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번 없이 목숨걸고 싸웠지만…병원비 내기도 버거운 상황"

  • 마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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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22 07:39  |  수정 2020-06-22 07:50  |  발행일 2020-06-22 제11면
[6·25전쟁 70周 특별인터뷰] 박덕용 참전유공자회 칠곡지회장

6·25전쟁 70주년을 맞은 2020년. 동족상잔의 비극적 전쟁은 긴 세월 속에 묻혀 이젠 국민 기억에서조차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군번도 없이 전장의 기록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학도병에게 6·25전쟁은 절대 잊지 못할 상처로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조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을 때 연필 대신 총을 든 수많은 학도병.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허울뿐인 명예와 바로 곁에서 죽어간 친구를 잊지 못하는 애절한 감정뿐이다. 21일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위치한 6·25참전유공자회 칠곡군지회 사무실에서 박덕용(87) 회장을 만났다.


17세에 친구들과 자원입대 후 학도병 신분으로 전장에 투입
고교졸업 후엔 6·25때 군번·계급 없었단 이유로 재입대하기도
현재 병사월급보다 수당 적어…죽기 전 합당한 예우 받는 게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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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국군 11사단 13연대 1대대 2중대 수색소대에 배속돼 북한군과 맞서 싸운 박덕용 6·25참전유공자회 칠곡지회장이 인터뷰 도중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보이고 있다.

"내 눈앞에서 단짝 친구가 북한군의 총격에 피를 토하며 유명을 달리하는 걸 직접 목격했습니다. 아마 친구가 그곳에 없었다면 그 총구는 바로 옆에 있던 저를 향했을 것입니다. 벗을 잃은 슬픔과 전쟁의 충격·공포로 인해 여러 날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당시 박 회장의 나이는 열일곱. 고등학생이었던 그가 학도병 지원을 결심한 것은 빨치산을 토벌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밤만 되면 산에서 내려온 북한군에 의해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잘못하다간 북한군에 잡혀서 죽거나 굶어 죽을 것 같아 차라리 국군에 들어가서 그들과 싸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동네 친구 열여덟명과 함께 자원 입대했습니다."

박 회장은 고향인 전북 장수군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1사단에서 지급한 솜바지를 입고 위에는 교복에다 학생모를 쓴 채 군번도 없이 전투에 나섰다. 일주일만 교육받고 자신의 키만 한 총 한 자루를 질질 끌고 곧바로 투입된 첫 전쟁터는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 함께 전장에 투입됐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전우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북한군과 마주쳐 생사의 기로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던 것도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버거운 일상이었다.

"낮과 밤이 바뀌면 무수히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습니다. 아군과 적군의 시체를 밟고 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학도병 신분으로 11사단 13연대 1대대 2중대 수색소대에 배속돼 진격 때마다 가장 앞에 섰다.

"정상적으로 징집돼 온 이들은 전쟁에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 만한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학도병은 오히려 말을 잘 듣고 겁이 없다고 해서 힘든 전장에 많이 투입됐습니다. 말이 좋아 학도병이지 총알받이에 가까울 정도였지요. 무기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작동도 잘 안 되는 소총을 들고 전투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그는 국군 11사단이 전방으로 투입되기 직전까지 약 2년간 지리산과 덕유산 곳곳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목숨을 잃은 전우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했다. 박 회장은 친구 얘기가 나오자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수건만 적셨다. 자신은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했다. 하지만 70년이 지난 지금도 꿈속에서 전사한 친구를 만난다고 한다. 그런 날이면 낙동강만 하염없이 바라본다. 박 회장은 당시 계급도, 군번도 없었던 학도병이기에 정식 입대로 간주되지 않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방의 의무를 지기 위해 재입대해야만 했다.

"호국영웅 백선엽 장군은 자신의 과를 덮고도 남을 만큼 공이 큽니다. 그럼에도 최근 친일파로 매도되고 있어요. 6·25라는 말조차 사회로부터 냉대받는 지금의 세태가 더욱 가슴 아픕니다. 이런 세상이면 누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싸우겠습니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작심한 듯 참전용사들의 처우 개선에 대한 얘기도 꺼냈다.

"지금 생존자 중에는 병원에 누워 있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데 치료비를 국가에서 너무 적게 지원해 주다 보니 자비로 더 내야 합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까지 내건 참전용사의 수당이 일반 병사의 월급보다 못하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의 목소리는 분노에 가까운 성토로 떨리기까지 했다.

"2000년 참전용사 800여명이 모여 6·25참전유공자회 칠곡군지회를 결성했으나 현재 220여명만 생존해 있습니다. 그중 절반 이상이 거동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기껏 살아야 5년이니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것뿐입니다."

인터뷰를 마치는 순간 그의 눈가는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직도 눈앞에서 쓰러져간 친구를 떠올리면 그저 가슴이 먹먹하기만 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우리가 바라는 건 특별함이 아닌 합당한 예우를 해달라는 겁니다."

글·사진=마준영기자 mj3407@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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