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의미없는 의지·절망의 양 극에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 임성수
  • |
  • 입력 2019-12-13   |  발행일 2019-12-13 제39면   |  수정 2020-09-08
[노태맹의 철학편지] “의미없는 의지·절망의 양 극에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이 행위가 능동적인 행위인가 아니면 수동적인 행위인가를 스스로 생각하거나 판단하도록 남들로부터 요구받는다. 그러나 이 구별은 정당한 것일까. 태형이 너는 네가 어떤 행위를 함에 있어 그것이 너 자신의 의지인지 아니면 타인의 의지로부터 강요받은 것인지 즉각적으로 판별할 수 있겠니?

가령 ‘내가 걷는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할 때, 이 문장이 지시하고 있는 것은 ‘나의 다리와 팔을 움직이도록 나의 뇌가 능동적 의지를 가지고 걷는다’라는 뜻일까? 그런데 이럴 때 나의 팔과 다리는 수동적인 것이 되고 말겠지. 차라리 이 문장은 ‘나에게 있어서 보행이 실현되고 있다’라고, 즉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사태로 설명하는 것이 맞을 거야. 다시 말하자면 능동 형식으로 표현되는 사태나 행위라 해도 그것이 반드시 능동 개념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지.

능동으로서의 우리의 의지라는 것은 과연 어디까지 사실일까?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사건이나 사물의 결과만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오직 결과일 뿐인 의지를 원인으로 착각해. 이러 저러한 메커니즘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느끼고 마는 것이지. 그래서 스피노자는 의지의 자유를 부정하면서 의지는 주관적으로 느껴진 능력으로서만 존재한다고 해. 다시 말해 자유의지는 불가능하고, 의지는 오직 효과로서 남는다는 것이지.

태형아, 오늘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행위를 능동과 수동의 이분법으로만 사고하면서 빠지게 되는 오류에 대해 반성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야. 그래서 오늘은 일본의 젊은 철학자 고쿠분 고이치로의 ‘중동태의 세계’(동아시아출판사·2019)라는 책을 참고하면서 중동태(中動態·Middle voice)에 대해 짧게 이야기해 보려고 해. 태형이 너는 어학을 하면서 능동태나 수동태 말고 중동태라고 들어본 적이 있니? 사실 나도 얼마 전 하이데거 수업을 하다가 생전 처음 들은 용어였고, 그것이 궁금하던 차에 이 일본 철학자의 책을 발견한 것이었어. 그의 논의를 짧게 따라가 보자.

프랑스 언어학자 벤베니스트에 따르면 과거의 언어에는 능동태도 아니고 수동태도 아닌 중동태라는 태가 존재했고 이것이 능동태와 대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래 존재했던 것은 능동태와 수동태의 구별이 아니라 능동태와 중동태의 구별이었다는 것. 즉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능동과 수동이라는 대립의 외부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까다로운 철학 이론 속에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 속에 하나의 태로 존재했던 것인데 이 중동태는 일찍이 인도-유럽어에 널리 존재하던 태였다는 것. 수동태는 대단히 먼 훗날이 되어서야 중동태의 파생태로 발전해온 것이라는 점은 비교언어학 분야에서 이미 밝혀졌다고 한다. 희랍어와 산스크리트어에는 중동태가 있었지만 라틴어에는 중동태가 이미 태로서 상실된 상태이지만 그에 상응하는 것이 동사 그룹으로 남았다고 한다. 그런데 중동태는 실제로 무얼 이야기하는 것일까?

기원전 1세기 경의 디오니소스 트라쿠스의 ‘문법의 기법’이라는 책의 ‘동사에 대하여’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태는 3가지가 있다. 능동·수동·중동이다. 능동은 예컨대 ‘나는 때린다’이고 수동은 ‘나는 맞는다(때려진다)’이다. 중동은 부분적으로 능동을 부분적으로 수동을 나타낸다. 예를 들어 나는 거기에 머물러 있다, 나는 정신을 잃은 상태이다, 나는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었다, 나는 자신을 위해 문서를 썼다 등이 있다.

[노태맹의 철학편지] “의미없는 의지·절망의 양 극에서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방향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태형아, 이제 조금 중동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겠니? 그런데 내가 이 중동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단지 어문학적이고 문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능동과 그것의 의지에 대한 정치 철학적 관심 때문이란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능동으로서 의지할 수 있고, 얼마만큼 의지할 수 있을까? 나는 우리가 능동적으로 의지하며 미래를 향해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 쪽이었단다. 그러나 요즘 나는 그 의지와 능동이 늘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물론 무의지와 수동을 옹호할 수도 없겠지. 그렇다면?

하이데거 이야기를 잠시 해 보자. 하이데거는 의지에 대해 비판한다. ‘의지가 시작을 소유하는 일 따위는 전례가 없는바, 의지는 늘 망각을 통해 본질적으로 그곳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가장 깊은 망각이란 회상하지 않음이다라고 하였다.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한나 아렌트는 ‘의지가 미래를 주장하는 것은 인간에게 과거의 망각을 강제한다고 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사고는 그 가장 중요한 활동인 회상을 빼앗겨 버린다’라고 주석한다. 의지는 절대적 시작임을 주장하기 때문에 지나가버린 일에서 눈을 돌리고 역사를 잊고 단지 미래만을 지향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결국 의지함은 망각하고자 함이고 사고하지 않겠다고 함이라고 쓴 것이다.

태형아, 내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의 능동과 그 의지를 비판하자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동으로 사유하고 의지하는 것은 어떤 정치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의미 없는 의지와 절망의 양 극에서 우리가 행위할 수 있다는 근거와 방향을 찾는 것이 또 하나의 과제로 주어졌다.

시인·의사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