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아삶공생태건축연구소장 김경호 (2)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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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31   |  발행일 2020-01-31 제34면   |  수정 2020-01-31
자기 공간의 일부, 이웃 위한 기증이 원칙…공생·공존·배려 건축물에서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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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아삶공생태건축연구소는 카페 같으면서도 동네 주민의 사랑방 같다. 대추나무 밭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통유리창, 그리고 벽난로가 있는 카페의 밀실 구역도 김경호 소장의 상상력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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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소장이 진행했던 건축에 대한 개요를 그려놓은 밑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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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 달동네 전경이 보이는 사진 아래 적어놓은 '부자가 되기 전에 가난을 배워둔다'란 문구도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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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 소장이 기본 디자인을 스케치해 놓은 대구 중구 종로 거리.

◆외조부의 흙손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다. 외조부는 1898년생으로 105세까지 장수를 하셨다. 유학자의 피가 흘렀지만 가손을 위해 손수 집을 지으셨다. 흙벽을 만들 때 당신의 손길이 흙과 어떻게 결부되는지 어린 나는 하염없이 관찰했다. 그때부터 내 건축장이 유전자가 분출된 것 같다. 안동에서 초·중·고를 보낸 뒤 성균관대 건축학과에 들어갔지만 매일 데모대열에서 살다시피 했다. 1986년 민주화의 봄 때 나는 군인이었다. 그때 군부정권의 끝을 맛봤고 '이 나라에 꼭 필요한 게 혁명'이란 말을 했다가 중대장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내가 정치에 꿈이 있었다면 무슨 양심선언이라도 했을 것이다.

복학을 했다. 난 건축학에만 올인했다. 다른 학우와 달리 나는 형태보다 건축 배후의 스토리에 더 치중했다. 어느 각도에서 가장 풍성한 햇살과 바람, 그리고 숲과 별이 보이는지를 더 관찰했다. 그 와중에 현대건축의 출발을 선언한 위대한 프랑스 현대건축가 르 코르비제(1887~1965)를 사숙하게 된다.

그때 한 교수가 내게 조언을 주었다. '건축을 제대로 하려면 사회학 공부에 더 치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건축만 공부해선 건축을 모른다는 의미로 들렸다. 그래서 인문사회학을 파고들었다. 3학년 때 처음으로 내 건축을 제시했다. 내가 근무했던 경기도 연천군의 한 군부대 근처 허름한 초성교회 리모델링 안이었다. 난 의성김씨 종택의 사랑채 개념을 거기에 대입시켰다. 부대 초병이 볼 수 있게 벽에 7개의 채광창을 북두칠성처럼 뚫어주었다. 졸업 작품은 'Principle of second man'. 서울역 앞 멋대가리 없게 지어진 대우빌딩 옆 남산타워가 보이는 공터에 지하철과 연계되는, 지하공간을 특화시킨 공존과 공생의 건축물을 제시했다.

햇살·바람·숲·별 보이는 스토리 관찰
대학때 제시한 사랑채와 결합한 교회
졸업후 생태건축 시작 '아삶공' 출범
'건축은 문화'…삶의 에너지 쏟아부어

투병중 모친 위해 지은 신개념 독학당
북성로 삼덕상회·종로 도심재생 확산
10년째 진행중인 청도 전원아트마을
부산 범천동 달동네 누각 같은 공간

철학자·시민·언론인 등 다양한 의견
대구 랜드마크 市청사 지어지길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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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범천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부산 아삶공' 옥상 전망 포인트에서 보이는 범천동 달동네 호천마을의 풍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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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아삶공' 생태건축연구소 1층 카페.

◆내 꿈의 결정체 아삶공

졸업 후 내 삶의 에너지는 고스란히 '아삶공'에 집결된다. 아삶공의 출범은 2000년부터. 이때부터 내 철학과 안목이 생기기 시작했다. 생태건축의 신지평을 열기 위해 자잘한 주춧돌을 놓고 있었다. 건축이 곧 '문화'임을 알려주려는 전략이다. 내 맘대로의 집을 원하는 건축주에겐 단호히 '노'라고 말한다. 건축주의 욕망만 존중받아선 안 된다. 건축가의 가치도 함께 선순환시켜야 된다.

