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애의 문화 담론] 어버이날 경송사(敬頌辭)

  • 임성수
  • |
  • 입력 2020-05-01   |  발행일 2020-05-01 제38면   |  수정 2020-05-01
"나는 괜찮다" …가슴 적시는 부모님의 '무아무욕'
(無我無慾· 자신의 존재를 잊고 누리고자 하는 마음도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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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 아이들이 어버이날을 맞아 어르신들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있다. 〈영남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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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애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

5월은 가정의 달. 부모 가슴에 카네이션 한 송이 달아드리는 '어버이날'이 다가오지만, 올해는 소소한 자식의 도리마저 지키지 못할 것 같아 그저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자식·손주들이 면역력이 약한 고령의 부모·조부모에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옮길까 우려된다며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로 혈친 간의 살가운 접촉을 삼가라고 권고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코로나 불효자가 속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이미 계획한 어버이날 기념행사를 줄줄이 취소하고 조촐한 동네 경로잔치마저 열지 못하도록 복지관이며 마을회관의 문을 걸어 잠가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어르신들은 외출을 자제하고 집 안에서만 소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병(疫病)이 할퀴고 있는 현실이 그렇습니다.

국민은 오늘도 밥벌이를 위해 마스크 쓰고 장갑 끼고 코로나의 지옥문을 드나들면서 쓸쓸하게 집을 지키는 부모님 걱정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 역시 홀로 계시는 아버지께 스마트폰을 자주 누르는 것이 습관처럼 돼 버렸습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딸자식의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으레 "그래, 나는 괜찮다. 너도 별일 없지?"입니다. "네, 아버지!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없다. 집에서 밥 먹으면 되지." 이러한 대화로 아버지의 건강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서야 직성이 풀립니다.

세상에 부모 자식 간의 마음이 모두 다 한결같다고 하지만 저의 아버지는 자식들 앞에서 언제나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다"라며 당신의 존재감을 외면하고 자식들부터 챙기는 무아무욕(無我無慾)으로 평생을 살아온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당신께서는 발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해 휘청거리기만 합니다.

젊은 시절, 그저 처자식 밥 안 굶기고 남부럽지 않게 거두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아버지! 늘그막엔 자식들 호의호식 못 시켜 줘 죄 밑이 된다는 아버지! 이젠 당신 몸 하나 제대로 추스르지 못해 자식들에게 짐만 된다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의 처연한 모습은 어쩌면 엄마가 별세한 이후 더욱 애달파 보이기만 합니다.

그러나 저희들 어릴 때 눈에 비친 아버지는 언제나 지혜롭고 힘이 세고 세상의 모든 일을 다 할 줄 아는 위대한 영웅이었습니다. 밤낮없이 일에 쫓기느라고 자식들과 아기자기하게 놀아주는 기회가 드물었지만 저희들 의식의 언저리에는 언제나 믿음직한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평소 무뚝뚝한 모습이었지만 항상 따뜻한 가슴으로 보듬어 주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지요. 하여 저희들은 언제나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불가능이 없는 가장 위대한 영웅으로 생각하며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저희들도 이제 어른이 되고 보니 '아버지'라는 위대한 이름 뒤에는 저희가 미처 몰랐던 또 다른 모습이 숨어 있었습니다. 언제나 지혜롭고 힘이 세고 불가능이 없는 그런 아버지가 아닌 신산한 세상살이가 힘들고 역겨워 어디엔가 하소연하고 싶었고, 기대고 싶었고, 비비고 싶었던 가슴 아픈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 그런 아버지는 간혹 비빌 언덕도 없었고 돌에도 나무에도 의지할 데가 없을 때 남몰래 소리 내어 울고 싶은 곳을 찾아 헤매던 여린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 당시 철부지였던 저희들은 아버지가 가끔씩 일이 뒤틀리고 낭패를 당할 때마다 애써 늠름한 태도로 "괜찮다, 나는 괜찮다. 앞으로 잘 될 거야!"라며 짐짓 웃는 모습을 보이던 기억만 남아 있었습니다. 저희들에게 아버지는 늘 하늘만큼이나 높은 이상과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당당한 아버지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즐겨 마시던 술에는 언제나 한숨과 눈물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는 사실도 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자식들에게 스스로의 참모습을 숨기고 그저 대범하게 정글의 투사처럼 살아오셨지만 저희들은 황혼 녘에 홀로 돌아서서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외롭고 쓸쓸한 노인의 뒷모습이 바로 아버지의 참모습이라는 사실을 그동안 감쪽같이 몰랐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참모습은 이리 내몰리고 저리 부대끼며 신산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등골이 휘어지는데 저희들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그저 좋은 옷 입고 싶었고, 좋은 신발 신고 싶었고 용돈 맘껏 쓰고 싶어서 아버지 속을 많이 태웠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사악한 세상에서 남에게 뒤처지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 애써 온 아버지가 가족에게 차마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못하고 혼자 돌아서서 가슴앓이로 생존의 열병을 치러왔다는 사실도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지금도 아버지는 그렇게 강한 의지력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께서 겪어온 과거의 상처가 깊지만 절망을 희망으로, 체념을 용기로 바꿀 방법을 찾아 그동안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저희들은 이제서야 아버지의 참모습을 바라보며 아직도 건강과 희망을 잃지 않고 계신다는 사실에 새삼 감동하며 축복 드리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저희들도 그 희망의 끈을 부여잡고 미래를 설계하며 살아가노라면 때론 깊고 어두운 강이 가로놓일지라도 좀 더 가볍게 건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요즘에도 무탈하게 건강을 유지하면서 "신(神)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천수(天壽)를 누린다"고 마음 편하게 한마디씩 툭 던지지만 그럴 때마다 문득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이라는 시 한 구절이 떠올라 저희들 가슴을 적시곤 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그러나 지금은 100세 시대. 저의 아버지처럼 역경을 딛고 살아온 이 세상 모든 어버이께 오래오래 아름다운 소풍을 즐기시길 기원하며 머리 숙여 사뢰는 마음으로 경송사(敬頌辭)를 바칩니다.

대구미술협회 사무처장·미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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