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안팎에 벽돌처럼 찍어낸 88기…시비가 마치 묘비처럼 서있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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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06-14   |  발행일 2013-06-14 제34면   |  수정 2013-06-14
대다수 지역 생존시인 시비
시인의 인지도·시의 완성도
시비 조형미·장소 적절성 등
어느 하나 충족시키지 못해
사찰 안팎에 벽돌처럼 찍어낸 88기…시비가 마치 묘비처럼 서있다


언젠가부터 ‘자작형 시비(自作型 詩碑)’가 전국 산하를 뒤덮고 있다. 시비를 위한 ‘기승전결적 고민’도 없이 그냥 지자체와 예술단체, 유족 등 관계자들만 아는 자축형 시비동산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고 있다. 일부는 개인의 열정으로 추진되기도 하지만, 대다수 지자체의 필요에 의하거나 문인단체의 특정 시인 예우사업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시비만이 갖고 있는 ‘배타적 권위’ 때문에 언론은 ‘묻지마 식 보도’를 하고 있다. 한마디로‘그들만의 시비잔치’란 평가다.

<사진= 당초 개인의 소박한 꿈으로 출발했다가 지금은 대구시단의 대표적 사업으로 급부상한 대구도동시비동산. 좁은 부지에 워낙 많은 시비가 들어사다보니 시비가 묘비처럼 보인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3차 시비산책로를 조성할 때 조형미를 주려고 했지만 함량 미달 시인 등으로 인해 동산의 위상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대다수 지역 생존시인 시비
시인의 인지도·시의 완성도
시비 조형미·장소 적절성 등
어느 하나 충족시키지 못해

개인의 사비로 추진된 결과
시인들 그동안 관망만 해와



시문학과 전혀 무관한 동네에
한국문인협 간부 자축용 건립
마을기금 반환 못 받아 분란



두 곳에 무려 530여기 세워져
정치인 등 함량미달 인물까지…
오죽했으면 ‘法으로 규제’기고



섬진강변엔 한 시인 위해 10기
장흥 해변엔 한 소설가 위해 30기
특정 문인 거의 우상화 수준

사찰 안팎에 벽돌처럼 찍어낸 88기…시비가 마치 묘비처럼 서있다
제현사 입구에서 바라 본 시비동산. 경내 조성된 탑이 시비를 압도하고 있다.


◆ 동산 같지 않은 동산, 대구 도동시비동산

2007년 11월21일 대구시 동구 도동 측백수림 맞은편 향산마을 제현사.

이곳 경내에 도동시비동산이 들어선다. 동구청에서는 여길 찾아오는 관광객을 배려한다는 생각에 불로동에 교통안내판까지 세웠다. 언론에도 대서특필되면서 대구를 대표하는 야심찬 시비동산으로 알려진다. 지역은 물론, 전국 시인들 사이에도 화젯거리가 된다.

이후 2009년 11월, 지난 5월, 모두 세 차례에 걸쳐 88기의 시비가 세워졌다. 대다수가 생존 지역 시인의 시비였다. 첫단추가 잘못 끼워지고 있었다. 일부 시인은 자존심을 구겨 가며 노골적으로 자기 시비를 세워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시비는 일사천리로 세워졌다.

‘당신 시를 세우니 싶으니 동의해 달라, 우리가 알아서 무료로 세워주겠다’고 했다. 이를 고사한 시인은 아무도 없었다. 시비 제안을 못 받은 일부 전국구 유명 시인은 ‘내가 누군데’라면서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지역 시단의 파벌의식은 여기서도 작동됐다.

일부 시인은 안면 때문에 시비건립에 건성으로 동의했지만, 이후 어떻게 자기 시비가 건립되는지 현장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이 현장에 오지 않은 이유는 명실상부한 시비동산이라고 보지 않은 탓이다. 시인들이 최종 시비 교정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탈자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제현사의 사비로 진행되다 보니 벽돌을 찍듯이 공장에서 시비를 자동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하려면 시비 한 개당 1천만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다. 자연 조형미가 생길 수가 없었다. 그냥 무늬만 시비였다.

현장으로 갔다.

대구국제공항에서 불로동으로 가다가 측백수림으로 빠지는 길 불로천 입구에 이정표가 서 있었다. 승용차로 8분 정도 걸려 시비동산 입구에 도착했다. 멀리 제현사를 알리는 탑이 하나 보였다. 하지만 이 언저리가 시비동산이라는 느낌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시비동산 초입의 풍광도 몹시 어수선했다. 동산 입구에는 방문객의 시야를 가리는 여러 동의 대규모 원예용 비닐하우스가 버티고 서 있었다. 각종 농기구와 공구가 널려 있고, 그 옆에는 사용하다 버린 듯한 대리석 판석이 방치돼 있었다. 꼭 공사장 야적장 같았다.

