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市 승격 70년, 포항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다 .6] 개척정신의 고장<下> 세계 철강업계의 기적 포스코

  • 박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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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16   |  발행일 2019-12-16 제12면   |  수정 2019-12-16
자본·기술·경험 없이 ‘하면된다’정신으로 일군 철강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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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소가 들어서기 전의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일대 모습. 종합제철 입지로 선정될 당시 포항은 인구가 6만7천여명에 불과했고, 전체 인구의 72%가 농림수산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지방 중소도시였다. <포스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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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는 1973년 6월9일 포항제철소 1고로에서 첫 쇳물을 생산한 지 46년 만인 2019년 10월 조강생산 10억t을 달성했다. <포스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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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6월9일 오전 7시30분 포항 1고로 출선구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오자 박태준 사장과 임직원들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 <포스코 제공>

포항의 고유한 정체성인 ‘개척정신’을 논(論)할 때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포스코의 탄생이다. 자본은 물론 기술, 경험도 없이 오로지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철강신화를 이룩했다. 철강 불모지에서 싹을 틔운 포스코는 한국의 산업근대화를 이끌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났다. 무에서 유를 창출한 대표적인 사례다. 포스코가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실패와 역경을 헤쳐낸 불굴의 개척정신은 포항의 정체성과 맥을 같이한다. ‘포항의 정체성을 이야기하다’ 7편에서는 세계 철강업계의 기적을 만들어낸 포스코에 대해 다룬다.

6·25전쟁후 한국 철강산업 현실 처참
외자조달 벽에 제철소 꿈 번번이 좌절
박정희정부 대일청구권자금이 돌파구
1970년 착공식…1973년 1고로 첫 쇳물
1983년 910만t 생산체제 ‘영일만 기적’


#1. 철강 불모지…거듭된 외자 유치 실패

한국 근대 철강산업의 역사는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한반도를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자국 기업을 진출시켜 제철소를 세우게 한 것이 시초다. 가장 먼저 한반도에 발을 디딘 기업은 미쓰비시제철(三菱製鐵)이다. 1918년 미쓰비시제철은 황해도 송림에 겸이포제철소를 건립했다. 현재 북한 황해제철연합기업소의 모체다.

1937년에는 일본고주파중공업이 함경도 성진에 특수강과 합금을 생산하는 제철소를 가동했고, 이듬해 이연콘체른은 평안도 진남포에 제철소를 건설했다. 이후에도 미쓰비시광업과 일본제철이 각각 청진제강소와 청진제철소를 설립·운영했다. 일본의 야욕으로 제철소가 지어진 만큼 당시 한반도의 철강산업은 기형적일 수밖에 없었다. 산업재의 기초가 되는 강재(鋼材)보다 군수물자를 만들기 위한 선철(銑鐵) 생산이 중심인 데다 숙련된 인력 양성도 여의치 않았다.

또 철강공장 대부분이 북한지역에 편중돼 지역간 불균형도 심각했다. 1940년 금속공업 생산량을 살펴보면, 북한지역이 전체의 90%를 차지했다. 6·25전쟁 이후 한국 철강산업의 현실은 더욱 처참했다. 폐허 속에 남은 설비는 가네부치공업 인천공장, 고레카와제철 삼척공장이 사실상 전부였다. 이마저도 설비를 가동할 자본과 인력이 부족하고, 시장도 형성되지 못해 가동 중단 상태에 놓였다. 경제부흥을 위해선 철강산업의 재건을 서두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의 종합제철소 건설계획은 1958년이 돼서야 구체화된다. 그해 8월26일 상공부(商工部)는 1965년까지 강원도 양양에 연산 20만t 규모의 종합제철을 만든다는 목표를 세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제철 건설 계획이었다. 하지만 자금과 기술을 제공할 원조국(援助國)이 나타나지 않아 무위로 끝났다. 제2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종합제철 건설은 외자조달 문제와 정권교체로 현실화되지 못했다.

종합제철소 건립의 희망은 박정희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다시 부풀어 오른다. 야심차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으나 기대와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외자조달 문제를 넘지 못하고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기술과 차관을 제공할 선진국과 세계은행이 볼 때 한국은 빈곤과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한 작은 나라일 뿐이었으니 종합제철 건설이 허황돼 보이는 것이 어쩌면 당연했다.

#2. 포항 종합제철주식회사의 탄생

거듭된 실패에도 정부의 의지는 강력했다. 1964년 12월4일 경제장관회의를 통해 ‘철강공업 육성계획’을 의결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준비하면서 종합제철 사업재개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5월 미국 방문길에 세계 굴지의 철강엔지니어링 회사인 코퍼스(Koppers)의 포이(Fred C. Foy) 회장을 만나 원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대통령이 직접 나선 만큼 포이 회장도 큰 관심을 가졌고, 이 만남은 ‘국제제철차관단’ 출범의 단초가 됐다.

1966년 12월6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회의가 개최됐고, 미국의 코퍼스·블로녹스·웨스팅하우스, 서독의 데마그·지멘스를 비롯해 영국의 웰먼, 이탈리아의 임피안티 등이 참가한 4개국 7개사는 4일간의 회의를 통해 한국에 종합제철을 건설하기 위한 기본사항에 합의했다. 이로써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어 국제사회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한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도 창립됐다.

KISA가 출범하고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가협정이 체결될 즈음, 대내적으로는 종합제철이 들어설 입지 선정이 당면 과제로 부상한다. 1967년 2월 내한한 미국 코퍼스의 기술진은 전역을 답사하고 인천, 마산, 포항, 부산, 삼천포, 울산 등 지역을 집중적으로 분석한 후 삼천포와 울산을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추천했다.

