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역사 청송 문화재 여행 .10] 청송향교와 진보향교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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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17   |  발행일 2019-09-17 제13면   |  수정 2020-03-18
‘지방교육 중심’ 옛 위상 추락했지만 유교의 가르침은 면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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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읍 월막리에 위치한 청송향교는 ‘좌묘우학’으로 배치돼 있는데 이는 유교적 이념에 의한 원칙 아래 풍토에 맞게 재편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전통적인 향교의 경우 평지에는 전묘후학, 구릉지에는 전학후묘하는 것이 일반적인 배치였다.

유교(儒敎)는 인(仁)을 모든 도덕의 최고이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현실 생활에서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등의 도덕적 덕목을 중시했고, 나아가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실현하는 것이 올바른 선비의 길(道)이라 했다. 그러한 유교의 가르침을 외적 질서로 드러낸 곳이 바로 오래된 학교, 향교였다. 건축은 시대를 꿰뚫는 정신과 연결되어 있고 그 뿌리는 깊다.

1426년 부사 정지아 청송향교 첫 건립
숙종때 현 위치로…건물배치‘좌묘우학’
지금도 매년 제향·체험프로그램 진행
조선전기 창건 진보향교 수차례 이건
1896년 창의한 ‘진보의진’ 결성 장소


#1. 유교의 가르침이 함축된 ‘향교’

향교는 지방에 세운 공립학교로 그 시작은 고려시대다. 고려의 제17대 임금인 인종은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유능한 학자들을 파견해 유학을 가르치도록 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향교는 지방 교육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조선은 통치 이념인 유학의 교육을 위해 한양에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세운 뒤 지방에 향교를 설립했다. 태조는 고을마다 하나의 향교를 세우라고 했을 정도로 교육 기관 설립에 정성을 기울였다.

향교는 유교국가 조선왕조가 각별히 중요시한 건물이었다. 따라서 객사처럼 법칙을 따랐는데, 배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과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을 기본으로 평지에는 전묘후학(前廟後學), 구릉지에는 전학후묘(前學後廟)하는 것이 일반적인 배치였다.

이렇게 고을마다 설치된 향교는 지역의 교육과 제향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향촌의 자치 기구로 활용되었다. 학생들은 과거 시험에 필수적인 시문 짓기나 유교의 경전, 사서 등을 공부했다. 제사는 지역의 내로라하는 양반들이 모두 참석할 만큼 중요한 행사였다. 고을의 재지세력은 향교에 모여 향론을 결정했다.

나라에서는 향교에 ‘학전(學田)’이라고 부르는 땅을 주고 학전을 일구어 거둔 세금으로 학교의 운영비를 충당하도록 했다. 향교에 대한 관리도 꼼꼼하게 행해졌다. 수령은 매월 교육현황을 관찰사에 보고해야 했는데 향교 교육의 성과는 수령을 평가할 때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향교는 임진왜란 때 큰 타격을 받았고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서원의 등장으로 위축되었다. 나라에서는 향교의 부흥을 위해 향교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사람은 과거시험을 보지 못하게 하는 방안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향교는 계속 서원에 밀렸고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면서 사실상 이름뿐인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 상징성은 뿌리 깊으며 현재에도 그 가지를 뻗어나가게 하기 위해 다양한 방편들이 시도되고 있다. 청송에는 2개의 향교가 있다. 하나는 청송향교(靑松鄕校), 또 하나는 진보면이 현(縣)이었을 때 세워진 진보향교(眞寶鄕校)가 그것이다.

#2.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593호 ‘청송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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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향교 명륜당은 정면 5칸에 측면은 가운데 1칸을 두고 양쪽으로 반 칸씩을 늘린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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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후손인 이영도가 청송도호부사로 부임한 뒤 건립한 대성전. 청송향교의 제향공간은 내삼문인 대성문과 대성전, 동무, 서무로 구성돼 있다.


청송읍 월막리 군청 아래에 청송향교가 있다. 청송향교는 세종 7년인 1425년 5월에 청송부사로 부임한 정지아(鄭之雅)가 그 이듬해에 현재의 청송읍 월막1리인 상리(上里, 당시 굴동·屈洞)에 처음 창건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때 위패는 묻어 보존시켰으나 건물은 전소되었다.

이후 선조 39년인 1606년에 퇴계의 후손인 이영도(李泳道)가 청송도호부사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5년에 구평(九坪, 당시 국동·菊洞)에 대성전을 건립하고 묻어두었던 위패를 모셨다. 인조 때인 1629년에 부사 이문증(李文證)이 동무(東)와 서무(西), 강당 등을 중수했고 숙종 때인 1693년에 부사 이문징(李文徵)이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 1700년에는 부사 이상훈(李相勛)이 명륜당과 청아루(菁莪樓)를 증축했고 고종 때인 1869년에 부사 윤현기(尹顯岐)가 대대적인 개수와 보수를 했다. 청송향교는 좌묘우학(左廟右學)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유교적 이념에 의한 원칙 아래 풍토에 맞게 재편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우측의 강학공간은 대문격인 청아루와 명륜당, 동재와 서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아루는 정면 5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올린 2층 누각이다. ‘청아’는 ‘우거진 쑥’이라는 의미다. 이는 시경에서 유래한 말로 무성한 쑥과 같은 인재나 그 인재를 교육하는 일을 뜻한다.

