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노계(蘆溪) 박인로의 도학적 기풍과 문학사상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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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5-07   |  발행일 2020-05-08 제21면   |  수정 20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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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삼 (전 언론인)

노계 박인로(朴仁老)는 조선중기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향반(鄕班)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32세 되던 해인 임진년(선조25년·1592년) 4월13일 가토기요마사의 왜군이 침략 열흘 만에 영천성을 함락시키자, 붓을 던지고 호수 정세아(鄭世雅) 의병장 휘하로 들어가 별시위(別侍尉)로 성을 되찾는데 공을 세웠다. 또 1598년 경상좌도병사 성윤문의 수군으로 종군하였다. 그해 겨울 부산 주둔 왜군들이 야밤에 퇴각하자, 그들을 추격하는 우리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태평사(太平詞)를 지었다.

 


나라가 한쪽에 치우쳐 작고 해동(海東)에 버려져 있어도, 기자(箕子)가 끼친 풍속 고금 없이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워, 조선 건국 이후 이백 년간 예의를 숭상하니, 우리의 문화가 한(漢)·당(唐)·송(宋)과 같이 되었더니(중략), 오, 만 년 동안 전쟁을 없애소서, 밭 갈고 우물 파서 격양가(擊壤歌)를 부르게 하소서, 우리도 거룩한 임금님 모시고 함께 태평을 즐기리라. 이 작품이 그의 시가창작 활동의 시초였다. 그는 그해 무과에 급제하고 수문장(守門將), 선전관(宣傳官), 조라포만호(助羅浦萬戶)를 지냈다. 


이은상, 문일평 등의 학자들이 노계문학을 본격 연구하면서 그는 송강(松江) 정철, 고산(孤山)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시가작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후학들의 노계문학 연구논문·저서는 2백여 편에 이른다. 그의 인간적인 진면목과 문학사상은 남다른 면이 많다. 그는 13세 때 지은 대승음(戴勝吟)은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보여준다. 뻐꾸기 울음소리 낮잠 자주 깨우니(午睡頻驚戴勝吟 ), 어찌 시골사람 마음을 이리 재촉하는고(如何偏促野人心). 저 한양의 좋은 집에 가서도 울어(啼彼洛陽華屋角), 밭갈이 권하는 새가 있음을 알리려무나(令人知有勸耕禽).
여기서 대승은 뻐꾸기를 말한다. 그는 당시 소년의 안목으로 당시 권력층을 비판하고 농촌의 어려운 실정을 은유적으로 나타냈다. 그는 경서를 도해(圖解)한 중용성도(中庸誠圖), 대학경도(大學敬圖), 소학충효도(小學忠孝圖)와 함께 성(誠)·경(敬)·충(忠)·효(孝) 네 글자를 벽에 써 붙이고 항상 자신을 성찰하는데 힘써 왔다. 바깥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는 사당이 바라보이거나. 비가 오고 밤길이 칠흑같이 어두웠을 때마다 말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갔다. 그는 종자(從者)가 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을 타고 갈 것을 권하자 "군자는 진실 된 마음으로 절개를 지켜야 하는데, 이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니 옳은 일이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몸가짐과 행동은 늠름하여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고, 학행일치(學行一致)를 하였다. 그는 현실적인 가난을 유학의 이상인 안빈낙도(安貧樂道)사상으로 승화시켰다. 임진왜란이 끝나는 51세 때 고향으로 돌아와 선비의 길을 걸었다. 그는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셨으니 어찌 내 나이가 많다고 하여 스스로 한계를 두겠는가."라고 하였다. 그후 그는 경기도 광주의 한음(漢陰) 이덕형과 교유하고, 도산서원을 찾아 퇴계(退溪)선생을 흠모하며 분향축천(焚香祝天)을 했다. 한강(寒岡) 정구에게 도를 묻고, 경주 옥산서원에서 독락당 가사를 지었다. 69세 때는 여헌(旅軒) 장현광과 왕래하며 입암곡(立巖曲) 29 수를 지었다.


여헌은 노계를 대호(大豪) 즉, 대문호라고 하였다. 당시 경상도순찰사 이명(李溟)은 그를 '우뚝 선 선비'라는 뜻의 독행특립사(獨行特立士)라고 극찬했다. '…대그릇의 밥과 표주박의 물이지만 이것도 족하다고 여기노라…'고 노래한 누항사 등의 작품을 보면 노계의 사상은 안빈낙도와 청빈(淸貧), 인애(仁愛)사상으로 압축할 수 있다.
정성삼<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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