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가난한 노동자는 왜 아픈가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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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02   |  발행일 2020-06-02 제26면   |  수정 2020-06-02
사재기 광풍 없이 버티는 건
진통제 의지하며 생계 잇는
물류 노동자의 고단함 덕분
자본 논리에 희생 방치하면
자랑스러운 K방역 의미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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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문화부장

코로나19가 발생하고 나서 '온라인 장보기'를 시작했다.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구시대적 쇼핑 스타일 때문에 그간 온라인 장보기엔 관심이 없었다. 바이러스는 창궐하는데 언감생심 대형마트에 갈 엄두는 나지 않고, 집 안에서 해결하는 삼시세끼 때문에 필요한 식료품은 늘어만 갔다. 하는 수 없이 휴대폰에 앱을 깔고 주문을 한 뒤 앉아서 현관 앞에 배달되는 먹거리를 받아보는 '새로운' 쇼핑의 세상에 들어섰다. 잠들기 전 주문한 먹거리를 다음날 아침 받아보는 경험은 놀라웠다. 잠시 그 편리함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억울함까지 들 정도였으니.

야심차게 시작된 나의 온라인 장보기는 그러나 몇 번의 위기와 마주했다. 먼저는 그 어마어마한 포장 용기였다. 배보다 큰 배꼽이라는 간단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포장지로 나는 또 세상에 얼마나 큰 해악을 끼치는가. 그 죄책감에 이어진 또 다른 위기는 '새벽' 배송이었다. 나의 편리한 새벽이 누군가의 고단한 밤을 갈아넣은 노동으로 얻는다는 것이 과연 옳은가. 몸은 편리함에 익숙해졌고 머리는 끊임없이 회의하는 사이 쿠팡발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터졌고 또 한 번 나의 온라인 장보기는 위기를 맞았다.

경기 부천 쿠팡물류센터에서 시작된 코로나19의 누적 확진자 수는 지난달 31일 기준 110명을 넘어섰다. 증가세가 다소 주춤해지고 지역사회 확산이 예상보다 크지 않아 최악의 상황은 모면했지만 이번 사태를 일으킨 구조적인 문제가 우리 사회의 여전한 위험 요소임을 알려준다.

우선 쿠팡물류센터의 작업 환경은 너무나 열악했다. 환기도 안되는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모자와 신발을 돌려쓰며 확산되는 바이러스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정규직은 3%도 안되고, 3%의 정규직을 제외한 비정규직 알바에게는 '사회적 거리두기'도, '아프면 쉬기'도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사용자는 이윤을 앞세워 확진자가 발생해도 작업자들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고, 노동자는 소득 감소와 실직이 두려워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투잡·스리잡을 뛰었다. 어찌 물류센터 직원들뿐이겠는가. 요양병원 간병인이 그랬고 콜센터 직원들도 그랬다.

코로나19는 이처럼 원래 있었던 사회·경제적 불평등 위에 바이러스 위험으로부터의 거리에 따른 새로운 격차를 더한다. 일을 쉬게 되는 순간 생계 문제에 직면하게 되는 수많은 노동자들은 아파도 진통제에 의지하며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일을 나가야 한다. 건강이 악화돼 약값과 병원비는 늘어나고 그래서 다시 돈을 벌러 나가야 하는 악순환에 빠진다.(이승윤·김기태 '아픈 노동자는 왜 가난해지는가') 그렇게 가난한 노동자는 아프고, 아픈 노동자는 가난해진다. 코로나19는 그 약한 고리를 우리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

우리 사회가 사재기 광풍없이 차분하게 코로나의 시절을 버틸 수 있는 것은 물류노동자와 배달노동자들이 사회적 거리의 불편함을 메운 덕분이다. 이면에는 이런 위험하고 불안정한 노동이 촘촘하게 깔려 있다. 이제 '노동에서의 방역'은 우리가 크토록 자랑스러워하는 'K방역'의 중대한 과제가 됐다. 그 수단이 법이든 제도든 문화든 만들고 바꿔나가야 한다.

사람보다 이윤이 더 중요한 사회에서 돈 대신 목숨이 희생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다. 코로나19가 우리 앞에 펼쳐보인 '노동'의 민낯이 이를 증명한다. 코로나의 광풍 속에서 무사히 살아남았으나 탐욕과 착취가 본질인 자본에 이렇게 희생된다면 도대체 무엇이 다행이란 말인가.
이은경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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