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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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17   |  발행일 2020-01-17 제42면   |  수정 2020-01-17
사랑과 삶·예술에 타오르는 두 여인의 시선

남편 될 사람에게 전해야 할 귀족여인 초상화 작업
화면 가득 채우는 스케치·파도·바람·아름다운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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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0년,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는 결혼을 앞둔 딸 엘로이즈(아델 에넬)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녀가 머무는 외딴 섬에 며칠간 머문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이 작업을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마리안느에 앞서 초상화를 그리려고 왔던 화가도 결국 실패하고 돌아갔다. 엘로이즈의 어머니는 "딸이 포즈를 취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마리안느를 화가가 아닌 산책 친구로 딸에게 소개한다. 짧은 며칠의 기간 엘로이즈 모르게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 그녀를 비밀스럽게 관찰하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묘한 감정의 기류에 휩싸인다.

여성의 시선으로 삶과 예술, 그리고 사랑을 논하는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고전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한 폭의 명화를 보는 듯하다. 미술과 세트, 의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미장센은 물론, 프랑스 해변에 비치는 햇빛마저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채색돼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화는 화가인 마리안느가 초상화를 그리는 단순한 행위로 시작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점차 엘로이즈라는 인물의 내면까지 파고들면서 파생되는 고요하지만 강렬한 이끌림에 천착한다. 그 과정에서 '뮤즈'로 정의되는, 그려지는 대상은 캔버스 안에서 창작자의 의지대로 새롭게 창조되고 대상화된다.

엘로이즈는 결혼을 원치 않는다. 때문에 남편이 될 사람에게 전달될 자신의 초상화가 그려지는 걸 방해했다. 이는 당시의 가부장적 시스템 안에 자신을 넣으려는 남성 권력에 대한 거부로 읽힌다. 기존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대상화된 여성의 모습이 아닌, 주체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받아들이고 사랑을 선택하는 모습이다. 계급이 존재했던 시대, 영화는 한발 더 나아가 귀족과 평민 화가, 하인이라는 수평적 관계에서 벗어나 이들이 친밀한 우정을 나누고, 사랑과 삶, 예술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이끌어 내는 모습을 인상 깊게 전달한다.

한정된 공간과 정해진 유예 기간, 그리고 제한된 인물들이라는 미니멀적 구성은 이 이야기의 몰입도를 높이는데 주효하게 작용했다. 사랑 자체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하고, 좀 더 드라마틱하게 긴장감을 유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아쉽게도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자신들을 찾아온 사랑의 형태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 또 서로의 마음을 뜨거운 채로 탐하게 놔둘 수도 없었다. 본인이 그린 작품에도 이름을 걸지 못한 채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전시회를 할 수밖에 없었던 마리안느처럼 18세기라는 엄혹한 시대적 상황은 여성이라서 겪어야만 했던 억압과 차별을 당연시해왔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은 마리안느의 화폭과 두 사람의 마음에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배경 음악은 따로 없다. 대신 캔버스에 스치는 붓과 스케치 소리, 파도와 바람 소리, 옷깃의 스침 등이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극을 풍성하게 채운다. 유일하게 음악(비발디 사계 중 '여름')이 등장한 건,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장면에서다. 결혼 후 홀로 공연장을 찾은 엘로이즈의 다양한 감정을 포착한 클로즈업 장면과 맞물려 짧지만 강렬한 여운을 선사한다. 지난해 제72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받았다.(장르:드라마 등급:15세 관람가)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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