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천문:하늘에 묻는다' 최민식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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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03   |  발행일 2020-01-03 제43면   |  수정 2020-01-03
"두 사람이 배역 정해라 감독이 주문
석규가 '형 내가 세종 할게요' 해서
'그럼 내가 장영실 맡을게' 라고 말해"


최민식

'내시같이 가깝게 두고.' 세종실록은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 짧은 한 줄의 역사에 영화적 상상력을 덧붙여 탄생시킨 '천문:하늘에 묻는다'는 그런 두 사람의 정서적 교감을 섬세하게 풀어간다.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한석규)과 그와 뜻을 함께했던 유일한 친구이자 동지인 장영실(최민식)과의 신분 차이를 뛰어넘은 특별한 관계를 그렸다. "그래서 만드는 재미에 취해서 살았던 것 같다." 최민식은 베테랑 배우답게 몇 줄 되지 않은 기록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장영실에 대한 접근을 흥미로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채워야 할 여백이 많다는 건 사실 배우에겐 쉽지 않은 도전이다. "실존 인물에 대한 부담감이 큰 건 사실이다. 대중이 역사책으로 접한 인물들의 이미지는 '이럴 것이다'가 이미 그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줘야 할까? 그러면 배가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관객들도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그는 자신의 상상력을 좀 더 동원하는 쪽으로 캐릭터의 방향을 잡아 나갔다. 몽상가이자 순수함을 지닌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장영실의 탄생은 그런 상상의 결과물이다. '명량'(2014)을 통해 고뇌에 찬 이순신의 면모를 인상 깊게 담아냈듯, 또 한 번 역사 속 인물의 영혼을 자신의 몸 안으로 끌어들였다.

▶장영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천재 발명가라는 것 외에는 제대로 알려진 게 없는 인물이다. 어떤 점이 흥미로웠나.

"문헌을 보더라도 장영실의 기록은 거의 전무하다. 출생은 물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원나라 기술자인 아버지와 관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노비 신분이라는 것 정도다. 그리고 재주가 출중했던 영실을 눈여겨본 세종이 그를 발탁해 각종 기기의 제작을 맡겼고, 그 과정에서 면천과 함께 벼슬을 하사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흥미를 느낀 건 조선시대 과학 기술을 발전시킨 표면적인 공적보다는 그 업적을 이루기까지 두 사람의 인간관계였다. 그건 어느 책에도, 어느 누구에게도 전해 들은 바가 없다. 그런데 세종과 장영실은 분명히 일과 시간 후에도 만나 과학과 천문에 대해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눴을 수 있겠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그럼 두 사람이 마냥 좋았을까? 격이 없이 대화를 하다 보면 가끔 각자의 신분을 망각하고 불손한 언행을 했을 수도 있고, 잠시 쉬면서 당시 유행하던 놀이를 하면서 분위기를 전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상상이 떠올랐다. 시나리오로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는 부분들도 흥미롭고 재밌었지만 자유롭게 마구마구 상상력을 발산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났다. 무엇보다 이런 의미 있는 작업을 오랜만에 석규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석규에게, '야, 이거 너무 괜찮은데, 같이 해보자' 했다."

▶세종 역의 한석규 배우와는 영화 '쉬리' 이후 20년 만의 만남이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개인적으로 워낙 친해서 연락도 자주 주고받는 사이지만, 한 작품에서 만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20년 만의 만남이다 보니 석규를 보자마자 바로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내가 (동국대 연극영화과) 2학년 일 때 석규가 1학년이었다. 후배들과 모두 친했지만 유독 석규와 가깝게 지냈다. 내 자취방에 자주 놀러 와서 잠도 자고 라면도 끓여 먹고, 같이 영화와 연극도 보러 다녔다. 지금처럼 목소리가 좋았고, 1984년 강변가요제에 참가해 장려상까지 받았을 정도로 노래를 잘 불렀다. 딴 데 한 눈 안 팔고, 이 동네에서 어기적어기적 뒹굴다 보니 이렇게 다시 나이가 들어서 만나고, 또 같이 작품을 하게 됐으니 말이다. 되게 짠했다."


"몽상가이자 순수·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장영실'
세종과 신분차이 뛰어넘은 유일한 친구이자 동지
과학발전 공적부문보다 두 사람의 인간관계 흥미
석규 아이디어로 함께 누워 별보는 신 무릎 탁 쳐"

"호흡 아주 잘맞는 상대배우와 환상의 앙상블 맛봐
창호지 구멍 내, 별 함께 보는 장면, 영화의 콘셉트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얘기 같이 봐주길 바라"


▶결이 다른 두 사람의 만남이 결과적으로 '천문'을 좀 더 살아 숨 쉬게 만든 상승작용을 했다. 연기 호흡은 어땠나.

