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복건 쓰는 것을 편치 않아했던 퇴계, 정자관 쓴 모습 그려져야"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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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14   |  발행일 2020-02-14 제39면   |  수정 2020-02-14
"옷을 바꾸게 되면 민족이 소멸"
전통복식 현재 이어온 中 먀오족
한땀 한땀 수놓아 전승해온 역사
민간에서 지어진 세월 깃든 의복
사라지기전 기증통로 확보 시급
퇴계 수제자 학봉 김성일의 기록
"복건은 중이 쓰는 두건같아 불편"
1972년 그린 영정 고증에 아쉬움
현초 이유태 화백이 1972년 그린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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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 언행통록.

책의 제목은 '1,300년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이었다. 전혀 복식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 제목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고구려 유민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옷이 가진 민족적 정체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책이었다. 놀랍게도 한 장의 바지 때문에 중국 먀오족이 고구려 유민임을 밝혀나가는 과정을 학술적으로 소상하게 그려나간 책이었다.

저자 김인희씨는 한국과 먀오족의 창세신화 비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 분야의 석학이었다. 김인희씨는 서문의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무엇보다도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존엄을 잃지 않았던 먀오족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 글에 밑줄을 그으며 나는 "고난의 연구에 경의를 표한다"고 적고 있었다. 이러한 연구가 증명하는 것은 하나의 바지는 그저 바지가 아니라 정신의 산물이고 역사임을 증명한다.

바지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흰바지야오족이 고구려인의 궁고를 입고 있는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출발했다. 고구려의 궁고는 가랑이에 삼각형 바대를 대어 엉덩이가 풍성하게 보이게 만들었는데, 그것과 똑같은 모양의 바지가 '쪼우'라고 불리면서 중국 내륙의 흰바지야오족이 입고 있다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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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 언행록.

불현듯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연상되었다. 아버지는 제수를 다듬기 전에 먼저 한복을 갈아입었는데, 한복 바지 모습이 늘 신기했다. 허리에 고무줄이 없어서 불편하게 묶어야 했고 다 입고 나면 언제나 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볼록하게 튀어나와서 그 풍성함이 재미있게 느껴졌던 기억이 났다.

이처럼 엉덩이 뒷부분이 뾰족하게 나오는 바대를 댄 바지는 북방인인 기마민족들이 말을 탈 때 편의를 위해 입던 바지인데 흰바지야오족처럼 말을 탈 일이 없는 남방민족이 넓은 바대를 댄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옷을 바꾸게 되면 민족이 소멸하게 될 것이고 인구가 번성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전통을 현재까지 지켜와 중국 전체에서 남자가 생활복으로 전통복식을 입고 있는 예는 흰바지야오족이 유일하다고 한다.

먀오족의 역사를 오스트레일리아의 인류학자인 게디스는 "세계 역사상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두 개의 민족이 있는데, 하나는 유대인이고 다른 하나는 먀오족"이라고 했다. 먀오족은 불굴의 의지로 자신들의 운명을 거부하며 자존을 지켜내었는데, 이들은 조상의 역사를 옷에 수놓아 기록하고 구전과 노래로 그들의 역사를 전해 나갔다고 한다. 그들이 떠나온 곳을 기억하기 위해 조상들이 건너온 강을 수놓았고 삼각형의 산과 직사각형으로 반복되는 논과 밭이며, 사각형 형태로 도성의 모습을 꼼꼼히 기록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전통복식을 만드는 법을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고 배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80세 정도 된 분들은 한복을 만들어 보았던 일을 이야기한다. "언니랑 같이 만들었는데, 언니는 곧잘 만드는데 나는 옷을 어떻게 뒤집었는지 팔이 네 개가 되기도 해서 한바탕 웃었지"라고 말하면서 옛 기억을 불러온다. 하지만 그 이후 세대들은 한복이 아니라 버선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몇 해 전 박물관을 찾아온 80세 정도 되는 할머니가 있었다. 아직은 나이에 비해 기운이 정정하고 반듯한 분이었다. 꼭 자신의 집을 방문해 달라고 해서 만났던 기억이 난다.

그분이 보여준 것은 소소한 골무며, 주머니들과 함께 선비의 평상복이던 심의(深衣)였다. 심의는 유학자의 평상복으로서 백세포(白細布)로 만들어 깃과 소맷부리 등 옷의 가장자리에 검은 단으로 선(?)을 두른 옷이다. 상의와 하의가 연결된 '의상연의(衣裳連衣)'이다. 머리에는 복건(幅巾)을 쓰고 발에는 흑리(黑履)를 착용한다. 심의를 펼쳐두고 옛이야기는 오래 계속되었다. 고된 시집살이에 옷을 지어야 했던 일도 이제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시아버님 생전에 지어 드린 옷인데 다른 옷들은 모두 소각하였고 이 한 벌만은 남겨두었어요." 바느질 솜씨가 좋아 시아버지가 특별히 이 심의를 평소에 즐겨 입었다고 했다. 한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펼친 듯 우아함과 위엄이 느껴지는 옷이었다. 넉넉한 소매는 금방이라도 바람이 일렁일 것 같았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풍성함이 있었다. 흰빛의 옷에 검은색 단을 깃과 소맷부리에 달아서 곧고 단정한 위엄과 깊이, 그리고 결단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러나 깊은 공감에도 불구하고 구입할 수가 없었다. 본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역사성도 있으니 잘 간직하고 있으라고 전하고 돌아서 나왔다. 그러나 조만간 시아버님의 무덤 앞에 가서 불에 태워야겠다고 말했다. 고인이 아끼던 옷이니 보내드린다는 뜻이었다. 안타까웠지만 도리가 없었다. 이렇듯 예전에는 일상으로 만들어지고 입던 옷이었지만 이제 우리 곁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만드는 이나 입었던 이가 사라지고 있으니 종손이나 종부집의 옛 옷들을 전수 조사하거나 입었던 옷들을 고증하고 기록하는 한편 태워서 없어지기 전에 기증받을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는 천원 권 지폐 속에 심의를 입은 퇴계 이황 선생을 보게 된다. 심의에 복건을 착용한 모습이다. 하지만 1732년에 간행된 '퇴계선생언행통록'에서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이 기록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 생각이 달라진다.

퇴계의 제자로 김취려(金就礪)라는 분이 복건과 심의를 만들어서 보냈다. 그러나 퇴계 선생께서 "복건(幅巾)은 중들이 쓰는 두건(僧巾)과 같아서 그것을 쓰면 내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시고서 심의(深衣)를 입으시고 정자관(程子冠)을 쓰셨다. 만년에 공부방에 계실 때 이와 같이 하고 계시다가 손님이 오면 상복(常服, 道袍)으로 갈아입으셨다.

이 일화를 기록한 분은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부인 못 할 사실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를 근거로 본다면, 퇴계 선생의 초상은 심의에 정자관을 쓴 모습으로 그려져야 한다. 천원 권 그림은 현초(玄艸) 이유태(李惟台) 화백이 1972년에 그린 영정인데, 조금 더 기록을 살펴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한 벌의 옷, 한 땀의 수에 자신의 역사를 기억해온 먀오족처럼 우리의 옷을 기억하는 일에 좀 더 절실한 노력이 필요할 때이다.

"우리는 왜 우리의 말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우리의 옷을 입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먀오족이기 때문이다~." 먀오족의 노랫가락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자신이 전통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삶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박물관 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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