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철학자 최진석(2)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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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05   |  발행일 2020-06-05 제34면   |  수정 2020-06-05
"창의·도전적 인재가 만드는 세상에 적합한 '철학과 말' 이동시켜야 할 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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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 이사장이 전남 함평 고향 집에 세워진 새말새몸짓 강의동 입구에 걸린 서예가 강병인이 쓴 새몸짓 액자 앞에 섰다. '부질없다 부질없다 전해진 모든 것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는 모든 먼지들 모든 생각들~.' 그는 그런 진영 이데올로기가 난도질하는 한반도의 시대착오적 이념상을 걷어내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을 위해 새말새몸짓 모임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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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와의 일상이 담긴 자잘한 사진이 조각보처럼 박혀 있는 액자.

나의 차림새는 철학자와 거리가 멀었다. 늘 청바지, 티셔츠 차림이다. 구두보다는 스니커즈, 그리고 은백의 머리카락은 입영 장병 만큼이나 짧았다. 웃으면 눈가의 주름이 도가풍이라고 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날 '최 도사'라 부른다. 처음에 칸트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유학 갈 생각이었다. 독일어도 공부했다. 어느 날 책장 아랫단에 있는 장자를 발견했다. 너무 재미가 있어서 한 번에 다 읽었다. 재미있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중국으로 유학 갔다. 박사학위 받고 18년 강의하고 59세 때 강단을 내려왔다. 이젠 서강대 명예교수 타이틀만 갖고 있다.

어떤 이는 내가 유달리 짧은 머리카락이라서 스님의 기운을 느끼고 간다. 어린 시절 한 탁발승이 모친으로부터 쌀을 얻어가면서 나더러 '저기 큰스님이 계신다'고 말한 걸 지금도 잊지 못한다. 속리산 법주사 수학여행 시절 그때 주지 스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날 스님이 내 손을 잡아 주실 때 승복에 묻어 있던 향 내음, 난 그 향기 때문에 몰래 훌쩍거렸다. 하지만 난 내가 출가를 해야 된다고 느껴 본 적은 없다. 내겐 좌우명이 없다. 취미도 없다. 그냥 사유하고 공부하는 게 내 팔자인 것 같다. 젊은 시절 내가 마구 망가질 때 아버지는 화를 내기보다 '너는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다'라고 날 잘 잡아 주셨다. 그 말 한마디로 지금 날 만드는 데 일조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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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9월1일 함평 분원에서 시작되는 새말새몸짓 기본학교 강의동 옆에 선 최진석. 그는 고향 집을 허물고 거기에 새로운 시절의 인식체계에 맞도록 불경과 장자, 그리고 노자의 사상이 스며든 집을 신축했다.


주지스님이 내게 말씀하신 출가 기운
장자에 빠져 中 유학, 18년간 선 강단
인문학 특수 덕 방송채널 강호학자로

진보 민주화 논리, 새 세상 겨냥 못해
창조적 인문학 사령부 '건명원' 건립
철학공동체 '새말새몸짓' 운동 이어가
서울 본원 두고 고향집에 분원도 세워

韓 자생철학 신지평 연 故 김형효 교수
탕이제 교수 못지않게 철학인생 영향
자신 존재 인지, 모두의 소중함 깨달아

강단을 내려올 즈음 국내에 난데없는 인문학 특수가 일어났다. 그때 종합채널 MBN의 '지식 콘서트'에 나갔고, 그 프로가 사라질 즈음, 2년 전 EBS '인문학 특강' 첫 강사로 모두 14번 노자(老子) 강의를 했다. 그때 내 생각에 밑줄긋기 하는 팔로어가 부쩍 늘어났다. 강단학자에서 강호학자로 변한 건지도 모른다. 내가 주문을 외운다고 달라질 세상이 아닌 줄 알면서 난 새로운 몸짓을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 새로운 말이 필요했다. 기존 말은 3차산업 혁명기에 태동한 것이다. 중진국 패러다임에 갇힌 그 말을 4차산업 혁명기에 맞는 말로 이동시켜주는 게 내게 주어진 소임이다. 새로운 인식이 없으면 비록 21세기에 살아도 여전히 구한말 사람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귀거래사

전남 함평IC에서 고향 마을로 들어서면 이렇게 밋밋한 동네가 있나 싶다. 동네 한복판에 큼지막한 대리석 같은 건축물 세 덩어리가 태어났다. 텃밭이 딸린 부모가 살던 집터는 사라졌다. 가장 모던한 것과 가장 고풍스러운 것이 이 공간에서 서식하도록 배려했다.

