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달서책사랑 전국주부수필공모전] 대상作 '아버지의 책 상자'

  • 노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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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20 08:06  |  수정 2020-08-20 16:16  |  발행일 2020-08-20 제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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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아버지를 '기마이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산동네 판자촌에서 드물게 대학 나온 사람인 데다 인물도 훤했다. 동네 찻집 마담과 선술집 젊은 과부는 아버지만 보면 분내 묻은 눈웃음을 흘렸다. 동네 한량들이 걸쭉한 술판을 벌이는 날이면 아버지는 '왕년에 내가 말이야'를 외치며 허세를 부렸다. 그날 술값은 으레 아버지 이름으로 외상 장부에 기재되고 외상값을 갚는 일은 오롯이 엄마 몫이었다.

거듭된 사업 실패로 경제 의욕을 상실한 아버지 대신 엄마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엄마는 바람 빠진 공처럼 쪼그라드는 살림살이를 붙잡고 허우적대면서도 욕을 하거나 큰 소리로 싸우는 일이 없었다. 한 달에 두어 번 아버지 외상값 받으러 온 여인네들과도 말을 길게 섞지 않았다. 커피값과 술값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졌으리라 의심하면서도 땀에 전 전대를 풀어 그네들이 요구하는 금액을 순순히 내주었다. 그런 엄마가 실성한 사람처럼 아버지에게 악다구니를 했다. 작은 트럭에 실려 온 책 상자가 좁은 마당에 가득 부려졌다. 아버지가 길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책 구매 계약서에 집주소를 적어 주었단다. 그 사람이 책 수십 상자를 우리 집에 부려놓고 수수료를 챙겨 잠적한 것이다. 아이들 볼 책 몇 권만 가져오라 했다는 아버지의 옹색한 변명을 엄마는 믿지 않았다. 분명 앞뒤 없이 소용될 만큼 알아서 가져오라 기마이를 썼으리라 짐작했다.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꺼이꺼이 울었다. 그동안 쌓인 울분이 활화산 마그마처럼 한꺼번에 터졌다. 책 도로 갖다주라고 아버지를 닦달했지만 그 사람의 주소도 연락처도 몰랐다. 출판사와 판매 대리점을 찾아가 하소연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애면글면하는 엄마에 대한 연민보다 책 상자를 향한 호기심이 더 컸다. 나와 동생들은 처음 보는 열매를 발견한 다람쥐처럼 책 상자 주위를 맴돌았다.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한국의 역사' '한국단편소설집' '학습백과사전' 등 상자 겉면에 적힌 책 제목을 큰 소리로 읽었다. 우리들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엄마가 책 상자들을 처마 밑으로 옮겼다. 책값은 최소 금액으로 최장 기간 할부로 갚기로 타협을 했다지만 문제는 책을 둘 자리였다. 단칸방은 여섯 식구 눕기도 비좁았다. 연탄 창고 옆에 납작한 나무 상자를 깔고 책 상자를 차곡차곡 쟁였다. 커다란 천막 비닐을 덮어 책이 젖지 않도록 방수를 했다.

이사할 때마다 사람들 발길에 차이는 천덕꾸러기였다. 품이 너른 집으로 이사를 해도 여전히 처마 밑이나 창고 옆에서 노숙하는 신세였다. 책값 갚느라 오지게 고생하는 엄마의 분풀이 상대였다. 아버지 대신 골목길에 내동댕이쳐지는 봉변도 여러 번 당했다. 그럼에도 그 책들은 예순 고개 겨우 넘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보다 몇 년 더 우리 곁에 눌러살았다.

집에 있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관심이 없고, 먹고 사는 일이 바쁜 엄마는 새벽부터 집을 비웠다. 울도 담도 허술한 집에 남겨진 우리 4남매는 유년의 대부분을 책과 뒹굴며 보냈다. 책들이 어른들의 빈자리를 대신했다. 어린 동생들 무릎에 앉혀 한글을 가르쳤다. 산동네가 세상의 전부인 아이들에게 넓은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험한 세상 발 헛딛지 않는 지혜도 가르쳤다. 잡초처럼 웃자라거나 어긋나지 않도록 절제와 인내를 가르쳤다. 백일장에서 장원한 날, 시험 만점 맞은 날, 우등상 받은 날, 시험 합격한 날의 기쁨도 함께했다. 자식을 키우며 부모들이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까지 책들이 함께 누렸다.

