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차별이 있는 가르침

  • 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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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9-28 07:51  |  수정 2020-09-28 08:00  |  발행일 2020-09-28 제14면

공자는 가르침에는 차별이 없다(有敎無類)고 하였다. 그는 한 묶음의 육포를 들고 찾아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제자로 받아들였다. 부처 역시 처음에 여자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을 걱정스러워했지만 마침내 아무 차별 없이 제자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초기 승가는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올 수 있으며, 또한 원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나갈 수 있었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뒤 범천(梵天)의 권청에 의해 설법하기로 결심했을 때 "감로의 법문은 열려 있다. 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들어라"라고 하였으며, '오너라, 비구여(善來 比丘)'라고 하는 것이 초기 불교의 구족계였다.

물론 공자나 부처나 모든 사람을 다 제자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중요한 조건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배우려는 열망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공자는 "알고 싶어 안달하지 않으면 열어줄 수 없고, 애태우지 않으면 말해줄 수 없다. 한 모퉁이를 예로 들어주었는데 나머지 세 모퉁이를 알지 못하면 다시 일러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승가에서도 제자를 지도해주는 책임자 비구를 화상(和尙)이라고 하는데, 화상은 제자가 스스로 찾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승가 내 10인의 비구에게 일일이 머리를 발에 대고 예배하는 절차를 통해 배우고자 하는 열망을 증명해야 했다. 이처럼 유교나 불교에서는 배우고자 하는 열망에 가득 찬 학생만 제자로 받아들였다. 사실 이것이 현대교육과 전통교육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가르침에 차별이 있다고 한 것은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라 방법에 차별이 있다는 뜻으로, 제자의 근기에 따라 차별을 두어 가르쳤음을 말한다. 제자의 근기가 예리하기도 하고 둔하기도 하여, 정진하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기도 하는데, 그 감당할 능력에 따라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가르침에 차별이 있는 것이다. 불교의 수행은 수행자 스스로의 고행과 노력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스승의 역할이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수행의 과정에서 스승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그 경지를 넘은 스승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불교교육에서 스승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제자의 수준이나 단계에 대한 정확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선종의 교사론(敎師論)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회산계현(晦山戒顯)은 '선문단련설(禪門鍛鍊說)'에서 가르치는 장로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제자들의 근기(根機), 즉 학습 단계를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선중(禪衆)에 들어오면 먼저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인재의 고하를 감정하고, 다음에는 갖가지 기략으로 학인(學人)의 깊고 얕음을 시험하여 주인과 손을 세우고, 일문일답으로 끊임없이 혼란을 주어 그 지혜의 여부를 살피면 학인의 근기가 저절로 드러난다.

'덕산방(德山棒) 임제할(臨濟喝)'이라는 말이 있다. 방은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고 할은 큰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깨달음의 문턱에 있는 제자로 하여금 그 문턱을 뛰어넘게 하는 한 방법이다. 이런 방과 할이 학생의 발달단계에 정확히 일치해야 함을 다른 말로 줄탁동시(啄同時)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줄()은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 안에서 쪼는 것을 말하고, 탁(啄)은 어미 닭이 밖에서 알 껍질을 쪼아 주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야 성공적인 깨달음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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