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순섭의 역사공작소] 기초가 탄탄해야죠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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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4-08   |  발행일 2020-04-08 제26면   |  수정 202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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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구박물 관장

"5세기 중반에 경산 옥산동 가마에서 만든 굽다리접시네요." 요즘 박물관이나 발굴 현장에 가면 어떤 문화유산에 한정하여 만든 곳과 시기를 꼭 집어 설명하는 연구자를 종종 본다. 대략 5~6세기 신라의 굽다리접시라고 두루뭉술한 화법을 구사하던 1980년대 원로 선생님들의 분위기에 비하면 완전히 다르다.

질그릇은 재료의 물성과 공방의 통제 여부에 따라 시시때때로 유행을 타서 바뀌었고 짧게 쓰고 버려졌다. 이 특징 때문에 진화의 개념을 적용해 정밀한 변화순서를 세울 수 있고, 지역 사이의 상호작용을 살펴볼 수 있으며, 함께 나온 기물들과 조합해 문화상을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질그릇 연구는 어떤 나라에서 고고학이 어느 수준인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무릇 모든 학문에서 기초과학이란 게 있듯, 고고학에서 질그릇 연구는 여러 가지 주제를 해석하는 데 가늠자 역할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1990년대에 질그릇 연구가 많이 늘어난 이유는 결코 쉬운 주제라서가 아니라 체계적인 단계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었음이 분명하다.

질그릇의 상대편년과 같은 기초연구가 탄탄해진 이후에 나타난 현상은 주제의 다양화다. 기념물·경관·사회조직처럼 거대 담론도 다루지만, 옥이나 유리처럼 화학분석 분야와 협력하는 미시분야도 생겨났고, 인간과 공존했던 자연계를 복원하거나 가축화 혹은 식량화 과정을 분석하며, 고인골의 병리학적 접근과 DNA 혹은 RNA 분석으로 인류의 계통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그간 의료기기라 여겨오던 X-레이와 CT가 문화유산의 검사에 쓰이는 건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흔히 미국 CSI 드라마에 등장하는 분석 장비가 문화유산을 다루는 국가기관에 그대로 있다고 여기면 틀림없다.

이렇게 장황하게 고고학 이야기를 풀어놓은 이유는 단 하나다. 지지난 정권은 고고학이 4대강 사업을 방해하는 업종 정도로 취급했고, 괘씸죄 때문인지 유적조사원 자격의 진입장벽을 없앴다. 이제 발굴 현장에서 비전공자를 만나는 건 놀랄 일이 아니며, 장삼이사 누구나 발굴할 수 있는 쉬운 짓거리라고 비아냥거리는 관찰자 시점의 외부인이 버젓이 있다. 코로나19의 팬데믹에서 우리나라가 잘 선방하고 있는 건 진단과 방역 분야에서 기초가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고고학계 전반에도 적용되기를 희망한다.
국립대구박물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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