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잘 들어야 한다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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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6-29 08:11  |  수정 2020-06-29 08:16  |  발행일 2020-06-29 제15면

'금강경' 제2분에서 수보리는 무상정등각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디에 마음을 머물러야 하는지 묻는다. 이에 붓다는 수보리에게 체청(諦聽)하라고 하고 설법을 시작한다. 여기서 체청이란 잘 들으라는 뜻이다. 잘 듣는다는 것은 어떻게 듣는 것일까? 잘 듣는다는 것은 수용성 안에서 듣는다는 뜻이다. 수용성 안에서 듣는다는 것은 완전히 복종하는 자세로 듣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잘 듣는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듣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로 영역을 나누고 있는 국어과 수업에서 잘 듣는 것은 '비판적' 듣기라고 말하고 있다. 비판적 듣기란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 그 말의 모순점이나 허점을 잘 분석하면서 들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상대방의 말을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한다.

'맹자'에 지언(知言)이라는 구절이 있다. 맹랑한 제자인 공손추(公孫丑)가 맹자에게 부동심(不動心)이 무엇인지 묻자 맹자는 부동심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말을 잘 알고(知言) 또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잘 기른다고 대답하였다. 말을 잘 아는 것을 맹자는 "편벽된 말(피辭)을 들으면 말하는 자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알며, 방탕한 말(淫辭)에는 무엇에 빠져 있는지를 알며, 사악한 말(邪辭)에는 무엇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는지를 알며, 숨기는 말(遁辭)에는 어떻게 궁한지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아마 국어과의 비판적 듣기를 염두에 둔 것이 바로 맹자의 지언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스승의 말을 잘 듣는 것은 국어과의 비판적 듣기나 맹자의 지언과는 다르다. 잘 듣는다는 것은 오직 듣는 일에만 집중해서 듣는 것이다. 듣는 행위 속에 결코 '나'가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불교를 포함한 전통교육의 핵심은 마음공부를 통한 진리의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공부란 제자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불분명하고 불투명한 것이다. 도대체 내 마음속에 있는 진리는 어떻게 탐구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지금 깨달은 것이 바로 그것인가 아닌가? 이러한 의문이 공부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일어날 것이다. 스승은 바로 이런 암중모색에 있어서 바로 안내자요 등불이다. 스승의 현존 바로 그 자체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 주고 또 그것이 달성 가능한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체청과 함께 학생의 자세에 '찬탄(讚歎), 권청(勸請), 수희(隨喜)'를 더하고 있다. 찬탄은 스승의 말씀이 끝나면 '아 좋은 말씀입니다' 하는 식으로 찬사를 보내는 것이고, 권청은 그 말에 이어 '한 말씀만 더 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것이며, 수희는 스승이 즐거워하면 따라서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에 대한 존경이다. 교육의 시작도 스승에 대한 존경(尊師)이고, 교육의 마지막도 스승에 대한 존경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배움에 힘쓰는 것은 스승을 존경함에 있고, 스승이 존경을 받으면 사람들이 스승의 말을 믿고 따르며, 스승의 도를 밝혀내게 된다. 그러므로 스승이 찾아가서 가르치거나(往敎), 스승을 불러서 배우거나(召師), 스스로를 낮추어 가르치거나(自卑), 스승을 낮추어 배우거나(卑師) 하는 것은 교육이 될 수 없다(孟夏紀, 勸學).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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