이후 정부는 월포, 포항, 삼천포, 울산, 보성 등 5개 지역을 집중 조사대상 지역으로 정하고, 1967년 5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에 현지 조사 및 비교 검토 용역을 의뢰했다. 그 결과 포항이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으로 분석됐다. 정부는 같은해 7월7일 포항을 최종 입지로 선정했고, 10월에는 영일군 대송면 송내리에서 종합제철 공업단지 기공식도 가졌다.

종합제철 사업을 담당할 실수요자 선정과 신설회사 출범은 순조로웠다. 박 대통령은 종합제철 사업을 추진할 적임자로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을 일찌감치 점찍었다. 이후 1968년 3월20일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에서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의 역사적인 창립총회가 열렸고, 박태준 대한중석 사장이 초대 사장으로 선임됐다.

#3. 대일청구권자금으로 돌파구 마련

KISA가 출범할 때만 하더라도 기술과 자금 문제가 해결되면서 종합제철사업은 곧 현실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1967년 10월 KISA와 기본협정을 체결한 후 반년이 지났지만 소요 외자 1억900만달러 중 조달이 확정된 것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3개국 총 4천300만달러에 불과했다. 정부는 KISA를 통한 차관 교섭이 여의치 않자 IECOK를 통한 차관 조달에 역량을 집중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했다.

대안 모색에 골몰하던 박태준 사장은 대일청구권자금에 주목했다.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한·일 양국이 농림수산 부문에 주로 투자하기로 합의한 대일청구권자금 일부를 종합제철 건설 자금으로 용도 변경하고, 일본 철강업계의 기술지원을 받는다면 제철소 건설이 가능할 것이라는 착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방향과 목표는 정해졌지만 대일청구권자금의 용도를 변경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미 외교적으로 합의된 사항일 뿐만 아니라 국내 산업 분야 간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었다.

박 사장은 일본 유력 인사들을 만나 물밑작업을 진행했다. 일본 야와타제철, 후지제철, 일본강관 3개사 사장은 물론 정부 관계자들을 차례로 만나 설득했다. 오랜 기간의 노력은 결실을 거뒀다. 1969년 8월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일본 정부가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에 적극 협력하는 데 깊은 이해를 표시하고,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조정을 하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약속한다는 성명을 받아냈다. 이어 1969년 12월3일 한일 양국은 ‘포항종합제철 건설자금 조달을 위한 기본협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국민의 여망 속에 거둔 값진 결실이었다.

#4. 개척정신으로 일군 영일만의 기적

1970년 4월1일 포항제철은 영일군 대송면 동촌동 건설현장에서 포항 1기 설비 종합 착공식을 거행하고,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다. 한 기업의 성패를 넘어 국가 경제의 근간을 좌우하는 건국 이래 최대의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건설이 시작되자 박태준 사장은 직원은 물론 설비공급사와 시공사의 모든 건설요원들에게 “선조들의 피값인 대일청구권자금으로 건설하는 만큼 실패하면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니 우향우해 영일만에 빠져 죽어 속죄해야 한다”며 사명감을 갖도록 주문했다.

당시 공사현장의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모래바람이 시작되면 눈을 뜰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호흡조차 곤란했고, 작업복 안에까지 모래가 가득 찼다. 공사 진척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현장을 방문한 주원 건설부 장관이 직원들에게 보안경을 지급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더욱이 포항제철은 급증하는 국내 철강재 수요를 하루빨리 충족시키고 생산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공기단축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만큼 힘든 작업의 연속이었다. 통상 종합제철소 건설의 경우, 기계·전기·건설·엔지니어링 기술이 집약되기 때문에 선진국에서도 대부분 10~20% 여유 공기를 두는 것이 관례였다.

우리 손으로 종합제철소를 짓겠다는 꿈은 결국 현실이 됐다. 1972년 7월 중후판공장이 준공됐고, 3개월 뒤에는 열연공장 공사가 마무리됐다. 1973년 6월9일 한국철강 산업의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한다. 포항제철소 1고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 첫 출선이 이뤄지자 당시 직원들은 뜨거운 눈물과 함께 연신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포항제철은 철강 설비 준공 후 불과 4개월 만에 정상조업에 돌입했다. 이는 통상적인 경우보다 6개월 이상 빨랐다. 또한 준공 이듬해인 1974년 제품 출하 100만t, 매출 1천억원, 수출 1억달러, 경영흑자 355억원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했다. 설비 증설도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포항 1기 착공부터 1981년 2월 포항 4기 종합 준공에 이르기까지 10여년간 포항제철은 ‘영일만의 기적’을 이뤄냈다.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이후 1983년 5월, 포항 4기 2차 사업을 마무리하며 포항제철은 910만t 체제를 구축했다. 1970년 사업을 시작한 이래 무려 13년에 걸친 역사가 비로소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포항제철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제철소를 완공하는 과정에는 철강을 통해 나라에 보답한다는 ‘제철보국 정신’, 실패하면 영일만 바다에 투신하자는 ‘우향우 정신’ 같은 결연한 정신적 가치가 든든한 뿌리로 박혀 있었다. 이러한 정신적 가치는 포항제철의 건설은 물론 성공적인 조업을 이끌었고, 나아가 포항의 정신, 포항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았다.

박종진기자 pjj@yeongnam.com

▨참고= 포스코 50년 통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공동기획지원 : 포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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