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0주년 영남일보 특별기획-2부-대구의 문화예술] (8) 지워지지 않는 기억, 그 시절의 영화

  • 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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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13 07:46  |  수정 2020-08-13 08:06  |  발행일 2020-08-13 제18면
한국영화 초창기 '중심 무대' 대구…피란민의 휴식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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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민경식 감독이 피란 중 대구를 배경으로 민초의 삶을 그린 영화 '태양의 거리'. 1950~1953년 6·25전쟁 중 제작된 극영화 14편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품이다. <한국영상박물관 제공>

영화는 연극과 함께 6·25 전쟁통 속에서도 인기를 얻은 예술 분야였다. 카메라 한 대 갖지 못하고 맨손으로 피란 온 영화인들은 각 군에 설치된 촬영대에서 종군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마저 상황이 어렵게 되자 영화인 중 일부는 연극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도 했다. 그러다 차츰 영화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게 됐다. 전쟁이라는 사회 불안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그 아픔을 잠시나마 달래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이들이 늘어났던 것이다.

◆육군중앙극장과 가설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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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사용되던 16㎜ 영화촬영기. <한국영상박물관 제공>

육군중앙극장은 전쟁통에서 영화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2군사령부 정훈부에서 대구공회당(대구시민회관 대강당, 현 콘서트하우스)을 인수해 영화관으로 사용했다. 전쟁의 고통에 찌든 시민들을 위한 값싼 싸구려 극장으로 누구라도 쉽게 영화 감상을 할 수 있도록 대민봉사를 했다. 오후 7시 1일 1회 상영을 원칙으로 했다. 시민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저녁 식사를 서두르고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이곳에서는 미군 부대에서 빌려온 16㎜ 외국 영화 필름으로 '변사'가 등장하는 영화가 상영됐다. 변사는 무성영화 해설자로, 그의 역량에 따라 객석은 웃음바다나 눈물바다가 되기도 했고, 공포나 감동의 도가니에 빠지기도 했다. 변사는 인기 절정의 연기자로 영화의 흐름을 주도했다. 당시 상영됐던 영화는 '애수' '역마차' '반역자' '아파치강의 요새' '쿼바디스' '서부전선 이상 없다' '대장 부리바' '검사와 여선생' 등이 있다. 대구에 유명했던 변사는 박칠성, 김해수 등이 있었다.

1950년대 당시 영화 스태프로 활동했던 김대한 전 대구영화인협회장은 "당시 미 8군에서 몰래 필름을 가져와 상영, 때에 따라서는 대구의 극장 개봉보다 빠르기도 해 인기를 끌었다"고 말했다.

민초 삶 그린 '태양의 거리' 흥행
'황진이''춘향전''미망인'도 개봉
나운규·이규환 등 실력파 감독
대구 활동…韓 영화 중흥 견인


1950년대를 전후해 강변 넓은 곳에 하얀 포장이 쳐지며 차려진 가설극장도 피란 시절 인기를 누렸다. 영사 기사가 스피커를 통해 가설극장이 왔다고 선전하면 전쟁으로 지친 사람들의 마음은 들썩들썩했다. 20여 리 멀리 퍼져 나간 스피커 소리에 처녀·총각과 가족들이 가설극장 쪽으로 삼삼오오 줄지어 모여들어 영화를 봤다. 어떤 영화는 너무 낡아서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필름이 끊어지면 야유가 터져 나오고 환불 소동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가설극장은 현 중구청 자리에 있던 공설운동장, 남문시장 공터 등에서 운영됐으며, 가난했던 그 시절 서민들의 하루 피로를 잊게 하고 삶의 활력을 안겨준 고마운 존재였다.

◆대구에서 영화제작 활발

대구 영화는 전쟁 속에 꽃피우며, 힘들었던 전쟁통에서 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톡톡히 했다.

대구에서 영화제작도 활발해졌다.

1952년 민경식 감독이 피란 중 대구를 배경으로 민초의 삶을 그린 영화 '태양의 거리'(박암·전택이 주연)를 만들어 흥행을 거뒀다. 태양의 거리는 대구 자유극장이 제작한 작품으로, 자유극장에서 간판 그림을 그렸던 대구 토박이인 민 감독의 데뷔작이다. 6·25전쟁으로 어려웠던 시대, 불량아들이 판을 치고 있는 어느 피란 마을에서 초등학교 훈육 주임 선생이 그 불량아를 선도해 밝고 명랑한 거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영화 내용이다. 박암·전택이가 주연을 맡았다. 6·25전쟁 중 제작된 극영화 14편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작품으로, 2013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필름을 수집해 디지털 상영본을 제작했으며, 향촌문화관에서 영화 관람이 가능하다.

또한 일본에서 영화 수업을 받고 돌아온 이규환 감독은 이민, 최훈과 손잡고 1955년 가창(냉천)에 당시로는 보기 드문 대형 촬영소를 세우고 '춘향전'(이민·조미령 주연)을 제작했다. 이 영화는 관객들의 취향을 영화로 흡수하는 데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200만명 정도였는데, 서울 개봉관 한 곳에서 1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대흥행으로 영화계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여주인공인 조미령은 이 영화 한 편으로 일약 스타가 됐다.

1957년 대구에서 사진관을 경영하던 업자들끼리 모여 만든 영화도 있다. 대구 출신 조긍하 감독의 '황진이'(김웅·도금봉 주연)다. 대신동에서 조광사진관을 운영하던 조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경상감영공원 앞에서 경우사진관을 경영하던 박재학이 제작, 변종건(변종하 화백의 형)이 기획을 담당했다. 여자 주연배우로는 대구대학(영남대 전신) 개교 기념 연극 '개골산'에 출연했던 도금봉을 스카우트했다. 도금봉은 미모와 타고난 연기력으로 이후 한국영화계에서 오래 이름이 높았다.

1955년 3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감독인 향토 출신 박남옥이 감독한 영화 '미망인'이 개봉돼 주목을 받았다.

달성공원에서 촬영했던 윤애담 감독의 '산적의 딸'(오소화·나일 주연)도 있다. 제작 과정에서 말 타고 달리는 장면은 대구기마경찰대 경찰들이 주연 배우 의상을 입고 촬영했고, 실제 배우는 사과 상자 위에서 말 타고 달리는 흉내만 내 촬영했다. 그 외에도 손전 감독의 '쌍무지개 뜨는 언덕' 등이 대구 영화의 맥을 이었다.

김대한 전 대구영화인협회장은 "대구는 한국영화 초창기(1920~50년) 지대한 공헌을 한 영화도시였다. 나운규, 이규환 등 실력파 감독들이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영화 중흥을 견인했고, 6·25전쟁을 전후로 양철, 신경균, 손전, 민경식, 조긍하, 윤애담 등 지역 영화인들이 우리나라 영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인들조차 대구를 영화의 불모지라 인식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면서 이 사실을 꼭 알려달라고 말했다. 이어 "대구시와 구청 등 행정기관이 앞장서 가창에 이규환 감독의 기념비를 세우는 등 많은 사람들에게 대구가 '한국 영화의 중심 무대'였다는 것을 알려줬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박주희기자 jh@yeongnam.com
공동기획 :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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