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 이야기-3]. 이사..."중국 서예역사상 첫 유명 서예가...소전(小篆) 창시 주인공"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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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02 11:46  |  수정 2020-06-03 08:46  |  발행일 2020-06-03 제20면
이사-태산각석
이사의 글씨가 새겨진 태산각석.

"이사는 초나라 상채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군 하급 관리로 일했다. 그는 관청의 변소에서 쥐들이 오물을 먹다가도 사람이나 개의 인기척이라도 나면 깜짝 놀라 달아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반면에 창고에 있는 쥐들은 저장해놓은 곡식을 먹고 큰 집에 살면서 사람이나 개를 겁내지 않는 것을 보았다. 이에 이사는 '사람의 잘나고 못난 것도 쥐와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라며 탄식했다."


사마천의 '사기' 중 '이사(李斯) 열전' 첫 대목에 있는 내용이다.


이사(?~기원전 208)는 진나라 시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데 핵심 역할을 하며 승승장구한 정치가로 유명하다. 가혹한 형법과 함께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건의해 집행한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명리를 좇았고, 이익 앞에서 의리를 잊었다. 결국 모함에 빠져 2세 황제에게 오형(五刑:얼굴에 먹물을 들이고 코를 베고, 다리를 자르고, 귀를 베고, 혀를 자르는 형벌)을 당한 뒤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사는 좋은 평판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중국 서예역사상 최초의 유명 서예가라 할 수 있으며, 소전(小篆)을 창시한 주인공이다.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승상 이사로 하여금 소전 문자를 만들게 하여 모든 공문서와 법령에 쓰도록 한 것이다. 한자를 규범화하는데 큰 역할을 한 소전 창시는 서예 발전에도 큰 공헌을 했다. 진나라 문자에 바탕을 둔 진전(秦篆)을 표준으로 삼아 만든 소전은 이사가 창제한 것이어서 '사전(斯篆)'이라고도 부른다. 소전은 필획이 복잡한 대전(大篆)을 간략화하고 고쳐서 만든 진나라 통일 국가의 표준 글씨체이다. 


진시황은 천하통일 후 지방을 순시하며 진나라와 자신의 공적 등을 기념하기 위해 곳곳에 기념비석를 세우게 했다. 역산각석, 태산각석, 낭야대각석 등이다. 이들 비석의 글은 모두 이사가 짓고 글씨도 소전으로 직접 썼다.

 

역산각석1
이사의 글씨가 새겨진 역산각석. 진시황이 천하통일 후 지방을 순시하며 곳곳에 세운 기념비석이다.

 

당나라 장회관은 서예를 논한 저술 '서단(書斷)'에서 이사의 서체에 대해 '필획은 마치 철이나 돌과 같고, 글자는 마치 날아 움직이는 것 같다'고 평했다.


이사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정막(程邈)도 진나라의 대표적 서예가이다. 정막은 진나라의 옥리(獄吏)로 있었다. 진시황 때 죄를 지어 죄수 생활을 하면서도, 대전을 잘 쓴 덕분에 운양감(雲陽監)의 옥리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감옥의 문서가 매우 번거롭고 많아 소전으로는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워, 쓰기가 좀 더 편리한 서체가 없을까 고민했다. '그는 10년을 고심하다 전서를 변형한 예서문자 3천여자를 고안해 황제에게 바쳤다.' 명나라 도종의가 지은 '서사회요(書史會要)'에 나오는 기록이다.


진시황은 예서가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 매우 기뻐하며 정막을 사면하고 어사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만든 예서를 감옥 공문서에 사용하도록 했다. 죄를 범한 정막이 감옥에서 문자를 고안했기에 이를 '예서(隸書)'라고 불렀다. '진예(秦隸)' '정예(程隸)'라고도 했다. 서체의 신천지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는 예서의 출현으로 문자의 실용성이 훨씬 높아지게 되었다.
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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