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위안부의 상징적 아이콘 된 ‘평화의 소녀상’ 만든 김운성·김서경 부부조각가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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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09-19   |  발행일 2014-09-19 제37면   |  수정 2015-01-30
“소녀상 건립은 강제위안부 할머니에게 잃어버린 소녀시절을 돌려주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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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대구국제사진비엔날레 개막식 참석차 대구예술발전소를 찾은 김운성·김서경씨 부부가 자신들이 제작한 ‘평화의 소녀상’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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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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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문화회관 앞에 있는 소녀상.

 2011년 위안부 할머니 도울 방법 찾다 ‘강제로 끌려간 소녀의 슬픈 사연’ 형상화
 한때 日서 제작중단 요구…항의 표시로 설계와 달리 곱게 모은 손을 주먹으로 바꿔
 전쟁·인권의 명제에 억울하고 슬픈 감정 이입…소녀가 입은 한복은 ‘조선’ 상징
 왼쪽 어깨 앉아있는 새는 자유와 평화를, 소녀의 맨발은 험난했던 삶의 여정 의미
‘전쟁 속 여성’ 대구사진비엔날레서 전시 뜻깊어…북한에도 소녀상 세우고 싶어

 

부부는 살아가면서 서로를 닮는다는 말이 있다. 조각가 역시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얼굴과 몸을 형상화하길 좋아한다.

‘평화의 소녀상’ 조각 작품으로 일본군 강제위안부 문제를 국제적인 이슈로 부각시킨 김운성(50), 김서경씨(49)는 부부조각가다. 부부이면서 조각가인 둘은 그런 점에서 닮은 데가 많다.

김씨 부부는 지난 12일, 대구국제사진비엔날레 개막식 참석차 대구예술발전소에 왔다. 2층 전시장엔 ‘Women in War’(전쟁 속 여성들)를 주제로 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가운데 김씨 부부가 창작한 소녀상이 관람객의 발길을 붙잡고 있었다. 전시장을 찾은 대부분의 관람객은 소녀상 옆 나무의자에 앉아 소녀상과 기념촬영을 하면서 추억거리를 만들고 있었다. 소녀상은 이제 강제위안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됐다. 더불어 김씨 부부도 세계적 조각가의 반열에 올랐다.

부부조각가는 오는 11월25일 결혼 25주년(은혼식)을 맞는다. 소문난 ‘과 커플’(중앙대 예술대학 조소학과)이기도 한 둘은 부창부수(夫唱婦隨)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작품의 세계는 조금 다르다. 남편인 운성씨가 조각 작품에 회화에서부터 퍼포먼스까지 가미해 다양한 주제를 선보이는 반면, 부인 서경씨는 주로 아이와 여성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부부는 대학시절부터 민족미술협의회에서 활동하는 등 사회참여적인 작품을 꾸준히 창작해온 공통점이 있다. 서경씨는 지금까지 5번의 개인전을, 운성씨는 2차례 개인전과 단체전을 했다. 부부의 가슴에 세월호 리본을 단 모습이 인상적이다. 큰 키에 꽁지머리를 한 운성씨에게 “소녀상이 아내 서경씨를 꼭 빼닮았다”고 하자 웃으며 동의했다.

-대구는 몇 번째 방문인가.

“예술마당 ‘솔’에서 주최한 문화행사관계로 여러 차례 왔다. 낯설지 않다.”(남편)

-어떻게 대구에 오게 됐나. 방문 느낌은.

“사진비엔날레 전시회 주제가 ‘전쟁 속 여성’이다. 주최 측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대여해 줄 수 없겠느냐고 해 작품과 함께 오게 됐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반갑다. 대구시내 진골목이란 곳에서 식사를 했는데, 게스트하우스 ‘공감’이란 북카페에 노란 리본이 달려 있는 게 인상적이더라.”(남편)

-평화의 소녀상을 세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일제강점기 강제위안부의 삶을 살았던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서울에서 증언을 했다. 그때 그 사실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할머니를 위해 도울 수 있는 게 어떤 걸까 하는 빚진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 20년이 지난 2011년 5월에 죄송한 마음을 갖고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를 방문해 ‘미술을 하는 사람인데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12월14일이 수요 집회(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일본군 강제위안부 할머니의 시위)1천일이 되는 날인데 그날 평화의 비석을 하나 세우고 싶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디자인을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살아계신 할머니도 많은데 검은 돌에 글씨를 새기는 비석의 형태보다 강제위안부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어떤가 하는 역제안을 정대협에 했다.”(남편)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자는 아이디어는 누가 냈나.

