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용 시인의 세월 산책] 산그늘 서럽게 짙고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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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07   |  발행일 2020-02-07 제39면   |  수정 2020-02-07
사람한테 받는 서러움, 견디다 아프면 떠나는 인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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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트럼페터 매튜 할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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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화가 앙리 마르틴의 작품 '농부'.

산그늘이 짙고 좀체 햇살이 비치지 않는 신작로 갓길에 옷가방을 양손에 하나씩 든 사내가 걸어왔다. 허적허적 걸어오고 있었다. 다급한 기색은 아니지만 황급히 걷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차를 세우고 태워 드릴까요 물었다. 그의 다리가 고맙다는 말에 앞서 신작로 중앙선을 넘어왔다. 짐가방을 품에 안고 차에 탄 후 고맙다는 인사말을 했다. 숯가마찜질방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한 달에 170만원을 받고 먹고 자는 조건으로 일하다가 열흘 만에 그만두고 돌아간다 했다.

마음이 황폐해져 있었다. 몹시 상처받은 듯했고, 약간의 진절머리를 치듯 머리를 흔들었다. 눈에 절망감 같은 게 역력했다. 앞날에 대한 막막함이었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오후 6시까지 일하기를 열흘 남짓 하는 중에도 점심시간에 함께 일하는 동료에게 밥 한번 같이 먹으러 가자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는 홀대에 그만 서러움까지 돋은 것이었다.

그는 통장번호를 가르쳐 주고 옷가방을 챙기고 이 지방을 떠나는 길이었다. 차라리 전에 일하던 돼지농장에서 한 달에 260만원을 받고 일하는 게 낫겠다고 말했다. 그의 눈이 벌써 그 어딘가의 돼지농장, 이전에 일하던 곳을 향해 있었다.

산그늘 짙은 신작로 끝에 다다르면 4차로 대로가 나오고 간이버스 정류장이 있다. 나는 그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어디서 왔는지도 묻지 않았다. 말투에서 이 지방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먼 지방에서 온 얼굴이 허여멀건 사내의 손톱에는 숯검정이 끼어 있었고 손등도 부어 있었다. 신발을 바닥에 끌다시피 겨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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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이 지방의 이름은 이제 기억에 되살리고 싶지 않은 경멸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버스정류장에 그를 내려주었다. 예순 중반쯤 돼 보였다.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그가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바람이 찬 북향을 향해 간이버스 정류장은 등받이 없는 의자를 품고 있었다. 그가 털썩 앉는 것을 거울 속에 담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왜, 내가 여기까지 왔지'라는 장탄식을 하거나 앞으로의 삶을 계획했을 것이다. 그보다 열흘 타향살이에서 나이 예순이 넘어 겪었던 생의 치욕을 뼛속에 새겼을지 모른다. 나무를 나르고 불을 지피고 불이 꺼지고 나면 숯가마에 들어가 숯을 퍼내고, 뜨거운 숯이 식을 동안 숯가마를 청소하고 먼지를 털고 숯이 식으면 또 포장하고 계속해서 숯가루를 마셨다. 그는 왜 열흘 동안의 인간적 서러움을 이겨낼 수 없었는가. 이해의 측면이든 동정의 측면이든 어떤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사람이 사람한테 받는 서러움이 세상 그 어떤 서러움보다 크다는 건 다 아는 사실.

그가 생계를 위해 먼 타지에서 왔건만 왜 그의 동료들은 그에게 밥을 같이 먹자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지 않았을까. 산그늘 짙은 신작로 길을 다시 달리면서 그가 걸었던 서러움의 농도가 산그늘의 농도와 다르지 않겠구나 싶었다.

견디다 서러우면 떠나는 인생 아닌가. 어디 한두 사람이 아니고, 온 세상 떠돌며 옷가방 품고 다니는 사내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한길에 그를 내려주고 돌아설 때 왜 이름 모를 그의 고향이 아플까. 왜 알 수 없는 그의 돼지농장의 삶이 미리 아파 올까. 옷가방을 품고 앉은 백미러 속 사내는 마치 이 세상 허기처럼 헛헛하기만 하였다.

그를 위해 재즈뮤지션 매튜 할살(Matthew Halsall)의 트럼펫 소리, 그리고 앙리 마르틴의 그림을 내밀고 싶었다. 비슷한 심정의 그 음색과 그 그림. 물감의 질감이 주는 농부과 대지의 질감에서 생의 질감이 드러나듯 트럼펫은 지금도 여명으로 전해져 오는 그 사내의 우수를 관음케 한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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