길 옆에는 수백장의 연탄재가 뒹굴고 있었다. 제현사 입구에 섰다. 제현사 표석보다 훨씬 작아 보이는 시비동산 표석이 초라하게 서 있었다. 꼭 ‘위패’ 같았다. 탑의 동과 서쪽에 40여기의 시비가 조형학적 고려도 없이 무표정하게 다닥다닥 도열해 있었다.

산책 나온 한 어르신에게 시비동산에 대해 물어봤다. 시큰둥한 대답이 돌아왔다.

“세운 사람이야 잘한 일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우린 별로 느낌이 없어요. 그냥 있는 자들이 하는 처사려니 생각해요. 시비동산이라면 동산 같은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이처럼 당초 취지와는 달리 참여 시인의 인지도와 시의 완성도, 시비의 조형미, 장소의 적절성 등에서 적잖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시비동산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한 유명시인들은 제현사의 시비동산건립 꿈을 성실하게 갈무리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흐름을 관망하던 일부 시인들도 “이제야 한마디 해야겠다”면서 “원칙 없이 시비가 건립됐다. 제대로 된 시비동산을 위한 계획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모 치과병원장은 공로가 인정됐다면서 2기의 시비를 세워줬다. 모 스님은 불교계 인사란 점, 모 화가와 모 천연염색전문가는 팔공산에 산다는 이유로 시비를 세웠다. 일부에선 “이렇다 할 만한 경력도 위상도 없는 시인을 위해 시비를 세워주면 그건 선정비지, 시비로 볼 순 없다”고 비판했다.

최근 시비동산 자문위원회(문무학 대구예총회장·공영구 현 대구문협회장·구석본 전 대구문협회장·도광의 시인 등)와 운영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이들도 시비동산이 나름의 문제를 갖고 있는 걸 알지만, 이 동산이 한 개인의 사비로 추진되고 있는 점 때문에 모두 관망만 하고 있다. 자기 돈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배가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2천평(6천600㎡) 가까운 개인 부지에 적잖은 사비를 시비건립비용으로 내놓은 권대자 대구문협부회장 겸 영남아동문학회 부회장.

그녀와 전화 인터뷰를 했다. 그녀는 “도동 측백수림에 소풍 오는 아이들이 볼 만한 게 없다는 얘기가 너무 가슴 아파 시비동산을 세우게 됐다”면서 “당초에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같은 전 국민적 애송시와 검증된 향토 유명시인 등을 축으로 시비를 세우려고 했지만 일을 해 나가는 과정에 소중한 인연을 챙기려다 보니 다소 무리가 있었던 것 같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현존 시인의 시비에 강한 반감을 가진 지역의 모 시인은 실명을 거론해도 좋다면서 “작고한 유명 시인을 위주로 시비동산을 만들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면서 “세워주려면 다 세워주고, 그렇지 않다면 세우지 않는 게 진정으로 ‘시인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꼬집었다.


◆ 문경 수예리 시비동산, 국고보조금에 눈멀어 급조하다


문경시 가은읍 수예리는 요즘 졸속으로 추진된 시비동산 때문에 마을 전체가 분란에 휩싸였다.

2007년 12월 한 떼의 한국문인협회 소속 시인이 녹색체험마을로 지정된 이 마을에 나타났다. 시비동산 제막식 때문이다. 시문학과 전혀 상관없는 이 마을에 웬 시비동산이란 말인가. 익명을 요구한 마을의 한 관계자는 “이장 등 이 마을 관계자들은 당시 국고보조금(2억4천만원)에 눈이 멀어 시비동산을 급조했다”고 고백했다. 한 마디로 시비동산은 ‘국고를 노린 들러리 프로젝트’였다는 지적이다.

당시 8기의 시비가 세워졌는데, 한 마디로 한국문인협회 ‘자축용 시비’란 비난을 샀다. 시비를 세운 시인 모두 한국문인협회에서 감투를 갖고 있는 실세들이다. 한국문인협회 김년균 이사장은 ‘외출’, 전 한국현대시인협회장 최은하 시인은 ‘저녁노을 속에서’, 한국문협 중앙운영위원 박기동 시인은 ‘가난한 사람’, 한국문협 중앙운영위원 유회숙 시인은 ‘슬픔엔 모서리가 없다’란 시를 새겼다.

