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해치지않아' 안재홍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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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17   |  발행일 2020-01-17 제43면   |  수정 2020-01-17
"북극곰 탈까지 쓰고 동물원 살려야 하는 간절함, 관객 향한 내 심정과 같아"
해치지않아_안재홍
"동물이 없는 동물원을 6개월 만에 정상화시켜라!" 로펌에 갓 입사한 수습 변호사 태수에게 떨어진 대표로부터의 미션이다. 황당하고 억지스럽지만 이 일을 완수해야 수습 딱지를 떼고 그가 원했던 M&A 전문 변호사 자리를 꿰찰 수 있다. 생계형 변호사 태수에겐 위기이자 기회의 순간이다. 이는 평범함 속에서 늘 비범함을 뽐냈던 배우 안재홍에게 더 없이 적역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영화 '해치지않아'는 파산 직전의 '동산파크'를 부활시키기 위한 태수의 고군분투를 다룬다. '동산파크'에 새 원장으로 부임한 태수는 고육지책으로 몇 명 남지 않은 직원들에게 동물 탈을 쓸 것을 제안하고, 자신은 북극곰 탈을 쓴다. 동물 탈을 쓰고 동물인 척 연기하는 기상천외한 작전을 펼치려는 것이다. "그래서 편해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는 그는 짠내 나는 태수의 목표와 열등감을 보여주기 위해 먼저 체중부터 감량했다. 접근 방식에서도 그만의 코믹 정서를 진지함으로 치환하는 대신 유머와 재미를 다른 배우들에게 양보했다. 늘 둥글둥글해 보이지만 그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하게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궁금해지는 배우다.

평소 좋아한 감독님 차기작 출연 영광
따뜻함 주는 착한 영화 여운 오래남아
수습변호사가 완수해야 할 황당 미션
태수가 처한 절박함, 처음 느껴본 감정
나도 더 잘하고 싶은 똑같은 의지 생겨

유쾌함 동시에 전하는 동물권 메시지
목말라 콜라 마신 북극곰, 스타 등극
아이러니한 상황속 자연스러움 유발
무릎칠 만큼 재밌고 기막힌 신 많아
착함도 좋지만 다양한 캐릭터 욕심 나


▶코믹과 드라마의 적절한 배치가 돋보인 작품이다.

"따뜻하고 착한 영화여서 나 역시 보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들도 많지만 그 과정에서 전달되는 메시지가 가볍게 휘발되지 않아서 더 좋았던 것 같다. 덕분에 좋은 느낌의 잔상과 여운이 오래도록 남을 수 있었다. 누구와 함께 보더라도 좋을 영화라고 생각한다."

▶태수 캐릭터에 누구보다 최적화된 캐스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내가 잘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만큼 친숙하게 다가온 캐릭터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나와 캐릭터의 닮은 점, 다른 점을 찾아 어떻게 디자인하고 인물에 접근할지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번엔 태수의 절박함이 먼저 강하게 다가왔다. 처음 느껴본 감정이다. 더 잘해보고 싶은 의지와 열정이 생기더라. 사실 그보다 앞서 이 작품을 꼭 하고 싶었던 건 연출을 맡은 손재곤 감독님 때문이었다. 감독님의 전작 '달콤, 살벌한 여인' '이층의 악당'은 내가 제일 좋아하고 사랑하는 영화다. 그 분의 차기작 시나리오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들뜨고 흥분됐던 기억이 난다."

▶시나리오를 읽어 본 첫 느낌은 어땠나.

"감독님 특유의 세련된 유머 코드와 감동이 잘 녹아 있는, 그 자체로 완벽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 그냥 나만 잘하면 될 것 같았다. 내가 태수처럼 예민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생각과 감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다. 태수가 '동산파크'를 정상화시켜야 하는 녹록지 않은 미션에 도전한 것처럼 나 역시 영화가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여줄 수 있게 노력해야 하는 미션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 촬영하는 내내 태수와 같은 절박하고 간절한 심정으로 연기에 임했던 것 같다."

▶태수는 나름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변호사임에도 그가 처한 상황 때문인지 계속 짠함을 유발한다.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로펌에 다니는 친구와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그의 생각도 같았다. 힘들게 변호사가 됐는데 정규직이 아니라면 거기에서 오는 불안감과 상대적 박탈감, 뭔가를 성취하고자 하는 갈망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클 수 있을 것이라는 거다. 납득이 되더라. 그래서 태수의 발버둥이 더 크고 요란하게 느껴질수록 이 이야기는 말이 된다고 생각했다. 동물원에 동물이 없는데 그가 할 게 뭐가 있겠나. 엉뚱하고 무모해 보이지만 동물의 탈을 쓰고 동물 흉내를 내는 일밖에 없었을 거다. 이게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다가간다면 이 이야기를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단, 굉장히 신선하고 재밌는 캐릭터들과 설정이 많기 때문에 극을 주도하고 있는 태수마저 뭔가 재미를 주려고 액션을 취한다면, 오히려 재미가 반감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중하게 중심을 잡고 늘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아마 그런 부분에서 짠한 감정이 느껴졌을 것 같다."

