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안계여 흥하라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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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16   |  발행일 2019-05-16 제31면   |  수정 2019-05-16
[영남타워] 안계여 흥하라

의성군 ‘안계면(安溪面)’. 누군가에겐 잊을 수 없는 로망이었다. 1942년 여름 어느 날, 의성 단밀면 위중리의 아홉 살 남자 아이는 동네 또래들과 ‘안계행(行)’을 감행했다. 안계장터에 서울 유명 곡마단이 찾아 왔기 때문이다. 단밀에서 안계까진 20리 거리. 간도 컸다. 시장에 내다 팔 만한 물건을 엄마 몰래 갖고 나온 것이다. 서커스장 입장료를 마련할 요량에서였다. 집에서 알면 난리가 날 일이었다. 어머니는 2대 독자인 아이에게 단 한 번도 안계 구경을 시켜주지 않았다. 사람 붐비는 곳에 데려가 자칫 귀한 장손을 잃어버릴까 염려한 탓이다. 당시 안계장이 서면 얼추 1만5천명이 한꺼번에 모였다. 신평·안사·단북·단밀·다인·구천·비안 등 이웃 면에서 장을 보러 오는 이들로 인산인해였다. 아이들은 그날 걷고 또 걸었다. 드넓은 안계들을 지나 마침내 안계에 이르렀다. 꿈에서도 그리던 안계였다. 혼을 쏙 빼놓는 서커스와 신기한 시장 물건, 그리고 발 디딜 틈 없는 장터. 그 옛날 단밀면 아이들에게 안계는 ‘내 마음 속 서울’이었다.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울 아버지의 77년 전 추억 한 토막이다.

2019년, 안계가 의성 서부의 맹주(盟主)를 넘어 경북의 핫플레이스를 꿈꾸고 있다. 그 동력은 경북도가 이 곳에 추진 중인 ‘이웃사촌 청년 시범마을’. 대도시 뺨치는 주거·교육·복지·문화 인프라를 조성해 재기(才氣) 넘치는 도시 청년을 ‘안계 사람’으로 만드는 게 골자다. 의성은 향후 30년 내 인구소멸 우려가 가장 높은 곳이다. 이철우 경북도지사가 일찌감치 의성을, 그 안에서도 안계를 콕 찍은 것도 그 때문이다. 청년 시범마을은 기존 일회성 퍼주기식 인구 정책과는 퀄리티부터 다르다. 전국 어디에도 없는 ‘차별화된 마을’이어서다. 특히 이 도지사가 이곳에 반려동물산업 인프라를 만들겠다는 것은 잘한 생각이다. 반려동물 사료·용품 업체와 반려동물 카페·펜션·훈련소·공원 등이 그것이다. 이른바 ‘펫시티(Pet city)’ 또는 ‘펫타운(Pet town)’이다. 잘만하면 대박이다. 입소문도 시간 문제다. 전국의 펫 동호인이 성지순례하듯 안계에 몰려올 게다. 관련 산업이 번창하면 일자리도 덩달아 늘어난다. 외국 사례도 벤치마킹해 똑소리나게 추진했으면 좋겠다.

안계 청년 시범마을은 일종의 ‘아이턴(I turn·도시 청년이 농촌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것)’이다. 대개 아이턴은 정착금이 주어지는 초기엔 줄을 잇는다. 하지만 지원이 끊기면 다시 도시로 돌아갈 개연성이 크다. 훗날 지원이 끝나도 청년들을 영구 정착시키는 게 관건이다. 방법은 분명하다. ‘비전(Vision)’ 제시다. 안계를 청년이 살 만한 곳으로, 즉 미래 가치가 있는 곳으로 만들면 된다. 이와 관련해 향후 안계에 ‘3·6·5 생활 서비스’(30분 내 보건·보육, 60분 내 창업·문화, 5분 내 응급의료) 시스템이 구축되는 것은 고무적이다. 덧붙여 젊은 부부에게 어필할 수 있는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교육 인프라다. 농촌을 살리는 데 좋은 학교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발상의 전환을 꾀하자. 시범마을에 완전히 새로운 ‘신개념 학교’를 세우는 것도 고민해봄 직하다. 대도시 학교도 울고 갈, 안계하면 이 학교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학교 말이다.

안계는 지금 가도 병원(양·한방)을 비롯해 약국·편의점·대형마트 등 없는 게 없다. 시범마을이 계획대로 착착 터를 잡는다면 안계는 오래지 않아 대도시 부럽지 않은 고장으로 도약할 수 있다. 올해 안으로 100여명의 청년이 안계에 보금자리를 잡는다. 내년엔 200~300여명의 서울 청년도 이주해 온다. 이제 안계는 더 이상 인구가 줄어들 일이 없다. 얼마 전 안계면사무소 공무원 한 분의 전화를 받았다. 이 분은 면사무소 관련 기사(안계면장 개방형 공모)가 신문에 톱으로 게재돼 너무 놀랍고 고맙다고 했다. 통화 말미 시범마을 얘기가 나오자 이 분은 “낯선 안계로 이사 올 젊은 남녀들이 마음 붙이고 잘살 수 있도록 고향 형과 오빠의 마음으로 대하겠다”고 다짐을 나타냈다. 이 분 말씀에 깨닫는 바가 컸다. 청년 시범마을도 결국은 제도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것을.

이창호 경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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