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가천면 포천구곡에 이원조 선생 기리는 철비

  • 김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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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22   |  발행일 2020-07-22 제13면   |  수정 2020-07-22
경북도 문화재자료 만귀정
이원조 선생 여생 보냈던 곳
후학이 뜻 기리고자 비 세워

철비
성주 포천구곡의 끝자락에 위치한 만귀정에 세워진 철비.

경북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 교동 마을에서 갈골마을로 가는 도로 중간쯤 산림정화 구역인 포천구곡의 끝자락. 경북도 문화재자료 제462호인 만귀정이 있다. 응와 이원조 선생이 철종 2년 만년에 귀향해 독서와 자연을 벗 삼아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이곳에는 특이한 비석이 있다. '고판서응와이선생흥학창선비((故判書凝窩李先生興學倡善碑)'라고 새겨진 철비다. 이 철비는 응와 이원조 선생의 학문과 인품을 기리고자 선생이 죽은 뒤 후학들이 철로 만들어 세웠다.

평삼문 마당 끝 커다란 자연석 바위를 받침대로 그 위에 세워진 비는 비신과 비두로 구성되었다. 비신의 길이는 80㎝ 너비 30㎝ 두께 2.5㎝ 비두 높이는 25㎝, 너비40㎝ 두께 4㎝다. 비두 앞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태극문이 새겨졌다. 뒷면에 '전몽연헌 십이월 일 (蒙淵獻 十二月 日)'이라고 새겨진 글은 고갑자 표기법으로 연도를 적어놓은 것이 특이하다.

보통 비는 비신 받침대에는 귀부(龜趺)가 마련되고 비신 상부에는 이수(리首)가 조각된다. 비신 상부에 용의 형상을 조각한 이수를 갖춘 것은 비의 품격을 높이고 장엄하게 보이게 함이다. 특정한 사실을 담고 있는 비신이 이룡의 수호로 파손되지 않고 오래도록 후대에 계승되리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만귀정에 세워진 것과 같은 철비는 1600년대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 많이 만들어졌다. 철은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공덕비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세웠다. 동양 사상에서는 악한 것을 물리치고 지기(地氣)가 강한 곳을 누른다는 풍수의 목적으로 사용했다.

부의 상징이었고 더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조상들이 세운 철비는 일본이 공출이라는 이름으로 민가에 있던 놋쇠 그릇과 숟가락까지 강탈해 갔던 시절과 6·25이후 어렵던 시절에는 고물상의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앞서간 조상들이 알았으면 철비를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난의 시대를 이겨내고 우리 앞에 당당히 서 있는 철비는 전국 23개 지역에서 50여 기 정도 확인되고 있어 가치면에서 희소성이 있다.

사람의 왕래가 뜸한 곳에 비바람에 노출돼 녹이 슬고 퇴색되어 가는 철비. 비각을 세워 보호해 주고 후손들에게 온전히 전수할 책임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싶다.

글·사진=김점순 시민기자 coffee-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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