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유리의 공예 담화(談話)] 장신구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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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13   |  발행일 2019-12-13 제40면   |  수정 2020-09-08
만들고 착용하고 보여주는 즐거움 ‘주얼리의 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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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로잔 바이스버사갤러리에 전시돼 있는 ‘발랑틴 뒤부아의 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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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아 모렐의 목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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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찌아 포그트의 브로치와 귀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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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에서 열린 ‘주얼리의 유희’ 전시회 모습.


명품 수공기술의 스위스
장인 정신의 섬세함
인간 유희의 본성 담은
반지·목걸이·브로치…
5가지 주제 장신구展 눈길

일상 착용한 사진도 소개
하나의 예술작품이라도
살아있는 신체와 만나
더욱 매력적인 가치 발산

60년대 후 현대미술 부분
창작의 매개체 소장·수집



1997년, 스위스 로잔의 바이스버사(ViceVersa)갤러리에서 ‘5초(En cinq sec)’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에서 단연 눈에 띈 작품은 반지를 만들 수 있게 재단된 긴 은판과 통조림 따개가 동봉된 패키지. 크리스티안 발머(1964~ )의 5초 만에 누구나 바로 반지를 만들 수 있는 키트였다.

‘5초’라는 흥미로운 주제의 전시를 기획한 갤러리는 어떤 곳일까. 개념적이고 유희적인 장신구를 제작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직접 보고 싶다는 나의 작은 바람은 2009년 실현되었다. 당시 바이스버사에서 보았던 발랑틴 뒤부아(1972~ )의 재치 있게 접은 사각형의 반지와 브로치, 소니아 모렐(1968~ )의 원형과 사각의 유기적 형태의 반복으로 구성된 길게 늘어진 목걸이, 루치아 포그트(1971~ )의 머리빗의 형태를 변형하여 만든 장신구 등 동시대 장신구 작가들의 작품은 꽤 오랜 세월 동안 나에게 인상 깊게 남아 있다.

로잔의 바이스버사 갤러리를 방문한 즐거움에 대한 기억과 함께, 이후 오랫동안 후회한 실수의 기억도 나에게는 남아 있다. 로잔을 대표하는 현대디자인미술관 무닥(MUDAC)의 휴관일에 로잔을 당일치기로 방문했고, 결국 나는 무닥 밖에서 건물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후 여행 계획을 세울 때 휴무일을 미리 체크하는 습관이 생겼고, 나에게는 무닥을 가지 못한 아쉬움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아쉬움과 무거운 마음을 정확히 10년 후에 떨쳐 버리게 되었다. 올해 11월1일부터 지난 8일까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DP에서 열린 무닥의 소장품 전시인 ‘주얼리의 유희(Bijoux en jeu)’ 덕분이다.

중유럽의 작지만 부유한 나라 스위스. 이 전시는 스위스가 알프스와 치즈의 나라라는 진부한 인식을 불식시키고도 남을 만한 전시였다. 많은 이들에게 스위스는 작은 치수까지 섬세하게 고려하는 신중함과 장인 정신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시계가 연상된다. 그러한 이유로 이 전시를 통해 스위스의 우수한 수공 기술의 향연쯤으로 기대하고 전시를 관람하는 관객에게는 스위스의 장신구 작가들이 표현한 인간의 유희적 본성이 신선한 놀라움을 선사했을 지 모른다. ‘주얼리의 유희’는 작가의 나이별로 줄 세우는 연대기 순서나 알파벳 순, 혹은 반지는 반지끼리, 목걸이는 목걸이끼리 착용 방식으로 분류한 전시가 아니다.

전시는 총 5가지 주제로 구성돼 있었다. 주제는 이야기를 담은 상징적 장신구를 보여주는 ‘말하다’, 인체를 장식하기 위한 도구인 장신구를 보여주는 ‘장식하다’, 비정통적 형식에 의한 사용을 보여주는 ‘사용하다’, 재현과 기능을 바탕으로 한 ‘모양을 갖추다’, 손의 지혜와 재료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만들다’였으며 220점의 작품이 전시됐다.

