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영남일보 특별기획-2부-대구의 문화예술] (3) 대구음악발전의 전기가 된 6·25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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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09 07:49  |  수정 2020-07-09 07:57  |  발행일 2020-07-09 제18면
피란 도시로 몰려든 음악인들 동요·가곡·군가 명곡 쏟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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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원로 음악가 우종억 선생이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한 육군군악대의 1951년 어느 전장에서의 연주 모습. 그는 당시 트럼펫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KBS교향악단을 창단한 김인배(1932~2018)와 특히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제공〉

6·25전쟁은 한국인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주었다. 가난한 나라의 보잘것없는 사회적 기능마저 모두 앗아가 버린 전쟁 속에서 예술 활동은 생각도 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예술인들은 존재했고, 특히 피란 도시가 된 대구에는 중앙무대의 예술인들이 몰려들면서 각별한 '예술혼의 도시'가 되었다. 음악 분야도 마찬가지였고, 이들은 전쟁 상황 속에서도 음악 활동의 에너지를 분출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속에서도 피어난 예술혼 덕분에 전쟁 시기는 대구의 클래식 음악계가 한 단계 성장하는 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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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피란 와 대구에 정착해 음악활동을 주도한 하대응(위)과 이경희.

◆대구에 피란 온 유명 음악가들

전쟁 발발 후 낙동강 전선이 최후의 보루가 되면서 대구는 다행히 직접적인 피해를 면하고, 일시적으로 임시 수도가 되기도 했다. 그런 대구에는 당연히 유명 음악가들도 몰려들었다. 작곡가 김동진(1913~2009)·변훈(1926~2000)·권길상(1927~2015), 작곡가이자 성악가인 하대응(1914~1983)·권태호(1903~1972), 피아니스트 이경희(1916~2004)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중 하대응, 권태호, 이경희는 대구에 아예 정착해 전쟁 후에도 대구 음악인들과 함께 음악 활동을 하며 대구 음악계를 활성화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작곡가들은 '가고파'(김동진), '명태'(변훈), '꽃밭에서'(권길상) 등 명곡들을 많이 남겼는데, 대구 피란 생활을 하면서 탄생시킨 곡들도 적지 않다. '국민 동요'로 불리는 '꽃밭에서'는 권길상이 부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중 1952년 가족이 있는 대구에 왔다가 우연히 본 잡지 '소년세계'에 실린 어효선의 시 '꽃밭에서'를 읽은 후 영감을 얻어 작곡하게 되었다.

그는 "6·25전쟁통에 풀이 죽은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만든 이 동요가 그렇게 유명해질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성악가로 활동하다 귀국해 합창단 지휘자로 활동하며 뛰어난 편곡 능력을 보여주며 주목받던 하대응은 전쟁 중 대구로 피란했다가 정착했다.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 남산여고 음악교사를 지냈고, 1954년 효성여대에 부임해 1980년까지 재직했다. 1955년 대구음악가협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1959년에는 경북예술단체총연합회를 발족하는 등 대구지역 음악활동을 주도했다.


권길상, 어린이들에 희망 주려 '꽃밭에서' 만들어
클래식음악 터전 녹향에선 변훈 작곡 '명태' 탄생
군악대도 활발한 활동…교향악단 창단 밑거름 돼


권태호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일본에서 성악을 전공한 테너 가수다. 광복 직후 귀국, 경주와 대구에서 활동하다가 대구에 정착해 음악활동을 이어갔다.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국방부 정훈국 전문위원이 되어 '보병의 노래' '호국의 노래' '승리의 노래' 등 군가를 많이 작곡했다. 200여회의 독창회를 가진 그는 국내 처음으로 독일 가곡을 소개한 성악가로, 우리나라 초기 성악발전에 기여한 공이 크다.