산동네가 재개발되어 환골탈태를 거듭했다. 하지만 우리 집 책 상자들은 새 아파트에 입주하지 못했다. 오랜 노숙 생활로 노화가 빨랐다. 책 갈피갈피 저승꽃 같은 얼룩이 생겼다. 4남매의 손때 묻은 모서리는 너덜너덜했다. 남루한 행색이 새 아파트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까시래기 가득한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던 아이들이 훌쩍 자라버렸기 때문이다.

엄마의 짐을 덜기 위해 대학 진학 대신 취업을 택했다. 앞에서 당겨주고 뒤에서 밀어주며 대학 공부를 마친 동생들은 전문 직업인이 되고 나는 평범한 전업주부가 되었다. 든든한 남편과 반듯한 세 아이들로 꾸민 꽃밭은 아담하고 예뻤다. 완벽한 꽃밭을 만들려고 온갖 정성을 쏟았다. 아무리 정성을 쏟아도 꽃이 피지 않은 빈 공간 때문에 완벽한 꽃밭을 만들지 못했다. 전문성을 인정받으며 진취적인 삶을 사는 동생들을 보며 느끼는 상실감이 만든 공간이었다. 다들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가는데 산동네 판잣집에 혼자 버려진 것 같은 소외감이 만든 공간이었다.

불혹의 나이에 한참 늦은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 공부는 어렵지 않았다. 산동네에서 읽은 책들이 좋은 자양분이 되어 수월하게 졸업을 했다. 지금은 수업을 들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정받는 독서논술교사가 되었다. 오후 한 시만 되면 동화책 속에서 톡 튀어나온 듯 똘망똘망한 아이들이 '선생님'을 부르며 품에 안긴다. 책으로 둘러싸인 공부방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를 쓰고 책을 읽는 행복으로 하루해가 빨리 저문다.

수업시간 아이들에게 산동네 책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의 기마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샀던 책들이 내 삶을 바꾸었다고. 창고 옆에 쟁여두고 읽은 그 책들 덕분에 꿈을 이루었다고. 인생의 등불, 일생의 보약, 삶의 이정표 등 화려한 수식어와 비유법으로 책 예찬론을 늘어놓는다.

한 아이가 '기마이'의 뜻을 묻는다. '돈이나 물건을 선선히 잘 내어주는 기질'이란 뜻으로 경상도 사람들이 많이 쓰는 말이라고 알려준다.

"결국 선생님은 아버지의 책 상자 덕분에 꿈을 이룬 거네요. 아버지가 엄청 감사하겠네요? 난 엄마가 책 사줄 때마다 짜증만 나거든요."

'아버지 기마이 때문에 산 책 상자'로 시작한 구구절절한 책 예찬론을 '아버지의 책 상자' 덕분에 꿈을 이루었다'란 한 문장으로 간단명료하게 요약해 버리는 아이. 게다가 아버지께 감사하냐는 엉뚱한 질문까지 던진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들추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원망심'이 뿌연 부유물처럼 떠다닌다. 감사의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때문에!"를 외치며 악을 쓰는 사춘기 소녀가 서 있을 뿐이다.

책은 인생의 등불이라 찬양하면서 책과 인연의 고리를 맺어준 아버지는 애써 부정하며 살았다. 산동네, 아버지, 책 상자, 인생의 등불로 이어지는 이야기 고리에서 '아버지' 고리를 빼내려고 하니 이야기 전개가 균형을 잃고 절뚝거린다.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콧물 눈물 묻은 수식어를 달았다. 주렁주렁 수식어를 단 논리는 축축한 감정에 호소할 뿐 논리적인 설득력이 부족하다. '산동네에서 아버지가 사 온 책 상자 덕분에 꿈을 이루었다'로 마무리한 아이의 요약이 더 설득력 있고 논리적이다. '아버지 때문'보다'아버지 덕분'이 더 설득력 있다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의 책 예찬론은 지금처럼 눅눅하지 않고 담백했을 것이다.

"선생님 아버지 혹시 하늘나라에서도 기마이 쓰고 계시는 거 아닐까요?"

한 아이가 객쩍은 소리를 하자 아이들이 책상을 두드리며 깔깔 웃어댄다. 그 소란을 틈타 슬그머니 돌아서서 눈물을 훔쳐낸다. '아, 아버지'



■ 용어 설명
**기마이(きまえ, 氣前)는 일본말 '기마에'에서 나온 말로 돈이나 물건을 선선히 내놓는 기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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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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