초현실주의 작가 메레 오펜하임(1913~1985)이 1936년 디자인한 ‘설탕 반지’를 스위스의 한 회사(Gems&Ladders)에서 2014년 생산해 고유 번호가 각인된 반지를 제외하고는 이 전시의 모든 작품은 수공으로 제작된 일품(一品)의 장신구이다.

전시장 내부에는 작품 관람에 큰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 크기의 사진들이 두 곳으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었으며, 눈밭 위를 달리는 여성, 농구대에 골을 넣고 있는 남성, 스케이트보드 위에 앉아 있는 여성 등의 모습이 담긴 14장의 흑백 사진이 있었다. 스위스 브베(Vevey) 사진 전문학교 학생들이 촬영한 사진 속의 모델들은 각각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을 착용하고 있었다. 전시 서문에서 무닥의 큐레이터 캐를 기나르는 “장신구가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착용자”라고 말하며, 그 가치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것 역시 착용하는 사람이라고 덧붙였다.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하여도 장신구는 ‘착용’되기 위한 사물이기에 그 목적에 충실한 착용 사진들을 함께 전시해 사진은 관람자의 이해를 돕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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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얼리의 유희전에 전시된 데이비드 빌란더의 작 ‘새우튀김’. 작가의 유머 감각과 섬세한 수공 기술을 엿볼 수 있는 지름 10㎝ 가량의 팔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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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얼리의 유희전에 전시된 오토퀸즐리의 작품 ‘코즈틱테오쿠이틀라틀’.

작품 하나하나에 대한 미적 체험과 개인적 감흥을 글로 옮기는 것을 뒤로하고, 나는 전시 이면을 통해 느낀 상대적 빈곤감(다른 대상과 비교하여 주관적으로 느끼는 심리적 빈곤감)으로 ‘주얼리의 유희전’ 관람기를 마무리하려고 한다.

2013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장식과 환영-현대장신구의 세계’라는 전시가 열렸다. 수준 높은 국내 현대장신구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소개한 기념비적인 전시였다. 기념비적인 전시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장신구가 현대미술의 한 부분으로 인정받으며 당당히 현대미술관에서 소개된 국내 첫 전시이기 때문이다. 이후 미술관은 장신구 작품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소장하기 시작했지만, 실정은 여전히 빈곤하고 열세하다. 반면 무닥은 1980년대 초반부터 장신구 작품을 소장하기 시작했고 현재 280점이 넘는 장신구를 보유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작품은 스위스 장신구의 선구자 중 한명인 맥스 프뢸리히(1908~1997)가 1962년 제작한 목걸이다. 60년대는 현대미술의 문맥 속에서 장신구가 창작의 매개체로 등장한 시점이며 유럽 작가들에 의해 ‘현대장신구(Contemporary Jewelry)’의 개념이 대두된 시점이기에 60년대 제작된 프뢸리히의 반지와 목걸이 등은 의미 있는 소장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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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닥과 함께 1918년 ‘스위스 연방 디자인 대회’가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매년 젊은 작가들을 격려하며 수상작을 소장하는 스위스 연방 컬렉션도 있다. 하나의 미술관에 두 개의 컬렉션이 존재하는 것이다. 장신구를 사랑하는 개인 수집가들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공공기관의 전폭적인 지원과 후원은 작가들이 지속적인 좋은 작업을 할 수 있는 든든한 토양이 된다. 대중에게 현대장신구를 소개하는 기관의 역할 역시 토양의 한 중추적인 성분이 된다. 국내 현대장신구 역사가 길지 않은 것을 고려했을 때 이제 시작의 단계이며 점점 나아지고 있다며 장신구 작가들 서로가 토닥이다가도, 현재 우리나라 장신구 작가들의 세계적인 활동과 수준을 고려했을 때는 남의 떡이 너무도 위대해 보인다. 그리고 (부러우면 진다는데) 부러워서 완패하게 된다.

계명대 공예디자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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