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광장] 그땐 그랬지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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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31   |  발행일 2020-01-31 제23면   |  수정 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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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현 변호사

90년대 대학 신입생 때 흥얼거리던 노래가 있다. 인기그룹이 부른 '그땐 그랬지'라는 노래인데, 특히 앞 부분 '참 어렸었지 뭘 몰랐었지 설레는 젊은 하나로 그땐 그랬지' 하는 부분은 그냥 캠퍼스의 낭만이나 20대의 특권이 느껴져서 좋았다.

이후 20년이 훌쩍 지나 요즘 듣는 이 노래는 다르게 들린다. 합격자 발표 뒤 이제 내 세상인 줄 알았던 세상의 배신부터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던 첫사랑의 실패를 겪고 난 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지더군' 하는 가사가 예사롭지 않다. 아마도 막연한 기대를 안고 고개를 넘었다가 후회하고 다시 잊는 일이 반복되는 인생이 담겨있어 그런 것 같다.

누구나의 삶이 마찬가지겠지만 요즘 인생사에 대한 고민이 가장 많을 것 같은 사람은 윤석열 검찰총장이다.

윤 총장은 이번 정부가 들어서면서 단행한 인사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보수적인 검찰조직에서 기수를 뛰어넘는 중앙지검장 승진은 새 정부가 말하는 개혁의 시작으로 보였다. 이후 사실상 윤 총장이 이끄는 검찰은 지난 정부와 관련한 대통령부터 대통령에게 뇌물을 준 재벌, 군, 국정원, 법원의 먼지 하나까지 탈탈 털어냈고, 털어낸 먼지들은 적폐라는 이름으로 쌓였다. 검찰의 의도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정부가 아마추어식 국정운영에도 지금의 지지율을 유지하고 보수당이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데에는 검찰의 역할이 컸다. 윤 총장은 '왕의 남자'를 넘어서 대통령과의 '운명공동체'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총장 임명된 지 6개월 후, 지금의 윤 총장 상황을 보면 '왕의 남자'니 하는 말이 무색하다. 윤 총장과 정권의 관계가 멀어지게 된 계기가 실세라 불리는 조국 전 장관의 수사에 있었음을 보면, 역시 정권의 최우선순위는 '왕실 지키기'에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3년 전 지난 박근혜정부에 대한 특검부터 몇 번에 걸친 선택의 기로는 있었다. 먼저 1단계 특검수사에서는 명분과 개인의 입신양명 두 가지를 얻기 위해 올바른 선택은 직진이었다. 중앙지검장 취임 이후 이어진 2단계 적폐수사도 법과 정의라는 명분을 얻고 조직을 보호하면서 총장으로 직행하는 디딤돌이 되었으니 뭐 법리적·이념적 이론을 떠나서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선택은 직진이었다.

문제는 다음 나타난 3단계 지금의 사태를 만든 '조국 수사'라는 언덕이다. 이제까지는 명분과 실리가 같이 갔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개인의 안정과 조직의 명운, 법과 정의라는 명분이 뒤엉켜 있는 고차 방정식을 풀어내야 했다.

어렵게 나온 선택의 결과는 무자비한 권력남용으로 이어졌고, 최근 있은 검찰 인사·항명·갈등의 레퍼토리는 위선적 개혁의 실체를 보여줬다. 이번 인사의 핵심은 정권 겨냥 수사 모두 중단이었다. 나는 건드리지 말라는 성역을 만들면서, 직제개편으로 민생에 집중하는 검찰을 만들겠다니, 그 모순과 억지, 적반하장의 버라이어티한 버전에 머리가 돌 지경이다.

지금 시점에서 윤 총장이 '그땐 그랬지' 하며 1단계부터 본인의 선택을 후회할지, 아니면 3단계에서 확실한 수사 성과를 내지 못한 걸 원통해 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90년대 인기 그룹의 노래처럼 세상사 언덕은 일단 넘어봐야 뭐가 있는지 보이는 것이고 자꾸 넘어봐야 첫사랑의 실패를 잊고 안줏거리로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기는 게 이치 아닌가. 그래도 우리는 이 스토리를 지켜보았던 탓에 교훈을 가졌다. 그럼 희망을 가져도 되지 않을까 한다. 또 한 번 언덕을 넘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겠다. 어차피 역사는 계속되니까.전지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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