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을 통해 만난 40대 후반의 교수 A씨는 자신을 ‘혼자 떠다니는 나무배’라고 했다. 파도는 잔잔하나 사방에는 아무도 없는 나무배. 어디로 흘러가는 듯하지만, 목적지가 없어 공허하고 막연한 느낌. 그런데 그 감정은 최근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지금도 그 감정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공부에, 연구에 더 몰두했고, 그 덕분에 늘 앞서 있었다고 한다.
A씨는 기러기 아빠다. 일찌감치 두 아들을 아내와 함께 미국생활을 하게 했다. 아내는 평소 시댁과의 갈등이 많았고 그럴 때면 아내에게, 또 친가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내는 시댁의 불만을 늘 자신에게 퍼부었고, 반복되다보니 아내와도 사이가 좋진 않았다. 유학시절 가족 모두 미국에서 생활했던 터라, 지금 아내와 두 아들은 영어가 유창하다. 두 아들은 유명 대학에 다니고 있으며, 아내는 자신의 전문성을 키워가고 있고 한인회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한국에 올 생각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외롭지 않느냐’는 질문에 A씨는 연구에 집중하다보면 외로울 새도 없고 오히려 편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친가와의 갈등을 눈으로 보지 않아도 되니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A씨는 4남매 중 장남으로, 아버지는 원양어선 마도로스라는 직업적 특성으로 길게는 3년, 짧게는 1년을 해외로 나갔다. A씨는 엄마에게는 남편이, 동생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어 주어야 했다. 엄마가 아침 일찍 일을 나가 밤늦어서야 돌아올 때는 꼭 이렇게 말했다. “숙제해라. 그리고 동생들 잘 돌봐주고, 밥도 꼬박꼬박 챙겨주어야 한다. 동생들 다치지 않게 잘 돌봐주고 숙제도 봐주고. 형이 잘 해야 동생들이 본받는다. 알다시피 아버지가 없으니 남들이 손가락질 안 하도록 너가 잘해야 한다.” A씨는 늘 어떻게 하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릴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A씨에게는 어린 시절이 없었다. 어린 시절을 도둑맞은 셈이다. 전형적인 부모화의 사례다. 부모화란 부모가 감당해야 할 책임을 자녀가 맡게 되는 현상으로 방임의 한 형태다. 부모는 자녀에게 가족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행동을 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는데, 부모화된 자녀는 부모가 해야 할 일을 조성하고 수행하며 부모를 돌보는 역할도 한다. 어린 시절의 부모화 경험은 우울 문제, 애착 및 대인관계 문제가 있을 수 있고, 전반적인 정신문제, 불안, 약물남용, 의존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또 부모로부터 자아분화가 지연되어 자율적인 자아정체감이 형성되기도 어렵다.
일을 해야만 편하다는 A씨의 말에는 숨겨진 의미가 있다. 박탈당한 어린 시절의 삶과 어른이 된 지금의 삶을 보상받으려는 마음, 외로움을 견디려는 마음이 있고, 아무리 노력해도 바라는 걸 충족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오래된 믿음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일하는 동안은 자신이 가치 있는 인간이며,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 한마디로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어머니를 기쁘게 하려고 동분서주하고 있는 셈이다.
A씨처럼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악순환의 사슬에 얽매이는 수가 있다. 전부 자기가 책임지려고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임을 다해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껴서 더 열심히 일해야 할 것 같은 최면에 걸려 녹초가 되고, 그때마다 무력한 데서 오는 허무감을 갖는다. 감정도 단순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깊은 감정을 주고받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통스럽고, 그 과정이 되풀이되자 아예 자신은 감정이 없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게 된다.
A씨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필자는 아내와 친가를 향한 감정을 적절히 처리하지 못해 겪어야 했던 좌절감과 어려움에 공감하며,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는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무도 어린 A씨에게 그런 점을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이며, 그를 몰아붙이기만 했다는 걸 설명했고, 이제는 고칠 수 있다는 걸 이해시켰다. <대구사이버대학교 교수 songyoume@dc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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