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거리두기

  • 이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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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5-09   |  발행일 2020-05-09 제23면   |  수정 2020-05-09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1764~1845)는 농업기술 서적 행포지(杏蒲志)에 '배나무 붉은별무늬병이 많이 발생하는데 이 병은 향나무와 신비한 관계가 있다'며 '배나무 주위에 향나무를 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라고 기술했다. 배나무 붉은별무늬병은 배나무잎 표면에 주황색 반점이 생기는 병인데 나중에는 잎 뒷면에 수염 같은 회갈색의 돌기가 돋아난다. 이 병을 일으키는 균은 향나무에서 겨울을 나고 봄에 배나무나 사과나무 같은 장미과 식물로 옮겨가 생활하다가 가을에 다시 바람에 실려 향나무로 날아간다. 균이 배나무에 있는 때는 붉은별무늬병, 향나무에서는 향나무녹병으로 불린다. 이 균은 바람에 의해 날아갈 수 있는 거리 안에 향나무와 장미과 식물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이 두 종류의 나무가 있어야 생존할 수 있는 균이다. 녹병에 걸린 향나무에는 4~5월에 오렌지색의 젤리 같은 균덩어리가 생긴다. 겨울포자다.

경북대 본부 건물 앞 주차장 옆에는 잘 다듬어진 향나무 여러 그루가 줄을 지어 앉아 있다. 땅에 붙이듯 전정을 해 놓은 것이 거대한 버섯갓을 연상케 한다. 이 향나무에도 녹병의 겨울포자가 있다. 캠퍼스를 살펴보니 학생복지관 앞에 장미과 식물인 명자나무가 있다. 본부와의 거리는 약 400m. 포자는 최대 1.6㎞까지 날아갈 수 있으니 병이 생길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런데 모둠심기를 한 이 명자나무 옆에 향나무를 모둠심기 해 놓았다. 이격거리는 1m 내외. 말할 것도 없이 명자나무에는 붉은별무늬병이, 향나무에는 녹병이 만연해 있다.

서유구가 기술한 배나무 붉은별무늬병은 100여 년이 지난 후에야 균과 감염경로가 규명됐다. 그는 1세기나 앞서 병의 전염을 막기 위한 나무 간 거리두기의 필요성을 설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경북대의 향나무와 명자나무처럼 나무 간 거리두기는 20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생활속 거리두기 시작과 동시에 수도권의 관광지와 클럽을 섭렵한 20대가 코로나19 확진자로 판명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생활속 거리두기로의 전환이 긴장을 풀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경고처럼 들린다. 
이하수 중부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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