내 젊은 시절 화두는 시건방지게도 '나는 금방 죽는다'였다. 어릴 때부터 여러 죽음을 연달아 목도한다. 그중 가장 큰 충격은 큰누나의 죽음이었다. 나는 병풍 뒤로 돌아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나를 보내는 마지막 의식을 치르는 기분으로 관을 열었다. 이상했다. 누나의 얼굴은 갑자기 달라져 있었다. 얇게 펴진 밀가루 반죽으로 덮여있었다. 나는 갑자기 아무 생각 없이 그 반죽의 이마 쪽 끝을 잡고 살짝 들어보려다 이내 내려놓았다.

산업화가 민주화 시대로 넘어왔지만 진보진영의 민주화 논리는 4차혁명 시대를 전혀 겨냥하지 못한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창조적 인문학 사령부가 필요할 것 같아서 생겨난 게 바로 '건명원(建明苑)'이다. 거기에 새로운 지식이 형성됐고 그걸 의미롭게 평가한 KBS1이 40주 동안 '생각하는 집'이란 프로그램으로 녹여냈다. 창조력을 발휘하고 도전하는 인재를 기르자는 게 목표였고 내가 그 기관의 초대 원장이 되었다. 나는 건명원을 뒤로하고 새로운 철학공동체를 만들었다. 그게 지난해 8월 만들어진 사단법인 '새말새몸짓'이다. 지금 내가 거기 이사장이다.

나의 동선도 달라져야만 했다.

서울에 본원이 있고 분원은 귀향한 고향 집에 세워졌다. 강의동 옆에 내가 기거하는 서재가 있다. 대문 바로 옆 카페처럼 생긴 강의동의 당호도 재밌다. 장자(莊子)의 제물편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나비의꿈)'이다. '삶이 곧 죽음이고 죽음이 곧 삶'이란 걸 수강생들이 자각하도록 도와주는 공간이 될 것이다.

지금 내 맘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몸까지 완전히 귀향한 건 아니다. 평일은 인연 때문에 서울, 주말이 되어서야 고향에 머문다. 1주일에 한 번씩 유튜브 방송을 고향 집 서재에서 만든다. 내 강의의 범주는 크게 반야심경·장자·노자로 대별된다.


◆마흔까지 공부만 하자

젊은 시절 난 스무 살부터 마흔까지는 죽도록 공부만 하자고 다짐했다. 그 약속을 얼추 지킨 것 같다.

베이징대 탕이제 교수 못지않게 내게 영향을 미친 국내 철학자가 있다. 2년 전 작고한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김형효이다. 그는 한국 자생철학의 신지평을 열어간 분이다. 서강대 철학과 시절 내 은사였고 유정회 국회의원이 되기도 했다. 그게 악연이었다. 철학과 시절 난 그를 어용교수로 규정, 그의 연구실 문에 못질을 했다. 하지만 그가 낸 책 '구조주의와 그 사유체계와 사상'이란 책이 날 뒤흔든다. 서문의 한 대목이 날 성찰케 했다. '승화되지 않은 이데올로기 때문에 우리들은 서로 비극의 세월을 보냈다'란 요지였다. 당장 전화를 해서 그를 만났다. 난 대뜸 '그 시절 교수님 연구실에 못질을 한 못난 놈'이라며 사과했다. 그는 내 손을 잡아주며 '이런 순간을 위해 철학이 존재하는 것 아닌가'라며 저녁을 사주셨다. 난 건명원 개원 때 그를 첫 강사로 초대했다.

난 과거학도 미래학도 두둔하지 않는다. 모두 치명적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법고창신(法古創新), 새로움을 오직 미래지향적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는 바로 '지금', 바로 '현재', 바로 '여기'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이는 아직도 과거에 살고 또 미래에만 살려 한다.

우리가 소중하고 당신이 소중한 걸 알기 위해선 바로 내가 어떤 존재인가부터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 앎이란 배타적인 구석이 다분해 결국 자기 구속이고 속박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린 수입된 철학에 갇혀 있는 것이다. 지금 인문학 특강의 열기가 자기 사유보다 남의 사유를 섬기는 결과를 낳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전문가의 말을 다 믿어서도 안 된다. 그의 말에 대해 가차 없이 질문으로 맞서야 한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해서 질문으로 끝난다. 큰 질문이 큰 인물을 만든다.

현재 유튜브 방송과 초청강연, 새말새몸짓 등이 바로 내 생각 혁명의 수단이다. 오는 9월1일부터 개강할 새말새몸짓 강의는 '기본'을 닦는 과정이다. 6개월~1년 '나는 누구인가' 등 철학적 질문을 하며 고독한 시간을 갖는다. 서울에서 함평까지 온다면 고독이라는 '자신만의 동굴'에 적어도 5시간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계속 공부할 것이다. 75세까지 날 한 단계 더 성숙시킬 것이다.

선선한 저녁 바람이 분다. 나는 아직 더 지워져야 될 것 같다.

글·사진 =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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