이경희는 1942년부터 이화여대 음대에 재직한 한국 피아노계 1세대다. 대구에 정착하게 된 이경희는 1951년 9월 대구 피란학교와 남산여고 교사로 재직하게 되고, 1955년에는 효성여대에 부임해 1982년 정년 퇴임 때까지 피아노를 가르치며 후학들을 양성했다. 대구 피아노계의 대모로 불리며 대구 음악의 토대를 튼실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명곡 '명태'가 탄생한 음악감상실 '녹향'

전쟁 중에도 대구의 클래식 음악이 성장·발전하는 터전이 된 대표적 공간으로 음악감상실 '녹향'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녹향은 1946년 클래식 음악을 사랑했던 이창수(1921~2011)가 클래식 음악 동호인들의 음악감상 공간으로 향촌동의 자택 지하에 마련, 문을 열면서 시작됐다. 녹향은 전쟁기에 음악가를 포함한 예술가들이 찾는 명소로 사랑을 받았다. 작곡가 김동진, 시인 유치환·신동집·양명문, 화가 이중섭, 소설가 최정희 등 당대 최고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다. 이곳을 찾은 예술가들은 음악을 감상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이중섭을 비롯한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고, 시인들은 시를 쓰기도 했다.

당시 유명한 시인이었던 양명문이 쓴 시 '명태'도 이곳에서 탄생했다. 이 시에 변훈이 곡을 붙였다. 변훈은 대학 재학 중 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연락장교로 복무 중, 미8군 통역관으로 근무하면서 녹향에 드나들다가 이곳에 자주 드나들던 양명문을 만나고, 그에게서 시를 받아 '명태'를 작곡했다. 세상살이의 애환을 가난한 시인의 술안주가 되어버린 명태에 빗댄 이 노래는 베이스 오현명과 윤치호가 불러 유명해졌다.

변훈은 양명문의 시에 곡을 붙인 '명태' '낙동강' '떠나가는 배'를 비롯해 70여 곡의 가곡을 남겼다.

◆대구 음악발전 촉매가 된 군악대

전쟁 발발 후 잇따라 창단된 군악대들이 대구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군악대는 대구 음악활동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육군군악대, 공군군악대, 국방경비대 군악대 등이 창단되면서 대구의 많은 관악기 연주 학생과 음악 전공자들이 군악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들 중에는 군악대 생활을 통해 뛰어난 음악가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발전시킨 이들도 적지 않았다.

대구에서 전쟁 직후부터 대구의 교향악 토대를 다진 대구시립교향악단 초대 지휘자 이기홍(1926~2018)은 전쟁 중 군악대에서 작곡과 지휘의 기초를 배웠다. 이기홍은 1950년 서울대를 졸업하던 해 서울교향악단에 입단했으나 곧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전쟁을 피해 대구로 내려와 있다가 거리 모병으로 입대해 전공이 음악이라 밝히고 해군 정훈음악대로 배치받았다. 그는 정훈음악대에서 지휘자로 활동하던 김성태 서울대 교수를 만나면서 작곡과 지휘에 대한 기초 지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해군 정훈음악대가 서울시향을 인수하면서 당시 지휘자 김생려와 악장 김민종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후 그는 1957년 대구 최초의 현악 합주단체인 대구현악회를 창단하고, 이후 대구교향악단과 대구방송교향악단을 거쳐 1964년 대구시립교향악단 창단을 이끌어 냈다.

대구시향 제2대 지휘자이자 작곡가인 우종억(1931~)도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50년 육군 군악대에 들어갔다. 1951년부터 1955년까지의 군악대 시절은 그의 음악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군악대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하며 이재옥(전 서울대 교수), 전봉초(전 서울대 교수), 양재표(전 KBS교향악단 첼로 수석), 이재헌(전 KBS교향악단 단원), 김인배(트럼펫 연주자·작곡가) 등 많은 음악가와 함께 생활했다.

군악대 활동을 하면서 단원 중 화성악을 공부한 사람을 찾아 틈틈이 화성법을 배운 결과, 군 생활 중 행진곡 '푸른 날개'를 작곡할 수 있었다. 우종억은 군 시절 자신이 창작한 곡이 무대에서 객석으로 울려 퍼질 때의 감동이 평생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고 했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57년에는 대구시립교향악단의 전신인 대구교향악단 창단 멤버가 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이상에서 보듯이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는 전쟁은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대구의 음악 토대를 튼튼하게 하고 발전시키는 전기가 되기도 했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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