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고통을 낭비하지 마라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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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10 08:02  |  수정 2020-08-10 08:04  |  발행일 2020-08-10 제15면

모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다(히브리서 11:2). 만일 누가 어떤 사물에서 그것을 있게 한 '사물 아닌 것'을 본다면 그는 바로 하느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모든 자아는 눈에 보이는 형상이다. 즉 나라고 하는 상(我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부처와 예수는 아상이 없다. 이처럼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근본(根本)이고 눈에 보이는 형상은 지말(枝末)이다. 그럼에도 이집트를 탈출한 고대 히브리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버려두고 눈에 보이는 우상을 숭배했듯이, 우리는 근본을 두고 지말에만 매달린다. 우리의 교육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수능 철이 되면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뛰어내린다. 그러면 많은 교육전문가가 방송에 나와 입시제도가 아이들을 죽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말은 근본에서 벗어났다. 입시제도가 아이들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패에 반응하는 방식이 아이들을 죽이는 것이다. 시험의 실패는 눈에 보이는 것이고, 실패에 반응하는 방식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우리가 겪는 일의 성격보다 그것들을 인식하고 대처하는 우리의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 그것이 근본이다.

실패에 반응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한 가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 그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은 얼마나 실망하실까? 내 친구들은 실패한 나를 어떻게 볼까? 세상 사람들은 실패자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내용이다. 우리는 아이들의 머리와 몸에 배도록 이러한 프로그램을 가르쳐 습관적 사고방식으로 만든다. 실패에 반응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이런 실패에 따른 괴로움이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간파하고, 실패에 대한 자신의 반응 방식이 자신을 괴롭힌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때 실패는 오히려 성장의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현대 교육은 아이들에게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북소리에 맞춰 행진할 것을 주입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학교에서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아이들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이런 교육을 통해 아이들은 세상을 얻는 대신 자신의 영혼을 잃는다. 앤소니 드 멜로 신부는 남의 북소리에 맞춰 행진하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관광객들이 버스로 아름다운 시골길을 달리고 있다. 하지만 창문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누가 상석에 앉을 것인지, 누가 최고인지, 누가 예쁘고 누가 재능이 많은지를 겨루는데 온통 정신이 팔려있다. 아무래도 그런 식으로 여행을 마칠 것 같다. 당신이 지금 그 관광객들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자유다. 그리고 마침내 무엇이 영성인지를 이해할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원인이 없다. 어느 누구도, 어떤 일도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할 때 그때 아이들은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즐거운 경험은 삶을 즐겁게 한다. 고통스러운 경험들은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통증이 있는 자리가 우리 몸의 어느 부위에 문제가 있는지를 가리키듯 고통은 우리에게 무엇이 어디에서 잘못됐는지, 어느 부분이 아직 성숙하지 못했는지를 가르쳐준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통의 어느 하나라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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