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예비 ‘랩 걸’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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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10   |  발행일 2019-12-10 제31면   |  수정 2019-12-10
[CEO 칼럼] 예비 ‘랩 걸’ 파이팅!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안하고 보내는 주말은 처음이라….”

이번에 수능을 치른 고3 조카딸에게 첫 주말을 보내는 감상을 물어보자 내놓은대답이다. 시험이 끝났으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친구들과 놀고 싶기도 할 텐데 막상 본인은 ‘물리 문제집’을 사러 시내 서점에 가볼까 한단다. 이과생이지만 수능 시험과목으로 물리를 선택하지 않았던 터라 이번 기회에 한번 공부해보고 싶다고 한다. 그 말에 제 엄마는 그 지겨운 공부를 시험 끝난 지 며칠 됐다고 또 하냐며 질색이다.

그런데 아이의 사정은 달랐나 보다. 학원도 독서실도 가지 않는 빈 시간 동안 어딘가 집중하고 마음 붙일 거리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수능시험만을 목표로 달려 온 그 아이에겐 당장의 목표가 사라지자 허탈감과 함께 하루하루 지탱해온 일상세계가 흐트러져 버린 것이다. 겉으론 덤덤해보였어도 속으론 얼마나 용을 쓰고 있었던지, 하루는 아이가 답안지에 답을 한 칸씩 미뤄 쓰는 악몽을 꾸곤 새벽에 놀라 깼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성적표가 나온 다음날에는 몸살을 앓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다행히 답을 한 칸씩 미뤄 쓰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이 잡히지 않고 온 신경이 수능성적에 가 있다고 해도 문제집이나 풀면서 이 귀한 시간을 보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물리 문제집 대신 미국의 여성 식물학자 호프 자런이 쓴 책 ‘랩 걸(lab girl)’을 권해볼까 한다. 이 책은 유시민 작가가 자신의 딸에게 추천한 책으로도 유명한데, 그런 세간의 명성을 걷어내더라도 성차별이 공고한 과학영역에서 ‘여성’ 과학자가 아닌 여성인 ‘과학자’로서의 성취를 보여주는 훌륭한 성장기라 할 수 있다. 나무와 식물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도 있지만 식물의 성장단계와 함께 교직된 여성과학자로서의 자전적 삶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읽어가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실험실 한 구석에서 새벽 여명을 바라보며 수많은 좌절의 밤과 짧은 환희를 느꼈을 세상 모든 ‘랩 걸’들에 대한 존경심이 차오를 수밖에 없다. 특히나 식물의 관점에서 인간사를 바라보는 통찰들이 곳곳에서 빛난다. 이 책에서 만난 가장 경이로운 문장은 이렇다.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은 어떤 식물이라도 사막에서 가지고 나오면 더 잘 자란다. 사막은 나쁜 동네와 많은 면에서 비슷하다. 거기서 사는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어서 거기서 사는 것이다.”

한국도 이공계 여성인력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이공계는 여성의 경력단절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분야이기도 하다. 한국교육개발원 통계(2017)를 보면, 자연대는 여학생과 남학생의 비율이 거의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공대는 여학생의 비율이 전체의 25%에 그치지만 이는 비단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취업을 하고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는 여성의 경력단계별로 인력 누출이 급격히 발생하는데, 신규채용 시에는 여성이 26.8%를 차지하다가 재직 중에는 20.1%로 낮아지고, 승진 시에는 16%, 보직 비율은 9.6%까지 떨어지게 된다.

실험실의 성차별적 관행에 맞서 단단한 여성과학자로 살아남았던 호프 자런은 말한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로 누군가 던진 돌을 내가 딛고 서서 몸을 굽혀 바닥에서 또 하나의 돌을 집어서 좀 더 멀리 던지고, 그 돌이 징검다리가 되어 신의 섭리에 의해 나와 인연이 있는 누군가가 내디딜 다음 발자국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 또한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목표여야 한다”고. 시험 위주의 공부와 자기만의 호기심이 추동하는 ‘진짜공부’를 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 건지, 다른 사람이 건너갈 징검다리가 되어 주는 일이 또 얼마나 중요한 건지, 이런 빛나는 순간들을 이제 사회로 나가는 예비 ‘랩 걸’들이 경험하게 되길 진심으로 응원한다.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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