“조형물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꽃, 고무신, 빈 의자, 나비를 만들자는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왔다. 그때 아내가 ‘할머니보다 소녀상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열서너 살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은 소녀의 슬픈 사연을 형상화시키는 작업을 하자고 했다. 할머니가 가졌던 과거 꿈 많던 소녀시절을 돌려주자는 의미에서였다.”(남편)

-작업은 누가 했나.

“처음엔 둘이서 함께 만들자고 했는데 남성과 여성의 감성이 아무래도 달라 내가 주도적으로 했다. 소년상이 아니고 소녀상이지 않나. 욕심을 낸 거지.”(아내)

-소녀상을 자세히 보니 서경씨와 닮은 것 같다.

“하하하 그런가. 여러 사람이 나와 닮았다고 이야기한다. 소녀상은 쌍꺼풀이 없고 코가 높지 않으며 얼굴이 둥글고 사랑스럽다. 머리카락은 단발인데 자세히 보면 거칠게 뜯겨진 모습이다. 원래는 댕기머리였는데 일본군이 잘랐다. 단발로 할까, 댕기머리로 할까 고민이 있었는데 강제로 끌려간 것이니 단발로 결정했다. 스님이 속세를 떠날 때 머리를 깎는 것처럼 단발은 인연이 끊김을 상징한다.”(아내)

-어떤 자세를 갖고 작업에 임했나. 작업기간은.

“약 6개월이 걸렸다. 전쟁과 인권이라는 명제에다 억울하고 슬픈 감정을 이입했다. 작업에 몰입하면서 많이 아팠다. 소녀가 한복을 입은 모습은 조선을 상징한다. 어린 여자이지만 다부지고 의연한 모습을 형상화시키고 깊었다. 한창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 일본 측에서 조형물제작을 중단시켜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어이없고 화가 나서 원 설계엔 무릎 위에 다소곳하게 모은 손을 주먹으로 바꿨다. 소녀의 눈빛에도 신경을 썼다. 일본대사관 건물을 뚫어지게 보며 ‘너희들이 한 짓을 봐라’ 사죄를 하지 않은 데 대한 꾸짖는 모습을 담고자 했다. 잔잔한 감동을 주고 싶었다.”(아내)

-작품 속 상징물인 새와 나비, 그림자, 빈 의자는 어떤 의미인가.

“소녀상 왼쪽 어깨에 앉아 있는 새는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상징물이다. 그러면서 자유와 평화의 의미가 담겨있다. 뜯겨진 머리는 타의에 의해 가족과 조국을 단절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표현했다. 빈 의자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의자다. 수요집회 때 강제위안부 할머니가 앉는 자리다. 그러면서 우리가 앉아 공감하는 자리이고 우리와 다음세대가 풀어가야 할 자리다. 소녀의 맨발은 험난한 삶과 여정을 의미한다. 소녀는 발뒤꿈치가 들려 있다. 이는 남에게 손가락질 받을까봐 아무에게도 말을 못 하고 숨죽이며 살아야했던 아픔을 의미한다. 강제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선 아직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음이다. 뒤에 그림자는 소녀의 그림자가 아니라 할머니의 그림자다. 그 그림자 속에 하얀 나비가 있다. 하얀 나비는 환생을 의미한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딸아이가 뭔가 허전하다면서 그림자를 만들자고 제안해 수용했다.”(아내)

-지금 대구예술발전소에 있는 건 원형인가.

“그렇다. 원 작품(브론즈)을 FRP(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로 뜬 것이다. 전시를 하거나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모시고 다닌다.(웃음) 그래서 실제 사람의 모습처럼 채색을 했다.”(남편)

-강의도 하나.

