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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월곡역사박물관에 있는 화원의병군공책(보물 제1334호)에는 1592~93년 우배선과 그의 부하 89명이 벌였던 전투시기와 장소, 전과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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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시 북구 동변동에 구회신의 위패가 봉안된 표절사(表節祠)가 있다. |
그는 초유사 김성일을 측근에서 호위했다. 1596년 최계는 훈련원주부로 명나라 책봉사 양방형, 심유경을 호위해 5개월간 일본에 머무르기도 했다. 최계는 1605년 선무원종 2등공신에 올랐다. 그의 둘째 아들 대암 최동집은 대구시 동구 둔산동 경주최씨 옻골의 입향조다.
세 의병장을 기리는 삼충비(三忠碑)와 사당은 대구시 동구 지묘동 738-1, 지묘네거리에서 파계사 가는 길 200m쯤에 있다. 이곳에는 최계의 가묘와 장남 다천 최동율의 재실이 있다.
⑥채선수
달서재(達西齋) 채선수는 임란 발발 1년 전 권응수, 서사원, 장몽기, 조경, 서사검, 서재겸, 이시발, 손처눌, 손처약, 박충윤 등과 함께 최동보의 집인 대송정에 모여 도이(島夷·섬오랑캐 즉 일본을 지칭함)가 곧 쳐들어올 것이란 소문과 민심이 흉흉한 데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는 임란이 일어나던 24세 때 창의해 8월에 군량미 수십곡(斛)을 의병진에 제공했다. 이듬해 권응수 등과 함께 공산의진군에 속해 1593년 문경 당교전투, 1596년 9월28일 팔공산전투에 참전해 왜적을 물리쳤다. 1597년 7월에는 화왕산성 회맹에 참가했고, 그해 9월3일에는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들어오는 왜적을 권응수와 함께 달성에서 격파했다. 사후 금호강 압로정 뒤 서산서원에 채귀하, 채응린, 채선수, 채선견과 함께 배향됐다.
⑦ 류요신, 류사온
류요신과 류사온은 6촌 간이다. 류요신은 임란 당시 42세, 류사온은 19세였다. 류요신은 서사원, 손처눌, 곽재겸과 비슷한 연배로 대구의 젊은이를 모아 거병했다. 그는 팔공산 요새에 병기를 설치하고 병사를 매복시켜 적의 병기와 군사를 많이 포획했다. 초유사 김성일은 그에게 병사를 모으는 유사를 담당케 했다.
류사온은 동촌 출신으로 의병장 권응수의 막하에서 주로 활약하면서 왜적소탕의 첨병에 섰다. 그 공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에 임명됐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의병 수백병을 모병해 경산 반송정 아래 진을 치면서 왜적을 막았다. 권응수가 다시 그를 불러 영천 창암전투에 참전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1597년 9월 정예병력을 이끌고 달성에 주둔하면서 노략질을 일삼는 왜군과 접전을 벌여 수십명의 목을 베고 물자를 노획했다. 그 공이 모든 장군보다 컸다고 행장에 기록돼 있다. 그해 12월에는 권응수 장군을 따라 동해에서 왜적을 소탕했다.
⑧ 우배선
월곡(月谷) 우배선(1569~1621)은 임진왜란 선무원종1등공신(92위)이다.
그는 ‘영남3대의병장’이라 불리는 곽재우(19위), 김면(35위), 정인홍(335위)에 버금가는 공적을 세웠다. 우배선은 화원현 월촌 출신이다. 당시 화원은 성주목 관할이었지만 현재 대구로 편입됐다. 고려말 유학자 역동(易東) 우탁의 후예인 우배선은 임란 당시 24세였다.
임진년 4월21일 왜군이 대구에 입성했을 때 대구읍내 관내 군민 2천여명은 팔공산 등지로 피신했다. 우배선은 5월23일 통문을 돌려 양반·중인·양인·노비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500여명의 군사를 규합한 뒤 화원현에서 거병했다. 부대의 구성은 대장을 비롯해 야장(冶匠), 시인(矢人), 궁수(弓手), 창수(槍手), 포수(砲手), 산척(山尺·사냥꾼) 등으로 다양했다. 그의 격문을 본 일부 백성은 “우모(某)가 장차 죄 없는 사람을 다 죽이겠다”고까지 했다.
우배선은 소수정예부대를 이끌고 임진년 6월 비슬산에서 20여명의 왜적을 벴다. 이어 7월에는 낙동강 여울에서 적병 30명을 사살했다. 11월과 12월에는 화원, 고령, 성주, 대구, 비슬산, 최정산, 낙동강 일대에서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술로 수백여명의 왜적을 사상시키는 등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1595년 합천군수로 임명됐다. 1597년 9월에는 관찰사 이용순, 의병장 권응수와 합세해 달성에서 왜적을 격파했다.
대구시 달서구 월곡역사박물관(지하 1층, 지상 2층)에 전시돼 있는 화원의병군공책(보물 제1334호)에는 누가 몇 명의 왜적을 벴고 사살했으며, 작살했는지 자세히 나와 있다.
우배선의 고향이자 단양우씨 600년 세거지인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에는 약 3만5천㎡의 역사공원이 조성돼 있으며 공원 안에 우배선 동상과 유허비, 열락당, 낙동서원 등이 있다. 공원부지 가운데 70%는 단양우씨 종중 땅이다. 종중이 운영하는 월곡역사박물관에는 우배선 관련 유물과 종중 소장품, 농기구와 생활용품, 고문서 등이 전시돼 있으며 무료로 시민에게 개방하고 있다.
우신남 종중대표 겸 월곡역사박물관장은 “건축물이나 조형물은 종중에서 관리하지만 잔디와 수목까지 관리하기에는 힘에 부친다”며 “달서구청이 나서서 공원관리에 좀 더 신경 써 달라”고 주문했다.
⑨ 전계신
파수(巴) 전계신은 대구의 파잠, 즉 현재 대구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임란 8년 전 21세의 나이에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수영(水營)우후란 직책으로 복무하다가 임란을 맞았다. 수사가 도주해 버려 같은 부에 근무하던 권응수, 안이명 등과 함께 신녕, 경산 등지에서 창의했다. 그의 행장에는 임란과 관련된 10가지의 공적이 기록돼 있다. 그 가운데는 대구 앞산(대덕산)을 중심으로 파동계곡에 매복해 왜적 수백명의 머리를 베었다는 사실을 비롯해 대구의 둔전을 관리했으며 예천, 경주, 인동, 흥해 등지에서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는 이야기도 들어 있다.
1599년 부사로 대마도에 건너가 일본의 정세를 살폈으며, 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인 포로 3천500명을 귀국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이후 경상도우후와 함안군수, 평안도병사 등을 역임했다. 경주시 건천읍 화천리 화강서당에 전계신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⑩ 구회신
계암(溪巖) 구회신(1564~1634)은 고려말 두문동 72현인 구홍의 후예다. 임진년 29세의 나이에 창의한 그는 장정을 이끌고 의흥을 지나 팔공산에서 낙재 서사원의 의병진에 합세했다. 이후 의병장 권응수의 막하에 편입돼 전략참모로 활동했으며 영천과 경주성을 수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정유재란 때는 류성룡을 따라 군관으로 울산 서생포 도산성 전투에 참전했다. 종전 후 1599년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첨정에 이르렀지만 고향인 대구 무태로 낙향해 성리학연구에 몰두했다. 대구시 북구 동변동에 그의 위패가 봉안된 표절사(表節祠)가 있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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