▶유일하게 동물원에 남은 북극곰은 좁은 공간과 기후 때문인지 줄곧 이상행동을 보인다. 그건 동물원이라는 공간이 낳은 폐해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는 동물권에 대한 메시지를 무겁지 않게 전하고 있다.

"동물권에 대한 어떤 사회적 이슈를 형성하고자 이 영화를 만든 건 아니다. 다만, 감독님이 서브 플롯이라고 언급하셨듯 무겁지 않게 동물권에 대한 메시지와 질문을 슬쩍슬쩍 이야기에 던진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기분 좋은 잔상이 계속 남았다고 말한 것도, 영화적 재미와 함께 그런 메시지가 자연스럽게 읽힌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런 방식이 관객에게 더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전에 예능 '꽃보다 청춘' 촬영을 위해 아프리카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사파리 체험을 했는데, 캠핑을 하면서 며칠 동안 그곳을 돌아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경상도 면적 크기의 초원에서 동물들이 야생의 상태로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국내 동물원에서는 애완견까지 우리에 갇혀 있는 걸 봤다. 아프리카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기분이 좀 묘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영화는 접근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동물권에 대한 메시지를 나름 의미 있게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북극곰 연기까지 1인 2역을 했다. 이를 위해 준비한 게 있다면. 그리고 해보니 어떤가.

"동물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 기존에 나와 있는 다큐멘터리와 유튜브는 거의 다 찾아본 것 같다. 심지어 영화 '레번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까지 참고했다. 물론 영화에서 포인트가 되는 건 동물보다 사람이다. 동물 탈을 쓰고 있어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의 감정이 잘 드러났으면 했다.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고, 때론 즐거워하는 모습까지 말이다. 북극곰 탈을 쓴 태수가 목이 타 무심코 콜라를 마시는 모습이 관객에게 포착된 후 동물원의 스타가 된다. 아마도 태수가 이제껏 살면서 받은 첫 관심과 환호였을지도 모른다. 탈 속의 태수가 느꼈을 복합적인 감정과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북극곰 연기는 신나고 재밌었다. 더 좋았던 건 겨울에 촬영했기 때문에 좀 답답한 것만 빼면 추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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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캐스팅한 손 감독의 눈썰미도 칭찬해주고 싶다. 그와의 작업은 어땠나.

"감독님이 워낙 말이 적고 성격도 조용한 편이다. 반면 되게 유머러스하고 재밌다. 그런 게 우리 영화와 많이 닮았다. 신기한 건 그런 감독님의 유머 코드와 취향이 나와 많이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번 촬영이 신나고 재밌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감독님이 '이건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떨까요'라고 하면 그게 마치 내 생각처럼 바로 공감이 됐다. 덕분에 태수의 감정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본인도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경험이 있다. 이번 작품을 통해 배운 게 있다면.

"영화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가 김성오 선배가 고릴라 탈을 쓴 채 나무늘보 탈을 쓴 전여빈씨를 업고 해질 무렵의 동산파크를 두런두런 얘기를 하며 걸어가는 장면이다.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고 유머러스했다. 다양한 감정과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손 감독님의 그런 코드를 좋아하고 배우고 싶다. '이층의 악당' '달콤, 살벌한 여인'에서도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재밌고 기막힌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모두 억지로 짜낸 게 아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아이러니한 상황과 설정을 만들어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이 정말 고급스럽다고 느낄 때가 많다. 내가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내공과 노하우를 지닌 분이라서 더 존경스럽다."

▶화면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진지하다. 실제 성격은 어떤가.

"조용하고 낯가림이 심하다. 조금 친해지면 편하게 행동하는데 그 관계가 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당황하는 분들이 종종 있다. 화면에 비치는 모습과 괴리감이 너무 크면 안될 것 같아서 한때는 대중이 생각하는 이미지대로 보여줄까 라는 생각도 한 적이 있는데, 이젠 내 성향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것 같더라. 요즘은 내가 먼저 다가가고,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 그런 모습이 차츰 자연스러워지고 있다."

▶필모를 보면 사랑스럽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작품들이 많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라고 봐도 좋을까.

"뭔가를 의도적으로 추구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런 장르의 작품들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달리 생각하면, 그건 대중이 보고 싶어 하는 배우 안재홍의 모습일 수 있다. 작품 선택의 특별한 기준은 없다.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 배우 안재홍이 아닌 캐릭터 그 자체로 보이기를 바랄 뿐이다. '응답하라 1988'에선 정봉이만 보였으면 좋겠고, '멜로가 체질'에선 범수가, 그리고 이번 '해치지 않아'에선 태수만 보였으면 했다. 나름 그들에게 주어진 성격과 감정을 잘 구현하고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뭔가 해석을 달리해서 결이 다른 인물을 보여드리는 건 아직 더 많은 경험과 내공이 필요할 것 같다. 다만, 변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젠 좀 다양하고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긴 하다. 오는 2월 개봉하는 '사냥의 시간'은 그 점에서 조금은 다른 배우 안재홍의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나도 어떤 평가가 나올지 궁금하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제이와이드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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