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재오의 유럽에서 보내는 편지] 길을 떠나야 돌아온다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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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17   |  발행일 2020-01-17 제39면   |  수정 2020-01-17
"새로운 예술 꿈꾸며 찾아온 낯선땅…엄습하던 불안도 숙소 닿자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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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셀도르프에서 가장 높은 라인 타워(Rhine Tower)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라인강을 지나는 배와 타워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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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셀도르프 중앙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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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타워를 나와 강변을 따라 보존되어 있는 독일 뒤셀도르프 옛 항구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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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열 번의 겨울을 보냈다. 많이 지쳤다. 예술은 사랑하지만, 현실은 매 순간 날 변심하게 만든다. 새로운 예술을 꿈꾸기 위해 미련 없이 대구를 떠나기로 했다. 수성구 파동에 있는 내 거처는 잠시 동면에 들 것이다. 어느새 마흔 번 이상의 겨울을 보았으나 이번 겨울은 내 인생 첫겨울이다.

현지에 도착해서 눈이 이끌고 마음이 흐르는 대로 가면 되지 않을까 하고 느긋하게 뭉기적거리다가 출국 이틀 전에야 첫 숙소를 예약했다. 출발 전날 아침에야 현지에 도착해서 이동할 첫 기차를 예약했다. 생면부지의 유럽, 일단 첫날의 목표인 숙소까지만 무사히 도착하면 앞으로의 3개월은 걱정 없이 보낼 수 있을 것이라 나를 다독인다.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낙관주의자다.

◆인천공항을 등지다

인천공항이 아스라이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대기는 안정적이어서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울 수는 없었다. 알 수 없는 불안이 가슴에 차오르며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가?'라며 다그친다. 여행을 앞두고 읽은 책이 알렝 드 보통의 '불안'이어서 일까? 어차피 궁금해하던 타지에서의 생활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나를 감싸고 붙잡고 있던 일과 연결고리들, 그리고 무겁게 매달려 있던 많은 짐들로부터의 거리를 바라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불안하지. 불안도 일종의 설렘이라 날 위로해 본다. 점점 농도를 높여 가던 불안의 먹구름을 꿰뚫는 하나의 빛줄기가 등장한 것이다.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가 독일 땅에 닿음과 동시에 불안하던 내 생각들도 모두 지상으로 내려앉는다.

무진장하게 긴 입국심사 대기 라인. 마침내 짐이 나왔다. 돌돌 거리는 캐리어를 끌고 터미널을 찾아야만 했다. 표지판에 의지해 더듬더듬 거기로 갔다. 긴 의자 한 편에 앉아 숨을 돌린다. 갑자기 웃음이 새어 나온다. 지나가는 한국인이 꽤 많았다. 여기 유럽 맞아? 꼭 인천공항에 있는 것 같았다.


獨 뒤셀도르프로 향하는 기차 플랫폼
길어진 정차시간 만큼 커지는 피로감
대구 벗어나자마자 이어지던 두려움
트램 탄 후 세번째 정류장 목적지 도착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편안함으로 돌변
대항해 후 美에 온 청교도 심경 같아


기차 시간이 좀 남았다. 근처 지하 쇼핑가를 잠시 훑어보기로 한다. 카푸치노와 빵을 하나 사서 먹기로 한다. 7.2유로, 1유로가 한화로 1천305원 정도니 우리 돈으로 1만원 남짓. 이곳에서의 첫 소비다. 느긋하게 앉아 빵과 커피를 연구하듯 즐기고 플랫폼으로 향한다. 열차 안내판에는 내가 탈 기차 시각이 올라오지 않았다. 가던 중간에 플랫폼까지 거리가 꽤 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앗, 하나 놓친 게 있다. 내가 탈 기차가 목록에 올라왔을 때 앞부분에 'ausfall'이란 단어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독일어는 완전 꽝이다. 그래서 폰을 갖고 검색해 본다. 취소, 휴업 등의 뜻이다. 순간 연착인가 싶었다. 뭔가 일이 있어도 지연 정도겠지 생각하며 느긋하게 걸었다. 플랫폼에 내려가 탈 위치를 확인하고 기다렸다. 순간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노란조끼를 입은 아저씨에게 물어봤다. 무슨 뜻인가요? 뭐라뭐라 하지만 통 모르겠다. 안내센터를 찾아가서 물어보라는 것 같다. 안내센터를 찾아 문의했다. 직원은 태연하게 취소라 말한다. 그 앞에 오는 기차도 뒤셀도르프로 가는 거니까 그걸 타면 된다며 출력된 승차 증명서를 준다. 열차편은 ice1144.

