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화, 넘자! 삶과 죽음] 그 곳에도 사람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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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2-21   |  발행일 2019-12-21 제22면   |  수정 201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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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변하고 있는 대구 북성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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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친구가 있을 때 집들은 층계와 정문을 가진 그냥 보통 집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반겨주며 미소를 짓는 그런 정다운 집. 모든 것이 안정되고 뿌리를 든든히 내린 사람이라면, 집도 그것을 알아챈다. 집들은 겸손한 태도로 가만히 서 있는 듯하지만 친구 하나 없고 돈 한 푼도 없는 불쌍한 녀석이 들어오려 하면, 그 동안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집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밟아 죽이기라도 할 듯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선다. 반기는 문도, 불 켜진 창문도 없이 그저 눈살을 찌푸리는 어둠만 존재할 뿐이다.” 진 리스의 ‘한밤이여, 안녕’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요즘 내가 보는 건물들의 모습이 이렇다. 돈이 없는 사람에겐 한없이 냉정하고, 돈 있는 사람에게 더 없이 친절한 건물들. 마치 사람처럼 표정이 있는 것만 같다.

우리 사무소는 올 4월부터 8개월째 북성로 일원의 도시계획에 대해 연구 중이다. 영원히 침울할 것 같았던 대구 한복판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음을 매일 만난다. 그 전의 모습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만큼 확고하고 익숙한 새 건물들이 들어서는 한편 여전히 오래된 삶을 유지하고 있는 낡은 것들이 도시의 대비를 더욱 강렬히 드러낸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부조화 앞에 서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런데 건축가들의 눈에는 몇 십년 후의 도심이 그려진다. 작고 오래된 것들은 사라지고, 건물과 광장과 공원과 길은 더 거대하고 더 높아질 것이다. 돈과 친구가 있는 사람에겐 다정하고 활기찬 도시가, 고독하고 가난한 이들에겐 등을 돌려버리는 도시가 될지 모른다. 급변하고 있는 북성로와 태평로 주변. 10년쯤 지나고 나면 대구 사람들은 이곳을 어떻게 기억할까?

1900년대 초반 대구역이 생기면서부터 그 주변에는 여관들이 자리잡았다. 특히 태평로를 따라 여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공사장의 인부들이나 여행객들 그리고 어느 도시에나 역 주변에 볼 수 있는 가난한 이들이 여기로 흘러들어와 누군가는 자리를 잡았고 누군가는 떠났다. 세상사 한 바퀴 돌아본 사람이라면 눈치챌 수 있는 사창가가 골목에 남아있고, 여관마다 ‘달세방 있음’이란 글귀가 붙어 있다. 이 도시와 등을 서로 붙인 채 또 다른 도시가 있다. 어느새 싹 밀어버린 북성로의 나대지엔 50층에 육박하는 최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군가에겐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누군가에겐 새 삶의 희망으로 피어난다. 대구역과 근대사와 중앙통을 모르는 세대는 이곳을 대구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가 있는 곳, 근대 건축물과 현대 건축물이 뒤섞인 도심의 핫플레이스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아파트가 들어설 자리 맞은편엔 벌써 공인중개사 사무소가 문을 열었지만, 아직 철거되지 않은 건물의 3층엔 기계 소리가 들린다. ‘철거’란 붉은 글씨와 나란히 ‘거주자 있음’이라고 적혀있는 벽 앞에서, 이 곳의 미래 조감도를 그려야 하는 건축가에겐 만감이 교차한다. 이곳에는 아직 사람이 살고 있다. 그들을 향한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젊은이에겐 희망이 필요하고 노인에겐 그리움이 필요하다. 그리워할 사람, 그리워할 장소를 조금이나마 남겨두길. 김현진(SPLK 건축사사무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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