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 칼럼] 언론, 검찰, 종교

  •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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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10   |  발행일 2020-07-10 제23면   |  수정 20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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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장

언론과 검찰, 종교. 따져보니 공통점이 적잖다. 첫째,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정의의 심판자, 진리의 수호자, 사회의 목탁으로서 공동체를 감시하며 의(義)와 불의(不義)를 판별한다. 공동체의 건강성을 지키는 선한 집행자. 엄중한 책무다. 인간의 한계와 진실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이들에게 그런 '절대반지'를 줬다. 둘째, 독립성과 자유가 유난히 강조되는 영역이다. 공적 의무와 역할의 숭고함 때문이리라. 우리는 다양한 형식의 훈육을 통해 이들을 향한 존중과 순복(馴服)을 체화해 왔다.

셋째, 심판자 최고의 덕목은 공의(公義)다. 공평과 정의.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 사사로운 감정의 개입도 안 된다. 오직 진실과 정의의 편이다. 이 덕목을 지킬 때만 진정 언론이고, 검찰이고, 종교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비'고 '삯꾼'이다. 굶주린 하이에나로도 둔갑한다. 넷째, 그 예리한 칼을 잘못 쓰면 사람과 공동체를 궤멸시킨다. 익숙함에 순치돼 날 선 칼 마구 휘둘러선 안 된다. '보편적 가치'를 떠나 '내 편이 누구인가'를 묻는 순간, 정의의 칼은 흉기로 변한다. 사회가 '심판자'의 권위를 준 것은 그가 공의롭다는 전제에서다. 공정하지 않으면 그 권위를 박탈하는 게 당연하다. 지킬 가치 없는 자유는 보호할 가치 없다.

다섯째, 이들의 독립성과 자유에 심각한 회의(懷疑)가 시작됐다. 이들이 누려온 무오류(無誤謬)의 높은 성곽이 무너지고 있다. 이유는 신뢰의 상실. 존경심도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지탄받는 사회집단의 첫손가락에 꼽힌다. 깨어있는 이성(理性)이 거대한 우상(偶像)을 깨기 시작했다. 시대 흐름이다. 이 흐름을 자각하지 못하는 듯하다. 스스로 어두워진 탓이다. '심판자'에 대한 불신은 그 어떤 불만 이상의 불만을 낳는다.

일차적 책임은 정치에 있다. 정치가 오염시켰다. 오염된 언론, 검찰, 종교계에는 정체를 숨긴 진짜 프로들이 득실댄다. 이들이 자신의 프레임으로 사이비 진실을 만들고 있다. 만들어진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

종교계부터 보자. 교회·성당·절에 유력 정치인의 자칭 '구루(guru)'가 수두룩하다. 정치에 오염된 종교집단은 안팎으로 싸운다. 돈과 자리, 권력을 향한 탐욕의 썩은 내가 진동한다. 성직자들이 앞장선다. 자신 탓인 줄 모르고 신자와 국민을 꾸짖는다. 나무라고 가르치려는 게 몸에 밴 이들이다. 신앙이 이념과 결합하면 참으로 위험하다. 심각한 '그루밍(Grooming) 폭력'을 낳는다. 강단(講壇)에서 매일 일어나는 폭력이다.

검찰총수가 특정진영의 대선후보 선호도 1위가 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자의든 타의든 정상적이지 않다. '오염된 검찰'을 이보다 확실히 보여주는 게 어딨나. 모든 정치적 논쟁의 한복판에 선 검찰, 그 자리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언론의 푯대는 정론직필. 작금 직필(直筆)은 정론(正論)의 도구가 아니다. 흉기다. '밤의 대통령'은 온전히 건재하다. 이를 흉내 내는 이·삼류 사이비는 길에 차일 정도다. '기레기'라 불린 지 오래지만, 자정(自淨) 의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감시하는 자가 감시받는 처지로 전락했다. 서글프다. 어찌 신뢰와 권위를 회복하려는가.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에 저울, 다른 한 손에 칼을 쥐었다. 그리고 두 눈은 가렸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공평무사한 자세. 우리 시대 언론과 검찰, 종교의 사표(師表)다. 대체 디케의 저울과 칼은 어디다 내버렸나. 부릅뜬 두 눈으로는 무엇을 그리 탐닉하고 있나.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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