“초·중·고는 물론 대학에서 강의요청이 많이 들어온다. 주로 역사와 예술, 문화에 관한 특강이다. 당시 끌려갔던 소녀는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강의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남편)

-3년 전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대사관 앞에 세워지고 난 뒤 반향은 어땠나.

“뜨거웠다. 국민들이 강제위안부 문제에 대해 다시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된 것 같다.”(아내)

-소녀상이 여러 군데 건립된 것으로 아는데 총 몇 개를 세웠나.

“정대협에서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을 건립했는데 두 번째 소녀상이 들어가게 됐다. 또 고양시장이 독도와 일본군 강제위안부 문제에 관심이 많아 직접 연락이 왔더라. 고양시 호수공원 내 고양시 600주년 기념관 앞에 세웠다. 이후 성남시청 공원, 수원시 올림픽 공원, 화성시 동탄센트럴파크 등지에 소녀상을 건립했다. 또 올해 거제문화회관 앞에 ‘서 있는 소녀상’을 제작하게 됐다. 이 소녀상은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새를 들고 서 있다. 바람을 맞고 있는 모습인데 교학사가 국사교과서를 왜곡하고 일본의 아베총리가 평화헌법을 수정하려는 분위기 속에 만들었다. 미국에 있는 소녀상 2개를 포함하면 총 10개를 세웠다.”(남편)

-미국엔 어떤 계기로 세웠나.

“캘리포니아주 LA한인들이 소녀상건립추진위원회를 조직했는데 거기에서 연락이 왔다. 지난해 7월 LA 인근 글렌데일시 센트럴파크 도서관 앞에 건립했다. 그런데 일본의 방해가 있었다. 글렌데일시에서 소녀상 건립과 관련해 공청회가 열렸는데 일본인 200명이 들어와 80명이 발언 신청을 했다. 한국인은 20명이 참석했다. 일본사람들이 ‘위안부는 조선에서 돈 벌려고 왔던 창녀인데 어떻게 세우냐’고 했다더라. 그런데 글렌데일시의회 의원들이 ‘너희들이 전쟁범죄를 숨기고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세우는 것이라고 호통을 쳤다’고 들었다. 지금도 글렌데일시 일본계 미국인이 소송을 내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남편)

-지난달 미국 디트로이트에도 소녀상을 세웠던데.

“글렌데일에 앞서 디트로이트에서 먼저 소녀상 건립요청이 있었다. 미시간주 평화의 소녀상 건립위원회 요청으로 디트로이트 인근 사우스필드시 미시간 한인문화회관 앞에 세웠다. 이 소녀상은 당초 디트로이트 지역 공공장소에 세우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디트로이트 소재 일본 총영사관과 일본 자동차기업들의 집요한 반대 로비에 부딪혀 성사되지 못했다.”(아내)

-북한에선 건립요청이 없었나.

“없었다. 요청이 있다면 북한에도 세우고 싶다.”(남편)

-지난달 대구시 중구 서문로에서 강제위안부 역사관 터 잡기 행사가 열렸다. 역사관건립추진 4년8개월 만에 첫 삽을 뜬 셈이다. 역사관 밖이나 내부에 소녀상 건립제의가 오면 응할 생각인가.

“당연하다.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도시가 아닌가. 강제위안부역사관 건립에 대구시민의 성금이 많이 답지했다고 들었다.”(남편)

-소녀상 말고 어떤 작업을 했나.

“대학 때 전태일 부조를 만들었다. 제주 4·3조각을 만들어 제주도에 기증하고 싶었는데 받아주지 않았다. 광주대학에 5·18민주화운동 10주년 기념탑을 제작했고, 전북 정읍의 무명용사탑, 효순·미선 추모조형물을 세웠다.”(남편)

-소녀상에 테러를 가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얼굴에 봉지를 씌우고 말뚝으로 테러를 했다. 글렌데일에선 소녀상의 코가 찍혔다. 훼손됐을 때 마음이 아프고 분노가 일었다. 우리가 조형물을 제작하면 대개 신문의 문화면엔 보도되지 않고 사회면에 나오더라.”(아내)

-희망이 있다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강제위안부 문제가 해결됐으면 좋겠다. 또 할머니들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면 좋겠다.”(아내)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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