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55년 전 월남참전용사를 아십니까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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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15   |  발행일 2020-06-16 제25면   |  수정 2020-06-15
금태남
금태남


대한민국 34만 파월 장병은 생과 사의 기약도 없이 베트남전으로 간 사람들이다. 이 한 목숨 다 바치겠다는 구국의 일념 하나로 국가의 명령에 따라 '불구덩이' 전쟁터로 향했다.
이별의 슬픔을 달래려고 모여든 수십만 환송 인파와 태극기 물결이 당시 부산 제3부두를 가득 메웠던 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전투부대인 맹호·백마·청룡부대가를 목이 터져라 부르고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리라고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 귀국'을 맹세했던 이 곳이 아니었던가. 사랑하는 부모·가족·친지들이 살아오기를 기원하며, 마냥 부둥켜 안고 땅을 치며 통곡했던 그 절규의 아우성 소리, 아직도 내 귓전을 때리고 있다.


애절한 눈물을 흘리던 파월 장병이 면도칼을 들고서 자기의 머리카락을 잘라달라고 부탁했다. 손톱을 깎아 모으고 머리카락과 함께 손때가 묻은 백지에 싸서 봉투에 넣어 환송 온 병사에게 건네주며 자기집 주소로 나의 부모에게 우편으로 송부해 달란다. 전장의 사지로 가서 살아오지 못하면 부모님이 나의 머리카락을 만져보시도록 하겠다는 애절한 마지막 부탁이었다. 동료 파월장병 모두가 통곡의 머리카락 자르기를 행하게 되던, 애잔한 그 현장을 그 누가 알아주랴 . 거대한 미군 수송선이 죽음의 전쟁터를 향해 떠날 때 '이별의 눈물'은 부산 제 3부두에 넘쳐 흘렀다. 


대한민국의 마지막이 보이는 섬, 부산 오륙도를 지날 때였다. 오천여명의 장병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갑자기 대화의 소리를 멈추었다. 눈물을 감추려고 속가슴 앓이로 훌쩍거리는 목메인 울음소리…. 이제 조국을 뒤로 하고 떠나가는 순간이었다.


1965년 우리나라는 개인소득 78달러로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이었다. 파월 전장(戰場)에서 그들이 9년 간 벌어들인 천문학적 외화(74억6천만 달러)는 한강의 기적을 태동시키고, 대북 우위·부국 강병의 초석을 만들었다. 제 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목표의 400%를 달성해 대대로 이어온 가난의 보릿고개를 영원히 탈출하게 만들었다. 


파월 장병은 이역만리(異域萬里) 남의 나라 폭염의 전쟁터에서 피와 땀, 눈물을 뿌리며 국위를 선양한 영웅들이다. 그들 가운데 5천여명의 전사자와 1만여명의 상이용사, 15만명의 고엽제 환자들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세계 경제대국 12위권에 올려놓은 역군이자 산증인이다. 파월장병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젠 70~80세 노병이 되었지만, 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진정한 애국자요, 조국 발전의 선구자임이 분명하다.


정글 속 수많은 독충, 적의 기습공격에 대한 공포감, 총·포탄에 쓰러진 유혈이 낭자한 전우의 모습은 아직도 노병들의 뇌리(腦裏) 속에 '전쟁공포 트라우마(trauma)'로 남아 사라지지 않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미국의 명장 맥아더 원수가 퇴역을 할 때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고 했다. 우리 참전 용사 노병 모두는 이에 깊이 공감한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전우들이 국가에 바라는 것은 우리가 국가를 사랑했던 만큼, 국가도 참전용사에게 그 사랑을 베풀고, 국가 유공자의 예우를 확실히 실천해 가슴 속에 한맺힌 숨은 역사의 한 단면을 속 시원히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모든 참전 용사(노병)는 이 나라 산 역사의 뿌리깊은 나무의 밑거름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끝으로 반세기 전 베트남전에 함께 참전해 대한의 용맹을 세계 만방에 떨치다 산화한 동료장병들에게 삼가 머리숙여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금태남<전 월남참전 대구 수성구 지회장·전 수성구의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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