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윤석열'의 길

  • 이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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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11   |  발행일 2020-08-11 제26면   |  수정 2020-08-11
부당한 인사에 항의하면서
사표 던지는 것은 답이 아냐
난마처럼 얽혀버린 상황이
그를 정치판으로 이끌 수도
어떤 새로운 장 열릴지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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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 논설위원

윤석열 검찰총장이 박근혜정부 당시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팀장으로 일하다 정권과 갈등을 겪은 끝에 한직으로 밀려나 있던 시절, 먼발치에서 두어 번 그를 본 적이 있다. 한번은 단출하게 동료 한 명과 함께 약간 늦은 점심을 하러 온 서울의 한 냉면 집에서였고, 다른 한 번은 대구행 기차간이었다. 인사가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항의하는 모습을 보인 뒤 사표를 내는 것이 일반화되어 온 검찰 조직 문화 속에서 윤 총장은 '굴욕'을 견뎌내는 중이었다. 암울한 시기를 견디어 낸 그는 주지하다시피 문재인정부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이른바 '적폐 수사'를 이끌었고, 그 공로로 검찰총장으로 직행했다.

그런 윤 총장이 문재인정부에서 다시 '견디는' 시간을 갖고 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11일자로 취임 후 두 번째로 단행한 검찰 고위간부 인사에서 '친정부' 성향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인사들이 대거 핵심 보직에 발탁됐다. 반면 윤 총장이 추천한 인사는 모두 승진에서 배제됐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윤석열 사단 대학살'이라 명명됐던 지난 1월 검사장 인사를 넘어 '아예 전멸됐다'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윤 총장을 보좌한 대검 참모진 대부분은 6개월 만에 교체됐다. 대검 참모진이 단기간에 교체되는 건 이례적이라고 한다. 또 눈에 띄는 것은 '검찰 4대 요직'으로 불리는 서울중앙지검장, 법무부 검찰국장, 대검 반부패강력부장, 대검 공공수사부장을 지난해 1월에 이어 이번에도 호남이 독식했다. 앞서 총선 직후 임명된 법무차관도 호남이다. 전국 최대 규모 검찰청인 서울중앙지검에 새로 보임된 차·부장급 중간 간부 인사에서 '호남 편중'이 도드라진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호남의 요직 독식이 호남 출신이 보기에도 지나쳤던 모양이다. 광주출신인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는 "영남은 아무리 권력을 독점해도 어느 정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지킨다는 느낌이었다. 호남은 그마저도 없다"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런데 필자는 검찰 인사를 보면서 두 가지 점에서 '윤석열의 길'을 생각해보게 된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취임하고 난 뒤 단행된 1월 인사에서 이른바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한 검사들이 좌천되거나 승진하지 못했다. 그중 일부는 검사복을 벗어던졌다. 이번 8월 인사와 관련해서도 앞으로 줄사표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부당한 인사에 항의하며 사표를 던지는 모습이 '쿨' 하게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답'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화나고 굴욕스러운 시간을 견디어 낸 '윤석열의 여정'을 되새겨보면 어떨까.

다른 하나의 '윤석열 길'은 초미의 관심사인 그의 대권 도전 여부와 관련해서다. 지난 3일 신임 검사 신고식에서 꺼낸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쓴 독재와 전체주의 배격' 발언은 윤 총장의 정치입문 가능성에 대한 야권 지지자들의 기대를 한층 키우고 있다. 사실 필자는 그동안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한 사람은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대통령감으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또 과거를 단죄하는 데 익숙한 사람보다는 미래지향적이고 유연하게 협상할 줄 아는 정치인이 리더로 나서는 것이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천생 검사'인 윤 총장은 대권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윤 총장 스스로 여의도와 명확히 선을 긋겠다는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난마처럼 얽힌 상황이 그를 정치판으로 이끌 수 있다. 그리고 정치인이 된 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해 우리 앞에 서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보여주었던 집념이 강한 모습은 충분히 그 광경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 이번 추미애 장관의 검찰 인사가 그것을 촉발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가까워지고 있는 '윤석열의 선택'이 우리 역사에 또 어떤 장을 열게 될지 주목된다.
이영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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