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함양 남계서원·청계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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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2   |  발행일 2019-11-22 제36면   |  수정 2019-11-22
맑고, 곧고, 우뚝하며 함부로 만질 수 없는 고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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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함양 남계서원. 정여창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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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의 누문인 풍영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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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의 강당인 명성당과 서재인 보인재 그리고 비각. 동재는 현재 공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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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서원의 가장 안쪽 높은 자리에 위치한 사당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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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에 준공된 청계서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는 남계서원과 똑같다.

꽤나 너른 부지다. 뒤로는 연꽃 모양이라는 연화산의 북서 끝 자락이 마치 오래된 토성처럼 둘러섰고 앞으로는 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계천이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산자락은 부드럽게 나직하고 천변에는 들이 넓어 사방 시야가 훤하다. 이곳에 일두 정여창을 모신 남계서원과 탁영 김일손을 모신 청계서원이 자리 한다. 모두 김종직의 제자였고 무오사화로 희생된 초기 사림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남계서원
무오사화 희생 정여창, 성리학史‘동방오현’
학문·사상 기리기 위해 지방유생들이 건립
연꽃·매화 읊조리는 누마루 애련·영매헌
한국의 서원…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홍살문 속으로 남계서원 문루가 보인다. 풍영루다. 굵은 화강석 누하주가 확고하다. 문루 뒤로 조금씩 보이는 건물들은 서원이 그리 큰 규모가 아님을 느끼게 한다. ‘일두’, 스스로 ‘한 마리의 좀’이라 불렀던 선비의 성격의 힘이라 할까. 홍살문 옆에 조그맣게 선 검은 하마비가 하도 단호하여 걸음걸이에 신경 쓰인다. 누문을 들어서자 곧바로 높은 석축 위에 앉은 네 칸 강당과 마주한다. 대청에 아이들이 가득하다. 살짝 들어보니 일종의 예절 강의인 듯하다. 아이들의 자유로운 앉음새가 어여쁘다.

정여창은 남계서원에서 그리 멀지않은 지곡면 개평마을에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독서하던 그는 함양군수로 온 김종직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성종 때는 당시 동궁이었던 연산군을 보필할 만큼 학문이 뛰어났지만 강직한 성격 때문에 연산군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여창은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어 1504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타계한 그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 부관참시 되는 화를 입기도 했다. 그는 우리나라 성리학사에서 퇴계 이황,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과 더불어 ‘동방오현’이라 불린다. 그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1552년 개암 강익 등 지방 유생들이 건립한 것이 남계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에 이어 전국에서 둘째로 오래된 서원이며 1566년 명종으로부터 사액을 받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훼철 되지 않았다. 그리고 2019년 7월에는 ‘한국의 서원’이라는 명칭으로 다른 8곳과 더불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강당은 명성당이다. ‘명성’은 ‘중용’에 나오는 말로 ‘참된 것을 밝히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하니, 참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참되게 된다’는 뜻이다. 강당 뒤 아주 가파른 계단 위에 사당이 위치한다. 문루에서 사당까지 일직선을 이루고 강학공간 뒤에 제향 공간을 둔 전학후묘의 이러한 배치 형식은 이후 서원 형식의 기초가 되었다. 강당 앞 좌우에는 동재인 양정재와 서재인 보인재가 위치하고 서재 앞쪽에는 비각이 서있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2칸 규모로 온돌방과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검박이다. 누마루는 애련헌과 영매헌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연꽃을 사랑하고 매화를 읊조리는 누마루라니. 과연 그 남쪽 아래에는 연지가 조성되어 있다. 정여창은 매화와 연꽃을 사랑했다고 한다.

정여창은 송나라 때의 성리학자 주돈이의 ‘애련설’에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다. 주돈이는 연꽃을 꽃 가운데 군자라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유독 연꽃이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럽혀지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겼으나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어 있고 밖은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치지도 않으며,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고 우뚝한 모습으로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하거나 가지고 놀 수 없음을 사랑한다.’ 이 문장 속에 남계서원이 있다. 맑고, 곧고, 우뚝하고, 깨끗하고, 함부로 만질 수 없는 이미지 말이다. 연지로 향한 누마루에 부러 판벽을 세우고 판문을 단 고결한 취향 앞에서 감탄밖에 할 수 없는.

청계서원
훈구파 불의에 직언 서슴지 않은 김일손
정여창과도 친분…그와같이 능지처참 형
높은 지대 사당 남계서원과 형제처럼 닮아


부지의 북쪽 끄트머리 바위 언덕 곁에 청계서원이 자리 한다. 원래 이곳은 김일손이 1495년에 청계정사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수학하던 곳이었다고 한다. 김일손은 청도에서 태어나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해 주로 언관으로 재직하면서 훈구파의 불의와 부패에 대한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정여창과도 깊이 교유했던 그는 ‘문장을 쓰려고 붓을 들면 수많은 말들이 풍우같이 쏟아지고 분망하고 웅혼함이 압도적인 기상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그가 타던 거문고 탁영금은 악기로는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김일손은 무오사화 때 청계정사에서 피체되어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이후 정사는 폐사 되었고 수백 년이 지난 1905년이 되어서야 유림에서 옛터에 유허비를 세웠다. 이후 정사의 재건을 위한 모금운동이 전개되었고 1917년부터 서원 건립이 시작되어 1921년에 준공했다. 대지는 남계서원으로부터 기증 받았다고 한다.

홍살문 너머에 외삼문인 취도문이 서 있다. 문을 지나면 정면에 강당인 애락당이 석축 위에 올라 있고 그 앞쪽에 동재인 역가재와 서재인 구경재가 위치해 있다. 그리고 강당 뒤편 높은 지대에 사당인 청계사가 자리한다.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이러한 배치는 남계서원과 똑같다. 동재와 서재 역시 각각 두 칸 규모에 온돌방과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동재 앞에만 작은 연못이 있는데(비록 풀로 가득차 있지만), 그래선지 동재의 누마루에만 판벽을 세우고 판문을 달았다. 김일손의 유허비각은 동쪽 담장 모서리에 서 있다.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은 형제처럼 닮았다. 사실 김일손을 배향한 곳으로는 청도의 자계(紫溪)서원이 보다 익숙하다. 그가 처형을 당할 때 냇물이 별안간 붉게 변해 3일간을 흘렀다고 해서 자계 즉 붉은 시냇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중종반정 이후 신원을 회복하고 만고의 충신으로 역사에 남았다. 청계서원 강당 앞에 누운 듯 다시 일어선 노송 한그루가 강건하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광주대구고속도로 함양IC로 나가 본백삼거리에서 좌회전해 고운로를 따라 직진한다. 수동삼거리에서 좌회전, 수동교차로에서 3번 국도 거함대로를 타고 가다 남계삼거리에서 남계서원, 청계서원 방면으로 우회전해 조금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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