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우의 영화, 음식을 캐스팅하다] ‘라스트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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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4-12   |  발행일 2019-04-12 제40면   |  수정 2019-04-12
아내와 동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비후가스 샌드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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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경양식집’이 있었다. 글자 그대로 가벼운 양식을 파는 곳. 돈가스, 비후가스, 생선가스, 함박스테이크(글 시작부터 미안하지만 나는 돈까스, 비프까스 또는 돈카츠, 비프카츠라고 쓰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가 주 메뉴였다. 미팅과 데이트 같이 특별하고 중요한 날이면 큰 맘 먹고 용돈 털어가며 경양식집을 찾았다. 그 시절과는 달리 이젠 비후가스 파는 곳을 찾기 힘들다.

비후가스는 일본에서 시작된 음식이다. 소고기에 반죽 옷을 입혀 튀겨낸다. 때문인지 일본영화 속 식탁에 자주 등장한다. 비후가스 샌드위치가 있다는 사실을 안 것도 다키타 요지로 감독의 ‘라스트 레시피’를 통해서였다. 비후가스를 넣은 샌드위치라니! 먹고 싶었으나 먹을 방법이 묘연했다. 일본 사람의 취향이 독특하다 여기면서도 호기심이 발동하여 비후가스 샌드위치 파는 곳을 찾아다녔다. 제대로는 고사하고 파는 곳조차 드물었다.

돈가스 샌드위치를 먹어보면 유사한 맛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상상에 이르렀다. 이곳저곳 수소문 끝에 돈가스 샌드위치 파는 가게를 찾아 나섰다. 대구 수성구 범어동 모 호텔 골목에 위치한 작은 카페다. 정갈한 상차림과 청결한 이미지가 일본 그 자체다. 가게의 외모만큼은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돈가스 샌드위치? 물론 먹었다. 고기 선택부터 전 과정은 주인의 손을 거친다. 일본 현지에서 먹었던 기억을 되살리는 주인은 주문과 동시에 조리를 시작한다. 솜씨가 보통이 아님은 말해야 무엇하랴. 끝내주는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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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레시피’의 한 장면.

‘라스트 레시피’는 휴먼드라마와 추적극 형식을 모두 차용한다. 일본 최고 아이돌 아라시 출신의 니노미야 가즈나리를 필두로, 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미야자키 아오이와 아야노 고에 이르기까지 연기파 배우로 라인업을 꾸몄다. ‘굿, 바이’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거머쥔 감독이 연출을 맡아 맛과 진중함을 두루 갖춘 요리의 세계로 인도한다.

한 번 먹어 본 음식 맛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절대미각을 가진 청년이 있다. 임종을 앞둔 이가 죽기 전에 먹고 싶은 ‘마지막 요리’를 만드는 것이 그의 일이다. 한때는 잘나가는 요리사였다. 자기 가게를 내고 단골도 많아 북적거렸으나 절대미각과 과도한 자부심이 모든 걸 망쳤다. 손님은 떨어지고 동료도 하나 둘 떠나갔다. 영업을 접고 빚을 갚기 위해 돈을 주면 어디라도 가서 마지막 요리를 한다. 영화의 시작도 오무라이스를 만드는 장면이다. 고급 병실에 입장하는 요리사와 커다란 여행용 케이스, 가스레인지부터 조리도구가 완비된 움직이는 주방이다. 현란한 손놀림으로 오무라이스가 만들어진다. 맛을 본 의뢰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래! 이 맛이야. 부인의 손에서 건네지는 수고비는 100만엔이다. 출장요리 한 번으로 1천만원이라니.


자신의 미각외엔 못 믿는 완벽주의자 요리사
과도한 자부심에 모두가 떠나고 닥치는 불행
“요리사가 행복해야 손님도 함께 행복해져”
가까운 사람이 좋아하는 맛으로 세계에 소개
맛과 진중함 두루 갖춘 요리의 세계로 인도



뒤이어 1930년대 만주로 시공간이 이동한다.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만주를 점령한 시절, 천황의 방문을 앞둔 사령부에선 원대한 프로젝트를 준비한다. 청나라 황제가 먹은 ‘만한전석’을 능가하는 ‘일본제국식채전석’이다. 청의 강희제가 만주족과 한족의 화합을 위한 연회용으로 시작한 것이 만한전석이라면 식채전석은 세계 모든 이의 입맛을 사로잡겠다는 야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랑스 유학파 출신 요리사를 특별히 데려오고 중국인 보조요리사까지 붙인다. 108가지 요리를 구성하고 레시피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한 편의 인간드라마다. 완벽주의자인 요리사는 자신의 미각 외엔 믿지 못한다. 동료가 만든 요리는 하나같이 맘에 들지 않는다. 곁에서 지켜보다 못한 아내의 한마디. “옆에 있는 사람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세계인의 입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건가요?” 완벽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친구와 동료가 드문 건 이 때문이다. 쉼 없는 자기 채찍질이 지나쳐 주위 사람까지 자기 세계 안에서 작동해야 한다고 믿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면 요리도 바뀐다. 자기 재능만 믿던 사람이 동료 음식을 칭찬하고 조리법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하나 둘 요리가 완성되어 식채전석 리스트가 채워질 찰나다.

문제는 대미를 장식할 최고의 음식이다. 화려한 피날레에 걸맞게 천황도 내빈도 더불어 세계인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요리여야 한다. 마지막 불꽃을 태울 즈음 딸이 태어나지만 아내는 출산 도중 숨을 거둔다. 슬픔 가득한 주방에서 비후가스 샌드위치를 만드는 요리사. 청혼한 이래 아내가 가장 좋아한 요리였다. 아이의 탄생과 아내의 죽음 앞에서 요리사는 최고의 음식을 만든다. 눈물 글썽이며 맛있게 먹는 동료를 보면서 그는 외친다. 유레카! 만찬의 대미를 비후가스 샌드위치로 장식하겠다는 외침이다. 식채전석 레시피 책 마지막 장을 장식한 조리법에는 맛있게 먹는 딸아이의 사진도 함께 붙어 있다. 세계인에게 바치려했던 마지막 요리는 나와 가까운 이를 행복하게 만든 비후가스 샌드위치였다.

제 아무리 비싸고 화려한 요리도 자꾸 먹으면 물린다. 타향살이에 외식과 배달음식으로 지칠 때마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집밥이 생각나는 건 이 때문일 터. 1천만원으로 필생의 오무라이스를 맛본 노인이 아내에게 “그럼에도 내 마지막 음식은 당신이 만들어주는 걸 먹고 싶다”고 말하는 건 같은 이치다.

최초로 오마카세를 만들었고, 최초로 미슐랭가이드 3년 연속 별 셋을 획득한 스시 레스토랑 초밥 장인 오노 지로는 말한다. “내가 행복할 때 비로소 손님도 내 음식을 먹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샌드위치를 다 먹을 때 즈음, 카페 주인남자는 종종 손님 없을 때만 낸다며 참외를 썰어왔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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