단다. 꼿꼿하게 앉아 빳빳하게 잘 다려진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장군의 일화를 나누는 어른들은 위엄이 있었다. 제를 올리기 전 빠뜨린 것을 지시하는 눈매 역시 호랑이처럼 매서웠다."개좌(開座) 아뢰오!"집례관이 마침내 시작을 알렸다. 제관과 후손들이 모두 사당 앞에 도열했다. 그러자 곧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비는 부슬부슬 내려 어느새 마당이 다 젖었는데, 그 누구도 망설임이 없었다. 아흔을 바라보는 최고령 어르신이 서슴없이 축축한 바닥에 엎드려 절을 하자 깐깐하기 그지없던 종손, 주손들도 줄줄이 축축한 마당에 고개 숙여 엎드렸다. 저절로 장군의 영정을 되돌아보게 됐다. 호랑이도 고개 숙이게 만드는 장한상 장군. 300여 년이 넘도록 유효한 장군의 기개와 그 속에 숨은 이야기가 점점 더 궁금해졌다. ◆장군께 올린 술 한 잔, 초헌관(初獻官)의 이야기 '유령(惟靈)은 골상(骨相)이 괴위(魁偉)하고 재력(才力)이 절윤(絶潤)했다. 궁마(弓馬)로 진과(進科)하여 위국(爲國)의 호신(虎臣)이었다. 어린 시절 발탁되어 명망(名望)이 출중했다. 쌍기(雙騎)로 묘예(妙藝) 보여 젊을 때도 진동했다.'1724년 장한상 장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경종대왕은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장사 지내도록 상여를 운반할 인부를 보내주며 이런 제문(祭文)을 내리셨다. 수많은 무신들 중에서도 장군은 활 쏘고 말 달리는 일에 빼어나 용맹스러운 무사로서 명성과 인망이 출중한 신하였다. 장군의 죽음을 슬퍼하던 경종대왕의 마지막 인사는 이렇게 끝을 맺고 있다. '울릉도(鬱陵島)에 사단(事端) 있어 현상(賢相)이 추천하여 책임자로 임명하니 파도 높은 험한 바다 평지같이 항해했고…(중략) 엊그제 시위(侍衛)할 때 씩씩하고 정정함을 보았는데 어찌 한 질환이 갑자기 불숙(不淑)함에 이르렀소. 헌연(軒然)하던 신수(身手)를 다시 보기 어렵구나. 승평세월(昇平歲月) 오래되어 위급한 일 일어날까 걱정되네. 헌걸(軒傑)차고 영특하던 경을 잃고 누구와 짝을 할까? 슬픈 생각 추억이 간절하여 이에 예작(禮酌)을 들려 보내노니 영명(英明)한 혼령은 내려와 흠향하오.'왕이 그를 얼마나 총애했는지, 그의 죽음 앞에 얼마나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는지 이 제문을 보면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사실 조선과 일본, 청나라 간 국경 분쟁이 잦던 그 시기에 무관으로 살아가는 삶은 녹록지 않았을 겁니다."향사를 마친 뒤 서울이며 순천 등 멀리서 참석한 분들을 배웅하고, 마지막까지 남아 뒷정리를 하던 순천장씨대종회장 장선호씨가 혼잣말처럼 작게 말했다. 비가 내린 탓일까? 오늘 향사의 초헌관으로서 장군께 첫 번째 술잔을 올렸던 그의 눈가가 왠지 촉촉해 보였다. "안용복 사건이 있었을 때는 우리 국토의 동쪽 끝 울릉도 수토사로 활약했고 그 뒤에는 청나라와 국경문제가 발생하자 영토의 북쪽 끝 백두산을 관리하는 중책을 수행하셨죠. 백두산 정계 과정에서는 백성들에게 뇌물을 받고 정치를 한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정쟁에 휘말려 탄핵을 당하기도 하셨는데… 상소가 올라와서 파직을 당해도 경종대왕은 끝까지 장한상 장군을 계속 중용했고, 장군도 그때마다 왕의 어명을 받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파직 당하고… 밖으로는 왜구와 싸우고, 안으로는 소론 정치세력과 싸우면서 그렇게 거의 반백년 가까이 무사로 사셨어요. 일흔을 바라보는 노장이 돼서도 이 어른은 무엇을 그렇게 끝까지 지키고 싶으셨을까요? 그게 뭔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은 그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이제는 세월이 달라져서 향사도 예전 같지 않다고 했다. 기억력이 짱짱해서 매해 향사가 있을 때마다 장군의 업적에 대해 어린 후손들에게 열정적으로 강의하시던 장영근 어르신(전 순천장씨대종회장)도 올해는 강의가 힘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중학생 장손을 포함해 마흔여 명의 후손들로 왁자하던 사당이다. 그들이 모두 떠난 자리가 갑자기 쓸쓸하게 느껴졌다. 문득 영정 속 장군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사실 저 영정은 진품이 아니에요." 이건 또 무슨 청천벽력 같은 얘긴가. "몇 해 전 경덕사에 도둑이 들어서 영정도 오려가고 유품도 훔쳐갔죠. 그러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이것 다 잃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젊은 우리가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종친 어른들 말씀대로 대종회가 나섰죠. 이 귀한 역사 자료와 유물을 나라에서 보호해 주면 좋겠다 싶어서 문화재 신청을 했는데. 말도 마세요. 전쟁이었습니다."그러나! 무사의 후손은 역시 달랐다. 전쟁이 터지면 죽기 살기로 전략을 짜고 끝내 이기는 것이 무사의 본성이다. 오랜 역사의 뿌리를 기억하는 후손의 몸에는 숱한 세월에도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장군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문화재 지정 전쟁에서 그는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렇게 2012년 경덕사에 소장하고 있던 유물이 일괄 경북도 문화재로 지정돼 의성 조문국박물관의 수장고로 이전됐다."사실 진짜 보물을 보려면 그걸 봐야 돼요. 그 자료들 안에 장군이 진짜 목숨 걸고 지켰던 가치들이 있거든요." 그렇다. 이제 시작이다. 장한상 장군의 흔적을 찾아가는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박물관을 향해 가는 길, 사당을 내려와 마을로 접어들자 장선호씨가 바위 하나를 손으로 가리켰다."저 바위가 장한상 장군이 마을 일 보러 와서 호랑이 묶어두던 바위였는데 호석(虎石)이라고 해요."아…분명 아침에도 이 길을 지났는데 그때는 왜 보지 못했을까. 물끄러미 선돌을 보고 있자니, 고은 시인의 짧은 시가 떠올랐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글=이은임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공동기획 지원: 의성군의성군 구천면 용사2리에 자리한 경덕사(景德祠)에서는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장시규(張是奎·1627~1712)와 장한상(張漢相·1656~1724) 부자를 함께 제향하고 있다. 사당 가운데 조선후기 숙종대왕 때 무신으로 활약했던 부친 장시규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오른쪽으로 그 아들인 장한상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무관으로 조선팔도 중에서 평안도를 제외한 칠도병마절도사(七道兵馬節度使)를 모두 역임한 것은 흔히 볼 수 없는 일이다.경덕사 사당에 모셔진 장한상 장군의 초상화. 호랑이를 타고 다닌 장군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2024.05.15
보도의 그 후, 뉴스 후(後)
현관문 열면 엘리베이터 닿는 대구 남구 신축 아파트, '원상 복구' 방침 발표
많이 본 뉴스
오늘의운세
개띠 12월 12일 ( 음 11월 12일 )(오늘의 띠별 운세) (생년월일 운세)
영남생생 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