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숙의 실과 바늘 이야기] 한복으로 지켜가야 할 정신문화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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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14   |  발행일 2020-08-14 제38면   |  수정 2020-08-14
장롱 속 곱게 개어둔 저고리·단속곳에 켜켜이 쌓인 할머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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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홍화염 모시겹저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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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세모시 명주 단속곳

어디서 달라붙은 것일까? 남색 원피스에 붙은 분홍색 실오라기가 도무지 떨어지지를 않는다. 떼어 냈다 싶으면 어디선가 또 붙는다. 끈질기게 따라붙는 실오라기처럼 오늘도 마음 자락을 따라다니는 것이 있다. 매주 방문하는 주간보호센터의 어르신들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분들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박물관협회가 주관하는 '길 위의 인문학' 사업의 일환으로 '어르신들을 위한 박물관 학교'의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다. 교육내용은 '바느질 놀이'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버선을 만들면서 '베틀가'를 부르기도 하고, 조각천을 이어붙이면서 보자기에 얽힌 추억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오늘도 선생님들이 체험할 재료와 유물들을 양손 가득히 들고 들어서면 책상 앞에서 조용히 기다리시던 어르신들의 눈빛이 일순간 반짝인다.

그중에서도 여름이어서인지 유난히 눈길이 가는 분이 있었다. 흰색 모시저고리를 허리까지 편안하게 내려오게 입고 동정은 흰색 인견으로 달아 깔끔하고 단정해 보였다. 잠시 동안 옥색 세모시 저고리에 흰색 겹모시 치마를 입던 어릴 적에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과 겹쳐졌다. 작은 지갑은 겨드랑이에 낀 듯 든 듯 살포시 잡고 더위를 피할 양산까지 잊지 않으셨다. 자연염색으로 낸 옥색은 한 잔의 찻물처럼 마음을 맑게 해주는 묘한 기운이 있다. 지금쯤 한여름의 밭에서 무릎 높이로 자란 쪽을 베어 짓이겨서 색을 내는 생쪽염은 물이 찰수록 맑은 색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동네의 우물 중에도 유난히 차서 쪽 염색을 할 수 있었던 우물에는 '쪽샘'이라고 이름이 붙어있다. 아마도 오늘 수업이 있는 날이어서 아침부터 바쁘게 차려입은 것일 테다. 어머니가 잔칫날 차려입고 나섰던 것처럼….

시집올 때 고이 만들어 가져온
계절별로 마련한 속속곳·버선
밖으로 보일라 보자기에 싸매
정교한 깨끼 바느질 고운 자태

소중한 옛산물 버려지는 현실
한복기증 운동 마련 각고 노력
동정과 고름, 민족 공동의 미감
전문교육·보존·연구 힘 모아야


어르신들은 고요한 호수에 조약돌처럼 던져진 선생님들의 질문을 따라 깊은 강물 같은 바닥에 깔려 있던 기억들을 하나둘씩 끄집어낸다. "어무이예, 첫날밤 버선은 누가 벗겨 주었어예?" 선생님의 질문과 함께 버선 향낭의 재료를 받아서 꺼내는 즉시 이야기가 이어진다. "내가 시집올 때 버선 10켤레, 단속곳과 속속곳을 계절별로 10개씩 만들어 가지고 왔지. 입을 일이 드물어 한 개씩 나누어주고 지금 장롱에는 몇 개 없다. 내 죽으면 다 버려질 텐데 걱정이다." 그랬다. 내내 실오라기처럼 따라붙은 생각의 실마리는 이제 장롱 속에서 나와 빛을 보지도 못하고 고인의 관이나 채우는 용도로 사용되거나 혹은 불로 산화될 저 옷들이다. 더구나 한복의 속옷들은 쉽사리 만나기가 어렵다.

