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준 교수의 '북한 이야기' .1] 세관에서의 첫 몰카 촬영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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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25   |  발행일 2020-09-25 제17면   |  수정 2020-12-25
가슴 졸인 위장신분 입국심사, 그 순간 한국서 온 문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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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라선시에서 청진으로 이동하는 중에 촬영된 농촌마을의 모습.

그 누구도 담지 못한 영상
다큐영화 '삐라' 의 탄생

조현준(39) 계명대 언론영상학과 교수는 서울 출생으로 중앙대 연극영화과 학사, 아카데미예술대 멀티미디어커뮤니케이션 석사, 동국대 영화영상제작학과 박사를 취득했으며, 미국 ABC 방송국 교양프로그램 PD를 지냈다. 조 교수는 다큐멘터리 'Alive in Havana'(2010)로 할리우드독립영화제·보스턴국제영화제·맨해튼영화제 초청, 다큐멘터리 'Transiam'(2011)으로 토론토아시안국제영화제·인도첸나이여성국제영화제 초청 등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조현준 교수는 2013년 북한 3차 핵실험 이후 임진각에서 벌어진 사건과 북한 주민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한 '삐라'(상영시간 80분)가 2015년 제7회 DMZ 국제다큐영화제 분단 70년 특별전을 통해 선보였다. 조 교수가 제작한 이 작품은 일주일가량 북한에 체류하면서 대북전단 살포 이후 함경북도 일대의 분위기와 북한 주민들의 의견을 담아냈다는 평가다. 조현준 교수 본인은 북한에서 그 누구도 카메라에 담지 못한 영상들을 몰래 촬영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조 교수는 "북한에서의 촬영이 제한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북한 국경 세관에서 촬영은 엄격히 금지돼 있어 몰래카메라로 가슴 졸이며 촬영했고, 중국으로 나올 때 세관에서 노트북을 오랜 시간 동안 검사해 많이 걱정했다"며 영화 촬영 당시의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영남일보는 이에 영화 '삐라'의 배경이 된 당시 북한 방문기를 통해 우리 민족의 또 다른 삶의 모습인 북한 주민들의 삶을 살펴본다.

"교수님, 부디 촬영…억류되면 큰일"
휴대폰 제출 재촉하는 北세관원 앞
태어나 가장 빠른 손놀림으로 삭제
가방 뒤져 메모리카드 개수도 확인
"남조선 사람이냐" 두려움에 얼어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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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입국 당시에 세관원으로부터 받았던 출입증. 안내원 보관용이었는데 잠깐 보자고 한 후 사진을 찍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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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세관원이 한 여행객의 가방 안에서 성인도구를 발견하고 작동법을 물어보더니 압수해가는 장면이다.



나는 2012년도에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가 임진각에서 대북전단 삐라를 살포하는 것을 촬영해오며 '삐라'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임진각에서는 파주 주민들을 포함하여 보수와 진보단체들, 그리고 500여명의 경찰들이 뒤엉켜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며 남남갈등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나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북한 주민들이 '삐라'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졌고 북한으로 가보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이 다큐멘터리 '삐라'가 탄생하게 된 계기다. 나는 캐나다 국적자로서 북한 출입이 가능했지만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북한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토론토대 경영학과에 2년 동안 재학했던 경험을 토대로 '캐나다에 거주하는 대학생' 신분으로 서류를 제출해 여행 비자를 받았다. 북한에 억류됐다가 혼수상태로 고국 미국으로 돌아와 사망한 오토 웜비어가 택했던 여행사를 통해 2013년 10월31일 북한 함경북도에 들어가서 1주일간 라선, 청진, 경성을 다녀왔다.

한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하여 옷에 한국말로 쓰인 태그를 가위로 다 자른 상태로 북한에 갔고 정상적인 촬영으로 북한 주민들을 인터뷰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판단하에 시계에 달린 몰래카메라를 손목에 찬 채 북한으로 향했다. 2013년도는 남북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던 해였는데 박근혜정부가 출범하던 2013년 2월 북한이 3차 핵실험을 감행하였고 이후 대한민국 근로자들이 개성공업지구에서 철수하면서 남북 관계는 긴장 상태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북한이 외국인들에게 함경북도의 방문을 처음으로 허용하기 시작했던 때였기도 해서 나는 함경북도 땅을 밟은 첫 외국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중국 옌벤에서 호주, 러시아, 미국, 영국에서 온 5명의 일행과 함께 3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함경북도 라선시 국경에 도착하였다. 세관에서 본격적인 몰래카메라 촬영이 시작되었다. 엑스레이를 통과하는 순간 북한의 한 세관 직원이 나의 주머니에 있는 물품들을 꺼내 보라고 얘기하였다. 주머니에 있던 나의 휴대폰을 발견한 세관원이 전원을 켜라고 지시하였고 휴대폰을 켜는 순간…, 중국과 맞닿은 국경이라서 로밍이 작동하며 진동과 함께 여러 개의 문자메시지가 휴대폰 스크린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였다. 나의 학생들이 보낸 메시지였다. "교수님…, 부디 촬영 무사히 잘 마치고… 억류되면 큰일 납니다!" 세관원이 볼 수 없게끔 휴대폰을 든 채 문자메시지를 하나하나 지우기 시작하였다. 세관원이 휴대폰을 달라고 재촉하는 상황에서…. 아마도 태어나서 가장 빠른 손놀림이었던 것 같다. 메시지를 다 지우고 난 후에 휴대폰을 건네주었고 세관원은 사진을 하나하나 체크하기 시작하였다. 혹시라도 사회주의에 어긋나는 선정적인 사진이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절차였다. 세관에서 방문객들의 가방을 뒤지기도 하였다.

북한에 몰래카메라 외에 DSLR 카메라를 가지고 갔는데 어느 한 세관원은 내 가방에 있던 메모리 카드의 개수를 세고 메모를 해두었다. 북한에서 출국할 때 개수가 맞지 않을 경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참고하라고 얘기해주었다. 가방 검사가 끝난 후 다른 세관원은 나를 힐끗 쳐다보면서 "조선족이구나"라고 하더니 여권에 도장을 찍었다. 최근에 새로운 여권으로 갱신하게 되었지만 함경북도 라선시 세관 이름인 "원정"이라고 쓰인 도장이 찍혀있는 이 여권은 기념으로 평생 간직하게 될 것 같다. 함경북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엄청 두려웠던 북한 세관에서의 첫 몰래카메라 촬영이 무사히 끝났다는 점에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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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안내원이 나를 맞이하며 물었다. "남조선 사람입니까?"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왠지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에 한국말을 더듬었다. 북한에 도착 후 일행들과 나는 20년 전 나온 스타렉스와 흡사한 모습의 SUV 차량으로 이동하였다. 이 차량의 브랜드는 북한에서 본인들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평화자동차'다. 함경북도 라선시 세관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비포장도로가 아닌 깔끔한 아스팔트 도로였다. 북한 안내원은 북한에 있는 동안 지켜야 할 규율을 얘기해주었다. 첫째, 군인은 절대로 사진 찍지 말 것. 둘째, 농촌마을의 모습을 촬영하지 말 것. 셋째, 일정을 마친 후 숙소로 돌아간 후에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말 것. 그러나 나는 촬영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지키지 않았는데 당시에도 안내원의 눈을 피해 북한의 민낯을 파헤쳐 볼 것이라고 굳게 마음을 먹고 있었다. 이렇게 북한에서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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