맞은편에는 명륜당이 자리한다. 정면은 5칸, 측면은 가운데 1칸을 두고 양쪽으로 반 칸씩을 늘린 입면을 보인다. 전면의 반 칸은 툇마루로 열었고 배면의 반 칸은 대청과 방에 편입시켰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동·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좌측의 제향공간은 내삼문인 대성문(大成門)과 대성전, 동무, 서무로 구성되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며 동·서무는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대성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을 올렸다.

청송향교는 6·25전쟁과 1959년 태풍 사라 등으로 훼손되었고 시간에 따라 퇴락했지만 지속적으로 보수되어 왔다. 그리고 2005년 신축, 보수, 개수 등을 통해 지금과 같은 향교의 면모를 갖추었다.

공립학교의 기능을 잃은 지는 오래 되었지만 1896년 청송의진의 창의를 위해 향회(鄕會)를 개최한 곳이 청송향교였다. 또한 한때 청아루는 청송중학교의 임시교실로 쓰이기도 했다. 근래에는 성년이 됨을 축하하는 ‘성년례행사’와 유학교육에서 다루었던 6가지 기초교양과목인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등 육예(六藝)를 체험해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제향은 지금도 이루어진다. 청송향교는 2012년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593호로 지정되어 보호 및 관리되고 있다.

#3.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 ‘진보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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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 진보면 광덕리에 위치한 진보향교 대성전. 진보향교는 강학공간이 전면에 배치되고 제향공간이 뒤에 자리 잡은 ‘전학후묘’의 형태를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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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 5칸, 측면 2.5칸으로 구성된 진보향교 명륜당. 특이하게 동재와 서재가 명륜당 뒤쪽에 위치한다.


진보면 광덕산 아래 광덕리가 있다. 광덕리는 진보면 소재지가 발전하기 전에 일찍 마을을 이룬 곳으로 진보향교는 그곳에 위치한다. 진보향교의 창건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근래에 간행된 ‘경북향교지’에 ‘1440년(태종 4)에 건립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태종 4년은 1404년, 1440년은 세종 22년이므로 서기와 왕력 사이에 혼동이 있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진보향교가 수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향교 안내판에는 태종 4년(1404)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건 이후 진보향교는 여러 차례 이건되었다. 명확한 기록은 신익호(申翼浩)가 쓴 ‘향교명륜당중수기(鄕校明倫堂重修記)’로 영조 38년인 1726년에 이건되었다고 한다. 그 외의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현의 남쪽 4리,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년)에는 관아의 동쪽 3리, ‘진보현읍지’(1786년)에는 현의 북쪽 3리로 기록되어 있어 이건 장소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이후 진보향교는 고종 18년인 1882년에 구읍(舊邑)으로 이건되었다가 1886년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졌다. 1896년 진보현이 청송군으로 합병되면서 진보향교는 청송군의 관할이 되었다.

진보향교는 강학공간이 전면에 배치되고 제향공간이 뒤에 자리 잡은 전학후묘의 형태다.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을 올렸는데 지붕 가운데를 마치 솟을문처럼 장식한 것이 이채롭다.

내부로 들어서면 곧바로 명륜당이 자리한다. 정면 5칸, 측면 2.5칸이며 전면 반 칸은 난간을 두른 툇마루를 깔았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상지삼십오년무술팔월초파일사시입주동월십삼일묘시상량(上之三十五年戊戌八月初八日巳時立柱同月十三日卯時上樑)’이란 상량문으로 보아 1898년에 중수한 것으로 보인다.

동재와 서재는 전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특이하게 명륜당 뒤쪽에 위치한다. 명륜당의 축선 상에 내삼문이 약간 높게 자리하며 그 안쪽에 대성전이 앉아 있다. 정면은 3칸, 측면은 청송향교의 명륜당처럼 가운데 1칸을 두고 양쪽으로 반 칸씩을 늘린 입면을 보인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현판은 현종 6년인 1665년에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건물도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1896년에 창의한 진보의진 역시 진보향교에서 결성되었다. 향교의 소장 전적은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보존된 책 중 특히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체임록(遞任錄)’과 ‘유안(儒案)’ 등의 고서는 일제 통제 하에서의 향교 운영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다.

광복 이후 진보향교는 꾸준히 보수되어 왔다. 향교의 공식적인 기능은 사라졌지만 그 상징적인 의미는 여전히 광덕산 아래 굳건하다. 진보향교는 1985년 10월15일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01호로 지정되어 보호 및 관리되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 청송군지. 경북향교지. 청송누정록. 청송향교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공동기획지원 : 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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