시비동산은 현재 이 마을에 있는 N 농원에 조성돼 있다. 농원 측은 사업이 잘 되면 원금을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마을기금을 국고보조금 수령을 위한 자부담금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건립 후 관광객이 전무한 탓에 마을기금을 돌려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 마을주민은 “농원 마당에 시비공원을 조성한다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었지만, 마을에선 훗날 공원에 사람이 많이 들면 수익금을 나눠가질 수 있다 해서 마을기금을 내놨다. 이럴 바엔 차라리 시비동산이 없었다면 마을이 더 화평했을지 모르겠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당시 언론은 검증 없이 이 시비동산을 ‘전국 최초의 현대시비동산이자 문경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대서특필한 바 있다.



◆ 충남 보령 “돈만 내면 원하는 시비를 세워 드립니다”

충남 보령시는 현재 생존 시인들의 ‘시비천국’이다. 이 도시에서는 돈만 내면 자기가 원하는 시비를 세울 수 있다고 한다. ‘상업적 자작 시비 시대’의 신지평이 열린 것이다.

보령시 성주면 개화예술공원에는 230여기의 시비가 서 있는 한국육필문예동산이 있다. 2006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2007년 5월에는 시와 전혀 상관없는 조순 전 경제부총리를 위한 시비 제막식도 있었다.

이후 2010년쯤 보령시 주산면 삼곡리에 대형시비동산이 생긴다. ‘시와 숲길 공원’인데 현재 300여기의 시비가 몰려 있다. 이 공간은 <사>한국육필문예보존회(회장 이양우 시인)가 운영하고 있다. 이 단체는 육필시비와 관련 특허도 갖고 있는데 시인 3천명의 이름이 적힌 ‘한국현대문학100주년기념탑’을 비롯해 ‘시와숲길 100인 문학비’ ‘항일민족시인 분향탑’ ‘시인 등단연대표’ ‘시인육필탑’ 등을 세웠다. 최근에는 ‘한국현대문인인물성역병풍석’을 세우고 있는데, 지역의 몇몇 시인도 거기에 가담했다.

하지만 보존회의 공격적인 시비마케팅에 대해 우려하는 시인들은 함량 미달 시인이 많아 ‘잔치용 시비’라는 비판도 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회장은 서울서 발행되는 문예춘추를 발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역 4선 국회의원 김현욱과 남병근 보령경찰서장도 문예춘추로 등단한 직후 시비까지 세웠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10월 계절문학 겨울호에 기고문을 통해 ‘시비규제법 제정’을 제안한 보령시 문인협회 한 관계자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기 돈 내고 자기 시비를 세우는 걸 홍위병 식으로 비판할 순 없지만, 시비공원에 걸맞은 시인을 선정하고 관리하는 게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강조했다.

◆ 경치 좋으면 어김없이 시비…지자체의 장단에 놀아나다

전국 지자체는 조금이라도 유명세가 있으면 즉각 시비를 ‘관광상품’으로 치장하는데, 자칫 특정 문인을 우상화할 우려가 있다는 여론이다.

전남 임실군 덕치면 진메마을 섬진강변에는 모두 10기의 시비가 서 있다. 섬진강 시인으로 알려진 김용택 시인의 시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날’ ‘향기 ‘구절초꽃’ 등을 돌에 새겼다.

이 시비는 임실군 문화예술과가 문화관광체육부의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된 섬진강 정비사업 일환으로 1억4천여만원을 들여 조성한 것이다.

전남 장흥군에서는 96년 서울에서 귀향한 유명 소설가 한승원씨를 문화관광상품화하기 위해서 안양면 율산리 여다지문학공원 해변 산책로에 30기의 시비를 세워줬다. ‘한 소설가를 위한 과잉예우’라는 지적이다.

남원시 운봉읍 정령치에 가면 이원규 시인의 시비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 서 있다. 2009년 3월 남원시와 남원문화원이 지리산 국립공원 북부사무소의 도움을 받아 비를 건립했다. 박남준과 함께 ‘지리산 시인’으로 불리는 이 시인의 경우 ‘지리산 정상부에 시비를 세울 만큼 문학적 업적을 이뤘는지 의문’이라는 게 주변의 시각이다.

이 밖에 4억원을 들여 조성한 군산 진포시비공원은 오자투성이 시비공원으로 낙인이 찍혔으며, 전북 남원시 덕과면 호암시비공원은 인적이 드문 곳에 조성되어 현재는 황량하게 방치돼 있다.

지난 2월6일 국제로타리클럽(3720지구)은 3천만원을 들여 마산역 광장에 노산 이은상의 대표작인 ‘가고파’를 기리기 위해 시비를 세웠다.

이 시비는 허인수 마산역장이 제안해서 세워졌지만 제막식을 하기 전 누군가 파란색 페인트로 시비를 훼손하기도 했으며, 곧이어 ‘이은상은 마산의 자랑이 아니라 수치’라는 내용의 대형 검정 펼침막이 다시 내걸렸다. 현재 마산은 가고파 시비 철거파와 옹호파로 대립 중이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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