"워낙 상반되는 성격이어서 더 잘 어울렸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악기로 비유하면 나는 일렉트릭 기타, 석규는 베이스다. 배우가 대사와 액팅을 서로 주고받을 때 상대의 눈을 보면서 그 마음을 읽게 된다. 그런데 그게 참 힘든 일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악기를 연주할 땐 좋은 소리가 나오듯 연기도 마찬가지다. 좋은 파트너를 만나면 그게 자연스럽고 편안해진다. 그래서 좋은 파트너와 동료를 만나 작품을 한다는 건 정말 행복한 일이다. 석규와의 이번 작업이 그랬다."

▶두 사람이 창의적으로 만든 장면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배우들이 제아무리 잘난 손오공이라고 해도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다. 우리 역시 허진호 감독님의 디테일 안에 있었지만, 좀 자유롭게 놀아보고자 했던 건 있다. 감독님도 그걸 바라셨고. 영실이 물시계 브리핑을 한 후 세종과 근정전 바닥에 함께 벌러덩 눕는 장면이 있는데 석규 아이디어다. 원래는 궁 후원을 거닐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설정되어 있었는데, 석규가 '그것보다는 누워서 별을 봅시다' 그러는 거다. 무릎을 탁 쳤다. 세종이 추구하는 신분타파를 보여주는 기막힌 설정 아닌가. 그건 석규가 담고 싶었던 세종의 모습이기도 했다."

▶관객들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두 사람 역시 연기하는 맛을 제대로 느꼈던 현장이었을 것 같다.

"호흡이 아주 잘 맞는 상대선수와 경기를 한 판 치른 느낌이다. 탁구나 테니스 경기에서 막상막하의 선수들끼리 만나면 오랫동안 랠리가 지속되는 것처럼 환상의 앙상블을 맛봤다. 우리는 튀어 오른 공을 절대 정공법 대로 스매싱을 하지 않고 약간씩 스핀을 먹게 하는 일종의 변칙 플레이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촬영에 앞서 시나리오 회의를 하고 리딩을 하지만 실제 슛에 들어가면 배우의 생체 리듬이나 감성 등이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에 연습한 대로 나오지 않을 때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걸 더 선호한다. 때문에 어느 방향에서 어떤 공이 튀어 오를지 모르니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배역은 어떻게 정해진 건가.

"감독님이 대본을 주면서 배역은 두 사람이 알아서 결정하라고 했다. 그래서 석규에게 나는 어떤 역이든 괜찮으니까, 네가 정하라고 했다. 대본을 읽고 사흘 후에 만난 자리에서 '형, 내가 세종할게요' 하더라. '그래? 그럼 내가 장영실을 할게' 했지. 사실 영화의 포커싱이 두 사람의 관계에 맞춰지기 때문에 세종과 장영실을 누가 하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그보다는 서로의 교감이 중요했는데, 이번 석규의 세종은 너무 좋았다."

▶'명량'을 찍고 나서 여운이 많이 남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어떤가.

"역사학자들이 말하는 하나의 역사적 사건과 진실, 거기에 연류된 다양한 인물의 해석들이 제각각 다르다. 예를 들면 이순신 장군이 갑옷을 벗은 채로 노량해전에 참전했는데, 그가 왜 갑옷을 벗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퇴각하는 왜구의 뒤를 쫓는다. 7년 동안 조선인을 능멸한 죄를 다스리기 위해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로 읽힌다. 다른 시각에선, 그를 질투하고 있는 선조에겐 아무리 공을 세워도 어차피 인정을 못 받을 게 뻔하니 불명예스럽게 생을 마감하느니 군인답게 전쟁터에서 죽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우리는 역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평가를 내놓는다. 그게 늘 흥미로웠다.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사람들이 아니다. 철저한 고증을 거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 픽션을 가미하고 영화적으로 뭔가 달리 표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과정들이 이번 '천문'에서 좀 더 극대화됐다."

▶세종의 침소에서 창호지를 통해 별을 보는 장면은 마치 멜로의 한 장면처럼 다가왔다.

"두 사람의 관계가 좀 더 자유롭게 표현됐으면 하는 생각에서 나온 장면인데 우리도 찍으면서 하나 건졌다고 생각했다. 창호지에 구멍을 내서 함께 별을 보는 게 얼핏 아이들 장난 같기도 하지만 우리가 콘셉트를 잡은 게 그거였다.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몽상을 하고 꿈을 꾼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민초들의 힘든 삶을 헤아렸겠는가. 그런 두 사람의 생각이 좀 더 구체적이면서 내밀하게 담긴 장면이다."

▶앞으로의 바람과 함께 '천문'을 아직 보지 못한 관객에게 이 영화를 소개한다면.

"역사극이니 다소 무겁다는 생각보다는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 얘기를 듣는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오면 좋을 것 같다. 허진호, 한석규, 최민식 세 사람이 오랜만에 만나 세종과 장영실 이야기를 아주 말랑말랑하게 풀었다는데 과연 재밌을까? 라는 궁금증을 품은 채 말이다. 그렇다고 큰 기대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 만난 것처럼 잠시 그 시절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어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람이라면 더 나이 먹기 전에 따끈따끈한 멜로나 석규와는 코미디 장르에서 다시 호흡을 맞춰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내 건강부터 챙겨야 할 것 같다." (웃음)

윤용섭기자 yys@yeongnam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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