우리의 한복에는 속옷이 매우 중요하다. 겉치마를 풍성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무지기치마'라고 하는 속치마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속옷은 일상적으로 늘 사용하던 것이어서 많이 상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내밀하게 사용하던 옷들을 쉽게 밖으로 내보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두 개의 보자기에 가득 쌓인 속옷을 만났다. 평소에 한복 속옷 유물을 구하려고 했던 것을 잊지 않았던 지인이 경매장에서 사서 보내온 것이다. 오랜 세월 장롱 속에 들어있다가 이제 막 나온 그대로였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곰팡이마저 군데군데 핀 옥양목 속곳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말끔한 것도 적지 않았다. 유물을 판 사람의 인적사항을 알 수 있어서 그 한복들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귀한 자료들이었다. 세모시에 비단을 덧댄 보기 드문 단속곳도 나왔다. 깨끼바느질의 고운 자태가 그대로 남은 옷이었다. 펼쳐보니 힘차고 당당한 직선과 부드럽게 올려진 곡선의 평면들이 한눈에 드러났다. 정교하고 강렬한 느낌이 참으로 아름답다. 다행스럽게 이처럼 건져지는 옷들이 있는가 하면 대개는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2015년부터 '한복 기증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운동의 의미와 참여에 대한 공감대가 널리 형성되지는 못한 것 같다. 어르신들의 이야기 속에는 곱게 보관해 둔 한복들을 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짐이 되기도 하는 속내를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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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쪽염 모시저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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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기에 가득 쌓인 옷들.

7월22일 안동과 상주를 오가며 상주 '한복진흥원' 한복 자문위원회의가 열렸다. 열다섯 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과의 첫 만남이었고 한복의 발전 방향과 향후 사업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스크린에 보이는 한복진흥원 건물의 조감도를 보면 산맥의 중심에서 가지처럼 뻗어나온 불꽃처럼 보인다. 산의 한 자락에서 둥근 곡선으로 맴돌다 밖으로 뻗어간 한복 동정의 끝처럼 맺혀 마무리된 그 조형물은 감동적이었다. 그렇다. 한복이라고 하는 것은 민족공동의 환상성이 있는 소중한 산물이다. 그 옷은 다양한 예술적 아름다움과 철학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어 우리의 소중한 정신문화의 대표적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그 정신문화의 불꽃 하나가 긴 시간의 산고 끝에 당당히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누에 같은 형태라거나 뱀이 똬리를 튼 형태라고 하는 말로는 이 한복진흥원 건물의 외형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한 민족의 정신의 구심점으로서의 한복진흥의 불꽃이 되고자 하는 것이 그 공간의 의미이다. 공간의 동선은 끝없이 순환하는 구조로 이어진다. 생(生)의 공간인 셈이다.

1999년 10월5일, 북한 공업종합출판사가 발행한 '아름다운 조선옷'이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자들의 저고리에서 동정과 고름을 놓고 보아도 흰색 동정은 얼굴을 돋보이게 하면서도 산뜻한 흰색으로 목을 감돌아 내려오다가 맵시 있게 사귀어진다. 목을 감돌아 내려와 삼각으로 맺히는 것은 함축되는 느낌도 주고 옷 전체를 명료한 세부로 결속하는 듯한 느낌도 주고 있다." 한복에 있어서만은 민족 공동의 미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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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

가시적인 것이 아니라 진정한 정신을 담아내는 한복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과정이 필수적이다. 즉 다양한 생애주기별로 한복을 소비하는 형태는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고려한 대한민국의 한복진흥원이 되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과정도 다각화해야 한다. 한복장인을 양성하는 일뿐 아니라 한복을 중심으로 한 전통문화 전반에 대한 교육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버려지는 한복을 한 벌 한 벌 모으고 한복 관련 각종 도서와 자료를 모으고 이를 체계화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한복전시나 패션쇼와는 달리 성과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복진흥의 기반을 다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여기에 더해 원재료의 보존과 연구에도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상주의 비단, 안동의 안동포, 영천 등지의 천연염색, 영주의 인견 등과 함께 대구의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한복산업과 섬유기술도 빠질 수 없을 것이다. 대구와 경북도 한복진흥을 위해서는 떨어질 수 없는 공동체인 것이다. 어느새 고요하던 어르신들의 공간에 자잘한 파문을 일으키고 우리는 썰물처럼 빠져나왔다. 지금 하지 않는다면 한복과 함께한 삶의 이야기들을 더는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경숙 박물관 수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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