아삶공 건축에는 하나의 불문율이 있다. 자기 공간 일부분을 모두를 위해 기증해야 그의 배려를 위해 최선의 집을 지어준다는 원칙이다. 그렇게 다양한 버전으로 기증받은 공간은 소외받고 있는 이 시대의 숨은 지성과 공유할 수 있는 게스트룸으로 만들어가는 게 아삶공만의 자부심이다. 나는 돈 받고 집만 지어주는 '건축꾼'으로 살고 싶지 않았다. 집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 하나의 정신,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지어주고 싶은 것이다.

1년가량 서울에서 워밍업을 위해 'GROUP21'이란 건축사무소에 근무했다. 어느 날 모친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곧장 서울의 삶을 정리하고 귀향했다. 이때 안동 시내에 '좋은건축'이란 사무실을 내면서 맨 위층에 모친이 머물 수 있는 마을회관 같은 신개념 원룸부터 지었다. '독학당(篤學堂)'이란 당호를 짓는다. 퇴계의 가훈이기도 한 '독학'을 염두에 둔 것이다. 기둥에 어항을 매립하고 가능한 한 많은 햇살을 끌고 들어오기 위해 군데군데 채광창을 냈다.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 수 있고 작은 음악회도 열 수 있는 널찍한 데크형 테라스도 얹었다. 자취생들도 입주자가 아니라 '패밀리'로 엮여졌다. 이 건물은 단번에 안동의 명물이자 아삶공 시리즈 1호 건물이 된다.

모친의 집을 지어준 뒤 대구로 와서 수성구 녹원맨션 건축에 간여했다가 엄청난 재산적 손실을 본다. 어떤 야욕에 난 철저하게 이용당한다. 그 후유증으로 2003년 무렵 내 잔고는 제로였다. 노숙인 신세였다. 자살로 삶을 마감한 서울의 유명 건축사무소 선배가 생각났다. 건축의 꿈과 건축의 현실, 나는 그 엄청난 간극을 감내해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대구와 깊게 인연이 맺어졌다. 불과 4천만원이 안 되는 비용으로 북성로 적산가옥 리모델링 1호로 불리는 '삼덕상회'도 부활시켰다. 또한 33만㎡ 넓이의 구미 제일모직 낡은 건물을 새롭게 리모델링 했다. 담당 상무가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나와 일을 직접 결정할 수 있는 담당자를 정해달라'고 했다. 소통을 방해하는 벽이 너무 많았다. 120㎝ 라인 아래로만 살리고 나머지는 다 철거했다. 계단부는 청색, 나머지는 아이보리톤. 커튼도 블라인드로 교체했다. 엄청난 다이어트 공사였다. 벌판 같은 오픈 구조의 신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세계를 향하는 아삶공 시리즈

지난 20년, 나의 마스코트인 아삶공 시리즈는 안동 독학당을 시작으로 경산, 청도, 문경, 성주, 상주, 봉화, 부산, 서울 홍대, 대구 만촌동, 그리고 중구 북성로 삼덕상회, 약전골목과 종로 도심재생프로젝트 등으로 확산돼 갔다.

가장 심혈을 들인 것은 '경산 아삶공'. 30년째 방치된 경산시 남산면 사월리의 한 농가 건물을 리모델링한다. 기와집 용마루에 올라가 기와를 걷어냈다. 과일창고는 여락당, 축사는 의열당, 그렇게 모두 6채 건물을 지었다. 난 건물을 지을 때 숨은 고수 어르신의 힘도 차용했다. 건축을 배우고 싶은 후배들도 도제식으로 참여시켰다. 월급 대신 그들에게 내 노하우를 전수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명의 건축회사 대표도 탄생할 수 있었다.

최근 그 근처에 빈 농가를 단장해 생태건축연구소 사무실로 사용 중이다. 거기도 공유빌딩이다. 1층은 근처 학생들의 공부방으로 이용되고 있다. 1층은 대추나무 과수원과 멀리 팔공산의 원경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창을 가진 카페, 2층은 회의·전시실이다.