◆숙소로 찾아가는 고단한 여정

열차 시각이 8분 남았다. 부리나케 플랫폼으로 다시 내려간다. 시각은 같은데 열차 편명은 다르다. 어떡하지? 같은 목적지니 그냥 타지 뭐. 자리도 많고 짐 둘 공간도 많았다.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는 자리에 중년 여성 한 명이 앉아 있기에 그 맞은편에 앉았다. 열차는 출발했고 1시간 20분쯤 뒤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내 주변을 떠돌던 피곤과 졸음이 갑자기 몰려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30분 정도만 자자며 눈을 감았다. 첫 번째 경유지인 쾰른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내리고 다시 타느라 기차는 잠시 서 있었고 뭐라 뭐라 방송을 여러 번 했었다. 정차 시간이 길어지자 다시금 불안이 몰려왔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뭐라고 하는 거냐고. 무슨 일이 있어 조금 기다리는 거니 괜찮을 거란다. 하지만 30분이 넘도록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맞은편 사람들은 '당케 도이치반'이라 하며 냉소적인 농담을 하곤 했다. 몇몇은 내려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담배를 피운 뒤 다시 타는 사람도 있었다. 내 우측에 앉은 아저씨는 살라미를 빵에 넣어서 음료랑 마셨다. 나는 다시 어떻게 해야 하나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기차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략 20분을 더 달렸다. 오, 목적지인 뒤셀도르프 역에 내릴 수 있었다. 대항해 끝에 미국 땅에 내린 청교도의 심경이랄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다시 거대한 장벽이 떡 하니 내 앞에 서 있었다. 숙소로 걸어갈 에너지가 없었다. 안내센터를 다시 찾아가 내가 가려는 곳을 알려주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어본다. 12번 플랫폼에 가서 'S-bahn'을 타면 한 구간이면 도착할거라 한다.

티켓은 녹색기계나 서점에서 살 수 있다고 했다. 두리번거리니 녹색기계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독일어. 영어도 있었으나 아무리 찍어도 내 목적지 역이 나오지 않는다. 녹색기계 옆 검은 옷을 입은 경찰들이 약간 허름하게 옷을 입은 남자를 검문하고 있었다. 여자 경찰이 가까이 있기에 어떻게 표를 사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경찰들도 이곳에 오늘 처음 왔다며 난감해한다. 나도 한국에서 지금 막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헤어졌다. 내가 잠시 더 헤매고 있을 때 할아버지 한 분이 내 다음으로 표를 구하러 옆에 왔다. 주저하지 않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표를 살 수 있나요?" 할아버지도 약간 힘들어 했지만 결국 2유로 조금 더 주고 표를 하나 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젠 타는 게 문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시 안내센터로. 이번엔 다른 안내센터로 갔다. 표와 목적지를 보여주니 가는 방법을 바로 출력해 준다. 트램을 타는 곳이랑 번호를 알려준다. 인사를 하고 역을 벗어났다. "이제 트램을 타고 세 번째에서 내리면 되겠지." 하지만 마지막 관문이 있다. 같은 번호가 적힌 플랫폼이 두 군데. 방향이 다를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금 사람들에게 질문하기. 7번 홈에서 타세요.

이제 모든 정보를 얻었다. 약간의 시간 여유가 생겼는지 주변을 돌아보며 사진 몇 장을 남겼다. 나의 유럽 잠행 첫 사진이었다. 잠시 후 트램이 왔고, 704번 트램을 타고 세 번째 정류장에 내리니 나의 숙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구를 떠나 비행기 안에 있을 때 날 엄습하던 그 불안함은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세포처럼 언제나 요지부동으로 변해만 간다.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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