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영화] 성혜의 나라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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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1-31   |  발행일 2020-01-31 제42면   |  수정 2020-01-31
비정규직 스물아홉 성혜의 고단한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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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성혜(송지인)는 희망 없는 고단한 일상을 하루하루 힘들게 버티며 살아간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고 낮에는 취업 준비를 위해 토익 학원에 다니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이 4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가 처음부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삶을 산 건 아니다. 대학 졸업 후 대기업 인턴으로 입사했지만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인 그가 외려 괘씸죄에 걸려 반강제 퇴사를 당했다. 인권위원회에 제소를 했다는 이유다. 이 일이 빌미가 돼 이후 변변한 취업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있다. 고단했던 하루 일과를 마친 성혜는 오늘도 지친 몸을 이끌고 혼자 사는 반지하 월세방으로 향한다.

'성혜의 나라'는 비정규직 젊은 여성의 삶을 다룬다. 암울하고 답답한 현실 아래, 희망 따윈 가질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좀비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스물아홉 여자의 삶이다.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그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다. 지인의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땅을 팔아야 했던 아버지는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고 있고, 경제적으로 빠듯한 상황에도 성혜는 병원비를 부담하고 있다. 7년간 만난 남자친구 승환(강두)은 매번 고배를 마시지만 여전히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착하지만 무능하고 눈치 또한 없어 늘 성혜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사방이 차갑고 무심한 공기로 가득 차 숨쉬기조차 힘든 상황이다. 하지만 성혜는 묵묵히 견디며 살아간다. 꿈도 사랑도 청춘도 떠나 보낸 그의 모습은 비슷한 처지와 환경에 놓여 있는 청춘들의 삶과 고민을 대변한다. 카메라는 이를 모두 흑백으로 담아냈다. 정형석 감독은 "흑백은 판타지적인 느낌을 줄 수 있고, 관객이 이야기에 접근하기 수월한 면을 취한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이를 동력 삼아 일체의 과장이나 기교 없이 성혜의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삶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간다.

별다른 사건 없이 주인공의 소소하고 반복적인 일상을 담은 중반부까지가 특히 인상적이다. 극적 파장이 거의 없는데도 사회적 문제로 자연스럽게 확장된다. 동시에 삶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혜 역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데, 지금의 청년세대가 보기에도 고개를 갸우뚱할 파격적인 선택을 한다. 하지만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성혜가 처음으로 흡족한 미소를 짓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다"는 최소한의 바람을 이뤘기 때문일까.

(장르:드라마 등급:12세 관람가)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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