어느 날 대구지역의 대안 매거진이었던 '안'으로부터 원고청탁이 왔다. 대구의 도심디자인에 대한 내 생각을 알아보려고 했던 것 같다. 나는 동성로를 스크린했다. 대백 앞 분수대가 흉물로 보였다. 저건 반드시 제거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성로축제 때 사람의 눈높이로 레이저빔을 쏘아 환상적인 빛의 터널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했다.

재차 종로 진골목 등 골목길 기본구상 및 실시설계 용역의 건축책임연구원으로서 종로거리가 갖고 있는 거리의 성격과 위계를 고민한 뒤 제안했다. 획일적 가로수 심기가 아닌 공터가 있는 곳에는 조금 더 심고 상가가 밀집한 곳에는 덜 심었다. 기존 간판은 너무 공격적이고 컸다. 그게 더 집중 못 하게 만든다. 약전골목 약재상에 매달린 한약재 봉다리 정도만 하면 족할 것 같았다.

청도의 전원아트마을 '수월21 프로젝트'는 10년 이상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건 파주 헤이리 마을처럼 예술인 친환경 전원주택 단지를 조성하려는 청도군과 민간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그리고 부산시 범천동 호천마을 달동네의 폐가를 매입해 수십 개의 철봉을 박고 공간 누각 같은 부산범천 아삶공도 지었다. 건축학을 전공 중인 내 딸도 투입됐다. 안목이 있는 지성과 공유할 수 있는 리셉션룸도 만들었다. 자기가 먹은 만큼 채워 넣고 떠날 수 있는 예의를 가진 자에게 공개된 공간이다. 밤이면 그 옥상 테라스에 커피잔을 들고 지긋이 앉는다. 달동네 가로등과 창문의 불빛이 만드는 장엄경이 라이브공연처럼 반짝거린다. 한 뼘만 한 지붕과 지붕을 연결한 루프웨이를 가설하면 세계적 명소가 될 거란 직감이 들었다. 산과 산을 연결해 그걸 내려다 볼 수 있는 스카이워크도 기가 막힐 것이다.

◆시청 신청사, 현장 인부 목소리도 담아야

서양은 광장이 중심, 우리는 길이 중심이다. 우리의 시장도 길의 연장이다. 이젠 수직적 사고를 건축에 대입하면 안 된다. 수평적 건축 개념을 고민해야 된다. 도심에나 어울릴 키다리 가로등을 한옥촌 리모델링 때 심어진다. 이건 무례함이다. 왜 수평으로 눕혀놓은 가로등을 생각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의 아파트 상가는 산책하며 물건을 살 수 있는 쇼핑로드로 만들지 못하는가.

대구의 랜드마크는 뭘까? 나는 신천이어야 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신천과 신천대로변은 이미 아파트 벨트에 갇혀버렸다. 신천의 분수도 다들 수직형이다. 물고기가 헤엄치는 스타일로 수평적으로 연결하면 어떨까. 그리고 아파트촌도 주상절리 개념으로 접근해 보면 재밌는 디자인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대구의 랜드마크는 거의 베낀 것이다. 대구만의 것이 아직 없다.

건축의 눈으로 건축을 보면 백전백패일 것이다. 현장 인부가 어느 대목에선 건축학 박사보다 더 빼어난 안목을 갖고 있다는 생각을 우리 건축가가 할 때 한국 건축도 민주주의로 웅비할 것이다. 군대 막사, 아파트, 학교 교실 등을 볼 때마다 수용소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왜 교장은 교장실에 짱 박혀 있어야 되는가. 수위실이 교장실일 때 아이들이 달라진다.

곧 대구시청 신청사가 지어질 것이다. 절대 건축 전문가만 불러 짓도록 해선 안된다. 그럼 배가 산으로 간다. 너무 유명한 걸 찾지 말자. 철학자·언론인·애향심 높은 대구시민이 동참하는, 그런 사람들로 컨소시엄이 짜이도록 가이드안을 마련해야 된다. '블랙 다이아몬드'로 불리는 덴마크 왕립도서관, 혹은 코펜하겐의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같은 대구만의 가슴 뭉클한 건축물이 탄생하길 기원해본다.

글·사진=이춘호기자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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